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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초대 국왕 헨리 7세 Henry VII | |||
<nopad> | |||
1505년 초상화. 황금양모 기사단 칼라를 메고 장미를 든 모습. | |||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헨리 7세 (Henry VII) | ||
출생 | 1457년 1월 28일 | ||
잉글랜드 왕국 펨브룩셔 펨브룩 성[1] | |||
사망 | 1509년 4월 21일 (향년 52세) | ||
잉글랜드 왕국 서리 리치먼드 궁전 | |||
재위기간 | 잉글랜드의 왕 | ||
1485년 8월 22일 ~ 1509년 4월 21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 헨리 튜더 (Henry Tudor) | |
배우자 | 요크의 엘리자베스 (1486년 결혼 / 1503년 사망) | ||
자녀 | 아서, 마거릿[2], 헨리 8세, 메리 | ||
아버지 |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 ||
어머니 | 마거릿 보퍼트 | ||
장례식 | 1509년 5월 11일 | ||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 |||
종교 | 가톨릭 | ||
문장 | }}}}}}}}} |
1. 개요
16세기 말 상상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그 유명한 헨리 8세의 아버지로 원래 신분과 본명은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이다. 에드워드 5세의 숙부이자 섭정이었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어린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리처드 3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분열된 요크 지지자들과 떨어진 민심을 포착해 2년 만에 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고 선왕 에드워드 4세의 장녀와 결혼하여 튜더 왕조를 개창했다.
동족상잔으로 귀족들의 반이 사라진 상태여서, 잉글랜드 역대 어느 왕조보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잉글랜드는 그의 아들 헨리 8세와 손녀 엘리자베스 1세 대에 제1의 전성기를 열고 대영 제국의 토대를 놓게 된다.
당대에는 음험하고 인색한 성품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후대에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장미 전쟁 이후 파탄난 국고를 다시 복구시킨 왕으로 재평가된다.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연 군주이자 현 영국 왕실의 조상인 제임스 1세의 조상이기도 하며, 따라서 엘리자베스 1세와 엘리자베스 2세의 공동 조상에 해당한다. 헨리 7세는 부계가 웨일스계이니, 제임스 1세와 후손들은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웨일스 혈통을 모두 물려받은 셈이다.
2. 생애
2.1. 기원
헨리 7세가 속한 튜더 가문은 웨일스의 펜미니드 지역에 거주하는 '타디르 가문'에서 기원한다. 이 가문은 초기엔 콘위 주의 에버겔 인근 콘위 강 동쪽 강둑에 있는 소규모 토지를 운영했으며, 이 지역이 귀네드 왕국에 병합된 뒤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를 섬겼다. 이 가문의 부흥은 에드니베드 피찬(? ~ 1246)에서 시작되었다. 에드니베드는 1215년경부터 귀네드 왕국의 주요 행정, 정치, 입법 기관을 이끌었다. 우선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의 수석 고문이었고, 그 후에는 허웰린의 아들인 다피드 압 허웰린의 수석 고문을 맡았다. 그는 두 왕을 보좌한 공으로 로스와 리보니오 영지를 받았으며, 궁정 징집과 군 복무를 제외한 모든 임대료와 의무 면제 등의 특권을 받았다. 이 특권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계승했으며, 그들의 전통적인 본거지는 앵글시 섬의 펜미니드가 되었다.에드니베드의 후손인 튜두르 압 고론위는 웨일스 남서부에 군림했던 데후바르트 왕국의 마지막 남성 왕족인 케레디지온의 토머스 압 오와인의 딸 마거릿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여러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중 막내가 마레두드 압 튜두르였다. 마레두드와 그의 형제들은 사촌이었던 오와인 글린두르를 따라 잉글랜드 왕국을 상대로 한 반란에서 한몫했지만, 반란 진압 후 마레두드의 운명은 알려진 바 없다. 마레두드는 다피드 피찬의 딸 마거릿과 결혼해 오와인 압 마레두드 압 튜두르(Owain ap Maredudd ap Tudur)를 낳았는데, 이 인물이 나중에 잉글랜드 정계에서 활약하면서 할아버지 이름인 튜두르의 잉글랜드식 이름인 '튜더(Tudor)'를 자기 성으로 삼았다. 그래서 오언 튜더는 튜더 왕조의 시조로 간주되었다.
오언 튜더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에 연루되었기에 땅과 재산을 몰수당했고, 공직을 맡거나 무기를 소지하거나 다른 도시에서 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1413년에 즉위한 헨리 5세가 웨일스인들이 공직에 선임되는 걸 금지했던 아버지의 법안을 파기하고 웨일스인을 궁정에 섭외했다. 이리하여 궁정에서 활동하게 된 오언 튜더는 모종의 시기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이자 헨리 5세의 마밍인이며, 헨리 6세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발루아와 밀회했다.
이보다 앞서, 잉글랜드 의회는 1427년 전왕의 왕비가 재혼하는 조건을 규정한 법률을 통과했다. 이에 따르면, 왕비의 새로운 남편의 지위와 신분이 왕비보다 낮으면 잉글랜드 왕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며, 그러한 결혼이 성사될 경우 위반자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몰수하기로 했다. 또한 이 법안은 성인 국왕이 자기 어머니의 재혼을 동의해야만 결혼이 성립된다고 규정했다. 당시 헨리 6세는 6살이었고, 당시 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는 만 14세였으므로, 카트린은 최소 8년 동안 재혼할 수 없었고, 그녀의 새 남편은 어린 왕의 양육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하지만 오언 튜더와 카트린은 남몰래 밀회했고, 1430년 무렵에 비밀 결혼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여러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두 아들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가 기록상에 명확하게 확인된다.
1437년 1월 3일 카트린이 사망한 직후, 그녀가 오언 튜더와 비밀리에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오언 튜더는 곧 체포되어 윈저 성에 수감되었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1439년 7월, 헨리 6세는 2,000 파운드의 보석금을 지불하는 조건하에 오언을 풀어줬다. 또한 11월 12일에 계부를 사면했고, 새해가 되기 전에 보석금을 돌려줬다. 그 후 헨리 6세는 오언 튜더를 기사로 선임해 잉글랜드 귀족의 일원이 되게 했고, 오언 튜더의 두 아들이자 자신의 이부형제들인 에드먼드와 재스퍼 형제를 후대했으며, 1452년 11월에 정식으로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했다. 에드먼드 튜더는 초대 리치먼드 백작이 되었고, 재스퍼 튜더는 펨브로크 백작이 되었다.
1455년 11월 1일, 헨리 6세는 초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의 외동딸로, 자신의 육촌인[3] 12살의 마거릿 보퍼트와 이부동생인 에드먼드 튜더의 결혼을 중재했다.[4] 이후 에드먼드 튜더와 마거릿 보퍼트는 아들을 낳으니, 그 아이가 바로 훗날 헨리 7세가 될 헨리 튜더이다.
2.2. 초년기
헨리 튜더는 1457년 1월 28일 웨일스 펨브로크 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에드먼드 튜더는 자신과 가족을 극진히 보살펴 준 헨리 6세를 위해 장미 전쟁에 뛰어들어 요크 가문에 맞서 싸우다가 1456년 여름 요크파 인사 윌리엄 허버트에게 체포되어 카마던 성에 감금된 뒤, 헨리 튜더가 태어나가 석달 전인 1456년 11월 3일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당시 13살로 당시 기준으로도 임신하기엔 너무 어렸던 마거릿 보퍼트는 출산 당시에 피를 많이 흘려서 하마터면 아기와 함께 죽을 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어린 헨리는 제2대 리치먼드 백작 칭호를 받았으며, 숙부인 재스퍼 튜더의 후견을 받으며 펨브로크 성에서 자랐다.1361년 8월, 헨리 튜더의 아버지 에드먼드 튜더를 체포해 감옥에서 병사하게 만든 윌리엄 허버트가 웨일스로 진군해 펨브로크 성을 함락했다. 이후 헨리는 윌리엄 허버트와 그의 아내 앤 데버루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린 헨리를 잘 대해줬고, 그를 자기 딸 중 한 명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1469년 7월 26일, 에드워드 4세를 상대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가 에지코트 전투에서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반란군과 손잡았다는 걸 알게 된 병사들이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강군을 갖춘 워릭 백작과 대적하기를 두려워해 도주하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했고, 노샘프턴으로 끌려간 뒤 7월 27일 워릭 백작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그 후 헨리는 어머니의 재혼 상대인 랭커스터가의 기사 헨리 스태퍼드의 양육을 받았다. 1470년 헨리 6세가 랭커스터파와 결탁한 워릭 백작에 의해 복위하면서, 해외로 망명했던 숙부 재스퍼 튜더가 돌아왔다. 그러나 1471년 워릭 백작에게 밀려났던 에드워드 4세가 부르고뉴국의 공작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을 주살하고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랭커스터파를 섬멸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는 도로 에드워드 4세에게 넘어갔다. 여기에 런던 탑에 갇혀 지내던 헨리 6세가 사망하면서, 헨리 튜더는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정당한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2.3. 랭커스터 왕조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
헨리 튜더는 부계로는 잉글랜드 왕실과 별다른 관계가 없었지만,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이자 에드워드 3세의 3남인 곤트의 존의 증손녀였다. 보퍼트 가문은 비록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였던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이 시조가 되는 가문이었지만, 이들은 어릴 때만 사생아였을 뿐 존과 캐서린이 재혼한 후에는 적자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의 할머니 카트린의 혈통을 거슬려 올라가면 헨리 3세와 연결되었다.[계보]다음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다.
1남 | 흑태자 에드워드 (1330 ~ 1376) | 플랜태저넷 왕조의 직계 혈통으로 유일한 후손 리처드 2세가 후사 없이 폐위되어 사망하면서 부계와 모계 후손 모두 단절 |
3남 |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어널 (1338 ~ 1368) | 부계 후손은 없고[6] 모계 혈통이자 유일한 후손은 모티머 가문으로 이어졌다가 이쪽도 부계 후손이 끊기고 모티머 가문의 여계 혈통을 통해 요크 왕조로 이어짐. |
4남 |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1340 ~ 1399) | 적자 계열의 부계 후손은 웨일스 공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때 끊겼고 마지막 남은 부계 후손은 존의 증손녀 마거릿 보퍼트가 있다.[7] |
5남 |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1341 ~ 1402) |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어널의 외손 자격으로 랭커스터 왕조보다 계승권이 앞선다고 주장함.[8] 부계 후손으로는 에드먼드의 고손녀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있다. |
8남 |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1355 ~ 1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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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7세 튜더 왕조 | 요크의 엘리자베스 | 에드워드 5세 요크 왕조 | |||||||||||||||||||
헨리 8세 튜더 왕조 |
[1] 이름 불명의 아들 두 명이 있었음.[2] 단 풀퀴크가 로트로드의 자식인지 고츠프레드의 자식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보통 고츠프레드의 자식으로 본다. 앙주 가문 문서 "기원" 항목 참조.[3] 노장 백작위와 모르타뉴 백작위를 합쳐 "페르슈 백작"이란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렇듯 수백년은 거슬려 올라가야 잉글랜드 군주와 겨우 닿는 처지였던 터라, 혈통으로만 치면 그가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장미 전쟁에서 왕족들의 골육상쟁이 심각하게 전개된 결과, 랭커스터 왕조는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를 제외하고 적자와 사생아 모두 부계가 단절되어서, 랭커스터 파벌이 요크 왕조에 맞서 내세울 왕위 계승자는 오직 마거릿 보퍼트의 외아들인 그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1471년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유일한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한 에드워드 4세는 그를 경계했고, 헨리 튜더는 잉글랜드 내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하지 않았다.
2.4. 망명 생활
헨리 튜더는 숙부 재스퍼 튜더와 함께 자기를 잡으려드는 왕실군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하려 했지만,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자 브르타뉴 공국에 머물렀다. 한편, 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남편 헨리 스태퍼드와 함께 에드워드 4세에게 귀순하기로 했다. 그 후 헨리 스태퍼드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4세는 1472년 자신의 편에 서서 워릭 백작을 물리치는 데 일조한 뒤 잉글랜드 무관장에 발탁된 제2대 스탠리 남작 토머스 스탠리를 마거릿 보퍼트와 맺어줌으로써, 그녀를 위시한 보퍼트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그 후 헨리 튜더는 숙부와 함께 수년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의 궁정에서 살았다.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두 사람을 어떻게든 잉글랜드로 끌어내기 위해, 프랑수아 2세에게 상당한 자금을 제공하고 군사 지원을 약속하면서 두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도 두 튜더를 자기 궁정으로 데려가기 위해 프랑수아 2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프랑수아 2세는 두 사람을 계속 보호하기로 했다. 그들은 처음엔 브르타뉴 제독 장 드 켈레네크의 성에서 살다가 낭트로 옮겨졌다. 1474년 초, 재스퍼 튜더는 반 인근의 조셀린 성으로 옮겨졌고,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 원수 장 드 리외의 소유인 라르고에 궁전으로 옮겨졌다.
1470년대 중반, 프랑수아 2세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브르타뉴 내에서 분쟁이 벌어질 조짐이 생겼다. 1475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7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또한 같은 해에 헨리 4세의 누이의 손자인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향하던 중 익사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또 다른 분파가 사라졌다. 이제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왕조의 마지막 분파인 튜더 가문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 건강이 나빠진 프랑수아 2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도 튜더 가문을 회유하기 위해 1472년 헨리 튜더가 어머니의 땅을 상속받을 권리를 인정했으며, 자기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튜더의 결혼을 제안했다.
1476년 11월, 프랑수아 2세는 재스퍼와 헨리 튜더를 잉글랜드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삼엄한 경비 속에 반으로 이송되었고, 헨리는 그곳에서 생말로 항구로 보내졌다. 그러다가 프랑수아 2세가 마음을 바꿔 잉글랜드로 보내지 않기로 하면서, 두 사람은 레르맹 성으로 옮겨졌다. 이후 프랑스 왕실이 그들을 파리로 보내라고 요구했고, 마거릿 보퍼트도 브르타뉴 공작에게 아들을 돌려보내달라고 호소했지만, 프랑수아 2세는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그 후 재스퍼와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 공국에서 수년간 조용히 지냈다.
2.5. 잉글랜드 왕위 도전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가 급사했다. 그 뒤를 이어 장남 에드워드 5세가 13세의 나이에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정변을 일으켜 에드워드 5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친족들을 제압한 뒤, 에드워드 5세의 왕위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 계략을 짰다. 그의 사주를 받은 바스 앤 웰스 주교 로버트 스털링턴은 초대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의 딸 엘리노어 탈보트가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결혼하기 전에 에드워드 4세와 합법적으로 결혼했다고 주장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로버트 스털링턴을 심문한 뒤, 그의 증언이 신빙성 있다고 판단한 후,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중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에드워드 5세를 포함한 일곱 자녀 모두 사생아로 간주했다.그리하여 에드워드 5세가 페위된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로 등극했다. 이후 에드워드 5세와 동생인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왕자는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가 8월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세간에서는 리처드 3세가 두 어린 아이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민심은 흉흉해졌고, 많은 귀족이 리처드 3세를 찬탈자로 간주하고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1483년 10월, 리처드 3세의 심복이었던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가 리처드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버킹엄 공작은 엘리 주교 존 모턴의 주선에 따라 헨리 튜더를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시키고 헨리 튜더를 왕위에 옹립하기로 했다.
공모자들은 켄트주, 서리주, 에식스, 버크셔, 윌트셔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고, 엑서터 주교 피터 코트니가 데번에서 봉기하고, 웨일스에서는 버킹엄 공작이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또한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 공국의 재무장관 피에르 랑다이스가 제공한 병사 3,500명을 받고 잉글랜드로 이동해 버킹엄 공작과 합세한 후, 런던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켄트주 공모자들은 약속한 날짜보다 10일 전인 10월 10일에 반란을 시작했고, 버킹엄 공작을 지도자로 선포해 버킹엄 공작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걸 조기에 노출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리처드 3세는 랄프 드 애쉬턴을 즉시 부보안관으로 선임하고, 그에게 공모자들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기소할 권한을 줬다.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켄트와 에식스의 반군이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병사 100명을 템스 강 어귀로 이동시켰다. 그 후 리처드 3세는 레스터에서 군대 소집령을 내리고, 반군 지도자들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버킹엄 공작에게는 1인당 1,000파운드 또는 평생 100파운드를, 토머스 그레이와 솔즈베리 주교인 라이오넬 우드빌에게는 각각 660파운드를, 다른 지도자들에게는 500마크를 걸었다.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2척의 배만 가까스로 이끌고 플리머스 항에 상륙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 리처드 3세를 지지하는 세력의 저항에 부딪쳤고, 결국 브르타뉴로 돌아가야 했다. 한편, 버킹엄 공작은 자기 영지에 상당한 병력을 집결했지만, 비가 많이 내려서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다른 반란군과 연합할 수 없었다. 리처드 3세가 토벌하기 위해 진군하자, 반란군은 대거 탈영했다. 버킹엄 공작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곧 체포된 뒤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1월 12일 솔즈베리에서 참수되었다.
그 후 리처드 3세에 대항한 반란에 가담했던 인사들이 브르타뉴로 피신해 헨리 튜더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헨리 튜더는 1483년 성탄절에 렌 대성당에서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 요크 가문의 왕위 상속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이에 리처드 3세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에게 프랑스 왕실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군대를 지원해줄 테니 헨리 튜더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브르타뉴 공작이 이를 수락할 낌새를 보이자, 헨리 튜더는 숙부 재스퍼 튜더와 함께 1484년 9월 앙주로 피신했다. 이후 프랑스의 새 국왕 샤를 8세를 알현한 뒤, 잉글랜드 왕위에 도전하기 위한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 프랑스 왕실과 잔존한 랭커스터 파벌, 그리고 리처드 3세에게 반발한 요크파 인사들의 지원을 받은 헨리 튜더는 1485년 8월 1일 숙부 재스퍼 튜더와 함께 프랑스 용병 2,000명을 이끌고 아르플뢰르 항을 출발했다. 이들은 영국 해협을 건너 8월 7일 웨일스 펨브로크셔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그는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의 새 남편인 제2대 스탠리 남작 토머스 스탠리가 이끄는 스탠리 가문의 지원을 기대했으며, 웨일스 귀족과 지주들이 웨일스 출신인 튜더 가문에 호의를 품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길 희망했다.
한편,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상륙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노팅엄에 머물면서 적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이윽고 헨리 튜더가 말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잉글랜드 왕국 전역에 반역자를 토벌하기 위한 군대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웨일스 남서부의 왕실 부관 리스 압 토머스가 헨리 튜더를 저지해주길 희망했지만, 애초부터 헨리 튜더와 서신을 주고받았던 리스는 헨리 튜더의 군대가 접근하자 곧바로 가담했다. 웨일스의 또다른 왕실 부관 월터 허버트 경은 헨리 튜더에게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진군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후 헨리 튜더는 예상대로 웨일스 귀족 및 지주들의 열띤 호응을 받아 병력을 순조롭게 모았고, 뒤이어 슈루즈베리를 향해 진군했다. 여기에 리처드 3세로부터 소환령을 받았던 귀족 다수가 병력을 파견하길 주저했다. 그들은 찬탈자이며 왕권 강화를 위한 무리한 정책을 펼쳐서 민심을 급속도로 잃어가는 리처드 3세를 돕길 꺼렸고, 전투에 나서기 전에 누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지 확실히 파악하고 싶었다. 1485년 초여름, 리처드 3세는 병력을 규합해서 도우러 오겠다는 토머스 스탠리의 요청에 따라 그를 랭커셔로 돌려보내면서도, 그의 아들인 스트레인지 남작 조지 스탠리를 인질로 삼았다. 그러나 토머스 스탠리는 왕실군에 조속히 합류하라는 리처드 3세의 명령에, 자기가 '땀 흘리는 병'에 걸렸다며 거절했다.
이 무렵, 헨리 튜더는 슈루즈베리에서 스태퍼드로 진군하여 토머스 스탠리의 동생 윌리엄 스탠리와 접촉한 뒤,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스태퍼드셔를 지나 와트링 스트리트를 따라 런던으로 진군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다수의 대포를 획득해 포병대를 구성할 수 있었다. 토머스 스탠리와 동생 윌리엄 스탠리는 가신들과 함께 헨리 튜더의 군대의 뒤를 천천히 추격했다. 이를 통해 헨리 튜더에게는 자신들이 그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리처드 3세에게는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든 헨리 튜더의 진격을 저지하려 한다고 믿도록 유도하려 했다.
1485년 8월 19일, 헨리 튜더가 리치필드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자, 리처드 3세는 아직 완전하지 않은 왕실군을 거느리고 노팅엄에서 출격해 헨리 튜더가 런던에 도착하기 전에 요격하기로 했다. 8월 20일, 헨리 튜더는 워릭 셔의 와트링 스트리트에 있는 작은 마을인 애서스턴에서 스탠리 가문 인사들과 접견했다. 8월 21일, 헨리 튜더는 애서스톤에서 동쪽으로 진군했고, 리처드 3세는 레스터에서 진군했다. 이윽고 8월 22일, 헨리 튜더와 리처드 3세는 보스워스 전투를 치렀다. 이때 헨리 튜더는 자신이 지휘관으로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군대 지휘권을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에게 넘기고 경호원들과 함께 후방에서 대기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여러 귀족이 전장을 무단으로 떠나거나 배신하는 바람에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투 막판에 최후의 발악으로 헨리 튜더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지만 끝내 적군에 저지된 뒤 낙마한 후 전사했다. 이리하여 헨리 튜더는 잉글랜드 왕국의 유일한 국왕, 헨리 7세가 되었다.[9]
2.6. 잉글랜드 국왕
2.6.1. 국왕 등극
1485년 9월 런던에 입성한 헨리 7세는 10월 30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그는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적을 세운 인사들에게 후한 보답을 했다. 먼저, 그동안 자신과 함께 오랫동안 해외 망명하면서 숱한 고생을 함께 했던 숙부 재스퍼 튜더를 베드퍼드 공작으로 선임하고, 그가 소유했던 모든 영지를 되찾게 해줬으며, 리처드 3세에게 처형된 버킹엄 공작의 미망인인 캐서린 우드빌과 결혼시켜서 스태퍼드 가문의 영지도 소유하게 했다. 또한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의 새 남편이며 보스워스 전투에서 자신이 승리하도록 도운 토머스 스탠리를 더비 백작에 선임하고 여러 영지의 보조금과 관직을 수여했으며, 윌리엄 스탠리를 시종장으로 삼았다.보스워스 전투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던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는 옥스퍼드 백작 작위와 영지를 돌려받았고, 런던 탑의 순경이자 잉글랜드, 아일랜드 아키텐의 제독으로 선임되었다.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도 리처드 3세에게 빼앗겼던 영지를 모두 돌려받았고, 궁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헨리 7세의 가장 강력한 조언자로 군림했다.[10] 또한 헨리 7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자녀들을 억류에서 풀어줬고, 의회를 소집한 후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두 사람의 자녀들을 사생아로 규정한 법률을 폐지하며,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한다고 선포했다. 다만 그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의 왕비 대관식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486년 1월 그녀의 친족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나서야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장남이 태어나자, 그는 장남의 이름을 브리튼의 전설적인 군주 아서 왕을 따서 아서 튜더라고 지음으로써, 새로운 왕조를 통해 잉글랜드의 위대한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을 표명했다.
이와 더불어, 헨리 7세는 패자가 된 요크파에 대한 회유책을 제시했다. 요크 측의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을 런던 탑에 가뒀지만 죽이지 않았고, 리처드 3세에게 잠정적인 왕위 계승자로 인지되었던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을 건드리지 않았다. 보스워스 전투 때 리처드 3세 편에 서서 자신에게 맞섰던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제3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서리 백작 토머스 하워드를 몇 달간 감옥에 가뒀다가 풀어준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이전의 작위와 영지를 회복하게 해줬다.
그러나 헨리 7세가 막 등극했을 때, 런던에 땀을 많이 흘린 후 발열과 심한 발한, 갈증, 심장 통증 증세를 보이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명 '잉글랜드 땀열병'이 창궐했다. 그 결과 1485년 9~10월에 런던 시장 2명, 시의원 6명, 보안관 3명을 포함한 수천 명이 사망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헨리 7세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이 전염병을 헨리 7세의 치세가 암울할 것임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고 밝혔다.
2.6.2. 왕위에 대한 도전과 극복
2.6.2.1. 램버트 심넬의 난
헨리 7세가 즉위 후 요크파 인사들에 대한 회유책을 펼쳤지만, 리처드 3세를 추종했던 요크파 잔당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기로 작정했다. 1486년 4월,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의 헌신적인 추종자로서 헨리 7세에 대적했다가 패배한 뒤 콜체스터에 은거했던 러벨 자작 프랜시스 러벨이 요크셔에서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가 헨리 7세가 심어놓은 첩자에게 누설되자, 그는 요크에 행차한 헨리 7세에게 암살자를 보내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당국의 추적을 피해 퍼니스 펠스로 이동하여 반군 동지들과 합류한 뒤 플란데런 백국으로 망명하여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딸이자 에드워드 4세, 리처드 3세의 누이이며,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미망인인 요크의 마거릿 궁정에서 머물렀다.그 후 마거릿과 그녀의 사위이자 독일왕인 막시밀리안 1세의 지원을 받은 요크파는 튜더 왕조를 전복하고 요크 왕조를 복원하기 위한 새로운 반란을 계획했다. 플란데런에 있던 프랜시스 러벨은 링컨 백작이며 리처드 3세의 외조카인 존 드 라 폴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작전을 모색했다. 그들은 런던 탑에 갇힌 12살된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을 옹립하는 걸 모색했지만, 감시가 철저해서 그를 빼돌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에 그들은 램버트 심넬이라는 소년을 워릭 백작 리처드와 동일 인물로 내세우기로 했다. 프랜시스 러벨과 존 드 라 폴은 램버트 심넬을 데리고 아일랜드로 건너가 제8대 킬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 아일랜드 대법관 토머스 피츠제럴드의 호응을 얻어낸 뒤, 1487년 5월 더블린의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램버트 심넬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요크파는 대중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런던 탑에 억류된 소년은 가짜라고 주장했다.
한편, 요크의 마거릿은 독일 용병대장 마르틴 슈바르츠를 고용했다. 마르틴 슈바르츠는 1,5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 잘 훈련된 란츠크네히트 장병들을 지휘했는데, 이들은 창병, 할버드병, 장검병, 석궁병, 그리고 포수들로 구성되었으며,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스위스인, 그리고 소수의 스코틀랜드인이 뒤섞였다. 그들의 규모는 작았지만, 최신 파이크 전투 기술을 훈련받았으며, 뛰어난 장비를 갖춘 전문 직업군인이었다. 그들은 1487년 5월 초에 여전히 요크파의 거점이었던 더블린으로 출항했다.
아일랜드에서는 지역 영주들이 '컨(kerns)' 이라 불리는 경무장 병사들을 조직했다. 이들은 열정적이고 용감했지만, 대부분 갑옷을 입지 않았고, 주로 단창과 장검으로 무장했다. 란츠크네이트가 도착한 뒤, 요크군은 여러 척의 배에 올라 잉글랜드 서부 해안으로 향했다. 6월 4일 퍼니스 인근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한 군대는 토머스 브로튼이 이끄는 추종자들과 합세한 뒤 동쪽으로 진군했다. 당시 요크군의 병력 규모는 8천 명에 달했으며,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과 프랜시스 러벨이 지휘했다. 링컨 백작과 러벨은 남쪽으로 진군을 계속하며 하루에 약 17마일(약 27km)을 이동했다. 6월 10일, 요크군은 브램햄 무어에 주둔했고, 친튜더군 400명이 태드캐스터 인근에 주둔했다. 러벨은 요크군 2,000명을 이끌고 적을 기습 공격해 몰아넀다.
이후 링컨 백작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지휘하는 적군을 따돌리기 위해 존 스크루프 경이 이끄는 분견대에게 6월 12일 요크 성벽을 공격했다가 노섬벌랜드 백작이 반격하려고 접근하면 즉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주력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계속 진군하다가 돈캐스터 외곽에서 스케일스 경 에드워드 우드빌이 이끄는 기병대와 마주쳐서 셔우드 숲에서 3일간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링컨 백작은 스케일스 경을 노팅엄으로 몰아냈고, 스케일스의 기병대는 주력군을 기다리기 위해 노팅엄에 머물렀다.
한편, 반란군이 램버트 심넬이라는 소년을 워릭 백작 에드워드라고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 7세는 진짜 워릭 백작을 런던 탑에서 끌어낸 뒤 런던 시민들에게 보여줘서, 그가 죽었거나 탈출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는 걸 인지하도록 했다. 그 후 군대를 소집한 헨리 7세는 6월 14일 노팅엄으로 가서 스케일스와 합류했고, 스트레인지 경 조지 스탠리도 가세했으며, 웨일스에서 헨리 7세의 주요 지지자였던 리스 압 토머스도 증원군을 이끌고 가세했다. 이제 헨리 7세는 12,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려 요크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적군보다 무장과 장비가 훨씬 좋았다. 6월 16일, 헨리 7세는 적군이 트렌트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뉴어크를 향해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요크파 반란군은 헨리 7세의 군대가 신속하게 추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을 따돌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13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이끄는 선봉대 6천 명을 먼저 격파한 뒤, 뒤따라 오는 헨리 7세의 후속 부대를 격파하기로 했다. 그러나 1487년 6월 16일에 벌어진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옥스퍼드 백작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텼다. 그 사이 재스퍼 튜더가 지휘하는 튜더군이 가세하면서 전력이 점점 불어났고, 숙련된 장궁병들은 요크군 진영을 향해 일제 사격을 연일 퍼부었다. 이윽고 소모전에 지친 요크군 전선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옥스퍼드 백작은 돌격 명령을 내렸다. 무장 수준이 열악했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요크군은 이 돌격 한 방에 붕괴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추격병에게 대거 사살되었다.
요크군은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4,000명을 잃고 궤멸되었다. 상당수의 란츠크네히트는 전투에서 살아남아 수용소에 갇혔다가, 헨리 7세의 배려로 잉글랜드를 떠날 수 있었다.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과 마르틴 슈바르츠, 토머스 피츠제럴드 등은 전사했다. 프랜시스 러벨은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갔으나 이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튜더군의 피해는 기록마다 300~3,000명으로 다르게 기술되었다.
램버트 심넬은 스토크 필드 전투 후 전장에서 생포되었고, 런던으로 이송되었다. 헨리 7세는 심넬이 요크파 지도자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걸 인지하고 심넬을 살려줬을 뿐만 아니라, 왕실 주방에서 꼬챙이로 음식을 뒤집는 일을 맡겼고, 나중에는 매사냥꾼에 임명했다. 심넬을 지지했던 아일랜드 귀족들도 사면되었지만, 성직자들은 헨리 7세의 요청을 따른 교황청에 의해 파문되었다. 링컨 백작에게 심넬을 소개한 리처드 시몬즈는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석방되었고, 미스 주교 존 페인도 투옥되었다가 사면된 뒤 왕실의 총애를 회복했다.
2.6.2.2. 퍼킨 워벡
1490년, 퍼킨 워벡이 요크의 마거릿이 머무는 플랑드르 궁정에 찾아왔다. 그는 자기가 에드워드 4세의 차남인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왕자이며, 그의 형인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 탑에 감금된 후, 형은 살해되었지만 자신은 나이가 매우 어리고 별다른 죄를 지었지 않기 때문에 몇 년간 자신의 진짜 이름과 출신을 숨기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풀려난 후에는 유럽에 숨어 있었지만, 자기를 보호하던 에드워드 브램튼이 떠난 뒤 신분을 밝히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당시 형제 리처드 3세를 죽이고 요크 왕조를 무너뜨린 헨리 7세를 증오해 어떻게든 축출하고 싶었던 요크의 마거릿은 이에 솔깃해 퍼킨 워벡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공식석상에서 퍼킨 워벡을 자신의 조카로 대접했으며, 외국 통치자들과 교황에게 편지 여러 통을 보내 조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491년, 퍼킨 워벡은 마거릿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4년 전 램버트 심넬이 그랬던 것처럼 아일랜드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아일랜드인들은 램버트 심넬의 반란이 실패한 뒤 헨리 7세에 맞서는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못 내고 있었기에 무산되었다. 이에 워벡은 방향을 돌려 프랑스로 향했는데,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는 프랑스의 적수인 잉글랜드 왕국을 약화할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그를 궁정에서 극진히 영접했다. 나중에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헨리 7세에 반기를 든 자들을 궁정에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자, 퍼킨 워벡을 부르고뉴 궁정으로 안전하게 보내줬다.
헨리 7세는 요크의 마거릿이 퍼킨 워벡을 숨겨주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펠리페 1세에게 항의했다. 펠리페 1세가 별다른 답변을 보내지 않자, 헨리 7세는 부르고뉴에 대한 무역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퍼킨 워벡은 펠리페 1세의 아버지인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초대를 받아 전임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리처드 4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1495년 7월 3일, 퍼킨 워벡은 요크의 마거릿의 자금 지원을 받고 용병을 고용한 뒤 켄트주의 해안 도시 딜에 상륙했다. 그는 주민들이 자기에게 호응하기를 기대했지만, 별다른 호응이 없었고, 토벌대가 급습하면서 용병 150명이 전사하자 아일랜드로 피신했다.
그 후 아일랜드에서 제9대 데스몬드 백작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지원을 받아 워터포드를 공략해 거점으로 삼으려 했지만, 강한 저항에 직면한 데다 토벌대가 접근하자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는 그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스코틀랜드 왕에게 있어 워벡은 환영할 만한 정치적 도구였는데, 헨리 7세를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는 유럽 국가의 왕녀 중 하나와 결혼시킴으로써 스코틀랜드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96년 1월, 제임스 4세는 퍼킨 워벡과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딸인 캐서린 고든의 결혼을 주선하고, 결혼 축하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이렇듯 퍼킨 워벡의 위세가 위협적으로 커지자, 헨리 7세는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자기 딸 마거릿 튜더를 제임스 4세의 신부로 제안했다. 제임스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퍼킨 워벡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4세'라고 선포했다. 1496년 9월 20일, 제임스 4세는 퍼킨 워벡을 앞세워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노섬벌랜드로 진군했다. 노섬벌랜드 주민들이 퍼킨 워벡을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자, 스코틀랜드군은 노섬벌랜드를 파괴하고 황폐화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접근하자, 제임스 4세는 즉시 군대를 철수했다.
1496년 11월 5일, 헨리 7세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이에 제임스 4세는 국경을 요새화하고 청야전술을 준비했으며, 잉글랜드 국경지대에 소규모 습격전을 여러 차례 벌였다. 하지만 헨리 7세와 제임스 4세 모두 전면전을 벌이기엔 재정이 빠듯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곧 평화 협상을 벌였다. 이때 헨리 7세는 퍼킨 워벡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제임스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퍼킨 워벡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워벡은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러던 1497년 초 콘월에서 헨리 7세의 가혹한 세금 징수에 분노한 농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곧바로 콘월로 가기로 했다. 1497년 9월 7일, 퍼킨 워벡은 콘월에 상륙했다. 당시 농민 반란은 이미 진압되었지만, 민심은 여전히 흉흉했다. 퍼킨 워벡은 주민들에게 자신이 승리할 경우 세금을 감면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혹한 농민 수천 명이 그를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4세로 받들었다. 그 후 퍼킨 워벡은 콘월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인 엑서터로 진군했고, 9월 17일에 엑서터를 포위했다. 하지만 도시 공략이 쉽지않자 4일 후 포위를 풀고 톤턴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이끄는 토벌대의 급습을 받아 참패했고, 퍼킨 워벡은 기병 30명과 함께 뷰리외로 도주했지만 끝내 따라잡혀 체포되었다.
그 후 런던 탑에 갇힌 퍼킨 워벡은 자신이 사기꾼임을 자백했다. 헨리 7세는 그가 진술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서 잉글랜드 전역과 유럽 대륙에 널리 퍼뜨리게 한 뒤, 퍼킨 워벡을 풀어주고 궁정에서 환대받게 했다. 이후 퍼킨 워벡은 왕실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감시를 끊임없이 받았고, 요크의 엘리자베스 왕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궁정에서 18개월을 보낸 후, 그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1499년, 그는 런던 탑에 15년째 갇혀 있던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탈출을 계획했다. 워릭 백작 재판 문서에 따르면, 워벡은 자신을 다시 왕으로 선포했고, 워릭 백작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퍼킨 워벡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지지자들을 집결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들은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런던 탑을 불태우고 플랑드르로 탈출한 뒤, 워릭 백작을 왕으로 선포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퍼킨 워벡의 계획은 이번에도 탄로났다. 1499년 11월 23일, 퍼킨 워벡은 타이번으로 끌려가 자백서를 읽은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사람들은 워릭 백작이 퍼킨 워벡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와 함께 헨리 7세를 음해하려 했다는 고발은 날조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어릴 때 끌려가 무려 15년간 런던 탑에 갇혀 지내면서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진데다[11] 삶에 대한 애착이 없었던 에드워드는 죄를 순순히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이 선고된 지 6일 후인 1499년 11월 28일,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런던 탑의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다.
2.6.3. 재정 정책
헨리 7세가 집권했을 당시, 잉글랜드 정부의 재정은 백년전쟁과 장미 전쟁의 여파로 막대한 빚에 시달렸고, 국정 운영은 이로 인해 심각한 차질을 벌였다. 헨리 7세는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국고를 채우기 위한 강력한 재정 정책을 실시하기로 했다. 먼저 1486년, 디넘 남작 존 디넘을 재무장관에 서임해 재정 정책 전반을 이끌게 했고, 1501년 존 디넘이 사망하자 서리 백작 토머스 하워드를 새 재무장관으로 선임해, 자기가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 재정 정책을 진두지휘하도록 했다. 그는 왕의 지시에 따라 왕실의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막대한 빚을 해소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기에게 맞서 싸운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해 왕실 토지를 크게 늘림으로써 재정 수입을 큰 폭으로 늘렸다.또한 헨리 7세는 무자비하게 효율적인 과세 제도를 도입해 영지의 세금 징수를 개선하기로 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존 모턴을 잉글랜드 대법관에 선임한 뒤 이 역할을 맡겼다. 17세기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모턴이 '모턴의 포크'로 알려진 정책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세금 위원들은 생활이 사치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왕에게 세금을 더 많이 줄 여유가 있다며 강제 징수하고, 검소한 사람들에게는 저축을 따로 모아두었을 테니 더 많이 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시 많이 거둬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건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어낸 이야기며, 모턴과 레지날드 브레이 등 왕의 고문을이 사망한 뒤 특별세가 남용된 것을 볼 때 두 사람은 헨리 7세가 세금을 과도하게 걷는 걸 억제하려고 노력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다만 1497년 콘월에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모턴과 레지날드 브레이 등이 자기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고 성토하는 글을 배포하기도 했다. 이렇듯 재정 관리에 힘쓴 결과, 잉글랜드 정부는 치세 말기에 이르러 빚을 대부분 청산하고 국고를 채울 수 있었다.
다만 헨리 7세는 재정 관리에 집착한 나머지 왕 치고는 졸렬하다는 평을 들을 만한 행보를 보였다.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뒤 돈이 아까워서 대관식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요크 지지자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서 결국엔 대관식을 치르거나, 장남 아서와 약혼한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장남이 죽고서도 20만 크라운이나 되는 지참금을 반환하기 싫어서 잡아두었다. 나중엔 캐서린을 차남인 헨리와 결혼시키려고 사돈인 페르난도 2세에게 지참금을 새로 요구했지만, 그가 주지 않는 바람에 결혼을 계속 미루며 캐서린을 가난하게 살게 할 정도로 푸대접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페르난도 2세로부터 지참금을 받아 차남 헨리는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장남 아서가 죽은 지 2년 후에 장남의 기사 서임세를 때리기도 하고, 과거 사문화된 선박세를 해군 재건 명목으로 부활시켰으며, 의회에서 가결한 전쟁을 위해 부과한 세금을 자기가 먹어버리기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법학자들을 동원하여 연구를 거듭하며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된 여러 봉건 의무를 세금으로 발굴하고, 징세관들을 임명하여 강제적으로 과세를 때리면서 많은 돈을 거두었다. 물론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강한 비난을 받았다.
2.6.4. 외교 및 무역 정책
헨리 7세는 평화를 유지하고 피폐해진 민생을 살리기 위해 경제적 번영을 창출하는 것을 외교 정책의 목표로 삼았다. 1489년 2월, 헨리 7세와 브르타뉴 대표단 사이에 레동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헨리 7세는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에게 병합되는 걸 막으려는 안 드 브르타뉴를 돕기 위해 6,000명을 보내기로 하고, 그 대가로 상당한 보상금을 받아냈다. 그러나 1491년 12월 안 드 브르타뉴가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결혼하게 되자, 헨리 7세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는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도전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프랑스 북부에서 제한된 군사 원정을 벌여서 프랑스가 평화 협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기로 했다.1492년 10월, 26,000명에 달하는 잉글랜드군이 헨리 7세의 지휘하에 칼레에 상륙한 뒤 불로뉴를 포위했다.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던 차에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협상을 택했다. 11월 2일, 양자는 에타플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8세는 잉글랜드 왕위 요구자 퍼킨 워벡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159,000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헨리 7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브르타뉴 공국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헨리 7세는 자신의 위치를 강하하기 위해 조선업에 보조금을 지원해 해군을 강화했다. 1495년 포츠머스에서 유럽 최초로 드라이 도크를[12] 취역시키기도 했다.
한편, 헨리 7세는 신대륙 탐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탐험가 조반니 카보토[13]는 브리스톨에서 온 선박이 아일랜드 서쪽의 훨씬 떨어진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런던의 피렌체 은행가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은 뒤 1496년 3월 헨리 7세로부터 특허장을 받고 서쪽으로 탐험 항해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카보토가 정확히 어디에 상륙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헨리 7세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1489년, 헨리 7세는 스페인과 메디나 델 캄포 조약을 체결해, 장남 아서 튜더와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그들과 군사 및 경제 동맹을 맺었다. 또한 1502년 오랜 세월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던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제임스 4세와 리치먼드 궁전에서 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제임스 4세는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튜더와 결혼하며, 마거릿 튜더의 지참금은 35,000 스털링 파운드로 합의되었고, 양자는 영구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기로 했다. 두 나라의 왕과 후계자들은 서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되었고, 어느 왕이든 조약을 어기면 교황청이 파문하기로 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오랜 세월 서로 전쟁을 벌이던 양국이 영구 평화 협약을 맺었다는 소식에 환영 의사를 밝히면서, 조약에 명시된 대로 조약을 먼저 어긴 왕을 파문하겠다고 공언했다.
1506년, 구호기사단의 기사단장 에메리 담부아즈는 헨리 7세에게 기사단의 보호자이자 후원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헨리 7세는 십자군에 관심이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1507년, 헨리 7세는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기독교 왕국들 사이에 평화를 수립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원정을 조직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헨리 7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주력 상품인 양모와 직물 무역에서 직물 염색을 위한 화학 고정제로 사용되는 명반 거래에 관심을 보였다. 명반은 유럽에서 단 한 지역(이탈리아 톨파)에서만 채굴되었기 때문에 매우 희귀한 상품이었고, 그 지역을 소유한 교황청에 매우 귀중한 수입원이었다. 1486년, 헨리 7세는 교황청이 독점하는 명반을 다른 데서 구할 길을 모색했다. 그는 이탈리아 상인 은행가 로도비코 델라 파바와 이탈리아 은행가 지롤라모 프레스코 발디의 도움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선박 진입 허가를 받고 명반을 취득한 후 저지대 국가와 잉글랜드에 판매했다. 그 결과 명반 가격이 크게 저렴해졌고, 잉글랜드 왕실의 수입은 급증했다.
1494년, 헨리 7세는 요크의 마거릿이 퍼킨 워벡을 지원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금수 조치했다. 이에 양모 무역의 독점권을 누리던 상인들은 안트베르펜에서 칼레로 이전했고, 플랑드르 상인들은 잉글랜드에서 쫓겨났다. 이에 따른 손실이 막대하자, 요크의 마거릿은 결국 굴복했다. 1496년, 양자는 마그누스 인터쿠르수스("대협정")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요크의 마거릿은 더이상 퍼킨 워벡을 돕지 않기로 했고, 양자는 양모 무역을 제개하기로 했다. 이후 잉글랜드는 플랑드르와 무역 거래를 활발하게 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고, 잉글랜드 경제는 회복했다.
1506년 1월, 스페인의 국왕이 되기 위해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향하던 부르고뉴 공작 펠리페 1세가 폭풍우에 휩쓸려 도싯 해안에서 난파되어 멤콤 레지스 인근에 표류했다. 그 후 필레페 1세는 헨리 7세의 궁정으로 옮겨진 뒤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플랑드르와 부르고뉴는 잉글랜드 직무 수출에 대한 모든 관세를 철폐해야 하지만, 잉글랜드는 기존 관세를 그대로 매길 수 있었다. 그리고 펠리페 1세의 여동생이자 2번 과부가 된 26세의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헨리 7세가 재혼하기로 했다. 여기에 헨리 7세의 숙청을 피해 해외로 망명한 에드먼드 드 라 폴를 잉글랜드로 넘겨야 했다. 그 대신, 헨리 7세는 펠리페 1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에게 지나치게 유리했기 때문에, 플랑드르와 부르고뉴인들은 이 조약을 인테르쿠르수스 말루스(Intercursus Malus, "악의적인 조약")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마르가레테가 헨리 7세와의 재혼을 극렬히 반대했고,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그리고 한자 동맹 모두 이 조약을 거부했다. 이후 1507년에 1496년에 체결되었던 조약을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헨리 7세는 프랑스 왕국의 보르도산 포도주를 수입해 오는 선박을 잉글랜드 국적 선박으로만 강제하는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잉글랜드 상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이후 항해조례는 잉글랜드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었다.[14] 이 항해조례를 통해 헨리 7세는 상인들에게 환심을 제대로 샀기에, 신하들은 의회에서 통치의 기반이 되는 턴세와 파운드세를 치세 내내 국왕이 마음대로 걷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기에 이른다. 이는 스튜어트 왕조 시대까지 국왕의 주 수입원이 된다.[15]
2.6.5. 지방 통제와 법 집행
헨리 7세는 장미 전쟁으로 흐트러진 지방 통제를 개선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각지의 귀족들이 하인으로 위장한 용병으로 구성된 사병대를 제각기 거느리며 위세를 떨쳤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가 장남 에드워드 5세의 이름으로 웨일스와 웽리스 변경 지역에 실 영지를 토대로 위원회를 설립해 웨일스를 다스렸던 걸 본받기로 하고, 장남 아서 튜더의 이름으로 웨일스와 웨일스 변경 지역, 체셔, 콘월을 통치하기 위한 웨일스 및 변경백 지역 위원회를 설립했다.헨리 7세는 귀족들이 자신에게 충성한다면 현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허용했다. 가령, 스탠리 가문은 법을 준수하는 조건으로 랭커셔와 체셔를 자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반면에, 헨리 7세에게 반항적인 귀족들은 칙령을 통해 제압되었다. 또한 헨리 7세는 상류층이 추종자들에게 휘장과 상징을 주어 과시하는 행위와 남성 '하인'을 너무 많이 두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했으며, 이를 어기는 자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물렸다. 또한 헨리 7세는 추밀원 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소수의 인사를 '별 법원(Star Chamber)'에 배속해, 복잡한 법률 체계를 뚫고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개인의 권력 행사나 왕권에 대한 위협과 관련된 심각한 분쟁을 처리하게 했다.
헨리 7세는 치안판사를 전국적인 규모로 활용했다. 그들은 모든 주에 임명되어 1녀씩 재임했는데, 주요 임무는 해당 지역에서 국가의 법률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모든 의회법은 치안판사의 감독을 받았으며, 도량형 확인과 같은 다양한 행정 업무도 치안판사의 관할에 속했다. 그들은 헨리 7세의 법과 질서를 집행하는 핵심 인사였으며, 무보수였기 때문에 법 집행에 드는 세금 부담이 적었다. 이 자리에 임명된 지역 귀족들은 치안판사직을 해당 지역에서 위신을 드높일 좋은 기회로 여겼기에 기꺼이 봉사했다. 그 결과, 장미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사회 질서는 빠르게 회복했고, 왕권은 굳건해졌다. 다만 그는 귀족과 동일한 원칙을 치안판사에게도 적용해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제한했다.
2.7. 말년
1501년 장남 웨일스 공 아서를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결혼시켰지만 이듬해 아서가 죽고, 그 이듬해인 1503년에는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8번째 아이인 캐서린을 낳다가 아이와 함께 죽는 악재가 겹쳤다. 아내인 엘리자베스와 아들 아서의 죽음은 가족을 사랑하는 헨리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16] 이후 신하들의 추천으로 새 장가를 가고 싶어했으나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왕비에겐 퇴짜 맞았고, 죽은 맏아들의 아내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언니인 카스티야의 후아나 1세에게 청혼해서 큰 웃음을 끌었다. 후아나는 심각한 정신병으로 유폐된 상태였고 근친혼이 잦은 당시에도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지간이라는 개족보가 되는데다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었기에 상대인 스페인 측에서 거부했다.이때부터 우울증에 걸린 것인지 헨리는 말이 없어졌고 신하들과의 접촉도 최소화하고, 궁정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골방 안에 틀어박혀 유일한 취미 생활인 돈 세기에만 몰두하며 지냈다고 한다.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었는데 결국 1509년 결핵이 악화되어 리치몬드 궁전에서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52세였다. 사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두 달 후인 1509년 6월 29일에 사망했다.
말년까지 세금 징수를 잘해서 헨리 7세에게 총애받은 두 신하들인 에드먼드 더들리[17]와 리처드 엠프슨은 역으로 백성들에게 증오받았다. 이 두 사람은 헨리 7세가 죽자마자 민심 안정과 정의 구현을 구실로 아들 헨리 8세에게 날조된 반역 혐의로 처형당한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헨리 7세 (Henry VII) | <colbgcolor=#fff3e4,#331c00> 초대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18]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 <colbgcolor=#ffffe4,#323300> 오언 튜더 (Owen Tudor) | |
마레드 압 튜더[19] (Maredudd ap Tudur) | |||
마거릿 퍼치 다비드[20] (Margaret ferch Dafydd) | |||
발루아의 카트린[21] (Catherine of Valois) | |||
샤를 6세 (Charles VI) |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of Bavaria) |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22] (Lady Margaret Beaufort) | |||
제1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23] (John Beaufort, 1st Duke of Somerset) | |||
제1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24]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 | |||
마거릿 홀랜드 (Margaret Holland) | |||
블렛소의 마거릿 뷰챔프 (Margaret Beauchamp of Bletso) | |||
블렛소의 존 뷰챔프 (John Beauchamp of Bletso) | |||
이디스 스토튼 (Edith Stourton) |
3.2. 아내와 자녀
|
아내 요크의 엘리자베스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웨일스 공 아서 (Arthur, Prince of Wales) | 1486년 9월 19일 | 1502년 4월 2일 | 아라곤의 카탈리나 |
1녀 |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거릿 (Margaret, Queen of Scots) | 1489년 11월 28일 | 1541년 10월 18일 | 제임스 4세 슬하 4남[25] |
슬하 1녀[26] | ||||
제 1대 메스번 영주 헨리 스튜어트 | ||||
2남 | 헨리 8세 (Henry VIII) |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 | 슬하 1남 1녀[27] |
슬하 1녀[28] | ||||
제인 시모어 슬하 1남[29] | ||||
| ||||
| ||||
캐서린 파 | ||||
2녀 | 프랑스의 왕비 마리 (Mary, Queen of France) | 1496년 3월 18일 | 1533년 6월 25일 | 루이 12세 |
제 1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 슬하 2남 2녀 |
[1] 현 웨일스 펨브룩셔 펨브룩 성[2]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 튜더 왕조의 바로 다음 왕조인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 제임스 1세다.[3] 헨리 6세는 곤트의 존의 적자계열 증손자고 마거릿 보퍼트는 곤트의 존의 사생아계열 증손녀였다.[4] 이 결혼은 이부동생에게 랭커스터 왕조의 왕위계승권과 막대한 재산을 지닌 상속녀를 안기려는 헨리 6세의 결정이었다고 한다.[계보] 헨리 3세-잉글랜드의 베아트리스-브리타니의 블랑쉐-아르투아의 마거릿-나바레의 필리프 3세-나바레의 블랑쉐-장 2세-샤를 5세-샤를 6세-카트린-에드먼드 튜더-헨리 7세[6] 라이어널은 자식이라곤 외동딸 필리파 밖에 없었다. 필리파는 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와 결혼해서 후손을 남겼다.[7] 보퍼트 가문은 존이 정부이자 3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와 결혼하기 전에 태어났으나 나중에 리처드 2세가 적법화했다.[8] 잉글랜드의 중세 왕위 계승은 남성 우선으로 부계 > 모계이다. 그러나 윗대의 모계가 윗윗대 부계보다 앞선다. 쉽게 말하면 고모의 후손이 작은 할아버지보다 계승권이 앞선다.[9] 폴리도어 버질에 따르면, 리처드 3세의 왕관은 전투 후 토머스 스탠리의 동생 윌리엄 스탠리에게 발견되었고, 스토크 골딩 마을 근처 크라운 힐 정상에서 헨리 튜더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10] 마거릿 보퍼트는 스스로 여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들 헨리 7세의 즉위 후 서명할 때 Regina(라틴어로 왕비 혹은 여왕이라는 뜻)의 R을 붙여 서명했으며 엘리자베스의 복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11] 연대기 작가인 에드워드 홀에 따르면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인간과 소통하지 못하고 동물도 보지 못한 채 너무 오랫동안 감금되어서 거위와 수탉을 구별할 수 없었다"라고 한다.[12] Dry dock. 선박이나 보트 등 수상 운송 수단의 건조, 유지 보수, 수리 등을 위해 물을 빼낼 수 있는 시설.[13] Giovanni Caboto. 영어식 이름인 존 카보트(John Cabot)로 유명하다.[14] 올리버 크롬웰이 한 걸로 알지만 크롬웰도 한 것이고, 잉글랜드의 국력이 부족할 경우 무시당하다가, 다시 항해조례를 반포했다가 포기하는 상황의 연속이었지 계속해서 잉글랜드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15] 턴세는 술통 단위로 부과하는 관세이고, 파운드세는 물류 무게당 부과하는 세금으로, 보통 왕이 등극하면 의회에서 "왕께서 치세 내내 걷으십시요."하며 승인해주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찰스 1세 시기에는 즉위 후 의회에서 고작 1년 6개월치만 허가해주자 왕과 의회의 갈등이 깊어지게 된다.[16] 헨리 7세는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결혼 자체는 정치적인 결혼이었지만 아내 엘리자베스와 금슬이 좋았으며, 정부와 사생아는 전혀 없었다. 장남이자 후계자인 아서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마음이 아파 그의 장례식에서 크게 흐느끼고 울부짖을 정도로 슬퍼해서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도 놀라며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특히 노랭이라서 병적으로 절약을 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아내와 자식들에게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지원해줬다. 딸 마거릿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에게 시집갈 때도 멀리 떠나는 딸 때문에 슬퍼했고, 그녀가 고향에 대한 향수병과 가족이 너무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오자 안타까워할 정도였다.[17] 이 에드먼드의 아들이 에드워드 6세 시절 에드워드 시모어(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를 몰아내고 사실상 잉글랜드를 통치하다가, 에드워드 6세 사후 메리 1세의 즉위를 막고 제인 그레이를 옹립하려다가 반역으로 참수당한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다. 에드먼드의 손자는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은 연인으로 유명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다.[18] 1430년 ~ 1456년 11월 3일 (향년 26세). 랭커스터 왕조 마지막 왕 헨리 6세의 이부(異父)동생이다. 이부동생이기에 헨리 튜더의 부계는 랭커스터 가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헨리 7세의 즉위 명분도 부계가 아닌 모계가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를 통해 랭커스터 가문이라는 점에서 나왔다. 헨리 6세가 자신의 이부남동생인 튜더 가문의 에드먼드 튜더와 자신의 육촌여동생인 랭커스터 가문의 마거릿 보퍼트의 결혼을 주선했기 때문이다. 1/2 웨일스인, 1/4 프랑스인, 1/4 독일인이다. 태어난 곳은 웨일스가 아니지만 죽은 곳은 웨일스다.[19] 웨일스인이다. 'ap'은 웨일스어로 '~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즉 'Maredudd ap Tudur'는 'Tudur의 아들 Maredudd'라는 뜻이다.[20] 웨일스인이다. 'ferch'는 웨일스어로 '~의 딸'이라는 뜻이다. 즉 'Margaret ferch Dafydd'는 'Dafydd의 딸 Margaret'이라는 뜻이다.[21] 헨리 5세의 아내. 헨리 5세 사후 오웬 튜더와 재혼했고 이 결혼은 튜더 가문이 랭커스터 가문의 분가가 되는 최초의 계기가 된다. 헨리 5세와 카트린 사이의 아들인 헨리 6세가 자신의 이부남동생인 튜더 가문의 에드먼드 튜더와 자신의 육촌여동생인 랭커스터 가문의 마거릿 보퍼트의 결혼을 주선했기 때문이다.[22]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 곤트의 존의 증손녀다. 따라서 헨리 튜더의 즉위 명분은 모계가 랭커스터 가문이라는 점에서 나왔다.[23]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 곤트의 존의 손자다.[24]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의 아들이다.[25] 제임스 5세 등[26] 마거릿 더글러스[27] 메리 1세 등[28] 엘리자베스 1세[29] 에드워드 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