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8 16:17:01

찰스 브랜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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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2DFDB><colcolor=#000> 제1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
Charles Brandon, 1st Duke of Suffolk
파일:Master_of_the_Brandon_Portrait,_Charles_Brandon.jpg
이름 찰스 브랜던
(Charles Brandon)
출생 1484년
사망 1545년 8월 22일 (향년 60~61세)
잉글랜드 왕국 서리 길퍼드
배우자 마거릿 네빌 (1507년 결혼 / 1507년 무효화)
앤 브라운 (1508년 결혼 / 1511년 사망)
메리 튜더 (1515년 결혼 / 1533년 사망)
캐서린 윌로비 (1533년 결혼)
자녀 앤, 메리, 헨리, 프랜시스, 엘레노어, 헨리, 헨리, 찰스
아버지 윌리엄 브랜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브로인
형제 윌리엄, 앤
1. 개요2. 생애
2.1. 기원2.2. 궁정에서의 생활2.3. 헨리 8세의 최측근2.4. 메리 튜더와의 비밀 결혼2.5. 이후의 경력
3. 아내4. 자녀5. 사생아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헨리 8세의 오랜 친구이자 매부. 헨리 7세의 기수인 윌리엄 브랜던과 엘리자베스 브루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아 제1대 서퍽 공작(1st Duke of Suffolk)의 작위를 받고 이어서도 추밀원(Privy Council)의 의장(Lord President)과 섭정(Lord Steward)도 맡았고 헨리 8세의 명령을 받아 전쟁에 나설 때는 장군으로서 군대를 이끄는 등 당대 잉글랜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2. 생애

2.1. 기원

브랜던 가문의 기원은 서면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소 모호하다. 일각에서는 이들의 조상이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원정을 떠났을 때 동행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공적을 세운 뒤 이스트 앵글리아의 영지를 보상으로 받았을 거라고 추정하나 불확실하다. 기록에서 확실히 등장하는 첫 번째 인물은 동앵글리아의 왕포드 출신의 부유한 젠트리였고, 찰스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브랜던이었다. 그는 노퍽 공작인 모브레이 가문의 가신이 되어서 높은 관직을 맡고 의회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헨리 6세에드워드 4세 밑에서 차례로 여러 사무직을 맡았고,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 이후 에드워드 4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76년 마지막 모브레이 가문 인사인 존 모브레이가 사망한 뒤, 윌리엄 브랜던은 뒤이어 노퍽 공작을 맡은 존 하워드를 섬기지 않고 에드워드 4세의 궁정에 남았다. 그의 아들들인 윌리엄, 토머스, 로버트는 그의 발자취를 따랐지만, 리처드 3세가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축출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그에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483년 버킹엄 공작의 반란에 연루되어 해외로 도주했고, 1485년 헨리 튜더 편에 서서 보스워스 전투에 참여했다. 이때 찰스 브랜던의 아버지인 윌리엄 브랜던은 기수로 참여하다가 헨리 튜더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리처드 3세에게 살해당했다.

찰스는 윌리엄 브랜던 경과 헨리 브루인 경의 딸이자 부유한 상속녀인 엘리자베스 브루인의 둘째 아들이었다. 형 윌리엄은 일찍 죽었고, 누이 앤은 존 쉴스턴 경과 초혼, 가웨인 케어우 경과 재혼, 니콜라스 시드니 경과 삼혼했다. 그녀는 니콜라스 시드니와의 사이에서 윌리엄 시드니 경을 낳았는데, 이 인물은 레스터 백작을 대대로 이어받은 시드니 가문의 선조이다. 찰스의 정확한 출생 날짜와 출생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는 아마도 1484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며, 당시 부모는 리처드 3세를 피해 해외 망명 중이었기에 브르타뉴 공국 또는 프랑스 왕국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아버지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아버지가 추종한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꺾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가 된 뒤,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할아버지 윌리엄 경이나 삼촌 토머스 경의 집에서 자랐을 것이다.

찰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아마도 다른 소년들처럼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독서와 쓰기에 능숙했고, 평생 동안 광범위한 서신을 주변인들과 주고받았다. 특히 스포츠와 마상창시합에서 뛰어났는데, 이는 나중에 헨리 튜더 왕자의 총애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2.2. 궁정에서의 생활

1493년 또는 1494년에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부모를 모두 잃은 뒤, 찰스는 사실상 생계를 잃었다. 1491년에 사망한 할아버지 윌리엄의 토지 소유권은 또다른 삼촌 로버트에게 상속되었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브루인의 상속 재산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인 윌리엄 티렐에게 넘어갔다. 그는 헨리 7세의 고문이자 외교관으로 일했던 그의 삼촌 토머스 브랜던의 보살핌을 받았다. 찰스는 아마도 토머스 브랜던의 집에서 자랐고, 왕실 궁정에서 지내면서 헨리 7세의 총애를 얻었다. 토머스 브랜던 경은 왕의 장남인 웨일스 공 아서 튜더의 수행원에 조카 찰스를 집어넣도록 했다.

1501년 아서 튜더가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결혼하고 젊은 부부가 웨일스 변경백국에 있는 러드로 성으로 떠났을 때, 찰스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1502년 아서 튜더가 병사한 후, 그는 궁정에 남았고, 그곳에서 헨리 튜더 왕자를 만나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1503년부터 헨리 7세를 식탕에서 모시는 시종 중 한 명이 되었고, 1505년부터 1509년까지 궁정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왕과 그의 상속인을 언제나 수행했다. 1505~1506년경에는 궁정에서 열리는 기사 토너먼트와 기타 대회에 정기적으로 참가하는 특수 기사단에 합류했고, 1507년부터는 왕의 정식 시종이 되었다. 헨리 7세 치세 말기에 에식스 백작 헨리 부르시에의 시종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삼촌 덕분에 궁정 신하들 사이에서 유용한 인맥과 지인을 얻었고, 1510년 삼촌이 사망하자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우스워크에 있는 채무자 감옥인 킹스 벤치의 수익성 있는 원장직도 물려받았다.

찰스는 스포츠 훈련과 토너먼트 경기장에서 헨리 8세와 항상 동행했고, 마상창시합에서 탁월한 기술과 용기를 선보여 헨리 8세의 찬사를 받았다. 헨리 8세가 즉위한 후에는 북부의 왕실 영지 총독으로 임명되하고 나중에는 훨씬 더 수익성이 좋은 임명을 여러 번 받았으며, 1513년 3월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찰스와 헨리 8세는 7살이라는 상당한 나이차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나름대로 많은 공통점을 지냈다. 그는 당대 기록에서 스포츠, 사냥, 토너먼트 경쟁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때때로 헨리 7세의 사생아로 오인받을 정도로 신체적 유사성이 상당했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무척 잘생기고 매우 용감하며, 잉글랜드에서 가장 뛰어난 마상창시합 선수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지적으로는 그다지 우수하지 않았지만, 헨리 8세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고 정신적으로 가까웠으며, 필요할 때 타협할 수 있었기에, 평생 헨리 8세의 신임을 유지할 수 있었다.

2.3. 헨리 8세의 최측근

헨리 8세 치세 초기 몇년은 찰스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끝없는 무도회, 토너먼트, 가면 무도회로 보냈다. 찰스는 초기엔 토머스 니벳, 에드워드 하워드, 헨리 길포드와 에드워드 길포드 형제, 에드워드 네빌과 같은 왕의 가장 친한 친구들로 구성된 측근 무리 속에서 왕의 애정을 공유해야 했다. 헨리 8세는 정치보다 오락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들이 정게에 미친 영향력은 판단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후의 사건들은 찰스와 왕의 관계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줬다.

1512년 캉브레 동맹 전쟁이 한창일 때,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등을 돌리고 스페인 편에 섰다. 찰스는 헨리 8세의 다른 심복들과 마찬가지로 군함 중 하나의 함장을 맡았지만, 그 해 여름에 벌어진 벌어진 세인트 매튜 곶 해전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당시 잉글랜드 함대가 프랑스와 해전을 치르고 있을 때, 그와 헨리 길포드는 경험이 부족하여 프랑스군에게 습격당한 토머스 니벳을 제때 도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대형 폭발이 일어나면서 토머스 니벳이 타고 있던 배가 불탔고, 토머스 니벳과 그의 선원 대부분이 사망했다. 찰스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고, 다시는 바다에서 싸우지 않았다.

그후 찰스는 왕실 궁정에서 점점 더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1512년 10월 초, 찰스는 전투 도중에 사망한 토머스 니벳을 대신하여 말 관리인 직책을 맡았다. 그의 임무 중에는 왕실 궁정의 움직임을 감독하고 왕실 마구간을 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헨리 8세의 애마를 주의 깊게 감독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또한 그는 사냥, 산책, 토너먼트, 의식 행결 뿐만 아니라 전국 순행과 군사 원정에서도 끊임없이 왕을 수행해야 했다. 당연히 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고, 헨리 8세의 강력한 신임을 얻었다. 그는 가면 무도회와 잔치에서 왕과 같은 의상을 입은 유일한 참가자였고, 마상창시합에서는 헨리 8세의 유일한 파트너가 되었다. 1513년 4월에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견을 맡았던 리슬 남작부인 엘리자베스 그레이와 약혼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리슬 자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왕의 가장 총애하는 사람으로 인정했다.

1513년 봄,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이 재차 시행되었다. 이때 헨리 8세는 찰스를 군대의 대원수로 임명함으로써 다시 한 번 찰스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여줬다. 그의 권한은 군 생활의 모든 측면에 미쳤다. 처음에는 경험 부족으로 인해 찰스의 군사 혐의회 참여도가 미미했고, 주요 임무는 군대의 질서와 규율 유지, 보급품 감독, 용병 모집 등에 국한되었지만, 그 임무를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원정이 진행되면서 군사 지도자로서의 그의 역할이 점점 커졌고,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총독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사절은 보고서에서 그를 "두 번째 국왕"이라고 칭했다. 1513년 8월 테루안 공략전에서, 그는 선봉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해 용감한 전사임을 입증했다. 그 해 9월 투르네 공방전 도중에, 그는 도시 문을 습격하는 포병 사단을 지휘해 도시의 항복을 성공적으로 협상했다.

잉글랜드군이 테루안에 주둔했을 때, 헨리 8세는 동맹을 맺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카를 5세 부자와 합류한 뒤 투르네에서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와의 결혼 협상을 논의했다. 이후 헨리 8세와 그의 사령관들은 릴에서 며칠을 보내며 황제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를 방문했다. 이때 승리를 기념하여 호화로운 축하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가 진행되던 중, 찰스는 마르가레테에게 접근해 농담으로 반지를 교환했고, 헨리 8세는 마르가레테에게 찰스를 남편으로 계속 추천하는 등 장난을 쳤다. 곧 그들이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막시밀리안 1세는 몹시 불쾌해했지만, 마르가레테는 이 모든 이야기가 단지 '사악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며 찰스와 진짜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밝혀 막시밀리안 1세를 안심시켰다.

1514년 2월 1일, 찰스 브랜던은 서퍽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 작위는 이전에 드 라 폴 가문에 속했으며, 마지막 소유자는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하다가 1513년에 헨리 8세의 명령으로 처형된 제3대 서퍽 공작 에드먼드 드 라 폴이었다. 찰스는 작위와 함께 드 라 폴 가문에서 몰수한 영지를 받았다. 그는 이제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와 함께 잉글랜드의 세 공작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1512년 3월 30일에 기사 작위를 받고, 14개월 후에 자작 작위를, 9개월 후에 공작 작위를 받는 가공한 출세를 달성했다.

그러나 찰스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한 일은 많은 비난에 부딪쳤다. 하워드와 스태퍼드 같은 저명한 귀족 가문 인사들은 일개 젠트리가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에 불쾌해 했다. 버킹엄 공작은 짜증을 내며 왕실을 떠나버렸고, 노퍽 공작과 그의 아들인 서리 백작 토머스 하워드는 찰스를 왕의 총애를 노리는 경쟁자로 여겼다. 찰스는 이에 맞서 자신처럼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었고, 노퍽 공작 및 버킹엄 공작과 불화 관계에 있던 잉글랜드 대법관 토머스 울지와 손잡았다.

한편, 1513년 가을 이후 가라앉았던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찰스의 결혼 소문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514년 3월 무렵, 유럽의 여러 국가 궁정에서는 헨리 8세가 친구를 공작으로 세운 후 마르가레테와 결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영국에서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서퍽 공작은 유럽 귀족들의 눈에는 그녀에게 적합한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찰스는 당시에 리슬 남작부인과 약혼하고 있었기에, 그의 구혼자 지위는 다소 의심스러웠다. 스캔들이 생길 것을 우려한 헨리 8세는 마르가레테와 황제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 또한 다음 해에 병력을 파견할 예정이었던 플랑드르에 찰스의 사절단을 보내지 말아달라는 마르가레테의 요청에 동의했지만, 리슬 남작 부인과 결혼해서 소문을 원천 봉쇄하라고 찰스에게 강요하라는 요구는 거부했다.

2.4. 메리 튜더와의 비밀 결혼

1514년, 헨리 8세는 프랑스와 화해하기로 했다. 당시 그는 여동생 메리 튜더카를 5세와 맺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왕가는 1514년 5월에 거행될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별다른 이유를 들지 않고 계속 연기했다. 그러다가 캉브레 동맹을 맺어뒀던 막시밀리안 1세와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가 프랑스와 비밀리에 휴전 협정을 맺었다는 걸 알게 되자, 헨리 8세는 메리 튜더와 카를 5세의 약혼을 파기하고, 토머스 울지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메리를 결혼시키기로 했다. 당시 메리 튜더는 궁정에 거의 매일 방문하던 찰스에게 몹시 반했고, 찰스도 그녀에게 호감을 표했다. 그러나 메리는 오빠의 뜻에 따라 루이 12세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대신 자기가 루이 12세보다 오래 살면 다음 남편을 직접 선택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1514년 9월, 메리 튜더는 호화로운 수행원들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고, 찰스는 10월에 그녀를 따라 결혼 축하연에 참석하고 마상창시합에 참가했다. 또한 그는 헨리 8세와 토머스 울지로부터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에 대항하여 프랑스에 동맹을 제안하고, 헨리 8세와 루이 12세의 회담을 주선하라는 비밀 임무도 받았다. 찰스는 루이 12세와 만나서 협상을 이어갔고, 결국 루이 12세는 찰스와 토머스 울지의 중재를 통해 헨리 8세와 협상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헨리 8세는 찰스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가 임무를 잘 수행했다며 흡족해 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루이 12세가 병사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3개월 만에 여동생이 미망인이 되자, 헨리 8세는 찰스에게 메리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재정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헨리 8세는 여동생의 전 남편에 대한 애도 기간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다른 유럽 군주와 맺어주려 했다. 그러나 메리는 이미 찰스가 아니면 다른 누구와도 재혼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찰스가 방문했을 때, 메리는 그에게 즉시 결혼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수녀원으로 은퇴하는 걸 받아들일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했다. 찰스는 나중에 헨리 8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메리에게 성급한 행동을 하지 말고 왕에게 축복을 구하라고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메리는 자기 뜻을 완강히 고수했고, 결국 찰스는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찰스와 메리는 1515년 3월 3일에 비밀 결혼했다. 3월 5일, 찰스는 토머스 울지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가 저지른 일을 자백하고 헨리 8세에게 자신을 대신해 중재해 달라고 간청했다. 토머스 울지는 이 서신에 큰 충격을 받았다. 왕의 허락 없이 이뤄진 그들의 결혼은 반역죄가 적용되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히 숨길 엄두를 못 낸 울지는 왕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했고, 이 문제는 추밀원과 의회에서 심의되었다. 하워드 가문은 찰스가 프랑스와 비밀리에 공모했다고 의심하며 그를 반역자로 간주했으며, 처형하거나 투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울지는 의회에서 찰스를 열심히 옹호했지만, 이에 동의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토머스 울지는 찰스에게 보낸 답장에서 왕이 이 소식을 "비통함과 불쾌함으로" 받아들였다고 알리면서, 왕이 메리의 마음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고, 그녀가 찰스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오면 결혼시켜 줄 의향이 있었는데, 허락을 받지 않고 비밀 결혼해버린 점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메리가 배상금을 지불하고 모든 보석을 돌려주며, 찰스가 메리의 남은 생애 동안 매년 4천 파운드를 지불한다면, 그리고 향후 외교 업무를 이전처럼 훌륭하게 수행하며, 프랑스의 새 국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메리 튜더가 가져온 지참금 중 20만 크라운을 잉글랜드로 반환하도록 설득한다면, 헨리 8세는 두 사람의 결혼을 용인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찰스와 메리는 5월 2일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헨리 8세와 대면했고, 헨리 8세는 여동생과 긴 대화를 나눈 뒤 마음이 누그러졌다. 5월 11일, 토머스 울지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관대한 조건으로 재정 합의가 이뤄졌다. 메리는 24,000파운드를 지불할 때까지 매년 2,000 파운드를 헨리 8세에게 지불하기로 했고, 찰스는 라일 남작 부인의 후견권을 잃었으며, 그녀와의 약혼은 파기되었다. 프랑스에서의 그의 외교 활동은 중단되었고, 모든 사무를 토머스 울지에게 넘기기로 했다. 또한 부부는 10만 파운드의 벌금을 물었으며, 메리는 루이 12세와의 결혼 기간 동안 선물 받은 금은 접시와 보석을 반환했다. 이렇게 모든 법적 절차가 완료된 후, 찰스와 메리는 1515년 5월 13일 그리니치에서 헨리 8세,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 및 궁정의 여러 구성원이 참석한 가운데 정식으로 결혼했다.

2.5. 이후의 경력

찰스와 메리는 결혼 후 한동안 궁정을 떠나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가 1518년에 왕의 외동딸 메리 공주와 프랑스의 도팽 프랑수아 3세의 약혼식에 참석했으며, 1520년에는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의 회담인 금빛 천의 들판에 참여했다. 1522년, 헨리 8세는 프랑스에 맞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동맹을 맺었다. 1523년, 찰스는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서 칼레에 파견되었다. 이후 피카르디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파리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겨울이 오면서 군대를 유지하기 곤란해지자 해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 후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 하자, 카탈리나 왕비의 친구였던 메리 튜더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찰스는 왕의 뜻을 지지했다. 카탈리나가 결혼 무효를 단호히 거부하자, 찰스는 헨리 8세의 지시를 받아들여 카탈리나를 찾아가 피할 수 없는이별을 받아들이고 웨일스의 태후라는 칭호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했지만 거부당했다. 그 후 결혼 무효 소송이 좀처럼 결판 나지 않자, 왕은 일처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며 토머스 울지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울지는 대법관 직에서 해임되고 모든 직함, 관직, 재산을 박탈당한 후 구금되었다. 이렇게 울지가 실각하면서, 찰스가 왕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1530년 8월 14일, 찰스는 추밀원 의장이라는 명예직을 받았다.

1533년, 헨리 8세는 마침내 결혼 무효를 좀처럼 받아들일 기미가 없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취소하고 앤 불린과 결혼했다. 그 해 6월 1일 새 왕비가 대관식을 치렀을 때, 찰스는 사회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아내 메리 튜더는 앤 불린을 기리는 축하 행사에 첨삭하기를 거부했고, 6월 25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찰스는 곧 제12대 윌로비 드 어스비 남작 부인 캐서린 윌로비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이전에 찰스가 메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헨리 브랜던과 약혼했지만 헨리 브랜던이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던 여인이었다.

그 후 앤 불린이 왕에 대한 영향력을 독점하기 위해 자신을 비롯한 궁정 신하들에게 오만하고 짜증스러운 태도로 대하자, 찰스는 이에 반감을 품고 앤 불린을 축출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1536년 헨리 8세의 총애를 잃은 앤 불린은 간통과 반역을 저지른 혐의로 참수되었다. 찰스는 앤 불린의 재판에서 배심원단에 있었고, 그녀의 처형식에도 참석했다. 1536년 말, 은총의 순례로 알려진 반란이 잉글랜드 북부 전역에서 발발했다. 반란군은 가톨릭 전례 부흥과 수도원 폐쇄 취소, 사생아로 간주된 메리 공주의 복권을 요구했다. 헨리 8세는 반란 진압을 찰스에게 맡겼고, 찰스는 링컨셔 지역으로 진군해 반군을 가혹하게 짓밟았다.

1537년 10월, 찰스는 왕위 계승자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대부가 되었고, 15141년에는 왕실 집사로 선임되었으며, 헨리 8세가 새 왕비를 들일 때마다 결혼식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의 영지에서 국왕을 맞이했으며, 모든 중요한 행사에 참석했다. 1541년에는 캐서린 하워드 왕비를 간통 혐의로 체포한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1544년 봄 프랑스를 향한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9월 중순, 찰스가 지휘하는 군대가 불로뉴를 점령했지만, 얼마 후 압도적인 군세를 갖춘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도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9월 30일 도버에 상륙한 왕과 그의 사령관들은 찰스가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칭찬했다.

1545년 8월 22일, 찰스는 길퍼드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간소하게 장례를 치러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를 매우 아꼈던 헨리 8세의 명령으로 윈저 성 부지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화려한 장례를 거행하도록 했다.

3. 아내

  • 앤 브라운: 1503년경, 찰스는 칼레 총독인 앤설니 브라운의 딸인 앤 브라운과 알게 되었고, 에식스 백작 헨리 부르시에의 가신을 맡았을 때 그의 고문들 앞에서 앤 브라운과 약혼했다.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부부로서 동거했으며, 두 자녀 앤 브랜던과 메리 브랜던을 낳았다. 1507년, 찰스는 몬터규 후작 존 네빌의 딸이자 존 모티머의 부유한 미망인인 마거릿 네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교황청의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1년 이내에 이 결혼은 가까운 친족 관계와 찰스가 앤 브라운과 약혼을 맺은 것 때문에 취소되었다. 앤 브라운은 둘째 아이 메리를 낳은 직후인 1510년 여름에 사망했다.
  • 엘리자베스 그레이: 1513년, 찰스는 자기가 후견을 맡았던 제2대 리슬 자작 존 그레이와 뮤리엘 하워드[1]의 외동딸인 제3대 리슬 여자작 엘리자베스 그레이와 약혼했다. 약혼 당시 엘리자베스는 고작 8살에 불과했다. 찰스는 엘리자베스가 성인이 되면 결혼하려 했다. 1512년 12월 이후, 헨리 8세는 찰스에게 리슬 자작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두 사람의 결혼 계약을 작성했다. 그러나 1515년 찰스가 왕의 여동생 메리 튜더와 비밀리에 결혼한 후 약혼은 취소되었고, 후견권은 4,000 파운드에 재판매되었다. 하지만 찰스는 엘리자베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녀의 땅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고, 그 땅에서 수입을 얻었다.
  • 메리 튜더: 1515년 5월, 찰스는 상술한 대로 왕의 여동생 메리 튜더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와의 결혼에 대한 교황청의 특별 허가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당시 마거릿 네빌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교회법에 따르면 찰스는 중혼자로 간주될 수 있었고 찰스와 메리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은 사생아로 간주될 수 있었다. 찰스는 나중에서야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적절한 교황칙서를 내려달라고 요청해달라고 청원했다. 1528년 5월 12일, 클레멘스 7세는 청원을 승인하고 교황 칙서에 승인해, 찰스가 이전의 아내 앤 브라운과 메리 튜더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합법화했다.
  • 캐서린 윌로비: 1533년 9월, 메리 튜더가 사망한 지 몇 달 후 제11대 에레스비의 윌로비 남작 윌리엄 윌로비의 외동딸인 제12대 에레스비의 윌로비 여남작 캐서린 윌로비와 재혼했다.

4.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앤 브라운
(Anne Browne)
1녀 포이스의 그레이 남작부인 앤 브랜던
(Anne Brandon, Baroness Grey of Powys)
1507년 1558년 1월 제3대 포이스의 그레이 남작 에드워드 그레이
랜달 하워스
2녀 몬티글 남작부인 메리 스탠리
(Mary Stanley, Baroness Monteagle)
1510년 6월 2일 1540년 혹은 1544년 제2대 몬티글 남작 토머스 스탠리
슬하 3남 3녀
잉글랜드의 메리 공주
(Princess Mary of England)
1남 헨리 브랜던 경
(Lord Henry Brandon)
1516년 3월 11일 1522년
3녀 서퍽 공작부인 프랜시스 그레이
(Frances Grey, Duchess of Suffolk)
1517년 7월 16일 1559년 11월 20일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
슬하 3녀[2]
에이드리언 스토크스
슬하 1녀
4녀 컴벌랜드 백작부인 엘리노어 클리퍼드
(Eleanor Clifford, Countess of Cumberland)
1519년 1547년 9월 27일 제2대 컴벌랜드 백작 헨리 클리퍼드
슬하 2남 1녀
2남 제1대 링컨 백작 헨리 브랜던
(Henry Brandon, 1st Earl of Lincoln)
1523년 1534년 3월 1일
캐서린 윌로비
(Katherine Willoughby)
3남 제2대 서퍽 공작 헨리 브랜던
(Henry Brandon, 2nd Duke of Suffolk)
1535년 9월 18일 1551년 7월 14일
4남 제3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
(Charles Brandon, 3rd Duke of Suffolk)
1537년 10월 12일 1551년 7월 14일

찰스 브랜던의 적자 네 명 중 메리 튜더에게서 낳은 두 명은 유년기에 사망했고, 캐서린 윌로비에게서 낳은 두 명인 헨리와 찰스는 1551년에 발생한 잉글랜드 발한병 유행에 휘말려 10대의 나이로 병사했다. 이후 메리 튜더에게서 낳은 3녀 프랜시스 브랜던이 서퍽 공작위를 물려받았고[3] 그녀와 결혼한 도싯 후작 헨리 그레이도 아내의 지위를 따라 서퍽 공작이 되었다. 헨리 그레이와 프랜시스 브랜던은 세 딸을 낳았는데 그중 장녀가 '9일 여왕' 제인 그레이다.

5. 사생아

  • 찰스 브랜던(1521년 이전 ~ 1551): 제임스 스트랭웨이 경의 미망인 엘리자베스의 남편.
  • 프랜시스 브랜던: 윌리엄 샌던과 초혼, 앤드류 빌스비와 재혼.
  • 메리 브랜던: 로버트 볼의 부인.

6. 대중매체에서

6.1. 튜더스

배우는 DC 확장 유니버스슈퍼맨으로 유명한 헨리 카빌이며 일본판 성우는 이토 켄타로. 역사처럼 헨리 8세의 절친한 친구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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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1 때의 경박했던 젊은 시절 모습

초기 시즌에서는 헨리 8세에게 격의 없는 행동도 자주 하지만 친분이 친분인지라 신뢰를 받고 있다. 잘생긴 외모에 대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여기저기서 여자들과 검열삭제를 즐긴다. 한 여자와 검열삭제를 하던 현장을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들키고도 "댁의 따님도 이게 첫경험은 아닌 것 같던데요."라는 말을 내뱉는 등, 왕의 친구라고 하기엔 다소 민망할 정도로 경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날 헨리의 누이인 마거릿 튜더가 포르투갈의 왕과 결혼하게 되자 헨리 8세에게 서포크 공작 지위를 받고 그녀를 포르투갈로 데리고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두 사람은 눈이 맞고 만다. 이후 마거릿은 어쩔 수 없이 포르투갈 왕과 결혼하게 되지만 워낙 노쇠했던 왕은 얼마 못 가 죽어버린다.[4] 사별한 마거릿은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브랜던과 몰래 결혼을 감행한다.[5][6]

하지만 헨리 8세는 이 일을 알자마자 격분해서 급기야 마거릿에게 "누님의 남편을 살려둘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겠다."라고 선고하지만 울지가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헨리 8세도 누나와의 우애, 브랜던과의 우정 때문에 결국 화를 푼다.[7] 그러나 둘 다 한동안 궁 밖으로 쫒겨나 있는 신세가 된다. 이 와중에 마거릿의 바가지에 쩔쩔매지만 자업자득. 이후 헨리 8세의 분노가 풀리면서 다시 친구이자 신하로서 발돋움한다.

그러나 이후 마거릿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면서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도 눈치채치 못했고 그녀가 홀로 쓸쓸히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날에도 바람을 피는 막장짓을 벌였다. 하지만 헨리 8세는 브랜던이 바람을 피운 것을 몰랐기에 누나의 병을 모른 것만을 크게 책망하고는 넘어갔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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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에서 헨리 8세와 함께.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다.

이후 캐서린 윌로비와 혼인하게 된 뒤로는 성격이 매우 점잖아지고 부인을 사랑하는 애처가로 돌변.[9]

아라곤의 카탈리나에게는 무척 동정적이었고 때때로 그녀를 몰래 방문하는 한편, 캐서린의 딸 메리 1세를 돕기 위해서 움직이기도 한다. 헨리 8세가 다리의 종양이 심해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곧바로 군사를 일부 보내 메리 1세를 보호할 것을 명령했을 정도. 또한 앤 불린을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에 그녀가 처형당할 때도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체 명령에 북부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이것을 진압하는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가톨릭 신자임을 숨기고 있던 아내 캐서린 윌로비의 간곡한 부탁, 잉글랜드에 큰 희생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는 고심하면서도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폭동을 일으킨 이들의 수장인 로버트 애스크와도 나름대로 대화를 하지만, 헨리는 애스크를 처형시킨 것은 물론 이들을 가차없이 죽일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결국 많은 이들을 사형시켰다.[10] 이후 가족의 곁으로 돌아와서도 이 일이 그의 발목을 계속 잡아 자신이 죽인 이의 환각을 보고 아들을 다그치는 등, 불안해하지만 어느 정도 회복한 듯. 하지만 이 일로 헨리의 방침에 회의감을 느껴 그렇게 친했던 사이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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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3 마지막에서. 숙적 토머스 크롬웰의 처형을 지켜보는 모습.

토머스 크롬웰과는 출신이나 성격 등의 차이로 크게 대립했고 에드워드 시모어와 결탁해 크롬웰을 죽이는데 성공하나, 이 일로 정치적인 술수를 무척이나 싫어했던 아내 캐서린과 별거하며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 아내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돌이키려고 노력은 했지만[11] 계속된 별거 끝에 수 년 후에는 거의 체념에 가까운 태도가 된다. 찰스도 모략이 판치는 정치판에 환멸을 느꼈는지 점점 궁의 일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헨리와 잉글랜드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대로이기에 지나치게 나서려는 시모어를 제지하거나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게 되자 나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없이 출전했다.

이 와중에 프랑스에서 포로로 잡힌 한 프랑스 여성인 브리짓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당돌한 태도 등이 마음에 들었는지 같이 잡혔던 그녀의 부친을 풀어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다 브리짓도 찰스에게 반해 잉글랜드군 진영에서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찰스의 곁으로 돌아오고, 찰스가 애인으로 정식으로 인정해 잉글랜드까지 함께 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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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막바지에서. 헨리 8세와 함께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한 모습.

이후엔 평온하게 지내다가 심한 병이 들고,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눈치챘는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와병 중에 일어나 헨리의 부름에 응해 헨리를 직접 만났다. 그간 쌓인 앙금과 서먹했던 사이를 토로하며 헨리와 드디어 화해하고, 헨리는 찰스에게 "내가 허락하지 않으니 죽지 말고 어서 나으라."고 했으나, 얼마 뒤에 브리짓의 곁에서 죽음을 맞았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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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1 때는 난봉꾼이더니 이후로는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점차 점잖은 귀족이자 노련한 정치가가 되어간다. 또한 쾌락과 유희만을 쫓던 청년이 점차 잉글랜드의 미래를 위해 생각하며 헨리의 곁에서 신하로서 노력한다는 점에서 튜더스의 등장 인물들 중에서도 많은 변화와 성장을 보인 인물.

튜더스에서 주인공 헨리 8세를 연기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를 제외하고 시즌 4 마지막회까지 모두 출연한 유일한 캐릭터이다. 맨 오브 스틸 이전에 헨리 카빌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 튜더스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출연한 남자 배우들 중에서 미모가 가장 돋보여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시즌 1이 방영된 해에 가장 멋진 귀족남으로 뽑히기도 했다.

6.2. 울프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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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리처드 딜레인.

헨리 8세의 오랜 친구이자 왕의 여동생 메리 튜더의 남편. 왕에게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왕을 해리라고 부르면서 친근하게 어깨를 툭툭치고 어린시절 난봉질 했던 일화까지 킥킥 거리며 공유하는 사이.

그런데 덩치가 크고 호탕하지만 눈치가 없다. 원작 소설 울프 홀에서조차 머리가 나쁘다라고 못박아 놓았을 정도. 하긴 왕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과부가 된 왕의 여동생과 덥석 결혼해 버릴 수 있는 행동력이 있다는 건 눈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1]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딸.[2] 레이디 제인 그레이[3] 앤 브라운에게서 낳은 장녀 앤 브랜던도 살아있었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와 불륜 스캔들로 찰스의 유언장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서퍽 공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고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4] 결혼식 당시에도 거동도 못할 지경이었으며 나이 탓에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경악한 마가렛은 참다 못해 밤에 남편과 단둘이 침실에 남겨져 있을 때 그를 베개로 짓눌러 질식사시켰다. 그러나 포르투갈 왕실에서는 왕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의혹을 품지 않고 바로 새로운 왕을 즉위시켰고, 마가렛이 원만하게 재혼할 수 있게 다시 잉글랜드로 보내주기까지 한다.[5] 실제 역사에서 찰스 브랜던과 결혼한 건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 튜더가 아니라 여동생 메리 튜더다. 이 드라마의 수많은 고증오류 중 하나. 메리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왕비로 시집갔다가 사별로 과부가 돼서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브랜던과 비밀 결혼했고 이후 남편보다 먼저 사망했다. 마거릿 튜더는 실제 역사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와 결혼해서 제임스 5세를 낳았다. 이후 제임스 4세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라스와 재혼해서 딸 마거릿 더글라스를 낳았고, 이 마거릿 더글라스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두번째 남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다. 이 혈연을 근거로 메리 여왕과 단리 경의 외아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획득하여 제임스 1세로 즉위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헨리 8세의 직계 후손이 끊겼기에 헨리 7세의 후손 중에서 계승자를 찾아야되는데 가장 연장자였던 마거릿 튜더의 계승권이 높았기 때문.[6] 역사적 순서도 많이 꼬여있다. 메리 튜더는 루이 12세와 결혼했는데 튜더스 시즌1 2회에서의 칼레에서의 조약에 나오는 프랑수아 1세는 루이 12세 다음 왕이다. 그러니까 이미 사별한 관계를 되살려 낸 걸 자매도 바꾸고 국가도 바꾸고 시점도 바꿔버린 것.[7] 이미 누나를 다 죽어가는 노인에게 시집보낸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마거릿도 약혼이 성사된 당시에 "사별해서 돌아오면 내가 원하는 남자랑 결혼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8] 헨리 8세가 이 사실을 알았지만 넘어갔을 가능성도 높다. 아내를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서 아내를 슬픔에 빠뜨린 것은 헨리 본인도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9] 하지만 바람을 한 번 폈다가 들켜서 캐서린에게 이것저것 빈다.[10] 자신의 명예를 걸었다며 반란 주동자의 처벌에 반대를 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주모자 처벌을 최소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왕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명령대로 가혹한 처벌을 하고 만다.[11] 찰스 자신이 바람을 폈어도 화만 낼 뿐 용서해주고 금슬좋게 살던 캐서린조차 잔혹한 반란 진압과 크롬웰 처형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도 온갖 정치모략에 넌더리를 내고있던지라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12] 다만 찰스가 죽은 이후 애인으로 들였던 브리짓은 캐서린에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등 불쌍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찰스의 아들이 인정했으니 어느 정도 대우는 받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