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더비 백작 토머스 스탠리 Thomas Stanley, 1st Earl of Derb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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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토머스 스탠리 Thomas Stanley |
출생 | 1435년경 |
잉글랜드 왕국 랭커셔 라솜 | |
사망 | 1504년 7월 29일 |
잉글랜드 왕국 랭커셔 라솜 | |
아버지 | 초대 스탠리 남작 토머스 스탠리 |
어머니 | 조앤 고스힐 |
형제 | 윌리엄, 존, 제임스, 엘리자베스, 마거릿, 캐서린 |
배우자 | 엘레노어 네빌 |
마거릿 보퍼트 | |
자녀 | 조지, 에드워드, 제임스, 토머스 등 |
직위 | 제2대 스탠리 남작, 초대 더비 백작, 맨 섬의 왕, 잉글랜드의 무관장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 사이를 오가며 영향력을 유지한 인물이다.2. 생애
초대 스탠리 남작 토머스 스탠리와 로버트 고스힐 경의 딸인 조앤 고스힐의 장남이다. 기록상에서는 1454년 헨리 6세의 시종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1459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맨 섬의 왕과 스탠리 남작위를 포함하여 아버지의 모든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 후 장미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지만,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1459년 9월, 그는 왕실로부터 제5대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셰와 합류하여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이 이끄는 요크군을 저지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의 첫번째 아내 엘레노어 네빌이 솔즈베리 백작의 딸이었기 때문에, 9월 23일 블로어 히스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후방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제임스 투셰가 패사한 뒤, 그는 리처드 네빌에게 축하 서신을 보냈지만 그의 편에 서는 건 거부했다.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조 편에서 싸웠지만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그 후 내전의 향방을 지켜보다가 1461년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서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군을 상대로 결정적으로 승리하자 에드워드 4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체스터 팔츠의 대법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470년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랭커스터파와 손잡고 에드워드 4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 때, 그는 에드워드 4세를 돕기를 거부하고 자기 영지에서 상황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고, 헨리 6세가 복위했을 때 충성을 서약하고 혼비 성을 점령했다. 하지만 1471년 에드워드 4세가 부르고뉴국의 공작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에 복귀하자 그의 편으로 돌아섰고, 워릭 백작을 물리치고 랭커스터파를 결정적으로 섬멸해 잉글랜드의 진정한 국왕이 된 에드워드 4세에 의해 무관장으로 선임되었다.
1482년, 토머스 스탠리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함께 에드워드 4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 후 초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의 외동딸이자 에드먼드 튜더와 헨리 스태퍼드 경의 미망인이며, 랭커스터 계열로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헨리 튜더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와 재혼했다. 1483년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리처드 3세는 버킹엄 공작의 반란을 진압한 뒤, 토머스 스탠리가 의붓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반란군과 내통했다고 의심해 감옥에 가뒀다. 토머스는 체포되는 동안 부상을 입었지만, 곧 풀려났고 리처드 3세의 신임을 회복해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484년 스코틀랜드에 사절로 파견되면서, 아들 조지 스탠리를 리처드 3세에게 인질로 넘겨야 했다.
1485년 8월 헨리 튜더가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고 펨브로크셔에 상륙하여 왕위에 도전했다. 리처드 3세는 노팅엄으로 가서 군대를 소집했다. 이때 토머스 스탠리는 영지로 가서 병력을 모으겠다고 요청해 리처드 3세의 허락을 받고 랭커셔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실군에 조속히 합류하라는 리처드 3세의 명령에, 자기가 '땀 흘리는 병'에 걸렸다며 거절했다. 한편, 헨리 튜더는 슈루즈베리에서 스태퍼드로 진군하여 토머스 스탠리의 동생 윌리엄 스탠리와 접촉한 뒤,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스태퍼드셔를 지나 와트링 스트리트를 따라 런던으로 진군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다수의 대포를 획득해 포병대를 구성할 수 있었다. 토머스 스탠리와 동생 윌리엄 스탠리는 가신들과 함께 헨리 튜더의 군대의 뒤를 천천히 추격했다. 이를 통해 헨리 튜더에게는 자신들이 그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리처드 3세에게는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든 헨리 튜더의 진격을 저지하려 한다고 믿도록 유도하려 했다.
1485년 8월 22일, 헨리 튜더와 리처드 3세는 보스워스 전투에서 맞붙었다. 이때 토머스 스탠리와 동생 윌리엄 스탠리는 3,000 장병을 이끌고 전장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평원에 대기했다. 리처드 3세는 스탠리 가문의 군대가 자기에게 좀처럼 가담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사절을 보내 당장 합류하라고 명령했고, 그러지 않으면 인질로 잡혀 있는 스트레인지 경 조지 스탠리가 살해될 거라고 위협했다. 그러자 토머스 스탠리는 이렇게 답했다.
"폐하, 저에게는 다른 아들들이 있습니다."
헨리 튜더 역시 토머스 스탠리에게 사절을 보내 어서 합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토머스는 적절한 시기에 가담하겠다는 답장을 보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세가 헨리 튜더 쪽으로 기울어지자, 윌리엄 스탠리가 1,000명을 이끌고 가세해 리처드 3세를 사살하는 데 기여했다. 헨리 7세는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한 뒤 1485년 10월 27일 토머스에게 더비 백작 작위를 수여했으며, 랭커스터 공국의 고위 궁내장관과 트렌트 강 북쪽의 삼림 관리인으로 선임했다. 그는 나중에 헨리 7세의 맏아들인 아서 튜더의 대부가 되었다.1495년, 동생 윌리엄 스탠리가 슈루즈버리의 리처드를 자칭한 퍼킨 워벡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긴급 체포 후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헨리 7세는 토머스에게 별다른 책임을 물지 않았다. 그 후 여생을 평온히 보내던 토머스는 1504년 7월 29일에 사망했다. 그는 맨 섬의 마지막 왕이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맨 섬의 영주라는 칭호를 썼다.
3. 가족
- 엘레노어 네빌(1438 ~ 1482):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엘리스 몬터규[1]의 딸.
- 조지 스탠리(1460 ~ 1503): 노킨의 스트레인지 남작. 아버지보다 1년 먼저 죽었고, 그의 아들인 토머스 스탠리가 제2대 더비 백작이자 맨 섬의 영주에 선임되었다.
- 에드워드 스탠리(1463 ~ 1523): 초대 몬티글 남작.
- 제임스 스탠리(1471 ~ 1515): 1506년부터 엘리 주교.
- 토머스 스탠리: 요절.
- 리처드 스탠리: 요절.
- 윌리엄 스탠리: 요절.
- 앤 스탠리: 요절.
- 제인 스탠리: 요절.
- 캐서린 스탠리: 요절.
- 마거릿 보퍼트(1443 ~ 1509): 초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의 외동딸. 토머스 스탠리와 결혼하기 전 존 드 라 폴, 초대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헨리 스태퍼드 경과 잇달아 결혼했다. 헨리 7세의 어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