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토머스 피츠제럴드 Thomas FitzGerald |
출생 | 1458년 |
아일랜드 영지 킬데어주 라카 | |
사망 | 1487년 6월 16일 (향년 28~29세) |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스토크 평원 | |
아버지 | 토머스 피츠제럴드 |
어머니 | 조앤 피츠제럴드 |
형제 | 제럴드, 엘레노어, 제임스 |
배우자 | 엘리자베스 프레스턴 |
자녀 | 모리스, 마거릿, 이사벨라 |
직위 | 아일랜드 대법관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아일랜드 영지의 대법관,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램버트 심넬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1458년경 제7대 킬데어 백작 토머스 피츠제럴드와 제6대 데스몬드 백작 제임스 피츠제럴드의 딸 조앤 피츠제럴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초대 고먼스턴 자작 로버트 프레스턴의 딸 엘리자베스 프레스턴과 결혼했다. 그는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모리스, 마거릿, 이사벨라를 낳았는데, 이중 마거릿이 개럿 웰즐리와 결혼했다. 마거릿과 개릿 웰즐리의 후손이 훗날 나폴레옹 전쟁에서 맹활약한 영국의 명장 아서 웰즐리이다. 토머스는 주로 킬데어 주 모나스터 레빈 인근의 라카에 거주했으며, 나중에 튜더 왕조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손들이 그의 영지를 유지했다.토머스는 1484년 초 리처드 3세에 의해 아일랜드 대법관에 선임되어 아일랜드 영지를 통치했다. 그러던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전사했다. 그 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7세는 토머스가 아일랜드 대법관으로서 통치하는 걸 용인했다. 하지만 그와 형인 제8대 킬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는 헨리 7세에 대한 충성심이 별로 없었고, 자신들과 가까운 요크 왕조의 부활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던 1487년 초, 자신을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이라고 주정한 램버트 심넬이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 프랜시스 러벨과 함께 요크의 마거릿이 지원해 준 2,000 가량의 독일 용병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그들은 아일랜드 귀족들에게 정당한 왕위 계승자의 등극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토머스는 형 제럴드와 함께 심넬을 열렬히 지지했고, 1487년 초 더블린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에서 열린 '에드워드 6세' 대관식이 참석했다. 그 후 토머스는 대법관 직을 사임하고, 약 4,500명의 잉글랜드-아일랜드 군인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모집했다.
1487년 5월, 토머스는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 프랜시스 러벨과 함께 램버트 심넬을 앞세워 잉글랜드로 진군했다. 그러나 6월 16일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참패했고, 토머스는 전사하고 램버트 심넬은 생포되었다. 그의 형제인 제럴드는 헨리 7세에게 사면받았다. 이후 피츠제럴드 가문은 50년 동안 아일랜드 정치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했지만, 헨리 8세의 아일랜드 정복전 이후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