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8대 킬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 Gerald FitzGerald, 8th Earl of Kildare | |
성명 | 제럴드 피츠제럴드 Gerald FitzGerald |
출생 | 1456년 |
아일랜드 영지 킬데어주 라카 | |
사망 | 1513년 9월 3일 (향년 56~57세) |
아일랜드 영지 킬데어주 라카 | |
아버지 | 토머스 피츠제럴드 |
어머니 | 조앤 피츠제럴드 |
형제 | 토머스, 엘레노어, 제임스 |
배우자 | 앨리슨 피츠유스타스, 엘리자베스 세인트 존 |
자녀 | 제럴드, 엘레노어, 앨리스, 마거릿, 앨리스, 제임스, 올리버, 리처드, 존, 월터 |
직위 | 제8대 킬데어 백작, 아일랜드 부총독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아일랜드 영지의 백작, 부총독. 장미 전쟁 시기 램버트 심넬의 반란에 가담했고, 반란이 실패한 후에도 직위를 그대로 유지해 아일랜드에서의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2. 생애
1456년경 제7대 킬데어 백작 토머스 피츠제럴드와 제6대 데스몬드 백작 제임스 피츠제럴드의 딸 조앤 피츠제럴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477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8대 킬데어 백작이 되었고, 같은 시기에 아일랜드 부총독이 되었다. 1481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는 그를 아일랜드 호국경으로 선임했다. 이후 그의 자리를 에드워드 4세의 이부 형제인 리처드 그레이로 교체하기 위해 그를 해임했다. 그러자 아일랜드 귀족들은 집단 항의 서한을 왕에게 보낸 뒤 의회를 해산했고, 에드워드 4세는 아일랜드를 다스리려면 제럴드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걸 깨닫고 원상태로 되돌렸다.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전사했다. 그 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7세는 토머스가 아일랜드 대법관으로서 통치하는 걸 용인했다. 하지만 그와 동생인 아일랜드 대법관 토머스 피츠제럴드는 헨리 7세에 대한 충성심이 별로 없었고, 자신들과 가까운 요크 왕조의 부활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던 1487년 초, 자신을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이라고 주정한 램버트 심넬이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 프랜시스 러벨과 함께 요크의 마거릿이 지원해 준 2,000 가량의 독일 용병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그들은 아일랜드 귀족들에게 정당한 왕위 계승자의 등극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제럴드는 동생 토머스와 함께 심넬을 열렬히 지지했고, 1487년 초, 더블린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에서 열린 '에드워드 6세' 대관식이 참석했다. 그 후 토머스는 대법관 직을 사임하고, 약 4,500명의 잉글랜드-아일랜드 군인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모집했다. 1487년 5월, 토머스는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 프랜시스 러벨과 함께 램버트 심넬을 앞세워 잉글랜드로 진군했다. 그러나 6월 16일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참패했고, 토머스는 전사하고 램버트 심넬은 생포되었다. 하지만 제럴드는 헨리 7세에게 사면받았다.
1491년, 에드워드 4세의 차남인 슈루즈버리의 리처드라고 자칭한 퍼킨 워벡이 아일랜드의 코크에 제럴드의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한 뒤, '리처드 4세'로 등극했다. 그러나 하지만 제럴드는 뒤늦게 토벌대를 구성한 뒤 반란군을 골웨이 전투에서 격파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실은 그가 진작에 상륙을 저지하지 않고 내버려뒀던 걸 수상하게 여겨 호국경 직위에서 해임하고, 잉글랜드 기사 에드워드 포이닝스를 그 자리에 앉혔다.
1494년, 제럴드는 아일랜드 북부 원정 도중에 에드워드 포이닝스로부터 오도넬 가문과 공모해 잉글랜드군을 축출하려 했다는 고발을 받았다. 이후 헨리 7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었고, 1494년 2월 잉글랜드로 압송된 뒤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이후 1496년 풀려났고, 엘리자베스 세인트 존과 재혼한 뒤, 장남 제럴드를 인질로 넘기는 대가로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1496년 9월 29일 드로이다에서 아일랜드 부총독으로 복위하고 헨리 7세에게 충성 선서를 다시 했다. 이후 그는 헨리 7세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
1500년, 제럴드는 코크 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시장을 교수형에 처했고, 1504년 8월 코나흐트의 노크도 전투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 1505년, 헨리 7세는 제럴드에게 킬링포드, 그린캐슬, 모른의 땅을 하사했다. 그는 이를 통해 1년에 150아일랜드 파운드의 수입을 올렸고,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1512년 클렌데보이의 오닐의 영토를 침공해 그를 붙잡은 후, 벨파스트를 점령했다. 이후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비셋 가문이 지배하던 엔트림 해안 협곡 영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1513년 8월, 오캐럴 가문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가 킬케아의 그리스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던 중 적의 습격을 받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는 킬데어로 이송된 뒤 1513년 9월 3일에 사망했다.
3. 가족
- 앨리슨 피츠유스타스: 초대 포틀레스터 남작 롤랜드 피츠유스터스의 딸.
- 제럴드 피츠제럴드(1487 ~ 1534): 제9대 킬데어 백작, 아일랜드 부총독. 1534년 헨리 8세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런던 탑에 갇혔다가, 그가 살해되었다는 잘못된 소문을 접한 그의 아들 토머스 피츠제럴드가 반란을 일으킨 뒤 자신에게 파문이 내려지자 1534년 9월 2일 런던 탑에서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 엘레노어 피츠제럴드: 제12대 카버리 공 도널 매카시 리흐의 부인.
- 앨리스 피츠제럴드: 초대 타이론 백작 콘 바카흐 오닐의 부인.
- 마거릿 피츠제럴드: 제8대 오몽드 백작 피어스 버틀러의 부인.
- 앨리스 피츠제럴드: 제8대 슬레인 남작이자 아일랜드 재무관 크리스토퍼 플레밍의 부인.
- 엘리자베스 세인트 존: 헨리 7세의 사촌인 리디아드 트레고즈의 기사 올리버 세인트 존의 딸.
- 제임스 피츠제럴드: 마조리 달시의 남편.
- 올리버 피츠제럴드
- 리처드 피츠제럴드: 제임스 마워드의 미망인 모드 달시의 남편.
- 존 피츠제럴드
- 월터 피츠제럴드:제5대 던세이니 남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