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19 19:53:56

스토크 필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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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크 필드 전투
영어: Battle of Stoke Field
시기
1487년 6월 16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이스트 스토크 평원
원인
헨리 7세의 집권에 대한 요크파 잔당의 반발
교전 세력
요크파 잔당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튜더 왕조 파일:튜더 왕조 문장.svg
지휘관
파일:Coat_of_arms_of_John_de_la_Pole_Earl_of_Lincoln.svg.png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
파일:Coat_of_Arms_of_Sir_Francis_Lovell,_1st_Viscount_Lovell,_KG.png 러벨 자작 프랜시스 러벨
토머스 피츠제럴드
마르틴 슈바르츠
파일:잉글랜드 국장(1413-1603).svg 헨리 7세
파일:Coat_of_Arms_of_John_de_Vere,_13th_Earl_of_Oxford.svg.png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파일:Coat_of_arms_of_Jasper_Tudor.svg.png 베드퍼드 공작 재스퍼 튜더
파일:Coat_of_arms_of_Sir_George_Talbot,_4th_Earl_of_Shrewsbury,_KG.png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
파일:Coat_of_arms_of_Sir_Rhys_ap_Thomas,_KG.png 리스 압 토머스
파일:Coat_of_arms_of_Sir_George_Stanley,_9th_Baron_Strange,_of_Knockyn,_KG.png 스트레인지 남작 조지 스탠리
파일:Coat_of_arms_of_Sir_Edward_Woodville,_Lord_Scales,_KG.png 스케일스 경 에드워드 우드빌
파일:Coat_of_arms_of_Sir_John_Savage,_KG.png 존 새비지
병력
8,000명 12,000명[1]
피해
4,000명 300~3,000명
결과
튜더 왕조군의 승리.
영향
요크파 잔당 괴멸.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87년 6월 16일, 잉글랜드 왕위 요구자 램버트 심넬을 앞세운 요크파 잔당이 헨리 7세의 왕실군에게 괴멸된 전투. 장미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간주되는 전투이다.

2. 배경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꺾고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 7세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요크파를 회유하는 동시에, 왕위 경쟁자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2]런던 탑에 감금했다. 1486년 4월,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의 헌신적인 추종자로서 헨리 7세에 대적했다가 패배한 뒤 콜체스터에 은거했던 러벨 자작 프랜시스 러벨이 요크셔에서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가 헨리 7세가 심어놓은 첩자에게 누설되자, 그는 요크에 행차한 헨리 7세에게 암살자를 보내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당국의 추적을 피해 퍼니스 펠스로 이동하여 반군 동지들과 합류한 뒤 플란데런 백국으로 망명하여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딸이자 에드워드 4세, 리처드 3세의 누이이며,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마망인인 요크의 마거릿 궁정에서 머물렀다.

그 후 마거릿과 그녀의 사위이자 독일왕막시밀리안 1세의 지원을 받은 요크파는 튜더 왕조를 전복하고 요크 왕조를 복원하기 위한 새로운 반란을 계획했다. 플란데런에 있던 프랜시스 러벨은 링컨 백작이며 리처드 3세의 외조카인 존 드 라 폴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작전을 모색했다. 그들은 런던 탑에 갇힌 12살된 워릭 백작 에드워드를 옹립하는 걸 모색했지만, 감시가 철저해서 그를 빼돌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에 그들은 램버트 심넬이라는 소년을 워릭 백작 리처드와 동일 인물로 내세우기로 했다. 그들은 아일랜드로 건너가 제8대 킬더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 아일랜드 대법관 토머스 피츠제럴드의 호응을 얻어낸 뒤, 1487년 5월 더블린의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램버트 심넬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요크파는 대중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런던 탑에 억류된 소년은 가짜라고 주장했다.

한편, 요크의 마거릿은 독일 용병대장 마르틴 슈바르츠를 고용했다. 마르틴 슈바르츠는 1,5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 잘 훈련된 란츠크네히트 장병들을 지휘했는데, 이들은 창병, 할버드병, 장검병, 석궁병, 그리고 포수들로 구성되었으며,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스위스인, 그리고 소수의 스코틀랜드인이 뒤섞였다. 그들의 규모는 작았지만, 최신 파이크 전투 기술을 훈련받았으며, 뛰어난 장비를 갖춘 전문 직업군인이었다. 그들은 1487년 5월 초에 여전히 요크파의 거점이었던 더블린으로 출항했다.

아일랜드에서는 지역 영주들이 '컨(kerns)' 이라 불리는 경무장 병사들을 조직했다. 이들은 열정적이고 용감했지만, 대부분 갑옷을 입지 않았고, 주로 단창과 장검으로 무장했다. 란츠크네이트가 도착한 뒤, 요크군은 여러 척의 배에 올라 잉글랜드 서부 해안으로 향했다. 6월 4일 퍼니스 인근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한 군대는 토머스 브로튼이 이끄는 추종자들과 합세한 뒤 동쪽으로 진군했다. 당시 요크군의 병력 규모는 8천 명에 달했으며,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과 프랜시스 러벨이 지휘했다. 링컨 백작과 러벨은 남쪽으로 진군을 계속하며 하루에 약 17마일(약 27km)을 이동했다. 6월 10일, 요크군은 브램햄 무어에 주둔했고, 친튜더군 400명이 태드캐스터 인근에 주둔했다. 러벨은 요크군 2,000명을 이끌고 적을 기습 공격해 몰아넀다.

이후 링컨 백작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지휘하는 적군을 따돌리기 위해 존 스크루프 경이 이끄는 분견대에게 6월 12일 요크 성벽을 공격했다가 노섬벌랜드 백작이 반격하려고 접근하면 즉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주력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계속 진군하다가 돈캐스터 외곽에서 스케일스 경 에드워드 우드빌이 이끄는 기병대와 마주쳐서 셔우드 숲에서 3일간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링컨 백작은 스케일스 경을 노팅엄으로 몰아냈고, 스케일스의 기병대는 주력군을 기다리기 위해 노팅엄에 머물렀다.

한편, 반란군이 램버트 심넬이라는 소년을 워릭 백작 에드워드라고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 7세는 진짜 워릭 백작을 런던 탑에서 끌어낸 뒤 런던에서 행진하게 해, 그가 죽었거나 탈출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였다. 그 후 군대를 소집한 헨리 7세는 6월 14일 노팅엄으로 가서 스케일스와 합류했고, 스트레인지 경 조지 스탠리도 가세했으며, 웨일스에서 헨리 7세의 주요 지지자였던 리스 압 토머스도 증원군을 이끌고 가세했다. 이제 헨리 7세는 12,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려 요크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적군보다 무장과 장비가 훨씬 좋았다. 6월 16일, 헨리 7세는 적군이 트렌트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뉴어크를 향해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이후 튜더군이 요크군을 따라잡으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487년 6월 16일 이른 아침, 링컨 백작, 프랜시스 러벨, 마르틴 슈바르츠는 헨리 7세의 군대가 신속하게 추격하고 있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을 따돌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들은 트렌트 강변 고지대에 위치한 이스트 스토크 마을 인근 능선에 진영을 세웠다. 중앙에는 란츠크네히트 용병대가 배치되었으며, 양익에는 잉글랜드-아일랜드 분견대가 배치되었고, 양측면에는 기바병과 대포가 포진했으며, 궁수대는 최전방에 섰다. 얼마 후 튜더군은 적군을 발견했지만, 이때 현장에 있던 이들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이끄는 선봉대 6천 명 뿐이었고, 헨리 7세와 나머지 군대는 여전히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옥스퍼드 백작은 즉시 언덕 기슭 맞은편에 전열을 배치하고, 하마 기사, 중기병, 궁수들을 소집해 우익을 형성하도록 했다. 요크군 수뇌부는 그 광경을 보고 능선에서 계속 버티는 것과 선봉대를 먼저 격파하고 뒤늦게 도착한 헨리 7세의 나머지 군대를 격파할지를 논의한 끝에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요크군은 능선 아래로 진군해 옥스퍼드 백작의 선봉대를 물리치려 했다. 옥스퍼드 백작은 장궁병들에게 집중 사격을 명령했고, 이 때문에 무장하지 않은 많은 아일랜드군이 대량으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은 3시간 넘게 진행되었는데, 옥스퍼드 백작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텼다. 그 사이 재스퍼 튜더가 지휘하는 튜더군이 가세하면서 전력이 점점 불어났고, 숙련된 장궁병들은 요크군 진영을 향해 일제 사격을 연일 퍼부었다. 이윽고 소모전에 지친 요크군 전선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옥스퍼드 백작은 돌격 명령을 내렸다. 무장 수준이 열악했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요크군은 이 돌격 한 방에 붕괴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추격병에게 대거 사살되었다. 이리하여 전투는 튜더군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4. 결과

요크군은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4,000명을 잃고 궤멸되었다. 상당수의 란츠크네히트는 전투에서 살아남아 수용소에 갇혔다가, 헨리 7세의 배려로 잉글랜드를 떠날 수 있었다.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마르틴 슈바르츠, 토머스 피츠제럴드 등은 전사했다. 프랜시스 러벨은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갔으나 이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가 그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안전 통행 허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서 스코틀랜드에 망명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후 그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튜더군의 피해는 기록마다 300~3,000명으로 다르게 기술되었다.

램버트 심넬은 스토크 필드 전투 후 전장에서 생포되었고, 런던으로 이송되었다. 헨리 7세는 심넬이 요크파 지도자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걸 인지하고 심넬을 살려줬을 뿐만 아니라, 왕실 주방에서 꼬챙이로 음식을 뒤집는 일을 맡겼고, 나중에는 매사냥꾼에 임명했다. 심넬을 지지했던 아일랜드 귀족들도 사면되었지만, 성직자들은 헨리 7세의 요청을 따른 교황청에 의해 파문되었다. 링컨 백작에게 심넬을 소개한 리처드 시몬즈는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석방되었고, 미스 주교 존 페인도 투옥되었다가 사면된 뒤 왕실의 총애를 회복했다.

헨리 7세는 승리를 기리기 위해 버럼 펄롱에 자신의 기치를 세웠다. 현재 이 자리에는 "1487년 6월 16일 스토크 전투 후 헨리 7세가 기치를 세웠던 자리에 버런드 덤불이 심어져 있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큰 돌 기념비가 있다. 그 후 1490년대에는 퍼킨 워벡이라는 또 다른 잉글랜드 왕위 요구자가 등장했고, 1497년 콘월 봉기가 발발하기도 했지만, 헨리 7세는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했고, 튜더 왕조는 이후로 100여 년간 잉글랜드를 지배했다.
[1] 실제로는 6,000명만 전투 가담.[2]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