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09:26:48

리처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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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6대 국왕
리처드 2세
Richard 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ichard_II_King_of_England.jpg
왕호 리처드 2세
(Richard II)
이름 보르도의 리처드
(Richard of Bordeaux)
출생 1367년 1월 6일
아키텐 공국 보르도
사망 1400년 2월 14일 (향년 33세)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폰트프랙트 성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377년 6월 22일 ~ 1399년 9월 30일
배우자 보헤미아의 안나 (1382년 결혼 / 1394년 사망)
발루아의 이자벨 (1396년 결혼)
아버지 흑태자 에드워드
어머니 켄트의 조앤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리처드 2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왕위 계승2.3. 즉위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2.4. 와트 타일러의 난2.5. 첫번째 결혼과 총신들2.6. 디스펜서 십자군2.7. 곤트의 존과의 갈등과 스코틀랜드 원정2.8. 프랑스의 스코틀랜드 파병과 마게이트 해전2.9. 청원파의 반란2.10. 안정된 정국2.11. 1차 아일랜드 원정2.12. 프랑스와의 협상과 리처드 2세의 재혼2.13. 청원파 숙청2.14. 볼링브로크와 모브레이의 추방2.15. 오판2.16. 몰락2.17. 최후
3. 평가4. 부인들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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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Richard II (리처드 2세)
프랑스어: Richard II (리샤르 2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1] 귀족들과 첨예한 갈등을 벌인 끝에 전제군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숙청을 단행했지만,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의 폐위는 장미 전쟁으로 이어질 잉글랜드 정치 격변의 단초로 작용했다.

2. 생애

2.1. 유년기

1367년 1월 6일 아키텐 공국의 중심지인 보르도 대주교 궁전[2]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자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를 이끌고 아키텐 공을 역임한 흑태자 에드워드였고, 어머니는 에드워드 1세의 막내아들인 초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의 딸인 켄트의 조앤이었다.

조앤은 1340년 14살 연상인 젠트리 출신의 토머스 홀랜드와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홀랜드가 전장으로 떠난 지 1년 후인 1341년 가족들의 권고에 따라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결혼했다. 하지만 1347년 토머스 홀랜드가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조앤과 결혼했던 사실을 알리며 조앤과 윌리엄 몬타구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는 청원을 했고, 1349년 11월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조앤은 홀랜드와 다시 결혼했다. 그 후 토머스 홀랜드가 1360년에 사망한 뒤 흑태자 에드워드의 청혼을 받았다.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 왕비는 조앤의 처지는 신분과 복잡한 과거사 때문에 이를 꺼렸지만, 에드워드는 자기 뜻을 끝까지 고집하면서 1361년 10월 10일 윈저 성에서 에드워드와 조앤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조앤은 토머스 홀랜드와의 사이에서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존 홀랜드, 조앤 홀랜드[3], 모드 홀랜드[4]를 낳았고, 흑태자 에드워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앙굴렘의 에드워드와 보르도의 리처드를 낳았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장남 에드워드를 무척 총애했지만, 1370년 9월 리모주 공방전을 치르고 보르도로 귀환했을 때 에드워드가 6살의 나이에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비탄에 잠겼다. 게다가 1367년 카스티야 원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질에 걸린 뒤 지속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1371년 1월 잉글랜드로 이주해 버크햄스테드 성에 은둔했다. 리처드는 아마도 1376년까지 버크햄스테드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리처드 왕자는 신체적 특성이 전사로 크기엔 좋지 않아서 아버지 에드워드의 실망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어떻게든 아들을 전사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강도 높은 신체 단련을 강요했고, 가정 교사로 하여금 아들에게 전쟁 기술을 가르치고 힘과 지구력을 키우게 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아버지가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에 빠져들었다. 특히 이복형제 토머스 홀랜드가 훌륭한 전사로서 명성을 날리고 아버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을 보고 더욱 더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2.2. 왕위 계승

1376년 6월 8일, 이질에 시달리던 아버지 에드워드가 사망했다. 아들보다 오래 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이때 이미 중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곧 사망할 것이 분명했다. 이로 인해 누가 왕위를 물려받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왕위 계승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 장남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어린 아들만 남겼을 때 다른 아들들이 왕위를 주장하는 게 가능했다. 에드워드 3세에게는 흑태자 에드워드 외에 6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둘째 아들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1368년에 사망했고 외동딸 필리파를 남겼다. 필리파의 남편인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왕실의 일원으로 간주되었으며, 왕위 계승 경쟁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경쟁자는 단연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인 곤트의 존이었다. 그는 랭커스터 공작으로서 잉글랜드 내에서 가장 많은 영지를 다스렸으며,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큰형 에드워드가 중병에 시달려서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던 1370년대에 국정을 총괄했다. 에드워드 3세의 다른 두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우드스톡의 토머스는 존에 비해 큰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곤트의 존이 조만간 조카를 제치고 잉글랜드 국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곤트의 존은 인기가 별로 없었다. 백년전쟁 지속을 원하는 여론과는 달리 프랑스 왕국과 어떻게든 평화 협약을 맺으려 하는 모습을 보여 반감을 샀고, 잉글랜드 성직자들과 심한 마찰을 벌이고 있던 존 위클리프를 옹호해 종교계의 지탄을 받았으며, 아버지의 정부인 앨리스 페러즈의 전횡을 방관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더 큰 비난을 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자기가 아직 살아있을 때 손자 리처드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로 마음먹었다. 1376년 11월 20일, 리처드 왕자는 웨일즈 왕자, 체스터 백작, 콘월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25일, 에드워드 3세는 성탄절 행사에서 리처드를 후계자로 선언하고 왕국의 모든 귀족, 기사, 주교들에게 리처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곤트의 존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거행된 성대한 잔치에서 모든 고문과 함께 리처드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왕좌의 상속자로 인정했다.

2.3. 즉위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

1377년 6월 21일, 에드워드 3세는 리치먼드 궁전에서 사망했고, 7월 16일 켄더베리 대주교 사이먼 서드베리의 주관하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리처드 2세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리처드 2세는 즉위 당시 10살의 소년이어서 스스로 통치할 수 없었다. 어머니 켄트의 조앤이 후견인이 되었고, 왕국은 공식적으로 12명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곤트의 존은 이 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헀다.

곤트의 존의 영지는 잉글랜드의 1/3을 차지했고, 125명의 기사와 132명의 종자를 상시 거느렸으며, 그의 궁전인 템즈 강의 사보이 궁은 리처드 2세가 살았던 궁전보다 더욱 화려했다. 존은 아버지 에드워드 3세, 큰형 에드워드와 함께 여러 전장에서 활약하면서 군사적 재능과 경험이 충만했다. 이렇듯 강대한 힘을 가진 그였기에, 원한다면 리처드 2세에게 충분히 도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큰형 에드워드를 진심으로 존경했던 그는 에드워드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축출하려는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켄트의 조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그녀가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걸 보장해줬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136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대대적인 공세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1360년 브레티니 협약으로 확보한 프랑스 내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고, 보르도에서 바욘 까지의 좁은 해안 지역 만이 잉글랜드의 통제를 받았다. 1375년 브뤼헤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2년간 휴전이 이어졌지만, 리처드 2세가 즉위한 직후인 1377년 7월 브뤼헤 휴전이 만료되자마자 프랑스 왕국의 공세가 재개되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함께 브르타뉴와 기옌에서 잉글랜드군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가론 강변의 베르주라크, 리부른, 생테밀리옹, 블라예를 공략했다.

여기에 프랑스 해군 제독 장 드 비엔은 120척에 달하는 전함을 이끌고 1377년부터 1380년까지 플리머스, 와이트 섬, 라이 등 잉글랜드 남부 해안과 10개의 잉글랜드 항구를 지속적으로 습격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런던은 여러 차례 적 함대의 습격에 대비하라는 경보를 발령해야 해 민심의 동요를 초래했으며, 잉글랜드와 가스코뉴, 플란데런 백국간의 물자 교류는 매우 악화되어 잉글랜드 정부의 재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일련의 공세로 인해 왕국의 위신이 실추되자, 1379년 하원에서 이에 반격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하기로 결의했고, 이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두세를 도입했다. 1380년에는 인두세가 3배로 늘어나면서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이로 인해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2.4. 와트 타일러의 난

1381년 봄부터 시작된 농민 봉기는 그 해 여름에 켄트,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햄프셔, 서머셋, 노샘프턴셔, 요크셔 등지로 확산했다. 이중 켄트 반란군은 지붕 수리공이었으며 과거에 전쟁에 투입된 적이 있었던 와트 타일러의 지휘하에 런던으로 진군하면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거주지를 약탈했다. 그들은 재무관 로버트 헤일스, 세금 징수관 존 레지의 처형을 요구했다. 이후 런던 동부 교외의 블랙히스에 도착한 반군은 농민들의 이동의 자유 허용, 코르비(Corvée: 지주의 농장에서 개인 장비를 가지고 일하는 부양 농민의 무료 강제 노동) 폐지, 1에이커 당 표준 임대료 4펜스 확립, 현물세를 현금세로 대체, 자유 무역 도입, 반군에 대한 사면 등을 요구했다.

당시 런던 탑에 살았던 14세의 리처드 2세는 그리니치에서 그들과 협상하기로 했다. 1381년 6월 13일, 그는 배를 타고 템즈 강을 건너려 했다. 그러나 장관들은 군중을 두려워 해 왕이 바지선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돌아오도록 했다. 이에 격분한 농민 반란군은 런던 교외를 황폐화시킨 후 런던 브리지를 건너 런던 시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곤트의 존의 뉴 탬플과 사보이 궁전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와 동시에, 잭 스트로우가 이끄는 에식스 반군과 헤러퍼드셔의 반군과 연합하여 런던에 도착한 뒤 하이버리와 밀 앤드를 점령했다.

6월 13일 저녁, 리처드 2세는 런던 탑 성벽 위에 올라 반군에게 진정하라고 연설하면서, 다음날 밀 앤드 공터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그는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와 함께 반군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왕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농노제를 폐지하고 농민들에게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읽었다. 리처드 2세는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히고 반군이 해산되기를 바라면서 런던 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런던 탑을 떠난 사이, 반군은 수비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물러난 덕분에 런던 탑을 손쉽게 접수하고 켄터베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총리 사이먼 테오발드, 재무장관 로버트 헤일스, 켄트에서 세금 징수를 담당했던 의회 집행관 존 레그 등 여러 장관을 잡은 뒤 타워 힐에서 참수했다. 이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런던 브리지에 전시했다. 조앤은 반군이 자기 방까지 침입해 위협하자 깜짝 놀라 플랙프라이어스의 베이나르 성으로 피신했고, 리처드 2세도 나중에 그곳으로 이동했다.

6월 15일, 리처드 2세는 켄트 반란군 지도자 와트 타일러를 만났다. 와트 타일러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귀족의 권력을 제거하고, 모든 주교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왕이 이 요구에 망설이다가 가능한 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지만, 와트 타일러는 왕이 성실하게 준수할 것 같지 않다고 여겨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이에 타일러가 왕에게 오만하게 군다고 여긴 왕의 호위병들이 타일러와 말다툼을 벌였다. 이때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가 타일러를 덮쳐서 말에서 끌어내려 죽였다. 농민 반란군은 눈앞에서 지도자가 살해당하자 격분해 위협적으로 다가가자, 리처드 2세가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나는 너희의 주군이다! 나를 따르라!"

농민 반란군은 왕을 차마 해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월워스가 군대를 모아 농민군을 포위했지만, 리처드 2세는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사면했다. 이후 리처드 2세는 윌리엄 월워스와 2명의 저명한 런던 시민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그 후 인두세가 폐지되었지만 농민 반란군의 다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리처드 2세는 6월 23일 에식스에서 자신이 한 약속을 확인하기를 거부했고,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 등이 반란군을 자발적으로 진압하는 걸 허용했으며, 7월 2일 체름스퍼드에서 사면령을 취소했다. 그는 존 볼을 포함한 반군 지도자 15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세인트 알반스 재판을 직접 주재했다. 다만 많은 반군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으며, 리처드 2세는 8월 30일 체포와 처형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2.5. 첫번째 결혼과 총신들

와트 타일러의 난이 진압된 후, 잉글랜드 당국은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에 맞서는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 지지를 천명했고,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이 힘을 합쳐 클레멘스 7세를 지원하는 프랑스 왕국을 압박하길 원한 우르바노 6세의 추천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딸인 보헤미아의 안나와의 결혼 동맹을 성립했다. 결혼식은 1382년 1월 14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성 스테판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리처드 2세는 막 15세가 되었고, 안나는 그보다 6개월 더 많았다. 안나 왕비의 대관식은 1월 22일에 거행되었다. 안나의 가족은 가난했기 때문에 지참금이 별로 주어지지 않았고, 안나 본인은 미인이 아니었지만, 리처드 2세는 고운 심성을 가진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안나 왕비는 잉글랜드 왕실의 풍토를 변화시켰다. 에드워드 3세의 통치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실에서는 궁정 예절이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고, 남성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여자는 남자를 충실히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안나 왕비가 보헤미아 왕국 출신 친족 및 측근들을 대거 끌고 온 이래로, 잉글랜드 왕실에서는 새련된 궁정 예법이 많이 도입되었다. 궁중에서 고급 식사가 제공되기 시작했고, 남성 패션에도 변화가 있었다. 또한 이전에는 왕의 옷은 단순하고 실용적이었지만, 이제는 보석으로 반드시 보완되는 우아한 남성 의류로 변모했다. 또한 리처드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기사도 문학 대신 사랑을 노래하는 시집 및 노래 모음집을 선호했으며, 제프리 초서 등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리처드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었으며, 초상화를 생전에 제작하게 한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리처드 2세의 이같은 모습은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당대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엄은 왕을 둘러싼 총신들은 "벨로나의 기사라기보다는 비너스의 기사였다"며, 왕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여성적인 매너를 채택했고, 사량과 같은 남성적인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밝혔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왕이 동성애자였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신빙성 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다만 리처드 2세가 총신들을 무척 아꼈던 것은 분명하다. 1381년 12월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했을 때, 리처드 2세는 상속인인 로저 모티머가 겨우 7살이라 막대한 영지를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상당한 영지를 총신들에게 분배했다. 이러한 행위는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었고, 총신들은 그 과정에서 막대한 영지를 챙길 수 있었다.

리처드 2세가 초기에 가장 아낀 인물은 즉위하기 전부터 친구 사이로 지냈던 토머스 모브레이였다. 모브레이는 먼저 시종관에 선임되었으며, 1383년 2월 12일에 노팅엄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그해 10월 26일 노팅엄 백작이라는 칭호로서 처음으로 왕실 의회에 소환되었다. 또한 같은 해 존 발리 경이 사망한 뒤 그를 대신해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2세는 나중에 그와 사이가 멀어졌는데, 이는 모브렝이가 리처드가 매우 싫어하는 인물인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 엘리자베스 피츠앨런과 결혼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이후 리처드 2세의 먼 친척이었던 제9대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가 토머스를 밀어내고 시종관에 선임된 후 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리처드 2세는 자신과 안나의 결혼을 성사시킨 마이클 드 라 폴도 굳건히 신임했다. 마이클은 1383년 잉글랜드 대법관으로 선임되었고, 1385년 8월 초대 서퍽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법관이 된 뒤 논란이 많은 행보를 보였다. 리처드 2세에게 숙부 곤트의 존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하니 어떻게든 깎아내려야 한다고 끊임없이 촉구해 왕실간의 불화가 심화되게 만들었으며, 리처드 2세가 스코틀랜드 원정에 전력을 기울이지 말고 프랑스와 화해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이렇다할 합의를 맺지 못했고, 수세에 몰린 전세를 바꾸기 위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과중한 특별세를 계속 부과해 민중의 분노를 샀다. 또한 리처드 2세의 가정 교사를 맡았던 기사 사이먼 벌리 역시 왕의 총애를 얻어 궁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6. 디스펜서 십자군

1378년 서방교회 대분열이 발발한 뒤 전 유럽이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와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 편으로 분열되었다. 잉글랜드는 우르바노 6세를 교황으로 인정했고, 프랑스는 클레멘스 7세를 받들었다. 1379년 8월, 프랑스 왕국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에 속한 헨트 직조공들이 자신들의 라이벌인 브뤼헤를 편애하고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3년간의 항전 끝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헨트 주민들은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들은 루이 2세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은 우르바노 6세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단을 토벌할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우르바노 6세는 플란데런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해듣고 클레멘스 7세를 추종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에게 십자군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의회와 상인들은 프랑스의 플란데런 침공으로 중단된 양모 수출이 이번 십자군 원정을 통해 재개될 수 있다고 여겨 호응했고, 의회 역시 부유한 플란데런 백국과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상당한 이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겨 찬성했다. 당시 리처드 2세는 삼촌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십자군을 운운하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헨리 주교의 십자군을 지원한다면 삼촌이 원정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보고 지지를 표했다. 또한 그는 1년 전 막대한 세금 부과에 반발한 농노들이 와트 타일러의 난을 일으킨 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십자군에 들어가는 비용은 교회가 전적으로 부담하니 꺼릴 게 없기도 했다.

1382년 12월 6일,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 전역에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 말에 헨리와 기사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클레멘스 7세를 숭배하는 이단을 토벌할 때까지 십자가를 지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에게 지급하던 전쟁 수행 보조금을 헨리에게 할당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383년 5월 칼레에 상륙한 뒤 프랑스군의 지배를 받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 플란데런의 여러 마을을 공략했으며, 5월 25일 루이 2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플란데런 연합군을 됭케르크 인근에서 격퇴했다.

잇따른 승리에 기세가 한껏 오른 기사들은 플란데런 백작과 프랑스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는 이프르 시를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이보다 앞서, 리처드 2세는 전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의 휘하에서 맹활약한 노장 윌리엄 뷰챔프가 이끄는 추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프랑스와 플란데런에 대한 공격을 미루라고 지시했다. 헨리는 왕의 명령에 따르려 했지만, 기사들이 이프르를 공략해야 한다고 계속 촉구하고 헨트 수뇌부 역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자, 그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1383년 6월 8일, 헨리의 십자군이 이프르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에 착수했다.(이프르 공방전) 하지만 이프르 주민들은 수비대장 얀 돌트르(Jan d'Oultre)의 지휘하에 농성 준비를 이미 완료했다. 도시 교외의 주거지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이때 나온 목재는 흙으로 된 성벽과 돌로 만들어진 성문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두 개의 도랑을 도시 주위에 파 두었고, 말뚝으로 강화된 높은 가시 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낮은 성벽의 방어를 보강했다.

십자군은 포위 첫날부터 사흘 동안 도시의 정문인 템플 게이트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성벽을 완전히 포위했고, 흙을 사용하여 외부 도랑을 메웠다. 포위 8일째인 6월 15일에 포병대를 동원해 방어 시설을 공격해 손상을 입혔지만, 수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버텼다. 십자군은 이후에도 수시로 도시를 공격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고, 포격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도시를 돕기 위해 인근에 군대를 배치한 루이 2세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수비대와 연락을 원활하게 주고받으면서 잉글랜드군을 앞뒤로 괴롭혔다.

8월 8일, 헨리는 헨트 동맹군에게 알리지 않고 철수했다. 헨트군은 이후에도 도시를 포위했지만 9월 10일 갈수록 불어나는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헨리와 기사 휴 칼블리는 프랑스로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다른 사령관들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병력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가기를 거부했다. 일부 십자군은 아예 전쟁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십자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년 왕 샤를 6세를 대동한 프랑스군이 8월 15일 아라스에서 소집된 뒤 플란데런으로 이동해 8월 말에 테루안에 이르자, 헨리는 그하블린느로 퇴각했다.

얼마 후 십자군이 점령했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이 차례로 프랑스군에 재정복되었고, 십자군이 플란데런에 마련한 마지막 거점인 그하블린느도 며칠 뒤 포위되었다. 헨리는 처음엔 항복을 거부하고 리처드 2세가 원군을 보내주기를 희망했지만, 리처드 2세가 프랑스와 정면 대결하기 싫어서 군대를 보내주지 않는데다 그하블린느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하겠다고 통보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제안했고,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헨리의 십자군은 10월 말까지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헨리는 잉글랜드에 돌아온 뒤 1383년 10월 26일에 소집된 의회에 소환되어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총리 마이클 드 라 폴은 그가 사전에 합의한 대로 칼레에 충분한 병력을 모집하지 않았으며, 군사 지도자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았고, 군대를 조기에 해산했다고 비난했다. 헨리는 이에 대응해 이프르에 충분한 병력이 모였고 지휘관을 잘 선택했으며, 왕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장군들이 이프르에서 철수한 뒤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로 도주하거나 명령에 불순종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재산이 압류되어 이번 십자군에 들어간 비용을 메꾸는 데 쓰였다.

2.7. 곤트의 존과의 갈등과 스코틀랜드 원정

리처드 2세의 총신인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와 노팅엄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 등 젊은 귀족들은 리처드 2세에게 강력한 권세를 지닌 곤트의 존이 언제든지 왕위를 노릴 거라며 항상 경계하라고 조언했다. 1384년 4월 솔즈베리에서 열린 의회에서, 카르멜회 수도사 존 라티머가 존을 반역자라고 고발했다. 그러자 리처드 2세는 즉시 존을 체포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곤트의 존은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입증했고, 리처드 2세의 이복형제인 존 홀랜드를 비롯한 기사 그룹이 존 라티머를 때려죽였다. 라티머가 이에 관련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역사가들은 로버트 드 베레가 조작된 혐의를 라티머에게 알려주고 고발하게 유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1385년 존이 의회에서 리처드 2세의 행실을 비판하면서 갈등이 다시 고조되었고, 존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존은 리처드 2세에게 그를 몰아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호소했지만, 리처드 2세는 존을 매우 불신했다. 이에 존은 심한 압박감을 느껴 잉글랜드를 떠나 카스티야 국왕이 되기 위한 원정을 떠나기로 했고, 왕실 고문들 역시 카스티야로의 군사 작전 비용이 리처드 2세가 얻게 될 더 큰 정치적 자유에 대한 대가로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1385년 10월 의회에서, 필요한 군자금 일부를 존에게 주기로 합의했다. 리처드 2세 역시 원정 비용으로 2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1386년 5월 9일, 존은 주앙 1세로부터 카스티야 국왕이 되도록 지원해주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그해 7월, 그는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플리머스에서 출항해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다.

한편, 잉글랜드 의회는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에 투입되어 잉글랜드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스코틀랜드 원정을 결의했다. 1385년 7월, 리처드 2세와 곤트의 존은 군대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내 프랑스군은 이에 맞서지 않고 프랑스로 철수했고, 리처드 2세는 에든버러에 입성한 후 몇달 간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귀환했다. 이때 이 원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잉글랜드군이 요크와 비숍스톤 사이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제2대 스태포드 백작 휴 드 스태퍼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랄프 드 스태퍼드가 모종의 일로 존 홀랜드와 다투던 중에 존 홀랜드의 궁수 중 한 명을 죽였다. 이후 랄프가 존 홀랜드에게 가서 사과하려 했을 때, 존 홀랜드가 검을 빼들어 랄프에게 칼을 꽂아 죽였다.

후계자를 허망하게 잃어버린 휴 드 스태퍼드는 리처드 2세에게 정의를 실현해달라고 요구했고, 리처드 2세는 존 홀랜드를 일반 범죄자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켄트의 조앤이 아들 리처드 2세를 찾아가서 자신의 아들이자 그의 이복 형인 존 홀랜드를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리처드 2세는 거부했다. 이에 절망한 그녀는 8월 8일에 갑작스럽게 쓰러져 사망했다. 그해 9월 14일, 리처드 2세는 존의 모든 재산을 압류했고, 존은 베벌리의 성 요한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1386년 2월, 리처드 2세는 존을 사면하기로 하고 모든 재산을 반환했다. 이후 존 홀랜드는 스태퍼드 백작에게 가서 사과해 용서를 받았고, 곤트의 존의 카스티야 원정에 함께 했다.

2.8. 프랑스의 스코틀랜드 파병과 마게이트 해전

1369년 샤를 5세가 전쟁을 재개한 이래, 프랑스 왕국은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가 빼앗아갔던 영토 대부분을 탈환했다. 그 후 프랑스 궁정에서는 이참에 잉글랜드까지 쳐들어가서 끝장을 내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1385년 5월, 장 드 비엔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5]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잉글랜드에 대항하던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 해 겨울 스코틀랜드군 4,000명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렌드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러나 뒤이은 잉글랜드군의 반격으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한 로우랜드 지방 대부분이 약탈당하자, 프랑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여긴 스코틀랜드는 장 드 비엔 등 프랑스 장성들을 강제로 억류한 뒤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길 정도로 격분했다. 장 드 비엔은 나중에 프랑스 왕실이 돈을 보내준 덕분에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샤를 6세 궁정이 샤를 5세 시절과는 달리 해군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자 크게 실망하여 오스만 술탄국에 맞서 십자군을 결성한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에 가담했다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1386년 10월,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자국을 공격한 프랑스에 응징하기 위해 프랑스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에 상륙할 병력과 선박을 모으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들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 수년간 전쟁을 치렀다가 1385년 투르네 협약을 맺고 그에게 귀순한 플란데런인들이 호담공 필리프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잉글랜드군이 상륙하면 즉시 호응하여 친잉글랜드 정권을 세우리라 기대했다. 함대 사령관으로는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 선임되었다.

1387년 3월 16일, 아룬델 백작은 센드위치 항에서 60척의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프랑스 함대와 카스티야 함대가 지난 가을부터 슬로이스 항에 3만 명의 군대와 1,200척의 함대를 집결시키고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이들을 기습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그 계획은 호담공 필리프가 갑작스런 병환에 걸리는 바람에 취소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선박이 슬로이스에 머물면서 무역 선박을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387년 3월 24일 출항한 아룬델 백작의 잉글랜드 함대는 얼마 후 마게이트 앞바다에서 플란데런 선박과 카스티야 선박 분견대가 포함된 프랑스 함대가 호송하는 와인 수송선단을 발견했다. 잉글랜드 함대가 이들을 향해 달려들자, 수많은 플란데런 선박이 도주했고 다른 선박들은 맞서 싸우려 했으나 이내 압도되어 슬로이스 항으로 패주했다. 아룬델 백작은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한 끝에 3월 25일 슬로이스 항구 인근 카잔트 섬 앞바다에서 적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슬로이스 항구 외곽 정박지에 세워진 7척의 배를 추가로 노획하고 슬로이스 항구에 정박한 적선 11척을 불태우거나 침몰시켰다.

그 후 잉글랜드 함대는 슬로이스 항을 2주 이상 봉쇄하면서 항구에 접근하는 선박들의 물품을 탈취하거나 선박 자체를 나포했다. 하지만 아룬델 백작은 항구를 점령하는 대신 해변에 육군을 상륙시킨 후 해안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이들을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플란데런인들이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를 상대로 봉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항구를 봉쇄한 잉글랜드군 내에서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이가 죽어가자 잉글랜드로 귀환하기로 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이 원정에서 수십척의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불태웠고, 무거운 짐을 실은 카스티야 선박 3척을 포함해 68척의 선박을 나포했다. 이렇듯 해군이 마게이트 해전에서 많은 손실을 보자,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2.9. 청원파의 반란

1386년 9월 1일, 마이클 드 라 폴 대법관은 잉글랜드를 위협하는 프랑스의 침공 가능성에 맞서 방어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전례없이 많은 보조금을 헌납하라는 요구를 하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1381년에 전쟁세를 과중하게 부과했다가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심각한 혼란이 벌어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요구를 따르길 요구했다. 그들은 대법관과 더럼 주교 겸 재무장관인 존 포드햄이 예산을 잘못된 곳에 낭비하고 막대한 자금을 빼돌리고 있다고 비난했고,제11대 아룬델 백작인 리처드 피츠앨런이 포함된 청원파가 곧 결성되어 왕에게 총리와 재무장관의 해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리처드 2세는 "요리사 한 명도 부엌에서 쫓아내지 않겠다"며 의회의 요구를 거부했고, 스트민스터를 떠나 켄트의 엘섬 궁전으로 이동했다. 이후 리처드 2세의 숙부인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일리 주교 토머스 아룬델이 하원 대표로 선임된 뒤 엘섬 궁전으로 파견되었다. 두 사람은 왕에게 의회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켰고, 사악한 왕실 고문들이 왕국에 피해를 끼쳤다고 비판했다. 특히 토머스는 왕이 법과 영주의 현명한 조언을 따르기를 꺼리며, 사악한 조언자들에 의해 자신이 백성으로부터 소외되도록 허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러면 의회가 그를 해임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의회가 왕을 해임하는 건 법률상 불가능했지만, 리처드 2세의 증조부인 에드워드 2세가 1327년에 의회의 결의로 인해 폐위된 전례가 있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10월 24일에 의회의 요구를 수락해 마이클 드 라 폴과 존 포드햄을 해임했다. 그 후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영주 중에서 선임된 판사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의회는 글로스터 공작을 포함한 14명의 귀족으로 구성된왕실 재정 조사 위원회를 설립해 11월 19일부터 1년 동안 정부를 감독했다. 위원회는 왕실 재정을 통제하고 크고 작은 인장을 관리하는 등 왕권을 상당부분 침해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왕실 보석의 관리인이자 자신과 가까운 사이인 존 뷰챔프를 초대 카더민스터 남작에 선임하고 왕실 청지기로 임명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대귀족들은 일개 에스콰이어였던 자가 자기들과 같은 귀족이 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386년 말, 리처드 2세는 더블린 후작이며 자신과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세간의 의심을 받던 로버트 드 베레를 아일랜드 공작에 선임했다. 이로써 로버트 드 베레는 그로스몬트의 헨리에 이어 잉글랜드의 왕족 출신이 아닌 공작이 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왕족 및 대귀족들은 그에 대한 왕의 총애가 너무 과하다고 여겼다. 1387년, 로버트는 리처드 2세의 왕비인 보헤미아의 안나의 시녀인 아그네스 드 론체크로나와 불륜을 맺은 끝에 필리파와 이혼을 감행하고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필리파의 삼촌이었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그의 이 처사에 분노했고, 귀족들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2세는 그를 지지했고, 교황청에 거짓 증거를 보내 그와 필리파간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게 해줬다.

1387년, 리처드 2세가 반격을 시도했다. 리처드 2세는 의회를 폐쇄하고 전국의 모든 카운티를 방문해 지원을 구하려 했다. 이때 그는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순회 판사들로부터 군주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은 불법이며, 이를 저지른 자들을 반역자로 간주할 수 있다는 조언을 받았다. 1387년 11월 이전에 런던으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려 하면서 왕권에 간섭하는 강력한 귀족 집단인 청원파의 지도자 리처드 피츠앨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 피츠앨런은 이에 맞서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함께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총신들을 타도하겠다며 군대를 일으켰다. 토머스 아룬델은 형과 왕을 중재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87년 11월 14일,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 그리고 제5대 모브레이 남작 토머스 모브레이로 구성된 청원파 5인이 마이클 드 라 폴, 아일랜드 공작 로버트 드 베레,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 대법원장 로버트 트레실리안, 전임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 등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고발하는 글을 왕의 사절단에게 제출했다. 이에 왕이 보낸 사절들은 왕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영주들을 웨스트민스터로 초대했다.

11월 17일, 청원파는 웨스트민스터 홀 에서 국왕을 만났다. 그들은 군대를 해산하길 거부하고, 왕이 총신들을 체포하고 의회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을 요구했다. 왕은 이에 동의하고 1388년 2월 3일에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총신들의 재판을 준비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으며, 의회에 모든 사람에게 불화를 잊을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발부했다. 이에 청원파는 왕이 자신들을 속였다고 여기고 군대를 일으켰다.

1387년 12월 19일 옥스퍼드셔의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로버트 드 베레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이끄는 4,500 병력에게 참패한 뒤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이 이끄는 반군이 런던에 접근하자,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으로 피신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1388년 2월 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서 청원파 5인은 왕의 총신들을 심판했다. 이들은 총 39개의 혐의를 낭독했는데, 그 내용은 왕의 미숙함을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법을 위반하고, 개인의 부를 위해 영향력을 사용하고, 또한 왕이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 결과 모든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8명이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이때 로버트 드 베레와 로버트 드 라 폴은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브레브레와 트레실리안은 처형되었다.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은 성직자로서 목숨을 건졌지만 영지와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때 왕의 가정 교사였으며 보헤미아의 안나 여왕에게도 신임받던 기사 사이먼 벌리 역시 권력 남용을 일삼아 몇년 만에 연간 수입이 20파운드에서 3천 파운드로 급증했으며, 부패한 사법 시스템을 만들었고, 심지어 도버를 프랑스에 매각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의회는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뒤 교수척장분지형을 선고했다. 안나 왕비가 사이먼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청원파는 이를 묵살했다. 리처드 2세는 그가 사형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단지 처벌을 간단한 참수형으로 대체하는 선에 그쳤다. 결국 사이먼은 1388년 5월 5일에 양팔에 수갑이 묶인 채 런던 전역을 순회한 뒤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다.

2.10. 안정된 정국

청원파는 리처드 2세를 협박해 총신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권세를 쥐었지만, 1388년 8월 5일 스코틀랜드군이 제임스 더글러스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해 오터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아들인 헨리 퍼시를 사로잡은 사건이 벌어진 후 위세가 약화되었다.

1389년 5월 3일, 당시 22세였던 리처드 2세는 자신이 이미 성인이 되었으며 젊었을 때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국가를 통치할 준비가 되었다고 의회에 알렸다. 청원파는 자기들이 전권을 계속 누리기엔 여론이 좋지 않다는 걸 인식하고, 왕이 어느 정도 독립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로 했다. 다만 리처드 2세는 여전히 윈체스터 주교이자 총리 윌리엄 위컴, 엑서터 주교이자 재무관인 토머스 드 브란팅햄,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에드먼드 스태퍼드가 주도하는 의회를 통해 나라를 통치해야 했다.

1389년 11월 리처드 2세는 카스티야 원정을 실패한 뒤 아키텐에 있던 삼촌 곤트의 존을 불러들였다. 청원파 역시 정치적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을 입증한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해 12월 런던에 도착한 존은 귀족들에게 화합을 이루라고 촉구했고,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의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 본보기를 보였다. 리처드 2세 역시 존에게 많은 보조금과 특권을 제공해 삼촌의 뜻을 지지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또한 존과 그의 형제들의 동의 없이 왕실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칙령이 선포되었다. 이후 정국은 안정되었고, 청원파의 단결력은 약화되었다. 토머스 뷰챔프는 자기 영지로 은퇴했으며, 토머스 모브레이와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와 화해한 후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은 이전의 입장을 이어갔지만, 서로 크고 작은 마찰을 벌였다.

1393년 체셔에서 곤트의 존에 대한 반란이 발발했고, 뒤이어 요크셔로 확산되었다. 당시 리처드 피츠앨런은 근처에 있었지만 반란을 진압하는 걸 전혀 돕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으려는 곤트의 존의 정책에 대해 불만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394년 1월, 리처드 피츠앨런은 의회에서 곤트의 존이 왕과 왕실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존은 아룬델 백작이 반군을 선동했으면서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며 반박했다. 리처드 2세가 이를 문제삼자, 리처드 피츠앨런은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 이후 청원파 인사들은 분란을 일삼는 리처드 피츠앨런을 외면했다.

1394년 6월 7일, 안나 왕비가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왕비에게 강한 애착을 갖고 있던 리처드 2세는 몹시 슬퍼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으며, 안나가 사망한 쉰 궁전 일부를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리처드 피츠앨런은 장례식에 늦었고, 도착하자마자 일찍 떠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리처드 2세는 이를 모욕으로 여기고 지팡이로 리처드 피츠앨런을 세게 친 뒤 체포해 런던 탑에서 몇 달을 보내게 했다. 이후 리처드 피츠앨런은 예의바르게 행동하겠다고 맹세하고 보석금 4만 파운드를 지불한 후에야 풀려났다.

2.11. 1차 아일랜드 원정

1394년, 아일랜드 현지인들의 봉기로 인해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력이 상실될 위기에 봉착했다. 리처드 2세는 처음엔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아일랜드 총독으로 세워서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게 하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 그는 삼촌인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를 호국경으로 세워서 자기가 떠난 동안 잉글랜드를 지키게 한 뒤, 1394년 9월 우드스톡의 토머스,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러틀랜드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 이복형제 존 홀랜드, 토머스 모브레이 등과 함께 아일랜드로 출진했다.

1394년 10월 2일 워터퍼드에 상륙한 리처드 2세는 더블린으로 진군하면서 몇 차례 사소한 교전을 빼면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리처드 2세는 더블린에 도착한 뒤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지도자들은 리처드 2세를 알현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자신의 땅에 대한 권리를 확인받았다. 4명의 아일랜드 왕들도 모두 도착했으며, 리처드 2세는 이들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그들은 리처드 2세가 잉글랜드식 예절을 배우고 전통적인 킬트 대신 잉글랜드식 바지를 입으라고 명령한 것을 내심 껄끄러워하면서도 일단 용인했다. 1935년 5월 1일, 리처드 2세는 로저 모티머를 아일랜드 총독으로 세우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2.12. 프랑스와의 협상과 리처드 2세의 재혼

파일:Richard and Isabella on their wedding day in 1396.jpg

1391년 5월, 칼레에서 곤트의 존이 잉글랜드 대표 자격으로 프랑스 사절단과 접촉했다. 그리고 1392년 3월 아미앵에서 존이 다시 사절단과 접견해 2달간 협상했다. 이때 프랑스 사절단은 존과 그의 후계자들이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잉글랜드 내에서 이에 불만을 토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그럼에도 1393년 3월부터 6월까지 롤링햄에서 새로운 협상이 이뤄졌고, 그 결과 리처드 2세가 프랑스 국왕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하되, 상당한 영토를 반환받고, 아키텐 공국의 최종 지위는 중재 법정에 의해 결정한다는 내용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 합의는 잉글랜드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존은 1394년 3월부터 5월까지 롤링햄에서 추가 협상을 벌였지만 교착 상태를 해결할 방안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1394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오스만 술탄국에 맞서 헝가리 왕국을 구원할 십자군 원정을 준비했다. 이때 잉글랜드 측도 호응해 많은 기사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프랑스 왕실은 리처드 2세에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어린 딸 이자벨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고, 주권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니 종전은 어렵겠지만 장기 휴전을 대신 맺자고 제안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동의했고, 1396년 3월 파리에서 리처드 2세와 이자벨의 약혼과 28년간의 장기 휴전이 체결되었다.

1396년 10월, 칼레 시 인근의 국경지대에서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의 회담이 열렸다. 이때 이자벨 공주가 리처드 2세에게 인도되었고, 11월 1일 칼레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리처드 2세는 30세였고, 이자벨 공주는 7세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주민들은 오랜 적수이며 대립교황을 따르는 프랑스와 결혼 협약을 맺은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여기에 샤를 6세는 리처드 2세가 복종해야 할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리처드를 돕고 지원하며, 그의 침해에 맞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자, 잉글랜드 영주들은 리처드 2세가 장차 프랑스군을 불러 조금이라도 반항하려는 영주들을 제압하려 들까 두려워했다. 특히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은 리처드와 이자벨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곤트의 존은 리처드를 지지했다. 그 결과 이자벨의 결혼은 의회의 승인을 얻었고, 이자벨은 1397년 1월에 잉글랜드 왕비로 즉위했다.

2.13. 청원파 숙청

1397년 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2년만에 소집되었다. 리처드 2세는 지난 번에 샤를 6세와 맺었던 협약에 따라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길 바랐지만,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그해 2월 1일, 서기 토머스 헉슬리가 제출한 청원서가 의회에 게재되었다. 그는 이 청원서에서 왕실의 막대한 지출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분노했고, 왕의 지위와 특권에 악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시도를 반역죄로 분류하도록 의원들에게 강요해 승인을 얻어냈다. 이후 리처드 2세의 법안은 소급 적용되었고, 토머스 헉슬리는 2월 7일에 처형되었다.

1397년 3월,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가 1396년 10월에 맺었던 조약의 세부 내용이 공개되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2만 파운드를 받고 브레스트 시를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음에는 칼레를 양도하려 할 거라는 뜬소문이 돌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브레스트 주둔군은 런던 거리에서 자국의 영토를 프랑스에게 넘겨버린 국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반 프랑스파 귀족들 역시 시위대를 지지하며 국왕에게 항의했다. 특히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은 왕이 수많은 희생을 치러가며 얻어낸 영토를 무단으로 넘겨줬다며 비난했다. 이후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 그리고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등이 리처드 2세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느 소문이 퍼졌다. 이에 리처드 2세는 소문의 진위와 상관없이 이들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1397년 7월 10일, 리처드 2세는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 토머스 뷰챔프를 왕실 연회에 초대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은 초대를 거절했지만, 토머스 뷰챔프는 참석했다. 리처드 2세는 연회가 끝난 직후 토머스 뷰챔프를 체포해 런던 탑에 투옥했다.[6] 의회 보고서에 제시된 바에 따르면, 토머스 뷰챔프는 엑서터 주교인 에드먼드 드 스태퍼드의 집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리처드 2세는 토머스 뷰챔프를 체포한 지 몇 주 후 리처드 피츠앨런 체포령을 내렸다. 피츠앨런은 처음에 맞서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리처드 2세에게 항복했다. 리처드 2세는 피츠앨런을 화이트 섬의 카리스브룩 성으로 보냈다. 이후 자신의 이복형인 헌딩턴 백작 존 해롤드, 조카인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를 포함한 수행원들을 이끌고 밤에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머물고 있던 에섹스의 플레시 성으로 달려갔다. 토머스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리처드 2세는 9년전에 안나 왕비가 사이먼 벌리를 살려달라고 호소한 걸 매몰차게 거부하지 않았느냐며 거부했고, 토머스를 체포한 뒤 칼레로 보냈다.

1397년 9월 17일, 곤트의 존이 주관하는 의회가 개최되어 세 사람의 범죄를 심판했다. 리처드 피츠앨런은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졌고, 칼레 감옥으로 보내졌던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9월 8일에 피살되었다. 세번째 피고인인 토머스 뷰챔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왕 앞에서 울부짖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 역시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리처드 2세는 형량을 감경해 맨 섬으로 평생 유배 보내도록 했다. 한편,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 역시 1388년에 청원자들을 도와 왕에게 불명예를 안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리처드 2세는 앉으라는 명령을 손짓으로 간접적으로 내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변호하는 걸 그만둬야 했다. 결국 토머스 아룬델은 유죄 판결을 받고 캔터베리 대주교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그가 가지고 있던 교회 본당은 압수되었다. 이에 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를 찾아가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보니파시오 9세는 처음에는 그를 도우려 했지만, 나중에 입장을 바꿔 요크 학장 로저 윌든을 새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토머스 아룬델의 해임을 승인했다.

리처드 2세는 숙청을 완료한 뒤 우드스톡의 토머스, 토머스 뷰챔프, 리처드 피츠앨런, 토머스 아룬델의 영지와 재산을 추종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이전에 반란에 가담했던 것을 용서받고 서머셋 공작 칭호를 수여했으며, 또다른 전 청원인인 토머스 모브레이는 노퍽 공작에 선임되었고, 존 홀랜드는 서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오말레 공작에 선임했다. 또한 체셔 카운티와 웨일즈의 여러 아룬델 백작 영지들은 왕실에 귀속되었다. 의회는 9월 30일에 리처드 2세의 모든 결정을 승인하고 해산했다.

2.14. 볼링브로크와 모브레이의 추방

1398년 1월 27일, 의회는 슈루즈버리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1388년 청원파가 리처드 2세에게 강요했던 모든 결정이 취소되었다. 이리하여 청원파가 주도한 의회에서 숙청된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서퍽 백작 칭호는 마이클 드 라 폴의 상속인에게 반환되었다. 사흘 후인 1월 30일,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토머스 모브레이가 청원파의 반란에 가담한 적이 있었으며, 보복을 두려워해 왕실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18명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선임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1398년 4월 29일 윈저 성에서 결성되었고, 그곳에서 헨리와 모브레이가 조우했다. 노퍽 공작은 자신이 청원파에 가담한 일은 이미 왕에게 사면받았는데, 이제와서 왕에 대한 음모를 꾸밀 리 없다며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헨리는 노퍽 공작이 왕에게 나쁜 조언을 제공하고 글로스터 공작을 암살한 것을 포함해 왕국의 많은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결투 재판을 통해 진위를 밝히겠다고 제안했다. 국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결투 재판은 9월 17일 코벤트리에서 열리기로 했다.

1398년 9월 17일, 잉글랜드 각지에서 몰려든 기사, 시민, 숙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투 재판이 열렸다. 대중은 환호로 두 공작을 맞이했다. 이때 왕이 돌연 개입해 지팡이를 던져 결투를 중단하게 했다. 이 재판은 전 유럽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노퍽 공작이 승리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 글로스터 공작 살해 문제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헨리가 승리하면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정적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왕은 두 공작 모두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노퍽 공작은 평생, 헨리는 10년동안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15. 오판

1399년 초, 리처드 2세는 400명에 달하는 체셔 궁수들과 함께 잉글래드 전역을 여행했다. 그가 여러 지역에서 지역 기사와 종자들을 끌어들이면서, 수행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로 인해 그가 들리는 도시와 마을들은 이들을 대접하느라 막대한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리처드 2세는 사치에 탐닉했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원파의 반란에 연루되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사면해주는 대가로 돈을 헌납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런던을 포함한 17개 카운티에 1,000파운드를 요구했으며, 공동체와 개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돈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그 결과, 그는 1399년 5월경에 런던 시민으로부터 6,570 파운드, 여러 교회로부터 5,550 파운드, 개인 채권자로부터 1,220 파운드 가량의 자금을 갈취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귀족 뿐만 아니라 대다수 민중의 미움을 받았다.

그러던 1399년 2월 3일, 곤트의 존이 레스터 성에서 병사했다. 그는 아들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추방되자 실의에 빠져 레스터 성에 은둔했지만, 리처드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곤트의 존은 죽기 전에 왕이 아들을 용서해주고 헨리가 유산을 물려받게 해달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이를 묵살했고, 랭커스터 가의 영지를 몰수한 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귀족들인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 서리 공작 토머스 홀랜드, 오말레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에게 분배했다. 또한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적용된 10년 추방형을 종신 추방형으로 변경했으며, 앞으로 왕에게 대항하려는 모든 시도를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칙령을 내렸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왕의 이러한 조치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고, 자신들도 언젠가 랭커스터 공작 가문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1399년 2명의 아일랜드 왕이 반란을 일으키고 아일랜드 총독 로저 모티머가 피살당했다. 이 소식을 접한 리처드 2세는 지난날 아일랜드 원정을 떠나서 권위를 드높였던 좋은 기억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아일랜드로 출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측근들은 국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그가 부재한 틈을 타 반란을 꾀할 수도 있다며 만류했지만, 리처드 2세는 묵살했다. 그는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를 호국경으로 세우고, 에드먼드 스태퍼드 총리, 윌리엄 르 스크루프 재무장관, 대인새관 리처드 클리퍼드 등이 에드먼드를 보좌하게 한 뒤, 1399년 5월 존 홀랜드, 토머스 홀랜드, 노리치의 에드워드,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 등과 함께 아일랜드로 출진했다.

그러나 첫번째 원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조기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전면전을 벌이길 거부하고 유격전을 벌여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다. 리처드 2세는 더블린에 도착한 뒤 아일랜드 반란군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단 워터퍼드로 이동한 뒤 전력을 재정비해 반란군을 향한 공세를 벌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2.16. 몰락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원정을 떠났을 무렵,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파리에서 9개월간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리처드 2세에게 처형된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상속인인 토머스 피츠앨런과 전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과 함께 했다. 그들은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 때를 틈타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6월 말, 헨리 일행은 볼로뉴에서 3척의 배에 300명의 추종자들을 태운 뒤 출항했다. 그들은 노스 요크셔의 레이블카로 항해했다. 이 땅은 랭커스터 가문의 소유였기에, 헨리는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레이븐스퍼에 상륙한 뒤 자신을 랭커스터 공작이라 칭하며 부당하게 몰수된 영지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이에 랭커스터 가문을 지지하던 귀족 및 기사들이 대거 가담했으며, 잉글랜드 북부의 강력한 거물인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도 뒤따라 가담했다. 이때 헨리는 돈캐스터에서 자신의 상속 재산, 즉 렝커스터 공국과 보훈의 영지를 반환받는 데 전념할 뿐이며, 다른 것은 노리지 않는다고 서약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이런 서약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며, 훗날 퍼시 가문이 헨리 4세를 가리켜 "위증에 의지한 찬탈자"라고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하고자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일랜드의 워터퍼드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던 리처드 2세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자 측근들을 모아놓고 조언을 요청했다. 이때 오말레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가 일부 부대를 육지로 먼저 보내고, 왕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뒤따라 가라고 제안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의 지휘하에 일부 병력을 노스 웨일즈로 보냈고, 7월 19일에 나머지 군대와 함께 사우스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이후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리처드 2세와 에드워드는 솔즈베리 백작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솔즈베리 백작의 군대는 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흩어졌다. 한편, 리처드 2세로부터 호국경에 선임되었던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군대를 일으켜 헨리를 치러 가던 중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해 7월 27일 버클리에서 헨리에게 항복했다.

1399년 8월, 리처드 2세는 군대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콘위 성에 이르렀다. 그는 체스터로 가서 반역자 헨리에 맞설 병력을 모집하려 했지만, 얼마 후 체스터가 8월 11일에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노리치의 에드워드를 비롯한 리처드 2세의 지지자 다수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넘어갔고, 군대는 흩어졌다. 그는 아일랜드로 후퇴하거나 프랑스로 망명할 수 있는 배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가지 않고 존 홀랜드, 토머스 홀랜드 등 얼마 안 남은 이들과 함께 콘위 성에서 며칠간 머물었다.

이때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토머스 아룬델이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특사로 선임되어 콘위 성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반란을 일으킨 걸 후회하며, 자신이 받을 자격이 있는 영지를 돌려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리처드 2세 본인이 지지자 5명과 함께 의회에 출두해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살해한 혐의에 대해 답변해야 하며, 왕실 재산은 유지될 거라고 덧붙였다. 리처드 2세는 다소 망설이다가 8월 14일에 성을 떠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 일행은 도중에 헨리 퍼시가 숨겨놓은 병사들에게 체포되었고, 플린트 성으로 끌러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가 과거에 저지른 행적을 고려할 때 왕으로 있도록 내버려둔다면 언젠가 복수하려 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겼다. 그는 9월 말에 리처드 2세를 런던으로 이송해 런던 탑에 가둬놓고 갖은 압력을 가했다. 결국 1399년 9월 29일, 리처드 2세는 많은 증인 앞에서 왕위를 양위하는 조서에 서명한 후 왕관을 땅에 내려놓았다. 9월 30일, 의회는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지시에 따라 리처드 2세가 서명한 명령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는 왕의 모든 범죄를 나열한 문서를 낭독하면서, 리처드 2세를 폐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2세는 자신을 변호하고 싶어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칼라일 주교 토머스 머크를 비롯한 리처드 2세 지지자들이 왕을 옹호했지만 무시당했다. 결국 리처드 2세의 폐위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왕좌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한 후 왕으로 선포되었다. 1399년 10월 13일, 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2.17. 최후

1399년 10월 23일, 상원은 리처드 2세를 요새화된 장소에 종신 감금하기로 결의했다. 10월 28일,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에서 요크셔의 폰테프랙트 성으로 이송되었다. 1400년 1월 초, 존 홀랜드, 토머스 홀랜드, 존 몬타구, 디스펜서 남작 토머스 르 디스펜서, 럼리 남작 랄프 럼리 등이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암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1월 6일 음모가 발각되었고, 음모자들은 모조리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리처드 2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리처드 2세의 정확한 사망 날짜와 상황은 불명확하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라파엘 홀린세드는 헨리 4세가 "누구도 자신에게서 '이 살아있는 두려움'을 없애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은 기사 피어스 엑스턴이 리처드 2세를 살해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또다른 연대기에 따르면, 리처드 2세는 자신을 구출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되자 벽을 향해 누운 채 식사를 거부했다가 아사했다고 한다. 일부 출처에서는 그의 사망 날짜가 2월 14일로 기재되었지만, 1400년 1월 29일에 리처드 2세의 죽음이 프랑스 왕실에 알려졌다는 기록도 있다.

사후 리처드 2세의 유해는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없애려는 의도로 런던으로 옮겨져 이틀간 세인트 폴 대성당에 전시되었고, 하트퍼드셔의 랭글리 성에 묻혔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리처드 2세의 유해를 리처드 2세의 첫 부인 안나가 묻힌 무덤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겼다.

3. 평가

리처드 2세는 옷차림[7]은 물론 외모와 머리모양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였으며 규칙적으로 목욕을 했고[8] 손수건을 고안하기도 했다. 성격은 성미가 급하고 신경질적이며 발작적으로 폭력적인 기질을 보였지만 어머니나 아내와 같은 가족, 측근 등에게는 관대했다고 한다. 어린 왕이 즉위한 틈을 타 그의 숙부들이 왕위를 노리고 벌어진 분쟁은 결국 훗날에 더 크게 터졌는데 그게 장미전쟁이다. 시인 제프리 초서의 후원자로 알려져있다.

이런 점을 보면 한국의 단종과 굉장히 비슷한 면이 많다. 요절한 아버지로 인해 어린 나이에 왕권을 이었으며 강력한 숙부들 사이에서 휘둘리기 딱 쉬운 입장이었다. 하지만 30대까지 장성해서 나름대로 왕권 강화를 위해 숙청을 가하다가 패배한 것이니 단종과는 차이가 있다.(그러면 명나라 건문제[9]) 현존하는 공식 초상화 때문에 소년왕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망 당시의 모습을 가장 흡사하게 표현한 그의 무덤 조각을 보면 수염까지 난 장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단종과 비교한 것은 어디까지나 포지션상 유사하다는 것이지, 단종처럼 안타깝거나 불쌍한 이미지를 주는 왕은 아니다. 사실 할 건 다 해보고 죽었다는 인상이 더 강하다. 그러나 동정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도유식을 통해 성별된 적법한 군주였고, 중세의 정치문화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현대인들의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이때문에 헨리 4세는 평생 찬탈자라는 굴레에 시달렸으며, 헨리 5세는 리처드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러줌으로써 자기 정통성을 확보해야 했다.

흰 사슴을 표장으로 삼은 사병 집단을 양성해서 전제정치를 시도했고, 과거 자신을 위협했던 5명의 대귀족을 복수의 명분으로 차례차례 제거해버렸다. 그중 하나가 바로 친척이자 랭커스터 왕가의 시초인 헨리였다. 재빨리 태세전환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한패였던 영주 아렌델을 맹렬히 비난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얼마 안 가 프랑스로 추방당한다. 더하여 왕의 말이 곧 국법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귀족들을 협박하거나 적당한 명분을 붙여서 영지와 재산을 마구 몰수하기도 했다. 와트 타일러의 난 진압 시에도 민란 지도자 와트 타일러를 회담장에서 살해하고, 농노들의 자유를 약속해놓고는 나중에 번복하자 분노한 농민들이 다시 일으킨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한테서도 신망을 잃고 만다.

왕이 강력한 권력을 추구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마그나 카르타 이래로 귀족과 의회 중심의 정치가 발달한 잉글랜드의 왕이었다. 이 상태에서 왕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곧 죽음이라는 협박은 법과 관습을 전면부정하는 행위였다.

유럽사에서는 리처드 2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사례는 많았고, 실제로 이루어 낸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의회와 귀족들을 상대로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는 상호 존중 관계에서 성립했던 것이며, 그런 왕들도 여차하면 반감을 품은 귀족의 반란으로 한 방에 훅 갔다. 반면 리처드 2세는 오로지 힘에 근거한 압력과 공포를 내세워 권력의 강화를 추진했고, 이과정에서 귀족과 평민 간에 했던 약속을 어기는 일도 예사였다. 이는 권리와 목숨 양자를 위협받은 유력 귀족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리처드 2세의 추종자들이 단단히 결집해 있는 지라 자칫하면 전국적인 내전으로 불거질 가능성이 커서 참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불만은 헨리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적당한 명분과 교체할 후계자를 얻게 되자 급격히 폭발하고 만다. 왕비를 프랑스 왕의 딸인 이자벨로 맞이하고 프랑스에 유화적인 친불정책도 시행했는데 이는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던 귀족들과 백성들을 반발하게 만들었다.

4. 부인들

첫 부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 국왕 카를 4세의 딸인 안나(Anne von Böhmen 1366~1394)였고 금슬도 좋았으나 안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12년 만에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3년 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 이자벨(Isabelle de France 1389~1409)과 결혼했지만 역시 아이를 낳지 못했다. 헨리 4세는 이자벨을 자신의 아들 헨리 5세와 결혼시키려고 하였으나 단념하고 친정으로 보냈다. 이자벨은 사촌 샤를 1세 도를레앙과 재혼했으나, 3년 뒤인 1409년 딸 잔을 낳던 도중 죽었다.

5. 대중매체에서

  • BBC에서 The Hollow Crown 이라는 제목으로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가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007 시리즈Q로 알려진 벤 위쇼가 리처드 2세를 맡았다.작중에서는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유약한 성격과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는 왕으로 묘사된다.


[1] 엄밀히 말하면 리처드 2세의 왕위를 계승한 헨리 4세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리처드 2세의 사촌으로 플랜태저넷 가문에 속해 있지만 헨리 4세가 제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켜서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리처드 2세를 끝으로 플랜테저넷 왕조가 단절된 것으로 본다.[2] 현재 팔레 로앙(Palais Rohan)[3] 1356 ~ 1384,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부인[4] 1359 ~ 1392, 기사 휴고 드 코트니와 초혼, 리그니 백작과 생폴 백작 발레랑 3세 드 룩셈부르크와 재혼.[5] 맨앳암즈 1,000명, 기마 궁수병 500명 등[6] 토머스 월싱햄은 이 연회를 살로메 3세가 춤에 대한 보상으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던 헤로데 안티파스 왕의 연회와 비교했다.[7]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합한 한 벌이 제각각 거의 2만 파운드(한화 3천만 원가량)에 달했다고 한다.[8] 중세인들은 흔한 편견보다는 훨씬 더 목욕을 좋아했다. 목욕문화가 쇠퇴하는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9] 반란을 일으킨 숙부 주체가 전투 중에 죽을까봐 안절부절 못했던 유약한 건문제와는 달리, 리처드 2세는 난폭한 성품과 한번 적으로 간주한 상대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 복수심을 갖춘 인물이었다. 자신의 왕권을 제한한 숙부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고문해서 죽이는 등 건문제와는 성격에서 영 딴판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