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1 18:39:01

헨리 스태퍼드

<colbgcolor=#F9B928><colcolor=#000000> 제2대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
Henry Stafford, 2rd Duke of Buckingham
파일:헨리 스태퍼드.jpg
이름 헨리 스태퍼드
Henry Stafford
출생 1455년 9월 4일
웨일스 공국 몬머스셔 에버게이브니
사망 1483년 11월 2일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솔즈베리 (향년 28세)
배우자 캐서린 우드빌 (1466년 결혼)
자녀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헨리, 험프리, 앤
아버지 험프리 스태퍼드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
형제 험프리 스태퍼드
직위 스태퍼드 백작, 버킹엄 공작, 오들리 남작, 잉글랜드 무관장, 잉글랜드 대법관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제2대 버킹엄 공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리처드 3세의 최측근으로 활약했으나,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뒤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체포된 후 처형당했다.

2. 생애

1455년 9월 4일 웨일스 공국 몬머스셔 에버게이브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스태퍼드 백작 험프리 스태퍼드이고,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의 딸 엘레노어 뷰챔프의 딸이다. 아버지 험프리는 1455년 5월22일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 랭커스터군에 가담했다가 팔에 화살을 입고 간신히 이탈했다. 이때 헨리의 외할아버지인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전사했다. 아버지 험프리는 1459년경에 사망했고, 어머니 마거릿은 기사 리처드 다렐 경과 재혼했다.

1460년 7월 10일, 헨리의 친할아버지이자 초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노샘프턴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 후 5살이었던 헨리가 조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 후 에드워드 4세의 왕비가 된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후견을 받았고, 1465년 5월 26일 기사 작위를 받고 공식적으로 버킹엄 공작, 스태퍼드 백작, 오들리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466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헨리를 여동생 캐서린 우드빌과 결혼시켰다. 1474년, 헨리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헨리는 에드워드 4세 치세 동안 왕의 신임을 얻지 못해 정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가진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부부의 친족 및 부하들이 가로챘다. 웨일스에서는 엘리자베스 왕비의 형제 중 한 명인 앤서니 우드빌이, 미들랜드에서는 에드워드 4세의 최측근인 윌리엄 헤이스팅스가 수입을 접수했다. 이 때문에 버킹엄 공작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곤궁하게 지내야 했던 헨리는 강한 불만을 품었고, 왕비의 친척들이 강력한 권력을 얻은 것에 불만을 품었던 에드워드 4세의 형제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동맹을 맺었다.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가 급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동생 리처드를 호국경으로 삼아 섭정을 맡게 하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왕비의 친족인 우드빌 가문과 외가인 그레이 가문은 에드워드 4세의 유언이 실행되는 것을 막고 리처드를 잉글랜드 통치에서 배제하려 했다. 윌리엄 헤이스팅스가 리처드를 호국경으로 승인하자고 의회에 제안했지만, 의회는 대다수 주교의 지원에 따라 이를 거부했다. 여기에 우드빌 가문은 당시 앤서니 우드빌의 보호를 받으며 러들로에 있던 에드워드 5세를 런던으로급히 불러들여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런던에 있던 헨리는 이 사실을 리처드에게 알렸고, 군대를 이끌고 가서 노샘프턴으로 갔다. 이후 스토니 스트렛퍼드에서, 리처드와 함께 에드워드 5세를 런던으로 모시던 호송대를 가로챘으며, 리버스 백작 앤서니 우드빌과 에드워드 5세의 이복형제인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했다. 이후 앤서니 우드빌과 리처드 그레이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처단하려 한 혐의로 반역죄를 적용받고 처형당했다. 이후 리처드는 5월 4일 호국경으로 취임했다.

그 후 헨리는 리처드가 리처드 3세로서 왕위에 오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6월 9일, 그의 사주를 받은 바스 주교 로버트 스틸링턴이 에드워드 4세가 이전에 슈루즈베리 백작 존 탈보트의 딸인 엘레노어 탈보트와 결혼 약속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불법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6월 24일, 헨리 본인이 런던 시민들 앞에서 에드워드 5세가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연설을 했고, 6월 25일 세인트 폴 대성당의 대회의실에서 연설했다. 그는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인 슈루즈버리의 리처드가 사생아이므로,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의회는 리처드 3세를 추대하기로 했다.

1483년 6월 왕위에 오른 리처드 3세는 헨리에게 후한 보상을 내렸다. 6월 28일, 그는 왕의 명령으로 처형된 윌리엄 헤이스팅스를 대신하여 잉글랜드의 대법관에 선임되었다. 7월 15일에는 잉글랜드 무관장이 되었고, 잉글랜드 서부와 웨일스에서 상당한 영지를 받고 강력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얼마 되지 않아 리처드 3세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가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분명하지 않다. 전통적인 가설에 따르면, 리처드 3세는 14세기 말에 소멸된 보훈 가문의 상속 재산인 헤리퍼드 백작령의 수입을 보훈 가문의 후손인 헨리에게 양도하는 것을 거부했고, 헨리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꾸몄다고 한다. 실제로 헨리는 랭커스터 왕조가 붕괴된 1471년부터 이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는데, 리처드 3세는 1483년 7월 13일에 헤리퍼드 영지를 그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영지의 양도는 공식화되지 않았고, 그곳에서 나는 수입을 얻으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할 것을 규정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고작 이 정도 사유로 헨리가 반역을 꾸몄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고 본다.

다른 가설은 런던 탑에서 에드워드 5세와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왕자가 '사라져버린 데'에서 버킹엄 공작의 반란이 비롯되었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헨리가 대귀족 여럿이 리처드 3세에게 처형되고, 런던 탑에 갇혔던 두 어린 아이가 살해된 후, 자신 역시 다음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왕자를 살해한 자는 바로 헨리로, 그는 리처드 3세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두 어린 아이를 살해했지만, 오히려 리처드 3세가 이 일에 분노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그가 헨리 튜더를 내세워서 리처드 3세를 폐위한 뒤 다시 헨리 튜더를 폐위하고 자기가 왕이 되려 했다고 주장한다.

1483년 8월, 헨리는 웨일스의 브렉녹 성에서 윌리엄 헤이스팅스와 함께 리처드 3세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감금되었던 엘리 주교 존 모턴을 석방했다. 그 후 존 모턴과 연합한 헨리는 브르타뉴 공국에서 망명 중이던 헨리 튜더와 서신을 주고받아 잉글랜드 왕위를 쟁취하기 위한 봉기를 준비했다. 헨리 튜더는 왕위 쟁취를 합법화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로 했다. 이들의 계획에 따르면, 헨리 튜더는 용병대를 끌어모아 웨일스 해안에 상륙한 뒤 버킹엄 공작이 파견한 웨일스군과 합류하기로 했다.

후에 발행된 의회 기소장은 버킹엄 공작이 음모 주동자라고 규탄했지만,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불충하고 탐욕스러운 한 거물"에게 사건의 책임을 돌려서 리처드 3세가 죽은 형의 측근들의 불신을 샀다는 '부끄러운 진실'을 숨기려는 의도로 그렇게 되었을 뿐, 실제 지도자는 음모를 적극적으로 이끈 엘리 주교 존 모턴과 기사 레지날드 브레이라고 추정한다. 존 모턴은 리처드 3세의 죄악을 명시한 문서를 잉글랜드 각지에 발송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요크의 리처드는 런던 탑에 갇힌 에드워드 4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리처드 왕자를 죽였다.
2. 리처드는 그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
3. 리처드는 앤 네빌의 첫번째 남편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죽였다.
4. 리처드는 앤 네빌과 강제로 결혼했고, 나중에는 아내를 죽인 뒤 조카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근친상간의 범죄를 저지르려 했다.
5. 리처드는 자신의 어머니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과 불륜을 저질렀으며, 형 에드워드 4세는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들이 아니므로 왕위에 대한 권리가 없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버킹엄 공작이 존 모턴과 협상하여 마거릿 보퍼트의 아들인 헨리 튜더를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시키고 헨리를 왕위에 오르게 하기로 했을 때, 주교는 레지날드 브레이를 마거릿에게 보내는 사절로 레지날드 브레이를 추천했다. 브레이는 이 임무를 수행했고,뒤이어 자일스 도벤, 존 체니, 리처드 길포드 등 많은 귀족을 설득해 반란에 동참하게 했다고 한다.

공모자들은 켄트주, 서리주, 에식스, 버크셔, 윌트셔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고, 엑서터 주교 피터 코트니가 데번에서 봉기하고, 웨일스에서는 버킹엄 공작이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또한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 공국의 재무장관 피에르 랑다이스가 제공한 병사 3,500명을 받고 잉글랜드로 이동해 버킹엄 공작과 합세한 후, 런던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켄트주 공모자들은 약속한 날짜보다 10일 전인 10월 10일에 반란을 시작했고, 버킹엄 공작을 지도자로 선포해 버킹엄 공작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걸 조기에 노출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리처드 3세는 랄프 드 애쉬턴을 즉시 부보안관으로 선임하고, 그에게 공모자들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기소할 권한을 줬다.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켄트와 에식스의 반군이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병사 100명을 템스 강 어귀로 이동시켰다. 그 후 리처드 3세는 레스터에서 군대 소집령을 내리고, 반군 지도자들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버킹엄 공작에게는 1인당 1,000파운드 또는 평생 100파운드를, 토머스 그레이와 솔즈베리 주교인 라이오넬 우드빌에게는 각각 660파운드를, 다른 지도자들에게는 500마크를 걸었다.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2척의 배만 가까스로 이끌고 플리머스 항에 상륙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 리처드 3세를 지지하는 세력의 저항에 부딪쳤고, 결국 브르타뉴로 돌아가야 했다. 한편, 버킹엄 공작은 자기 영지에 상당한 병력을 집결했지만, 비가 많이 내려서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다른 반란군과 연합할 수 없었다. 리처드 3세가 토벌하기 위해 진군하자, 반란군은 대거 탈영했다. 버킹엄 공작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곧 체포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기사 랄프 배너스터가 현상금을 받기 위해 버킹엄 공작을 배신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왕의 시종들이 버킹엄 공작과 랄프 배너스터를 모두 생포했다고 한다. 버킹엄 공작은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1월 12일에 솔즈베리에서 참수되었다.

헨리 스태퍼드가 처형된 뒤 버킹엄 공작의 모든 영지와 작위는 몰수되었지만, 헨리 튜더가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꺾고 잉글랜드 국왕이 된 뒤 그의 장남인 에드워드 스태퍼드가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돌려받았다.

3. 가족

  • 캐서린 우드빌(1458년 이전 ~ 1513년 이전): 초대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과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의 딸. 헨리 스태퍼드 사후 재스퍼 튜더와 재혼했다.
    • 엘리자베스 스태퍼드(? ~ 1530년 1월 1일 또는 1532년 5월 11일): 초대 서식스 백작 로버트 래드클리프의 부인.
    • 에드워드 스태퍼드(1478 ~ 1521): 제3대 버킹엄 공작.
    • 헨리 스태퍼드(1479 ~ 1523): 윌트셔 백작.
    • 험프리 스태퍼드(1480): 유아기에 사망.
    • 앤 스태퍼드(1483 ~ 1524): 월터 허버트 경과 초혼, 초대 헌팅던 백작 조지 헤이스팅스와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