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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D6D0><colcolor=#000000> 에드먼드 더들리 Edmund Dudle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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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드먼드 더들리 (Edmund Dudley) |
출생 | 1462년 또는 1471년/1472년 |
잉글랜드 왕국 | |
사망 | 1510년 8월 17일 (향년 37~48세) |
잉글랜드 왕국 런던 런던 탑 타워힐 | |
배우자 | 앤 윈저 (1494년 결혼 / 1500년 ~ 1503년 사이 사망) |
엘리자베스 그레이 (1500년 ~ 1503년 사이 결혼) | |
자녀 | 엘리자베스, 존, 앤드류, 제롬 |
아버지 | 애싱링턴의 기사 존 더들리 |
어머니 | 엘리자베스 브램숏 |
형제 | 피터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헨리 7세 치세 때 행정기이자 재정 관리인을 맡아 세금 수취에 힘썼지만,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한 후 가혹한 세금 수탈에 분노한 민심을 달래려는 왕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이듬해 처형되었다. 에드워드 6세 치세에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한 존 더들리의 아버지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이었던 로버트 더들리의 조부이다.2. 생애
다양한 출처에는 1462년경 또는 1417/1472년에 출생한 것으로 기재되었다. 그는 브르타뉴 출신으로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에 참여한 기사 중 한 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더들리 가문에 속했다. 에드먼드는 부계 쪽으로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에 참여한 제6대 더들리 남작 존 서튼의 손자였으며, 아버지 존 더들리는 애서링턴의 기사로 1485년 서식스의 보안관을 역임했다.1478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 받은 후 그레이스 법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그곳의 홀 창문 중 하나에 더들리 남작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었다. 23세 때 그의 총명한 면모에 주목한 헨리 7세의 추밀원 고문으로 선임되었고, 1491년 루이스의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495년 서식스의 샤이어 기사로 선임되었다. 1492년 에타플 조약이 성립되는 데 기여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1497년 런던의 차석 보안관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왕의 추밀원 고문이자 교육받은 변호사가 그런 낮은 직책을 맡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 그는 동료 학자 리처드 엠프슨과 함께 세인트 스위틴 길가에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헨리 7세의 큰 신임을 받은 에드먼드는 왕의 지시에 따라 귀족들의 부정 행위를 조사했다. 그리고 동료 리처드 앰프슨과 함께 법원의 학식 있는 협의회의 저명한 회원이 되었다. 이 협의회는 헨리 7세 통치 기간 동안 왕실에 대한 부채를 징수하고, 보증으로 채권을 요청하고, 고귀하고 부유한 개인에 대해 다른 금융 수단을 사용하는 책임을 맡은 특별 사법 기관이었다. 왕은 에드먼드와 리처드의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작업을 직접 감독했다. 에드먼드는 왕실 재정을 충당하는 일을 도맡으면서 서식스, 도싯 및 링컨셔에 광범위한 영지를 획득하면서 부유한 지주가 되었다. 그가 왕의 재정 관리자로 재직하는 동안, 헨리 7세는 약 450만 파운드의 동전과 금괴를 얻을 수 있었다. 에드먼드가 합법적, 불법적 거래로 얻은 수입은 연간 12만 파운드로 추산된다.
1504년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왕실 칙령에 따라 법률 고문이 되었다. 1506년 헤이스팅스 시의원이 되었으며, 앰프슨과 함께 형법 적용을 위한 특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헨리 7세의 의중에 따라 엠프슨과 함께 왕이 매긴 특별세를 가차없이 거둬들였고, 민중은 이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1509년 4월 21일 헨리 7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헨리 8세가 왕위에 올랐다. 헨리 8세는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에드먼드와 앰프슨을 런던 탑에 가뒀다. 새 왕은 그들이 "법, 이성, 그리고 양심"에 어긋난다고 판단하여 그들의 모든 공적 보증 관련 거래를 무효로 처리했다.
1509년 7월 16일, 에드먼드는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기소장에는 이 사건의 재정적인 측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 대신, 그는 헨리 7세가 임종할 때 사병을 동원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듬해 초, 에드먼드와 앰프슨 모두 재산을 몰수당했다. 1510년 여름, 왕의 사면이 없을 것이 분명해지자, 에드먼드는 동생 피터와 친척 제임스 보몬트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기로 결심했지만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510년 8월 18일, 에드먼드는 엠프슨과 함께 런던 탑의 타워 힐에서 처형되었고, 그날 밤 블랙프라이어스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처형 당일에 유언장을 작성해 서식스, 도식, 링컨셔에 있는 영지를 아내와 아이들에게 남기고, 땅의 일부는 옥스퍼드의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하는 데 쓰게 했으며, 동생 피터에게 어린 아들의 교육과 양육을 맡기겠다고 밝혔다.
에드먼드는 감옥에 있는 동안 왕의 사면을 얻기 위해 절대군주제를 옹호하는 <잉글랜드 연방의 뿌리(The Tree of CommonWealth)>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집필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이 책을 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소책자의 한 부는 에드먼드의 증손자인 엠브로즈 더들리의 소유가 되었고, 그가 죽은 뒤에 사이먼즈 데브스 경에게 넘겨졌다. 다른 한 부는 역사가 존 스토우가 복사하여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에게 전달했다. 몇몇 후속 사본은 맨체스터의 채트먼 도서관 , 대영 박물관 및 콜소프 경의 개인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3. 가족
- 앤 윈저: 스탠웰 기사 토머스 윈저와 엘리자베스 앤드류스의 딸.
- 엘리자베스 더들리: 제7대 스투어턴 남작 윌리엄 스투어턴의 부인.
- 엘리자베스 그레이(1470/1482/1484 ~ 1525/1526): 제6대 리슬 여남작. 제3대 리슬 남작 에드워드 그레이의 부인. 에드먼드 더들리가 사망한 후 1511년 에드워드 4세의 사생아인 아서 플랜태저넷과 재혼해 세 딸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