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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튜더

<colbgcolor=#F9B928><colcolor=#000000> 초대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파일:Edmwnd_Tudur.jpg
이름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출생 1430년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머치 해덤 궁전
사망 1456년 11월 1일 (향년 25~26세)
웨일스 공국 카마던
배우자 마거릿 보퍼트 (1455년 결혼)
자녀 헨리 7세
아버지 오언 튜더
어머니 발루아의 카트린
형제 재스퍼, 에드워드, 캐서린 또는 마거릿
지위 초대 리치먼드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자녀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리치먼드 백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를 위해 요크 왕조와 대적하다가 요크파에게 제압되어 카마던 성에 감금되었다가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헨리 7세의 아버지이다. 이로 인해 튜더 왕조 이후의 모든 잉글랜드 왕실은 에드먼드의 후손이다.[1]

2. 생애

1430년 경 비밀리에 결혼한 부부 오언 튜더발루아의 카트린의 장남으로서 하트퍼드셔의 머치 해덤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귀족과 의회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카트린의 영지인 하트퍼드셔에서 은거했다. 에드먼드는 출생지를 따서 해덤의 에드먼드로 불리기도 했다. 역사가 제럴드 해리스는 에드먼드의 실제 부친은 카트린의 재혼 대상으로 거론되곤 했던 에드먼드 보퍼트라고 주장했지만, 랄프 그리피스 등 다른 학자들은 이를 입증하는 증거가 없다며 부정한다.

어머니 카트린은 1436년 말 중병에 걸려 치료를 받기 위해 버몬지 수도원에서 요양 생활하다가 1437년 1월 3일에 병사했다. 그 후 카트린 왕비와 비밀리에 결혼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오언 튜더는 체포된 뒤 투옥되었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1439년 11월 헨리 5세와 카트린 왕비의 외아들이자 에드먼드의 이부형제인 헨리 6세가 오언 튜더를 사면했다. 그 후 헨리 6세는 이부형제들을 매우 잘 대접했다. 에드먼드와 재스퍼 튜더 형제는 왕의 지원에 힘입어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의 자매인 바킹의 수녀원장 캐서린 드 라 폴의 보호를 1442년까지 받았다. 그녀는 소년들의 음식과 옷을 돌봤고, 두 소년은 하인들을 대동했다. 그들이 청소년기에 이르렀을 때, 왕은 두 이부형제의 가정교사를 신중하게 고른 끝에 교회 목사들을 섭외했다. 그들은 우수한 교육을 해줬고, 두 형제가 "젊음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올바른 삶을 가르쳤다고 한다.

1452년, 에드먼드와 재스퍼 형제는 정식으로 잉글랜드 왕실에 편입되었다. 헨리 6세가 그들을 아꼈기도 했지만, 당시 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에 그들을 형제로 인정해 잠재적인 상속인으로 삼으려는 의중도 담겨 있었다. 그 해 11월 23일, 헨리 6세는 에드먼드를 초대 리치먼드 백작으로 선임했고, 재스퍼를 초대 펨브로크 백작으로 선임했다. 이와 동시에, 에드먼드는 리치먼드에 있는 가족 재산을 받았다. 그는 리치먼드 영지의 2/3을 소유했고, 나머지 1/3은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의 미망인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에게 속했다가,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아들인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에게 넘어갔다.

1453년 1월 5일, 에드먼드와 재스퍼는 런던 탑에서 열린 의식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 해 3월 6일 레딩에서 소집된 의회에서, 에드먼드와 재스퍼는 상원 의석을 차지했다. 또한 하원은 왕에게 백작들을 그의 이부형제로 공식적으로 인정해달라고 청원했고, 헨리 6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편, 백작이라는 높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상당한 수입이 필요했다. 이에 헨리 6세는 이부형제들에게 꾸준한 수입과 이익을 보장하는 영지를 하사했다. 또한 1452년 11월부터 그들에게 상당한 임대료를 지불했는데, 1453년 6월에 헨리 6세가 정신병에 걸리면서 중단되었다.

1455년 11월 1일 헨리 6세초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의 외동딸로, 자신의 육촌인[2] 12살의 마거릿 보퍼트와 이부동생인 에드먼드 보퍼트의 결혼을 중재했다.[3] 이듬해 마거릿 보퍼트는 미래의 잉글랜드 국왕이 될 헨리 튜더를 임신했다.[4] 이후 장미 전쟁이 발발하자, 헨리 6세에게 많은 은혜를 입은 튜더 가문은 그를 위해 투쟁했다. 그러던 1456년 여름, 에드먼드 튜더는 요크파 인사 윌리엄 허버트에게 체포되어 사우스 웨일스의 카마던 성에 감금되었고, 1456년 11월 3일 페스트에 걸려 사망한 뒤 카마던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외아들 헨리 튜더는 아버지가 죽은 지 약 3개월 후 유복자로 펨브로크 성에서 태어났다. 1539년, 에드먼드 튜더의 유해는 세인트 데이비드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3. 가족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헨리 7세
(Henry VII)
1457년 1월 28일 1509년 4월 21일 요크의 엘리자베스[5]
슬하 2남 2녀[6]

[1]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튜더 왕조의 직계가 단절된 이후 스튜어트 왕조, 하노버 왕조,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윈저 왕조가 들어섰으나 이 왕조들 모두 서로 먼 친척 관계이긴 해도 전 왕조이자 시조인 튜더 왕조의 피만큼은 이어받은 직계 후손이었다.[2] 헨리 6세곤트의 존의 적자계열 증손자고 마거릿 보퍼트는 곤트의 존의 사생아계열 증손녀였다.[3] 이 결혼은 이부동생에게 랭커스터 왕조의 왕위계승권과 막대한 재산을 지닌 상속녀를 안기려는 헨리 6세의 결정이었다고 한다.[4] 12살에 임신하고 13살에 출산했는데 결혼과 출산이 현대보다 훨씬 빨랐던 중세 기준으로도 이는 지나치게 빨랐다. 나이가 너무 어렸던 탓인지 마거릿은 출산 당시에 아이와 함께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한다.[5] 에드워드 4세의 장녀.[6] 웨일스 공 아서,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거릿, 헨리 8세, 프랑스의 왕비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