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00:48:32

에드워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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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5대 국왕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of Englan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ward_III_of_England_%28Order_of_the_Garter%29.jpg
왕호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이름 윈저의 에드워드
(Edward of Windsor)
출생 1312년 11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윈저 성
사망 1377년 6월 21일 (향년 64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리치몬드 쉰 성
장례식 1377년 7월 5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327년 2월 1일 ~ 1377년 6월 21일
배우자 에노의 필리파 (1328년 결혼 / 1369년 사망)
자녀 흑태자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라이오넬, [1], 에드먼드[2], 메리, 마거릿, 토머스
아버지 에드워드 2세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
형제 존, 엘레노어, 조앤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프랑스 여행과 아버지와의 이별2.3. 결혼 협상2.4. 에드워드 2세의 몰락2.5. 잉글랜드 국왕
2.5.1.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의 통치2.5.2. 친위 쿠데타2.5.3. 초기 치세2.5.4. 스코틀랜드와의 전쟁2.5.5. 플란데런 반란2.5.6. 백년전쟁(1338 ~ 1347)
2.5.6.1. 전쟁 초기(1338 ~ 1340)2.5.6.2.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과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대립2.5.6.3.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2.5.6.4. 1346 ~ 1347년 프랑스 원정2.5.6.5. 네빌스 크로스 전투2.5.6.6. 브르타뉴의 혼란
2.5.7. 가터 기사단 창립과 중세 흑사병2.5.8. 백년전쟁(1350 ~ 1360)
2.5.8.1. 칼레 전투2.5.8.2. 윈첼시 해전2.5.8.3. 지지부진한 전쟁과 평화 협상2.5.8.4. 카를로스 2세 문제2.5.8.5. 잉글랜드의 포로가 된 프랑스 국왕2.5.8.6. 1359 ~ 1360년 프랑스 원정과 브레티니 평화 협약
2.5.9. 결혼 동맹 정책과 내치2.5.10. 백년전쟁(1369 ~ 1377)2.5.11. 말년
2.6. 사망
3. 평가4. 가족관계
4.1.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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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2세이사벨라장남. 친조부는 에드워드 1세이고 외조부는 필리프 4세이며, 필리프 4세의 손자들 중 유일하게 장성한 사람이기도 하다.[3] 50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백년전쟁을 이끈 잉글랜드 군주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312년 11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의 윈저 성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딸인 프랑스의 이자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엘트햄의 존[4], 우드스톡의 엘레노어[5], 의 조앤[6]이 있었다. 그는 윈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부 기록에서는 '윈저'라는 별명으로 언급되었다. 필리프 4세의 주치의였던 앙리 드 몽드빌이 그의 출산을 도왔고, 이자벨 왕비의 하인인 존 라운지와 그의 아내이자 이자벨의 시녀인 조앤은 왕비의 성공적인 출산과 왕위 후계자의 탄생을 알린 공로로 에드워드 2세로부터 공동 연금 80 파운드를 받았다. 런던 시민들은 왕자의 탄생에 몹시 기뻐했고, 런던 시는 출산 소식이 전해진 11월 14일을 공휴일로 선포하고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엄숙한 감사 예배를 거행했으며, 일주일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도 유사한 예배가 열렸다.

에드워드 왕자는 1312년 11월 16일 성 에드먼드 리치 축일에 윈저의 세인트 에드워드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교황 및 프랑스와 협상을 벌이고 있던 에드워드 2세는 산타 프리스카 수도원의 추기경 사제이자 교황 대사인 아르눌을 설득해 세례를 주관하게 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자벨과 그녀의 삼촌인 루이 데브뢰는 아기에게 프랑스 왕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름을 쓰자고 주장했지만, 에드워드 2세는 장남에게 자기 이름을 물려주기를 고집해 관철되었다고 한다. 11월 24일, 에드워드 왕자는 체스터 카운티와 플린트 카운티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체스터의 수입이 왕자를 부양하기에 충분하지 않자, 에드워드 2세는 왕자의 토지 보유를 늘리기로 했다. 1312년 12월 초, 에드워드 왕자는 카리스부르크 성과 와이트 섬의 통제권을 받았다. 1318년 윌리퍼드 성과 펫워스의 수입을 받을 권리를 이정받았으며, 콘월의 주석 광산으로부터 연간 1,000 마르크를 받을 권리도 인정받았다. 1320년대 중반, 에드워드 왕자의 연간 수입은 약 4,000 파운드였는데, 이는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인 휴 디스펜서와 랭커스터 백작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보다 많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관례에 따라 1313년 이후로 부모와 떨어져 지냈다. 에드워드 2세는 장남을 매우 극진하게 챙겨줬다. 그는 아들의 첫번째 성탄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으며, 아들에게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냈고, 왕국 보안관들의 수입과 노스웨일스의 수입 부과금 일부를 아들에게 보냈다. 그 외에도 아들을 위해 여러 가지 특별 구매 비용을 지불했는데, 특히 설탕과 향신료 구매에 35파운드를 할당했다. 따라서 에드워드 왕자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개인 간호사였던 마거릿 대번트리에게 강한 애착을 느꼈다. 훗날 왕이 된 에드워드 3세는 1337년 마거릿 대번트리의 딸 에비사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100파운드에 달하는 축의금을 하사했고, 1350년대에는 마거릿의 재산과 금전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법적 절차에 개입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조금 더 성장했을 때, 그의 안전, 교육, 군사 훈련을 책임지고 그의 재산과 집에 대한 전반적인 감독을 담당하는 특별 교사들이 배정되었다. 1318년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인 로저 다모리의 형제인 리처드 다모리가 특별 교사를 맡았다. 그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매너, 에티켓, 노래 및 악기 연주를 가르쳤다. 하지만 에드워드 왕자는 그런 것보다는 승마, 창검술, 사냥에 열중했다. 그의 교육은 체셔의 로스테른 신부 존 페이넬이 감독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앵글로-노르만 프랑스어, 대륙 프랑스어 및 영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유럽 대륙에서 활동하면서 플란데런어와 독일어도 익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행정 분야에서 사용되는 라틴어를 적어도 제한적으로 읽고 쓸 수 있었다. 훗날 국왕이 된 에드워드는 공식 문서에 자신의 손글씨 샘플을 보존한 최초의 잉글랜드 통치자였다.

1320년 8월, 에드워드 왕자는 잉글랜드 귀족으로서 처음으로 의회에 소환되었다. 1322년 5~6월에 요크 대의회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1325년까지 왕실 회의 및 의회에 전부 참석했다. 1321~1322년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디스펜서를 축출하고자 잉글랜드 남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에드워드 2세가 이에 대응해 토벌했을 때, 에드워드 왕자는 아직 어렸던 터라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여러 남작을 처형한 뒤 압수한 재산을 휴 디스펜서 등 총신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1322년 8월, 에드워드 왕자는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를 물리치기 위해 집결한 군대에 합류하라는 왕의 지시를 받들어 뉴캐슬로 갔다. 이후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요크로 이동한 왕실 의회의 공식 수장을 맡았다. 그해 9월 21일, 에드워드 왕자는 프랑스 귀족 앙리 4세 드 쉴리의 방문을 기념하여 조직된 요크 왕실 잔치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대신했다.

1322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의 매복에 걸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국내로 돌아왔고, 이자벨 왕비도 타인머스에 있는 수도원에 피신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군을 대파한 여세를 이어가 에드워드 왕자가 머물고 있던 요크를 공격했지만 공략엔 실패하고,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헀다. 11월 초 스코틀랜드군이 돌아간 후에야 왕과 왕비는 요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런던으로 이동한 에드워드 왕자는 1323년 9월 노샘프턴에서 열린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이때 그는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 헨리 드 보몽을 멘토로 삼고 그로부터 펜싱을 배웠다. 헨리 드 보몽은 1323년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한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아내를 통해 얻었던 스코틀랜드의 뷰컨 백작위를 포기한 것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그는 나중에 에드워드 3세의 대 스코틀랜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23년, 휴 디스펜서의 비서이자 왕실 의장 관리관이었던 에드워드 쿠산스가 에드워드 왕자의 재무관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쿠산스의 친척일 가능성이 있는 장 클라룬이 왕자의 관리인이 되었다. 그와 친분을 맺은 귀족들도 늘어났는데, 대표적으로 로버트 우퍼드, 윌리엄 몬타구, 윌리엄 드 보훈을 들 수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훗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초년기를 함께 했던 이들을 중용했으며,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인 하인들 역시 계속 자신을 섬기게 했다. 이는 그가 친구 및 하인들에게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2.2. 프랑스 여행과 아버지와의 이별

1322년, 샤를 4세가 프랑스 왕국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1323년 여름, 생사르도 요새를 둘러싸고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에 샤를 4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프랑스 영지인 아키텐과 퐁티외를 몰수하겠다고 발표했고, 1324년 여름에 군대를 동원해 아키텐과 퐁티외를 침공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가 평화를 간청하자, 샤를 4세는 그해 성탄절 직후에 협상을 하고 싶으니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이자 자신의 누이인 이자벨과 에드워드 왕자를 프랑스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잉글랜드 왕실은 미래의 왕위 계승자를 프랑스에 보냈다가 인질이 될 것을 우려해 섣불리 보내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이자벨 왕비가 파리로 가서 평화 조약의 조건을 협상했다. 샤를 4세는 아키텐 공작이자 퐁티외와 몽트뢰유 백작인 에드워드 왕자가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영지를 그대로 가지도록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자벨은 무기력한 남편 에드워드 2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고, 남편의 총신인 휴 디스펜서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고 파리에 거주했다. 에드워드 2세는 아내의 심기를 눈치채고 아들을 섣불리 보냈다가는 휴 디스펜서를 제거하려는 아내의 원정에 내세워질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프랑스 왕실의 압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휴 디스펜서도 샤를 4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설득하자, 결국 에드워드 2세는 아들을 보내기로 했다. 1325년 9월 10일, 에드워드 2세가 아키텐과 퐁티외를 에드워드 왕자에게 양도하는 내용의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후 휴 디스펜서의 동맹자였던 엑서터의 주교 월터 스테이플던, 왕실 특사인 존 쇼어디치와 글로서트의 리처드, 그리고 에드워드 왕자의 멘토인 헨리 드 보몽, 윌리엄 몬타구가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프랑스로 가기로 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9월 12일 도버에서 출항했고 9월 22일 파리에 도착해 어머니와 합류했다.

1325년 9월 24일, 에드워드 왕자는 뱅센에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으로 아키텐 공작이자 퐁티외와 몽트뢰유 백작으로서 샤를 4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에드워드의 수행원들은 지체 없이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이자벨은 아들과 함께 프랑스에 남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10월 14일 푸아시, 10월 15일과 17일 파리, 10월 22일 르 부르제에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두 모자는 10월 말에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장소인 랭스에 들렀다. 잉글랜드 왕실은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잉글랜드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자벨은 남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휴 디스펜서를 타도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이자벨은 1325~1326년 겨울에 런던 탑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한 후 반 휴 디스펜서 진영을 이끌었던 로저 모티머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에드워드 2세는 1325년 12월 2일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촉구하고 어머니가 있든없든 돌아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별다른 소용이 없자, 결국 그는 1326년 1월 아들의 모든 재산을 왕실에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2월에 잉글랜드에 도착하는 대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즉시 체포할 것이며, 그들을 따르는 해외 망명자들을 왕실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3월엔 자신을 아키텐과 퐁티외의 행정관이자 총독으로 선포하여 이자벨이 아들을 내세워 반기를 일으킬 권력을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샤를 4세가 프랑스군을 동원해 아키텐을 다시 침공하는 빌미만 제공했다. 1326년 6월,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 국왕, 남작, 주교들에게 이자벨 왕비의 귀환을 촉구해달라는 절박한 호소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그해 7월, 에드워드 2세는 아키텐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잉글랜드 왕국에 있는 모든 프랑스인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샤를 4세는 이에 대응해 프랑스에 있는 모든 잉글랜드인을 구금하고 그들의 물품을 압수하라고 명령헀다.

2.3. 결혼 협상

1323년 봄, 샤를 4세는 자기 사촌을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는 안건을 에드워드 2세에게 제시했지만, 에드워드 2세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아들의 결혼을 통해 프랑스와 전쟁을 치를 때 믿음직한 동맹국을 확보하려 했다. 그는 처음엔 에드워드를 아라곤 왕국의 국왕 차이메 2세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다가, 다시 계획을 변경해 에드워드 왕자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1세의 누이인 엘리노어와 결혼시키고 알폰소 11세를 자기 딸인 우드스톡의 엘레노어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결혼 협상은 수 년 동안 이렇다할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1326년,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는 잉글랜드를 침공할 때 필요한 동맹국을 확보하기 위해 에노 백작 기욤 1세와 협상했다. 사실 에드워드 2세도 1319년 에드워드 왕자와 기욤 1세의 장녀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려고 접촉했지만,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들은 1326년 초 발렌시네스에서 기욤 1세의 아내이자 샤를 4세의 삼촌인 샤를 드 발루아의 딸인 발루아의 잔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기욤 1세와 발루아의 잔 부부는 이자벨의 정변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둘째 딸인 에노의 필리파를 잉글랜드 왕비로 삼고, 향후 에노가 외세의 위협을 받을 때 잉글랜드군이 보호해주기를 희망했다. 이자벨은 이에 동의했고, 에드워드 왕자와 필리파의 약혼을 주선했다.

에드워드 왕세자와 필리파는 친척이었기 때문에 결혼이 성립되려면 교황 요한 22세의 허락이 필요했다. 이자벨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절을 교황청에 보냈는데 필리파를 "에노 백작의 딸"이라고만 언급하고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요한 22세는 1327년 9월 두 사람의 결혼을 승인했고, 필리파는 그해 10월 코벤트리 주교의 주례하에 대리로 에드워드와 결혼했다.

2.4. 에드워드 2세의 몰락

1326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이자벨이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방비에 나섰다. 그는 교회 주교들더러 관할 주교구에 있는 신민들에게 충성을 촉구하게 했으며, 왕국의 거물들에게 각 카운티를 잘 지키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웨일스로 가서 모병했으며, 이자벨의 군대가 브리스톨에 상륙할 것이라고 에상하고, 딘의 포레스트에 정찰병을 배치했다. 9월 23일, 이자벨, 모티머, 에드워드 왕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도르드레흐트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에드워드 2세의 예상과는 달리 브리스톨이 아니라 이스트 앵글리아의 오웰호 어귀에 상륙했다. 이자벨은 상륙한 직후 잉글랜드 왕국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에게 서신을 잇따라 보내 왕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함께할 것을 촉구했으며, 런던 당국과 서신을 교환했다.

노퍽 백작과 여러 주교들은 재빨리 이자벨 편에 섰고, 이자벨의 군대가 던스터블에 도착했을 때 랭커스터 백작이 합류했다. 켄터베리 대주교 레이놀즈는 9월 30일 런던에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런던 시민들이 격분해 봉기를 일으켰고, 에드워드 2세, 휴 디스펜서, 레이놀즈는 10월 2일에 런던에서 도주했다. 10월 6일, 이자벨은 런던 시민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체포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0월 15일, 런던 시청에서 열린 회의에서 스태이플던 주교가 이자벨의 적으로 선언되었다. 스태이플던 주교는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도중에 체포된 뒤 참수되었다. 10월 16일, 런던 탑 순경은 로저 모티머의 두 아들을 포함한 모든 죄수를 석방하고 요새의 열쇠를 주었고, 당시 탑에 있었던 에드워드의 형제 존이 런던 탑 순경으로 선포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런던에서 탈출한 뒤 사우스 웨일스로 도주하려 했지만 11월 16일 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체포되었다. 휴 디스펜서 더 엘더와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은 그 전에 체포된 뒤 기사 재판 후 처형되었으며, 두 사람의 재산은 압류되어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에게 양도되었다. 잉글랜드 총리 로버트 발독도 체포된 뒤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에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옥사했다. 이자벨 측은 에드워드 2세가 왕국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했다며, 에드워드 왕자를 '왕의 이름과 권리'로 왕국의 관리인으로 선포했다. 에드워드 2세는 포로 신분인 채 몬머스 성에 감금되었다가 12월 5일 레스터 백작 소유의 케닐워스 성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아들에게 국왕의 인장을 넘기라는 압박에 시달린 끝에 11월 20일에 1309년 프랑스로 떠날 때 만들었던 인장을 넘겼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제 막 14세가 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통치가 가능한 나이였다. 그러나 이자벨 왕비는 공식적으로 아들과 권력을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받았으며, 1327년 1월 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소집된 의회에 소환된 남작들의 명단 맨 위에는 이자벨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가 자리잡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1327년 1월 초 런던에 도착했다. 1월 13일, 잉글랜드 남작들은 런던의 길드홀에서 휴 디스펜서 부자의 잔당들에 맞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지키고, 현 의회에서 통과된 조례를 지키며, 런던 시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했다. 같은 날 런던 의회에서, 로저 모티머는 영주들이 에드워드 2세를 폐위하고 에드워드 왕자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 되기로 결의했다고 선언했다. 이 무렵 에드워드 왕자 편으로 돌아선 레이놀즈 대주교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모임에서 에드워드 2세의 나약함과 무능함, 사악한 조언을 분별없이 들어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에서 영토를 잃은 것을 비난하며, 그의 장남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하십시오!"라는 세 번의 외침으로 레이놀즈 대주교의 발언을 환영했다.

1327년 1월 20~21일, 대표단이 에드워드 2세가 갇혀있던 케닐워스 성에 도착해 에드워드 2세에게 의회가 그의 폐위를 결의했다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만일 그가 왕위를 포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와 그의 아들들을 모두 거부하고 왕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임명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에드워드 2세는 이자벨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가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해 협박에 굴복하고 에드워드 왕자가 그의 후계자가 되면 자발적으로 왕위를 사임하겠다고 동의했다. 1월 24일 에드워드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소식이 런던에 전해졌고, 다음날인 1월 25일부터 에드워드 왕자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로서 공식 문서에 등장했다.

2.5. 잉글랜드 국왕

파일:에드워드 3세 대관식.jpg

1327년 2월 1일, 에드워드 3세는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레이놀즈 대주교의 주관하에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도유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국법과 이 나라 국민이 확립해야 할 정의로운 관습을 준수하고 보존하겠다"고 선서했다. 이후 국왕을 보조하고 국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의회는 4명의 주교, 4명의 백작, 6명의 남작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임해 모든 중요한 정책을 주관하도록 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이자벨과 모티머에게 있었고, 위원회의 역할은 갈수록 축소되었다. 이자벨은 아들에 대한 영향력과 접근권을 통제했으며, 모티머는 공식적으로는 주요 공직을 맡지 않고 왕실 추밀원 의원도 아니었지만 이자벨의 측근으로서 회의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에드워드 3세는 통치 첫해 동안 전국을 널리 여행했다. 그와 그의 수행원은 여행 기간 동안 신성한 집, 주교의 뜰 또는 성에서 숙박했지만, 때로는 텐트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런던 외곽의 왕실 거주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2.5.1.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의 통치

에드워드 3세가 등극한 지 1년 후인 1328년 1월 31일,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당시 샤를 4세에게는 왕비 에브뢰의 잔과의 사이에서 두 딸 잔, 마리가 있었지만, 이들 모두 살리카 법의 원칙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다만 에브뢰의 잔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경우 그 갓난아기가 프랑스의 국왕이 될 수도 있었다. 모두가 왕비의 출산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2월 8일, 발루아 백작 필리프는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을 비롯한 프랑스의 대귀족들을 포섭해 자신이 임시로 국왕의 섭정을 맡는 데 동의하도록 했다. 1328년 4월 1일, 에브뢰의 잔은 딸 블랑슈를 낳았다. 이리하여 위그 카페 이래 340여 년간 프랑스 왕위를 이어가던 카페 직계가 단절되었다. 필리프는 즉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 선포되었고, 그해 5월 29일 랭스 대성당에서 도유식대관식을 거행했다.

이자벨은 아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필리프 6세가 부당하게 가로챘다고 여겼다. 그녀는 우스터, 코벤트리, 리치필드 주교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내 프랑스 귀족들에게 왕위 계승이 잘못 처리되었으니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고 물러가야 했다. 게다가 프랑스 왕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잉글랜드 귀족들은 의회에서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에드워드 3세와 이자벨 왕비는 필리프 6세가 프랑스 국왕에 오르는 걸 용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국에 속한 영지의 영주로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헀다. 잉글랜드 왕실은 국왕의 위신을 손상시킬 이 일을 가능한 미루려 했지만, 필리프 6세가 속히 따르지 않으면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자,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로 보내기로 했다. 1329년 5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도버에서 출발했고 6월 6일 아미앵 대성당에서 필리프 6세에게 아키텐과 퐁티외의 주군으로서 필리프에게 선서를 했다. 그러나 의식 도중 손을 맞잡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공작령에 대해 필리프가 가진 주권을 부정했다. 필리프 6세는 이렇게 어물쩡하게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1330년 7월까지 기한을 주고 완전한 선서를 다시 하지 않으면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윽고 예고한 기한이 지나자, 그는 군대를 소집해 가스코뉴를 향한 공세를 개시해 여러 영지를 탈취했다.

이자벨과 모티머는 스코틀랜드 문제에서도 곤경을 겪었다. 두 사람은 처음엔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2세의 정책을 고수해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 왕국의 북부 지역으로 간주했다. 1327년 봄, 왕실군이 노섬벌랜드 일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북상했다. 왕실군의 공식 사령관은 에드워드 3세였지만, 실질적인 지휘관은 로저 모티머였다. 에드워드 3세는 5월 말에 요크에 도착한 뒤 6월 내내 그곳에서 보내면서 시장, 마을 사람들, 수도원장들의 접견을 받았다. 7월 초, 로저 모티머가 이끄는 왕실군이 요크에서 출진해 더럼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8월 3일 또는 4일 밤에 스탠호프 인근의 웨어 계곡에서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와해되었다. 당시 원정군에 동행하던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하마터면 잡힐 뻔했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제임스 더글러스가 "더글러스!"라고 외치며 곧장 잉글랜드 숙영지 중앙 지점으로 달려가서 왕실 텐트의 밧줄 몇 개를 잘라내는 바람에 텐트가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에드워드 3세는 한참 동안 그곳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구조되었다고 한다. 로저 모티머는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했지만 사기가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다고 보고 철수했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에드워드 3세가 원정 실패에 너무 격분해 철군하는 내내 울었다고 밝혔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북부 잉글랜드에 활개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실은 북부 잉글랜드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 지출은 7만 파운드였는데, 그중 41,000파운드가 용병에게 지급되었다. 반면 잉글랜드 정부의 연간 수입은 30,000 파운드였고, 수입을 제외한 지출액은 빚으로 충당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당국은 1327년 9월 중순 링컨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을 보호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산의 1/20를 직접세로 거두기로 했다. 그러나 로저 모티머와 이자벨은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일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로버트 1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고, 1328년 5월 1일 노샘프턴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협약을 굴욕이라고 여기고, 1328년 7월 여동생과 데이비드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으며, 신부에게 지참금을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한편,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는 에드워드 2세를 반대했다가 탄압받은 인사들을 복권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휴 디스펜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반역자로 규탄되었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며, 토머스가 잃어버렸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돌려줬다. 모티머 본인도 복권되었고, 처크의 제1대 모티머 남작이자 자신의 삼촌인 로저 모티머로부터 영지를 물려받은 것을 시작으로 웨일스에서 영지를 계속 늘려갔고, 마치 백작이라는 칭호도 받아냈다. 이자벨 역시 에드워드 2세에게 몰수되었던 모든 영지를 반환받았고, 다른 토지들도 계속 양도받은 결과 20,000파운드에 달하는 수입을 매년 챙김으로서 잉글랜드에서 가장 거대한 토지 소유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에드워드 2세가 복위를 시도할 것을 우려했던 그들은 1327년 9월 에드워드 2세를 구출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즉시 조치를 내렸다. 1327년 9월 23일 밤,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아버지가 이틀 전에 "자연적인 원인으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로저 모티머의 지시에 따라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현대 학자들도 이자벨과 모티머가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에드워드 2세의 유해는 12월 20일 글로스터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렇듯 이자벨과 모티머가 재산을 계속 늘려가며 권세를 누렸던 반면,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 왕비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자벨과 모티머는 왕실 재정을 통제하면서, 어린 왕과 왕비의 지출을 일일이 간섭해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이자벨은 잉글랜드 'Queen consort(왕비)' 직함을 독점하길 희망해, 필리파의 왕비 대관식을 가능한 한 미뤘다. 필리파의 대관식은 1330년 2월 18일이 되어서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는데, 당시 그녀는 흑태자 에드워드를 임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필리파는 잉글랜드에 온 이래 어떠한 토지도 수여받지 못했고, 독립적인 수입도 얻지 못했으며, 왕실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1327년 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가 로저 모티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모티머와 화해한 뒤, 로저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를 경계했다. 에드워드 3세는 로저 모티머가 활개치는 웨스트민스터와 런던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고, 모티머가 붙여놓은 스파이의 감시를 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이러한 억압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장차 왕권을 되찾기 위한 정변을 준비했다.

2.5.2. 친위 쿠데타

1329년 말 또는 1330년 초, 에드워드 3세는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몬타구에게 서신을 맡겨 교황 요한 22세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교황에게 보낸 서신에는 손글씨로 "pater sancte"(거룩한 아버지)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교황에게 자신이 권력을 되찾는 걸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로저 모티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젊은 귀족들을 대거 끌어들여 장차 쿠데타를 일으킬 시기를 노렸다. 그러던 1330년 10월, 모티머와 이자벨이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위험해진 가스코뉴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의회가 열릴 에정인 노팅엄 성으로 이동했다.

에드워드 3세는 노팅엄 성에서 거사를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그곳으로 향했지만, 모티머로부터 4명의 하인만 대동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그는 친구들과 상황을 논의했고, 그들 중 한 명인 윌리엄 몬타구는 즉시 거사를 단행하자고 촉구했다. 얼마 후 도시에 도착한 랭커스터 백작은 에드워드 3세에게 병력을 제공하면서 그들의 계획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저 모티머는 스파이들로부터 왕의 동료들이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왕과 그의 추종자 5명을 심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거사를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1330년 10월 19일, 에드워드 3세와 수행원들은 노팅엄 성을 떠났다. 그날 밤, 최소 1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공모자들이 지하 통로를 통해 요새로 들어왔다. 요새의 모든 복도와 통로의 구조를 완벽하게 알고 있던 노팅엄 성주 윌리엄 앨런드는 터널의 비밀 문을 잠그지 않았고, 공모자들에게 어둠 속에서 길을 보여줬다. 그렇게 성내로 들어간 공모자들은 이자벨이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로저 모티머는 이자벨과 한 곳에서 회담을 하고 있었고, 로저 모티머의 아들인 에드먼드와 제프리, 링컨 주교 헨리 베르거쉬, 기사 사이먼 베레스포드, 휴 터핑턴도 거기에 있었다. 방에 침입한 공모자들은 즉시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로저 모티머는 검을 가지러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지만 얼마 안가 제압되었다. 베르거쉬 주교는 변소를 통해 탈출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를 그곳에서 끌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자벨은 문가에 서서 동료들 뒤에 있었던 아들에게 외쳤다.
"에드워드! 선량한 모티머를 살려다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의 요청을 묵살했다. 그는 아침이 되자 국가를 자신의 손으로 장악했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한 뒤 1330년 11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의회를 소집한 후 로저 모티머를 "왕권과 정부를 찬탈하고 왕의 재산을 강탈"한 혐의로 기소했다. 모티머는 변호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채 유죄 판결을 받고 1330년 11월 29일 타이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만 반역자의 시신을 여러 개로 잘라서 여러 도시에 보내던 관례를 따르지 않고, 모티머의 유해를 런던에 온전히 묻었다가 코벤트리에 이장했다. 12월 24일에는 사이먼 베레스포드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잉글랜드를 탈출한 모티머의 추종자 다섯 명은 에드워드 2세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살해에 연루된 혐의로 궐석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이자 로저 모티머의 애인이있던 이자벨은 버크햄스테드 성에 이송되었다가 1332년까지 윈저 성에 갇혔고, 다시 노퍽의 캐슬 라이징으로 보내져 수년간 가택 연금되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3세가 그녀와 화해하면서, 특권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 후 이자벨은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가 낳은 첫 아이인 흑태자 에드워드를 무척 사랑해 종종 궁정에 찾아와서 어린 에드워드와 놀아주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모티머의 아들 제프리도 1331년에 사면되어 잉글랜드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있는 어머니의 재산 중 일부를 돌려받는 걸 허락했다.

2.5.3. 초기 치세

파일:Edward_III_Plantagenet_of_England_pays_homage.jpg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3세가 모티머를 처단하고 왕권을 탈환했을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1315 ~ 1322년 기근의 여파로 수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빈곤하게 살아갔고, 에드워드 2세 말과 에드워드 3세 치세 초반의 정치적 격변으로 관리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강도단이 여러 카운티에서 만연헀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해 귀족들과 협의한 끝에, 남작들이 범죄자들을 기소로부터 보호해주지 않고 왕과 그의 대리인들이 법을 준수하도록 돕겠다고 약속하게 했다. 또한 농민의 수확물 일부를 우선적으로 받을 왕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사법 개혁도 진행되어 고리타분한 순회재판 재도를 영구 왕실 대표 제도로 대체하고, 치안 수호자 지위를 도입해 각지에 만연한 강도단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겼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가스코뉴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저지해야 했다. 그는 이제 막 권력을 장악했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은 자국군 상황으로는 도저히 서유럽 최강국인 프랑스를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필리프 6세에게 선서를 다시 할 테니 침공을 멈춰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1331년 4월, 에드워드 3세는 상인으로 위장해 프랑스로 비밀 여행을 떠났고, 필리프 6세와 파리에서 접견한 뒤 필리프 6세 앞에서 선서를 다시 했다. 이리하여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가진 영지를 비롯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 대해 주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의 아버지 에드워드 2세는 과거에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를 상대로 명백한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토를 돌려줄 수는 없지만, 대신 자신이 원정을 감행하여 탈취한 영지를 전부 돌려주고 피해를 보상해주기로 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계획 중인 십자군에 동참하고 싶다고 대답함으로써 호의를 표했다.

그렇게 프랑스와의 갈등을 수습한 뒤, 에드워드 3세는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 영토가 현지인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1332년 여름, 에드워드 3세는 바다를 건너 아일랜드에 상륙하기 위해 군대를 항구에 집결시키라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헨리 드 보몽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 거물들은 노샘프턴 평화 협약 이후 잃어버린 스코틀랜드 영지를 되찾고 싶어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아일랜드 대신 스코틀랜드를 침공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때마침 로버트 1세가 1329년 6월 7일에 사망하고 5살의 어린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에 오른 뒤, 스코틀랜드 정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스코틀랜드를 공략할 가능성이 생겼다. 헨리 드 보몽 등은 지난날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웠던 존 발리올의 아들인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고 자기들 땅을 받아내려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직접 개입은 거부했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병대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2.5.4.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1332년 여름, 에드워드 발리올헨리 드 보몽, 헨리 퍼시, 월터 매니, 토머스 우트레드 등 잉글랜드 귀족 및 로버트 1세에 의해 추방당한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이들은 1332년 8월 11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섭정인 마르 백작 돔놀 2세를 전사시키고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쳤다. 이후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피신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은 1332년 9월 24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3개월 후인 1332년 12월 16일 아난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를 추종하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의 기습 공격으로 에드워드 발리올의 동생 헨리가 전사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은 추종자 몇 명만 데리고 잉글랜드로 도주했다.

1333년 2월,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그가 가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며, 스코틀랜드 남부를 잉글랜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3월, 에드워드 3세는 윌리엄 몬타구, 헨리 퍼시,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베릭을 포위했고, 7월 19일 할리든 힐 전투에서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맞붙었다. 당시 잉글랜드군의 규모는 스코틀랜드군의 절반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3세는 언덕에서 방어적인 위치를 차지한 뒤 하마기사 및 중장보병 3개 분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측면에 장궁병을 배치한 뒤, 자신은 중앙을 지휘하고 발리올이 우측면을 지휘했으며, 에드워드 3세의 동생이자 콘월 백작인 엘트햄의 존이 좌익을 맡았다. 스코틀랜드군 창병대가 언덕을 올라가자,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화살을 퍼부었다. 스코틀랜드 창병대가 화살비에 압도되어 멈춰서자,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해 물리쳤고, 발리올이 이끄는 기마병들이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모조리 섬멸했다. 에드워드 3세는 전투가 끝난 뒤 스코틀랜드 백작 6인의 유해를 몸소 매장했다.

할리든 힐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에드워드 3세는 베릭 성의 항복을 받아낸 뒤 스코틀랜드 대귀족들의 복종 서약을 받아냈다. 1334년 2월 에든버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에드워드 발리올의 대관식이 재차 거행되었고, 이후 뉴캐슬어폰타인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서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로디언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저지대 지역을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했다. 또한 데이비드 2세와 결혼했던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앤과 약혼했다. 에드워드 3세는 원정 성과에 크게 만족하며 런던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발리올의 입지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았다. 로버트 1세에게 추방당했다가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복귀한 귀족들과 브루스 가문의 지지자들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에이셔의 로버트 스튜어트와 리데스데일의 영주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데이비드 2세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존은 1334년 8월 반란군을 피해 베릭 성으로 이동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1334년 말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겨울 추위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133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서 로우랜드를 휩쓸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산악 지대에 숨어서 농성하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있든 프랑스 왕국이 개입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준비에 한창 몰두하고 있었지만, 주요 동맹국이 무너진 채로 원정을 떠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에드워드 3세에게 항의했다. 1334년 5월,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가 에드워드 2세로부터 빼앗은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신도 십자군에 동참하겠으며, 스코틀랜드 문제는 잊어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필리프 6세는 프랑스의 충실한 동맹국이었던 스코틀랜드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여겨 거부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꼭 가고 싶었기에 잉글랜드를 대놓고 적대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스코틀랜드 저항군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스코틀랜드와 노르망디 사략선이 영국해협에서 잉글랜드 선박들을 약탈하도록 했다. 이후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를 돕기 위해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장병 6,000명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하겠다고 선언했다. 1335년 8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가 오랜 앙숙인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것에 격분했고, 양국간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분쟁 조정을 위해 자신과 함께 중재를 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교황은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편을 들고 있는 그에게는 중재자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며 혼자서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협상은 양자간의 입장차가 너무 커서 실패했고, 베네딕토 12세는 필리프 6세에게 십자군을 취소하라고 권고했다. 1336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재차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해안가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경작지를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수도원의 식량창고를 약탈한 뒤 에버딘을 파괴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분노해 8월 20일 파리에 찾아온 잉글랜드 사절단에게 함대를 규합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해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후 프랑스 전함들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파리 법원은 1336년 12월에 잉글랜드로 망명한 로베르 다르투아를 인도할 것을 잉글랜드에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맞서 프랑스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항전할 것을 호소해 여론의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했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이 프랑스 왕국 전역에 선포되었고, 프랑스 국왕에게 반기를 든 '아키텐 공작 에드워드'의 영지를 몰수한다는 결의안이 뒤이어 선포되었다. 그해 7월, 1만여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 가스코뉴 국경지대의 여러 마을을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었고, 에노 백국, 겔데른 백국, 림부르크 백국, 율리히 공국, 브라반트 공국, 팔츠 선제후국의 동치자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 과정에서 동맹을 맺는 대가로 보조금을 약속했는데, 그 금액은 124,000 파운드에 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막대한 액수를 얻기 위해 1337년의 대부분과 1338년 상반기에 자금을 조달했다. 이탈리아 은행가, 특히 바르디와 페루치 가문으로부터 거액을 빌렸고, 의회 및 성직자와 세금 협상을 했으며, 재정적 이익을 얻기 위해 국제 양모 무역을 통제했다. 왕실이 잉글랜드 수도원에서 가져온 금은 도구와 왕실 보석은 대출을 확보하기 위한 담보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 신민들은 특별세를 자주 내야 했다. 또한 양모 거래에 대한 독점권을 상인들에게 넘기는 대가로 자금을 받아내려 했지만, 상인들이 잘 호응하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2.5.5. 플란데런 반란

1336년 8월 12일,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프랑스 왕국에 보복하기 위해 프랑스 본토와 프랑스의 속국들에 양모와 가죽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당시 모직업이 번창했던 플란데런 도시들은 막대한 양모를 생산하는 잉글랜드와의 무역에 사활을 걸었다. 그런 그들에게 에드워드 3세의 양모 수출 금지령은 심대한 충격이었다. 잉글랜드가 더 이상 양모를 팔지 않는다면 그들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을 게 자명했다. 더욱이 당시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느베르는 파리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프랑스 국왕에 충성을 바치는 반면에 플란데런을 거의 들리지 않으면서 플란데런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숙청했다. 이에 플란데런 주민들은 깊은 반감을 품었고,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갈수록 강해졌다.

플란데런 내 친 잉글랜드 파벌의 지도자는 헨트의 부유한 방직업자인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Jacob Van Artevelde, 1290 ~ 1345)였다. 그는 탁월한 웅변술을 발휘해 동료들이 부재중인 압제자에 반기를 들고 잉글랜드의 친구가 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떠받들었고, 그는 헨트의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을 반역자로 선고하고 가스코뉴를 공격한 필리프 6세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에드워드 3세는 플란데런에서 반 프랑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치르면서 국고가 텅 비어버렸고, 왕은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무기, 물자 수급에 들어가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의 여러 대급업자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야 했다. 이 막대한 빚을 감당하려면 새로운 재원 마련이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부유하기로 유명한 플란데런을 자기 편으로 확고히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지시를 받은 사절들은 플란데런 각지를 돌며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으라고 권유했다. 그 결과 헨트, 브뤼헤, 이프르 등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무역을 정상화하는 조약을 맺기로 했다. 특히 야코브는 헨트에서 사절단을 만나 잉글랜드군이 플랑드르에 상륙하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프랑스를 합동 공격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하니, 당분간은 잉글랜드에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 정도로 해주겠다고 밝혔다. 사절단은 잉글랜드로 곧장 돌아가서 야코브의 제안을 전달했다.

하지만 모든 플란데런 일대가 잉글랜드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프랑스군 수비대 및 해군이 주둔한 항구 도시 슬로이스와 스헬트 강 입구에 위치한 카잔트 섬은 야코브의 대의에 따르길 거부하고 필리프 6세를 변함없이 지지했다. 두 도시에 주둔한 수비대는 영국 해협을 가로질러 오가는 잉글랜드 상선을 종종 위협했다. 이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에 상륙한 뒤 프랑스로 진군할 때 보급로를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빠르고 쉬운 승리를 한시바삐 거둬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우려를 표하고 있는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로 마음먹고, 플란데런에 소규모 군대를 파견해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프랑스 수비대를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1337년 11월,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플란데런 백국으로 파견되어 카잔트 전투에서 프랑스를 지지하는 플란데런 민병대를 격파했다. 예정대로라면 슬로이스 시를 공격해야 했지만, 월터 매니는 카잔트와 며칠 거리에 있는 볼로뉴 쉬르 메르에 프랑스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잘 요새화된 슬로이스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거기에 묶여있는 사이에 프랑스군의 요격으로 섬멸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포로와 약탈품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카잔트 전투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에드워드 3세가 원했던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이들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품기 시작했고, 플란데런의 친 프랑스 인사들은 잉글랜드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겁먹었다. 이에 고무된 플란데런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필리프 6세에 더욱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대응해 막대한 돈을 분배해 보데몽 백국, 제네바 백국, 사보이 백국을 자국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보헤미아 왕국의 지원도 확보했다. 여기에 제노바 공화국에게 거액의 돈을 지급하고 함선과 숙련된 석궁병들을 고용했다. 가장 큰 성과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의 동맹이었다. 1336년 12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는 프랑스 왕에게 대서양 에서 매우 유용한 해상 지원을 약속했다. 이리하여 백년전쟁이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2.5.6. 백년전쟁(1338 ~ 1347)

2.5.6.1. 전쟁 초기(1338 ~ 1340)
2.5.6.1.1. 영국 해협 전역
1338년 2월, 필리프 6세는 카잔트 전투에 보복하기 위해 전임 재무부 관료이자 해군 장성인 니콜라 바후셰를 프랑스 제독으로 선임하고 잉글랜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338년 3월 24일, 바후셰는 소형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칼레에서 영국해협을 건너 포츠머스에 접근했다. 그들은 잉글랜드 국기를 걸어서 잉글랜드인들을 속여 포츠머스에 상륙한 뒤 배에서 내려서 눈에 띄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교회와 구호소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후 채널 제도에 상륙하여 건지 마을에서도 약탈을 자행했다. 미처 프랑스와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잉글랜드군은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잉글랜드 당국과 국민들은 포츠머스 습격 사건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고, 잉글랜드 남부 해안선을 따라 방어 요새를 설치하고 군대 및 함대를 배치하는 조치가 잇따라 내려졌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 상륙할 병력 모집은 차질을 빛었다. 심지어 영국 남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데본과 콘월 영주들도 프랑스군이 여기까지 들이닥칠 수 있으니 수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면서 프랑스로 원정갈 병사들을 지원할 물자와 자금을 달라는 왕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노르망디, 피카르디, 브류타뉴의 영주 및 상인들이 각자 전함을 사들여서 잉글랜드 해안을 종종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포로들을 돌려주는 대가로 몸값을 뜯어내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338년 5월, 필리프 6세가 제노바와 카스티야에서 고용한 갤리선 80척이 칼레에 이르렀다. 바후셰는 이들을 이끌고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잉글랜드 상선들을 탈취했다. 그 해 9월, 프랑스 원수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이 이끄는 프랑스-제노바 연합 함대는 먼저 채널 제도를 공격했다. 사크 섬은 전투 없이 함락되었고, 건지 섬은 제노바 선박 2척이 침몰한 짧은 전투 끝에 함락된 뒤 수비대 전원이 처형되었다.

1338년 9월 23일, 니콜라 바후셰와 위그 키에레 제독이 전함 48척을 이끌고 양모를 팔기 위해 플란데런의 아르네뮤이덴 항구에 접근하던 잉글랜드 상선 5척을 위그 카이레와 함께 습격했다. 잉글랜드인들이 대포를 처음으로 해전에서 사용하는 등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자, 이 해전에서 900명 이상 잃은 것에 화가 단단히 난 두 제독은 존 킹스턴 선장을 비롯한 잉글랜드 선원 전원을 몰살하고 상선 5척과 대포 및 화물을 포획했다.(아르네뮤이덴 해전)

1338년 10월 5일, 프랑스 함대는 수천 명의 프랑스, 노르만, 제노바, 카스티야 수병들을 사우스햄튼 항구 인근에 상륙시킨 뒤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사우샘프턴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마을 민병대와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시골로 도망쳤고, 일부 수비대는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사우샘프턴 전역이 파괴되고 수천 파운드 상당의 물품과 선박, 포로들이 프랑스로 끌려갔다. 다음날 뒤늦게 조직된 민병대가 마을 외곽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자, 프랑스군은 함대에 몸을 싣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사우샘프턴의 상업은 1년간 마비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함대가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영국과 보르도 사이의 해상 보급을 수행하고자 식량을 수송하던 영국 선박들을 나포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가스코뉴 주민들의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지는 갈수록 약해졌다. 이들은 1337년 프랑스군의 침공을 잘 막아냈고 1338년 여름 프랑스군이 침공을 가했을 때 역시 막아냈지만, 그해 11월 필리프가 북부 프랑스에서 모집한 주력군을 가스코뉴로 파견하자 속절없이 밀려났고, 1339년 7월에는 보르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이 프랑스군에 넘어가고 보르도는 프랑스군에 포위되었다. 프랑스군은 미리 매수한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주자 즉시 성내로 진입했지만, 수비대와 민병대가 결사적으로 반격하면서 공략에 실패하자 장기적인 포위 공격을 위한 공성 장비나 보급 계획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철수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보르도마저 프랑스에게 넘어갈 게 자명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지대를 다스리는 백작들에게 민병대를 대폭 강화해 프랑스 함대가 또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막게 하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백작들은 최선을 다해 수비에 임했고, 프랑스 함대의 사우샘프턴과 플리머스, 저지 섬에 대한 재침은 격퇴되었다. 다만 헤이스팅스가 급습당해 파괴되고 그곳에 살던 어선 몇 척이 나포되고 살해당한 어민들의 시신이 칼레 거리에서 전시되었다. 1339년 여름, 몰리 남작 로버트가 이끄는 잉글랜드와 플란데런 함대가 반격에 착수했다. 그들은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 뒤 올트와 르 트레포르 마을을 파괴하고 내륙으로 좀더 들어가면서 여러 마을을 황폐화했다. 뒤이어 볼로뉴 항구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기습해 파괴했다. 한편 필리프 6세에게 반기를 든 플란데런 함대도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그 해 9월에 디에프 시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2.5.6.1.2. 캉브레 전역
1338년 7월 22일,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향한 원정을 감행하기 위해 자신과 손잡기로 한 플란데런의 항구도시인 안트베르펜에 상륙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정부의 자금난이 극심했기 때문에 프랑스를 향할 원정을 감행할 자금과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고, 처음에는 잉글랜드 왕을 환영했던 플란데런 상인들은 자신들에게 돈을 꿔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승인 없이는 외국 영토를 공격할 수 없다며 발을 빼려 했다.

설상가상으로 루트비히 4세 마저 프랑스와 협상을 통해 분쟁을 끝내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워드 3세는 12,000파운드에 달하는 자금을 수레에 싣고 코블렌츠로 달려가서 황제에게 6000파운드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황제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뇌물로 뿌렸다. 이에 루트비히 4세는 마음을 달리 먹고 9월 5일 선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에드워드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에드워드의 전쟁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제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에 대한 불복종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선언했다. 에드워드는 안트베르펀으로 돌아온 뒤 황제 대리인의 이름으로 불복종 시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며 저지대 군주들을 소환했고, 10월 12일 내륙에 있는 소도시 헤르크에서 그들 모두의 충성 맹세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 침공은 1339년 7월로 정해졌지만, 에드워드는 그때까지 자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해 원정을 결행하기도 전에 파산당할 지경에 몰렸다. 에드워드는 플란데런 영주들에게 잉글랜드 채권을 강매했지만,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킹스턴의 부유한 양모상이자 에드워드 3세의 총신인 윌리엄 드 라 폴이 용케도 1만 파운드 이상의 거금을 구해서 왕에게 빌려주면서, 자금난이 일시적으로나마 해소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을 구해준 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1339년 9월 20일, 에드워드 3세는 비로소 12,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가 첫 목표로 삼은 곳은 프랑스 오드프랑스 지역의 노르주에 위치한 캉브레였다. 이 곳은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자유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캉브레에는 300명의 프랑스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캉브레 주교 기욤 도손이 수장으로 군림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곳을 공략해 루트비히 4세에게 넘김으로써 황제의 지지를 보다 확실히 얻어내고, 필리프 6세가 캉브레를 구하러 달려온다면 즉시 요격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9월 26일 캉브레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기욤에게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했지만, 기욤은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을 표명하며 거부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공성전을 벌였지만, 프랑스 수비대가 대포 10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공략에 실패했다. 그러던 중 필리프 6세가 두 배 이상의 병력을 콩피에뉴에 집결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워드 3세는 포위를 풀고 캉브레에서 물러났다.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캉브레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 즉시 요격하여 끝장내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의 재정 상태가 지극히 열악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자신이 캉브레에 대한 이권을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라도 하면 루트비히 4세 역시 에드워드를 더는 지원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하고 콩피에뉴에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어떻게든 필리프 6세와 승부를 빨리 보고 싶었던 에드워드는 프랑스 영내로 진입했다. 이에 필리프 6세가 군대를 이동시켰고, 양군은 페론 시 인근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 곳은 필리프 6세의 확고한 영토라서 전장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야음을 틈타 동쪽으로 후퇴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생캉탱 동쪽의 소도시인 오리니를 점령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성채와 마을과 소도시들을 약탈하고 불태우며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에 필리프는 10월 17일 에드워드에게 야전으로 한판 붙자는 내용의 도전장을 보냈고, 에드워드는 이를 수락한 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에노 백령과의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당초 기스 시의 다리를 통해 우아즈 강을 건너려 했지만, 기스 수비대가 다리 통과를 거부하자 인근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우아즈 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10월 21일 에노 백령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소도시 라 카벨을 점령한 뒤 도시와 북서쪽의 숲 사이의 경사진 장소에 진지를 세웠다.

10월 22일 프랑스군이 라 카펠에 도착했고, 양군은 곧바로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그러나 프랑스 장군들이 "우회할 공간은 없으니 정면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고, 정면 공격 시 적 경보병들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잉글랜드 궁수들의 화살 세례를 양쪽에서 받아서 궤멸될 공산이 크니 전투를 미뤄야 한다"라고 진언하자, 필리프 6세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라 카펠에서 물러났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군이 물러나자 필리프가 도망쳤으므로 자신이 전투의 재판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뒤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갔다.
2.5.6.1.3. 슬로이스 해전투르네 공방전
1340년 1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새로운 프랑스 국왕을 옹립하려는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를 비롯한 플란데런인들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헨트 시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플란데런 도시 행정관들과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은 뒤 수많은 군중 앞에서 프랑스 왕으로서 플란데런인들이 선왕들과 맺었던 조약의 의무를 면제하겠다고 선포해 민중의 환호를 받았다. 그 후 2월에 프랑스 왕국 전역에 자신이 루이 9세의 선한 법과 관습을 복구할 것이며, 필리프 4세 이후 왕실이 신민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해온 화폐 가치 절하를 중단할 것이고, 프랑스 왕들은 앞으로 언제나 왕국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조언을 듣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반포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맞서 에드워드의 포고문의 사본을 소지한 사람은 누구나 반역죄로 처벌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플란데런 도시들을 대상으로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렇듯 프랑스 왕을 자처하는 등 기세를 한껏 끌어올렸지만, 막상 에드워드 3세 앞에 놓인 현실은 매우 가혹했다. 수 년 전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국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국내와 플란데런, 이탈리아의 금융업자들로부터 돈을 마구 빌리면서 빚과 이자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나마도 1340년 초에 이르러 더 이상 돈을 빌릴 곳이 없었고, 약 4만 파운드에 달하는 빚을 가까운 시일 내에 납부하지 않으면 파산하고 말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게 했으나, 의원들은 에드워드의 총신들이 조세를 수시로 횡령한 것을 지적하며 이를 조사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을 제정할 위원회를 자기들 선에서 구성하려 하니 그럴 권한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총리로서 왕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고 있던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는 이런 중대한 문제를 자기 선에서 처리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왕에게 국내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는 즉시 잉글랜드로 가려 했지만, 돈을 떼일까 두려워한 플란데런 귀족 및 상인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결국 그는 필리파 왕비와 두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앤트워프의 라이오넬,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 서퍽 백작 로버트 우퍼드를 인질로 남겨두는 조건으로 잉글랜드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의회의 요구를 허락하고 잉글랜드가 프랑스 왕국과 합병되어서는 안 되며 프랑스 왕의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신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상원과 하원의 청원에도 엄숙히 동의했다. 이에 의회는 4월 3일에 5만 파운드 이상의 전쟁세를 통과시키기로 결의했다.

1340년 4월, 에드워드 3세가 의회와 협상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간 사이, 플란데런에 잔존한 잉글랜드군과 신성 로마 제국군, 플란데런군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투르네 공세에 착수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행군 도중에 지휘관인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서퍽 백작 로버트 우퍼드가 프랑스 기병의 기습 공격에 생포된 뒤 파리의 샤를레 감옥에 수감되자 안트베르펜으로 퇴각했고, 신성 로마 제국군은 티에라슈에 새로운 프랑스군이 집결 중이라는 잘못된 첩보를 믿고 그들을 기습하려고 그곳에 갔다가 허탕만 치고 인근 마을 수십 곳을 약탈하다가 다른 곳에서 집결을 마친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철수했다. 유일하게 투르네 시에 도착한 플란데런군은 다른 군대가 오지 않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5월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순식간에 에노 백령의 수도인 발랑시엔을 포위하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근처 마을들을 약탈하러 흩어진 사이 23일 새벽 성문 밖으로 나온 주둔군과 민병대의 기습을 받고 패주했다. 캉브레지 북부로 후퇴해서 재정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이제 보급로를 위협하는 국경 지역의 요새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고, 플랑데런 시민 정부와 저지대 군주들이 보낸 지원군을 각각 투르네 근처의 스카르프 강과 툰 레베크 근처의 스헬더 강에서 격퇴한 뒤 6월 23일 툰 레베크를 점령하고 부샹으로 향했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상황이 위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3세는 서둘러 함대를 끌어모은 뒤 플란데런으로 돌아가서 투르네로 진군하길 원했다. 그러나 함대를 소집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해군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왕은 소수의 배만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그가 더 많은 함대를 끌어모으려면 상선을 임시로 징발해야 했다. 징발된 배와 선장, 선원들은 전쟁 기간 동안 복무하는 대가로 급료를 받았다.[7]

그러나 에드워드 왕이 막대한 빚더미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급료를 지급받긴 커녕 아까운 배나 잃을까 두려워한 상인들이 쉽사리 징발에 응하지 않았기에 함대 규합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출항 날짜가 계속 연기되자, 에드워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340년 6월 4일에 당장 출항할 수 있는 40척의 선박 만으로 출항하기로 했다. 그런데 프랑스에 보내뒀던 첩보원이 중대한 소식을 알려줬다. 프랑스 전함 213척과 2만에 달하는 병력이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했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사전에 잉글랜드에 보내둔 첩자를 통해 에드워드가 슬로이스 항구를 통해 플란데런으로 돌아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를 중도에서 가로막아 궤멸시킨 뒤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끝장을 내려 했다.

에드워드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이들이 잉글랜드로 쳐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선제공격을 가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를 포함한 최고 고문들을 소환한 뒤 가능한 한 빨리 출항하겠다고 선언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40척만 이끌고 213척을 상대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에 경악해 왕에게 그런 자살 행위는 하지 말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왕이 고집을 꺾지 않자, 캔터베리 대주교는 잔뜩 흥분한 나머지 뛰쳐나갔고, 얼마 후 "강인하고 강력한 군주와 논쟁을 벌이기에는 너무 늙었다"라며 총리직을 사임했다. 에드워드는 다음으로 제독 로버트 몰리와 몰리의 부관인 잭 크랩베를 불러 자신과 함께 출항하자고 권유했지만, 두 사람 모두 캔터베리 대주교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격분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집에 있어도 좋다! 나는 죽더라도 바다로 떠나겠다!"

하지만 두 제독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지금 당장 바다를 건너기엔 풍향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지적해가며 설득하자, 왕은 곧 진정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전역에 프랑스 대함대가 조국을 침공하기 위해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함을 모집하니 조속히 모일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필리프와 내통한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프랑스에 대한 오랜 적개심과 조국을 지키겠다는 애국심, 에드워드 왕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등에 휩싸인 상인들이 앞다퉈 응하면서, 오웰호에 수많은 배가 빠른 시일에 집결했다. 얼마나 많은 선박이 모였는지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기에 확실하지 않으나, 학자들은 연대기들의 기록에 근거해 120~150척 정도였을 거라 추정한다. 함대에 탑승할 이들은 백작 10명, 기수 50명, 기사 600명, 전투병을 포함한 선원 12,000명이었다. 이중 7,000명은 장궁병이었다.

파일:BattleofSluys.jpg

1340년 6월 24일, 에드워드 3세는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궤멸시키고 슬로이스에 상륙했다. 그는 이 기세를 이어가 육지에서도 프랑스군을 무찌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지난날 아르투아 백작위를 놓고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와 분쟁을 벌이다가 패배한 뒤 잉글랜드로 망명했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에게 10,000명에서 15,000명 가량의 플란데런인과 1,0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을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여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고, 프랑스와 플란데런 국경지대의 중요한 도시인 생오메르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로베르는 생오메르로 진군했지만 생오메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퇴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로베르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본군을 이끌고 투르네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후 필리프 6세의 프랑스 본대가 생오메르로 긴군하는 로베르를 요격하기 위해 그 쪽으로 이동한 사이, 에드워드 3세는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플란데런군과 브라반트 공작 장 3세가 이끄는 브라반트군, 에노 백작 기욤 2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함께 투르네로 진격했다. 당대의 프랑스 연대기는 연합군 규모가 12만 명에 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고 최대 23,000명, 최소 16,000명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에 맞서는 투르네에는 주민들 외에도 5,800명의 프랑스 수비대가 있었다. 이 수비대는 프랑스 국경 수비대장 라울 1세 드 브리엔이 이끄는 현지 주둔군과 필리프 6세가 파견한 푸아 백작 가스통 2세 드 푸아가 지휘하는 2,500~3,000명의 기병 및 중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연합군은 1340년 7월 23일 투르네에 도착한 뒤 공방전을 개시했지만, 투르네 성벽이 매우 탄탄해 쉽게 뚫리지 않는데다 연합군 내부의 불협화음이 심했고, 잉글랜드 의회가 국왕을 위해 보내기로 한 5만 파운드 가량의 자금이 들어오지 않으면서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기에 장병들의 전의가 갈수록 떨어졌다. 그러다가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투르네 인근에 이르자, 브라반트 공작과 에노 백작이 이끄는 장병들이 급여를 주지 않는다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필리프 6세와 평화 협상을 가질 기회를 엿보았다.

한편, 프랑스 진영에서는 에노 백작부인이자 필리프 6세의 여동생이며 에드워드 3세의 시어머니이기도 한 발루아의 잔이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요청에 따라 양자의 화해를 주선했다. 필리프 6세는 전쟁이 발발한 1337년부터 1340년까지 화폐 가치를 5번이나 떨어뜨려야 할 정도로 재정이 악화되고 프랑스 북부의 많은 마을이 파괴되고 인명이 살상되는 상황에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연합군을 상대로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잔은 9월 22일 연합군 진영에 가서 에드워드 3세에게도 같은 호소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2.5.6.2.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과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대립
1340년 9월 25일,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는 양국은 1341년 6월 24일까지 9개월 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한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Trêve d'Esplechin)을 체결했다. 이후 연합군은 즉시 해산되었고, 필리프 6세는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던 투르네 주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에드워드 3세는 헨트에 도착한 뒤 플란데런 귀족 및 상인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10월 28일 자신이 더 이상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면서 사과하는 글을 남겨둔 채 잉글랜드로 몰래 도주했다. 한편, 1340년 데이비드 2세 지지자들이 스코틀랜드에서 유격전을 벌여 잉글랜드 북부를 습격했고, 리데슬레일의 영주 윌리엄 더글러스는 에딘버러를 탈환했다. 그 후 데이비드 2세는 1341년 6월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1340년 11월 30일 런던에 예고도 없이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자신에게 돈을 보내지 않은 장관들을 비난하고 로버트 드 스트랫퍼드 총리, 런던 시장, 재무관 윌리엄 드 라 폴, 리처드 드 라 폴 등을 체포해 런던 탑에 가두었다. 이러한 장관 숙청으로 인해 1341년 첫 4개월 동안 잉글랜드 정부는 마비되었고, 존 챈더스 휘하의 잉글랜드군은 런던 인근 마을과 작은 성을 약탈하고 불태워가며 왕을 위한 자금을 모으려 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제3대 칸틸루프 남작 니콜라스 드 칸틸루프를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에게 보내 루벤 상인들에 대한 빚을 청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먼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하라고 덧붙였다. 스트랫퍼드는 신변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할 거라 여기고 런던으로 가기를 주저했다. 1340년 12월 29일,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했을 때 자신이 세속적 일에 연루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불평함으로써, 군자금을 보내지 않은 것에 책임을 묻는 왕실의 비난에 공개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하면서도, 자신을 미워하고 반역자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대헌장의 규정을 위반해 장관과 판사들을 무단으로 체포했다며, 그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340년 12월 31일, 스트랫퍼드는 잉글랜드의 모든 주교들에게 <Sacrosancta ecclesia(거룩한 교회)> 편지를 배포했다. 이 편지는 런던 주교이자 캔터베리 교회 관구의 학장이며, 그의 조카이기도 한 랄프 스트랫퍼드가 쓴 <교회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러면서 늙은 신하의 지혜로운 조언을 듣지 않은 르호보암 왕을 거론하면서, 에드워드 3세를 간접적으로 비판했으며, 에드워드 3세가 대관식 때 성직자, 귀족 및 국민의 의지를 존중하겠다고 서약한 사실과 에드워드 2세가 이를 무시했다가 폐위된 사실을 상기했다. 에드워드 3세는 랄프 드 스태퍼드를 파견해 스트랫퍼드에게 런던으로 오라고 재차 요구했지만, 스트랫퍼드는 왕이 자신에게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소환에 응할 수 없다고 답했다.

스트랫퍼드는 이후에 두 개의 다른 편지를 성직자들에게 보냈다. 첫번째 편지에서, 그는 잉글랜드 총리 로버트 부르시에에게 과도한 세금을 불법적으로 부과한 것에 항의했다는 것을 알렸고, 두번째 편지에서는 성직자에게 부과된 높은 재정적 요구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비판했다. 1341년 2월, 에드워드 3세는 윈체스터 주교 아담 올턴을 시켜 <Libellus famosus(유명한 책)>을 작성 및 배포하게 해, 캔터베리 대주교가 왕국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스트랫퍼드는 이에 대응해 변론서를 배포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을 완고한 젊은 왕과 맞서는 노인 정치가로 소개하면서, 왕이 자신에 대해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을 가져올 나쁜 조언자들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본문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공로에 대해 왕으로부터 어떤 보상이나 호의도 받지 못했을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총리로서의 자신의 행동에 변론해야 한다면 의회만이 이를 위해 자신을 소환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이렇듯 스트랫퍼드의 연이은 비판으로 인해 민심이 격앙되고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일자, 에드워드 3세는 뒤늦게야 자신이 아버지 에드워드 2세처럼 반란군에 의해 폐위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1341년 4월 23일 윈체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귀족들과 화해하고 과세 혜택을 받는 대가로 재정, 행정에 대한 왕권 행사에 규제를 두는 법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의회에 참석하려던 스트랫퍼드는 왕실 근위병들에게 접근이 거부되었다. 근위병들은 폭력을 행사하길 기피했지만, 그의 열렬한 반대자인 존 다아시와 윌리엄 킬스비가 그를 향해 돌진해 폭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온건한 고문들에게 저지되었다. 이후 스트랫퍼드는 8명의 세속 귀족과 네명의 주교로 구성된 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의회에 출석해 모든 혐의를 밝히겠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이후 많은 잉글랜드 대귀족들이 대주교의 말을 직접 듣고 싶다며 압력을 가하자, 에드워드 3세는 어쩔 수 없이 4월 28일에 스트랫퍼드를 의회에 출석시켜 그에 대한 혐의를 밝히게 했다. 그 후 하원 의원 뿐만 아니라 대귀족과 고위 성직자들 대다수가 스트랫퍼드의 편에 서서 그를 지지하는 청원서를 작성했고, 에드워드 3세는 5월 3일에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의회가 왕실 예산을 감찰하는 권한이 인정되었고, 왕국의 주요 장관들이 의회에서 취임 선서를 하도록 요구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또한 잉글랜드 왕국의 영주와 장관은 체포될 수 없으며 오직 "평등한 법원의 의회"에서만 재판을 받을 수 있고, 왕은 이 결정에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 법령이 왕의 특권을 침해한다고 여겼기에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1341년 10월 1일, 에드워드 3세는 분위기가 잠잠해진 틈을 타 의회가 제정한 일련의 법령을 폐지했다. 10월 23일, 에드워드 3세와 스트랫퍼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하지만 왕에게 군자금을 제대로 보내지 않고 불경한 언사를 내뱉은 혐의는 계속 이어지다가 1343년에 이르러서야 왕의 특명으로 해제되었다. 이후 그는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원로 정치가로서 존중받았고, 에드워드 3세가 1345년과 1346년에 잉글랜드를 떠나 있는 동안 의회 의장 직을 맡았다.

1341년의 정치적 위기는 에드워드 3세가 자칫하면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와 아버지처럼 폐위될 수 있었던 중대한 고비였다. 그는 의회에게 많은 정치적 양보를 해 이를 무마했고, 그 대가로 새로운 자금원을 협상할 만큼 충분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주요 수출품인 양모에 직접세가 도입되어 왕실의 수입이 126,000파운드에 이르렀다.
2.5.6.3.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여조카인 잔 드 팡티에브르가 브르타뉴 여공작에 선임되었다. 장 3세는 오래전부터 잔을 후계자로 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실과 친프랑스파 귀족 및 성직자들의 후원을 받게 했다. 그러나 장 3세의 배다른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반발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여자는 공작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며 자신이 공작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드 몽포르는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게 위해 파리로 간 틈을 타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군대를 일으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1341년 10월, 샤를 드 블루아는 샹토소 전투에서 장 드 몽포르를 격파한 뒤 낭트를 포위 공격한 끝에 장을 사로잡아서 루브르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하지만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잔 드 플란데런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마음먹고, 신뢰할 수 있는 측근 한 명을 잉글랜드로 보내 원군을 요청하게 한 뒤 엔봉에서 농성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잔 드 플란데런을 돕기로 하고,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파견해 엔봉 공방전을 치르고 있던 그녀를 구원했다.

1342년 8월,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또다른 잉글랜드군이 브레스트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브레스트 항구에 상륙한 뒤 브르타뉴 서부 일대를 신속하게 공략했다. 그 해 10월, 아르투아 백작을 자칭하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부관으로서 활동하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10,0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반으로 진군했다. 잔 드 플란데런과 월터 매니도 엔봉에서 100명의 기병과 100명의 궁수와 함께 로베르에 합류했다. 이들은 반 성을 향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지만, 반 성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은 브르타뉴 마르쉐 영주이자 기사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결사적으로 항전해서 실패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계략을 통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로베르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반 성문 앞에 불을 피워서 수비대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그 동안 월터 매니가 이끄는 소규모 장병들이 수비대가 비워두고 있던 성벽을 기어올라간 뒤 성이 함락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 이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매니가 열어준 성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가 여전히 싸우려 하는 적병들을 압도했다. 플란데런의 잔은 다음날 반에 도착한 뒤 닷새 동안 머물다가 로베르에게 반 성의 권리를 넘기고 월터 매니와 함께 엔봉으로 돌아갔다.

한편, 올리비에 4세는 성이 함락되었을 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격분해 12,600명의 병력을 모아서 반으로 향했다. 그 해 11월 올리비에 4세가 들이닥쳤을 때, 이전 공성전 때 파괴되었던 성벽은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잉글랜드군은 렌으로 가버렸기에 조기에 구원하러 올 수 없었다. 로베르는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중상을 입은 뒤 런던으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반은 철저하게 약탈당한 뒤 올리비에에게 재귀속되었다.

이 무렵 잉글랜드 본군을 이끌고 브레스트에 상륙한 에드워드 3세는 반이 재차 함락되었으며 로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르투아 백작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반으로 진격했다. 1342년 12월 5일 반을 포위한 에드워드 3세는 주변 마을을 모조리 약탈했고 성을 수시로 공격했다. 올리비에 4세는 이에 맞서 종종 출격해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 생포되었다. 하지만 수비대는 지휘관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스태퍼드 백작 랄프를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수만 병력을 규합하여 브르타뉴로 진군해 플로에르멜 마을 인근에 주둔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수비하기 좋은 지형에 자리를 잡고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터라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고, 갈수록 쌓여가는 재정 적자에 큰 부담을 느꼈다. 에드워드 3세 역시 안토니오 도리아가 이끄는 프랑스-카스티야 함대가 무기와 보급품을 수송하는 모든 잉글랜드 선박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중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사절이 개입해 휴전을 맺으라고 촉구하자, 양자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1343년 1월 19일, 양국은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들은 3년간 휴전을 준수하기로 했고, 반은 클레멘스 6세의 추기경이 임시로 관리하기로 했다. 또한 루브르 감옥에 갇혀 있던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는 전임 공작 장 3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딸 잔이 물려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반 주민과 지역 성직자들은 장 드 몽포르에게 충성했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몇 달 후인 1343년 9월 추기경을 몰아낸 뒤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1344년 3월, 샤를 드 블루아는 반 주민들이 추기경을 몰아내고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인 것을 빌미로 삼아 평화 협약이 깨졌다고 주장하며 공새를 개시해 몽포르 파벌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1344년 3월, 샤를은 캉페르를 포위해 5월 1일에 함락시킨 뒤 1,400 ~ 2,000명 가량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몽포르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생포된 잉글랜드 포로들은 몸값을 받기 위해 따로 구금되었지만, 파리로 이송된 뒤 반역죄가 적용되어 처형되었다.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로 비밀리에 이동해 세력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45년 3월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내전이 종결되는 듯했지만, 1346년 여름 에드워드 3세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에게 정예병 수백 명을 맡겨 장 드 몽포르와 함께 브르타뉴로 파견하면서 재개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브르타뉴 해안지대의 몇 개 마을과 요새를 공략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병사 1,000여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1346년 6월 9일, 생폴드레옹 전투에서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샤를 드 블루아를 격파했다. 이후 샤를은 군대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7월 캉페르 탈환에 착수했다가 샤를에게 격퇴된 뒤 엔봉으로 철수했고, 장 드 몽포르는 그곳에서 병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했다. 또한 잔 드 플란데런은 정신병에 걸려 잉글랜드로 이송되었다. 이후 몽포르 파벌의 지도자는 장 드 몽포르의 다섯살 아들 장이 되었지만, 브르타뉴의 대다수 지역은 잔 여백작과 샤를 드 블루아를 섬겼다.
2.5.6.4. 1346 ~ 1347년 프랑스 원정
2.5.6.4.1. 1차 캉 공방전
1345년 6월, 1343년 1월 19일에 체결된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이 만료되자,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3개의 전선에서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은 분견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스코뉴에서 활동하며, 에드워드 3세 본인이 이끄는 주력군은 플란데런 백국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주력군은 6월 29일 출항했다. 그들은 7월 22일까지 플란데런의 슬로이스 항에 정박하다가 재차 바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잉글랜드의 여러 항구로 흩어졌다. 그 후 병력을 재규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데다 왕과 의회가 앞으로의 계획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느라 시간을 더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재출항이 힘들어졌다. 게다가 플란데런 내 친 잉글랜드파 지도자 야콥 반 아르테벨데가 피살된 뒤 플란데런이 혼란에 빠지면서, 계획을 실행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내년에야 프랑스에 올 거라는 정보를 파악하자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병력을 파견해 그곳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 분견대를 궤멸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군이 베르주라크 전투오베르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가스코뉴를 공략하려는 프랑스 왕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346년 초, 필리프 6세의 후계자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은 적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들어 오를레앙에 15,000~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는 먼저 에기용을 탈환한 뒤 라 레울을 공략하고 뒤이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를 공략하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장 왕자의 지휘하에 아쟁에서 가론 계곡을 따라 행진하여 4월 1일 에기용에 도착했다. 그러나 뒤이은 에기용 공방전에서 스태퍼드 백작 랄프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프랑스로의 공세를 재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는 4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브르타뉴에 상륙해서 쇠락해가고 있던 친영파인 몽포르 가문을 재건시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플란데런 백국에 상륙해서 북부 프랑스를 휩쓸면서 프랑스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세번째는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잘 싸우고 있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와 합세한 뒤 남부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해안 지역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노르망디, 플란데런, 가스코뉴 세 방향에서 프랑스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마지막 안건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고 노르망디 상륙을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정보가 새지 않기 위해 출항 직전 8일 동안 어느 누구도 잉글랜드를 떠날 수 없다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하는 등 보안에 신경썼다. 필리프 6세와 프랑스 수뇌부는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나 가스코뉴에 상륙할 거라고 오판했지만, 혹여 문제가 생길 것을 막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 요새들에 주둔군과 순찰대를 대거 배치하고 함대를 동원해 영국 해협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했다. 그런데 잉글랜드군이 상륙하기 3일 전에 요새에 배치된 제노바 용병들이 임금 체불에 불만을 터트리며 탈영해버렸고, 상륙 당일엔 용병대를 대체하기 위해 민병대 소집령이 막 내려진 상황이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그 덕분에 1346년 7월 11일 라 우그 인근 해변에 무사히 상륙했다.

12,000~15,000명으로 추산되는 잉글랜드군은 필리프 6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몇몇 노르망디 귀족들과 합세한 뒤 약탈 행진을 감행했다. 이들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이 파괴되고 민중들은 막대한 재산을 잃었다. 700척에 달하는 잉글랜드 함대는 해상에서 군대의 경로와 평행하게 이동하면서 해안에서 최대 8km 지점까지의 범위를 약탈하고 전리품을 모았으며, 100척이 넘는 적선들을 나포하거나 불태웠다. 이런 에드워드의 초기 목표는 노르망디 북서부의 문화, 정치, 종교 및 금융 중심지인 이었다. 그는 이 중요한 도시를 공략함으로써 전쟁 비용을 회수하고 필리프 6세에게 압력을 가하기를 원했다.

1346년 7월 25일, 잉글랜드군이 캉 교외에 접근했다. 그들은 도시 수비대장인 외 백작 라울 2세 드 브리엔과 시의회에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라울은 이를 거부하고 사절을 투옥했다. 그 후 라울은 캉 시를 구성하는 세 지역인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생장 섬 중 생장 섬을 포기하고 나머지 두 지역을 중점적으로 경비하려 했다. 그러나 생장 섬에 거주하는 부유한 상인 및 지주들이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자, 결국 구 시가지를 포기하고 생장 섬을 경비하기로 했다.

다음날 현장에 도착한 잉글랜드군은 구시가지가 방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이곳을 즉시 점령했다. 이후 바이외 주교 기욤 베르트랑의 지휘를 받는 군인 300명이 주둔하고 있는 마을 북쪽의 요새를 봉쇄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이 파견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전장을 쭉 살펴본 뒤 캉 시가지를 관통하는 오돈 강 북쪽 기슭에 있는 다리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군대를 재편성하려 했지만, 약탈을 열망하는 장궁병과 중장병들이 편성이 완료되기도 전에 다리를 향해 돌진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병사들이 돌격하자 당장 돌아오라고 명령했지만 무시당했다.

잉글랜드군은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진 오돈 강을 건너 반대편 강둑을 따라 급조된 적 방어선을 공격했다. 프랑스 수비대는 서둘러 이를 막으려 했지만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는 적군을 상대로 고전했다. 그러던 중 일부 잉글랜드군이 도시에 침투한 뒤 디리 수비군을 후방에서 공격하자, 프랑스 병사들은 공포에 질러 패주했다. 몇몇 프랑스 고위 장교들은 말을 타고 잉글랜드의 포위를 뚫고 성채로 도주했고, 다른 몇몇 장교들은 탑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버텼다. 그러나 나머지 병사들은 모조리 학살되었고, 외 백작 라울 2세를 포함한 소수의 부유한 전투원과 상인들은 생포되었다. 잉글랜드군은 성채를 제외한 캉 시를 장악한 뒤 주민 5,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 닷새간의 약탈이 끝난 뒤 성채를 함락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조상인 윌리엄 1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한 뒤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2.5.6.4.2. 크레시 전투
1346년 8월 7일, 잉글랜드군은 센 강에 도달하여 루앙 교외를 약탈했다. 필리프 6세는 당장 잉글랜드 왕과 화해하라는 교황 사절들의 압력을 받고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어서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쓸데없는 토론에 행군을 멈출 생각이 없다고 답하고 쫓아낸 뒤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8월 13일 잉글랜드군이 파리 시에서 하루 이내 거리에 있는 푸아시까지 진군하자, 필리프 6세는 맨앳암즈 8천과 제노바 용병 6천을 동원해 푸아시로 이동한 뒤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다리를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하루만에 임시 교량을 설치하여 센강을 건너 푸아에 이르러 약탈을 자행했다.

필리프는 센 강 북쪽으로 후퇴한 뒤 파리 남쪽 교외로 진군해 부르라렌 인근의 고지대에 진을 친 뒤 에드워드에게 여기서 야전으로 한판 붙자며 도전장을 보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고지대에 자리잡은 적과 싸우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고, '필리프가 숨어서 안 보이기 때문에 대신 그가 신민이라고 부르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러 가겠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낸 뒤 다시 푸아시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필리프는 파리 시내로 돌아와 공포스러운 야만인들을 도시에서 쫓아낸 국왕의 위엄에 감격한 시민들 앞에서 잉글랜드 왕의 비겁함을 규탄했다. 그리고 플란데런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면서 계속 병력을 모았다.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프랑스인들의 청야 전술에 시달렸다. 가까운 지역에서는 프랑스인들이 미리 밭을 갈아엎고 식량을 없애고 집을 불태웠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은 더 먼 곳에 식량 수집 부대를 보내야 했다. 이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습격을 받아 전력이 갈수록 소모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행진이 느려지는 사이, 필리프는 적보다 하루 먼저 솜 강에 도착한 뒤 적이 플란데런이나 노르망디로 이동할 길목을 틀어막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솜 봉쇄를 뚫기 위해 행게스트, 퐁레미를 찔러봤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그 와중에 보급품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제 프랑스군이 곧 들이닥치면 영락없이 무너질 판이었지만, 에드워드는 블랑슈타크 전투에서 여울목에 주둔한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고 극적으로 솜 봉쇄를 돌파했다. 몇 시간 후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이 추격해와서 여러 잉글랜드 낙오병들과 마차 몇 대를 포획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8월 24일의 남은 시간 동안 강 건너편에 있는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 프랑스 수뇌부는 저녁 썰물 때 도강을 시도할 지를 논의한 끝에 그러지 않기로 하고 8월 25일 아침에 아브빌로 돌아갔다.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크레시앙퐁티유까지 14km를 행진하여 방어 진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솜 방어선을 뚫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기에 그 지역을 황폐화하지 않았고, 잉글랜드군은 그 덕분에 재보급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필리프 6세는 플란데런군이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호응해 남하하고 있으니, 두 군대가 합류해서 남쪽으로 역습할 것이라 여기고 추격을 중단하고 방어전을 준비했다. 그 때 프랑스-플란데런 국경 지대의 소도시 베뒨의 주민들이 결사항전해 플란데런군을 저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이 적지에 고립되자, 필리프 6세는 하느님이 절호의 기회를 줬다고 판단해 8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해 크레시 마을 인근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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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년 8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10,000 ~ 15,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필리프 6세가 이끄는 30,000 ~ 40,000 가량의 프랑스군과 대적했다. 먼저 크레시 언덕에 자리잡은 잉글랜드군은 크레시 인근 구릉지에 진지를 구축한 채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에드워드 3세는 모든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령했으며, 하마 기사와 보병들을 3개로 나눠서 배치했다. 장궁병 부대는 양익에 배치되었는데,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구덩이와 통나무 등 장애물을 설치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 본인과 측근들은 후방의 언덕 풍차에 진을 친 뒤 전투를 지휘하기로 했으며, 흑태자 에드워드는 전방에서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조프루아 다르쿠르, 존 챈더스, 제임스 오들리 등 영주 및 기사들과 맨앳암즈 800명, 장궁병 2,000명, 웨일스 보병 1,000명으로 구성된 우익 부대를 지휘했다.

이후 벌어진 크레시 전투 초반, 프랑스군 선두 부대가 언덕 위에 포진한 잉글랜드군을 무리하게 돌격했다가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퍼부은 화살비로 인해 궤멸되었다. 이때 에드워드 왕자는 적군이 무너지는 모습에 흥분해 두번째로 다가오는 샤를 2세 달랑송 휘하 프랑스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나 그와 호위 기사들은 곧 프랑스군에 에워싸였다. 존 드 베레는 급히 에드워드 3세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군을 보내 에드워드 왕자를 구출하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아들이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뒤 이렇게 답하며 거부했다.
"그에게 박차를 가할 기회를 줘라."

에드워드 왕자가 격투를 벌이던 중 땅바닥에 쓰러졌을 때, 그의 기수인 리처드 피츠사이먼이 깃발을 던지고 에드워드 왕자 앞에 서서 왕자가 일어나는 동안 적병들을 물리쳤다. 이후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 후위대를 이끌고 최전선으로 달려와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에드워드 왕자를 구출했다. 이후 프랑스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면서 전투가 끝난 뒤,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굽혀 경의를 표하면서 전투의 열기에 취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위험을 자초한 자신을 벌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아들을 포옹하면서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5.6.4.3. 1차 칼레 공방전
크레시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뒤, 에드워드 3세는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하고 사망자들을 매장한 뒤, 보급품과 지원군을 확보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다. 그는 당초 노르망디의 항구도시들을 장악하려 했지만, 장군들과 논의한 끝에 칼레를 잉글랜드 해군의 집결지이자 잉글랜드 본토에서 프랑스로 건너갈 육군을 수송할 기지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칼레는 노르망디보다 브리튼 섬과 가까웠고 백년전쟁 발발 이래 에드워드 3세를 지속적으로 돕는 플란데런 백국과 가까웠기에 이 역할에 적합했다.

9월 4일 칼레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칼레를 단시일에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챘다. 칼레는 넓은 습지대에 있었고 대부분 물에 잠겼기 때문에 육지에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또한 성벽은 높고 탄탄했으며, 성벽 주위에 바다와 연결된 해자가 이중으로 흘렀고, 수비대가 수문을 열어서 주변 일대를 수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보급품은 바다를 통해 항구에 하역할 수 있기에 육지에서 봉쇄해도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따라서 이 곳을 공략하려면 육상에서 봉쇄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함대로 해상 봉쇄를 수행해야 했다. 에드워드는 빌뇌브라아르디(Villeneuve-la-Hardie)라는 이름의 숙영지를 건설하고 장기 포위에 필요한 물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는 본국 의회에 크레시에서의 대승 소식을 전달하며 칼레 포위에 병력과 물자를 보태달라고 요구했다. 서유럽 제일의 강대국인 프랑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잉글랜드 의원들과 국민들은 열광했고, 기꺼이 왕의 요청에 응했다. 선원 15000명을 포함해 상선 700척이 징발되었고 병사 3만 명이 칼레 포위군 주둔지에 배치되었다. 동맹인 플랑드르 시민 정부의 민병대 모집도 활기를 얻어서 최소 2만 명 이상이 소집되었다. 에드워드는 칼레가 함락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겠다고 맹세하고, 매일 도시 주변을 정찰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사절을 맡은 두 추기경이 그를 찾아와 프랑스 왕과 화해할 것을 권고하려 했지만, 에드워드는 아비뇽 유수에 놓인 교황은 프랑스의 앞잡이니 그가 보낸 추기경들을 만나줄 필요가 없다며 무시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완패한 뒤 파리로 귀환한 후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는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으로 가서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거나 잉글랜드로 돌아갈 거라 여겼다. 그러다 칼레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9월 9일 콩피에뉴에서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야전군을 소집했지만 10월까지 모인 병력은 맨앳암즈 3,000명과 보병 5,000명에 불과했다. 이걸로는 도시를 에워싼 수만에 달하는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구나 남부 프랑스 일대에서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던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앙주, 푸아투를 거쳐 북쪽으로 160마일 이동해 푸아티에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러다가 헨리의 군대가 파리까지 쳐들어올 가능성을 우려한 프랑스 수뇌부는 헨리를 격퇴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나마도 콩피에뉴에 모인 소규모 병력에게 지급할 자금마저 없었기에, 필리프 6세는 10월 27일 모든 공격 준비를 취소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렇듯 일이 자꾸만 틀어지자 프랑스 정부 인사들간의 비난이 만연했다. 프랑스 원수 샤를 1세 드 몽모랑시는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해 크레시의 파국을 야기한 혐의로 해임되었고, 프랑스 재무부의 모든 관료들은 군대에게 지급할 급료를 제때 마련하지 않고 국고를 횡령한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모든 재정 문제는 3명의 고위 수도원장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담당했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후계자인 은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몇 달 동안 왕실 회의에 출석하기를 거부했고, 삼부회는 왕의 측근들을 매섭게 비난했다. 나바라 왕국의 여왕이자 샹파뉴 여백작 호아나 2세는 필리프 6세의 군대가 자신의 영지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한 끝에 1346년 11월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이렇듯 프랑스 수뇌부가 자중지란에 시달리면서, 가까운 시일에 칼레를 구원할 프랑스군이 올 가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도시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의 상태 역시 좋지 많았다. 많은 군인의 복무 기간이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이질이 군영 내에 돌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탈영자도 속출했다. 1346년 말과 1347년 초 사이의 어떤 기간에는 가용 가능한 잉글랜드군의 수가 5,000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 투석기와 대포를 동원해 성벽을 뚫으려 시도했고, 육지나 바다 쪽에서 칼레를 공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칼레 총독 장 드 비엔이 이끄는 수비대는 결사적으로 항전해 잉글랜드의 모든 공세를 격퇴했다. 여기에 프랑스 함대가 그들에게 물자를 지원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347년 3월과 4월 동안 1,000톤 이상의 보급품이 잉글랜드 해군의 봉쇄를 뚫고 칼레로 들어왔다.

필리프 6세는 칼레가 잘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1347년 4월 말에 군대 소집령을 재차 발동했다. 그러나 그가 콩피에뉴에 이르렀을 때 도착한 군인이 거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에도 병력 소집에 응한 이가 매우 적어서 6월이 다가도록 충분한 병력이 모이지 않았다. 많은 도시가 잉글랜드군의 슈보시에 맞서기 위해 성벽을 보강하거나 민병대를 결성하고자 모든 가용 자금을 사용했고, 대부분의 귀족은 지난 9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지불한 빚이 너무 많이 쌓여서 파산의 위협에 시달렸다. 심지어 몇몇 귀족들은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섬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이렇듯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병력 규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칼레의 입지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1347년 4월, 잉글랜드군은 칼레의 바다쪽 항구 입구에 있는 리스방크를 점령하고 그곳에 요새를 건설하고 포병을 배치해, 칼레에 프랑스 수송선들이 진입하는 것을 차단했다. 여기에 80척 가량의 잉글랜드 전함이 도착해 항구 입구를 차단했다. 이제 칼레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칼레 주변 프랑스 민병대가 도시를 구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플란데런군이 잉글랜드군을 도우러 오는 것을 막고자 플란데런을 공격한 프랑스군 마저 격퇴되었다.

1347년 6월 25일, 약 40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가 보급품을 가지고 센 강 어귀를 지나 칼레로 항해하다가 더 많은 잉글랜드 함대의 공격을 받아 많은 선박이 나포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같은 날 칼레 총독 장 드 비엔은 필리프 6세에게 서신을 보내 칼레에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를 위해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을 지닌 제노바 장교가 도시 밖으로 나갔지만 도중에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 에드워드 3세는 서신을 읽어본 뒤 필리프 6세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했다. 그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필리프 6세가 칼레를 구원하기 위해 무리하게 달려오도록 유도한 후 무찌르려는 생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구호 함대를 칼레로 진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프랑스 수비대는 노인, 허약자, 부상자, 여인과 어린이들을 도시에서 추방해 입을 줄이려 했지만, 포위군이 이 난민들이 포위망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을 때까지 성벽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이윽고 잉글랜드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에드워드 3세는 5,300명의 중장병, 6,600명의 보병, 20,000명의 궁수로 구성된 대군을 갖추었다. 여기에 함대에는 15,000명의 선원이 있었고, 인근 국경에는 20,000명의 플란데런군이 잉글랜드군을 지원하기 위해 주둔했다.

1347년 7월 14일, 20,000명 가량의 병력[8]이 헤스뎅에 집결했다. 필리프 6세는 이들을 이끌고 칼레 구원을 시도해보려 했지만, 프랑스 영토를 통해 남쪽에서 포위군 주둔지를 공격한다면 플란데런군이 비어있는 후방을 노릴 위험이 있었으므로, 플란데런 영토를 기습해서 베뒨과 카셀을 점령하고 칼레 포위군 진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지역에 대한 기습공격이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포위군 진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졌다. 결국 7월 27일 칼레 인근 상가테 고지에 도착한 필리프는 포위군 진영 외곽의 감시초소 하나를 점령한 뒤 정찰병들을 보내 적진을 정탐했다. 함 강과 해안 지역의 장애물로 인해, 잉글랜드군을 공격할 수 있는 경로는 강력한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는 나울레 다리를 건너는 것뿐이었다.

크레시 전투 때보다 훨씬 안 좋은 조건에서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필리프 6세는 무력으로 도시를 구할 방도는 없다고 여기고 에드워드 3세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는 아키텐 공국 전체를 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프랑스 왕실이 아키텐 공국의 명목상 주군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에드워드는 칼레를 얌전히 내놓는 것이 협상에 응할 최소한의 조건이며, 그러지 않는다면 협상에 임할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필리프는 마지막 시도로 2명의 교황 사절에게 잉글랜드 진영에 찾아가 중재를 제의하게 했으나, 에드워드는 이번에도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1347년 8월 1일, 칼레 수비대는 상가테 고지에 있는 프랑스군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니 항복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에 프랑스군은 그날 밤 숙영지를 불태우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칼레 수비대장 장 드 비엔은 성문 밖에서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 기사단을 만나 수비대와 도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에드워드는 매니로부터 수비대의 뜻을 전해듣자 차갑게 답했다.
"저놈들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고 너무 많은 잉글랜드인이 목숨을 잃었다. 저들이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받아줄 수 없다."

그러나 잉글랜드 기사들은 왕의 이같은 뜻을 전달하길 꺼렸다. 그들이 숭상하는 기사도에 어긋나기도 했고, 만약 프랑스 왕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한다면 칼레 수비대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대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매니와 동료 기사들은 에드워드에게 뜻을 돌려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에드워드는 군심이 이반할 것을 우려해 "칼레 수비대와 주민들의 자유는 보장해주지 않겠지만 너희들의 생명을 구하겠다"며 협상에 응하기로 했다. 에드워드 3세는 도시에 전령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너희 중 여섯 대표를 뽑아라. 그들은 셔츠만 입고 목에 올가미를 감고 도시의 열쇠를 들고 내 앞에 와야 한다. 나는 그들을 내키는 대로 처리할 것이다."

파일:칼레의 여섯 시민.jpg

1347년 8월 3일, 에드워드 왕이 에노의 필리파 왕비, 휘하 장군, 기사, 고문, 영주, 플란데런 인사들과 함께 칼레 성문 앞에 집결한 가운데, 여섯 명의 칼레 시민이 마을의 열쇠를 들고 성문에서 나왔다. 그들은 에드워드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저항하려는 다른 도시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사형집행인을 불러 즉시 여섯 시민을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필리파 왕비와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에드워드는 한동안 자신 앞에 엎드린 여섯 시민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단 이 항복 의식 자체가 에드워드 왕이 의도한 퍼포먼스였고 후대에 각색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후대엔 이 시민 대표들이 마치 스스로 희생해서 도시를 구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알려졌는데, 실제로는 이미 대략적인 항복 내용은 칼레 측과 에드워드 왕 양측에서 논의가 끝났고, 에드워드 왕은 단순히 자신의 관용을 극적으로 과시하며 항복을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하지만 이 항복 이야기는 후대에 널리 퍼졌으며 오귀스트 로댕은 이 6명의 시민 대표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잉글랜드군이 칼레에 진입한 뒤 칼레에 거주하던 프랑스인 전체가 추방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에서 주민들을 불러들여서 칼레에 정착하게 했다. 장 드 비엔을 비롯한 고위급 장교 및 상인들은 잉글랜드로 끌려가 몸값을 마련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칼레에서 추방된 주민들은 인근의 프랑스 마을에 기거했다. 필리프 6세는 그들의 운명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들이 선택한 프랑스 어느 도시에든 정착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으며, 공석이 된 국가 관직에 칼레 출신 인사가 앉히는 것을 허용했다. 여기에 그들을 단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했다.

에드워드는 칼레 공방전을 마무리한 뒤 플란데런군을 돌려보낸 후 파리를 향한 공세에 착수했다. 그러나 생 오마르 요새를 공략했다가 큰 손실을 보고 칼레로 향하던 보급 호송대가 볼로뉴에서 파견된 유격대에게 포획되는 악재가 터진 데다 자금 조달에 또다시 문제를 겪자, 그는 비로소 교황 사절단의 요청에 응해 평화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 9월 4일부터 협상이 시작되었고 9월 28일에 휴전이 합의되었다. 이른바 '칼레 휴전'으로 명명된 이 휴전은 1348년 7월 7일까지 9개월간 지속되기로 합의되었지만, 중세 흑사병 도래 등 여러 악재로 인해 1355년 공식적으로 취소될 때까지 수년간 반복적으로 연장되었다. 이후 칼레는 백년 전쟁 내내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군의 주요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2.5.6.5. 네빌스 크로스 전투
1340년대 중반,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치중하느라 자기들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잉글랜드군이 점령했던 자국의 영역을 전부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1343년 1월 19일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체결해 3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을 때, 스코틀랜드 역시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중단했다. 그 후 1345년 에드워드 3세가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을 재개하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1329년에 양국이 맺은 방위 협약에 따라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1346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본대가 포츠머스에 집결하자, 필리프 6세는 재차 사절을 보내 잉글랜드 침공을 호소했다.
"부탁하오, 간청하오. (중략) 비슷한 위기 상황에서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나를 위해 해주고, 가능한 한 빨리 해주길 바라오."

그해 7월 에드워드 3세가 15,000명의 군대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1차 캉 공방전에서 을 파괴하자,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에 재차 호소했다. 그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 브르타뉴, 플란데런에도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는 "사제, 수도자, 서기, 장인, 상인들"만 남아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2세는 강성한 잉글랜드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파국을 맞을 것을우려해 필리프 6세의 요청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지만, 필리프 6세의 이번 설득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1346년 9월 퍼스에서 스코틀랜드 전역에 소집령을 내리고 조카 로버트 스튜어트,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리데스데일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 등 여러 귀족들을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1346년 10월 7일, 데이비드 2세는 일부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는 국경지대에 설치된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먼저 '리델의 껍질(Peel of Liddell)'로 불리는 자연 요새를 포위해 3일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하고 자신의 장교였다가 잉글랜드에 귀순한 뒤 총독 노릇하고 있던 월터 셀비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후 인근의 칼라일 시민들로부터 약탈하지 않는 대가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고, 남동쪽의 부유한 도시 더럼으로 향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다. 그러다 헥샴에서 3일간 머물면서 그곳의 대수도원을 약탈했다. 10월 16일, 데이비드 2세의 군대는 더럼에 도착한 뒤 도시 서쪽에 있는 보레페어 마을에 도착했다. 이 곳의 수도사들은 마을과 수도원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1,000파운드의 몸값을 10월 18일에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데이비드 2세는 이에 동의하고 지급일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스코틀랜드 수뇌부는 잉글랜드군이 대거 프랑스로 가버렸으니 현지 민병대 외에는 자신들을 막을 병력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요크 대주교 윌리엄 드 라 주쉬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부 요크셔의 리치몬드에서 병력을 신속하게 모집했다. 이에 잉글랜드 북부 지역인 컴벌랜드, 노섬벌랜드, 랭커셔 등지에서 3,000~4,000명이 모였고, 또다른 3,000명의 요크셔 병사들이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다가왔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군대를 모집할 때 험버 강 북쪽 지역에는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같은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했다. 잉글랜드군 상당수는 장궁병이었는데, 그중 1,200명은 랭커셔 출신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요크셔 병사들을 기다리지 않고 리치먼드에서 바너드 성까지 진군했고, 대주교는 그곳에서 군대를 3개 편대로 재구성한 뒤 진군을 이어갔다. 10월 17일 아침,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소규모 스코틀랜드군은 더럼 남쪽 지역을 약탈하던 중 페리힐에서 잉글랜드군 2개 부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곧 교전했고, 스코틀랜드군이 300명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했다. 더글러스는 보레페어에 있는 아군 진영으로 돌아와서 국왕에게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고 알렸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군이 이렇게나 빨리 대응한 것에 깜짝 놀랐다. 때마침 2명의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이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더럼에서 찾아왔지만, 데이비드 2세는 이들이 스파이라고 생각해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군영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이 '네빌의 십자가'라고 불리는 돌 기념물이 서 있는 고지로 이동하고 잉글랜드군이 그곳에 도착했다. 이후 벌어진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3,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가 전사했으며, 데이비드 2세와 리더스데일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 등 여러 귀족, 경호원, 시종, 순경 등이 사로잡혔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347년 초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로우랜드 대부분을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보급품이 바닥나자, 잉글랜드군은 점령지를 확고히 다지지 못한 채 철수했다.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어 런던 탑에 사로잡힌 뒤,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 때를 틈타 스코틀랜드 왕위에 재차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347년 스코틀랜드로 잠입해 갤러웨이에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뒤 1355년까지 갤러웨이의 일부 지역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를 붙잡아둬서 스코틀랜드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뜯어낼 생각만 했을 뿐, 발리올을 복위시키는 데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에드워드 3세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스코틀랜드군의 반격을 피해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356년 1월 20일, 발리올은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는 대가로 스코틀랜드 국왕 칭호를 에드워드 3세에게 넘겨줬다.
2.5.6.6. 브르타뉴의 혼란
1346년경, 브르타뉴 전선은 샤를 드 블루아가 이끄는 친 프랑스 진영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장 드 몽포르는 이미 죽었고,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잔 드 플란데런은 정신병에 걸려 잉글랜드로 이송되었으며, 장 드 몽포르의 아들 은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다. 이에 따라 브르타뉴의 대다수 지역은 잔 드 팡티에브르와 샤를 드 블루아를 섬겼다. 그러나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완패하자. 민심은 또다시 요동쳤고,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잉글랜드군과 은밀히 접촉했다.

1347년 5월, 중장병 1,800명, 궁수 600명, 석궁병 2,000명, 다수의 농민병을 모은 샤를 드 블루아는 브르타뉴의 민심을 수습하고 잉글랜드군을 브르타뉴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재개하기로 했다. 그의 첫번째 목표는 라 로슈데리앙이었다. 그는 이곳을 포위 공격하면서 잉글랜드 구원군이 근처에 이르면 즉시 요격해 궤멸시키기로 했다. 5월 20일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마을을 에워싸고 북쪽, 동쪽, 남쪽에 3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한 뒤 다양한 크기의 투석기 9개로 포격을 가했다. 가장 큰 투석기는 무게가 300파운드에 달하는 돌을 던졌고, 이로 인해 마을 주지사의 집이 부분적으로 파괴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라 로슈 데리앙의 잉글랜드 주지사 리처드 토스햄은 그의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인사들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복을 거부했다.

라 로슈데리앙 마을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토머스 다그워스는 라 로슈데리앙에서 남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카하익스에서 기마병 300명, 궁수 400명을 모은 뒤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행진했고, 6월 중순에 마을에서 9마일 떨어진 베강의 대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후 야밤에 조우디(Jaudi) 강 동쪽 기슭을 따라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접근하기로 하고, 일부 부대는 조우디 강 서쪽 기슭의 도로를 따라 행군하며 소음을 일으켜서 적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잡아끌게 했다.

6월 20일 새벽에 도로변에서 소음이 일자, 샤를은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군에 가만히 서서 적의 공격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다그워스의 잉글랜드군은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뒤 마을 동쪽에 있는 숙영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사전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곧바로 반격했고, 잉글랜드군은 침착하게 대응하는 적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지휘관 다그워스는 부상을 입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테지만, 날이 밝을 무렵 아군이 적진을 기습 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처드 토스햄은 성벽을 지키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이끌고 마을 밖으로 출격해 샤를의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이를 예상치 못했고, 많은 병사가 겁에 질러 달아났다. 진영을 떠나지 않은 다른 두 진영의 브르타뉴-프랑스군은 차례로 잉글랜드군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결국 무너졌다. 다그워스는 구출되었고, 샤를은 치열한 격투를 벌이다가 17개의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프랑스군이의 사상자는 600명에 달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었지만, 상당한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샤를 드 블루아는 생포된 후 치료를 받은 뒤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수년 동안 투옥되었다. 한편 다그워스 역시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프랑스군은 그의 부재를 이용해 라 로슈 데리앙 마을을 기습해 3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그곳을 함락하고 샤를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주민들을 학살했다. 150명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항복한 뒤 비무장 상태로 샤토네프로 끌려간 후 그곳 마을의 목수들과 정육점 주인들에게 학살되었다. 이렇듯 몽포르 파벌과 블루아 파벌 모두 지휘관이 사라지면서 지리멸렬해졌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 노르망디-플란데런-가스코뉴 등 다른 전선에 전념했지만 이곳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브르타뉴 내전은 소규모 군벌들과 도적단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2.5.7. 가터 기사단 창립과 중세 흑사병

1347~1348년 겨울과 봄, 에드워드 3세는 길퍼드에서 성탄절을 축하한 후 여러 도시에서 토너먼트를 개최했으며,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를 포함한 고귀한 포로들을 행진시켰다. 이후 그는 세속 기사단을 창설하기로 마음먹었다. 1348년 8월 6일, 그는 가터 기사단 창립을 선포했다. 그는 새로운 기사단을 성모 마리아성 조지에게 바치기로 결정했다. 1349년 윈저 궁에서 성 조지의 날을 축하하면서 기사단의 첫 공식 회의가 열렸다. 이 기사단에는 아서 왕의 이미지가 많이 포함되었으며, 프랑스의 상징인 파란색 예복과 모토[9]를 통해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잉글랜드 국왕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1348년 가을,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다. 이 전염병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잉글랜드 인구의 약 1/3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질병은 왕실도 덥쳤다.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의 아들인 페드로와 약혼한 에드워드 3세의 딸 조앤은 1348년 8월에 신랑에게 갔으나 도중에 흑사병에 걸려 9월 2일에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48년 11월 30일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과 협상하기 위해 잠시 칼레로 갔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의도적으로 런던을 피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성탄절을 보낸 후 왕실 유물이 전달된 킹스 랭글리를 거쳐 인저로 갔다가 우드스톡으록 향했다. 1349년 초에 계획된 의회 소집은 취소되었고, 추밀원 회의와 일반 기도회는 1349년 성령강림절까지 중단되었다.

1349년 6월 18일, 에드워드 3세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노동자 법령을 반포했다. 이는 1351년 의회에서 비준된 '노동자의 임금 인플레이션은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법안'인 노동법의 전신이었다. 1352년, 에드워드 3세는 봉건 원칙에 따라 징병을 요구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이후 영국 원정군에 징집된 군인과 기마궁수는 대부분 자원봉사자였다. 또한 1352년에는 반역죄의 정의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반역법'이 공포되어 왕실에서 반역죄가 자의적으로 사용되는 일이 없어졌다. 또한 교황이 성직을 처분하는 관행을 제한하기 위해 하원의 요청에 따라 위원 법령(1351)과 왕과 그의 정부의 권력 침해 금지 법령(1353)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1351년에 대대적인 주화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자체 금화인 노블과 은화인 그라우트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1353년, 잉글랜드 정부는 양모 무역에 대한 독점을 확립하는 이전 관행을 포기하고, 상인들이 이 제품에 대한 대외 무역을 수행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동시에 외국 상인들이 모직물을 생산하기 위해 잉글랜드으로 오도록 장려하기로 합의했다.

2.5.8. 백년전쟁(1350 ~ 1360)

2.5.8.1. 칼레 전투
1349년 12월, 프랑스 북동부 사령관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칼레를 기필코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병력 모집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잉글랜드 약탈자들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프랑스군이 칼레를 무력으로 되찾는 건 힘들다는 걸 잘 알았다. 그 대신 기책으로 칼레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칼레 성문 한 곳의 열쇠를 소지하고 있던 파비아 출신의 랑고르바르드인 용병대장인 아이머리(Aimery)에게 접근했다. 이 사람은 잉글랜드인이 아니며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매일 급료를 받으며 전투를 치르는 용병이기 때문에 잘만 하면 매수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아이머리는 이전에 프랑스 왕실에 고용된 제노바 갤리선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영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행정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아이머리를 왕의 갤리선 선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그가 이끄는 배에 탑승한 선원들은 줄무늬 천으로 제작된 망토를 특별히 착용했다. 이로 볼 때, 에드워드는 그를 상당히 총애하고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인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프루아는 그에게 막대한 금을 보여주면 넘어갈 거라 확신하고 요원을 비밀리에 보내 2만 에퀴(약 3500파운드)[10]를 제공할 테니 프랑스군이 칼레 시에 진입하도록 협조해달라고 요구했다. 아이머리는 흔쾌히 수락했고, 조프루아는 5,000명의 병력을 비밀리에 모아서 칼레 공략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아이머리는 에드워드 3세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1349년 12월 말 그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드워드는 12월 30일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근위병을 포함한 900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일반인으로 변장한 채 칼레로 향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월터 매니의 깃발을 빌림으로써 그가 칼레에 온 것처럼 위장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칼레에 도착한 뒤 성 안의 지하실, 금고 등 여러 방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새로운 벽을 세우고 병사들을 숨겼으며, 성 도개교의 거대한 들보 중 하나를 부분적으로 절단한 뒤 적병이 성안에 다 들어오면 탑 위에서 돌을 떨어뜨려 그 들보를 깨트려서 성문이 저절로 닫히게 함으로써 적을 성안에 가두기로 했다고 한다.

1350년 1월 1일 밤, 조프루아의 부관인 우다트 드 렌티(Oudart de Renti)가 이끄는 100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2만 에퀴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칼레 성벽을 기어올라갔다. 아이머리는 그들로부터 금을 수령한 뒤 프랑스인들을 성채로 이끌었다. 잠시 후 숨어있던 잉글랜드군이 튀어나와 그들을 덮쳤고, 우다트와 프랑스 장병 100명은 즉시 항복했다.한편, 조프루아는 칼레 남쪽 문 근처에 주력군을 이끌고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해가 떠오르면서 트럼펫 소리와 함께 쇠창살이 들어올려진 뒤 성문이 열리자, 잉글랜드 기사와 궁수들이 "에드워드! 성 조지!"를 외치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프루아의 군대 절반은 갑작스러운 급습에 "배신당했다!"라고 외치며 달아났지만, 그는 남은 병력을 모아 적의 돌격을 막아낸 뒤 반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은 압살될 뻔했지만, 북쪽 성문에서 출격한 흑태자 에드워드의 또다른 군대가 프랑스군의 좌측면을 요격하면서 프랑스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200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하고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생포되었다. 생포된 이들 중에는 조프루아 드 샤르니도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조프루아를 포함한 많은 수감자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고 조프루아를 사로잡은 자에게 100 파운드(2021년 기준 70,000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날 저녁, 에드워드는 고위층 포로들을 식사에 초대한 뒤 그들과 즐겁게 식사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조프루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프루아 경! 내가 싸워서 손에 넣은 것, 지금까지 많은 돈을 쏟은 것을 그대가 밤을 틈타 내게서 빼앗으려 했으니 내가 경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오. 그러니 경을 이리 한가하게 만든 것이 몹시 기쁘오. 경은 이곳을 나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그러니까 2만 에퀴로 손에 넣으려고 했소.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경이 실패하고 말았군.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마음이 내키신다면 나의 더 커다란 사업을 도와주실 거요."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기사 유스타스 드 리브몽(Eustace de Ribbemont)의 용기를 칭찬하고 그에게 진주로 장식된 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국왕의 기수인 기 드 브라이언(Guy de Brian)도 전투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연간 200마르크의 연금을 받았다. 아이머리는 적절한 봉사를 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평생 160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잉글랜드 왕과 싸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가석방되었지만, 조프루아는 잉글랜드로 끌려간 뒤 몸값을 전액 지불할 때까지 18개월간 런던에 억류되었다.
2.5.8.2. 윈첼시 해전
1350년 봄, 카스티야-플란데런 연합 함대는 샤를 드 라 세르다 제독의 지휘 하에 보르도에서 잉글랜드 해안으로 항해하던 가스코뉴 수송 함대를 습격해 물자를 모조리 탈취한 뒤 생포한 선원들을 바다에 던져 죽였다. 이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3세는 극도로 분노해 그해 5월부터 카스티야 해적들을 소탕할 준비에 착수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그동안 영국 남부 해안을 개별적으로 지키고 있던 토머스 호, 조넷 호, 플렌티 호, 이사벨라 호, 가브리엘 호, 미카엘 호, 월페어 호, 마리오테 호, 예루살렘 호, 토머스 뷰챔프 호, 마리 호, 존 호, 에드먼드 호, 팔콘 호, 부셰 호 등이 모여들었다. 여기에 잉글랜드 북부에 정박했던 함대들도 남부 해안으로 모여들었다. 8월 10일 켄트의 샌드위치 항에 집결한 잉글랜드 함대 규모는 50척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처음엔 월터 매니에게 함대 지휘권을 맡기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자신이 직접 탑승하여 전반적인 지휘권을 맡았고 월터 매니는 북부 함대의 제독으로 선임되었다. 여기에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도 동행했고,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를 포함한 잉글랜드의 여러 귀족들이 400명의 기사들과 함께 참여했다. 2척의 선박은 왕의 '홀'과 왕실과 행정부를 위한 숙소인 '옷장'으로 지정되었고, 나무르 백작 존의 아들 로버트 드 나무르가 '왕의 홀'의 선장으로 선임되었다. 에드워드 3세 본인은 가장 좋아하는 배인 토머스 호에 승선했다.

8월 28일, 잉글랜드 함대는 카스티야 함대가 출몰하기를 기다리기 위해 윈첼시 항구 외곽에 정박했다. 당시 카스티야 함대는 영국 해협과 북해에서 잉글랜드 상인을 포획하고 물품을 빼앗은 뒤 슬로이스 항구에서 쉬고 있었다. 샤를 드 라 세르다는 잉글랜드 해군이 윈첼시 항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번 기회에 잉글랜드 해군을 궤멸시키고 영국 해협과 북해를 완전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플란데런 외 여러 국적의 용병을 고용했다. 당대의 연대기에 따르면, 카스티야 함선 수는 40척으로 잉글랜드 함대보다 적었지만 함대에 실린 전사 수는 에드워드 3세의 함대에 승선한 전사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1350년 8월 29일 일요일, 샤를의 함대가 슬로이스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잉글랜드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이른 저녁에 적 함대를 발견하자 닻을 내리고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에드워드는 무장한 기사와 귀족들에게 포도주를 제공하여 긴장을 풀게 한 뒤 친히 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이후 두 함대는 서로를 향해 접근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가 탑승한 토머스 호가 선두에서 질주하다가 카스티야의 선두 선박을 공격하여 돛대를 부러뜨렸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높은 갑판에서 큰 바위를 떨어뜨리려는 카스티야인들을 화살을 퍼부어 저지했다. 카스티야 선박은 잉글랜드 선박보다 훨씬 높았기에, 잉글랜드 병사들은 사다리를 이용해 적 선박에 올라가야 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카스티야 선박은 점거되었지만, 토머스 호는 카스티야 함선과 정면 충돌한 여파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에 에드워드는 기사들의 설득에 따라 방금 확보한 카스티야 선박으로 갈아탔다.

한편 흑태자 에드워드는 곤경에 처했다. 그가 탄 배는 카스티야 전함과 충돌하여 침몰하고 있었고, 에드워드의 장병들은 적선을 공략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때 랭커스터 공작이 이끈 함선에 탑승한 전사들이 반대편에서 적선에 올라타자, 에드워드는 병사들을 독려해 적선에 뛰어들게 했다. 결국 에드워드와 장병들은 자기들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적선을 공략할 수 있었고, 카스티야 선원들은 모조리 사살되거나 바다에 던져졌다.

로버트 드 나무르가 이끄는 '왕의 홀'은 더 큰 카스티야 선박과 맞붙었다가 적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끌려갔다. 선원들은 갈고리를 자르려 했지만 적선에서 쇠뇌와 돌을 마구 퍼붓는 바람에 실패했고, 적선에 올라 타려는 시도 역시 실패했다. 그들은 다른 영국 선박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다들 정신없이 싸우느라 '왕의 홀'의 위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때 로버트의 하인 헨네킨이 손에 단검을 들고 카스티야 배 위로 뛰어 올라 많은 적병을 죽이고 주돛을 무너뜨려 적선을 정지시켰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용기를 얻어 적선으로 앞다퉈 뛰어들었고, 뒤늦게 '왕의 홀'을 도우러 온 잉글랜드 선박들이 호응하면서 카스티야 병사들은 결국 섬멸되었다.

샤를 드 라 세르다가 탑승한 전함은 이날 전투에 참가한 카스티야 배 중 가장 거대하고 전사 및 승무원이 가장 많았으며, 바위를 쏘아보낼 수 있는 투석기도 충실히 갖췄다. 그들은 주변의 잉글랜드 함선들을 공격해 막대한 사상자를 입혔지만, 잉글랜드 선박들이 주위를 에워쏴서 화살비를 퍼붓고 적군이 올라 타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섬멸되었다. 샤를은 쪽배를 타고 가까스로 빠져나와서 전장에서 이탈했고, 아직까지 잉글랜드군에 붙잡히지 않은 선박들도 뒤따라 도주했다.

카스티야 함선 14~26척이 나포되었고, 여러 척이 침몰했다. 잉글랜드 함대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드워드 3세가 탑승한 선박과 흑태자를 태운 선박이 침몰하고 '왕의 홀'로 지정된 선박이 적군에 거의 나포될 뻔했던 것을 볼 때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카스티야인과 플란데런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습격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잉글랜드인들에 의해 배 밖으로 던져졌다.

파일:에드워드 3세의 금화.jpg

에드워드 3세는 윈첼시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금화를 주조했다. 이 동전에는 돛대를 단 한 척의 배와 영국과 프랑스의 문장이 포함된 왕립 문장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살아남은 카스티야인들은 이후에도 해적 행위를 거리낌없이 자행했다. 잉글랜드와 가스코뉴간의 무역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이들의 습격이 하도 심해서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 잉글랜드의 항구를 사용해야 했다.
2.5.8.3. 지지부진한 전쟁과 평화 협상
1350년, 잉글랜드로 끌려가 4년간 옥고를 치렀던 라울 2세 드 브리엔이 60,000 리브르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그 큰 돈을 마련할 길이 없자,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의 소유물인 긴느 성을 잉글랜드에 양도하기로 했다. 긴느 성은 잉글랜드가 1차 칼레 공방전을 통해 확보한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인 칼레에서 9.7km 떨어진 요새로, 칼레 주변의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충지였다. 에드워드 3세는 그곳을 확보한다면 칼레에 대한 프랑스군의 압박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라울 2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라울을 체포한 뒤 루브르 궁전 내 지하감옥에 가둔 후 11월 19일 재판도 치르지 않고 즉결 처형했으며,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상당한 거물이었던 라울 2세가 순식간에 처형된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발루아 왕조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장 2세는 에드워드 3세가 내치에 전념하느라 전쟁 재개를 꺼리는 걸 이요해 적극적으로 공세를 벌이기로 했다. 그는 기옌 전선에서의 전략을 개편했다.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보르도 공략을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포기하는 대신 잉글랜드가 내부 정비에 집중하는 동안 미리 공세 역량을 꺾어놓기 위해 가스코뉴 국경의 전초기지에 해당하는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1351년 2월, 멜로 영주 기 2세 드 네슬과 부관 아르눌 도드랭이 이끄는 수천 명이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수비대 6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생장당젤리 요새를 포위하고 요새로 이어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했다. 수비대는 몇 달간 결연히 버텼지만,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군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의 세네샬 존 드 체버스턴과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영주인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는 생장당젤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백 명의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이들은 수적으로 열세했기 때문에 적 포위망을 뚫을 생각은 없었지만 수비대에 물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기 2세 드 네슬은 일부 병력를 남겨서 계속 포위하게 한 뒤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러 출진했다.

1351년 4월 1일, 기 2세 드 네슬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생트 마을에서 약 3마일 떨어진 도로에서 잉글랜드군을 요격했다.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즉시 말에서 내려 고지로 올라가서 전투 대열을 형성하고 말을 후방으로 이끌었다. 네슬은 양 측면의 소규모 기병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고지를 에워싸서 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인근의 타이르부르와 토네-샤랑트의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수백 명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이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프랑스군은 패주했고, 600명 가량의 프랑스 기사가 죽거나 사로잡혔다. 기 2세 드 네슬과 아르눌 도드랭 역시 사로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존 드 체버스턴은 생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생장당젤리 요새로 접근했지만 포위망을 뚫지는 못하고 보급품을 수비대에 전달해 준 후 철수했다. 한편 장 2세는 지휘관들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히 추가 병력을 이끌고 포위군과 합세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구원이 더이상 오지 않자, 생당장젤리 수비대와 주민들은 1351년 8월 장 2세에게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이에 맞서 프랑스 북부에 기마 약탈을 벌였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아직 프랑스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준비가 안 되었던 에드워드 3세는 휴전을 맺자고 제의했고, 장 2세는 생장당젤리의 지배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등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다.

1352년 1월, 돈캐스터의 존이라는 이름의 향사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가 긴느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돈캐스터의 존은 전쟁 초기에 포로로 잡힌 후 긴에서 강제 노역하다가 풀려난 후 잉글랜드로 돌아갔다가 폭행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갇혔다가 에드워드 3세의 칼레 원정에 동행하는 대가로 풀려난 뒤 칼레 수비대에 배석되었다. 그는 긴느 요새에서 노역하면서 그곳의 수비 상태를 눈여겨봤기 때문에, 그곳의 약점에 대해 잘 알았다. 그와 동료들은 밤중에 해자를 건너 성벽을 기어올라가 보초를 죽이고 성채를 습격한 뒤, 그곳에 갇혀 있던 잉글랜드 포로들을 석방하고 성 전체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프랑스 수뇌부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긴느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위그 드 벨콩로이는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망쳤다가 북동부 전선 사령관 조프루아 드 샤르니에게 체포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 장 2세는 1월 15일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휴전 중인 상황에서 긴느 성을 빼앗아간 것을 강력히 규탄하며 당장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 전면 전쟁을 벌일 준비가 안 됐고 명분상으로도 밀란다고 보고 긴느 성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철수시키려 했다. 하지만 1월 17일 소집된 의회에서 많은 의원들이 전쟁을 강력히 지지하자, 에드워드 3세는 곧 마음을 돌렸다. 의회는 3년간의 전쟁세를 승인하기로 결의했고, 에드워드는 돈캐스터의 존을 완전히 사면하고 보상을 해줬다.

잉글랜드 측이 이렇게 나오자, 장 2세는 실력 행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352년 5월, 장 2세로부터 긴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접수한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1,500명의 맨앳암즈와 많은 이탈리아 석궁병을 포함한 4,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토마스 호그쇼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수비대 115명이 지키는 긴느 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긴느 성은 공략하기가 까다로운 곳이었다. 습지대가 성 주변에 깔려 있고 많은 수로가 있어서 대부분의 방향에서 접근하기 어려우면서도 수비대가 물을 공급받기 용이했다. 조프루아는 지형을 꼼꼼히 살펴본 끝에 요새 정문을 똑바로 공격하는 것만이 요새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정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녀원을 요새로 개조하고 투석기와 대포를 배치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5월부터 7월까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쉽사리 정문을 돌파하지 못했다. 그러던 7월 중순에 수천 명의 잉글랜드군이 긴느 인근에 도착했다. 이들은 야간에 프랑스 진영을 기습 공격했고, 이를 대비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수녀원 주변에 쳤던 방어벽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결국 조프루아는 요새를 공략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철수했다. 다만 칼레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진 프레툰에 새로 건설된 잉글랜드 탑을 기습 공격해 점거하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파비아 출신의 용병대장 아이머리(Aimery)를 체포한 뒤 생오메르로 끌고 가 도끼로 쳐죽였다.

잉글랜드군은 조프루아를 격퇴한 뒤 칼레 주변 습지를 통과하는 모든 진군로에 요새를 건설해 칼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해 칼레 인근 마을 60곳에 요새를 설치했다. 그 후 양자는 몇 달 동안 대치하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중재에 따라 1353년 초 긴느에서 휴전 협상을 시작했고, 1353년 4월 6일 긴느 휴전 협약 초안을 마련했다. 그들은 먼저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 대해 논의했다. 공작위 계승 분쟁의 당사자인 장 드 몽포르는 1345년에 사망헀고, 4살된 아들 장과 그의 아내 잔 드 플란데런이 잉글랜드에 있었다. 또다른 당사자인 샤를 드 블루아는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사로잡힌 뒤 런던에 수감되어 몸값을 협상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당국은 샤를 드 블루아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하되, 샤를 드 블루아는 300,000 크라운의 몸값을 지불하고, 브르타뉴는 잉글랜드와 영구적으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가 훼방을 놓으면서, 협상은 중단되었다.
2.5.8.4. 카를로스 2세 문제
1354년 1월 18일, 카를로스 2세의 동생인 롱그빌 백작 필리프가 이끄는 무리가 레글르(L'Aigle)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샤를의 수행원들이 대거 척살되었고, 샤를은 도주하다가 체포된 뒤 목숨을 구걸하다가 살육에 흥분한 필리프의 부하들에게 참수되었다. 카를로스는 동생 필리프가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지 않고 암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이 살인을 주도했으며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몄기에 정당방위로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카를로스 2세는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3세는 카를로스를 잘만 이용한다면 프랑스를 분열시킬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그와의 협상을 진행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중재해서 전쟁을 종식했다는 업적을 세우길 원했기에 장 2세에게 나바라 왕을 용서하라고 설득했다. 장 2세는 고심 끝에 내전을 피하기 위해 카를로스와 화해하기로 하고 1354년 2월 22일 카를로스와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카를로스는 장 2세가 자신에게 주지 않았던 앙굴렘 등 여러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그는 왕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가야만 했다. 장 2세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는 카를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브뢰에 인질로 보내졌고, 카를로스는 1354년 3월 4일 파리로 가서 삼부회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에게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 허락을 얻어냈다. 이후 에드워드 3세가 보낸 동맹 제안을 거부하면서 그의 도움으로 폭력사태 없이 화해가 이루어져서 다행이라며 조롱하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1354년 4월 6일,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는 긴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고, 장 2세는 전쟁 이전의 가스코뉴 영토에 더해 푸아투, 리우쟁, 루아르 지방의 영토와 주권을 양도하기로 했다. 10월 1일 아비뇽에서 조약이 확정되는 동시에 교황이 그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해 8월, 나바라 왕 카를로스의 심복이었던 아르쿠르 백작이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그에 따르면 시종관이자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주도한 로베르 드 로리스를 포함해 장 왕의 측근 중 일부는 나바라 왕 카를로스의 첩자이며 추밀원 회의 내용을 그에게 비밀리에 누설했다고 한다.

장 2세는 이에 분노해 카를로스 형제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궁전에서 열린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형제는 참석하러 가던 중 경고를 받자 급히 파리를 탈출해 암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카를로스는 노르망디를 침공한 장 2세를 피해 교황청이 있는 아비뇽에 은거했고, 장 2세는 1355년 1월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긴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카를로스는 아비뇽에 잉글랜드 측 사절로 찾아왔던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즉시 접근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겠다고 제안했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35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로 가서 그곳의 병력을 규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본인은 노르망디로 가서 카를로스와 연합해 장 2세와 맞붙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2,000명의 용병들을 이끌고 노르망디 세르부르에 상륙한 카를로스 2세는 장 2세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장 2세 역시 카를로스와 잉글랜드가 연합하는 사태를 피하고 싶었기에 받아들였다. 양자는 2개월간 협상한 끝에 9월 초 장 2세는 카를로스로부터 빼앗은 영지를 돌려주고 사면하고, 카를로스는 프랑스 왕국에 충성을 바치고 영국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합의가 맺어졌다.

카를로스에게 또다시 농락당했지만, 에드워드는 프랑스 침공을 진행하기로 했다. 노르망디 원정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카를로스가 고용했다가 해산한 용병들을 재고용해 브르타뉴 방면을 교란하게 하면서, 본인은 칼레에 상륙한 뒤 피카르디 일대에서 슈보시를 시도했다. 그러나 장 2세가 피카르디 일대의 모든 농민에게 사료, 음식, 잠재적인 전리품 등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자 잉글랜드군은 열흘 만에 칼레로 귀환했다. 하지만 장 2세와 프랑스군의 시선이 에드워드 3세에게 쏠린 사이, 가스코뉴로 간 흑태자 에드워드가 남부 프랑스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슈보시를 벌였다.

흑태자의 슈보시는 잉글랜드 왕국에 막대한 전리품을 안겼다. 한 기록에 따르면, 잉글랜드인들은 가능한 많은 금과 보석을 휴대하기 위해 약탈했던 은을 버렸고,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1,000대의 수레를 동원했다고 한다. 50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민심을 수습하려는 장 2세에 의해 세금 면제를 받았다. 현재 학계에서는 총 40만 에퀴(약 6만 파운드)에 달하는 조세 부담 능력을 가진 거주지와 시설이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여기에 약탈을 모면한 프랑스 남부 전역의 도시들은 요새를 건설하거나 수리하는 데 수년에 걸쳐 많은 돈을 지출했다. 또한 에드워드의 슈보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프랑스 군부에 대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장 2세는 친정을 단행해 잉글랜드군과 한 판 붙어서 쫓아내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한편, 칼레로 돌아간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군이 베릭을 공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서둘러 잉글랜드로 떠났다. 1356년 1월,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1월 13일 베릭을 탈환했고, 이후 스코틀랜드 로우랜드를 파괴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에 대한 에드워드 3세의 마지막 원정이었다.
2.5.8.5. 잉글랜드의 포로가 된 프랑스 국왕
1356년 4월 5일, 장 2세가 루앙에서 열린 샤를 도팽의 연회에 참석한 카를로스 2세와 추종자들을 모조리 체포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에브뢰 가문과 노르망디 귀족들은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장 2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노르망디에 파견했다. 1356년 4월,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대부분을 장악하고 항복을 거부한 노르망디 중부의 브레퇴유 요새를 포위했다. 5월 14일, 장 2세는 샤르트르에 머물면서 잉글랜드의 대응에 대비해 병력을 모으고자 전국에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민중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장 2세는 병력이 모이지 않자 5월 말과 6월 초에 소집령을 재차 반포했다. 한편, 카를로스 2세의 동생 필리프는 코탕탱 반도 북부로 도주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조속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356년 8월 18일, 5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지휘하에 코탕탱 반도 북동쪽의 생바스트라후그에 상륙했다. 그들은 필리프가 지휘하는 200명의 노르만 병사들과 합류했고,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브르타뉴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800명의 추가 병력이 몽트부르에서 가세했다. 잉글랜드군은 6월 24일 몽트부르에서 출발하여 노르망디 서부 일대를 관통하며 약탈을 자행했고, 7월 5일 브레퇴유에 도착했다. 브레퇴유를 포위 공격하던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했고, 수비대는 1년간 동안 포위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보급을 받았다.

헨리는 여세를 이어가 7월 4일 베르누이로 진군해 그곳을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몸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여긴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프랑스군이 베르누이에서 11km 떨어진 콩데쉬르이통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는 전투를 준비했다. 프랑스군이 콩데쉬르이통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낙오병들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 헨리는 그들과 3~5km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했다. 장 2세는 헨리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헨리는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는 애매한 답을 했다. 그 후 헨리는 밤에 숙영지를 철거하고 45km 떨어진 아르장탕까지 강행군했다. 장 2세는 이들을 추격하는 대신 브레퇴유를 재차 포위하기로 했다.

7월 12일부터 브레퇴유 포위를 재개한 장 2세는 성벽 아래에 땅굴을 파서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8월의 어느 시점에 거대한 이동식 공성탑을 지어서 성벽까지 밀고 들어갔지만, 수비대가 공성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격퇴되었다. 이렇듯 수비대가 악착같이 저항한 데다 1년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저장했으니, 가까운 시일에 성을 공략하는 것은 요원했다. 여기에 가스코뉴에 있던 흑태자 에드워드가 8월 4일부터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며 여러 마을을 황폐화시켰다. 장 2세는 처음엔 가스코뉴에서 올라오는 적을 격퇴하자는 제안에 "브레퇴유의 반역자들이 더 위험하다!"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프랑스 남서부의 민심이 심하게 악화되어 자칫하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 들 수 도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결국 브레퇴유를 무력으로 공략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그 대신 수비대에게 코탕탱 반도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해주고 귀중품과 물품을 가져갈 수 있게 해줄 테니 브레퇴유를 떠나라고 권유했다. 수비대는 처음엔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장 2세가 막대한 돈을 찔러주자 이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브레퇴유 문제를 해결한 뒤, 장 2세의 프랑스 주력군은 흑태자를 물리치기 위해 남하했다. 그러나 1356년 9월 19일에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또다시 완패했고, 장 2세는 막내아들 필리프와 함께 생포되었다. 장 2세와 막내 아들 필리프는 보르도로 끌려간 뒤 최고급 포로로서 우대를 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을 잉글랜드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왕을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하길 원했지만, 에드워드 3세가 강력히 명령하자 이에 따르기로 했다. 1357년 3월 23일, 흑태자 에드워드와 도팽 샤를 사이에 1년간 휴전 협약이 체결되었다. 4월 11일, 장 2세와 필리프 왕자는 여러 고급 귀족 포로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이송되었다. 5월 4일 플리머스에 상륙한 장 2세는 5월 24일 런던에 입성했다. 이때 장 2세는 수려한 흰색 군마를 탔고, 흑태자 에드워드는 작은 검은 색 말을 탔다. 이후 장 2세는 런던의 초고급 거주지인 호텔 드 사부아에 거주했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 그는 함께 포로로 잡힌 친척 또는 프랑스에서 자의로 온 이들로 구성된 나름의 궁정을 꾸렸다.

이제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에 이어 프랑스 국왕 장 2세마저 생포하면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게 되었다. 1357년 10월 3일,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와 베릭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를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고 풀어주는 대가로 10만 마르크를 분할 납부 받기로 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상당한 영토 이득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1358년 1월, 에드워드 3세와 장 2세는 다음과 같은내용의 제1차 런던 조약에 서명했다.
1. 잉글랜드 국왕은 필리프 2세 이래로 프랑스 왕국에게 잃었던 아키텐 공국의 본래 소유권을 전부 회복한다.
2. 프랑스 국왕은 400만 크라운의 몸값을 지불하는 대가로 프랑스 왕위를 잃지 않은 채 석방된다.

그러나 프랑스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기옌, 생통주, 푸아투, 리무쟁, 쿠에르시, 페리고르, 루에르그 및 비고르가 잉글랜드에 넘어간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확인한 파리 시민들이 반발한 끝에 에티엔 마르셀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정권을 장악하고 제1차 런던 조약을 무효로 처리해버렸다. 이후 프랑스는 장 2세를 대신하여 프랑스의 섭정을 맡고 있던 샤를 도팽카를로스 2세와 에티엔 마르셀간의 내전이 벌어진 끝에, 에티엔 마르셀이 피살되고 카를로스 2세가 노르망디로 도주하면서 샤를 도팽이 승리했다. 카를로스 2세는 에드워드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를 침공해 샤를 왕자를 격파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르망디, 피카르디, 샹파뉴, 브리의 영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전에 카를로스 2세에게 연이어 속았던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생포된 뒤 런던으로 끌려간 장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뒀던 에드워드 3세는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장 2세를 압박하기로 마음먹었다.
2.5.8.6. 1359 ~ 1360년 프랑스 원정과 브레티니 평화 협약
1359년 3월, 장 2세는 이동 제한을 더욱 엄격히 적용하면서 압력을 행사한 에드워드 3세의 뜻에 따라 제2차 런던 조약을 체결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아키텐 공국의 이전 소유물에 더해 메인, 투렌, 앙주 및 노르망디도 에드워드 3세와 후계자들에게 넘어간다.
2. 브르타뉴 공작으로는 샤를 드 블루아가 아니라 장 드 몽포르의 아들 이 선임되며, 잉글랜드 국왕은 브르타뉴 공작으로부터 경의를 받는다.
3. 장 2세는 인질들을 남긴 채 프랑스로 귀환한 뒤 400만 크라운의 몸값을 더 짧은 기한 내에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삼부회는 협약 내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샤를 왕자에게 전쟁을 지속하라고 촉구했고, 샤를 왕자 역시 받아들였다. 샤를 왕자와 삼부회의 입장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재차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1359년 늦여름, 4,000명의 맨앳암즈, 700명의 대륙 용병, 5,000명의 장궁병을 칼레에 집결시킨 그는 랭스로 진격해 5주 동안 랭스를 포위했지만 방어 태세가 워낙 굳건해서 함락이 어려워지자 1360년 봄 포위를 해제하고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로 진격했다. 파리 교외는 철저하게 약탈당했지만, 샤를 왕자와 수비대는 파리 성에서 끝까지 버텼다. 천혜의 요새인 파리 성을 무력으로 공략하는 건 무리었고, 프랑스인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먹을 것을 구할 길이 막막해지고 곳곳에서 적군이 튀어나와 치고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급기야 전염병 마저 창궐해 많은 이들이 죽자, 에드워드는 다른 곳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1360년 4월 13일,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대성당이 있는 도시인 샤르트르에 도착했다. 클리니 수도원장 앙드루앵 드 라 로슈가 이끄는 수비대는 요새 뒤에 숨어서 농성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요새를 포위해 공성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날 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맹렬한 폭풍우가 잉글랜드 진영을 강타했다. 우박이 사람과 짐승을 죽일 만큼 컸고 수없이 떨어졌기에 가장 용감한 자도 겁을 먹었다.

조슈아 반스의 <가장 성공한 군주 에드워드 3세>에 따르면, 이날 6000마리의 말과 거의 1000명의 병사가 우박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다른 사료에는 수치가 확인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되지만, 고위급 기사인 기 드 뷰챔프 2세가 우박에 맞아 3주간 고통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을 볼 때 피해가 심히 큰 건 사실로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하느님이 프랑스 왕국과 완전한 화해를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해 징벌을 내렸다고 여기고, 샤르트르에 있는 성모 교회 쪽으로 몸을 돌려 땅바닥에 엎드리며 성모 마리아에게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인 4월 14일, 앙드루앵이 잉글랜드 진영에 찾아와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하자, 에드워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샤르트르 공방전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한편, 장 2세는 제2차 런던 조약이 삼부회에게 거부된 뒤 경비병 69명의 감시 하에 가택 연금을 당했고, 서머튼으로 옮겨졌다가 1360년 봄에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상스 대주교 기욤 2세 드 멜룬에게 조속히 에드워드 3세와 협상을 완료하고 샤를 왕자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 것을 촉구하게 했다. 이후 양국이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360년 10월 24일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었다. 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직위를 주장하는 것을 그만둔다. 그 대신 기옌, 가스코뉴, 아키텐, 아르마냐크 등지의 영주권을 인정받으며, 프랑스 국왕은 이에 대해 명목상의 주권만 가진다.
2. 제2차 런던 조약에서 잉글랜드 왕국이 가지기로 했던 노르망디, 투렌, 앙주, 메인, 브르타뉴, 플란데런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다.
3. 장 2세는 300만 에쿠스를 몸값으로 지불하기로 약조하고 석방하되, 두 아들인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 그리고 여러 명의 왕자와 귀족, 파리 주민들을 인질로 보낸다.

브레티니 평화 협약 내용을 전해들은 잉글랜드인들은 열렬히 환영했고, 1361년 의회에서 이를 비준했다.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 에드워드를 아키텐 공작으로 선임해 그곳의 통치를 독자적으로 이끌도록 했다. 이때가 에드워드 3세 치세의 정점이었다.

2.5.9. 결혼 동맹 정책과 내치

프랑스 및 스코틀랜드와의 갈등을 종식한 뒤, 에드워드 3세는 결혼 동맹 정책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에드워드 3세는 1330년에서 1355년 사이에 필리파 왕비와의 사이에서 14명을 낳았는데, 이중 아들 5명, 딸 4명이 유년기를 넘겼다. 1358년까지 아들 중 단 한명, 앤트워프의 라이오넬만 제4대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와 결혼해 외동딸 필리파를 낳았다. 이제 1358 ~ 1359년에 몇 가지 중요한 결혼 협약이 체결되었다. 마거릿 공주는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와 결혼했고, 셋째 아들 곤트의 존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차녀인 블랜치와 결혼했다. 이러한 결혼은 에드워드 3세가 영국 제도를 통치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361년, 에드워드 3세는 라이오넬을 아일랜드 총독으로 선임했고, 1362년에는 그에게 클라렌스 공작이라는 칭호를 수여헀다. 또한 곤트의 존은 1362년 랭커스터 공작으로 선임되어 북부 잉글랜드에서 가장 거대한 거물이 되었으며, 수 년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의 보안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65년,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은 끝에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의 최종 승리자가 된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에드워드 3세의 딸 메리 공주와 결혼했다. 메리 공주는 결혼식 직후 사망했지만, 장 4세는 에드워드 3세의 허락 없이는 재혼하지 않는 데 동의했다. 1366년,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의붓딸인 조앤 홀랜드와 재혼했다. 1362년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지만, 이 공국은 이후로도 수년간 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에드워드 3세는 플란데런 백국과 부르고뉴 백국의 상속녀인 마르그리트와 케임브리지 백작을 맡고 있던 넷째 아들 랭글리의 에드먼드를 결혼시키려 했지만, 프랑스 왕국이 이를 막기 위해 교황청에 열심히 로비한 끝에 우르바노 5세가 마르그리트와 에드먼드의 결혼을 불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막내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다.

1362년, 에드워드 3세는 50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의회는 이를 기념해 일반 사면을 발표했으며, 왕실의 필요에 따라 징벌 조항에 대한 왕의 권리를 정의하고 제한하는 중요한 법령을 체택했다. 이는 에드워드 3세가 전쟁 기간 동안 정부가 축적했다고 주장하는 상당한 부채를 지불하기 위해, 하원에 양모 수입 부과금을 갱신하도록 요청해야 했기에, 그들의 호의를 사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체택될 수 있었다. 하원은 전쟁 중에만 부과할 수 있는 직접세와 이후 몇 년 동안 다소 영구적이게 된 간접세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입증하면서 이 제안에 동의했다. 1362년 의회에 제출된 또 다른 제안은 영국에서 생산된 상품의 수출과 이를 위한 단일 환적 지점을 칼레에 만들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하원은 이 제안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정부는 1363년에 단독으로 칼레에서 그러한 지점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잉글랜드 경제가 아니라 상품 수출을 관리하도록 지정된 무역 회사에 이익을 제공했다.

2.5.10. 백년전쟁(1369 ~ 1377)

1367년 카스티야 원정을 수행하고 귀환한 흑태자 에드워드는 원정 도중에 얻은 이질에 시달리다가 보르도에 몸져누웠고, 카스티야 원정을 치르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전비를 메꾸기 위해 그가 다스리는 가스코뉴, 아키텐 등지의 세금을 대폭 늘려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1368년 1월 난로세를 강제 징수하기로 한 조치는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에드워드의 심복인 존 헤어웰 주교는 니오르에서 회의를 열어 푸아투, 생통주, 리모주, 루에르그 남작들을 설득해 이 세금을 받아들이게 했지만,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코밍즈, 알브레 영주들은 이에 복종하지 않았다. 여기에 에드워드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던 존 챈더스는 난로세를 부과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르망디 영지로 은퇴했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강압적인 세금 징수에 반감을 품은 알브레 영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다르마냐크 등 수많은 아키텐 영주들은 처음에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버지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시정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자, 그들은 1368년 5월부터 샤를 5세에게 개입해줄 것을 청원했다. 브레티니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 왕국은 영토가 이전되고 몸값이 지불된 뒤 아키텐의 주권이 프랑스 왕국에서 잉글랜드 왕국에 넘어가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이 명목상으로나마 아키텐의 주권자로 남아 있었다.

샤를 5세는 이 점을 이용해 아키텐을 프랑스에 도로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1368년 5월 20일 자신의 친척이자 피에르 1세 드 부르봉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와 결혼시켰다. 그해 6월 30일, 샤를 5세는 자신에게 청원한 아키텐 영주들과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프랑스 국왕의 가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했고, 그 대가로 현재 가지고 있는 영지를 인정받으며,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이렇게 준비를 갖춘 뒤, 1369년 1월 25일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사촌, 에두아르 다키텐 공작이여. 파리로 와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프랑스의 왕이신 샤를의 허락 없이 세금을 부과한 것에 대해 변호하시오.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에 분개해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기꺼이 파리로 가겠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에 투구를 쓰고 6만 병사들과 함께 갈 것이다."

이후 양자는 전쟁을 재개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을 프랑스의 국왕으로 칭했다. 이에 샤를 5세는 같은 해 11월 30일에 주군에게 반역을 저지른 아키텐 공작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샤를 5세의 유능한 장성들인 베르트랑 뒤 게클랭,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루이 드 상세르 등이 샤를 5세의 형제인 장 드 베리, 루이 1세와 함께 대대적으로 공세를 벌였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도운 데다,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귀족들이 대거 프랑스군에 귀순했고, 흑태자 에드워드가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전쟁에 직접 나서질 못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기울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으로 다시 자처하기로 한 뒤 1369년 여름 칼레로 향하는 군대를 직접 이끌고 가스코뉴로 가려 했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한 든든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가 병사하자 깊은 슬픔에 빠져 곤트의 존에게 자신을 대신해 가스코뉴로 가게 했다. 1372년,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 휘하의 잉글랜드 함대가 아키텐의 주요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으나 라 로셸 해전에서 카스티야 함대에게 참패하고 존 헤이스팅스는 생포되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아키텐으로 재차 원정을 떠날 채비를 했다. 1372년 8월 30일, 에드워드 3세는 손자인 보르도의 리처드를 섭정으로 삼고 배에 올라탔다. 그러나 기상 조건이 극도로 좋지 않아 함대가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자, 에드워드 3세는 5주 후에 잉글랜드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일설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해안에 도착한 뒤 엎드리며 하느님에게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잉글랜드를 보우하소서.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후 샤를 5세의 유능한 장군들이 연이은 승전을 거두면서, 브레티니 협약으로 확보한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고, 보르도에서 바욘 까지의 좁은 해안 지역 만이 잉글랜드의 통제를 받았다. 1375년 3월 25일, 브뤼헤의 성 도나티아 대성당에서 프랑스 측과 잉글랜드 측 사절단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양자는 먼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1375년 7월 1일부터 1377년 6월까지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때 그레고리오 11세의 사절단은 잉글랜드 측 협상 대표 곤트의 존에게 잉글랜드의 소유를 포기하고 프랑스 국왕의 명목상 가신이자 독립적인 아키텐 공작이 될 것을 제안했다. 존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잉글랜드 의회가 아키텐이 자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추가 협상에서 현재의 영토 상황을 토대로 40년간 휴전 협정을 맺는 안건이 제시되었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자 모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오면서 역시 무산되었다.

1376년 7월, 이번에는 샤를 5세의 사절인 샤르트르 주교 장 르 페브르가 에드워드 3세에게 제안했다. 그는 도르도뉴 강 남쪽에 위치한 기옌 일대에 대한 에드워드 3세의 영주권을 인정하고, 장 2세의 몸값 중 여전히 지불되지 않은 1,200,000 프랑을 지불할 테니, 아쟁, 비고르, 케르시, 바자데이스를 프랑스 왕국에 반환하고 기옌 공작으로서 샤를 5세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최종 평화 협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2.5.11. 말년

1370년대, 에드워드 3세는 고령의 나이에 노쇠할 대로 노쇠해지면서 치매 증세 마저 보였다. 여기에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도 중병에 걸려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차남 라이오넬은 1368년에 사망했다. 따라서 삼남 곤트의 존이 국정을 총괄했다. 그러나 존은 잉글랜드 국민들의 강한 비난에 직면했다. 그들은 1340년 슬로이스 해전, 1346년 크레시 전투, 1356년 푸아티에 전투의 영광을 생생히 기억했고, 1360년 브레티니 협약으로 정점을 찍었을 때로 되돌려야 한다고 여겼다. 반면에 존은 전쟁을 지속하는 건 잉글랜드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 백해무익하며, 잉글랜드가 번영하려면 장기적인 평화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어떻게든 평화 협정을 맺고자 했다. 이에 많은 이가 존이 흑태자 에드워드와는 달리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그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졌다.

일각에서는 1375년 6월에 체결된 첫번째 휴전으로 인해 캥페를레를 포위하고 있던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캥페를레를 공략하는 것을 막았다며 비난을 퍼부었으며, 연대기 작가들은 존이 공적 자금으로 지원받아놓고 댄스 파티를 성대하게 벌였고, 존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상을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한 후 영국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협상을 이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잉글랜드의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는 데 더 관심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존은 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정부인 앨리스 페러즈의 전횡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앨리스 페러즈는 에노의 필리파 왕비의 시녀로, 10대의 나이에 노쇠한 왕의 정부가 된 뒤 왕비와 같은 권력을 쥐었고 사익을 위해 왕을 조종했다. 56개의 장원과 성을 받아냈으며, 왕실의 판결에 개입하여 친구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냈고, 왕에 대한 신하들의 접근을 통제하기까지 했다. 이에 수많은 이가 그녀의 전횡에 분노했지만, 존은 아버지의 총애를 듬뿍 받는 그녀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비난을 더 받았다.

1376년, 1371년과 1373년 의회에서 징수한 세금이 모두 소진되면서 정부에 자금이 부족해졌다. 이에 따라 1376년 4월 28일, 국고를 채우기 위한 의회가 소집되었다. 일명 '좋은 의회'(Good Parliament)로 일컬어지는 이 의회에서, 의원들은 왕의 부패한 조언자들, 특히 왕의 정부 앨리스 페러즈를 탄핵하고 왕권에 도전하기로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회의에 참석하기엔 너무 쇠약해져서 개입할 수 없었고, 존이 그를 대신해 의회에 참석했다. 의회는 전쟁 수익, 막대한 돈 낭비 및 부패에 대한 비난을 제기했다. 의회는 국왕이 "자신의 비용으로 생활해야 하며" 막대한 세금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존은 이 압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왕실 행정부에 대한 조사에 동의해야 했다. 그 결과, 의회는 다수의 "부패한 신하"를 탄핵 하고 왕의 여주인인 앨리스 페러즈가 연간 3,000 파운드를 왕에게서 강탈한 혐의로 궁정에서 축출하도록 선고했다.

1376년 7월 10일, 의회는 에드워드 3세의 자금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진노한 에드워드 3세는 같은 날 의회를 해산했고, 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했다. 존은 의회가 4월 28일부터 7월 10일까지 내렸던 모든 조치를 무효로 처리해 왕권을 되돌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추방된 신하들을 궁정에 복귀시키기로 했다. 이 중에는 앨리스 페러즈도 있었다. 또한 존은 지난 의회의 의사 결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인사들을 대상으로 징벌적인 정책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왕에게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9명의 영주로 구성된 고문단을 해체했으며, 11월 17일엔 고문단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위크햄 주교로부터 세속 재산을 박탈하고 궁정에서 추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1377년 1월, 존은 친구이자 세인트 데이비드 주교인 아담 휴턴을 새 총리로 임명했으며, 지난 의회의 의장이었던 피터 드 라 마레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이리하여 존은 왕권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수많은 정적을 양산했고 인기가 더욱 떨어졌다. 1377년 1월 27일, 존은 리처드 왕자와 함께 의회를 소집했다. 일명 '나쁜 의회'(Bad Parliament)로 일컬어지는 이 의회에서는 지난 의회의 결정 대부분을 공식적으로 뒤집었다.

1377년 2월 2일, 런던 주교 윌리엄 드 코트니가 존 위클리프이단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켄터베리 대주교 시몬 서드버리와 다른 주교들이 주관하는 법정에 출두해 혐의에 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은 이를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자신을 모욕하려는 시도로 보았고, 신학자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주교를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위클리프를 변호하기 위해 신학박사 4명을 임명했다. 재판은 2월 1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존과 잉글랜드 원수 헨리 퍼시가 원수 지휘봉을 들고 현장에 도착했다.

코트니 주교는 존과 퍼시가 대성당에 온 것에 분노해 퍼시가 자신의 양떼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비난했다. 이에 존은 "주교님이 좋아하시든 아니든, 원수는 원수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라고 답했다. 코트니는 이 말에 더욱 분노했고, 존과 코트니간의 언쟁이 벌어지더니 존이 주교의 머리카락을 의자에서 끌어내겠다고 위협한 것에 격분한 런던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존과 퍼시는 위클리프를 데리고 대성당에서 도주했고,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얼마 후, 퍼시는 런던 시민 한 명을 체포해 런던에 소재한 자신의 집에 구금했다. 이는 런던 치안 판사의 권한을 빼앗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세간에는 존이 런던 시장을 퍼시로 교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퍼시의 집을 약탈하고 거기에 갇혀 있던 시민을 석방했다. 이후 폭도들은 사보이 궁전으로 가다가 도중에 존을 변호하던 사람을 죽였다. 코트니 주교가 급히 달려와서 자제를 호소한 덕분에, 사보이 궁전은 약탈당하지 않았다.

당시 오랜 친구이자 부유한 플란데런 상인인 장 디프레의 집에서 저녁 식사 중이었던 그는 부하들로부터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퍼시와 함께 뒷문을 통해 탈출하여 배를 타고 켄싱턴 궁전으로 항해했다. 이후 누이 조앤 공주가 3명의 기사를 보내 런던 시민들을 설득해 폭동을 멈추고 귀가하게 했다. 다음날 런던 사람들은 국왕에게 대표단을 보내 자신들이 일으킨 폭동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 사태의 책임은 존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는 런던의 특권이 보존될 것이며 다가오는 황금 희년을 기념하여 일반 사면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의회는 해산되었고, 잉글랜드의 정치 혼란은 겨우 진정되었다.

2.6.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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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6년 6월 8일, 수년간 병마에 시달리던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아들이 누운 곳으로 가서 임종을 지켜봤다. 이후 에드워드 3세 역시 큰 농양이 생기자 죽음을 준비하기로 하고, 10월 5일 자신의 개인 재산을 관리할 관리인을 임명하고 3일 후에 유언장을 작성했다. 1377년 2월 3일 농양이 터지면서, 에드워드 3세는 기운을 다소 되찾았다. 2월 11일, 에드워드 3세는 배를 타고 리치먼드 쉰 성으로 이송되었다. 배가 당시 국회의사당이 있던 웨스트민스터 궁전을 지나 항해했을 때, 영주들이 찾아와서 늙은 왕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부디 좀더 힘을 내라고 격려했다. 에드워드 3세는 4월 23일 윈저를 방문한 뒤 많은 젊은 귀족과 왕실 구성원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고, 손자인 보르도의 리처드와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가터 기사 작위를 내렸다.

그 후 쉰 성으로 돌아가서 중병에 시달리던 에드워드 3세는 1377년 6월 21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로저 샹들레르에 의해 방부 처리되었으며, 3일만에 쉰 궁전에서 런던으로 운송되었다. 장례 행렬에는 횃불 1,700개가 사용되었으며, 장례식 미사는 6월 28일 캔터베리 대주교인 사이먼 서드버리가 참석한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장례식은 7월 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살아남은 두 아들 곤트의 존과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왕의 무덤은 참회왕 에드워드의 예배당 남쪽에 위치했다. 에드워드 3세는 50년 동안 왕으로 재위했으며, 중세 흑사병에서도 살아남았고, 세 명의 형제자매와 아내, 그리고 12명의 자녀 중 8명보다 오래 살았다. 당시 백성들 중에 에드워드 3세가 왕이 아니었던 때에 살았던 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를 신의 은총의 표시로 여겼고, 그를 잃은 것에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이었던 보르도의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3. 평가

에드워드 3세는 치세 동안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 전례없는 인기를 누렸다. 백성들은 종종 세금을 너무 많이, 자주 걷는다며 불평하면서도 슬로이스 해전,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를 이끌고 브레티니 평화 협정으로 프랑스 영토를 대거 석권한 자신들의 군주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1369년 이래 샤를 5세의 반격에 그동안 쌓았던 위업이 대거 무너졌고, 정부 앨리스 페러즈를 지나치게 총애해 폐단을 초래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난받은 적은 전혀 없었다.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에드워드 왕과 같은 사람은 아서 왕 시대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에드워드 3세에 대한 숭배는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더욱 발전했다. 당시 연대기 작가들은 에드워드 3세를 '황금 왕', 그의 치세를 '황금 시대'로 일컬었다. 15세기 초 헨리 5세가 백년전쟁을 재개했을 때, 그는 자신의 저명한 증조할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의 군사 작전에 관한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후 잉글랜드 왕실은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튜더 왕조로 바뀌었지만, 에드워드 3세의 명성은 정권이 바뀌는 동안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16세기 말에는 익명의 희곡 <에드워드 3세>가 집필되었는데, 많은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간주했다.

에드워드 3세의 사후 명성은 군사적 업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헨리 4세에드워드 4세는 입법 및 재정 정책에 있어서 에드워드 3세처럼 행동하도록 촉구받았으며, 16세기와 17세기에는 영국 군주제의 부와 유리한 무역 수지를 보여주기 위해 에드워드 3세의 치세였던 1350년대 관세 기록 사본이 만들어졌다. 17세기에는 에드워드 3세를 입헌 군주의 모범으로 여겼으며, 그의 통치기간 동안 국왕과 의회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했다고 간주되었다. 명예 혁명이 발발한 1688년에는 에드워드 3세의 전기가 출판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에드워드 3세에 대한 역사가들의 관점이 바뀌었다. 윌리엄 스텁스는 저서 <영국 헌법사>에서 에드워드 3세를 무책임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부를 빼앗았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에드워드 3세의 선견지명이 부족했으며, 인기를 사서 왕위의 특권을 소외시킴으로써 영국 군주제를 입헌 마비 상태로 몰아넣었고, 이는 결국 장미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현대 영국 역사학계는 에드워드 3세가 말년(1369~1377년)을 제외하면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해 잉글랜드를 전반적으로 잘 이끈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노르망디와 칼레의 일부 분리주의자들[11]은 에드워드 3세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반면 대다수 프랑스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땅을 침공한 침략자로 취급된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흑태자 에드워드
(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 6월 15일 1376년 6월 8일 켄트의 조앤
슬하 2남[12]
1녀 베드포드 백작부인 이사벨라
(Isabella, Countess of Bedford)
1332년 6월 15일 1382년 10월 5일 코시 영주 앙게랑 7세
슬하 2녀
2녀 조앤 공주
(Princess Joan)
1333년 12월 19일 또는
1334년 1월 28일
1348년 9월 2일
2남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Lionel of Antwerp, Duke of Clarence)
1338년 11월 29일 1368년 10월 7일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
슬하 1녀
비올란테 비스콘티
3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John of Gaunt, Duke of Lancaster)
1340년 3월 6일 1399년 2월 3일 랭커스터의 블란체
슬하 1남 2녀[13]
카스티야의 콘스탄사
슬하 1녀[14]
캐서린 스윈포드
슬하 3남 1녀[15]
4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Edmund of Langley, Duke of York)
1341년 6월 5일 1402년 8월 1일 카스티야의 이사벨
슬하 2남 1녀[16]
조앤 홀랜드
3녀 브르타뉴 공작부인 메리
(Mary, Duchess of Brittany)
1344년 10월 10일 1361년 9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4녀 펨브로크 백작부인 마거릿
(Margaret, Countess of Pembroke)
1346년 7월 20일 1361년 10월 1일 또는 12월 25일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
5남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Thomas of Woodstock, Duke of Gloucester)
1355년 1월 7일 1397년 9월 8일 또는 9월 9일 엘리노어 드 보훈
슬하 1남 3녀

왕비 에노의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5남 4녀의 적자녀들을 낳았다.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 왕족으로 태어나도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게 당연시 되는 시대였고 이로 인해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많은 왕족들과는 다르게, 에드워드 3세는 왕비 에노의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낳았고 성인으로 장성하고 혼인하여 후손을 남긴 아들만 해도 5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보다 먼저 병사했고, 흑태자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였던 리처드 2세가 왕권을 이어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어린 리처드 2세가 즉위한 틈을 타 에드워드 3세의 나머지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다. 특히 2남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17], 3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4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손들 사이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이 터졌으며 이는 결국 백년전쟁 종전 후 장미 전쟁으로 표출된다.

에드워드 3세의 세째 아들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John of Gaunt, 1340∼1399)의 후손으로 코난 도일[18], 베네딕트 컴버배치[19]가 있다. 즉 이 둘은 32촌 관계인 것. 이쯤되면 그냥 남이다.[20]


[1] 이 사람이 곤트의 존이다. 이 곤트의 존의 증손녀가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이며 또 곤트의 존의 3녀인 캐서린은 카스티야 왕국의 왕비가 되었으며 3녀 캐서린의 친손녀는 이사벨 1세이다.[2] 이 사람의 증손자인 에드워드 4세의 장녀가 헨리 7세의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다.[3] 필리프 4세의 장남 루이 10세는 외아들이자 유복자인 장 1세를 낳았지만 그도 태어난지 고작 5일만에 사망했고, 차남 필리프 5세는 어거지로 살리카법을 확대해석하며 즉위했지만 정작 본인도 아들없이 딸만 두었으며, 삼남 샤를 4세마저 딸만 낳고 남성 상속자없이 사망하면서 일어난 결과. 그나마 필리프 4세의 살아남은 손는 에드워드 3세 뿐이지만, 손들은(루이 10세의 딸이자 나바라의 여왕 잔느, 필리프 5세의 딸 마르그리트) 결혼도 하고 후손도 남겼다.[4] 1316 ~ 1336, 콘월 백작[5] 1318 ~ 1355, 굴드르 공작 르노 2세의 부인[6] 1321 ~ 1362,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왕비[7] 선장은 하루에 6펜스, 선원은 3펜스를 받았다고 전해진다.[8] 이중 11,000명은 기마병이었다.[9] Honi soit qui Mal y pense(그것에 대해 나쁘게 생각한 사람을 부끄러워하게 하라)[10] 프랑스의 에퀴 금화는 1337년 처음 주조되었을 때는 약 4/5투르리브르이자 잉글랜드 페니 은화 48개, 즉 1/5스털링파운드 가치였으나 점차 가치가 하락했고 장 왕 치세에는 34페니, 즉 1/7파운드까지 떨어졌다.[11] 노르망디는 프랑스화된 바이킹의 후손이고 윌리엄 1세의 주도 하에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족의 영향으로 프랑스 본토와 달리 문화적으로 북유럽 및 잉글랜드에 가까우며(워낙 북쪽이라 북쪽에서는 잘 자라기 힘든 포도로 담그는 와인 대신, 칼바도스라는 프랑스 타 지방에는 없는 독특한 술 종류가 있다), 칼레 또한 원래는 플랑드르, 즉 네덜란드ㆍ벨기에 쪽의 영역이었고, 프랑스에서 독자세력화를 시도했던 부르고뉴국의 역사도 있는데다가, 북해 연안이라 바다 건너 영국령이었던 세월도 그리 짧지 않은 관계로, 서프랑크부터 이어지는 오늘날 프랑스 및 그 전신에 속해 있던 세월이 생각보다 길지 않기 때문에, 두 지역의 주민들은 스코틀랜드, 카탈루냐, 바스크 등처럼 진지하게 분리주의를 획책하고 있지는 않아도 프랑스 본토 내에서는 독자적인 지역색이 상당히 있는 편이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잔 다르크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12] 리처드 2세 등.[13] 포르투갈의 왕비 필리파, 헨리 4세 등.[14] 카스티야의 왕비 카탈리나[15]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16] 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17]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사실 서른살도 되기 전에 요절했고, 아들은 없고 외동딸 필리파만 있어서 그의 자손들은 이용당하고 휘둘리기만 하는 입장이었다.[18] 곤트의 존의 15대손[19] 곤트의 존의 17대손[20] 실제로 7촌이 넘어가면 유전적으로도 남이라고 한다. 본관 같은 할아버지-손자뻘 항렬의 남남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