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03 20:01:53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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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영어: First Battle of St Albans
파일:제1차 세인트올번스 전투.jpg
시기
1455년 5월 22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세인트 올번스
원인
요크의 리처드에드먼드 보퍼트의 권력 분쟁
교전 세력
요크 가문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랭커스터 가문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지휘관
파일:800px-Richard_of_York,_3rd_Duke_of_York_(Variant).svg.png 요크의 리처드
파일:Arms_of_Neville_of_Middleham.svg.png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파일:Arms_of_Richard_Neville,_16th_Earl_of_Warwick.svg.png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파일:잉글랜드 국장(1413-1603).svg 헨리 6세
파일:Beaufort_Arms_(France_modern).svg.png 에드먼드 보퍼트
파일:Coat_of_Arms_of_Sir_Humphrey_Stafford,_1st_Duke_of_Buckingham,_KG.png 험프리 스태퍼드
파일:Coat_of_Arms_of_Henry_Percy_(Hotspur).svg.png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파일:Arms_of_Clifford.svg.png 토머스 드 클리퍼드
병력
3,000명 2,000명
피해
60명 100명
결과
요크군의 승리
영향
요크의 리처드의 집권.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와 이후의 이야기

1. 개요

1455년 5월 22일, 런던에서 북쪽으로 22마일(35km) 떨어진 세인트 올번스에서 요크의 리처드가 이끄는 요크군과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왕실군이 맞붙은 전투. 장미 전쟁의 첫번째 전투이다.

2. 배경

백년전쟁 말기, 잉글랜드 왕국프랑스 왕국에게 속절없이 밀려 유럽 대륙 내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고, 민심은 갈수록 악화했다. 1450년 9월 7일, 아일랜드 총독이었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요크의 리처드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헨리 6세 에 대한 충성을 밝히면서, 노르망디를 상실하게 만든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를 비롯한 나쁜 조언자들을 제거하라고 촉구했다. 몇 주 후 의회에서 헨리 6세와 접견한 리처드는 자신의 주장을 반복했고, 대부분의 의원들이 그의 주장에 찬성했다. 결국 에드먼드 보퍼트는 그해 11월 런던 탑에 투옥되었고, 리처드는 가신인 윌리엄 올드홀의 도움을 받아 의회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에드먼드 보퍼트는 1450년 성탄절에 왕비 마르그리트의 설득을 받아들인 헨리 6세에 의해 석방되었고, 이때부터 리처드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1451년 1월, 리처드의 가신이 헨리 6세가 지난 해 잭 케이드의 난에 호응한 것에 보복하고자 켄트를 초토화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로 인해 켄트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에드먼드 보퍼트는 존 탈보트와 함께 잔혹하게 진압했고, 수백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후 리처드가 겐트 반란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리처드는 그해 4월에 러들로 성으로 피신했다. 그해 6월, 브리스톨 시장이자 의원인 토머스 영이 헨리 6세가 아직 후사가 없는 상황이니 리처드가 왕위 계승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에 분노한 서머셋 공작은 의회를 해산하고 토머스 영을 투옥했다.

1452년 2월, 요크의 리처드는 정부를 장악한 에드먼드와 보퍼트 가문의 부패와 무능함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병력 2천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2년 전에 서퍽 공작의 무능을 성토했던 요크 공작을 열렬히 지지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요크 공작을 도시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왕명을 충실히 따랐다. 이에 요크의 리처드는 켄트로 가서 지지 세력을 끌어모은 뒤 런던으로 재차 진군했고, 에드먼드는 국왕군을 이끌고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웰링에서 마주쳤다. 이후의 협상에서 요크의 리처드는 에드먼드가 최근 칼레의 수비대장에 임명되었음을 거론하고, 그가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았듯이 칼레를 부르고뉴에 넘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리처드는 곧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음을 직감하고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공개 선서를 하고 사면받아야 했다. 그 후 마르그리트 왕비가 1453년 봄에 임신한 사실을 선포하면서, 리처드를 왕위 계승자로 세우려는 움직임은 수그러들었다.

1453년 여름,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잉글랜드 남부를 순행했다. 그러던 8월 10일, 클라렌던 궁전에서 사냥하던 중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다. 그 후 그는 1년이 넘도록 모든 외부 사건, 심지어 자신에게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도 완전히 무관심해졌으며, 환각에 시달렸다. 특히 1453년 10월 13일 아들이자 후계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아들을 인지해달라는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요청에 불응했다. 또한 1454년 3월 22일 왕실 의회 의장 존 캠프가 사망한 뒤 캠프의 후게자를 제안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침묵했고, 나중에는 이미 사망한 존 캠프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외조부 샤를 6세가 생애 마지막 30년 동안 간혈적으로 광기에 시달렸던 점을 들어, 외조부의 정신병이 유전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듯 왕이 주변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누구에게도 반응하고 인식하지 못해 국정에 손을 대지 못하자, 요크의 리처드는 이 기회를 노려 1454년 2월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 호국경에 취임했다. 리처드의 오랜 정적이었던 서머셋 공작 에드먼트 보퍼트는 긴급 체포된 뒤 런던 탑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1년간 지내야 했다. 또한 세간에는 무기력해진 왕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리 없다며, 마르그리트가 에드먼드 보퍼트와 간통해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소문이 요크 공작 측의 사주로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리처드는 섭정으로 재임하는 몇 달간 정부의 과도한 지출 문제를 해결하고 잉글랜드 북부에서 심각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에 화해를 촉구해 내전을 회피하도록 했다.

그러던 1454년 여름부터 점차 제정신으로 돌아온 헨리 6세는 그해 12월 30일 마르그리트가 아들 에드워드를 보여주자 즉시 자신의 아이라고 선언했다. 1455년 초, 정신이 돌아온 헨리 6세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리처드를 호국경에서 해임하고 에드먼드 보퍼트를 칼레의 대장 직위에 복귀시켰다. 이후 에드먼드 보퍼트는 왕비의 지원을 받아 "적들로부터 왕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회를 소집해, 리처드 파벌을 대대적으로 탄핵하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요크의 리처드는 1455년 5월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함께 3,000 병사를 이끌고 남하했다.

에드먼드 보퍼트는 이 소식을 듣고, 요크 공작이 수도에서 지나치게 많은 지지를 얻을 것을 우려해 헨리 6세,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와 함께 2,000 병사를 이끌고 런던에서 철수해 하트퍼드셔의 세인트 올번스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전국의 귀족과 영주들에게 세인트올번스로 군대를 이끌고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에 상당한 규모의 지원군이 파견되었지만, 전투는 그들이 도착하기 한참 전에 발발했다.

3. 전투 경과

1455년 5월 20일, 요크군이 로이스턴에 도착했다. 요크의 리처드는 그곳에서 대법관과 왕에게 서신을 보내 서머셋 공작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1455년 5월 22일 아침, 국왕군이 세인트 올번스에 도착했고, 요크군이 도시로 향해 진격할 수 있는 동쪽의 2개 주요 도로를 바이케이드로 차단했다. 2개의 바리케이드를 방어하는 왕당파 군대는 클리퍼드 남작 토머스 드 클리퍼드가 지휘했다. 요크군은 1455년 5월 22일 아침에 세인트 올번스 동쪽에 나타나 키필드에 진을 쳤다.

이후 양자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고, 전령들은 상대측 진영을 자주 왕래하며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요크파는 서머셋 공작이 항복하고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헨리 6세는 무장 위협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요구했다. 리처드는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이러다가 사방에서 몰려오는 지원군이 왕과 가담하면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그 전에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요크군은 두 바리케이드를 공격했다. 요크 공작 본인은 슈롭셔 레인을 따라 진격하는 부대를 이끌었고, 솔즈베리 백작은 소프웰 레인 끝에 있는 바리케이드를 공격했다. 요크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길이 좁았기에 왕실군이 2차례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한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로버트 오글 경이 지휘하는 장궁병 500명을 포함한 예비군을 이끌고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돌파가 지지부진한 걸 보고 두 도로의 중간 지점인 톤멘 도랑을 건너 할로웰 스트리트를 따라 늘어선 건물로 향했고, 체커스와 크로스 키스 여관 사이의 바리케이드 측면에서 할로웰 스트리트로 돌파했다. 요크 궁수들은 바리케이드에 있던 왕실군을 향해 사격을 가해 흩어지게 만든 뒤, 마켓 플레이스 지역에 집결했다. 왕실군은 바리케이드를 떠나 마을로 도망쳤고, 요크군 주력은 바리케이드를 돌파한 뒤 마을 중심부로 진격했다.

헨리 6세는 경호원들과 함게 캐슬 여관 주변의 세인트 피터스 거리에 있었다. 요크 궁수들은 세인트 피터스 거리에 집결한 적군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국왕의 일행 중 많은 사람을 사살했으며, 화살 하나가 국왕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상처를 입혔다. 이어진 시가전에서, 클리퍼드 남작을 비롯한 왕실군 지휘관 몇 명이 전사했다. 전투가 끝나갈 무렵, 서머셋 공작은 인 성으로 피신했다가 적군이 포위하자 성채에서 출격해 적병 4명을 사살했다가 수많은 창과 검에 찔려 전사했다. 헨리 6세는 호위병에게 버림받은 뒤 벌판에서 또다시 광기에 걸려 발작하다가 요크군에게 확보되었다. 요크 공작은 헨리 6세를 세인트 올번스 교회 예배당으로 데려간 뒤 자신이 그의 충성스러운 신민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 후 요크 병사들은 세인트 올번스 시를 온종일 약탈하다가 요크군 장성들의 제지를 받고 중단했다.

4. 결과와 이후의 이야기

왕실군 고위 지휘관 중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클리퍼드 남작 토머스 드 클리퍼드가 전사했다. 헨리 6세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는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요크 측이서는 클린턴 경과 로버트 오글 경이 살해되었다. 또한 요크군 장병 60명과 왕실군 100명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투가 끝난 후, 요크 공작은 헨리 6세를 대동한 채 런던으로 향했다. 그 후 의회를 소집해 헨리 6세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호국경으로 취임하고, 추종자들에게 여러 요직을 수여했다. 또한 워릭 백작과 함께 런던에 성가대 예배당을 지었고, 그곳에서 한 사제가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매일 기도하도록 했다. 하지만 요크 공작은 왕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에 깊은 부담감을 느꼈던 데다 내전을 피하고 싶었던 대다수 귀족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촉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 왕비는 리처드에게 원한을 품은 보퍼트 파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귀족들을 하나씩 포섭하며 천천히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1456년 2월 25일, 헨리 6세가 정신을 되찾고 의회에 나타나 요크 공작의 섭정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아버지가 누리던 직위를 물려받고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총애를 받고 리처드를 견제했다. 또한 마르그리트 왕비는 수도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궁정을 코벤트리로 옮긴 뒤, 남편에게 리처드를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돌려보내라고 촉구했다. 이에 요크 파벌이 반발하면서, 양자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다. 그러던 1457년 8월 28일, 프랑스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습격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프랑스인인 마르그리트 왕비가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458년 3월 24일,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부르시에의 설득을 받아들인 헨리 6세는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와 요크의 리처드, 마그리트 왕비 및 보퍼트 파 귀족과 요크파 귀족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행사를 거행했다. 이들은 이 행사에서 서로 팔짱을 낀 채 런던 거리를 행진하면서, 모든 원한을 잊고 서로 화해해 나라를 잘 이끌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모습일 뿐이었고, 요크파와 보퍼트파 간의 정쟁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1458년 5월 말,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지휘하는 칼레 함대가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6척의 배를 나포했고, 며칠 후에는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약탈했다. 이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워릭 백작이 중립국인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공격한 것은 왕명에 위배된다며 그를 런던으로 소환했다. 워릭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왕명에 따랐지만, 근위대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다시 런던을 탈출해 칼레로 돌아갔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워릭 백작을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모든 자금 및 물자 공급을 중단했고, 워릭 백작은 이에 대응해 카스티야 및 중립국 선박에 대한 약탈 행위를 지속하는 한편 프랑스 국왕 샤를 7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접촉했다.

1459년 여름, 마르그리트 왕비는 왕을 대신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은백조 문양을 수여하고 귀족에 등록하는 한편, 요크파 귀족들을 주요 관직에서 해임하고 토지를 몰수했다. 1459년 6월, 마르그리트는 번트리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요크파 귀족들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요크 공작 리처드는 마르그리트 왕비와 랭커스터 파벌이 요크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한다고 여기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러들로 성에서 추종자들을 소환했다. 이리하여 장미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