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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즐리 무어 전투 영어: Battle of Hedgeley Moor | ||
시기 | ||
1464년 4월 25일 | ||
장소 | ||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헤즐리 무어 | ||
원인 | ||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휴전 협상을 막으려는 랭커스터군과 이들을 격퇴하려는 요크군의 맞대결. | ||
교전 세력 | ||
요크 가문 | 랭커스터 가문 | |
지휘관 | ||
랄프 퍼시 | ||
병력 | ||
6,000명 | 5,000명 | |
피해 | ||
미상 | 미상 | |
결과 | ||
요크군의 승리. | ||
영향 | ||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의 평화 협상 시작. |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64년 4월 25일,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휴전 협상을 막으려는 랭커스터군과 이에 맞서는 요크군이 노섬벌랜드의 헤즐리 무어에서 맞붙은 전투.2. 상세
1461년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서 참패한 후 남편 헨리 6세, 어린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던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3세의 궁정에 머물면서 재기를 꾀했다. 1461년 후반기에 스코틀랜드군과 랭커스터군이 연합하여 칼라일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1463년 제임스 3세, 제임스 3세의 모친인 헬러의 마리아 왕비, 마르그리트 왕비, 그리고 헨리 6세가 참가한 스코틀랜드군이 노럼 성을 포위했지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격퇴되어 스코틀랜드로 후퇴했다.하지만 마르그리트 왕비는 포기하지 않고 프랑스 왕실의 지원을 받고 군대를 모집한 뒤, 1464년 초 잉글랜드 침공을 재개했다. 랭커스터군은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성을 접수했고,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 로스 남작 토머스 로스, 헝거퍼드 남작 로버트 헝거퍼드, 그리고 퍼시 가문의 랄프 퍼시의 사병대도 가세했다. 요크 왕조는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 정부와 휴전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침략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양자는 그 해 5월 5일 요크 시에서 회담을 갖기로 했지만, 랭커스터군이 스코틀랜드 사절이 요크로 가는 걸 막으려 하면서 회담이 성사되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동생이자 초대 몬터규 후작인 존 네빌은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지시에 따라 6,000 병사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사절들이 요크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임무를 수행했다. 서머셋 공작은 뉴캐슬 인근에서 몬터규 후작의 군대를 습격하려 했지만, 정찰병이나 내부 고발자의 경고를 받은 몬터규 후작은 매복 공격을 회피하고 북쪽으로 계속 이동해 뉴캐슬로 향했다. 이후 북쪽으로 계속 진군해 알른윅으로 이동한 후, 울러를 향해 북서쪽으로 진군했다. 이윽고 4월 25일 노섬벌렌드의 울러에서 남동쪽으로 7마일 떨어진 글랜턴 마을 북쪽의 헤즐리 무어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서머셋 공작의 5,000 병사와 마주쳤다. 서머셋 공작의 군대는 고지대를 접수해, 몬터규 후작이 북쪽으로 이동할 때 통과해야 하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 상황은 기록이 빈약해서 불분명하다. 다만 양측 간에 통상적인 화살 교환이 이뤄졌고, 몬터규 후작이 1,500야드에 달하는 황무지를 가로질러 진격하자, 좌익에 있던 헝거퍼드 남작의 부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붕괴되었고, 이후 본대끼리 맞붙었을 때 랭커스터군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져 전장을 떠났다는 건 분명하다. 서머셋 공작은 많은 랭커스터 부대를 수습해 타인데일로 질서있게 후퇴했다.
이때 랭커스터군 선봉대를 이끈 랄프 퍼시는 홀로 가신들과 함께 최후의 저항을 감행했다. 현지 전설에 따르면, 퍼시의 말은 돌격 도중 약 30피트(9m)를 뛰어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그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돌멩이들이 세워졌는데, 일명 '퍼시의 도약'으로 알려진 그 자리에 있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현재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랄프 퍼시는 최후까지 분전했지만, 다른 모든 지휘관과 아군으로부터 어떠한 구원을 받지 못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으면서 "내 가슴 속 새를 구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현재 '퍼시의 십자가'로 알려진 네모 모양의 돌기둥이 전투 장소 근처에 세워졌다.
랭커스터군이 이렇게 무너진 뒤, 스코틀랜드 사절단은 요크에 무사히 도착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랭커스터파는 알른윅에서 병력을 재편성한 뒤 서머셋 공작의 지휘하에 헨리 6세를 대동한 채 남하했다. 이에 몬터규 후작이 맞대응하면서, 양측은 헥섬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