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03 20:40:18

웨이크필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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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필드 전투
영어: Battle of Wakefield
파일:웨이크필드 전투.jpg
시기
1460년 12월 30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요크셔 웨이크필드
원인
요크의 리처드의 권력 장악과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반격.
교전 세력
요크 가문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랭커스터 가문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지휘관
파일:800px-Richard_of_York,_3rd_Duke_of_York_(Variant).svg.png 요크의 리처드
파일:Arms_of_Neville_of_Middleham.svg.png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파일:Arms_of_Edmund,_Earl_of_Rutland.svg.png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
파일:Beaufort_Arms_(France_modern).svg.png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
파일:Coat_of_Arms_of_Henry_Percy_(Hotspur).svg.png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파일:Courtenay-Earl_of_Devon_COA.svg.png 토머스 코트니
파일:Arms_of_Clifford.svg.png 클리퍼드 남작 존 클리퍼드
파일:Coat_of_Arms_of_John_Neville,_Baron_Neville.svg.png 네빌 남작 존 네빌
파일:De_Ros_arms.svg.png 로스 남작 토머스 로스
파일:Coat_of_Arms_of_Sir_James_Butler,_1st_Earl_of_Wiltshire,_KG.png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
파일:SIr_Andrew_Trollope's_coat_of_arms.svg.png 앤드류 트롤로프
병력
4,000명 15,000명
피해
2,900명 사망, 나머지 생포. 미상
결과
랭커스터군의 승리
영향
랭커스터군의 남진, 에드워드 4세의 등극.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60년 12월 30일, 요크파의 수장인 요크의 리처드가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랭커스터군에게 포위되어 목숨을 잃은 전투.

2. 배경

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요크군이 대승을 거두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그 후 요크군은 런던으로 귀환해 정권을 장악했고, 랭커스터 측 인사들은 모조리 축출되었다. 그 해 10월 16일, 요크의 리처드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깃발을 내걸고 런던에 입성했다. 그 후 소집된 의회에서, 그는 왕좌에 손을 대고 자기가 왕이 될 권리가 있다고 선언헀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들은 싸늘하게 침묵함으로써 이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헨리 6세의 '간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뭉쳤지, 헨리 6세를 폐위하고 리처드를 왕으로 옹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비롯한 리처드의 추종자들 역시 리처드의 행동에 몹시 당황했다. 이후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이 중재해, 헨리 6세를 왕으로 인정하되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헨리 6세가 아닌 다른 남자와 왕비가 불륜 관계를 맺어서 태어난 사생아로 간주하고, 리처드가 헨리 6세의 계승자로 지명되도록 조치했다.

한편,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스코틀랜드에서 용병대를 끌어모은 뒤 잉글랜드 북부로 진군해 랭커스터파 인사들을 대거 끌어모았다. 랭커스터 지지자들은 요크 공작과 요크파 인사들의 영지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 1460년 가을, 요크 공작은 가장 가까운 지지자들과 약 5,000명의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토벌하러 출진해, 12월 21일 요크셔의 웨이크필드 시에서 킬더 강 남쪽의 샌달 성에 도착했다. 여기에 웨일스 변경에 있던 그의 장남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이 병사들을 이끌고 아버지를 도우러 북진했다.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랭커스터군과 함께 웨이크필드에서 약 12마일 떨어진 폰트프랙트 성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 직후, 그녀는 요크 공작을 물리치기 위해 웨이크필드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공성 병기가 딱히 없었고, 때는 한겨울이었으므로, 그녀가 요크 공작이 있는 샌달 성을 공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데 요크 공작은 장남이 구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버티지 않고 회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후대의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표했고, 이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요크 공작이 적의 군세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고 본다. 요크군 정찰병들이 12월 16일 노팅엄셔의 워크솝 전투에서 랭커스터 가문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던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의 분견대에게 격파되었다. 그 결과 요크군은 적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여기에 성내 식량이 부족해서, 장기간 농성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웨이크필드 전투 후 수십년이 지나서 작성된 에드워드 홀의 연대기와 부르고뉴의 장 드 와브랭의 연대기에 따르면, 랭커스터군에 소속된 기사 앤드류 트롤로프가 요크 공작을 속이기 위한 절묘한 계략을 수립했다고 한다. 그는 가짜 탈영병을 요크 공작에게 보내 노샘프턴 전투 때처럼 일부 부대가 전투 도중에 요크 공작의 편으로 돌아설 준비가 되었다고 알리게 했다. 여기에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와 클리퍼드 남작 존 클리퍼드가 이끄는 절반 병력은 샌달 성과 캘더 강 사이의 웨이크필드 평원에 포진하고, 나머지 절반은 로스 백작 토머스 로스와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의 지휘하에 그 지역을 둘러싼 숲에 숨었다. 요크는 평원에 포진한 적군만 보고, 자기 군대보다 그리 많지 않으니 포위 공격을 견디는 것보다는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윌리엄 우스터의 <잉글랜드 왕국 연대기(Annales Rerum Anglicorum)>에 따르면, 존 네빌은 요크의 리처드로부터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휘하에서 요크 편에 싸울 8,000 병력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 병력을 이끌고 샌달 성에 접근했지만, 실제로는 랭커스터 가문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들은 존 네빌은 처음부터 랭커스터 파였지만, 요크 공작은 존 네빌의 군대를 자신의 심복인 워릭 백작이 보낸 원군으로 착각했다고 기술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서머셋 공작은 1월 6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지만, 사흘 연속으로 전령을 보내 요크 공작에게 모욕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공작이 너무 비겁해서 성에서 나와서 여자가 이끄는 군대와 전투를 벌일 수 없다고 비난했고, 요크 공작은 이에 열받아서 군대를 총동원해 출진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 존 새틀러는 후대 기록들과는 달리 랭커스터 가문의 속임수나 매복은 없었으며, 단지 요크 공작이 성급하게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요크 공작은 식량을 모으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출진했다가 수적으로 우세한 랭커스터군에게 순식간에 포위당해 궤멸했다는 것이다.

3. 전투 경과

1460년 12월 30일 아침, 요크 공작은 샌달 성에서 출진해 성 바로 인근의 웨이크필드 평원에 포진한 랭커스터군을 공격했다. 랭커스터군은 처음에는 적군의 기세에 밀려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하지만 샌달 성 주변의 숲과 언덕에서 랭커스터군이 나타나 요크군을 공격했다. 여기에 클리퍼드 남작 존 클리퍼드가 이끄는 랭커스터 주력군이 샌달 커먼에서 출진해 요크군을 요격했다. 요크군은 순식간에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적군에게 에워싸였고, 요크 공작은 여러 차례 부상을 입고 군대의 통제를 잃었다. 요크군 내부에 공황이 퍼졌고, 결국 붕괴되었다.

파일:러틀랜드 백작의 살인.jpg
찰스 로버트 레슬리(Charles Robert Leslie, 1794 ~ 1859) 작, 러틀랜드 백작의 살인.

클리퍼드의 군대는 줄어들고 있는 요크군을 포위 섬멸하고, 부상당한 요크 공작을 포함한 생존자들을 생포하고, 수비대가 없는 샌달 성을 접수했다. 랭커스터군에 붙잡히지 않은 소수의 요크 장병들은 시골로 도망쳤다. 이때 요크 공작의 차남인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당시 17세)는 가정교사와 함께 웨이크필드 다리를 건너 탈출을 시도했지만, 존 클리퍼드가 급파한 추격대에게 붙들렸다. 에드먼드는 클리퍼드 경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이는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아버지 토머스 드 클리퍼드가 전사한 것에 대한 클리퍼드 경의 복수였을 것이다.

요크 공작의 최후에 대해,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전투 중에 죽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생포된 뒤 마르그리트 왕비와 클리퍼드 남작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요크 공작의 머리에 종이 왕관을 씌웠으며, 러틀랜드 백작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요크 공작에게 건넨 뒤 그를 처형했다고 한다. 또한 포로로 잡힌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은 폰트프랙트 성으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요크 공작, 러틀랜드 백작, 솔즈베리 백작의 머리는 요크 성의 미클게이트에 전시되었다. 이 수급 밑에는 "요크가 요크 마을을 내려다보게 하라"는 표지판이 세워졌다고 한다.

4. 이후

웨이크필드에서 승리한 랭커스터군은 약탈을 갈망하는 스코틀랜드인의 지원을 받아 남쪽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워릭 백작의 군대를 격파하고, 워릭 백작의 군대에 끌려왔던 헨리 6세를 탈환했다. 하지만 런던 시민들이 입성을 거부해서 런던을 접수하지 못하고,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대상으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한 뒤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갔다.

한편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아버지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런던으로 급히 이동하다가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자기를 저지하려는 랭커스터군을 격파했다. 그 후 런던에 입성한 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로 등극했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규합하여 북진했다. 1461년 3월 29일, 양측은 중세 잉글랜드 왕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인 토우턴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