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f091f 0%, #cf091f 30%, #cf091f 70%, #cf091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 블로어 히스 전투 | 러드퍼드 다리 전투 | 샌드위치 해전(1460년) | 런던 탑 공방전(1460년) |
노샘프턴 전투 | 웨이크필드 전투 |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 페리브리지 전투 | |
토우턴 전투 | 헤즐리 무어 전투 | 헥섬 전투 | 에지코트 전투 | 로스코트 전투 | |
바넷 전투 | 튜크스베리 전투 | 런던 탑 공방전(1471년) | 버킹엄 공작의 반란 | 보스워스 전투 | |
스토크 필드 전투 | 1497년 콘월 반란 | }}}}}}}}}}}}}}} |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영어: Second Battle of St Albans | ||
| ||
시기 | ||
1461년 2월 17일 | ||
장소 | ||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세인트 올번스 | ||
원인 | ||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런던으로 진군하는 랭커스터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요크군의 대결 | ||
교전 세력 | ||
요크 가문 | 랭커스터 가문 | |
지휘관 | ||
병력 | ||
8,000 ~ 10,000명 | 10,000~12,000명 | |
피해 | ||
2,000명 | 500명 | |
결과 | ||
랭커스터군의 승리 | ||
영향 | ||
랭커스터군의 잉글랜드 북부 철수와 에드워드 4세의 등극. |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61년 2월 17일, 런던으로 진군하려는 랭커스터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요크군의 전투.2. 배경
1460년 12월 30일,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에게 참패했다. 요크 공작은 전사하거나 생포된 뒤 처형되었고, 그의 17세된 차남인 러틀랜드 공작 에드먼드는 클리퍼드 남작 존 클리퍼드에게 처형되었다. 요크 공작의 최측근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역시 생포된 뒤 처형되었다. 요크 공작, 러틀랜드 공작, 솔즈베리 백작의 수급은 요크 성벽에 말뚝이 박힌 채 전시되었다. 이러한 대승에 고무된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3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헬러의 마리아 왕비로부터 대규모 스코틀랜드 병사를 받아낸 뒤 런던으로의 진군을 개시했다. 랭커스터군은 남쪽으로 진군하면서 그랜섬, 스탬퍼드, 피터버러, 헌팅던, 로이스턴 등 여러 도시와 마을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 잉글랜드 남부 주민들은 랭커스터군이 잔혹한 약탈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공포에 떨었다.한편, 런던에 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동생인 몬터규 후작 존 네빌,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와 함께 군대를 규합한 뒤 랭커스터군을 어떻게든 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당초 웨일스에 있던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합류하기를 기다렸다가 북상하려 했지만, 랭커스터군이 런던에 가까이 이르자 출진하기로 마음먹었다. 1461년 2월 12일, 워릭 백작은 헨리 6세를 데리고 런던으로 북쪽으로 진군해 세인트 올번스로 가서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를 내세운 랭커스터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요크군은 세인트 올번스에서 사흘 간 전투 준비에 착수했다. 장궁병들은 세인트 올번스 중심부, 마켓플레이스 주변에 주둔했다. 존 네빌은 세인트 올번스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버나드 언덕에 주둔했다. 워릭 백작의 군대는 샌드리치를 점령했고, 노퍽 공작은 노르만슬랜드 커먼에 주둔했다. 여기에 부르고뉴 용병대가 가져온 대포를 최전선에 배치했다. 요크군 전선은 렝커스터군이 접근하는 경로로 예상되는 북쪽 진로를 향해 포진했다.
하지만 랭커스터군은 요크군 수뇌부의 에상과는 다른 진로를 택했다. 이는 어느 지역 도살업자가 노퍽 공작의 부하인 로버트 포이닝스 경이 이끄는 소규모 요크파 군대의 지원하에 던스터블에서 봉기를 일으킨 데서 비롯되었다. 랭커스터군은 남쪽으로 계속 진군하는 대신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던스터블로 향했다. 그들은 던스터블을 공략한 뒤 반란군을 철저히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으며, 도살업자는 반란을 일으킨 걸 후회하며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들은 와트링 스트리트를 통해 서쪽에서 세인트 올번스에 접근했다. 이리하여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1461년 2월 16일, 랭커스터군은 던스터블에서 9마일 떨어진 도로를 따라 세인트 올번스를 향해 이동했다. 당시 요크군 수뇌부는 정찰병을 파견해 적의 동태를 추적하게 했는데, 정찰병 한 명이 적군이 북쪽이 아니라 서쪽에서 세인트 올번스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수뇌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경악하며 새로운 방어선을 서쪽 도로에 편성하려 했지만, 그들이 북쪽 도로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데 며칠을 보냈는데,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다른 방향을 향해 새로운 진지로 이동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으며, 랭커스터군이 세인트 올번스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진영을 미처 세우지 못했다.2월 17일 새벽, 앤드류 트롤로프가 지휘하는 랭커스터군 선봉대 5,000명이 서쪽에서 세인트 올번스로 진군하여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요크군 궁수들과 맞붙었다. 이리하여 세인트 올번스 중심부의 마켓 플레이스 지역, 특히 시계탑 주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지휘하는 랭커스터 기병대가 도시 북서쪽으로 진입하여 세인트 피터스 거리로 진격했다. 랭커스터군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시 외곽 버나드 언덕에 있는 존 네빌의 병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존 네빌은 부하들에게 후방으로 침투하는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방향을 틀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설치된 무거운 대포를 180도 회전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고, 결국 코앞에서 밀어닥친 적을 향해 단 한 발의 포탄을 쏘지도 못했다. 나머지 요크군은 허겁지겁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렸고, 랭커스터군은 던스터블에서 세인트 올번스로 차례로 입성해 존 네빌을 몰아붙였다. 결국 병력이 크게 부족하고 지원도 받지 못한 존 네빌의 군대는 붕괴되어 도주했고, 존 네빌은 생포되었다.
당시 버나드 언덕에 있던 헨리 6세를 감시하던 요크군 기사 토머스 후는 요크군이 무너지는 걸 보고 왕에게 랭커스터군에 합류하자고 제안했다. 헨리 6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게 전갈을 보내, 그의 군대에 합류하겠다고 제안했다. 여러 랭커스터 귀족이 즉시 헨리 6세 앞으로 나아가 경의를 표한 뒤 자기들의 대열로 이끌었고, 왕실 깃발이 계양되었다. 한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어떻게든 동생을 도우려고 했지만, 요크군에 소속된 켄트 출신의 시종 러브레이스가 편을 바꾸는 등 군대의 이탈이 이어졌기에 수습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동생의 군대가 무너졌고 세인트 올번스 시도 적에게 장악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샌드리지를 통과하는 길을 따라 철수하다가 노르만슬랜드 공유지 앞의 고지에서 노퍽 공작과 합류했다.
이후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워릭 백작과 노퍽 공작은 적이 전장 곳곳에 널리 흩어져서 패잔병을 색출하느라 정신없는 것을 보고, 밤을 틈타 4,000명을 거느리고 철수했다. 이리하여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는 랭커스터 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랭커스터군은 이 전투에서 5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요크군은 2,0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몬터규 후작 존 네빌은 생포되었고, 훗날 에드워드 4세의 왕비가 될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아버지인 존 그레이가 전사했다. 헨리 6세는 전투 후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재회한 뒤, 마르그리트의 제안에 따라 외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약 30명의 랭커스터 가문 자제들에게도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이때 헨리 6세를 감시하고 있다가 아군이 패배한 뒤 사로잡혔던 토머스 키리엘과 본빌 경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의 특명으로 처형되었다. 나중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두 기사가 보이지 않자 에드워드에게 행방을 물어보고, 에드워드가 곧바로 명령을 내려 죽여버렸다고 답하자 경악했다고 한다.워릭 백작 등은 전투 이후 서쪽으로 이동해 러들로에 있던 마치 백작 에드워드와 합류했다. 이제 마르그리트 왕비와 그녀의 군대는 요크군의 저항 없이 런던으로 진군할 수 있었지만, 런던 시민들은 랭커스터군의 심각한 약탈 행진에 깊은 반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런던 시민들의 동향을 전해듣고, 런던으로 진군하는 걸 망설였다. 여기에 더해,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1461년 2월 2일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랭커스터군은 잉글랜드 북부로 물러나기로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스코틀랜드인과 변경 영주들이 이미 모은 전리품을 가지고 전력에서 이탈했다.
마치 백작 에드워드와 워릭 백작은 3월 2일 런던에 입성했고, 에드워드는 곧바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를 칭했다. 그 후 그는 랭커스터군과 맞붙기 위해 북상했고, 양자는 중세 잉글랜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인 토우턴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