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9 23:46:29

러드퍼드 다리 전투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f091f 0%, #cf091f 30%, #cf091f 70%, #cf091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블로어 히스 전투 러드퍼드 다리 전투 샌드위치 해전(1460년) 런던 탑 공방전(1460년)
노샘프턴 전투 웨이크필드 전투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페리브리지 전투
토우턴 전투 헤지리 무어 전투 헥섬 전투 에지코트 전투 로스코트 전투
바넷 전투 튜크스베리 전투 런던 탑 공방전(1471년) 버킹엄 공작의 반란 보스워스 전투
스토크 필드 전투 1497년 콘월 반란 }}}}}}}}}}}}}}}
러드퍼드 다리 전투
영어: Battle of Ludford Bridge
시기
1459년 10월 12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러들로 남쪽 러드퍼드 다리
원인
요크의 리처드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권력 분쟁
교전 세력
요크 가문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랭커스터 가문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지휘관
파일:800px-Richard_of_York,_3rd_Duke_of_York_(Variant).svg.png 요크의 리처드
파일:Arms_of_Neville_of_Middleham.svg.png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파일:Arms_of_Richard_Neville,_16th_Earl_of_Warwick.svg.png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파일:잉글랜드 국장(1413-1603).svg 헨리 6세
파일:Coat_of_Arms_of_Sir_Humphrey_Stafford,_1st_Duke_of_Buckingham,_KG.png 험프리 스태퍼드
병력
6,000~8,000명 12,000~15,000명
피해
미상 미상
결과
랭커스터군의 승리
영향
요크파의 망명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59년 10월 12일, 잉글랜드 슈롭셔 러들로 남쪽 러드퍼드 다리에서 랭커스터군과 요크군이 대치하다가, 요크군 장병들이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대적하길 꺼려해 사방으로 도주하면서 랭커스터군이 승리한 전투.

2. 배경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는 정신병에 걸린 왕을 대신하여 잉글랜드 왕국을 다스릴 호국경으로 등극해 권세를 누렸고, 그의 추종자들도 요직을 맡았다. 하지만 요크 공작은 왕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에 깊은 부담감을 느꼈던 데다 내전을 피하고 싶었던 대다수 귀족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촉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 왕비는 세인트 올번스에서 전사한 에드먼드 보퍼트의 유족들과 손을 잡고, 귀족들을 하나씩 포섭하며 천천히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1456년 2월 25일, 헨리 6세가 정신을 되찾고 의회에 나타나 요크 공작의 섭정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아버지가 누리던 직위를 물려받고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총애를 받고 리처드를 견제했다. 또한 마르그리트 왕비는 수도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궁정을 코벤트리로 옮긴 뒤, 남편에게 리처드를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돌려보내라고 촉구했다. 이에 요크 파벌이 반발하면서, 양자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다. 그러던 1457년 8월 28일, 프랑스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습격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프랑스인인 마르그리트 왕비가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458년 3월 24일,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부르시에의 설득을 받아들인 헨리 6세는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와 요크의 리처드, 마그리트 왕비 및 보퍼트 파 귀족과 요크파 귀족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행사를 거행했다. 이들은 이 행사에서 서로 팔짱을 낀 채 런던 거리를 행진하면서, 모든 원한을 잊고 서로 화해해 나라를 잘 이끌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모습일 뿐이었고, 요크파와 보퍼트파 간의 정쟁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1458년 5월 말,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지휘하는 칼레 함대가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6척의 배를 나포했고, 며칠 후에는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약탈했다. 이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워릭 백작이 중립국인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공격한 것은 왕명에 위배된다며 그를 런던으로 소환했다. 워릭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왕명에 따랐지만, 근위대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다시 런던을 탈출해 칼레로 돌아갔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워릭 백작을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모든 자금 및 물자 공급을 중단했고, 워릭 백작은 이에 대응해 카스티야 및 중립국 선박에 대한 약탈 행위를 지속하는 한편 프랑스 국왕 샤를 7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접촉했다.

1459년 여름, 마르그리트 왕비는 왕을 대신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은백조 문양을 수여하고 귀족에 등록하는 한편, 요크파 귀족들을 주요 관직에서 해임하고 토지를 몰수했다. 1459년 6월, 마르그리트는 번트리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요크파 귀족들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요크 공작 리처드는 마르그리트 왕비와 랭커스터 파벌이 요크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한다고 여기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러들로 성에서 추종자들을 소환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이에 맞서 레스터에 군대를 집결했고, 랭커스터군은 1459년 여름이 끝날 무렵 러들로 성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1459년 9월, 요크 공작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에게 긴급 전갈을 보내 요크셔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모집할 수 있는 병력을 모아오라고 요청했고, 칼레의 대장을 맡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에게도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데려오라고 요청했다. 한편, 요크 공작이 있는 러들로로 진군하던 마르그리트 왕비는 솔즈베리 백작이 러들로로 진군하는 걸 막기로 하고,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셰에게 솔즈베리 백작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오들리 남작에게 솔즈베리를 죽이든, 살리든 자기에게 데려오라는 지시를 덧붙였다. 그러나 1459년 9월 23일, 솔즈베리 백작은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오들리 남작을 처단하고 랭커스터군을 물리쳤다.

그 후 솔즈베리 백작은 러들로에서 요크 공작과 합류했고, 뒤이어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칼레 수비대를 이끌고 가세했다. 하지만 당시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 왕비가 집결한 병력은 요크군의 2배에 달했다. 요크군은 런던으로 진군하려 했지만, 랭커스터군에 의해 길이 막히자 우스터로 후퇴했다. 요크 공작은 이곳의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한 뒤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지만 묵살당했다. 이후 요크군은 러들로로 이동했고, 러들로 남쪽의 러드퍼드 다리 인근에 방어용 도랑을 파고 대포를 매설한 수레로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얼마 후 랭커스터군이 접근하면서, 양자간의 전투가 임박했다.

3. 전투 경과

1459년 10월 12일, 랭커스터군이 헨리 6세를 앞세워 러드퍼드 다리 인근으로 진군했다. 그 후 양자는 협상을 시도했다. 헨리 6세는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셰의 죽음이 첵임이 있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사면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요크군 진영은 아래의 이유로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1. 지난 날에도 사면받았지만, 아무런 실효가 없었다.
2. 왕은 공작과 백작을 귀족과 평민으로 격하했으며, 그들을 의회에 소집하지 않았다.
3. 왕의 친척들은 교만하고 고집스럽게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
4. 귀족들은 의회에 소집되어 머물고, 떠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누려야 했다. 그러나 워릭 백작은 웨스트민스터에서 고의로 포위당하고 압박받았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이와 더물어 군대를 일으킨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1. 연방의 복지와 훌륭한 정치 법률이 비참하게 전복되었다.
2. 왕실 재산이 터무니없이 약탈당하고 강탈당했다.
3. 왕실을 지탱할 재원이 거의 남지 않았다.
4. 상인과 백성들은 불법적인 신품 판매로 왕실 대신들로부터 대가 없이 막대한 강탈을 당했다.
5. 정부는 크고 끔찍한 살인, 강도, 위증, 강탈을 허용했고,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편애하고 부추겼다.
6. 국왕은 자신의 복된 행실과 고귀한 성품으로 연방의 복지에 기꺼이 헌신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탐욕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통치하기 위해) 이 모든 악행을 국왕에게 숨겼다.

그러나 이때의 교섭은 요크군 장병들에게 왕이 갑옷을 입은 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다는 걸 확인시켜줬고,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들을 쳐부술 생각만 했을 뿐 왕에게 칼을 들이댈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들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다. 여기에 랭커스터군의 실질적인 지휘관인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는 왕을 따르는 자에게 사면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앤드류 트롤로프가 이끄는 칼레 수비대 600명이 밤을 틈타 랭커스터군에게 귀순했고, 일부 분견대가 뒤이어 귀순했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요크 공작, 솔즈베리 백작, 워릭 백작은 군심이 떠났으니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러들로로 돌아가겠다고 공식 발표한 뒤, 극비리에 군대를 버리고 웨일스로 도망쳤다. 10월 13일 새벽, 요크군은 지휘관이 전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자 헨리 6세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고, 왕의 사면을 받았다. 요크 공작의 아내 세실리 네빌, 두 어린 아들인 조지, 리처드, 그리고 막내딸 마거릿까지 버려졌다. 이들은 러들로 마켓 십자가 앞에 서 있다가 랭커스터군에 체포된 뒤, 버킹엄 공작에게 넘겨졌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자신의 처제이기도 한 세실리를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이후 랭커스터군은 러들로에 입성한 뒤 와인에 취한 채 러들로 시를 약탈하고 시민들을 학대했다.

4. 이후

요크 공작은 둘째 아들인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와 함께 아일랜드로 망명했고, 솔즈베리 백작, 워릭 백작, 그리고 요크 공작의 장남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워릭의 영지와 지지자들이 있는 사우스 웨일스로 갔다. 그 후 브리스톨 해협을 건너 웨스트 컨트리로 갔고, 그곳에서 추종자인 존 다인햄 경이 제공한 배를 타고 칼레로 피신했다.

그 후 왕실군은 코번트리로 이동했고, 마르그리트 왕비와 그녀의 추종자들로 가득 찬 의회가 그곳에서 소집된 뒤 요크 공작, 솔즈베리 백작, 워릭 백작 및 그들의 추종자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재산 몰수형을 선고했다. 그 해 12월 11일, 코번트리에 모인 영주들은 헨리 6세의 어린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의 왕좌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헨리 6세는 10월 9일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를 칼레 수비대장으로 삼았지만, 워릭 백작이 몇 시간 차이로 그를 앞지르는 데 성공했고, 워릭 백작의 삼촌인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이 지휘하는 수비대와 칼레 시는 여전히 워릭 백작을 지지했다. 서머셋 공작은 칼레 인근에 상륙한 뒤 인근의 기옌 성을 점령했지만, 칼레를 2차례 공격해봤지만 모두 격퇴되었다.

1460년 1월 6일, 워릭 백작의 지시를 받은 존 다인햄 경이 샌드위치에 정박해 있던 왕의 함대를 급습해 막대한 군수품과 대포 및 함선들을 탈취했다. 이리하여 영국 해협의 지배권을 확보한 후, 워릭 백작은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가 지휘하는 왕실 함대의 훼방을 뚫고 아일랜드로 항해해 요크 공작과 접견하여 향후 계획을 짰다. 그들은 군대를 개별적으로 일으켜서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한 지점에서 합류한 후 런던으로 진군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칼레로 돌아온 워릭 백작은 그 해 6월 26일 샌드위치에 상륙한 뒤 런던으로 진군해 7월 2일 시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입성했다. 그 후 요크 공작과 합세한 그는 헨리 6세와 랭커스터군이 주둔한 노샘프턴으로 진군하여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