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30 20:48:48

블로어 히스 전투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f091f 0%, #cf091f 30%, #cf091f 70%, #cf091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블로어 히스 전투 러드퍼드 다리 전투 샌드위치 해전(1460년) 런던 탑 공방전(1460년)
노샘프턴 전투 웨이크필드 전투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페리브리지 전투
토우턴 전투 헤지리 무어 전투 헥섬 전투 에지코트 전투 로스코트 전투
바넷 전투 튜크스베리 전투 런던 탑 공방전(1471년) 버킹엄 공작의 반란 보스워스 전투
스토크 필드 전투 1497년 콘월 반란 }}}}}}}}}}}}}}}
블로어 히스 전투
영어: Battle of Blore Heath
파일:블로어 히스 전투.jpg
시기
1459년 9월 23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스태퍼드셔 블로어 히스
원인
요크의 리처드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권력 분쟁
교전 세력
요크 가문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랭커스터 가문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지휘관
파일:Arms_of_Neville_of_Middleham.svg.png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파일:Arms_of_Neville_of_Middleham.svg.png 토머스 네빌
파일:Arms_of_Neville_of_Middleham.svg.png 존 네빌
파일:COA_Tuchet.svg.png 제임스 투셰
파일:Coat_of_Arms_of_Sir_John_Sutton,_1st_Baron_Dudley,_KG.png 존 서튼
병력
5,000명 10,000명
피해
200명 2,000명
결과
요크군의 승리
영향
요크군의 러들로 진군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59년 9월 23일, 잉글랜드 스태퍼드셔의 블로어 히스에서 요크군과 랭커스터군이 맞붙은 전투.

2. 배경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는 정신병에 걸린 왕을 대신하여 잉글랜드 왕국을 다스릴 호국경으로 등극해 권세를 누렸고, 그의 추종자들도 요직을 맡았다. 하지만 요크 공작은 왕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에 깊은 부담감을 느꼈던 데다 내전을 피하고 싶었던 대다수 귀족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촉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 왕비는 세인트 올번스에서 전사한 에드먼드 보퍼트의 유족들과 손을 잡고, 귀족들을 하나씩 포섭하며 천천히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1456년 2월 25일, 헨리 6세가 정신을 되찾고 의회에 나타나 요크 공작의 섭정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아버지가 누리던 직위를 물려받고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총애를 받고 리처드를 견제했다. 또한 마르그리트 왕비는 수도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궁정을 코벤트리로 옮긴 뒤, 남편에게 리처드를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돌려보내라고 촉구했다. 이에 요크 파벌이 반발하면서, 양자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다. 그러던 1457년 8월 28일, 프랑스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습격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프랑스인인 마르그리트 왕비가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458년 3월 24일,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부르시에의 설득을 받아들인 헨리 6세는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와 요크의 리처드, 마그리트 왕비 및 보퍼트 파 귀족과 요크파 귀족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행사를 거행했다. 이들은 이 행사에서 서로 팔짱을 낀 채 런던 거리를 행진하면서, 모든 원한을 잊고 서로 화해해 나라를 잘 이끌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모습일 뿐이었고, 요크파와 보퍼트파 간의 정쟁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1458년 5월 말,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지휘하는 칼레 함대가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6척의 배를 나포했고, 며칠 후에는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약탈했다. 이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워릭 백작이 중립국인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공격한 것은 왕명에 위배된다며 그를 런던으로 소환했다. 워릭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왕명에 따랐지만, 근위대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다시 런던을 탈출해 칼레로 돌아갔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워릭 백작을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모든 자금 및 물자 공급을 중단했고, 워릭 백작은 이에 대응해 카스티야 및 중립국 선박에 대한 약탈 행위를 지속하는 한편 프랑스 국왕 샤를 7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접촉했다.

1459년 여름, 마르그리트 왕비는 왕을 대신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은백조 문양을 수여하고 귀족에 등록하는 한편, 요크파 귀족들을 주요 관직에서 해임하고 토지를 몰수했다. 1459년 6월, 마르그리트는 번트리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요크파 귀족들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요크 공작 리처드는 마르그리트 왕비와 랭커스터 파벌이 요크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한다고 여기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러들로 성에서 추종자들을 소환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이에 맞서 레스터에 군대를 집결했고, 랭커스터군은 1459년 여름이 끝날 무렵 러들로 성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1459년 9월, 요크 공작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에게 긴급 전갈을 보내 요크셔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모집할 수 있는 병력을 모아오라고 요청했고, 칼레의 대장을 맡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에게도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데려오라고 요청했다. 한편, 요크 공작이 있는 러들로로 진군하던 마르그리트 왕비는 솔즈베리 백작이 러들로로 진군하는 걸 막기로 하고,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셰에게 솔즈베리 백작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오들리 남작에게 솔즈베리를 죽이든, 살리든 자기에게 데려오라는 지시를 덧붙였다.

3. 전투 경과

1459년 9월 23일 새벽, 오들리 남작은 더들리 남작 존 서튼과 함께 1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규합한 뒤, 마켓 드레이튼에서 북상해 마켓 드레이튼에서 뉴캐슬언더라임으로 가는 도로 남쪽의 고지대인 블로어 히스에 군대를 배치했다. 랭커스터군은 도로 남쪽과 웸버튼 브룩이라는 개울에 위치한 늪지대 뒤에서 전투를 위해 군대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랭커스터군 좌익 앞에는 마켓 드레이튼에서 뉴캐슬로 가는 주요 도로와 웸버튼 브룩이 가파른 경사면에 놓였다. 도로가 랭커스터군 진지에서 북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이 경사지는 랭커스터군 우익 앞으로 계속 이어져 웸버튼 브룩에 연결되었다. 오들리 남작은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는 전통적인 전투 방식 대신 전원 말에 태웠다. 그는 기병 수가 적군보다 훨씬 많은 점을 활용해, 임박한 전투를 기병간의 교전으로 이끌려 했다.

해가 지평선에서 떠오를 무렵, 요크군이 랭커스터군 진영이 보이는 협곡에 이르렀다. 요크군은 협곡 가장자리에서 멈춰선 뒤 방어 진지를 건설하기 싲가했다. 요크군 마차들은 랭커스터군 전선이 끝나는 곳 맞은편에 요새화된 진영을 형성했다. 요크군 기사와 병사들은 3개 부대로 나뉘었는데, 도로 북쪽에 뻗어 있는 지점의 서쪽에 2개 부대가 배치되어 요크군 우익을 형성했고, 도로 동쪽에 세 번째 부대가 배치되어 좌익을 형성했다. 또한 요크군 궁수들은 중앙과 우익 사이에 섰다. 요크군 방어선의 오른쪽 끝은 나중에 전투가 끝난 뒤 오들리 십자가가 세워진 곳에 있었다. 이후 요크군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진지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

오후 1시경, 양측에서 맹렬한 화살 세례가 쏟아지면서 전투가 발발했다. 요크군은 이 화살 세례로 20명의 사상자와 마차 진영의 말들을 잃었다. 반면에, 방패를 충분히 구비하지 못한 랭커스터군은 약 2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때 오들리 남작은 기병대를 이끌고 협곡으로 돌진했고, 오크군 기병대는 그들과 맞서는 척했다가 후퇴했다. 랭커스터 기병대가 이들을 추격하다가 요크군 방어선에 도달하려 할 때, 요크군 궁수들이 그들을 향해 집중 사격했다. 랭커스터 기병대는 약 500~6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오들리 남작은 기병대를 수습한 뒤 2번째 돌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격퇴되었고, 오들리 남작을 포함한 사상자 100여 명이 발생했다.

오들리 남작이 전사한 뒤, 더들리 남작 존 서튼이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그는 이번에는 보병대에게 진군 명령을 내렸다. 랭커스터 가문의 기사와 병사들 중 상당수는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하고, 동료들이 협곡을 건너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때 말을 타고 있던 랭커스터 기사와 보병 약 500명이 돌연 배신해 요크군 진영을 향해 진군하던 랭커스터군 후방을 공격했다. 랭커스터군은 삽시간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고, 요크군은 이들을 맹추격했다. 말에서 내린 랭커스터 기사단과 보병들은 전장에서 탈출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더들리 경, 토머스 피튼 경, 그리고 다른 기사 12명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전투는 오후 5시경에 끝났다.

4. 결과

요크군은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200명만 상실했지만, 랭커스터군은 오들리 남작을 비롯해 2,000명을 상실했다. 하지만 요크군은 전투 후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그들은 온종일 행군하다가 진지를 건설하고, 뒤이어 전투를 치르느라 탈진했고, 적을 추격하느라 뿔뿔이 흩어졌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 왕비는 15마일 떨어진 에클설에 또다른 랭커스터군과 함께 있었다. 토머스 스탠리가 이끄는 군대도 인근의 뉴캐슬언더라임에 주둔했는데, 스탠리는 장인인 솔즈베리 백작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요크군에 가담하는 건 거부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랭커스터군 증원군이 근처에 있어서 언제라도 자기들을 덮칠 것을 우려해, 러들로를 향해 남쪽으로 서둘러 진군하기로 했다. 그레고리 연대기에 따르면, 지역 수도사를 고용하여 밤새도록 블로어 히스(Blore Heath)에 머물게 하고 주기적으로 대포를 발사하여 근처의 랭커스터군에게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고 믿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한편 오들리 남작은 더비셔의 달리 수도원에 묻혔고, 오들리가 살해된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오들리 십자가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