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3D8B5><colcolor=#000000> 서퍽 공작부인 프랜시스 브랜던 Frances Grey, Duchess of Suffol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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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랜시스 브랜던 (Frances Brandon) |
출생 | 1517년 7월 16일 |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해트필드 | |
사망 | 1559년 11월 20일 (향년 42세)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쉰 | |
배우자 |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 (1533년 결혼 / 1554년 사망) |
에이드리언 스토크스 (1555년 결혼) | |
자녀 | 제인, 캐서린, 메리 |
아버지 | 제1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 |
어머니 | 메리 튜더 |
형제 | 엘레노어, 헨리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여공작. '9일 여왕' 제인 그레이의 어머니다.2. 생애
2.1. 초년기
1517년 7월 16일 잉글래드 왕국 하트퍼드셔 햇필드에서 초대 서퍽 공작이자 헨리 8세의 친구였던 찰스 브랜던과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의 장녀로 출생했다. 형제로 헨리[1], 엘레노어[2], 헨리[3]가 있었다. 프랜시스라는 이름은 그녀가 태어난 날인 7월 16일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시성된 날짜였기에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프랜시스는 모계로 헨리 8세의 조카딸이자 헨리 7세의 외손녀로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그녀의 부모는 1515년 3월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결혼했고, 그 해 5월 13일 잉글랜드에서 헨리 8세의 승인을 받고 공식적으로 결혼했다. 이는 찰스 브랜던의 세 번째 결혼이었다. 그의 전처 중 앤 브라운은 1510년에 사망했지만, 또 다른 전처인 마거릿 네빌은 살아 있었다. 찰스 브랜던은 1507년경 마거릿 네빌과 결혼하도록 교황의 허락을 받았지만, 그해 말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 요청을 했고, 이 역시 허락받았다.
그런데 1515년 메리 튜더와 결혼했을 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결혼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교회법에 따라 중혼으로 간주될 수 있었고, 두 사람의 자식들은 사생아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는 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메리 튜더와 앤 브라운의 자녀들의 합법적 지위를 확인하는 교황 칙서를 반포해 달라고 청원했고, 1528년 5월 12일 오르비에토에서 교황 칙서가 발행되어 같은 해 여름에 잉글랜드에 도착한 후, 여러 증인 앞에서 노리치 주교의 인증을 받았다. 1533년 메리 튜더가 사망한 지 몇 달 후, 찰스 브랜던은 제11대 어스비의 윌로비 남작 윌리엄 윌로비의 딸이며 왕실 시녀였던 캐서린 윌로비와 재혼했고, 캐서린 윌로비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헨리와 찰스를 낳았다.
프랜시스가 태어났을 때,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장이 대부를 맡았고,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가 대모를 맡았다. 그녀는 성장하면서 헨리 8세와 카탈리나 왕비의 외동딸이자 사촌인 메리 공주와 무척 친하게 지냈다. 1533년 헨리와 카탈리나 왕비의 결혼이 취소된 후, 메리 공주는 국왕의 새 왕비인 앤 불린을 절대로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왕비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프랜시스는 그런 메리를 지지했다. 그런 두 사람의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메리 공주가 가톨릭을 고수하고 프랜시스가 개신교로 기운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2.2. 헨리 그레이와의 결혼
프랜시스는 어린 시절을 미드 서퍽의 웨스트소프 홀에서 보냈으며, 어머니, 형제자매, 그리고 계모 캐서린 윌러비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매력적인 성격에 교육 수준이 높았으며, 튜더 왕조와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찰스 브랜던은 딸에게 유리한 결혼 상대를 기대했다. 1530년, 찰스 브랜던은 딸을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장남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노퍽 공작은 프랜시스의 지참금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 결혼을 거부했다. 또 다른 후보인 제2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의 상속인 헨리 그레이는 부유하고 오래된 귀족 집안인 그레이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프랜시스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먼저 캐서린 피츠앨런과 맺은 약혼을 파기해야 했다. 1533년 3월, 헨리 8세가 승인하면서, 프랜시스는 도싯 후작 작위를 물려받은 헨리 그레이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사우스워크에 있는 프랜시스 부모님의 저택인 서퍽 플레이스에서 열렸다.헨리 그레이는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 하인리히 불링거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급진적인 복음주의자가 되었으며, 프랜시스는 그런 남편의 영향을 받아 역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세 딸들인 제인, 캐서린, 메리를 낳은 뒤 딸들을 개신교도로 양육했고, 그들의 교육을 주의 깊게 감독했다. 도싯 후작은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했기에 아내 프랜시스와 함께 세 딸들의 지적 능력을 최고로 끌어올리고 개발시킬 기회를 갖도록 했다. 헨리 그레이는 자신이 후원하는 개신교 신학자 중 특별히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선정해 딸들의 가정교사로 지명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성공회 사제이자 학자인 존 에일머였다. 에일머는 도싯 후작으로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비용을 지급받았다.
세간에서는 제인 그레이가 어릴 때 조금만 실수를 해도 부모에게 잔혹하게 구타당하고 채찍질당하는 등 아동학대에 시달렸고, 교사에게 "제인 그레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이는 18세기 초부터 영국 작가들이 제인 그레이의 비극적인 생애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이야기인데, 이는 잉글랜드의 학자이자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3대를 모신 행정가인 로저 애샴이 저서에서 제인 그레이가 자신에게 이렇게 밝혔다고 기술한 데서 비롯되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앞에 있을 때, 말하든 침묵하든, 앉든 서든 가든, 가든, 먹든 마시든, 즐거워하든 슬퍼하든, 바느질을 하든, 놀든, 춤을 추든, 그 밖의 어떤 일을 하든, 나는 마치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과 같은 무게, 분량, 수에 따라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몹시 놀림을 받고 잔인하게 위협을 받으며, 때로는 꼬집고, 뜯고, 찧기도 하고,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내가 존경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 그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엄청나게 혼란스러워서 지옥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로저 애샴은 제인 그레이와 실제로 만나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글을 썼으며, 헨리 그레이가 메리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일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작 로저 애샴이 제인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녀의 부모에 대한 찬사를 담았으며, 제인과 부모의 미덕을 칭찬했다. 그레이 부부의 사제인 제임스 해든은 잉글랜드와 스위스에서 개신교 목사로 활동했고, 르네상스 인본주의자 존 플로리오의 아버지이기도 한 미켈란젤로 플로리오에게 제인이 경건함에 있어 부모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으며, 어머니 프랜시스와 무척 가까운 사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제인 그레이가 부모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다는 걸 입증할 당대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녀는 아버지가 붙여준 우수한 교사들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인본주의에 숙달한, 당대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여성 지식인이 되었다.
2.3.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궁정에서
프랜시스는 궁정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녀는 헨리 8세의 총애하는 조카딸로서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의 시녀로 일하면서 그녀와 친분을 두텁게 쌓았다. 당시에는 가장 높은 지위의 친척 가문에 자녀를 보내 양육하게 하는 오래된 관습이 있었는데, 프랜시스는 이 관습에 따라 캐서린 파의 집에 제인을 보냈고, 제인은 캐서린 파의 자상한 양육을 받으며 지적 재능을 마음껏 키울 수 있었다.1547년 1월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9살의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가 되었고, 프랜시스의 딸들은 이제 헨리 8세의 딸들 다음으로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헨리 8세의 유언에 따르면, 에드워드 6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귀족 16명이 섭정 위원회를 맡아서 왕국을 다스려야 했지만, 위원들은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 에드워드 시모어를 호국경으로 세우고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이에 에드워드 시모어의 동생 토머스 시모어는 형이 권력을 독점한 것에 분노했고, 형을 견제하기 위해 세력을 키우기로 했다. 토머스 시모어는 헨리 그레이를 동맹으로 끌어들이기로 하고, 그레이 부부에게 장녀 제인 그레이를 자기에게 보내 키우게 해 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이후 토머스 시모어는 하인 해링턴을 보내 도싯 후작에게 제인 그레이와 에드워드 6세를 결혼시키자고 제안했고, 자기가 에드워드 6세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헨리 그레이는 이에 동의하며, 이 결혼이 성사되어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면 토머스 시모어가 장래에 수익성 있는 직위에 임명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토머스 시모어가 체포되었다. 그는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해 국왕과 제인 그레이의 결혼을 성사하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자신의 결혼 역시 성사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헨리 그레이는 이에 연루되어 심문을 위해 추밀원에 소환되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헨리 그레이는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그의 아들인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신부로 제인 그레이를 삼으라고 제안함으로써 공모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토머스 시모어는 결국 1549년 3월 20일에 처형되었지만, 그는 무사히 빠져나왔다.
6개월 후 에드워드 시모어가 몰락하고 워릭 백작(후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권력을 잡자, 헨리 그레이는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와 제인 그레이의 약혼을 파기하고 존 더들리의 측근이 되었다. 1551년 가을, 찰스 브랜던이 캐서린 윌로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헨리와 찰스가 전염병에 걸려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리하여 프랜시스는 서퍽 여공작이 되었고, 헨리 그레이는 그녀의 남편 자격으로 서퍽 공작이 되었다.
2.4. 여왕의 어머니
토머스 시모어의 계획이 실패한 뒤에도, 헨리 그레이는 제인 그레이와 에드워드 6세의 결혼을 주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한동안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1553년 초 왕이 병에 걸렸고, 그 해 5월 말이 되자 의사들이 이미 그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통보했다. 에드워드 6세가 이대로 사망한다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공주가 잉글랜드 여왕이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가톨릭을 배제하고 성공회에 개혁주의 신학을 도입했던 이들의 안위가 위태로울 게 자명했다. 이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메리 공주를 기필코 왕위에서 배제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위해 결혼 동맹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에게 그의 장녀 제인이 자신의 막내 아들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하자고 제안했다.19세기 영국 여성 역사 작가이자 시인인 아그네스 스트릭랜드(Agnes Strickland, 1796 ~ 1874)가 집필한 <영국 여왕들의 삶>에 따르면, 제인 그레이는 이 결혼을 받아들이길 싫어했지만, 어머니 프랜시스 브랜던에게 잔혹하게 구타당하고 채찍질당해 복종해야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탈리아 추기경이자 교황청 특사 조반니 프란체스코 코멘도네가 "서퍽 공작의 첫째 딸인 제인이라는 이름으로, 비록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고집과 아버지의 위협으로 인해 복종해야 했다"라고 기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코멘도네는 가톨릭을 잉글랜드에서 복원하려는 메리 1세를 강력히 지지한 교황의 특사였기에, 그녀를 몰아내고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던 존 더들리와 헨리 그레이 부부를 비방하고자 지어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 외에 제인 그레이가 부모의 협박을 받아 결혼을 승낙해야 했다는 걸 입증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사실 서퍽 공작은 자기 딸을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시키는 걸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장차 잉글랜드 왕권이 자기들 가문에서 노섬벌랜드 공작가에게 넘어갈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섬벌랜드 공작이 이 문제에 대해 왕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받아들였다. 1553년 5월 21일, 제인 그레이와 길포드 더들리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553년 5월 28일, 주치의가 왕이 곧 죽을 것이 분명하다고 전했다. 1553년 6월 초, 에드워드 6세는 변호사들이 유언장 최종본을 작성하는 것을 직접 감독했고, "문서의 여섯 군데"에 서명했다. 그런 다음 6월 15일 존 더들리의 감시 아래 고위 판사들과 변호사들을 침대로 불러모아 "날카로운 말과 화난 표정"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선왕 헨리 8세가 1543년에 반포한 제3차 왕위 계승법에 관한 특허장을 바꾸라고 명령했다. 개정된 특허장의 내용은, 그의 두 이복 자매인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는 왕위 계승 후보자에서 제외되고, 제인 그레이가 새 왕위 계승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6세는 이 특허장을 의회에서 채택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고문과 변호사들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고, 그들에게 자기가 죽고 나면 자기 뜻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훗날 대법관 에드워드 몬태규는 이 일에 관해 메리 1세에게 사과하면서, 자신과 동료들이 문서의 유효성에 대해 법적 이의를 제기했을 때 존 더들리가 분노에 떨며 자신들을 위협했고, 자기 뒤에 서 있던 영주들이 "계속 거부한다면 반역자로 간주할 것이다."라고 결론 짓는 소리가 들렸기에 별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마지막으로, 6월 21일에 왕의 고문, 귀족, 대주교, 주교, 보안관 등 100명이 넘는 유력 인사들이 특허장에 서명했다. 그들 중 다수는 나중에 자기들이 존 더들리의 위협을 받아 강제로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1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틀 후, 노섬벌랜드 공작은 제인 그레이에게 선왕이 그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알렸다. 세간에서는 제인 그레이가 이 소식을 듣고 혼절했으며, "내가 아니라 메리 공주가 여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울부짖었지만 부모의 협박에 못 이겨 여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지만, 이 역시 후대 작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제인 그레이 본인이 런던 탑에 투옥된 뒤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7월 9일 노섬벌랜드 공작의 미완성 궁전인 사이온 하우스에서 열리는 의회에 참석하라는 소환장을 받고 그곳에 간 뒤, 시아버지 존 더들리와 프랜시스 헤이스팅스, 윌리엄 허버트, 윌리엄 파, 헨리 피츠앨런을 만났다. 귀족들은 제인 그레이에게 왕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녀가 영국의 왕관을 수락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왕위를 잇는 걸 부담스럽게 여겨서 거절했지만, 부모와 시부모가 포함된 귀족들의 간절한 설득을 받았고, 남편 길포드가 "기도와 애무"라는 부드러운 방식으로 설득하자 결국 왕위를 수락했다고 한다.
제인 그레이는 1553년 7월 10일 잉글랜드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 런던 탑으로 이동했다. 프랜시스는 런던 탑에서 딸과 함께 지냈으며, 7월 19일 남편 헨리 그레이가 비보를 전할 때도 딸과 함께 있었다. 헨리 그레이는 추밀원이 메리 편으로 돌아섰으며, 제인은 더 이상 여왕이 아니라고 알렸다. 이후 그레이 부부는 베이나드 성으로 가서 제인 그레이를 지지했다가 메리 편으로 돌아선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를 설득해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자신들을 강압해서 제인을 억지로 왕위에 올린 것일 뿐이니 메리 여왕에게 잘 설명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 후 노섬벌랜드 공작, 제인 그레이, 그녀의 남편 길포드 더들리, 헨리 그레이 모두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프랜시스는 메리 여왕이 있는 뷰리외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녀는 7월 29일에 메리를 만나 노섬벌랜드 공작이 에드워드 6세를 독살했고, 헨리 그레이를 독살하려 시도해서 헨리 그레이가 병에 걸렸다고 주장하면서, 제인 그레이는 억지로 왕위에 올랐을 뿐이니 선처해달라고 호소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프랜시스의 호소를 들은 메리 여왕은 마음이 움직였고, 헨리 그레이를 사면하기로 했다. 헨리 그레이는 7월 31일 풀려난 후 리치먼드로 갔고, 프랜시스는 궁정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은 스페인 사절의 압력에 따라 제인 그레이를 계속 잡아뒀으며, 존 더들리를 반역죄로 기소한 뒤 8월 22일 아침 런던 탑의 타워 힐에서 참수했다.
2.5. 이후의 생애
메리 1세는 왕위에 오른 후 스페인 왕자 펠리페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소식은 메리 1세의 신하들에게 합스부르크 왕조가 잉글랜드를 종속하고 가톨릭으로의 회귀가 이뤄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이는 1554년 1월 25일 토머스 와이엇 등이 메리 1세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프랜시스는 남편과 어린 딸들과 함께 런던의 쉰에 있었는데, 남편 헨리는 잉글랜드에서 개신교를 보존하고 제인을 구하기 위해 반란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반란은 2월 초에 진압되었고, 공모자들은 체포되었다.반란군은 제인 그레이가 아닌 엘리자베스 공주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메리 1세의 측근들은 제인 그레이 역시 정당한 잉글랜드 왕위 자리를 두고 도전할 잠재적인 위협이라고 여겼다. 결국 메리 1세는 신하들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1554년 2월 12일 제인 그레이와 길포드 더들리 부부를 참수했다. 며칠 후인 2월 23일 프랜시스의 남편 헨리 그레이도 처형당했다.
세간에서는 프랜시스가 가족을 구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돌지만 사실이 아니다. 프랜시스는 남편이 사형을 선고받기 전부터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녀는 메리 여왕이 또 다시 반역에 가담한 남편을 두 번이나 용서할 가망이 없다는 건 잘 알았지만 그래도 여왕을 설득해 남편에게 품었던 미움을 풀게 했으며 자녀들의 양육을 위해 몰수된 영지 일부를 되돌려 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그녀가 남은 두 딸 캐서린, 메리에게 의절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두 딸에게 가톨릭을 믿는 모습을 보여서 메리 여왕의 경계를 사지 말도록 했다. 메리 1세는 그레이 가문이 자신의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좋은 관계를 맺은 바 있었고, 자신이 앤 불린을 상대로 맞설 때 프랜시스가 지지해준 걸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 후 프랜시스와 두 어린 딸은 다시 궁정에서 환영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1554년 4월 초, 프랜시스는 레스터셔에 있는 그레이 영지를 돌려받았고, 7월에는 여왕의 시녀로서 수행원에 합류해 여왕의 별장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녀의 딸들도 궁정에서 직책을 맡았고, 메리 여왕으로부터 특별한 호의를 받았다. 또한 그들은 메리 1세와 펠리페 왕자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이 무렵 프랜시스와 데번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4]의 재혼을 주선하자는 아이디어가 추밀원에서 제기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제안한 이들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인 에드워드와 튜더 왕조의 후손인 프랜시스가 결혼함으로서 메리 여왕이 프랜시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프랜시스와 에드워드 코트니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에드워드 코트니는 1555년 5월에 잉글랜드를 떠났다.
그 직후 프랜시스는 자신의 말 관리인이었던 에이드리언 스토크스와 결혼했다. 에이드리언은 기사 겸 의원이긴 했지만 귀족은 아닌 미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와 재혼한 프랜시스는 왕위계승서열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메리 1세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고 남은 자녀들을 보전하려는 계산이 담긴 선택이었다. 그녀는 결혼 후 새 남편과 막내딸 메리와 함께 자신의 영지 중 한 곳에서 살았지만, 여러 번의 유산과 사산을 겪으면서 건강이 악화해 궁정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1558년 메리 1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했다. 이후 프랜시스와 그녀의 딸들은 궁정에서 모든 지위를 상실했다. 프랜시스는 병 때문에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메리 그레이는 궁정에 전혀 초대받지 못했으며, 캐서린은 강등되어 더 이상 여왕의 사저에 접근할 수 없었다. 새 여왕이 그레이 가문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어머니 앤 불린을 헨리 8세의 합법적인 왕비로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를 사생아로 간주해 왕위 계승에서 배제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서린과 메리는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의 외손녀들로 잉글랜드 왕위의 적법한 후계자였으므로 언제라도 엘리자베스 1세를 전복하려는 야심가들에게 이용될 수 있었다.
프랜시스는 1559년 11월 20일 또는 21일에 42세의 나이로 두 딸과 몇몇 가까운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런던의 쉰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왕실의 일원이었기에 12월 5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모든 매장 비용은 엘리자베스 1세가 부담했다. 딸 캐서린 그레이가 인솔한 장례 행렬은 리치먼드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 진행되었다. 영어로 진행된 장례식은 개신교 예식으로 이뤄졌으며, 솔즈베리 주교 존 주얼이 총괄했다. 4년 후, 에이드리언 스토크스는 전 아내의 무덤 위에 설화석고 묘비를 세웠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프랜시스를 묘사한 무덤 형상은 공작의 망토를 입었고, 머리에는 왕관을 썼으며, 기도서를 들고 있는 형태를 취했다.
3. 가족 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프랜시스 브랜던 (Frances Brandon) | <colbgcolor=#fff3e4,#331c00> 제1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 (Charles Brandon, 1st Duke of Suffolk) | <colbgcolor=#ffffe4,#323300> 윌리엄 브랜던 경 (Sir William Brandon) | |
윌리엄 브랜던 경 (Sir William Brandon) | |||
엘리자베스 윙필드 (Elizabeth Wingfield) | |||
엘리자베스 브루인 (Elizabeth Bruyn) | |||
헨리 브루인 경 (Sir Henry Bruyn) | |||
엘리자베스 다시 (Elizabeth Darcy) | |||
메리 튜더 (Mary Tudor) | |||
헨리 7세 (Henry VII) | |||
초대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Lady Margaret Beaufort) | |||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 |||
에드워드 4세 (Edward IV) | |||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
3.2. 남편
- 헨리 그레이(1517 ~ 1554): 제3대 도싯 후작, 서퍽 공작.
- 제인 그레이
- 캐서린 그레이
- 메리 그레이
- 에이드리언 스토크스(1519 ~ 1585): 프랜시스 브랜던의 말 관리인. 레스터셔의 기사 겸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572년 헨리 8세의 외교관이었으나 엑서터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된 니콜라스 케어우의 딸이자 스코틀랜드 주재 잉글랜드 대사로서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여왕 사이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니콜라스 스록모턴의 미망인인 앤 케어우와 재혼했다.
- 세 자녀를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 또는 사산했다.
3.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 (Henry Grey, Duke of Suffolk) | ||||
1녀 | 레이디 제인 그레이 (Lady Jane Grey) | 1536년 혹 1537년 | 1554년 2월 12일 | 길포드 더들리 경 |
2녀 | 하트퍼드 백작부인 캐서린 시모어 (Katherine Seymour, Countess of Hertford) | 1540년 8월 25일 | 1568년 1월 26일 | |
초대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6] 슬하 2남 | ||||
3녀 | 레이디 메리 키스 (Lady Mary Keyes) | 1545년 4월 20일 | 1578년 4월 20일 | 토머스 키스[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