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FF><colcolor=#ffffff> 제19대 아룬델 백작 헨리 피츠앨런 Henry Fitzalan, 19th Earl of Arundel | |
성명 | 헨리 피츠앨런 Henry Fitzalan |
생몰년도 | 1512년 4월 23일 ~ 1580년 2월 24일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아란 아룬델 성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룬델 하우스 |
아버지 | 제18대 아룬델 백작 윌리엄 피츠앨런 |
어머니 | 앤 퍼시 |
아내 | 캐서린 그레이, 메리 아룬델 |
자녀 | 제인, 헨리, 토머스 |
직위 | 제19대 아룬델 백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정치인.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4대에 걸쳐 잉글랜드 정계에서 활약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실각했다.2. 생애
1512년 4월 23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아란 아룬델 성에서 제18대 아룬델 백작 윌리엄 피츠앨런과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딸인 앤 퍼시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세례성사 때 대부를 맡은 헨리 8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궁정에서 일했으며, 1533년 2월 처음으로 의회에 말트라버스 남작으로 소환되었고, 1534년 7월에는 즐랜드의 다크르 남작을 재판한 귀족 중 한 명이었으며, 1536년 5월에는 앤 불린과 조지 불린 남매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 중 한 명이었다. 1540년 칼레의 총독을 맡아 칼레 요새를 수리했다.1544년 1월 아버지가 사망한 후 잉글랜드로 돌아와 상원에서 아룬델 백작으로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4월 24일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과 불로뉴 공략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뒤 궁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547년 1월에 사망한 헨리 8세의 유언에 따라 어린 왕 에드워드 6세를 보좌할 섭정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에드워드 6세의 대관식을 주관하는 얼 마셜을 맡았다. 이후 궁내장관으로 계속 재직했지만, 왕의 섭정을 맡은 호국경 에드워드 시모어가 권력을 독점하는 바람에 정계에 영향력을 제대로 미치지 못하게 되자 에드워드 시모어의 정책에 대한 비판자로 활동했다.
1549년 7월 로버트 캣이 이끄는 노퍽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그 해 10월 에드워드 시모어가 몰락한 뒤, 초대 사우샘프턴 백작 토머스 리오슬리, 워릭 백작 존 더들리(후에 노섬벌랜드 백작) 등 여섯 명의 수호자가 이끄는 새로운 통치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횡령 혐의로 가택 연금에 처해져 12,000 파운드의 벌금을 물었는데, 그 중 8,000 파운드는 나중에 면제되었다. 그 후 풀려나긴 했지만 1551년 10월 에드워드 시모어가 존 더들리 등 여러 귀족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그 역시 시모어를 도운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고,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정권은 벌금을 새로 납부하는 조건으로 풀어줬다.
1553년 7월 초 에드워드 6세가 사망했을 때 여러 귀족과 함께 제인 그레이를 왕으로 받들겠다고 서약했다. 이후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거병한 메리 1세가 진군하자, 제인 그레이를 옹립한 노섬벌랜드 공작 존 그레이가 그녀를 잡으러 진군했고, 제인 그레이는 7월 18일에 그녀의 "충실하고 사랑하는 사촌들"인 헨리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가 이끌 새로운 군대를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대세를 읽고 메리 1세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인 7월 19일, 헨리와 윌리엄 허버트는 런던에서 정변을 일으켜 내각과 런던 시장의 지원을 받아 메리 1세를 여왕으로 선포했다. 그 후 헨리는 제6대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 초대 베드퍼드 백작 존 러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 등과 함께 베이나드 성에서 메리를 영접했으며, 존 더들리를 체포해 런던 탑에 가두었다. 그 후 메리 1세로부터 법정 관리인, 추밀원 의원, 서식스에 있는 그의 영지와 관련된 여러 특권을 받았다.
1555년, 헨리는 메리 1세의 남편인 스페인 왕자 펠리페와 함께 브뤼셀로 이동했고, 1557년 스페인군과 함께 프랑스군과 대적한 잉글랜드군 중장이자 방위군 대장으로 선임되어 전장에서 활약했다. 또한 1556년 메리 1세로부터 미완성 궁전인 논서치 궁전을 사들인 뒤 1559년 완광했다. 1585년 엘리자베스 1세와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 궁전에서 양자간의 동맹과 스페인에 대한 공동 대응을 규정한 논서치 조약에 서명했다. 1580년 헨리가 사망한 후, 그의 사위인 초대 럼리 남작 존 럼리는 1590~1592년에 534파운드 상당의 토지와 교환하여 궁전을 엘리자베스 1세와 왕실에 다시 팔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사망할 때까지 논서치 궁전을 왕실 거주지로 사용했고, 그 후계자인 제임스 1세는 이 궁전을 상속받았다.
1558년 메리 1세가 사망한 후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헨리를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문이 잉글랜드에서 가장 고귀하고 추종자들이 대단히 많았기에 모든 직위를 유지하는 걸 허용했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왕실 대관식에서도 얼 마셜을 맡았다. 그 후 그는 대표적인 잉글랜드 내 가톨릭 영주로서, 당국이 가톨릭 신자를 억압하는 걸 방지하고 가톨릭 여왕인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적대하는 것 역시 반대했다.
1562년 엘리자베스 1세가 병에 걸렸을 때, 그는 런던의 아룬델 하우스에서 회의를 열고 왕위 계승권이 있는 캐서린 그레이[1]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세우자고 제안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엘리자베스는 분개했고, 헨리는 1564년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된 후 가택 연금형에 처했다가 12월에 풀려났다. 1566년 3월 파도바로 갔다가 여왕의 부름을 받고 1567년 4월 17일 런던으로 돌아왔다. 1569년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가 잉글랜드로 망명한 스코트랜드 전 여왕 메리와 결혼한 후 엘리자베스를 몰아내고 메리를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고발당했다. 이때 헨리도 이 음모에 관여한 혐의로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1569년 11월~12월 잉글랜드 북부 가톨릭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는데, 체포된 인사들 중 일부는 헨리를 공범으로 지목했다. 헨리는 자신이 엘리자베스 1세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고 주장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를 섣불리 제거했다간 후폭풍이 클 것을 예상해 그를 믿는 척하고 1570년 3월에 풀어줬다. 그러나 1571년 9월 제 은행가 로베르토 리돌피가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내 가톨릭 영주들에게 군자금을 지급해 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내고 스코틀랜드 전 여왕 메리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해 가톨릭 부활을 꾸민, 일명 '리돌피 음모'에 그 역시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헨리는 다시 체포되었고,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가 처형된 후인 1572년 12월까지 풀려나지 못했다.
그 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조용히 지내다가 1580년 2월 24일 런던의 아룬델 하우스에서 사망했고, 아룬델 성의 피츠앨런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세 자녀 제인, 헨리, 메리 모두 이미 사망했고, 딸 메리의 아들이자 그의 외손자인 필립 하워드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후손이었다. 이리하여 아룬델 백작령과 아룬델 성을 포함해 헨리가 서식스에 소유했던 광대한 영지 전체가 하워드 가문의 수중에 넘어갔다.
3. 가족
- 캐서린 그레이(1516 ~ 1542): 제2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의 딸. '9일 여왕'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인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의 누이.
- 제인 피츠앨런(1537 ~ 1576/7): 초대 럼리 남작 존 럼리의 딸.
- 헨리 피츠앨런(1538 ~ 1556): 말트라버스 경.
- 메리 피츠앨런(1540 ~ 1557):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아내.
- 메리 아룬델(? ~ 1557): 콘월의 깃발 기사이자 콘월 공국의 총독 존 아룬델의 딸. 초대 서식스 백작 로버트 래드클리프의 미망인.
메리 아룬델 사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1세 바사의 딸 세실리아 공주와의 혼담이 오갔지만 성사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