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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하워드

<colbgcolor=#CBE0A7><colcolor=#000>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3rd Duke of Norfolk
파일:Hans_Holbein_the_Younger_-_Thomas_Howard,_3rd_Duke_of_Norfolk_(Royal_Collection).jpg
이름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출생 1473년
사망 1554년 8월 25일 (향년 80~81세)
케닝홀
배우자 요크의 앤 (1495년 결혼 / 1511년 사망)
레이디 엘리자베스 스태퍼드 (1513년 결혼)
자녀 헨리, 캐서린, 메리, 토머스, 뮤리엘
아버지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어머니 엘리자베스 틸니
형제 에드워드, 에드먼드[1], 존, 헨리, 찰스, 헨리, 리처드, 엘리자베스[2], 무리엘, 윌리엄, 토머스, 리처드, 도로시, 앤, 캐서린, 엘리자베스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와 출세2.2. 결혼 정책2.3. 앤 불린과 토머스 하워드2.4. 은총의 순례2.5. 6개 조항2.6. 토머스 크롬웰과의 정쟁과 위기2.7. 투옥과 석방2.8. 토머스 와이엇의 난과 사망
3. 가족 관계
3.1. 아내3.2. 자녀
4. 대중매체
4.1. 울프 홀에서의 토머스 하워드

1. 개요

Thomas Howard
1473-1554

제3대 노퍽 공작 (Duke of Norfolk).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앤 불린의 외삼촌이자 캐서린 하워드의 백부.

15세기 잉글랜드의 대귀족이었던 하워드 가문의 수장이다.

2. 생애

2.1. 초년기와 출세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에쉬웰소프의 프레드릭 틸니 경의 딸 엘리자베스 틸니의 장남이다. 친형제로 6남(에드워드, 에드먼드, 헨리, 리처드, 존, 찰스) 2녀(엘리자베스, 뮤리얼)가 있었고, 아버지의 재혼녀이자 모친의 사촌인 아그네스 틸니가 낳은 이복형제로 3남(윌리엄, 토머스, 리처드) 4녀(도로시, 앤, 캐서린,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그가 12살일 때인 1485년, 조부인 초대 노퍽 공작 존 하워드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 편에 서서 헨리 7세에 맞서 싸웠다가 전사했다. 아버지 토머스 하워드 역시 리처드 3세를 위해 싸웠다가 생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고, 하워드 가문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당했다. 하지만 반역자로서 처형당하는 것은 모면했고, 새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풀려난 뒤 여러 잡무를 하며 조용히 지내며 영지를 조금씩 돌려받다가 1489년 서리 백작에 선임되었다.

1495년 2월 4일, 토머스는 에드워드 4세의 딸이며 헨리 7세의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자매인 요크의 앤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하워드 가문의 위신이 상당히 회복되었다. 토머스는 1497년 가혹한 세금 징수에 반발하여 봉기한 콘월 반군과의 전투에 복무했고, 9월에는 아버지의 지휘하에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 복무했으며, 9월 30일 기사 작위를 받았다. 1509년 임종을 맞이한 헨리 7세는 유언장에서 하워드 가문의 모든 땅을 그들에게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1510년 4월 새 국왕 헨리 8세에 의해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1512년에는 스페인으로 파견된 군대의 중장을 역임했다.

1513년 5월 4일 해군 대장이 되었고, 9월 9일 아버지 토머스 하워드의 지휘하에 플로든 전투에 참여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를 사살하고 적군을 섬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듬해, 아버지 토머스 하워드는 스코틀랜드군을 섬멸한 공로를 인정받고 마침내 노퍽 공작에 선임되었고, 그의 유력한 상속인인 토머스는 이제 서리 백작에 선임되었다. 152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3대 노퍽 공작이 되었을 때, 그의 입지는 무척 탄탄했다. 헨리 7세가 보스워스에서 승리하고 귀족들을 소집했을 때는 잉글랜드-웨일즈에 귀족 가문이라곤 29개 가문만이 응했고 헨리 8세 시절까지 복구된 가문을 합쳐도 약 50여 개에 불과했는데 왕족 계열이 아닌 공작 가문은 노퍽 공작이 유일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사실상 왕실 다음으로 가장 뼈대있는 집안이었다. 튜더 왕조는 헨리 8세를 제외하곤 남계혈족이 남지 않았고 랭커스터 가문요크 가문의 남계는 장미 전쟁 과정과 사후 처리에서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2.2. 결혼 정책

당대 귀족들이 흔히 그랬듯이, 토머스는 친척들과 유리한 결혼을 통해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첫번째 아내인 요크의 앤은 요크 왕조의 일원이었고, 그녀의 아이들은 왕위 계승 서열에 있었다. 1513년에 결혼한 두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스태퍼드는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의 딸로, 그녀의 모친인 캐서린 우드빌은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자매였다. 이렇듯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둠으로써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그의 아들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가 수년 후 자신의 혈통을 이유로 왕실 문장을 사용했다가 헨리 8세의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친척과 유리하게 결혼하는 것은 분쟁을 회피하는 유용한 방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1520년 봄, 토머스는 아일랜드 영지에서 총독으로 활동하는 동안 친척인 불린 가문과 버틀러 가문이 오몽드 백작 작위를 놓고 분쟁을 벌이는 걸 목격했다. 그는 이를 중재하면서, 조카 딸인 앤 불린과 젊은 제임스 버틀러를 결혼시켜서 두 가문의 오몽드 백작 계승권을 통합하자고 제안했다. 버틀러 가문은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불린 가문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몇년 후, 제9대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의 미망인인 조앤 피츠제럴드는 앤 불린의 사촌인 프랜시스 브라이언과 결혼했다.

토머스는 자기 자식들이 왕실과 연을 맺도록 힘썼다. 그는 딸 메리의 남편으로 헨리 8세의 사생아인 초대 리치먼드와 서머셋 공작 헨리 피츠로이와 맺어줬다. 아내 엘리자베스 스태퍼드는 귀한 딸을 사생아와 맺어주는 것을 모욕이라 여기고 반대했지만, 토머스는 이를 묵살하고 강행했다. 또한 그는 헨리 8세에 의해 사생아로 간주된 메리 공주를 아들 헨리 하워드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토머스가 이복형제인 토머스 하워드와 헨리 8세의 조카딸이자 마거릿 튜더의 딸인 레녹스 백작 부인 마거릿 더글러스의 비밀 약혼의 배후라고 의심한다.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가 사생아로 전락한 후, 마거릿 더글러스가 왕위 계승 서열 1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이 비밀 약혼을 알아차리고 격분하자, 토머스는 공식적으로 형제와 거리를 두었다.

2.3. 앤 불린과 토머스 하워드

토머스는 당초 조카딸 앤 불린을 제임스 버틀러와 결혼시키려 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헨리 8세가 직접 앤 불린에게 구애하기 시작하자, 그는 이 기회를 꼭 붙잡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 무효를 추진하는 헨리 8세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1529년 잉글랜드 귀족들이 왕의 결혼 무효를 지지한다고 공동으로 밝힌 서신에 서명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발송했다. 7년간의 공작 끝에, 앤 불린은 1533년 마침내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앤 불린은 삼촌의 도구로 이용되기를 거부했다. 앤은 가톨릭의 전례를 최대한 계승하기를 바라는 삼촌과는 달리 유럽 대륙에서 전개되는 종교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잉글랜드 국교회마르틴 루터의 교리를 가미하길 바랐다. 여기에 비천한 가문 출신인 토머스 크롬웰이 앤 불린을 왕비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급격히 출세해 국정을 이끌기 시작하자, 토머스 크롬웰을 경멸하던 그는 이 상황에 강한 불만을 느꼈다. 앤이 왕비로 있는 동안 토머스는 자기 의견을 거의 반영하지 못했다. 일설에 따르면, 토머스는 몬터규 남작 헨리 폴에게 앤이 모든 개를 자신보다 더 잘 대한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1536년 1월 앤 불린이 유산했을 때 그녀는 삼촌인 토머스 하워드가 왕이 마상창시합에 참가했다가, 낙마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바람에 자신에게 큰 충격을 주어 유산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이후로도 앤은 계속 유산을 반복하며 헨리 8세가 그토록 바랐고, 자신이 왕비 자리에 오른 근본적인 이유였던 아들을 낳지 못해 결국 왕의 사랑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이젠 앤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와의 재혼을 결심하면서 이내 앤을 간통과 반역 혐의로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토머스는 앤의 몰락이 자신과 가문에 화를 입히는 걸 피하기 위해 자기가 직접 나서서 앤을 처단하기로 했다. 1536년 5월 2일, 노퍽은 고위 관리인으로서 런던 탑의 대회당에서 앤 불린과 그녀의 동생인 로치포드 자작 조지 불린의 재판을 주재해 사형을 선고했고 조지 불린은 5월 17일에 처형되었고 앤 불린은 이틀 후에 처형되었다.

2.4. 은총의 순례

1536년 10월, 잉글랜드 북부 전역에서 은총의 순례가 발발했다. 토머스와 장남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는 제4대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와 함께 국왕의 군대를 공동으로 지휘하여 반란 진압에 착수했다. 당시 토머스의 군대는 5,000명이었고, 슈루즈버리 백작은 8,000명이었다. 반면에 폰트프랙트 성에 집결한 로버트 애스크의 봉기군은 30,000~40,000명에 달했다. 이렇듯 수적 열세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토머스는 강경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반군과 협상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그는 폰트프랙트 성에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봉기군 지도자 로버트 애스크는 순례자 4명을 돈캐스터로 보내 토머스에게 봉기의 이유를 설명하기로 했다. 봉기군측은 플로든 전투에서 활약해 북부 주민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토머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봉기 성공에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그 후 토머스와 사절단 4인은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고, 10월 27일 사절단 중 로버트 보우스와 랄프 엘러커가 토머스의 동의를 받아 왕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윈저로 파견되었다. 왕은 청원서를 읽은 뒤 청원서의 내용이 불명확하고 두루뭉실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봉기를 중단한다면 너그럽게 넘어갈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이후 토머스 애스크는 추종자들과 협의한 뒤 왕에게 보낼 청원서를 좀더 명확하게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예외 없이 모든 순례자에게 사면을 내려달라.
2. 순례자들의 요구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북부에서 의회를 소집해달라.
3. 사생아로 격하된 메리 공주의 신분을 회복해 달라.
4. 교황의 권위를 회복해 달라.
5. 이단서를 불태우고 이단자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내려달라.
6. 폐쇄된 수도원을 복원해달라.
7. 종교 시설 폐쇄와 관련된 다양한 의회법을 폐지해달라.
8. 트렌트 강 북쪽의 모든 사람을 위해 요크 교구의 관활권을 확장해 달라.
9. 토머스 크롬웰, 리처드 리치, 토머스 오들리를 내각에서 해임해 달라.

헨리 8세는 봉기군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고, 반란 주모자들을 어떻게든 응징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군대가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했기에, 토머스는 적어도 순례자들의 요구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헨리 8세는 12월 6일 토머스에게 전면 사면, 휴전 연장, 순례자들의 우려를 논의하기 위한 특별 의회 소집 약속에 대한 권한을 주었다. 이러한 권한은 토머스의 입지를 강화하여 폐쇄된 수도원에 관해서도 반란군을 달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수도원을 다시 열 권한은 없었지만, 왕에게 복종한 수도원은 특별 의회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자신이 복구하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순례자들은 토머스가 제시한 약속에 만족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봉기를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애스크는 그들을 간신히 달랜 뒤 12월 8일에 봉기군을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가 새겨진 깃발을 내리도록 했다. 그 후 헨리 8세의 초대를 받고 그리니치 궁전에서 열린 성탄절 연회에 참석한 애스크는 왕으로부터 진홍색 벨벳 재킷을 선물받았다. 또한 왕은 전면 사면령을 내리고, 다음 의회를 요크에서 소집하고, 심지어 제인 시모어를 요크에서 왕비로 대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애스크는 왕의 지시에 따라 순례에 대한 회고록을 썼는데, 헨리 8세가 북부 사람들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권고도 포함되었다.

1537년 1월, 로버트 애스크는 모든 것이 잘 풀렸다고 여기며 요크셔로 돌아왔지만, 상황은 곧 악화되었다. 헨리 8세는 순례자들의 정치 개입 시도를 강하게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고, 토머스는 1월 말에 헨리 8세로부터 순례자들의 맹세를 무효화하고. 헨리 8세를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며, 왕위 계승 순서 변경을 인정하고, 수도원의 해산을 인정하도록 강요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반역자로 간주해 처벌하라는 지시를 받고 돈캐스터로 향했다.

하지만 토머스가 행동에 옮기기 전, 세틀링턴의 프랜시스 비고드 경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헨리 8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고, 토머스가 조만간 군대를 이끌고 순례에 참여한 이들을 학살할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북부를 장악하고 노퍽 공작을 사로잡아서 순례자의 맹세를 따르겠다는 서약을 받아내기로 작정했다.

애스크는 왕의 호의를 잃지 않기 위해 프랜시스 비고드와 재빨리 거리를 뒀다. 그는 주민들에게 비고드의 반란에 절대로 가담하지 말고 왕과의 협약을 깨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랜시스 비고드와 그의 동지 존 헬럼을 따르는 무리 수백 명이 헐과 스카버러에서 봉기를 강행했다가 곧바로 진압되었다. 헨리 8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모든 협상과 양보를 무효로 선언했고, 토머스는 잉글랜드 북부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프랜시스 비고드의 반란에 가담한 인사 200명을 처형했다.

애스크는 동료 로버트 콘스터블, 토머스 다아시 경과 함께 토머스를 찾아가서 자신들은 프랜시스 비고드의 봉기를 막으려고 노력했으니 왕에게 잘 설명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토머스는 런던으로 가서 왕에게 선처를 호소하라고 권고했고, 그들은 이에 따랐다. 그러나 런던으로 향한 애스크와 콘스터블, 다아시 경은 곧바로 체포되었고, 1537년 5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라티머 경과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반군의 위협에 강제로 편입된 것이 인정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반면 로버트 애스크, 로버트 콘스터블, 토머스 다아시, 존 헬럼, 프랜시스 비고드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다아시는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고, 비고드는 타이번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타블과 헬럼은 헐에서 처형되었으며, 로버트 애스크는 1537년 7월 12일 요크로 보내졌고, 요크 성의 클리퍼드 타워에서 온종일 쇠사슬에 매달렸다가 타워 밖에 세워진 사형대로 끌려간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2.5. 6개 조항

1539년, 전통 교리를 수호하고자 했던 토머스는 국왕의 수석 장관 토머스 크롬웰의 개혁주의 종교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헨리 8세는 의회를 소집해 잉글랜드 국교회의 교리에 대한 의견의 합의를 이루도록 했다. 5월 5일, 상원은 교리 문제를 고려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다. 토머스는 위원회 위원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5월 16일 6가지 논쟁적인 교리 문제를 의회에 제출하여 심의를 요청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성체성사가 변화 없이도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 될 수 있는지,
2. 양형 성체성사가 평신도에게 주어져야 하는지,
3. 순결 서약이 신의 법의 일부로 지켜져야 하는지,
4. 성직자의 독신이 의무화되어야 하는지,
5. 사적인 미사가 신의 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요구되는지,
6. 귀의 고해성사(즉, 사제에게 하는 고해)이 신법의 일부로서 필요하는지.

이 문제들은 다음 달 동안 국왕의 적극적인 참여 하에 의회에서 논의되었고, 최종 결과는 6번째 문제를 제외한 모든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교리를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즉, 한 가지 형태의 영성체, 의무적인 성직자 독신, 순결 서약, 그리고 신심 미사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본 교리가 되었다. 개신교도들은 '귀의 고해 성사'에서 작은 승리를 거뒀는데, 의회는 귀의 고해성사를 유지하는 것이 편리하고 필요하다고 선언하면서도, "신의 법에 의해 요구된다"고 확정하지 않았다. 또한, 전통적인 용어로 실제적인 현존이 확언되었지만, ' 실체 변화'라는 단어 자체는 최종본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6개 조항 법은 1539년 6월에 법률로 확정되었으며, 이 조항을 위반하면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성체성사에서 실체변화[3]를 부정하는 자는 참회할 기회 없이 화형에 처해지며, 다른 조항을 거부하면 교수형이나 종신형에 처해졌다. 법률이 반포되기 전에 결혼한 사제는 7월 12일까지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 사제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6개 조항법은 에드워드 6세의 통치 초년인 1547년 반역법에 의해 폐지되었다.

2.6. 토머스 크롬웰과의 정쟁과 위기

1539년 6월 29일, 토머스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손님으로서 램버스 궁전에서 국왕 헨리 8세, 토머스 크롬웰과 함께 만찬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토머스 울지 추기경를 주제로 토론이 오갔을 때, 크롬웰은 토머스가 왕에게 불충을 저지른 울지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며 그를 불충실한 신하라고 비난했다. 토머스는 이에 맞서 크롬웰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이 서로를 적대한다는 게 세상에 공개되었다.

1540년 2월, 토머스는 수도원이 폐쇄되는 것을 막으려고 헨리 8세에게 수도원을 대학 교회로 전환하라고 청원했다. 그는 첫 번째 아내이자 국왕의 이모인 요크의 앤과 옛 사위였던 리치먼드 공작 헨리 피츠로이가 수도원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이 이대로 폐쇄되길 원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른 귀족들도 같은 요청을 했지만 소용 없었다. 다만 헨리 8세는 수도원 해산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척의 유해를 다시 묻을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토머스는 두 사람의 유해를 프램링엄의 대천사 성 미카엘 교회로 옮겼다. 수도원이 해체된 후, 그 땅은 토머스에게 주어졌다.

그 후 토머스 크롬웰이 클레베의 앤이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가 되도록 주선했지만, 왕이 새 왕비에게 실망해 결혼을 취소하려 하자, 토머스는 이 기회를 틈타 크롬웰을 무너뜨리기로 마음먹었다. 1540년 6월 10일, 토머스 크롬웰은 반역 혐의로 체포된 뒤 사법위원회에 회부되었고, 토머스는 크롬웰의 어깨에서 가터 훈장의 휘장인 세인트 조지 칼라를 빼앗으며 "반역자는 이걸 착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윽박질렀다. 7월 9일, 헨리 8세의 클레베의 앤의 결혼은 취소되었다. 이 시기, 토머스의 또 다른 조카 딸인 캐서린 하워드가 왕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헨리 8세의 캐서린 하워드는 크롬웰이 처형한 날인 7월 28일 오틀랜즈 궁전에서 결혼했다. 토머스는 이 결혼으로 한동안 정치적 명성과 물질적 보상을 누렸다.

그러나 1541년 가을, 종교 개혁가 존 라셀스와 그의 여동생 메리 홀이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에게 왕비가 왕과 결혼하기 전에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알렸다. 그 해 11월 1일, 크랜머는 헨리 8세게 서신을 보내 이 사실을 보고했고, 헨리 8세는 몹시 분노해 하워드 가문이 왕비의 문란한 생활을 은페했다고 비난했다. 캐서린은 곧바로 체포된 뒤 간통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542년 2월 13일에 처형되었다. 토머스의 가족 여러 명이 이때 처벌받았는데, 그의 딸 메리, 계모이자 과부가 된 노퍽 공작 부인 아그네스 틸리, 그리고 아그네스 틸리의 아들이자 토머스의 이복형제인 윌리엄 하워드가 포함되었다. 토머스는 케닝홀에 있는 자기 거주지로 은퇴한 뒤 국왕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캐서린 하워드와 아그네스 틸리에게 전가함으로써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그 후 왕의 신임을 겨우 회복한 토머스는 1542년 8월 거친 구혼에서 대장으로 선임되어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활동했다. 1543년 6월, 그는 헨리 8세의 이름으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원정군의 중장으로 임명되었다. 1544년 5~10월 몽트뢰유를 포위했지만,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몽트뢰유 포위를 포기했다. 여기에 잉글랜드군에게 장악된 불로뉴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다고 여기고 약간의 수비대만 남겨두고 칼레로 철수했다. 그는 이로 인해 헨리 8세에게 심하게 질책받았다.

2.7. 투옥과 석방

헨리 8세의 말년, 왕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에드워드 6세를 낳은 헨리의 세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의 친정인 시모어 가문이 득세했다. 시모어 가문은 프로테스탄트로 가톨릭인 토머스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토머스는 과부가 된 딸 메리를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시켜 시모어 가문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헨리 8세는 결혼을 승낙했지만, 토머스의 장남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와 부인인 엘리자베스 스태퍼드가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546년,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참회왕 에드워드의 개인 문장 일부를 자기 문장으로 삼았다가 헨리 8세로부터 왕실 문장을 도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헨리 8세는 하워드 가문이 왕위에 눈독을 들였기에 이런 일을 벌였다고 확신하고, 1546년 12월 12일 토머스와 아들 헨리 모두 체포되어 런던 탑에 보내졌다. 12월 24일, 토머스는 아들 헨리의 거짓 행위를 숨김으로써 반역죄를 은폐했다고 인정하고, 아들이 왕에게만 해당되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문장을 사용하는 걸 막지 못한 걸 회개하겠다며 자기 땅을 왕실에 바쳤다.

그 후 아내 엘리자베스 스태퍼드, 딸 메리 하워드, 정부 엘리자베스 홀랜드를 포함한 토머스의 가족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토머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시했다. 토머스의 아들 헨리는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547년 1월 19일에 처형되었고, 1월 27일에 하워드 부자는 모든 작위와 영지를 박탈당했다. 이후 임종을 눈앞에 둔 헨리 8세는 어린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을 맡은 위원들에게 토머스를 처형하는 걸 승인했다. 이제 토머스는 처형을 모면할 수 없을 듯 했지만, 1월 28일 이른 아침에 헨리 8세가 사망한 뒤, 섭정 위원회는 유혈 사태 없이 새 국왕을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그의 처형을 집행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친 가톨릭 성향인 그를 경계한 에드워드 6세의 섭정단에 의해 런던 탑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1553년 7월 잉글랜드 여왕이 된 메리 1세는 토머스 하워드와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를 사면하고 런던 탑에서 석방하기로 했다. 그 직후, 토머스는 추밀원에 임명되었고, 8월 18일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재판에서 수석 재판관을 맡아 사형을 선고했다. 또한 얼 마셜(Earl Marshal)에 복귀했고, 1553년 10월 1일 메리 1세의 대관식에서 그 자격으로 집전했다. 또한 메리 1세가 첫 번째로 소집한 의회에서 하워드 가문의 재산이 몰수되었던 것이 무효로 선언되었고 그의 작위와 영지는 모두 회복되었다. 6년 전 헨리 하워드가 처형된 이후로 비어있던 서리 백작위는 이제 토머스의 후계자가 된 헨리 하워드의 장남이자 그의 손자인 토머스에게 넘어갔다.

토머스는 석방 직후 헨리 하워드의 다섯 손주를 돌보던 개신교 설교자 존 폭스를 해고하고, 손자이자 상속인인 토머스 하워드의 교육을 메리 1세의 법무장관으로 선임된 스티븐 가디너 주교에게 맡겼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손자 토머스와 또 다른 손자 헨리 하워드의 교육을 링컨 주교로 선출된 가톨릭 사제 존 화이트에게 맡겼다. 1553년 후반, 토머스는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두 가톨릭 가문을 통합하기 위해 제19대 아룬델 백작 헨리 피츠앨런의 딸 메리 피츠앨런과 손자 토머스 하워드의 결혼을 주선했다.

2.8. 토머스 와이엇의 난과 사망

1554년 1월 25일, 메리 1세와 스페인 왕자 펠리페의 결혼에 반발한 토머스 와이엇 더 영거가 켄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취지에 공감한 추밀원 인사들이 메리 1세를 돕기를 주저하자, 그녀는 런던 시의회에 호소했다. 런던 시의회는 논의 끝에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토머스에게 800명의 민병대로 구성된 토벌군을 이끌고 켄트로 진격하게 했다. 1월 28일, 토머스는 그레이브젠드에 주둔했던 코브햄 남작 조지 브룩과 합세해 1,200명과 대포 8문을 거느리고 로체스터로 진군했다.

이때 와이엇의 밑에 들어갔던 조지 하퍼가 토머스에게 귀순했다. 토머스는 오랜 지인인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고, 그로부터 와이엇의 입지가 불안정하며 반란군이 곧 흩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조지 하퍼는 그날 밤에 토머스 휘하 민병대에게 반란군 편을 들도록 비밀리에 선동했다. 1월 29일 아침, 토머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체스터로 진군했는데, 반란군과 맞닥뜨렸을 때 민병대가 돌연 이렇게 외치며 와이엇 편으로 돌아섰다.
"우리는 모두 잉글랜드인이다! 와이엇! 와이엇!"

토머스는 포병대에게 반기를 든 민병대를 향해 포탄을 쏘라고 명령했지만, 반란군이 포대를 접수해버리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런던으로 도망쳤다. 그 후 그의 이복형제인 초대 에핑엄 남작 윌리엄 하워드가 그를 대신해 반란 진압을 맡았고, 2월 7일 런던으로 쳐들어온 반란군을 격멸했다.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케닝홀 자택에서 은거한 토머스는 1554년 8월 25일에 사망했다. 사후 서퍽주 프랭링엄의 대천사 성 미카엘 교회에 안장되었고, 그의 작위와 영지는 손자인 토머스 하워드에게 돌아갔다.

3. 가족 관계

3.1. 아내

  • 요크의 앤(1475 ~ 1511): 에드워드 4세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다섯 번째 딸. 1495년 2월 4일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토머스는 앤의 시녀인 엘리자베스 홀랜드와 성관계를 가지며 병약한 아내를 무시했고, 앤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녀들은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정확한 수와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토머스라는 아들 하나 만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 살았지만 유년기에 사망했고, 다른 자식들은 사산하거나 세례를 받기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 엘리자베스 스태퍼드(1497 ~ 1558):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의 딸. 1513년 1월 8일 즈음에 결혼했다. 두 부부는 초기에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으로 보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다섯 자녀가 태어났다. 그러나 1527년 토머스가 요크의 앤 생전에도 성관계를 가졌던 엘리자베스 홀랜드를 아예 정식 정부로 삼고, 케닝홀 자택에서 그녀를 아내와 함께 살게 하면서, 두 부부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스태퍼드는 엘리자베스 홀랜드를 음탕하고 지루하며 어리석은 여자라고 비난하는 서신을 작성하기도 했다.
    토머스는 정부와 헤어지라는 아내의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아내와 헤어지기로 마음먹고 이를 감행하려 했다. 엘리자베스 스태퍼드는 이에 맞서 남편이 자신을 학대했으며, 딸 메리를 낳고 회복하던 중 남편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침대에서 끌어내 집안을 끌고 다니며 단검으로 상처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남편의 정적인 토머스 크롬웰에게 서신 3통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남편이 "시녀들을 시켜 내 손가락 끝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나를 묶게 하고, 나를 꿰뚫고, 내가 피를 뱉을 때까지 내 가슴 위에 앉게 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토머스는 아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결국 1534년 3월 23일, 엘리자베스 스태퍼드는 하트퍼드셔 레든본에 있는 한 집에 강제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크롬웰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써서 연간 200파운드라는 빈약한 수당으로 사실상 감금 상태에 있다고 불평했다. 토머스는 아내에게 이혼에 동의하라고 설득하며 보석과 의류를 돌려주고 자신의 접시와 가재도구 대부분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장남 헨리와 딸 메리는 그녀와 사이가 벌어졌고, 그녀의 오빠인 초대 스태퍼드 남작 헨리 스태퍼드는 여동생이 품위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토머스는 결국 그녀와 이혼하지 못했다.
    1547년 1월 남편 토머스가 장남 헨리와 함께 체포되어 런던 탑에 구금되자, 남편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던 그녀는 곧바로 남편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시했다. 그 후 오랜 세월 런던 탑에 갇혀 있던 토머스는 1553년 메리 1세에 의해 석방된 뒤 1554년 사망하면서 유언장을 적었는데, 거기에는 아내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스태퍼드는 증손자 필립 하워드의 세례식에서 대모 역할을 한 것 외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558년 11월 30일 램버스에서 사망하여 램버스 성모 마리아 교회의 하워드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엘리자베스 스태퍼드
(Elizabeth Stafford)
1남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
(Henry Howard, Earl of Surrey)
1517년 1547년 1월 19일 프랜시스 드 베레
슬하 2남 3녀[4]
1녀 더비 백작부인 캐서린 스탠리
(Catherine Stanley, Countess of Derby)
1518년 1530년 제3대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탠리
2녀 리치몬드와 서머셋 공작부인 메리 피츠로이
(Mary FitzRoy, Duchess of Richmond and Somerset)
1519년 1557년 리치몬드와 서머셋 공작 헨리 피츠로이[5]
2남 초대 빈던의 하워드 자작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1st Viscount Howard of Bindon)
1520년 1582년 엘리자베스 마니
슬하 4남 1녀
거트루드 라이트
슬하 1남 1녀
메이블 버튼
슬하 1녀
마거릿 매닝
3녀 뮤리엘 하워드
(Muriel Howard)
1521년 ?[6]

토머스 하워드의 장남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는 최고 귀족인 아버지와 가문만 믿고 무분별하게 행동하며 많은 정적을 양산하다가, 결국 참회왕 에드워드의 개인 문장을 자신의 문장에 집어넣는 짓을 벌였다가 헨리 8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헨리의 아들이자 노퍽 공작위를 물려받은 손자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엘리자베스 1세 시절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노리며,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키고 메리를 옹립하려는 리돌피 음모에 가담했다가 참수당했다. 이처럼 대를 이어 가문의 장자들이 반역죄로 처형당했음에도 하워드 가문의 자손은 끝까지 살아남았고 노퍽 공작 작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술한 대로 왕족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공작 작위이다.

4. 대중매체

앤 불린캐서린 하워드를 다루는 창작에서는 그리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조카를 왕비로 올리기 위해 음모술수를 일삼고 단물이 빠지자 재빨리 버리는 비정한 기회주의자로 등장한다. 둘째 부인을 학대했다는 이야기 또한 그가 악인으로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 운이 억세게 좋은 인물이기도.

4.1. 울프 홀에서의 토머스 하워드

파일:Wolf Hall.Thomas Howard.jpg

영화 타이타닉에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과 반지의 제왕세오덴 왕을 연기한 버나드 힐이 맡았다.

오만하고 고압적인 남자로 조카 앤 불린헨리 8세의 왕비 자리에 앉히려 노력하지만 자기 못지않게 성격이 강한 앤과 자주 부딪힌다. 똑같이 앤 불린을 지지하는 토머스 크롬웰과 협력하는 관계이지만, 헨리 8세의 신임을 받는 크롬웰을 질투하며 출신이 천한 그를 대놓고 무시한다. 헨리 8세가 말에 떨어져서 죽은 줄 알자 크롬웰은 왕비인 앤 불린이 섭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워드는 자신이 섭정이 되어야 하며 여자는 섭정을 할 수 없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권력욕을 드러낸다.

이런 권력지향적인 면모는 앤이 헨리 8세의 총애를 잃고 왕비 자리에서 쫒겨날 위기에 처하자, 거리낌 없이 적으로 돌리고 그토록 무시하던 토머스 크롬웰과도 손을 잡아 앤을 몰락시키는 모습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앤을 손수 체포하러 오기도 하고 그녀의 재판에서는 재판장 역할을 맡아 사형을 선고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화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1] 캐서린 하워드의 아버지.[2] 윌트셔 백작부인으로 앤 불린, 메리 불린, 조지 불린의 어머니.[3] 성체성사에 쓰이는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하고, 빵과 포도주의 우유는 그대로 남아서 실재를 가리키는 상징이 된다는 입장. 가톨릭의 성체성사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이다.[4]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5] 헨리 8세의 사생아 아들.[6] 생몰년은 불명이지만 유년기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