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BE0A7><colcolor=#000>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 Henry Howard, Earl of Surre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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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헨리 하워드 (Henry Howard) |
출생 | 1517년경 |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헌스던 | |
사망 | 1547년 1월 19일 (향년 29~30세)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타워힐 | |
배우자 | 프랜시스 드 베레 (1532년 결혼) |
자녀 | 제인, 토머스, 헨리, 캐서린, 마거릿 |
아버지 |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
어머니 | 엘리자베스 스태퍼드 |
형제 | 캐서린, 메리, 토머스, 뮤리얼 |
지위 | 서리 백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2. 특징
고위 귀족인 아버지의 후광을 받고 평탄한 삶을 살았지만 오만하고 과격한 성격 탓에 많은 정적을 양산하며 무분별한 행동을 벌인 끝에 헨리 8세로부터 반역 의심을 받고 처형당했다.3. 생애
1517년경 하트퍼드셔 헌스던에서 당시 서리 백작이었던 토머스 하워드와 엘리자베스 스태퍼드의 다섯 자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친조부모는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에쉬웰소프의 프레드릭 틸니 경의 딸인 엘리자베스 틸니였으며, 외조부모는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와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딸인 엘레노어 퍼시였다. 그는 부계쪽으로 메리 불린, 조지 불린, 앤 불린 세 남매와 캐서린 하워드의 사촌이었다.하워드 가문은 당시 잉글랜드에서 단 셋 뿐인 공작위[1]를 가진 최고위 귀족이었다. 이런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난 헨리는 든든한 배경을 바탕삼아 당시 최고의 교사들로부터 세심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걸 즐겼으며, 헨리 8세의 사생아인 리치먼드와 서머셋 공작 헨리 피츠로이와 함께 윈저 성에서 자랐다. 이윽고 헨리 하워드는 헨리 피츠로이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헨리 피츠로이가 여동생 메리와 결혼한 후에는 처남이 되었다.
헨리는 조부와 아버지처럼 군인으로 발탁되어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해 해상 및 육상에서 국왕의 중장으로 복무했으며,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경솔한 행동을 벌여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한 번은 신하를 때렸다는 이유로, 또 다른 한 번은 런던 거리를 돌아다니며 잠든 집의 창문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1524년 조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노퍽 공작이 되었을 때, 그는 서리 백작 작위를 받았고, 장남이자 상속인으로서 장차 4대 노퍽 공작이 될 운명이었다.
1532년 헨리 8세, 헨리 피츠로이, 그리고 앤 불린과 함게 프랑스를 방문했고,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수행원으로서 1년 이상 그곳에 머물렀다. 1533년에 돌아온 헨리는 아버지가 엘리자베스 홀랜드와 불륜 관계를 맺은 후 부모간의 대립이 격해져서 이혼 소송이 전개되는 걸 목격했다. 그는 가족 분쟁에서 주로 아버지 편을 들었다. 한편, 앤 불린은 헨리와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인 메리 공주의 결혼을 추진해, 이를 통해 자기를 왕비로 인정하지 않는 메리를 궁정에서 완전히 축출하려 했다. 노퍽 공작은 이 결혼이 자신에게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주고 그의 가문을 잉글랜드 왕위에 더 가깝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매우 열광했다. 그러나 앤 불린은 곧 노퍽 공작이 이 결혼을 이용해 메리 공주의 왕위 계승 주장을 뒷받침하고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를 지지할 것을 우려해 결혼 계획을 백지화했다.
1532년 10월, 앤 불린은 마지못해 하는 삼촌 토머스 하워드를 설득해 서리 백작이 옥스퍼드 제15대 백작 존 드 베레의 딸인 프랜시스 드 베레와 약혼하도록 했다. 1532년 1월 15일, 노퍽 공작과 옥스퍼드 백작은 결혼 계약에 합의했다. 프랜시스는 지참금으로 4,000 마르크를 받는데, 그중 200마르크는 결혼 시 받고 나머지는 분할로 받기로 했다. 프랜시스는 훗날 남편이 처형된 후에도 이 권리를 유지했다. 또한 노퍽 공작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연간 300파운드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영지를 주었다.
결혼식은 4월 23일에 거행되었지만, 부부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1535년까지 함께 살지 않다가 나중에 함께 살면서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다. 결혼식은 가톨릭 의식에 따라 진행되었지만, 두 가족 간에는 종교적 차이가 있었다. 헨리의 아버지인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가톨릭을 받드는 잉글랜드 대귀족이었던 반면,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는 종교개혁을 지지하고 개신교로 개종했다. 또한 옥스퍼드 백작은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백작령을 소유했고, 대법관을 역임했다.
1536년 5월, 그는 아버지와 함께 친척인 앤 불린과 조지 불린의 재판에서 왕의 의심을 회피하기 위해 두 사람을 직접 심판했다. 노퍽 공작은 고위 관리로서 재판을 주재했고, 서리 백작은 그 아래에 얼 마셜(Earl Marshal)을 맡았다. 그 해 7월, 서리 백작의 처남인 리치먼드 공작 헨리 피츠로이가 1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하워드 가문의 영지에 속한 테트포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 해 10월, 서리 백작은 아버지와 함꼐 수도원 해산에 반발하여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가톨릭 신자들의 봉기인 은총의 순례 진압 작전을 이끌었다.
헨리는 친구 토머스 와이엇과 함께 시인으로 활약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가 나중에 사용한 소네트 형식으로 글을 쓴 최초의 잉글랜드 시인으로 손꼽혔다. 헨리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2권과 4권을 번역하면서 무운시를 발표한 최초의 잉글랜드 시인이기도 했다. 와이엇은 잉글랜드 시에 소네트 형식을 직접 도입한 반면, 헨리는 소네트 형식에 운율을 부여하고 4행시로 구분하여 엘리자베스 시대, 셰익스피어 시대 소네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쓰인 소네트를 특징지었다. 1557년 런던의 출판사 직원이었던 리처드 토텔이 런던에 처음 발간한 《토텔의 미셀러니》(Tottel's Miscellany)에 헨리가 집필한 40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잉글랜드 귀족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던 하워드 가문의 인사들은 토머스 크롬웰과 시모어 가문[2]처럼 헨리 8세의 궁정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은 '신진인사'들을 경원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헨리는 이러한 신규계층에 대한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후술하다시피 시모어 가문과 정략결혼을 추진하던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못한 처신을 보였다. 그는 토머스 크롬웰을 "사악한 촌뜨기"라고 비웃었고 윌리엄 패짓을 "비열한 놈"이라고 낙인 찍었으며 사람들 앞에서 아래의 말을 종종 했다고 전해진다.
"이 새로 선출된 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귀족을 한 명도 남기지 않을 것이오!(These new erected men would by their wills leave no nobleman on life!!)"
헨리 8세의 치세 말기 에드워드 왕세자의 외가인 시모어 가문은 국왕의 신임을 얻어 큰 권력과 영향력을 얻었고, 하워드 가문은 헨리 8세의 다섯번째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가 간통죄로 처형당하면서 권세가 다소 위축되었다. 더욱이 헨리 8세가 일찍 승하하여 그의 유일한 적자인 에드워드 왕세자가 어린 나이에 즉위할 시 외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섭정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과부가 된 딸 메리[3]를 에드워드 시모어의 남동생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시켜서 시모어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그러나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가 격이 낮은 시모어 가문과 연을 맺는 건 하워드 가문의 수치라며 격렬하게 반대해서 결국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헨리는 여동생 메리에게 그녀의 전 시아버지인 헨리 8세의 정부가 되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정부이자, 사실상의 프랑스 왕비로 군림하던 에탕프 공작 부인 안 드 피슬뢰 델리[4]처럼 되라는 말도 안되는 제안을 했다. 메리는 오빠의 이러한 망언에 격분하여 "그런 악행에 동의하느니 차라리 내 목을 스스로 그어버리겠다."라며 강하게 거부했다.
1546년 헨리는 방만한 행동을 일삼은 끝에 결국 아버지를 위기에 몰아넣고 자신의 목숨마저 끝장내는 짓을 벌였는데, 다름아닌 참회왕 에드워드의 개인 문장을 4분할하고 그중 일부를 자신의 문장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 이유는 헨리 하워드의 증조부 초대 노퍽 공작 존 하워드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4남인 초대 노퍽 백작 브라더턴의 토머스의 후손이고, 헨리의 또 다른 조상이자 마찬가지로 브라더턴의 토머스의 후손인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문장이 참회왕 에드워드의 문장 일부를 병용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회왕 에드워드의 문장은 오로지 잉글랜드의 국왕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고, 브라더턴의 토머스의 먼 후손일 뿐 왕실의 가까운 친척도 아니고 왕비의 외척도 아닌 헨리가 이 문장을 쓴 것은 미친 짓이었다. 당연히 헨리 8세는 헨리 하워드가 왕실 문장을 도용했다고 비난했고, 하워드 가문이 왕위에 눈독을 들였기에 이런 일을 벌였다고 확신했다.
1546년 12월 12일, 헨리는 아버지인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함께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두 사람은 왕좌를 탈취하고 가톨릭을 부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았다. 12월 24일, 토머스는 아들 헨리의 거짓 행위를 숨김으로써 반역죄를 은폐했다고 인정하고, 아들이 왕에게만 해당되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문장을 사용하는 걸 막지 못한 걸 회개하겠다며 자기 땅을 왕실에 바쳤다. 그 후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태퍼드, 여동생 메리 하워드, 아버지의 정부 엘리자베스 홀랜드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토머스와 헨리 하워드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시했다. 1547년 1월 13일, 헨리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1월 19일에 런던 탑 타워힐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 타워 스트리트에 있는 만성 교회에 묻혔다가, 1614년 서퍽 주 프랭링엄에 있는 성 미카엘 대천사 교회로 이장되었다.
아버지 토머스는 1월 28일에 처형될 것이 예정되었지만 헨리 8세가 그날 이른 아침에 죽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토머스 하워드는 6년간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대부분의 직함과 재산을 몰수당했지만, 1553년 8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등급한 뒤 사면되었고, 빼앗겼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돌려받았다. 헨리의 아들인 토머스 하워드는 1554년 조부가 사망한 뒤 제4대 노퍽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도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시절 그녀를 폐위시키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리돌피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부자가 나란히 반역죄로 처형당한 것이다.
4. 가족
- 프랜시스 드 베레(1517 ~ 1577): 제15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의 딸. 헨리 하워드 사후 서퍽 주 소햄 출신의 의원 토머스 스태이닝과 재혼해 아들 헨리와 딸 메리를 낳았다.
- 제인 하워드(1533/1537 ~ 1593):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의 부인.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일으킨 남편을 따라 적극적으로 반란군을 모집하고 형제 토머스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했지만, 북부 반란은 실패하고 토머스마저 리돌피 음모에 연루되어 반역죄로 처형당하면서 자신도 가택연금 당했고 죽을 때까지 풀려나지 못했다.
- 토머스 하워드(1536 ~ 1572): 제4대 노퍽 공작. 엘리자베스 1세를 타도하려는 리돌피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 헨리 하워드(1540 ~ 1614): 초대 노샘프턴 백작.
- 캐서린 하워드(? ~ 1596): 제7대 버클리 남작 헨리 버클리의 부인.
- 마거릿 하워드(1547 ~ ?): 아버지가 처형된 후에 출생. 제9대 스크로프 남작 헨리 스크로프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