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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폴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몬터규 남작
헨리 폴
Henry Pole, 1st Baron Montagu
이름 헨리 폴
Henry Pole
출생 1492년
잉글랜드 왕국 버킹엄셔
사망 1539년 1월 9일 (향년 46~47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배우자 제인 네빌 (1513년경 결혼 / 1538년 사망)
자녀 캐서린, 토머스, 헨리, 위니프레드
아버지 리처드 폴 경
어머니 마거릿 플랜태저넷
형제 레지널드, 제프리, 아서, 우르술라
직위 초대 몬터규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아내3.2. 자녀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남작, 군인. 마거릿 폴의 장남으로, 튜더 왕조의 가까운 친척이자 요크 왕조의 모계 후손이었다. 헨리 8세의 궁정 신하로서 활동했지만 엑서터 음모에 휘말려 처형당했다.

2. 생애

1492년경 잉글랜드 왕국 버킹엄셔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리처드 폴헨리 7세의 이종사촌으로[1] 웨일스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자 버킹엄셔의 지주였다. 리처드는 1485년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는 걸 적극적으로 지지한 뒤 할레치 성과 몽고메리 성의 치안관, 메리오네스셔의 보안관을 역임했고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어머니 마거릿 플랜태저넷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딸이자 에드워드 4세의 조카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이었고, 자신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신하이자 친척과 결혼시켜서 후환을 없애려는 헨리 7세의 의사에 따라 리처드 폴과 결혼했다.

이러한 가족관계를 통해 헨리 폴은 아서 튜더, 마거릿 튜더, 헨리 8세, 메리 튜더와 부계와 모계로 모두 육촌 지간이었다. 형제로 레지널드, 제프리, 아서[2], 우르술라[3]가 있었다.

리처드는 1505년 이전에 사망했고, 장남 헨리 폴에게 영지를 남겼다. 여기에는 버킹엄셔, 햄프셔, 서식스, 윌트셔, 서머싯 및 도싯에 있는 영지가 포함되었다. 헨리 폴은 1513년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헨리 8세가 투르네에서 기사 작위를 내린 귀족 49명 중 한 명이었다. 같은 해에 왕은 어머니 마거릿 폴에게 조상들이 지녔던 솔즈베리 백작 작위를 그녀 자신의 권리로 부여했다. 마거릿과 그녀의 아들은 이 작위의 소유자들이 이전에 소유했던 땅을 다시 사야 했다. 헨리 폴이 언제부터 몬터규 남작이 되었다는지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지만, 1517년부터 끊임없이 몬터규 경으로 불렸다.

1518년 9월, 헨리 폴은 프랑스 사절을 맞이한 영주 중 한 명이었다. 1520년 금빛 천의 들판에서 헨리 8세를 수행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를 만났고, 그라블린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접견했다. 1513년경 제3대 에버게이브니 남작 조지 네빌의 딸 제인 네빌과 결혼했다. 1521년 4월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때 그도 연루되어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났다. 1522년 카를 5세가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도버에서 캔터베리로 가는 길에서 황제를 알현한 영주들 중 한 명이었다.

1523년 초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1529년 12월 1일 상원 의원에 취임했으며, 이듬해 잉글랜드 귀족들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국왕과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의 결혼 무효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1530년과 1538년 사이에 햄프셔, 서식스, 윌트셔, 서머싯, 도싯 주의 치안판사로 재직했으며, 1532년 10월 프랑수아 1세를 다시 접견하기 위해 왕과 함께 칼레로 갔고, 1534년에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이끄는 의회에 참여했으며, 1535년 4월 "이단자"를 재판하는 특별위원회의 위원이 되었지만 단지 이름만 올렸을 뿐 실제로 활동하지 않았다.

1535년 7월 1일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토머스 모어의 재판에서 판사 중 한 명을 맡았으며, 1536년 5월 앤 불린 재판에서도 판사로 참석해 간통 및 반역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 판결을 내렸다. 1536년 10월 초 링컨셔에서 수도원 폐쇄에 반발한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국왕으로부터 병사 200명을 동원해 반란군을 상대로 진군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가 출진하기도 전에 반란군이 빠르게 토벌되었다. 1537년 10월 15일, 헨리 폴은 에드워드 왕자세례성사에 참석했고, 11월 12일에는 초대 컴벌랜드 백작 헨리 클리퍼드와 함께 제인 시모어 왕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햄튼 코트에서 윈저로 이동하던 메리 공주를 수행했다.

헨리 폴은 이렇듯 헨리 8세에게 순종적인 자세로 일관했지만, 헨리 8세가 시작한 종교 개혁과 수도원의 폐쇄, 교황의 권위 전복을 탐탁지 않게 본 듯하다. 형제 레지널드 폴이 해외로 망명한 뒤 교황청에 의해 추기경으로 발탁된 후 헨리 8세를 거세게 비난했을 때, 그는 다른 가족과 함께 레지널드 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사적인 대화에서는 왕이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동생 레지널드와 함께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고 전해진다. 1538년 초 아내가 사망한 후 정치에 관심을 끊고 영지에서 조용히 지냈다.

1538년 8월 말, 동생 제프리 폴과 그의 전 하인 휴 홀랜드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그 후 제프리 폴은 강도 높은 심문을 받은 끝에 10월 말 형과 어머니 마거릿 폴, 코트니 가문, 그리고 에드워드 네빌 경이 헨리 8세를 페위하고 새 왕을 옹립해서 가톨릭을 복원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진술했다. 또한 제프리 폴은 형 헨리가 어린 시절부터 왕을 싫어했으며, 왕이 아니라 폐위된 뒤 별궁에 유폐되었던 아라곤의 카탈리나를 섬기도록 요청했다고 밝혔다.

1538년 11월 4일, 헨리 폴은 초대 엑서터 후작 헨리 코트니, 어머니 마거릿 폴 등과 함께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다. 그들은 레지널드 폴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레지널드의 행동에 찬성 의사를 표명했고, 왕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내전이 예상된다고 밝힌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무죄를 호소했지만, 귀족 법원은 몬터규 남작과 엑서터 후작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헨리 폴은 12월 2일에, 헨리 코트니는 12월 3일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헨리 코트니는 1538년 12월 9일 참수형에 처해졌고 헨리 폴도 1539년 1월 9일에 참수되었다. 그의 작위와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다가 메리 1세가 즉위한 후에야 두 딸이 재산과 권리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3. 가족

3.1. 아내

  • 제인 네빌(? ~ 1538): 제5대 베르가베니 남작 조지 네빌의 딸.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헌팅던 백작부인 캐서린 헤이스팅스
(Catherine Hastings, Countess of Huntingdon)
1519년 이후 1576년 9월 23일 제2대 헌팅던 백작 프랜시스 헤이스팅스
슬하 6남 5녀
1남 토머스 폴
(Thomas Pole)
1519년 또는 1520년 이후 ? 엘리자베스 윙필드
2남 헨리 폴[4]
(Henry Pole)
1520년 또는 1521년 이후 1542년 9월 이후 마거릿 네빌
2녀 레이디 위니프레드 헤이스팅스
(Lady Winifred Hastings)
1521년 또는 1525년 이후 ? 토머스 헤이스팅스 경[5]
배링턴 홀의 토머스 배링턴 경
슬하 2남 1녀

[1] 리처드 폴의 어머니 이디스 세인트 존이 헨리 7세의 이모(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의 이부언니)였다.[2] 1502 ~ 1535, 서식스주 브로드허스트 영주.[3] 1504 ~ 1570,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의 아들이자 초대 스태퍼드 남작인 헨리 스태퍼드의 부인.[4] 어린 나이에 런던 탑에 감금되었고 결국 거기서 옥사했다.[5] 위에 나오는 언니 캐서린의 남편이자 자신의 형부인 제2대 헌팅던 백작 프랜시스 헤이스팅스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