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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2세 | 제임스 3세 | 제임스 4세 | 제임스 5세 | 메리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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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2세 | 앤 | ||||
}}}}}}}}}}}}}}} |
<colbgcolor=#0065bd><colcolor=#ffffff>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8대 국왕 프랑스 왕국 프랑수아 2세의 왕비 메리 Mary, Queen of Scots | |
| |
1558년-1560년 프랑스 왕비 시절 초상화 | |
이름 | 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 |
출생 | 1542년 12월 8일 |
스코틀랜드 왕국 린리스고 린리스고 궁전 | |
사망 | 1587년 2월 8일 (향년 44세) |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파서링게이 성 | |
신체 | 키 180cm[1] |
재위 | 스코틀랜드 왕국의 여왕 |
1542년 12월 14일 ~ 1567년 7월 24일 | |
배우자 | 프랑수아 2세 (1558년 결혼 / 1560년 사망) |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1565년 결혼 / 1567년 사망) | |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 (1567년 결혼 / 1578년 사망) | |
자녀 | 제임스 6세 & 1세 |
아버지 | 제임스 5세 |
어머니 | 마리 드 기즈 |
종교 | 가톨릭 |
서명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8대 여왕[2]이며 한때 프랑스 왕국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왕비이기도 했다.보통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메리 1세와 구별하기 위해 본명인 '메리 스튜어트'라고 불리지만[3]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으니 공식적으로는 성이 붙지 않는[4] '메리 여왕'이라고 불러야 한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메리 2세와 구별하기 위해 '메리 1세'로 칭할 수도 있다.[5]
2. 문장
|
1200년대 ~ 1558년 (왕실 문장) |
|
1558년[6] |
|
1558년 ~ 1559년[7] |
|
1559년[8] |
|
1559년 ~ 1560년[9] |
|
1560년 ~ 1565년[10] |
|
1565년 ~ 1603년[11] |
3. 생애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메리 여왕(스코틀랜드)/생애#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메리 여왕(스코틀랜드)/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평가
메리 여왕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부터 극단적으로 양분되었다. 스코틀랜드 개신교 설교자 존 녹스는 메리를 "어리석고 게으르며 요염한 프랑스 소녀"라고 경멸적으로 표현하면서 보스웰 백작과 함께 그녀의 남편인 단리 경의 살해를 공모했으며 보스웰 백작과 간통해 파렴치한 결혼을 했으며 그와 함께 많은 자국민과 전쟁을 벌인 사악한 여자라고 규탄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개신교 성향 역사가이자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의 가정교사였던 조지 뷰캐넌은 저서 <메리 여왕의 발견>(Detectio Mariæ Reginæ)에서 그녀의 "부자연스러움, 증오, 야만적인 사나움, 터무니없는 잔혹함"을 비난했다. 뷰캐넌은 메리가 두 번째 남편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음탕하게 즐겼던 마녀였다며 그녀가 단리 경의 시신을 목격했을 때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그녀가 그의 살육으로 마음을 채웠듯이, 그의 시체가 죽는 광경으로 눈을 채워야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반면에, 가톨릭 주교 존 레슬리는 1569년에 <메리의 명예를 옹호하는 변호>를 출간해, 메리를 경건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인으로 묘사했다. 그는 메리가 피에 굶주리고 음탕한 아내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가장 조심스럽고 다정한 어머니"이며, "과거의 경건하고 덕행 있는 삶은 모든 의심을 물리치고 몰아낸다."라고 주장했다. 뷰캐넌과 레슬리 모두 여성 통치의 정당성과 가톨릭 군주제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메리의 서사를 이용했다. 그들이 형성한 메리의 이미지는 이러한 관점에 대한 의견 차이만큼이나 극단적이며, 스코틀랜드 여왕에 대해 그들이 만들어낸 상반된 평판은 정치적 열정의 상징으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유사했다.
이후 메리에 대한 평가는 '뷰캐넌적 관점'과 '레슬리적 관점'으로 양분되었다. 많은 개신교 신자는 메리 여왕을 피에 굶주린 '제2의 이제벨'로 간주한 뷰캐넌에게 동의했고, 많은 가톨릭 신자는 그녀를 예수의 수난에 참여한 성모 마리아처럼 경건한 순교자로 간주했다. 엘리자베스 1세를 받들며 스페인과의 전쟁을 치른 다수의 잉글랜드인은 메리를 "우리의 정당한 여왕을 음해하려 든 사악한 마녀"라고 여겼고, 프랑스 측에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의 왕위를 한때 정당하게 통합한 여인으로 해석했다.
메리에 대한 잉글랜드 진영의 평가는 그녀의 외동아들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 등극한 뒤 더욱 복잡해졌다. 친 스튜어트 왕조 진영에서, 메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가문의 어머니로 추앙받았으며, 훗날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한 뒤 처형된 손자 찰스 1세와 함께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반면, 반 스튜어트 왕조 진영에서는 뷰캐넌의 저서 <메리 여왕의 발견>을 재출간해 스튜어트 왕조를 사악한 마녀의 피를 물려받은 가문으로 몰아붙임으로써 그들에 대한 반란을 정당화했다.
18세기에 스튜어트 왕조가 앤 여왕을 끝으로 단절된 뒤, 메리는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적 '감상주의 문화'에 심취한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웬만한 중산층 영국인 응접실에는 그녀가 사형당하는 장면을 밀랍 인형으로 묘사한 모형이 세워졌으며, 그녀의 삶에 대한 대중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발간되어 널리 읽혔다. 18세기 역사가들은 감정적이고 동일시적인 독서에 새롭게 관심을 두게 된 독자층에 메리에게 감정 이입하도록 부추겼고, 그녀의 틀림없이 슬픈 삶에 대해 새롭고도 감동적인 묘사를 그려냈다. 그리고 여전히 영국 왕위에 제임스 2세의 후손이 등극해야 한다고 믿었던 자코바이트는 메리의 이야기를 통해 스튜어트 왕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영국 국민에게 심어줌으로써, 스튜어트 왕조의 복귀를 이루려고 시도했다.
이 시대에 주목받기 시작한 '영국 여성'이라는 관념도 메리를 논쟁의 중심에 놓았다. 1752년 조지 발라드가 쓴 영국의 "명망 있는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인기 회고록은 메리의 "남편에 대한 엄격한 복종과 지극히 친절한 행동"과 "독특한 온화한 성격과 비할 데 없는 화법"을 보여주는 그녀의 구두 묘사를 그려냈으며, 이외의 여러 저자들도 메리를 새로운 부르주아 여성성의 모델로 취급했다. 그러나 동시에 데이비드 흄과 같은 회의적인 계몽주의 역사가들은 메리를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될 부정적인 여성으로 간주했다.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받은 메리 헤이스와 안나 제임슨 같은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은 메리 여왕에게서 여성적 욕망의 억제되지 않은 발현을 목격했다. 특히 제임슨은 메리를 "진정한 여성적 제국의 관념, 즉 내가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 특권"을 실현한 자유로운 여인으로 추켜세웠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 역사가 아그네스 스트릭랜드는 메리가 가장 경건한 여성 본성의 자선과 본능을 구현했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출간한 메리 여왕 전기는 메리를 빅토리아 시대 '집안의 천사'의 전형으로 묘사했다. 반면에, 스트릭랜드와 마찬가지로 인기 있었던 동시대의 역사가 제임스 앤서니 프루드는 메리를 "냉소적인 능숙함"과 "지속적이고 정교한 계략"으로 가득 찬 "야생 고양이"로 묘사했다. 이 외에도 여러 작가가 메리를 본받아서는 안 될 사악한 악녀로 묘사하거나, 반대로 부당한 모함을 받고 수난을 겪었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여걸로 묘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영국 총리 윌리엄 램은 빅토리아 여왕과 잡담을 나누던 중 메리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많은 백성 사이에서 메리 여왕은 나쁜 여자라는 평판을 받고 있더군요."
빅토리아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를 언제나 불쌍히 여긴다오."
이렇듯 극단적으로 양분되었던 메리 여왕에 대한 평가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좀 더 중립적인 관점을 견지하려는 영국 역사가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안토니아 프레이저(Antonia Fraser, 1932~)는 1969년 작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Mary, Queen of Scots)에서 메리는 여러 장점과 덕목을 지녔지만,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매우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했던 스코틀랜드엔 맞지 않아 불행을 맞이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녀는 메리 여왕이 단리 경 암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으며, 보석함 편지는 위조된 것이며 메리가 쓴 실제 편지와 보스웰 백작의 정부 중 한 명이 쓴 연애편지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추정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역사가 고든 도널드슨(Gordon Donaldson, 1913 ~ 1993)은 1974년작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에서 메리가 많은 장단점을 동시에 공유했던, 불행한 인생을 산 여인이라며 중립적으로 평가했다. 제니 워멀드(Jenny Wormald, 1942 ~ 2015)는 메리가 자신에게 가해진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계략을 꾸미는 귀족들의 꼭두각시로 취급당한 비극적인 실패자였다고 결론지었다.
현재 많은 학자는 메리 여왕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군주로서의 기본적인 역량이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녀는 지적이고, 재치가 뛰어났고,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지지자들과 친구들에게 충실했다. 윌리엄 메이틀랜드는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온 지 6개월 만에 잉글랜드 재상 윌리엄 세실에게 아래와 같은 서신을 보냈다.
"여왕께서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요구하는 모든 일에 매우 온화하게 처신하십니다. 만약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그 잘못은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메리 여왕이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귀환했을 때, 많은 가톨릭 신자는 그녀가 개신교 국가가 되어버린 스코틀랜드를 가톨릭으로 되돌려줄 거라고 희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개신교 영주들을 제압하기엔 군사력이 부족하고 지지 세력도 열악한 현실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의회의 종교 개혁 정책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추밀원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개신교로 개종하고 미사드리지 말라는 요구는 거절하고 자기 궁정에서 미사드리는 걸 의회로부터 인정받았으며, 가톨릭에 대한 억압 정책을 추진하려는 의회를 제지함으로써, 스코틀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의 마음도 얻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그녀의 타협 정책은 어머니 마리 드 기즈의 개신교 용인 정책을 본받았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이를 관철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기보다는 엘리자베스 1세와 협상을 통해 합의를 이루려 했다.
또한 메리는 16세기의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이게도 매우 과감하고 용감했다. 단리 경을 남편감으로 정하자마자 주위 신하들과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확정 지었으며, 이에 반발한 모레이 백작이 반란을 일으키자 곧바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한 뒤 앞장서서 진군해 반란을 진압하고, 모레이 백작이 잉글랜드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총애하는 음악가였던 다비드 리치오가 암살당하고 본인도 암살자들에게 억류되었을 때, 그녀는 이에 절망하지 않고 암살자들과 함께했던 단리 경을 설득해 궁궐을 함께 빠져나온 뒤, 임신 중인 상태에서도 진압군을 편성하고 에든버러로 귀환해 암살자들을 잉글랜드로 내쫓았다. 또한 폐위된 후 로클레번 성에 감금되었을 때도 절망하지 않고 탈출할 기회를 노리다가 1년 만에 극적으로 탈옥한 뒤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복위를 시도했다.
그러나 메리 여왕에게는 상대방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부족했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경솔하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다. 신하들과 엘리자베스 1세의 의견에 좌우되지 않고 재혼할 상대를 과감하게 정한 것 자체는 좋았지만 불행히도 그녀가 모든 반발을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한 두 번째 남편 단리 경은 폭력적이고 거만하며 매음굴을 드나들고 메리를 협박해 왕으로 등극하려 든 여왕의 남편으로서 여러모로 부적합한 인간이었다. 만약 메리가 결혼을 무작정 감행하지 않고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됨됨이가 어떤지 차분하게 살펴봤더라면, 진작에 단리 경의 사람됨을 파악해서 결혼 계획을 취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리는 깊은 호감을 느낀 단리 경을 남편으로 얼른 맞이하려고 서둘렀고 그 결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그 후 메리는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는 보스웰 백작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고 그가 외동아들 제임스의 세례식을 단리 경 대신 주관하도록 허락하는 등 각별히 대했다. 사실 보스웰 백작은 노르웨이의 저명한 제독이자 사략선 해적이었고 당시 덴마크 주재 노르웨이 대사였던 크리스토퍼 트론센의 장녀 안나 트론센과 교제해 1560년경 약혼했지만 지참금을 받아놓고 떠나버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메리는 단리 경 때처럼 보스웰 백작의 됨됨이를 확실하게 파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그를 따뜻하게 대하듯이 그 역시 자신을 각별하게 여길 거라고 믿었다.
메리 여왕이 단리 경 암살 사건을 공모했는지는 불확실하며 많은 현대 학자는 메리가 공모했다는 이야기는 별다른 증거가 없는 가정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그런 학자들도 메리가 사건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일을 키우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그녀가 단리 경 암살에 공모했다는 소문이 에든버러 시내에 공공연히 나돌았고 급기야 그녀를 매춘부의 상징인 인어로 묘사하며, 보스웰 백작과 간통하고 있다는 플래카드가 돌아다니는 형국이었음에도 메리는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방관했다. 또한 단리 경 암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해서 보스웰 백작과의 관계에 대한 의문점을 깔끔하게 해소하라는 주변인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보스웰 백작을 정식 재판이 아닌 추밀원에서 열린 심리에 참석시켜서 무죄 판결을 받도록 하면서 재판이 지나치게 졸속으로 치러졌다는 불신을 받았다. 이러한 행태로 보스웰 백작의 단리 경 암살 혐의는 무죄가 되긴 커녕 사실로 굳어졌고 메리 역시 그와 공모했다는 혐의가 더욱 확실해졌다. 심지어 이런 보스웰 백작에 대한 노골적인 비호로 단리 경의 아버지이자 시아버지였던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부터 스코틀랜드 내 저명한 귀족들 대부분을 적으로 돌려버린 건 덤.
가장 큰 실책은 보스웰 백작이 던바 성으로 자신을 끌고 갈 때 순순히 응했고 그의 요구에 따라 결혼해 버린 것이다. 일각에서는 메리 여왕이 보스웰 백작에게 강간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메리 여왕 본인부터가 강간당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을 지켜주고 싶으니 결혼하자는 보스웰 백작의 꼬드김에 넘어가 상호 합의로 성관계를 가지고 결혼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보스웰 백작을 여왕의 남편을 살해하고, 여왕을 납치한 뒤 결혼해 버린 천인공노할 인간으로 간주했고, 메리 여왕 역시 그와 야합하여 남편 살해를 공모한 후 얼마 안 가서 결혼해 버린 방탕한 여자로 낙인찍혔다. 보스웰 백작이 메리와의 결혼을 통해 권력을 독차지할 것을 우려한 귀족들은 이런 민심을 등에 업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메리는 폐위되었다.
그 후 로클레번 성에 감금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뒤 아들 제임스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을 맡은 이복오빠 모레이 백작에 맞섰지만, 랭사이드 전투에서 참패한 후 메리는 오촌 고모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이 왕위를 되찾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이미 메리 여왕은 프랑스에 살던 시절부터 전 시아버지 앙리 2세의 부추김으로 자신을 적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선언하였으며, 이후로도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과 왕위주장을 포기하는 에든버러 조약의 인준을 거부하며 여러 차례 엘리자베스 1세의 정통성에 반기를 들었다. 이렇게 여러 번 심기를 건드렸는데 엘리자베스 1세가 단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도와줄 거라 믿었던 것부터가 매우 안일한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메리 여왕이 잉글랜드로 망명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환영하긴 커녕 단리 경 암살 사건과 메리 여왕의 폐위 과정을 조사하겠다며 위원회를 열도록 한 뒤 보석함 편지 등을 비롯해, 메리 여왕이 '폐위되어야 할 이유를 입증할 증거'를 수집한 후 어느 쪽에도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고 위원회를 끝낸 뒤 제임스 6세 정부를 그대로 인정하고 메리를 억류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도움마저 받을 수 없게 된 메리는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복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건 물론 아예 신병마저 엘리자베스 1세에게 구속되어 그로부터 장장 18년간 억류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제 최대 정적의 손아귀에 놓인 상황이었지만 군주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에게 굴복하는 걸 끝까지 거부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를 몰아내고 자기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가톨릭 세력의 음모에 여러 번 관여했고 엘리자베스가 제시한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내 가톨릭 박해는 가속화되었고 메리 또한 엘리자베스 1세의 불신을 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대우가 열악해졌고 감시는 심해졌다. 그러나 메리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서 외부와 비밀리에 서신 왕래를 이어가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런 메리 여왕을 눈엣가시로 여겼지만 그녀를 처단한 뒤의 후폭풍을 염려해 18년간 쭉 억류하기만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측근들은 계속 메리를 내버려두면 국내에 잔존한 가톨릭 세력이 그녀를 옹립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계속 반란을 도모할 테니 정권의 안정화를 위해서라도 메리를 기필코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메리는 프랜시스 월싱엄 등이 교묘하게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 배빙턴 음모에 가담했고 명백한 반역자로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제 메리의 사형을 집행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엘리자베스는 이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교묘한 술수를 부렸다. 그녀는 사형 영장에 서명해 추밀원 의원 윌리엄 데이비슨에게 넘기면서도 이 영장을 당장 내려보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놓은 뒤, 윌리엄 세실 등이 사형을 감행하는 걸 방관했다. 그다음에는 자기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일을 벌였다며 분노하고 데이비스를 런던 탑에 가뒀다가 나중에 풀어주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신하들이 멋대로 처리해 버렸다."라고 변명할 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형을 받게 된 메리는 죽음을 앞두고 끝까지 결연한 태도를 유지했고, 순교자로 자처해 잉글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렇듯 죽을 때까지 실책만을 거듭하며 굴복하지 않은 메리에 대해 엘리자베스 1세는 훗날 이렇게 평가했다.
“The daughter of debate, that eke discord doth sow.”
"불화의 씨를 뿌리는 논쟁의 딸이다."
"불화의 씨를 뿌리는 논쟁의 딸이다."
4.1. 대중의 시각
오늘날에는 '비운의 미녀 군주'로 재조명되면서 각종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다루어졌다.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가 평전을 쓰면서 메리를 호의적으로 비평한 것이 유명하다. 이에 일각에서는 당시 스코틀랜드는 고유의 개신교 교파인 장로회의 큰 기틀이 마련되고 중세 후기부터 지속된 귀족, 도시민, 성직자의 삼각 과두정 체제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박은 중요한 시기를 맞이했는데, 메리 여왕의 극적인 개인사와 여성성만 부각되어 정작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이 묻혀 버렸다며 비판한다.메리가 대중적으로 주목받은 이유는,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시시콜콜한 신학적, 정치적, 이념적 문제보다 미녀 여왕의 사랑 이야기와 비극적인 삶이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또한 녹스, 뷰캐넌, 멜빌 같은 동시대 스코틀랜드 역사를 주름잡은 종교개혁의 거두들이 하나같이 다혈질에 꽉 막힌 꼰대들인데다가 심지어 뷰캐넌 같은 경우, 알코올 의존증에 폭력쟁이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중요성과 별도로 인간적인 매력이 별로 없다.[12] 당대 최고의 라틴어 문장가이자 존 녹스를 이어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종교개혁 이후 근세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민족주의 이념마저 창시한 것으로 평가되는 16세기 스코틀랜드 최고의 학자인 조지 뷰캐넌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좀 비싼 감옥의 죄수나 마찬가지였던 어린 제임스 6세의 개인 교사를 했다. 하지만 뷰캐넌은 어린 왕이 학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면 때리기까지 했는데 이 밑에서 배운 제임스 6세, 훗날 잉글랜드의 왕이 된 제임스 1세는 뷰캐넌이 죽은 지 한참이 지나고 자신 역시 노년이 된 뒤에도 라틴어 문장을 똑바로 못 외웠다고 만취한 뷰캐넌에게 흠씬 두드려 맞는 악몽을 꾼다고 호소했다. 왕실 자문회의 기록에 따르자면 이때 뷰캐넌이 제임스 6세를 두들겨 패는 꼴을 보다 못한 그의 시녀 중 하나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국왕을 이렇게 두들겨 패선 안된다고 항의하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던 뷰캐넌이 침 뱉듯 던진 말은 아래와 같다.
그리고 젠더 담론이 역사적인 평가와 기억에도 큰 평가를 미치게 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스코틀랜드 장로교 개혁자가 지지한 존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은 현대의 성평등적인 가치관과 노골적으로 충돌하는 탓에 대중적인 인기가 떨어진다. 《여군주 폭군론》의 원제를 직역하자면 《여자들의 극악무도한 정권에 맞선 첫 번째 나팔 소리》이다. 당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망명 및 유학 중이던 존 녹스가 1558년에 쓴 저서인데 이 책에서 존 녹스는 《성경》을 들어서,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천륜을 뒤집는 행위이니 여왕을 갈아 엎고 남자만 왕위 계승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이 출간된 1558년 당시에는 아주 공교롭게도 왕호까지 똑같은 잉글랜드 왕국의 메리 1세와 스코틀랜드 왕국의 메리 여왕이라는[15] 독실한 가톨릭 교도 여왕 2명이 각각 이웃 나라에서 재위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 명의 메리 여왕들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과 동시에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한창 신나게 조지고 있다 보니, 당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개신교 종교개혁가였던 존 녹스가 보기에는
"이 두 메리라는 이단 가톨릭 광신도 미친 여왕년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을 봐라! 역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책이 출간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교도 여왕인 메리 1세가 승하하고, 같은 개신교도에 명군인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존 녹스는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존 녹스는 자신의 책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같은 나쁜 가톨릭 여왕들만 상대로 한 것이지, 엘리자베스 1세 같은 참된 개신교 여왕을 향한 게 아니라고 땀 한 바가지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을 했다. 당연히 엘리자베스 1세는 '여군주'로써 개신교 이전에 왕권을 능멸한 존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에 대해 노발대발했고, 존 녹스를 잉글랜드에서 영구 추방하면서 그의 저서인 《여군주 폭군론》을 금서로 지정했다. 이걸로도 모자라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내의 존 녹스를 추종하던 청교도들과 그의 제자들을 숙청하고, 심지어는 당시 장 칼뱅이 신권 정치로 통치하고 있었던 제네바가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의 출간을 허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교를 단절하고, 칼뱅을 맹렬하게 비난했다.[16] 잉글랜드의 성공회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는 일단 같은 개신교로서 가톨릭 교도들에게 대항하여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논리로 전략적으로 협조했으나, 종교적 순수성보다 실리적인 왕실의 권위 확립이 더 큰 우선 순위였던 성공회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왕도 멋대로 갈아 치우고, 가치관도 반세속주의적이며, 왕권과 세속 정부에 대한 교권의 우월함을 주장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매파들을 상당히 고깝게 보았다.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장로교회와 영국식 칼뱅주의의 아버지인 존 녹스는 심각한 여성 혐오자였고, 장로교 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끌어올린 조지 뷰캐넌은 알코올 중독 폭력 교사였다. 녹스와 뷰캐넌의 학풍을 이어받아 '언약도 혁명'까지 1~2세대 장로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던 앤드류 멜빌도 광신적인 반세속정부주의자였다. 거기다가 2세대 교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아치볼드 존스턴, 알렉산더 핸더슨같은 언약도 혁명의 지도자들은 신의 왕국을 현세에 구현하겠답시고, 자식은 많이 낳아놓은 채 양육은 한 번도 책임지지 않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가장들이였다. 심지어 존스턴과 핸더슨은 자신들이 에딘버러 성에서 혁명 정부를 이끌 동안, 버림받은 처자식들은 빚쟁이들에게 구걸하게 만들었던 막장 인성의 소유자들이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평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 기준으론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일 뿐만 아니라 칼뱅주의 특유의 도덕관념 때문에 상술한 16세기 후반~17세기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은 일기나 자서전도 많이 썼고, 내용도 신 앞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이라도 지키는 양 성생활이나 가정 생활 같은 상당히 은밀한 개인적 내용들도 많이 적어 놓았기 때문에 깔 거리 발굴도 쉬운 편이다. 예로 들면 《언약도 혁명 선언문》의 저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아치볼드 존스턴만 하더라도 자기 일기에서 20살 때 14살짜리 곰보 자국이 흉했던 여아와 결혼하여, 처음엔 곰보 흉터를 흉해했으나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이 너무 아름다워 거기 반해 결혼 생활 내내 기도와 섹스만 반복하다가 겨우 1년 뒤 자기 생각엔 섹스를 너무 많이 해 어린 처를 병 걸려 죽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성욕을 주체 못 해 겨우 1년 뒤 중매로 다시 결혼했다는 내용을 대놓고 써 놓았으니 현대인들은 메리 스튜어트 여왕에 대한 비판의 주 출처인 스코틀랜드 칼뱅파 장로교 종교개혁가들이 긍정적으로 보일 리가 없고 그 반대 급부로 메리 여왕은 오히려 더욱 긍정적으로, 낭만적으로 부각된 것이다.
정치 역사적 관점에서도 현대 스코틀랜드 국민당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가 다시 부흥하고 있긴 하지만, 막상 유럽 전역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알파 버전이라 할 만한 16~17세기의 민족 관념 형성을 주도한 로우랜드 개신교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정치 계파상으로 보면 대부분 17세기 후반, 18세기에 친영 통합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로 반잉글랜드 감정을 자양분으로 삼는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와 달리, 이 당시 16~17세기 로우랜드 스코틀랜드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은 잉글랜드가 아니라 자국 내 하이랜드, 서부 제도 가톨릭 게일어권 클랜들을 가장 큰 주적으로 보고 적대했다. 이들을 근현대적인 관점에서 '친잉글랜드 매국노'로 비하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문화적인 성향이 외부적으로 더 잘 알려지고 더 확실하며, 독특한 나머지 잉글랜드와 차별화되는 게일어 하이랜드 문화를 강조하는 성향이 더 강하고,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이념은 사회민주주의적인 성향에 20세기 중후반의 반제국주의적인 제3세계 민족주의 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17] 따라서 이 시기 로우랜드 개신교 지식인들의 핵심적인 사상적 요소였던 칼뱅주의 자체가 범세계적으론 주로 영미 경제문화적 엘리트 기득권과 관련된 인상이 강한지라 막상 역사적인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발흥은 언약파 칼뱅주의 민족주의자들을 떼어놓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종교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성향이 강하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현대 스코틀랜드 독립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의 역사 인식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메리 스튜어트에 반대한 로우랜드 스코틀랜드 엘리트들은 현대 사회 정치적인 문맥에 따른 재평가나 재발굴이 하나도 없었다.
5. 가족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Mary, Queen of Scots) | <colbgcolor=#fff3e4,#331c00> 제임스 5세 (James V) | <colbgcolor=#ffffe4,#323300> 제임스 4세 (James IV) | |
제임스 3세 (James III) | |||
덴마크의 마르그레테[18] (Margaret of Denmark) | |||
잉글랜드의 마거릿 (Margaret of England) | |||
헨리 7세 (Henry VII) | |||
요크의 엘리자베스[19] (Elizabeth of York) | |||
마리 드 기즈 (Marie de Guise) | |||
기즈 공작 클로드 (Claude, duc de Guise) | |||
로렌 공작 르네 2세 (René II, duc de Lorraine) | |||
헬러의 필리파 (Filippa van Gelre) | |||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 (Antointte de Bourbon) | |||
방돔 백작 프랑수아 (François, Comté de Vendôme) | |||
룩셈부르크의 마리 (Marie de Luxembourg) |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 ||||
1남 | 제임스 6세 & 1세 (James VI & I) | 1566년 6월 19일 | 1625년 3월 27일 | 덴마크의 아나 슬하 3남 4녀[20] |
6. 기타
당대의 미인들 중 한 명이었다고 전해지며 특징으로 모후인 마리 드 기즈의 장신을 물려받아[21] 키가 180cm가 넘었다고 한다. 현대 기준으로도 180cm 이상의 여성은 모델 급의 엄청난 장신으로 취급받는데, 평균 신장이 훨씬 낮은 시기였으니 메리는 당대의 남자들보다도 훨씬 더 큰 거인 수준이었을 것이다.일생의 라이벌이였던 잉글랜드 왕국의 엘리자베스 1세도 175cm에 달하는 남자보다 큰 장신이었고, 본인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22] 당연히 메리가 더 컸다. 야사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1세는 어느 날 스코틀랜드 대사 앞에서 잉글랜드의 위엄을 한껏 뽐냈고, 이에 스코틀랜드 대사도 관례대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적당히 장단을 맞춰줬다. 그러던 중 양국 여왕들의 키 이야기가 나오자 대사는 이번엔 단호히
"저희 여왕께서 더 크십니다."
라고 얘기했고,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나보다 더 크다니 대체 얼마나 큰 키냐며 놀랐다고.옥중에서 주로 암호문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해독되지 않은 편지가 2023년에 해독되어 공개되었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죠죠의 기묘한 모험》 Part 1 <팬텀블러드>에는 생전에 메리를 섬겼다는 가상의 기사 타커스와 브루포드가 등장한다. 여기서의 메리는 아름답고 자애로운 성격을 가진 여왕으로 타커스와 브루포드를 마치 어머니처럼 감싸주었다고 하며, 남편인 단리 경을 암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위의 실존인물 항목과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미화가 된 편이다. 한편 메리와 대립하는 입장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완전 악녀처럼 묘사된다.
-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매게체 중에서 오페라로는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대표적이다.[23] 이 오페라는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24] 중의 하나로 역사적 사실보다는 《돈 카를로스》[25]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쓰여진 각본이지만, 음악은 벨칸토 오페라답게 아름답다는 호평이 대부분이며, 실제 역사에서 전혀 만나지도 않았던[26]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서로 만나서 신경전을 벌이는 부분[27]은 이 오페라 최고의 명장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엘리자베스 1세와 펠리페 2세의 대결을 그린 2007년도 영화 <골든 에이지>에서 사만다 모튼이 연기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벌어졌던 칼레 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없으면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실 흥행에 실패한 원인도 이것 때문인데, 배경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보면 상당한 명작이다. 초반부터 엘리자베스 1세(케이트 블란쳇 분)의 명령에 의해 포더링헤이 성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로 나온다. 엘리자베스를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꾸리고, 스페인과도 연결 루트를 구축해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할 음모를 꾸미지만, 여왕의 충신인 프랜시스 월싱엄(제프리 러쉬 분)이 뒷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여왕이 감사성찬례를 드리러 행차하는 날 암살을 기도한다. 그런데 이 암살단의 단주가 미쳤는지 자객의 총에서 총알을 빼두는 바람에 암살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하는데[28][29] 음모자들은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당한다. 당연히 메리도 무사할 수 없었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고 목이 잘렸다.
- 미국 The CW 채널에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메리 스튜어트가 주인공인 드라마 <레인>(Reign)을 방영했다. 진지한 역사물은 절대 아니고, 10대 청소년~20대 초반까지가 타깃인 방송사의 성격답게 하이틴 드라마 스타일의 시리즈이다. 잘생긴 배우들이 예쁜 의상을 입고 나와 벌이는 막장 드라마 보는 맛에 보면 된다. 막장이라고는 해도 하이틴물 정도 수위라 무슨 대단한 노출이나 정사 장면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지만, 역사 인물이 주인공이면서 역사적 정확성 따윈 집어던진 스토리 전개는 충분히 막장이다. 아무리 역사 왜곡을 하더라도 명색이 사극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의상이나 소품 같은 물질적 고증 정도는 맞춰주는데, 이 작품은 그것도 없다. 적당히 개조된 고전'풍' 드레스[30]에 여자들 신발은 대놓고 현대식 하이힐이고, 메리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프랑스 궁정의 무도회에 뛰어들어 무슨 클럽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놓지만 동서고금 막론하고 비정한 궁정 암투는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그래도 메리 스튜어트 역을 맡은 호주 배우 애들레이드 케인의 연기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실제 메리 스튜어트는 적발이었으나 애들레이드 케인은 흑발에 흑안의 소유자로 외모만 따지면 메리 스튜어트보단 앤 불린과 유사한 점이 더 많아보인다.
- 2018년 12월 7일에 시얼샤 로넌, 마고 로비 등을 주연으로 하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가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와 서로를 자매로 여기나 정치적인 까닭으로 대적하는 입장에 선다. 또한 아들 제임스를 매우 아끼며, 아들과 헤어진 이유도 적대 세력의 계략인 것으로 나온다. 또한 사랑하는 이복오빠의 이름인 '제임스'를 자기 아들인 왕자의 이름으로 붙여주었으나, 이후 그 오빠에게 배신당하자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끝내 스코틀랜드의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고 잉글랜드로 망명하지만, 그곳에서도 정치적 관계로 인해 실제 역사대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처형당한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 A급 교역 특화 항해사로 등장했다. 영입할 수 있는 항구는 에든버러, 낭트인데 등장 확률이 손에 꼽을 정도로 낮은지라 많은 유저들이 고통받는 중. 준수한 외모와 보이스를 가졌고 교역 스탯중 선호도가 높은 판매 전략 스탯이 높지만 직업이 방적상인 관계로 직물 관련 스킬이 많아 스킬 부분이 아쉽다는 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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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잉글랜드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의 평균 키조차도 크게 앞선 굉장한 장신이었다.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키. 모후인 마리 드 기즈도 딸만큼은 아니지만 키가 매우 컸다고 한다.[2] 스코틀랜드 왕국에서는 두 번째 여왕이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첫 번째 여왕은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였다.[3] 그러나 본명으로 불러도 직계 후손이자 이름까지 똑같은 '메리 스튜어트'인 메리 2세와 헷갈리게 된다.[4] 유럽 문화권에서 왕실 인사를 부를 때 일부러 성씨를 붙이는 것은 왕실이나 왕족의 정통성이나 적법성을 부정하겠다는 의미다. 일례로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은 루이 16세를 왕족이 아닌 평범한 시민으로 여긴다는 의미를 담아 '루이 카페'라고 불렀다.[5] 다만 영국 왕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명칭에다가 따로 '1세'를 표기하지 않았다.#[6] 메리 여왕이 프랑스 도팽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하며 프랑스 도팽 상징 추가.[7] 왼쪽 절반에 스코틀랜드 문장을 넣어 만든 프랑수아 2세의 스코틀랜드 국서 문장 추가.[8] 메리 여왕의 잉글랜드 왕위 주장으로 잉글랜드의 상징 추가.지저분하다[9] 프랑수아 2세의 프랑스 국왕 즉위로 만들어진 프랑스 왕비 문장.[10] 프랑수아 2세의 사망으로 만들어진 프랑스 왕대비 문장.[11]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하여 원래의 문장으로 복귀. 유니콘을 방패잡이로 삼은 대형 문장 제정.[12] 특히 뷰캐넌은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이었다.[13] 이 때문에 제임스 1세는 뷰캐넌을 매우 싫어했고, 뷰캐넌은 이 일로 직위 해제되어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제임스 1세는 뷰캐넌의 능력은 높이 사서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뷰캐넌은 장관이 되었을 때도 제임스 1세와의 관계가 좋지 못해 얼마 못 가 해임되었다. 그래도 제임스 1세가 다른 관직을 주는 배려는 해주었다.[14] 제임스 1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뷰캐넌에게 배운 것이 엄청나게 많다고 인정은 했다. 성년이 될수록 왕권을 명백하게 종교적 권위 아래에 두는 장로회의 과격성을 배격하고, 영국 국교회 고교회파의 국왕 중심적이며 신학적인 온건성을 추구했던 건,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장로회 지도부에 대한 염증도 상당히 컸으리라고 추측된다.[15] 심지어 가톨릭에서 '메리'라는 이름은 개신교도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성모 신심을 나타내기도 한다.[16]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조선 정조때 윤구종이라는 자가 경종의 단의왕후가 묻힌 의릉에서 말을 타다 의릉 부근에 오자 원래 의릉에 올때 말에서 내리고 절을 해야하는데 윤구종은"이 무덤에서도 말에서 내려야 하나?하는 발언을 하여 국문을 시행하였는데 경종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자백했는데 이에 정조가 분노하여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 수 있냐?"라면서 "이게 무슨 흉악한 발언이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말을 할 수 있는가?"라며 경악하였고 조정 대신들도 이에 동조했다. 아무리 선대왕과 정치 성향이나 종교 성향이 다르고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었어도 선대왕을 모욕하는 건 왕실을 모욕하는 것이였다. 영조와 경종이 애증의 관계였어도 경종이 끝까지 영조를 보호하여 왕위를 물려주었듯이 엘리자베스 1세 또한 이복언니인 메리 1세와는 애증의 관계로 정치 성향과 종교 성향이 달랐어도 마지막에 자신을 보호해주고 왕위를 물려준 이복언니를 모욕한 존 녹스를 괘씸하게 여겼을 것이다.[17] 당시 로우랜드 언약파 스코틀랜드 지도부의 방침은 이제 같은 개신교를 믿게 되었으니 스코틀랜드를 단순히 잉글랜드에게 여 드십쇼 하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잉글랜드의 개신교는 짭개신교 국교회니깐 진짜 칼뱅주의적 종교개혁을 겪은 스코틀랜드가 주도하는 형태의 영국 통합을 추구했고, 훗날 1707년 양국 통합 때도 독립된 사법권을 강하게 주장하며 결국 관철해냈듯이 스코틀랜드 민족 의식이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근세적인 관점에서 국가 자체는 잉글랜드와 공유해도 여전히 그 안에서 독립적인 스코틀랜드적 정체성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연히 이런 섬세한 역사적 평가는 대중 담론의 차원에선 순식간에 지워지고 무시되기 일쑤이다.[18] 크리스티안 1세의 고명딸이다.[19]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이다.[20] 보헤미아의 왕비 알주베타, 찰스 1세 등.[21] 마리는 5피트 11인치(180cm)가 넘는 장신의 여성이었다.[22] 현대에도 키가 큰 것이 작은 것보다는 낫다는 인식이 강한데 당시에도 관념상 큰 키는 곧 그 사람의 위엄과 직결되었다. 군주가 키가 크다는 건 그만큼 위풍당당하다는 뜻이었으므로.[23]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는 메리 스튜어트의 이탈리아어 발음이다.[24] 앤 불린의 이야기를 그린 <안나 볼레나>, 메리 스튜어트의 마지막을 그린 <마리아 스투아르다>, 엘리자베스 1세의 내연남 에식스 백작이 처형되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로베르토 데브뢰>를 통틀어서 여왕 3부작이라고 부른다. 앤 불린은 여왕이 아니지만, 영어로 왕비와 여왕은 "Queen"이라 쓰는 것이 맞으니까.[25] 주세페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 <돈 카를로>가 바로 쉴러의 원작을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다.[26] 많은 매개체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만, 이는 가상이다. 둘은 생애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다만,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의 사형집행서에 사인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27] 이 장면은 원작자 쉴러의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28] 사실 이 사건은 펠리페 2세가 유도하지 않았는가 하는 해석이 있다. 펠리페가 잉글랜드를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가 가톨릭 여왕 메리를 처형한다'는 상황을 만들려 했고, 그러려면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죽일 상황도 만들어야 하니까 '메리의 파벌이 엘리자베스를 암살하려 시도하고 실패'하도록 유도했다는 해석이다.[29] 자객을 맡은 배우가 이때는 별 인지도는 없었으나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지도도 있고 품절남인 에디 레드메인이다.[30] 이 중 메리 스튜어트가 입었던 드레스 중에는 아예 패션쇼 컬렉션이 출품되었던 드레스까지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