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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4대 국왕 제임스 2세 James II | |
| |
17세기 상상화 | |
왕호 | 제임스 2세 (James II) |
출생 | 1430년 10월 16일 |
스코틀랜드 왕국 홀리루드 사원 | |
사망 | 1460년 8월 3일 (향년 29세) |
스코틀랜드 왕국 록스버러셔 록스버러 성 | |
재위 |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
1437년 2월 21일 ~ 1460년 8월 3일 | |
배우자 | 헬러의 마리아 (1449년 결혼) |
자녀 | 제임스 3세, 메리, 알렉산더, 데이비드, 존, 마거릿 |
아버지 | 제임스 1세 |
어머니 | 조앤 보퍼트 |
형제 | 마거릿, 이사벨라, 엘리노어, 메리, 조앤, 알렉산더, 아나벨라 |
1. 개요
<colbgcolor=#0065bd><colcolor=#ffffff> | |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
중세 스코트어: Iames II
영어 & 스코트어: James II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4대 왕이다. 부왕과 같이 후손 중에 동명이인이 있다.
2. 생애
1430년 10월 16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홀리루드 사원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와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의 딸 조앤 보퍼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쌍둥이 형제 알렉산더가 있었는데, 1년만에 사망했다. 그래서 그는 제임스 1세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고, 로스세이 공작 칭호를 받으면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1437년 2월 20일, 아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 킨포트의 로버트 그레이엄, 로버트와 크리스토퍼 챔버스 형제 등 공모자 30여 인이 퍼스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 머물던 제임스 1세를 습격해 살해했다. 이때 조앤 보퍼트도 피습을 당해 부상을 입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당시 6살이었던 제임스 왕자와 함께 탈출했다. 그 후 조앤 보퍼트의 지지자인 앵거스 백작 모레이와 윌리엄 크라이튼이 사병대를 동원해 조앤에 가세했고, 아솔 백작도 이에 맞서 군대를 동원했다. 양자는 3월 첫째주까지 팽팽하게 대치했고, 교황 특사 우르바노 주교는 평화를 맺을 것을 촉구했지만 무시당했다.
3월 7일, 조앤 왕비는 참혹하게 살해된 남편의 유해를 퍼스 시민들에게 공개해, 반역자 세력에 저항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시민들이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전의를 상실한 아솔 백작의 사병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월터 스튜어트는 앵거스 백작에게 생포된 뒤 에든버러의 톨부스 성에 갇혔고, 그곳에서 재판을 받은 뒤 1437년 3월 26일 처형되었다. 이후 암살자들의 지도자인 로버트 그레이엄도 체포되어 스털링 성에서 열린 의회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뒤 4월 9일 처형되었다.
제임스 2세는 1437년 3월 25일 홀리루드 수도원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이후 어머니가 섭정을 맡았지만, 1437년 6월 퍼스에서 소집된 의회가 잉글랜드 출신인 그녀를 더 이상 섭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제5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섭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파벌간의 갈등이 촉발되었다. 귀족들은 제임스 1세가 생전에 가져갔던 영지를 도로 차지하려 했고, 최고 권력을 둘러싼 정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때로는 서로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1439년, 섭정을 맡던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사망했다. 그 후 섭정 직위는 공석이 되었고, 정치 권력은 스코틀랜드 대법관 윌리엄 크라이튼과 스털링 성 보안관으로서 어린 국왕을 데리고있던 칼렌더의 알렉산더 리빙스턴 경이 공유했다. 1439년 8월 3일, 리빙스턴은 조앤 보버트 왕비와 그녀의 새 남편인 론의 기사 제임스 스튜어트를 가택 연금에 처했다. 두 사람은 압력을 받은 끝에 제임스 2세를 리빙스턴 가문의 보호 아래 두는 공식 협정을 맺었고, 조앤 왕비는 제임스 2세의 생계를 위해 지참금을 포기하기로 했으며, 리빙스턴이 왕의 안전을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걸 인정하고 난 뒤에야 풀려났다.
1440년 11월 24일, 윌리엄 크라이튼과 알렉산더 리빙스턴은 제6대 더글러스 백작이며 당시 16살이었던 윌리엄 더글러스와 동생 데이비드를 애든버러 성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저녁 식사 도중에 돌연 체포되었고, 반역을 꾸민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10살이었던 제임스 2세는 손님으로 찾아온 그들을 죽이는 건 있을 수 없다며, 그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크라이튼과 리빙스턴은 왕의 요청을 묵살하고 에든버러 성 마당에서 두 더글러스를 참수했다. 사흘 후에는 두 더글러스의 추종자였던 컴버놀드의 맬컴 플레밍도 참수되었다. 그 후 더글러스 백작령은 윌리엄 더글러스의 삼촌인 에이번데일 영주 제임스 더글러스가 제7대 더글러스 백작으로서 물려받았다. 이 때문에 에이번데일 영주 역시 두 조카를 살해하는 데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444년, 리빙스턴 가문은 제7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 동맹을 맺고 모든 경쟁자를 배제해 왕실 행정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1448년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1449년 잉글랜드군이 로디언을 침공해 약탈을 자행하자, 스코틀랜드군은 앨른윅 요새를 점력하고 파괴했다. 1448년 12월 31일,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군사 동맹이 재현되었고,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섬기는 스코틀랜드 근위대가 파견되어 노르망디 공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449년에 부르고뉴 와 무역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 이 조약에 따라 스코틀랜드 상인들은 당시 부르고뉴 가문에 속했던 플란데런 백국에서 자유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려가 있었다. 스코틀랜드와 부르고뉴의 화해는 1449년 7월 3일 제임스 2세와 헬러 공작 아놀드 폰 에그몬트의 딸이자 선량공 필리프의 조카인 헬러의 마리아의 결혼으로 성립되었다.
제임스 2세는 마리아와 결혼하 뒤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되어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정국을 농단하던 리빙스턴 가문을 끝장내기 위해 더글러스 가문과 손잡았다. 1450년 초, 리빙스턴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행정직에서 해임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로버트 리빙스턴은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그 후 10년간의 무정부 상태로 혼란스러운 국가 행정을 바로잡고 비어가는 국고를 채우려 했다. 여기에 결혼 계약에 따라 마리아에게 제공해야 할 연간 5,000 파운드를 마련해야 했는데, 왕실 직할지에서 얻는 수입은 충분하지 않았다. 반면에, 제8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는 매우 화려한 궁전을 세우고 호화롭게 살았다. 이에 제임스 2세는 더글러스 영지를 뺴앗고 그들의 부를 가로채기로 마음먹었다.
1451년 윌리엄 더글러스가 로마 순례를 떠나자, 왕의 군대가 더글러스 백작령으로 진군해 그 땅을 접수했다. 그러나 윌리엄 더글러스가 돌아오고 민심이 그쪽으로 쏠리자, 제임스 2세는 브루스 가문과 정면 대결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후퇴했다. 1452년 초, 제임스 더글러스는 안전에 대한 서면 보장을 받고 왕이 머물던 스털링 성에 초대되었다. 1452년 2월 22일 저녁 식사에서, 왕은 윌리엄 더글러스가 헤브리디스 제도를 접수하고 군도의 왕을 칭하며 스코틀랜드 국왕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맥도날드 가문의 수장 존 2세 맥도날드와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해, "자기의 허락없이 맺은 건 불법이니 당장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윌리엄은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고 답했다. 제임스 2세는 격노해 더글러스 백작을 칼로 찔렀고, 신하들이 뒤이어 윌리엄 더글러스를 집중적으로 찔러 확인사살했다. 나중에 더글러스 백작의 몸에서 상처 26개가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윌리엄 더글러스의 동생인 제임스 더글러스는 제9대 더글러스 백작에 취임한 뒤, 형을 살해한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스털링으로 진군했다. 제임스 2세는 딴 곳에 가 있었고, 스털링 성은 곧 함락된 뒤 철저하게 불태워졌다. 여기에 군도의 왕 존 2세 맥도널드, 크로포드와 모레이 백작 등이 반란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급 귀족들이 왕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하고 잇달아 이탈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군사력을 투사하지 못했다. 그 사이 제임스 2세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지지를 확보하고 더글러스 영지에 대한 원정을 단행했다.
1452년 5월 18일, 제임스 2세의 부관인 알렉산더 고든이 지휘하는 왕실군이 더글러스 가문 휘하의 알렉산더 린제이가 이끄는 반란군을 상대로 브레친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에 제임스 더글러스가 화해를 제안하자, 제임스 2세는 수락했다. 이후 폅상이 이어진 결과, 1452년 8월 22일 협정이 체결되었다. 제임스 더글러스를 형 살해에 연루된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른 귀족들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왕은 갤러웨이 서부의 영지를 백작에게 양도하고 더글러스가 갤러웨이의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1455년 3월, 제임스 더글러스와 동맹을 맺었던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최고 권력에서 실각하자, 제임스 2세는 이때를 틈타 더글러스 가문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왕실군은 더글러스 영지 일부를 접수하고, 그의 성 몇 개를 파괴했으며, 뒤이은 아킹홀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이후 제임스 2세의 주도로 소집된 의회는 제임스 더글러스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영구히 몰수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제임스 2세는 새로 확보한 광대한 영지와 직위를 중산층 지주계급 대표자에게 대거 나눔으로써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귀족 계급을 형성했다. 이때 백작 작위를 꿰찬 대표적인 씨족이 고든 씨족, 캠벨 씨족, 그리고 싱클레어 씨족이었다. 또한 제임스 2세는 의회를 정기적으로 소집했으며, 의회를 통해 세습적 지위를 폐지하고, 사법 제도를 간소화하고, 스코틀랜드의 가장 중요한 성(에든버러, 스털링, 덤바턴 )을 포함하여 왕령지의 상당 부분을 양도할 경우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도입하는 등 여러 주요 조치를 시행했다.
더글러스 가문의 영지를 몰수한 후, 왕실 재무부의 재정 상황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영지와 몰수된 토지, 관세로 인한 왕의 총 수입은 연간 1만 파운드에 달했다. 그러나 10여 년간의 무정부 상태와 내전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많은 지역이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세금 징수 관행이 사라졌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보편적 세금 부과 없이 국정을 운영하는 처지가 되었다. 제임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봉건적 의무 없이 "봉건 농업"의 조건으로 토지를 하사하는 관행이 확대되었지만, 이는 국왕에게 금전적 기여를 하는 조건으로만 이루어졌다. 이는 영주가 가신에게 영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충성을 받는 제도가 붕괴되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제임스 2세는 1451년 스코틀랜드의 두번째 대학인 글래스고 대학을 설립해 스코틀랜드의 법률 교육을 발전시키려 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장미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1460년 7월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조가 요크 왕조에게 패배한 후,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를 비롯한 랭커스터 가문 관계자들이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모계 쪽으로 랭커스터 가문과 관련이 있는 왕은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록스버러 성을 포위했다. 그는 성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플란데런 백국에서 수입한 많은 대포를 가져갔다. 8월 3일, 왕은 대포 중 하나가 설치된 장소 인근에 서 있었는데, 대포가 돌연 폭발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16세기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 피츠코티의 로버트 린제이는 "왕이 대포 근처에 서 있을 때, 틀에 박힌 대포 조각에 의해 그의 허벅지뼈가 두 동강이 났고, 그로 인해 그는 땅에 쓰러져 급사했다"고 기록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앵거스 백작 조지 더글러스의 지휘하에 공방전을 이어갔고, 록스버러 성은 며칠 후 함락되었다. 제임스 2세의 미망인 헬러의 마리아는 성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장남 제임스 3세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 마리아가 3년 후 사망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3. 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제임스 2세 (James II) | <colbgcolor=#fff3e4,#331c00> 제임스 1세 (James I) | <colbgcolor=#ffffe4,#323300> 로버트 3세 (Robert III) | |
로버트 2세 (Robert II) | |||
엘리자베스 뮤어 (Elizabeth Mure) | |||
아나벨라 드루몬드 (Anabella Drummond) | |||
존 드루몬드 경 (Sir John Drummond) | |||
메리 몬티펙스 (Mary Montifex) | |||
조앤 보퍼트 (Joan Beaufort) | |||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 | |||
곤트의 존[1] (John of Gaunt) | |||
캐서린 스윈포드 (Katherine Swynford) | |||
마거릿 홀랜드 (Margaret Holland) | |||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Thomas Holland, earl of Kent) | |||
앨리스 피츠앨런 (Alice FitzAlan)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제임스 3세 (James III) | 1451년/1452년 | 1488년 6월 11일 | 덴마크의 마르그레테[2] 슬하 3남[3] |
1녀 | 아란 백작부인 메리 (Mary, countess of Arran) | 1453년 5월 13일 | 1488년 5월 | 아란 백작 토머스 보이드 슬하 1남 1녀 |
제임스 해밀턴 경 슬하 2남 1녀 | ||||
2남 | 앨버니 공작 알렉산더 (Alexander, duke of Albany) | 1454년 | 1455년 8월 7일 | |
3남 | 모레이 백작 데이비드 (David, earl of Moray) | 1455년 | 1457년 7월 | |
4남 | 마와 가리오흐 백작 존 (John, earl of Mar and Garioch) | 1456년경 | 1479년경 | |
2녀 | 마거릿 (Margaret) | 1456년경 | 1500년경 | 오칭걸 경 윌리엄 크릭턴 슬하 1남 1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