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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대 미합중국 상무장관 | |
| <colbgcolor=#002d72><colcolor=#ffffff> 제48대 뉴욕주지사 윌리엄 애버럴 해리먼 William Averell Harriman | |
| | |
| 본명 | 윌리엄 애버럴 해리먼 William Averell Harriman |
| 출생 | 1891년 11월 15일 |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 사망 | 1986년 7월 26일 (향년 94세) |
| 미국 뉴욕주 뉴욕시 요크타운 하이츠 | |
| 재임기간 | 제11대 상무장관 |
| 1946년 10월 7일 ~ 1948년 4월 22일 | |
| 제48대 뉴욕주지사 | |
| 1955년 1월 1일 ~ 1958년 12월 31일 | |
| 국적 | |
| 배우자 | 키티 로런스 (결혼: 1915년, 이혼: 1929년) 매리 위트니 (결혼: 1930년, 사별: 1970년) 파멜라 디그비 (결혼: 1971년) |
| 자녀 | 딸 2명 |
| 학력 | 예일 대학교 (학사) |
| 종교 | 개신교(성공회) |
| 직업 | 정치인, 사업가 |
| 정당 | |
| 서명 | |
| 약력 | 주소련 미국대사 (1943~1946) 주영국 미국대사 (1946) 제11대 상무장관 (1946~1948) 상호안보국장 (1951~1953) 제48대 뉴욕주지사 (1955~1958) 제7대 극동담당 국무차관보 (1961~1963) 제4대 정무담당 국무차관 (1963~1965) |
1. 개요
미국의 정치인.2. 생애
매사추세츠의 명문 사립학교인 그로턴 스쿨을 졸업한 뒤 예일 대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예일 시절 미국 동부 엘리트 네트워크의 상징인 비밀결사 스컬 앤 본즈(Skull and Bones) 회원이었으며, 졸업 직후 예일 조정팀의 역대 최연소 코치를 맡았다. 이 무렵 정치 명문가인 루스벨트 가문과 인연을 맺었고, 엘리너 루스벨트의 남동생인 홀 루스벨트와도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다.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리먼은 미국 내에서 벨기에 학살을 규탄하는 여론 조성 활동에 참여했다. 1916년에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의 전쟁 개입 준비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 정부 활동에 협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러시아 2월 혁명 세력과 접촉하는 등 국제 정세 속에서 외교적 감각을 쌓게 되었다.
한편 1922년, 아버지 E. H. 해리먼에게서 상속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W.A. 해리먼 앤드 컴퍼니(W.A. Harriman & Co.)를 설립하며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1927년에는 동생 롤랜드 해리먼이 합류하면서 사업 기반을 다졌고, 1931년에는 브라운 브라더스 앤드 컴퍼니(Brown Bros. & Co.)와 합병해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Brown Brothers Harriman & Co.)이라는 유력한 투자 은행으로 확장했다.
이 회사에는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조지 H. W. 부시의 외조부 조지 허버트 워커, 그리고 그의 사위 프레스콧 부시도 함께 일했다. 해리먼은 이후 유니온 퍼시픽 철도와 머천트 조선회사를 비롯한 다양한 기업을 소유하며 사업을 확장했고, 폴라로이드 같은 신생 기업에도 투자하는 금융가 겸 자산가로 성장했다.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뉴딜 정책을 시작하자 해리먼의 누나이자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와 가까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메리 럼지(Mary Rumsey)는 해리먼에게 공공정책 영역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유했다. 럼지 설득과 루스벨트 가문과의 인연을 계기로 해리먼은 뉴딜 정책의 경제 회복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전국산업부흥청(NRA)에서 활동하면서 정부 정책 수립과 산업 조정에 참여했다. 이는 해리먼이 자본가에서 정치가로 바뀌는 출발점이 됐다.
이후 해리먼은 루스벨트 행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넓혀 갔다. 1937년과 1939년에는 상무부 산하 기업자문위원회의 의장을 맡아 정부와 산업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산업계 지도자들과 정치계 핵심 인물들로 구성된 협력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며 민주당 내 실력자 그룹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했다고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리먼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을 상대하는 대통령 특사로 외교 무대에 등장했다. 1941년부터는 유럽 특사로 활동하며 무기대여법 협력과 연합국 외교 조율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해리먼은 전쟁 초기부터 나치 독일이 점령지에서 자행한 유대인 학살과 강제수용소 운영 실태를 파악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1940년부터 이미 홀로코스트와 가스실 학살 가능성에 대해 미국 정부 내에 경고를 보냈다.
미국 내 고립주의와 반공 여론 속에서도 소련 지원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1943년부터 주소련 미국대사로 임명되어 스탈린과 직접 협상한 핵심 외교 인물로 활동했다.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 등 전시 외교의 주요 현장에서 미국 대표단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덕분에 전후 해리먼은 독일 분할과 유럽 재편 문제를 논의한 전후 처리 협상에 참여했지만, 폴란드와 동유럽 문제를 둘러싼 미·소 갈등 속에서 점차 대 소련 강경파로 입장을 굳혔다.
1946년 주소 미국대사 임기를 마친 후 귀국해 조지 케넌의 롱 텔레그램의 확산에 기여하며 트루먼 행정부의 소련 봉쇄 정책 수립에 함께 했다. 같은 해에 주영 미국대사로 전임되었고, 이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상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48년에는 마셜 플랜의 집행 책임자로 활약했고, 1951년에는 이란-영국 석유 분쟁 중재를 위해 테헤란으로 파견되는 등 외교 현장에서 계속해 활동했다.
1952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애들레이 스티븐슨에게 낙선했지만 1954년 선거에서 해리먼은 공화당의 토머스 E. 듀이 주지사 후계자로 꼽히던 어빙 M. 아이브스 상원의원을 11,125표 차로 누르고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1955년부터 주지사로 재임하며 주 소득세 11% 인상, 자선 목적 소액 복권(bingo) 합법화, 실업 보험 제도 확대 등 일련의 행정 개혁을 추진하면서 체급을 키웠고 1956년 대선에서는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의 지지까지 받으며 재도전에 나섰지만 애들레이 스티븐슨에게 또다시 패했다.
1958년 뉴욕 주지사 재선을 위한 도전에서는 공화당의 넬슨 록펠러와 맞대결을 펼쳤는데, 이 선거는 언론에서 백만장자의 대결(Battle of the Millionaires)로 불릴 만큼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2기 행정부 중간선거로 전국적인 민주당의 승리 속에서도 10%p 격차로 패배해 낙선, 실질적으로 선출직으로서의 생활을 씁쓸하게 마무리하게 됐다.
1960년 대선에서 해리먼은 트루먼의 영향으로 처음엔 존 F. 케네디의 당내 후보 지명을 주저했지만, 결국 케네디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지지로 돌아섰다. 케네디는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지도자였지만 해리먼의 풍부한 외교 경험과 냉전 전략 감각을 높게 평가했다. 로버트 F. 케네디는 해리먼 기용에 반대했으나, 조셉 P. 케네디가 그 반대를 눌렀다.
1961년 1월,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대통령 전권대사로 임명되며 외교 무대에 공식 복귀했다. 곧바로 인도차이나 문제와 냉전 외교 현안에 투입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로 기용되어 동남아 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라오스 중립화 협상을 주도해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1963년에는 부분 핵실험 금지조약(PTBT) 체결 협상에도 참여해 핵 군비 경쟁 완화를 도왔다.
해리먼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라오스의 쑤완나 푸마 왕자를 만나 라오스 문제는 군사적 개입이 아닌 중립 외교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굳혔다. 이는 당시 CIA가 내세우던 푸마는 공산 세력의 꼭두각시라는 분석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해리먼은 소련과 중국이 라오스에서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해 협상력을 확보했고,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라오스 중립화 협정 체결을 이끌어내며 외교적 수완을 입증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도 해리먼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강경 대응과 외교적 출구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군사 충돌 위험을 경고하며,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체면을 살리며 물러날 수 있는 협상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언은 위기 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전략으로 작용했고, 이후 해리먼의 외교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케네디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해리먼은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발언 스타일로 유명했다. 회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청기를 꺼버리곤 했고, 군 지휘부를 향해서도 욕설에 가까운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아 동료들 사이에서 크로커다일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러나 거친 성격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해리먼의 국제정세 감각과 전략 판단을 높이 신뢰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1961년 1월, 해리먼은 케네디 행정부의 대통령 전권대사로 임명되며 미국 외교 무대의 최전선에 공식 복귀했다. 해리먼은 곧바로 인도차이나 문제와 냉전 외교 해결에 투입되었고, 그해 11월부터는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로 공식 기용되었다. 라오스 중립화 협상을 주도했고 1963년 부분 핵실험 금지조약(PTBT) 체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인도 방문 중 라오스의 수반인 쑤완나 푸마 왕자를 만나 중립 외교를 논의하면서, 당시 CIA가 주장하던 공산주의 세력의 꼭두각시라는 의혹을 부정했다. 미국의 라오스 개입 확대를 경계했으며, 라오스 문제는 군사 개입보다 외교적 해결이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구소련과 중국의 영향력 경쟁을 이용해 협상력을 키운 해리먼은 제네바 회담에서 라오스 중립화 협정을 타결지으며 국제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케네디에게 단호한 대응과 동시에 소련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체면을 살려줄 출구를 제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략은 위기 해결에 기여하며 명성을 높였다고 한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으로 유명했고, 그 거침없는 태도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 크로커다일이라는 별명을 얻었기도 했다. 이런 다소 거친 언행에도 불구하고 케네디 대통령은 국제 문제에 대한 해리먼의 직감과 판단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후임으로 대통령직을 계승한 린든 B. 존슨 대통령 밑에서도 정무 담당 국무차관으로 유임되어 1964년 가을, 베트남 정책 자문을 위해 워킹그룹을 구성했을 때, 해리먼은 비둘기파 인사 가운데 한 명으로 포함되었고, 1965년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와 직접 회담하며 북베트남 지원 중단을 요구했지만, 회담은 소련의 강한 반발 속에 결렬되었다. 이후 해리먼은 매파와 충돌하며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베트남 폭격 확대를 주장한 월트 휘트먼 로스토 국가안보보좌관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같은 해 국무차관직에서 물러나며 야인이 됐다.
3. 활동
4. 여담
5. 선거 이력
|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54 | 미국 주지사 선거 | 뉴욕 | | 2,560,738 (49.61%) | 당선 (1위) | 초선 |
| 1958 | 미국 주지사 선거 | 2,553,895 (44.71%) | 낙선 (2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