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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리오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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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대법관
토머스 리오슬리
Thomas Wriothesley
파일:1st Earl of Southampton Thomas Wriothesley ©Beaulieu3.jpg
출생 1505년 12월 21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사망 1550년 7월 30일 (향년 44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링컨 플레이스
재임기간 영국 대법관
1544년 ~ 1547년
부모 부 윌리엄 리오슬리
모 아그네스 드레이튼
형제 엘리자베스, 앤, 에드워드
배우자 제인 체니
지녀 윌리엄, 앤서니, 엘리자베스, 메리, 캐서린, 앤, 메이블, 헨리
지위 초대 사우샘프턴 백작, 잉글랜드 대법관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법조인. 헨리 8세에드워드 6세 치세 때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2. 생애

1505년 12월 21일 런던에서 윌리엄 리오슬리와 지주 제임스 드레이튼의 딸이자 상속녀인 아그네스 드레이튼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평범한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전령관을 맡았으며, 본래 성은 "라이트(Wryth)"였다. 그러다가 삼톤 토머스 라이트가 처음으로 성을 "리오슬리(Wriothesley)"로 바꾸었고, 다른 이들도 모두 그대로 따르면서 그 역시 리오슬리라는 성을 사용했다. 그의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 앤[1], 에드워드가 태어났다. 1509년에 태어난 에드워드는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포드와 제5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를 대부로 삼은 채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8살 때 아버지를 잃고 삼촌 토머스 리오슬리에게 양육되었다. 변호사로 키우려는 삼촌의 의향에 따라 런던의 세인트 폴 스쿨에 다녔고, 이후 스티븐 가디너의 지도 아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민법을 공부했다. 그는 민법 과정을 마치지 못했지만, 이때부터 가디너와 친분을 다졌다. 1524년부터 궁정에 출입하면서 헨리 8세의 비서로 활동하던 가디너를 섬기는 서기가 되었고, 나중에 토머스 크롬웰을 모셨다. 그는 왕실 비서실의 일원으로서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의 결혼을 취소하는 일을 성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교황청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헨리 8세는 리오슬리의 열의를 주목했다. 1530년 1월, 리오슬리는 요크셔의 세인트 메리 수도원에서 얻은 수입으로 연간 5파운드의 연금을 받았다.

이후 리오슬리는 헨리 8세로부터 비밀 전문을 정기적으로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533년 10월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새로 선출된 벵고르 주교를 위한 교황 칙서를 얻기 위해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1534년 여름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그레이스 인에 들어갔고, 1535년 1월 2일에 검사관이 되었으며, 왕립 법원의 변호사로 선임되었다. 그는 점점 더 왕의 비서 역할을 했고, 토머스 크롬웰은 그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기용했다. 리오슬리는 교황을 배제하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창설하려는 왕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해산된 수도원의 부를 사용하여 병원을 짓고, 상비군을 창설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돕자고 강력히 주장해 왕의 승인을 받았다.

리오슬리는 수도원 폐쇄령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그는 와이트 섬에 있는 콰르 수도원의 토지, 햄프셔에 있는 티치필드와 뷰리외 수도원의 소유물, 윈체스터 인근 하이드 수도원의 토지를 얻었다. 동시대의 한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리오슬리는 놀라운 속도로" 수도원을 파괴하고 거기에서 발견된 모든 물질적 가치를 팔았다. 그 결과, 그는 몇 년 안에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햄프셔와 와이트에서 열린 다야안 위원회에 참여하여 지역 수도원과 교회에서 성유물을 압수하는 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1538년, 리오슬리는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나 카를 5세에 의해 플랑드르 총독으로 세워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에게 헨리 8세와 밀라노 공작부인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2], 메리 공주와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아들인 베자 공작 루이스 사이의 결혼을 제안했다. 이는 플아스와 스페인 사이의 반 잉글랜드 동맹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맹은 이미 체결되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은 거부되었고, 그는 체포되기 전에 간신히 플랑드르를 떠났다. 1539년 햄프셔 대표로 하원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메리 공주와 바이에른의 필립과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국왕을 대신하여 하트퍼드로 가서 메리 공주를 설득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헨리 8세와 클레베의 앤의 결혼에 반대했다. 1540년 4월에 공식적으로 국왕의 비서로 임명되어 랄프 새들러와 그 자리를 공유했다. 1540년 4월 18일, 토머스 크롬웰이 에식스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을 때, 리오슬리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1540년 여름, 토머스 크롬웰은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크롬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리오슬리 또한 위험에 처했다. 그가 곧 런던 탑으로 보내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추밀원에는 리오슬리가 윈체스터 인근 여러 영지를 불법적으로 탈취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 그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롬웰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고, 클레베의 앤과 헨리 8세의 이혼 절차에 참여해 왕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입증했다. 그 결과 크롬웰은 처형되었지만 그는 무사했으며, 같은 해 12월 29일 그에 대한 혐의는 명예훼손으로 선고되었다.

이 무렵, 리오슬리는 종교 개혁에 긍정적인 입장에서 친 가톨릭 성향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제 마르틴 루터장 칼뱅의 교리를 참고해 잉글랜드 교회를 변화하려는 움직에 반대하고, 전통 의식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정파에 속했다. 1542년 초 반역죄로 처형된 왕의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의 친척인 하워드 가문의 몰락은 리오슬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리오슬리는 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1542년 4월 카를 5세의 대사 외스타슈 샤퓌는 리오슬리를 잉글랜드에서 내무장관 윌리엄 피츠윌리엄과 함께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여겼다. 같은 해 11월, 샤퓌는 리오슬리가 잉글랜드 전체를 지배한다고 확신하는 서신을 카를 5세에게 보냈다.

리오슬리의 영향력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부분적으로 샤퓌와 협력하여 카를 5세와 잉글랜드의 동맹을 회복한 데 기인한다. 리오슬리는 제국 대사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유지했다. 1543년 10월 25일, 그는 스티븐 가디너와 함께 카틀 5세와의 공격 및 방어 동맹 조약의 전문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조약은 성립되었고, 헨리 8세와 카를 5세는 1544년 프랑스를 침공했다. 리오슬리는 이 공적을 인정받아 1544년 1월 1일 티치필드의 리오슬리 남작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같은 해 4월 22일에 토머스 오들리가 병환을 앓는 동안 국새 보관자로 임명되었으며, 토머스 오들리 사후인 1545년 5월 3일 잉글랜드 대법관이 되었다. 7월 9일, 리오슬리는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 중에 섭정이 된 캐서린 파 왕비의 고문 중 하나가 되었다. 1545년 4월 23일에는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국내 개신교도 박해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우호 정책의 일부가 되었다. 리오슬리는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법원에서 이단자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종교 개혁 지지자 중 일부는 참수형에 처해졌고, 일부는 산 채로 화형되었다. 1546년 런던 탑에서 여성 개신교 설교자 앤 애스큐의 고문과 화형에 직접 참여했다. 급진적인 개신교도로 여겨졌던 캐서린 파 왕비도 그 해에 여러 번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리오슬리는 캐서린 파 왕비를 체포한 뒤 폐위하고 싶어했지만, 왕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의 많은 학자는 리오슬리는 단지 헨리 8세가 캐서린 파를 제어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을 뿐이며, 리오슬리는 자주 바뀌는 왕의 뜻에 동조했을 뿐이라고 본다.

헨리 8세 치세 말기, 리오슬리는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를 비롯한 하워드 가문 인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토머스 하워드와 헨리 하워드 모두 권력을 탈취하고 가톨릭을 부활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리오슬리는 왕이 기소장을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서리 백작은 1547년 1월 19일에 참수되었고, 런던 탑에 갇힌 노퍽 공작은 왕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1547년 1월에 열린 의회에서 ,리오슬리는 헨리 8세의 죽음을 발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왕의 유언장에 따르면, 리오슬리는 연간 연금 500파운드와 사우샘프턴 백작 작위, 그리고 섭정 의회 의석을 받았다.

새 국왕 에드워드 6세는 리오슬리를 총리로 계속 두려 했지만, 리오슬리는 곧 사임했다. 그 이유는 그와 국왕의 삼촌이자 호국경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와 결등을 벌인 데다, 의회 의원 대부분이 종교 개혁 신앙에 헌신적인 것, 그리고 리오슬리가 최근 몇 년간 억압 정책을 펼친 것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에드워드 시모어의 사주를 받은 의회 의원들이 그를 무능하고 권력을 남용했다고 비난했고, 리오슬리는 얼마 동안 가택 연금을 받다가 나중에 풀려났다.

이후에도 리오슬리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1549년 의회의 업무에 참여해 잉글랜드 종교 의례를 통일한 통일령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가 나중에는 따랐다. 여기에 에드워드 시모어의 동생 토머스 시모어와 협력해 에드워드 시모어를 몰락시킬 계기를 노렸지만, 1549년 초 토머스가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려고 시도한 혐의로 긴급 체포된 뒤 처형당하자, 자신이 그의 계획과 관련 없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에드워드 시모어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존 더들리에게 가담했다. 이 음모에 참여한 추밀원 의원들이 모인 곳은 그의 집이었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1549년 10월에 권력 남용 혐의로 기소되어 권력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었으며, 리오슬리는 다른 여러 영주들과 함께 체포 현장을 목격하기 위해 윈저로 여행했다.

이렇듯 리오슬리는 존 더들리와 손잡고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람들은 그가 미사를 복원하고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을 종식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1549년 11월에 중병에 걸린 그는 내각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1550년 2월 이후로는 집을 나서지 않았다. 1549년 12월, 리오슬리는 에드워드를 처형하고 존 더들리의 명예를 실추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550년 7월 30일 런던의 링컨 플레이스에서 오랫동안 신음하며 고통을 호소하다 사망했다. 그가 독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근거는 없다. 그의 유해는 햄프셔 주 티치필드에 묻혔으며, 무덤 근처에 웅장한 기념비가 세워져서 현재 보존되고 있다.

3. 가족

  • 제인 체니: 스티븐 가디너의 조카이자 버킹엄셔 체샴 보이스의 기사 윌리엄 체니의 딸.
    • 윌리엄 리오슬리: 유년기에 사망.
    • 앤서니 리오슬리: 유년기에 사망.
    • 엘리자베스 리오슬리(1535 ~ 1555):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의 부인.
    • 메리 리오슬리(1537 ~ 1561): 허스트본 프라이어스 출신의 기사 마이클 리스터[3]의 아들 리처드 리스터와 초혼. 런던의 판사 윌리엄 셀리의 손자인 미셀그로브의 기사 윌리엄 셀리와 재혼.
    • 캐서린 리오슬리(1539 ~ ?): 월트셔 주 의원인 매튜 아룬델 경과 결혼 계약을 맺었지만 이뤄지지 못했고, 그 대신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 신하인 토머스 콘윌리스와 결혼했다.
    • 앤 리오슬리(1541 ~ ?): 엘리자베스 1세의 재무관 헨리 월롭과 약혼했지만 결혼 전에 사망했다.
    • 메이블 리오슬리(1543 ~ ?): 스톡브리지의 의원 월터 샌디스의 부인.
    • 헨리 리오슬리(1545 ~ 1581): 제2대 사우샘프턴 백작.

[1] 햄프셔의 기사 토머스 나이트의 아내.[2]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국왕 크리스티안 2세의 딸이다.[3] 아라곤의 카탈리나, 앤 불린, 제인 시모어 왕비들의 시녀로 유명한 마조리 리스터의 남편이다. 단, 리처드 리스터는 마이클 리스터가 첫 아내인 엘리자베스 텔라베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