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蚩尤 | Chiyou
고전 치우도의 모사도. # | 2000년에 지어진 중국의 중화삼조당 내 치우 벽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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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요괴이자 치우 신앙의 대상인 전쟁의 신으로, 중화삼조(中華三祖)로 여겨지기도 한다. 공공, 축융, 형천과 함께 염제 신농씨의 대장군으로, 동방 구려(九黎)부락의 두령이었다고 한다.[1]2. 상세
치우는 신화적으로 오랫동안 요괴, 마물 또는 괴물로 취급되었다. 그러면서도 치우 신앙 또한 분명히 존재했고, 중국의 많은 군주들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에게 기원했듯이, 시대와 기록에 따라서 그 위상이 천차만별이었다. 천자의 재상, 대제후, 섭정과 서자 떨거지, 요괴, 재앙신 등으로 위상이 매우 달라졌다.한고조 유방도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등 군신으로서 치우 자체에 대한 신앙은 면면히 존재해 왔다.[2] 다만 이는 지역마다 달라서, 치우 신앙이 시작된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대우가 상당히 좋았다. 진나라 때 진시황에게 접근한 방사들이 숭상을 권한 팔신[3]들 중에 치우가 있었으며, 현재도 중국 동북지역 일부에서는 민간에서 용신이자 우신으로 숭배된다.[4] 실제로 한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 전에는 중국에서도 지역/국가 별로 민간 신앙의 차이가 컸으나, 한나라를 시작으로 점차 각지의 민간 신앙이나, 흡수한 국가의 관변 신앙을 정리하고, 유학을 장려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 중국의 창세신급 여신이었던 여와가 태호 복희씨의 여동생으로 격하되는 신화도 한나라 때부터 등장한다.
치우는 팔 6개에 눈 4개가 달렸고, 소의 뿔과 발굽,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동두철액)가 있었으며, 일부 자료에서는 신화상의 다양한 소들과 관련된 특징들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의 머리는 두 개의 뿔이 달린 황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몸은 인간이었지만, 뒷모습은 곰을 닮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맨몸으로 맹수와도 대적할 수 있었을 만큼 힘도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당시의 조악한 기술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으며, 안개 도술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 말고도 치우는 구려라고 하는 신족의 우두머리이기도 했으며[5], 베트남, 중국, 라오스 등에 사는 묘족인 몽족들에게는 현명한 신화적 왕으로 알려져있다. 출처와 견해에 따라서는 동이족 혹은 묘족 등의 조상으로 인식이 되며, 그렇기에 오늘날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여겨지면서도 몽족의 전설적인 건국의 아버지로 숭배되고 있다.
중국 송나라(960년~1279년) 시대의 역사서인 《율서》에 따르면 치우의 성은 '강'(姜)으로 삼황 중 한 명인 염제 신농씨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결국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는데, 이것을 묘사하기를 동두철액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치우는 별자리와 기후를 불러 일으키는 주문도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치우는 탁록대전 당시 주문으로 안개를 소환해 황제와 그의 병사들을 둘러쌌다고 한다.
《치우, 오래된 역사병》(2017, 푸른역사)을 쓴 김인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치우'(蚩尤)란 뱀이 많은 중국 남쪽 장강(長江) 일대의 지배 세력을 뜻하는데, 갑골문을 보면 '치'(蚩)란 뱀을 밟은 불길함을, '우'(尤)는 고기를 독점하는 탐욕을 상징한다. 황제 헌원씨로 대표되는 황하 세력이 보기에 장강에 사는 놈들이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의미이다. 거기다가 장강 일대는 구리가 풍부해 청동기가 빼어났다. "구리로 된 이마"를 지닌 치우가 기주, 혹은 탁록에서 황제와 한판 승부를 벌였다는 얘기도 거기서 나온다.
한편 형제 81인[6] 또는 72인과 풍백, 우사를 거느리며 다녔다고도 한다. 문제는 단군신화에 풍백, 우사, 운사가 거론되는 덕에 위서인 《환단고기》를 지을 때 짜맞춰넣을 여지가 생겼다는 점이다. 그 외에 다섯 병기를 만들어 팔 6개로 들고 다녔다고도 하는데, 이 다섯 병기가 무엇인지도 기록마다 전부 다르다.[7]
역사적인 실존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신뢰성이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중국에서는 '중화삼조'라며 역사적 인물처럼 인정하지만 애초에 그건 소수민족 융합 차원, 다시 말해 '중국인'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며, 치우의 실존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사마천의 《사기》뿐, 물증은 하나도 없다. 저자인 사마천 본인도 예전부터 내려온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역사라는 근거를 전혀 대지 않았다.[8] 중화삼조 운운한 뒤부터는 드라마 같은 데서 패전 후 살아 남아 황제 헌원씨에게 복속한 걸로 나오기도 한다.
과거에는 유성우를 '치우기'(蚩尤旗, 치우의 깃발)라고 불렀다.
3. 문헌 속 치우
중국 문헌에 천자(天子)로 기록된 인물로서 구려(九黎)의 군주(임금)로 기록하고 있다.응소(應劭)가 말했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이다.”
《사기집해》 <오제본기> #
《사기집해》 <오제본기> #
공안국(孔安國)이 말했다. “구려(九黎)의 군주를 치우라 부른다."
《사기색은》 <오제본기> #
《사기색은》 <오제본기> #
탁록(涿鹿)에서 황제(黃帝)와 격렬하게 대립한 인물이었는데 황제는 응룡(應龍)으로, 치우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로 서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다.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했다. “황제는 응룡(應龍)에게 명령하여 치우를 공격하도록 했다. 치우는 풍백(風伯)·우사(雨師)에게 청하여 따르도록 하면서 큰 바람과 비를 내렸다."
《사기정의》 <오제본기> #
《사기정의》 <오제본기> #
《노사》(路史) <국명기>(國名紀)에 의하면 치우의 구려(黎)는 동이국(東夷國)이었다고 한다. 즉 치우는 동이 구려로서 첫 번째 천자를 칭한 임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黎)는 하나라 제후인 구려(九黎)이다. 두예는 말하기를, ‘동이(東夷) 국가다’라고 했다.
《노사》 <국명기>(國名紀) -려(黎)- #
《노사》 <국명기>(國名紀) -려(黎)- #
《사기》 <봉선서>(封禪書)에 의하면 진나라의 시황제가 섬기는 8신(八神) 중의 세 번째인 군사(兵主)의 신으로 치우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즉 병법의 신으로 치우를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시황제(始皇)는 동쪽으로 바닷가까지 유람하며, 명산대천과 8신(八神)에게 예를 행하고 제사를 지내며, 신선(僊人)인 선문(羡門) 같은 이들을 〔만나기를〕 구했다. …… 8신(八神)은, …… 세 번째는 군사를 주관하며, 치우(蚩尤)를 제사지내고
《사기》 <봉선서>(封禪書) #
《사기》 <봉선서>(封禪書) #
김인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재앙을 상징하는 '치'(蚩)자와 욕심을 상징하는 '우'(尤)자를 결합하여 ‘치우’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서주(西周)시대에 이르러서인데, 이는 서주시대에 치우 집단이 세력을 형성하고 역사무대에 등장했음을 뜻한다. 치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상서》의 <주서>(周書) -여형-(呂刑)편에 실려 있는데, 여형(呂刑)을 제정하면서 악독한 형벌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정에 등장한다. 서주는 무기와 예기를 제작하는 데 필수품인 청동 원료를 확보하고, 제후로서 예를 다하지 않는 미성 웅씨의 초나라를 덕을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정벌했는데 이러한 내용이 -여형-편에 황제 헌원씨가 치우를 정벌한 이야기로 기록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치우 현상에 대해, 한족 왕조가 정통이라는 관념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황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황제 헌원씨와 염제 신농씨는 화하의 정통으로 숭배된다. 탁록대전에서 황제가 치우와 격전을 벌인 것은 정의가 사악함을 징벌한 것으로, 인(仁)과 덕(德)이 폭력을 이긴 것을 뜻한다. 치우는 탐욕스럽고 대란을 일으켰기에 정벌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죽여도 되는 폭도로 간주된다.
이러한 외모와 《산해경》에서 표현된 원전 신화에서의 강력함, 그리고 비와 바람을 다스리는 데다가 대척점에 있는 황제 헌원씨가 하필 가뭄을 사용하는 것 때문에 일부는 치우가 염제 신농씨의 기믹을 이어받은 동부 평야의 풍요와 문명의 신이며, 황제는 그에 대항해 나타난 서부 황야의 무법자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말해, 묘족의 전승에 따르면 당시 동부 평야는 묘족이 주름잡고 있었는데 한족들이 그들을 밀어냈다고 한다. 근데 황제 헌원씨가 가뭄을 상징한다면 풍백과 우사 앞에선 떼꿀멍이긴 해도 비를 내리게 하는 응룡이 황제의 편인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치우라는 이름은 《산해경》에도 나오는데,[9]《산해경》은 선진시대인 전국시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치우가 정말 고대의 실존인물이었다면 수없이 발견된 상나라의 갑골 문자에는 왜 전혀 나오지 않는지 설명하지 못한다.[10] 설마 모를까 싶지만, 사마천의 《사기》가 쓰인 전한은 전국시대보다 한참 뒤의 시대다. 즉, 신화속의 존재일 확률이 매우 높고, 실존인물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치우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들도 그냥 그렇다는 구전이 내려올 뿐, 유물이나 기록 같은 제대로 된 근거가 없다.
전승에 따르면, 당시 치우의 군대는 발전된 병기 제작 기술과 치우의 영도력에 의거해 수많은 세력을 패퇴시키고 그 판도를 넓혀 나갔다. 그리고 그 뒤 염제 신농씨(神農氏)와의 판천대전에서 승리한 신흥세력이었던 황제(黃帝) 헌원씨와 격돌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중국 신화와 한국의 유사역사학에서 별 이견이 없지만 그 뒤의 기록부터 상당 부분 달라진다.
응룡이나 황제가 죽였다는 쪽이 메이저지만, 마이너하게는 살아서 고향으로 도망쳤다거나 황제 헌원씨의 신하가 되었다고 나오기도 한다. 치우가 죽었다는 설을 따르지만 '치우가 죽은 후 요마들이 날뛰니 치우의 얼굴을 그려 붙여 그가 살아서 황제 헌원씨의 신하가 된 것처럼 위장하자 조용해졌다'고 나오는 신화도 있는데, 사망설과 생존설의 융합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치우와 황제의 마지막 결전은 탁록(학술적으로 위치 불명)에서 있었는데, 그때 황제는 지남거[11]를 만들어 안개 속에서도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결국 응룡(應龍)과 자신의 딸인 태양을 다스리는 여신 발(妭)[12]까지 총동원하여 치우를 쓰러뜨렸다고 전한다. 묘족 신화에서는 여신 발의 미인계에 의해 당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황제에 의해 토막나서 처형당하는데, 이때 흘린 피가 단풍나무에 스며들어 가을마다 단풍이 붉게 물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만 같은 《산해경》에서의 단풍나무 전설 기록에 보면 치우가 자신을 포박한 차꼬와 수갑을 풀어 버리고 도망쳤는데 그것이 변한 게 단풍나무라는 이설도 나온다. 애초에 《산해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후대에 수없이 덧씌워진 신화집이라 모순되는 내용이나 현실과 괴리된 내용이 굉장히 많다.
《관자》 <오행>편에 보면 황제 헌원씨가 치우를 得[13]하여 천도를 훤히 알게 되었다는 기록도 나오지만, 염제 신농씨의 자손인 치우 본인이라기보다는 유성을 의인화한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금속기 주조나 기상 현상의 통제와 같은 면모가 없고, 대신 천도를 아는 현자라서 황제가 관직을 내린 것으로 나온다. 일단 황제와 싸운 그 치우가 아니라는 주석이 달려 있지만 본문이 아니라 주석이므로 권위가 떨어지며, 함께 병렬로 언급된 재상들 중 다른 중국 신화의 신들이 있고, 중국 신화에 나오는 치우가 한 명 밖에는 없기 때문에, 이 치우와 저 치우를 동일 인물로 여기는 경향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 한편 <지수>편에서는 천자가 치우에게 광산을 관리토록 시켰다가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다른 제후국들을 겸병하고 다니자 천자에게 털렸다고 나온다. 즉 잘 알려진 탁록대전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전집 내에서도 기록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관자》가 여러 명의 저자와 편집자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4. 치우 신앙과 사학
치우를 통해 한국과 중국, 먀오(묘)족이 고대사를 어떠한 방식으로 재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 세 민족은 각기 자민족의 현실적인 이익에 의해 역사기억을 선택, 강화, 망각, 재구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새롭게 과거를 창조하였다. 한국과 먀오족은 민족영웅으로서 치우가 필요하고 중국은 먀오족을 포용하여 중화민족으로 융합시키기 위해 치우가 필요하다 …(중략)… 문헌자료의 인용에 있어 나타난 문제점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에 적당한 자료만을 인용하고 인용한 자료에 대해서도 자의적인 해석을 가하였다는 것이다.
김인희. (2012). <치우를 통해 본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 재활용>. 《동아시아고대학》, 28, 253-288. 초록 중
김인희. (2012). <치우를 통해 본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 재활용>. 《동아시아고대학》, 28, 253-288. 초록 중
4.1. 묘족의 치우 신앙
치우를 믿는 집단은 중국 동부 황하 하류 지역에 거주했다. 묘족의 조상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묘족 역시 원래 장강 이북에 거주하다가 후대에 남하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융합 차원에서 치우 또한 '중화삼조'라고 해서, 황제 헌원씨와 염제 신농씨, 치우를 중화민족(한족과 다른 개념)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신화시대를 다룬 중국 드라마에서 흔히 치우를 비열하고 사악한 악당으로 묘사하는 통에 묘족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화삼조의 한 분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하고 발끈하곤 한다.千古奇才横空贤 천고의 세월 영웅 치우 천왕을 可堪并论炎黄间 염제 및 황제와 더불어 이야기하리 五兵刑法君始点 다섯 무기와 형과 법이 치우로 시작했으니 九黎生气冲云天 구려 백성,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남는도다 席卷中原华夏联 염제와 황제를 누르고 중원을 석권하니 血染江河五千年 5,000년 강물을 피로 물들였네 英名不因涿鹿败 영웅의 이름이 탁록 패전으로 말미암지 않으니 老黑石山百花鲜 흑석산 온갖 꽃들 여전히 붉네 |
4.1.1. 비판론
단 《치우, 오래된 역사병》(2017, 푸른역사)을 쓴 김인희 박사는 저서에서 치우가 한민족의 조상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묘족의 조상신조차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저자가 실제로 묘족을 찾아가 인터뷰해보면, 지식인 계층에서나 치우를 알 뿐, 근대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묘족의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적인 감정으로, 한족과 대립되는 위대한 조상을 만들고자 치우 신화를 끌어들였고, 묘족의 전설이나 옛 이야기들 중 '치우'와 이름이 조금이라도 유사한 인물이 등장한다 싶으면 전부 치우와 연결지어 역사를 꾸며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 박사의 저서를 따르면, 묘족의 '치우 신화'라는 것도 곧이 믿을 수가 없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맹획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반인 계층에선 이미 신앙이 사멸했을 뿐[15] 조상신으로 섬겨진 역사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4.2. 한국의 사이비 신앙 및 사학
신채호나 정인보, 김교헌 같은 원조 '민족사학자'들도 언급하지 않았던 치우를 뜬금없이 한민족의 기원과 연관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은 1990년대에 나타나 2000년대 초 한·일 월드컵 애국주의 마케팅과 함께 절정을 이뤘다. 이후 치우 열풍이 유사역사학에서 비롯된 것임이 상당히 알려지면서 대중적인 관심은 많이 사라졌다. 또 최근 김진명의 역사소설인《고구려》의 <작가의 말>에서"이제껏 동이(東夷)의 역사로 버려두었던 요하 문명에서 황하 문명보다 근 1,500년이나 앞선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서둘러 동이의 조상인 치우(蚩尤)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둔갑시키고(하략)"
라고 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의 기록에서 치우를 한민족과 연관지은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알려진 것은 《규원사화》이고, 가장 대표적인 저작은 《환단고기》인데, 《환단고기》는 위서이며, 《규원사화》는 논란이 많지만 역시 위서로 치부되고 있다. 치우 숭배가 도깨비 신앙에 영향을 줬다고 보는 설이 있긴 하나, 신빙성은 없다.
김인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치우가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처음 주장한 이는 박성수였다. 박성수는 1999년 《치우연구회》 창간호에 실린 <민족의 무신, 치우 천황>이라는 논문에서
“중국의 기록에는 치우가 삼황오제 때 싸움만 좋아하는 말썽 많은 동방의 제후로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에 가서는 정토(征討)당하고 마는 패장으로 왜곡되어 있으나 우리 기록에는 일찍이 환웅의 신시시대에 중국을 정벌한 용감한 장수 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주 안압지 출토 녹유귀면와(綠油鬼面瓦)는 치우인데 이름을 잃어버리고 도깨비로만 기억하고 있다.”
라고 했다.《환단고기》등의 위서를 제외하면 치우를 한민족과 연관짓는 이들의 논거는《사기》 등에 쓰여 있는 '동이' 기록인데, 그저 중국 입장에서 동쪽에 있는 민족들을 '동이'라고 불렀을 뿐,[16][17] 위에 설명했듯이 한반도에는 독립적인 치우 신앙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고, 현대 이전에 치우에 대한 계승 의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없다.
《환단고기》 및 이를 따르는 대다수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서는 전쟁에서 오히려 치우가 승리했다고 하며, 결국 전쟁은 이기긴 했지만 휴전 비슷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얘기를 한다.
역시 또다른 위서인 《단기고사》에서는 '治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행적은 중국 신화와 비슷하게 염제 신농씨를 위해 자부선생 밑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인 황제 헌원씨와 싸웠다가 패배하지만 그의 손자인 특명이 단군조선의 관료가 된 것으로 나온다. 이 治尤라는 이름은 《환단고기》에서도 등장하지만, 서방을 담당하는 신으로 자오지 환웅과는 별개의 인물로 나온다.
일부 사람들 중 《관자》 <오행>편에서 치우가 천도에 밝았다고 하는 기록을 갖다붙이는 자들이 있는데, 《관자》에서는 치우가 황제 헌원씨의 재상들 중 한 명이 되었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붉은악마에서 귀면와를 치우의 얼굴로 해석하여 귀면와의 도안을 붉게 만든 치우천왕기 도안을 만들어 널리 퍼뜨리고 다녔으나, 귀면와와 치우를 연관짓는 것은 이전에는 존재한 바 없는 독자적인 주장이다. 귀면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도철의 형상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 기록에서 도철은 사흉 중 하나로 아주 탐욕스러운 괴물이다.
한국조폐공사에서는 치우천왕 불리온 금메달/은메달을 팔고 있다. 조폐공사에 환빠가 있고, 그들의 주장에 완전히 포섭되었는지 '고대 배달국의 제14대 환웅'으로까지 소개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이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신으로 홍보하고 다니다 보니 다른 나라에도 어느 정도 알려졌는지 최근에는 묘족(몽족) 가운데에서도 한국인과 자신들이 같은 왕(치우)을 공유하는 같은 동이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한민족과 묘족 사이에서도 서로 상대방을 그냥 치우에게 지배받은 민족 중 하나로만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일종의 문화로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미신과 풍습이 문화로 변하는 건 단순히 역사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향후 100년 뒤에도 2000년대 초반의 축구 열풍과 함께 당대를 휩쓸었던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간극 문화로서 여겨질 것이다.
4.3. 중국의 어용사학
위에서 중화삼조라 하며, 이를 현대 중국 내 소수민족 통합주의의 기치로 삼고, 실존인물인 것처럼 포장하려 한다고 했는데, 이를 위해 어용학자들이 여러가지로 《환단고기》급 소설을 써내고 있다. 웃기는 건 한국의 유사역사학자들 중에서도 이런 중국 어용학자들의 영향을 받거나, 이들의 주장을 근거로 치우의 실존을 주장하는 작자들이 있다는 것이다.5. 현대의 대중문화
진의 여부와는 별개로 작품의 소재로서는 적절해서, 소설이나 만화 등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5.1. 《치우천왕기》
2003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이우혁의 판타지 소설 《치우천왕기》는 치우와 관련된 유사역사학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논란이 많았으나 애초에 판타지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수작이라고 평가된다. 그리고 작가 이우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치우천왕기》의 완간 소식을 알릴 때 자신은 《규원사화》만 잠깐 참고했지, 《환단고기》나 《부도지》 등의 서적은 참고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만,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읽어봤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환단고기》의 내용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역사가 아니고 그냥 소설적인 장치라고 이전부터 밝혀왔었다. 하지만 이전 작품인 《퇴마록》에서 여과없이 《환단고기》에 관련된 내용을 적었다는 점에서는 지금도 비난을 피하지는 못하고 있다. 후에 소장판에서는 내용과 각주에서 아예 《환단고기》 관련 내용을 빼버렸다.사실, 1980년대에는 《단》(丹)같은 소설을 TV광고를 하며 팔았고, 《환단고기》 역시 수업 시간에 국어교사들이 이야기해주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환단고기》부터 《대쥬신제국사》가 출판된 시기까지, 그런 것을 이용하는 정권은 혐오해도 민족적인 자부심을 부추기는 컨텐츠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던, 다시 말해 악과 깡말고는 세계에 내세울 게 없었던 그 시대를 산 386세대 유명 인사들도 대놓고 옹호하지는 않아도, 대놓고 까지는 않은채 은근히 희망하며 후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작가 역시 동시대를 산 사람이었다. 물론 《치우천왕기》는 2010년대쯤이 되어서야 완결이 난 작품이다.
작중에 묘사되는 치우에 관해서는 치우천과 치우비 문서 참조.
이후 조아라의 노블레스인 《MEMORIZE》에서 치우천이 사용했던 갑옷이라는 설정으로 치우 천왕의 갑옷이 등장한다.
5.2. 기타
중국 신화에서는 한 가지 발명품을 만든 신이나 영웅이 신화마다 다르게 나오거나, 그 반대가 많다. 이런 신들은 해당 직업인들이 가톨릭의 수호성인처럼 각 직업의 시조이자 수호신으로 모셨는데, 이렇게 많은 이유는 유명한 신이나 영웅을 내세워 미화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신이 여러 직업의 수호신이 되던가, 실제 역사하고는 전혀 동떨어지는 우스꽝스러운 경우도 존재했다.- <슈퍼로봇대전>에선 용호왕 등 초기인들이 치우의 무덤 근처에 묻혀있다고 나오지만 아직까지 치우의 초기인 같은 건 언급되진 않았다.
-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포악하고 잔인한 원시 부족의 족장이다.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힘이 세고, 자기 부하들은 잘 대해주지만 반항하거나 저항하는 등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냅다 때려죽이거나 물어죽이는 악랄한 괴물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시시시시~"라는 실소라 주장하는 특이한 웃음소리가 특징이자 포인트. 황제 헌원씨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꽤 잘 나갔었지만, 헌원이 염제 신농씨를 굴복시키고 세력을 일원화하면서 맞붙은 탁록대전에서 구리 투구와 무기들로 무장한 병사들은 헌원이 이끄는 맹수부대의 밥이 되었고, 안개 도술로 적을 절벽으로 유인한 뒤 낙석으로 때려잡던 18번 전법도 헌원의 지남거로 인해 전부 파훼되면서 헌원의 칼에 의해 목이 달아난다.
-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 2부의 주인공이자 전 시리즈를 통틀어서 언급이 되고, 주인공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5부의 주인공이었던 가리온은 치우가 쓰던 강궁과 무기(창으로 재달련된 12자루의 칼)를 사용하면서 치우의 환생으로 불리게 되고, 전생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 문제 때문에 흑화한다. 6부에선 짝사랑하던 여자를 잃은 위만이 힘을 추구하게 되자 봉인되어 있었던 멧돼지 악령이 치우의 창술 12초식과 마지막 최강이자 최악의 초식인 동귀어진까지 알려준다.
- <SD건담 삼국전>에선 치우+노이에 질을 모티브로 했으며, 사후에 의해 제압당해 이들 중 한 명인 무의와 함께 봉인된 암흑의 화신이자 마신이면서 군신+전신이란 설정으로 나온다.
- 타나카 요시키의 소설인 《창룡전》에서 우종족의 왕으로 등장하며, 최종 보스로 보인다. 우종족답게 소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괴물이며, 4권에서 잠깐 나왔다가 용왕 4형제의 3남인 류도 오와루가 휘두른 칠성보검에 머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반토막이 났다.
- <페르소나 3>에서는 탑 아르카나의 최종 페르소나로 등장한다. 이명은 '강군의 왕'으로, 스킬카드 무도의 마음가짐을 주며 아이템화 할 경우, 타케바 유카리의 최강 무기 원시만궁이 된다.
- 《문제아 시리즈》에서는 황제와 싸웠던 마왕 치우 혹은 무장신 치우로 언급된다. 별의 신무기인 아스트라를 벼리는게 허락된 푸른 별의 대장장이 중 하나라고 한다. 동세계관인 《밀리언 크라운》에서는 그 이름을 받은 왕관종 치우도 존재한다.
- TRPG <월드 오브 다크니스>에서는 먼 옛날 동방의 늑대인간 부족인 핫켄의 장군이었다고 나온다. 핫켄이 대륙에서도 살고 있었을 때만큼 오래 전이라고.
- <태합입지전 5>에서 치우의 갑옷이라는 아이템이 등장한다. 교토의 황거에서 1년에 한 번씩 벌어지는 천황의 친람 경기에서 전국의 괴물들을 뚫고 승리하면 랜덤으로 득템할 수 있다.
- 타이완의 상업지 작가인 흑청낭군의 한 단편에서는 구릿빛 피부에 팔 6개를 가졌으며 노출도가 높은 옷을 입은 야성미 넘치는 소녀로, 인체를 이용한 신묘한 지남거를 쓰는 황제에게 패배해 성노예 신세가 된다.
- 현재 대한민국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들의 헬멧 정면에 도장되어 경기중 자주 볼 수 있다.
- 《도굴왕》에서 왕의 투구인 치우의 가면으로 등장한다.
- 1998년에 발매된 고전 게임인 <칸: 바람의 신화>(제작사: 코마)의 네 캐릭터 중 한 명이 치우이다.
- <머털도사 -백팔요괴편->의 단치우는 치우를 본뜬 걸로 보일 정도로 무척 강력하다.
[1] 《百度百科》 蚩尤, 东方九黎部落首领[2] 환빠들은 이걸 갖고 치우가 승리했다는 근거로 삼으려 하지만 세계적으로 전쟁신이 패전을 겪거나 패장이 전쟁신으로 모셔지는 것도 분명히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아레스와 관우가 있다.[3] 제나라에서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던 여덟 신[4] 이쪽 전승에서는 치우가 황제 헌원씨에게 막판에 패배해 동북부로 돌아온 후, 이쪽 마을에 좌정하여 우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서영대 저, 《용, 그 신화와 문화 세계편》 참고)[5] 거의 모든 출처에서 치우는 구려족의 지도자로 나오나, 그의 정확한 민족적인 소속은 상당히 복잡하며, 출처에 따라 여려 부족이 언급되었다고 한다.[6] 일부 자료들에서는 81명의 형제들이 그의 왕국 내에 있는 81개의 부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7] 주로 등장하는 병기는 검과 창, 도끼이며, 활과 화살은 기본으로 기록된다. 판본에 따라 쇠뇌, 투구, 방패 등 나머지 병기들이 기록되기도 한다.[8] 애초에 사마천은 하나라부터 역사로 봐서 삼황과 오제는 배제하려다가, 고민 끝에 오제까지는 《사기》에 넣어준 것이었다.[9] 혹자는 어전비가 《산해경》보다 이른 시기의 것이라고 하나, 이 역시 시대상으로는 전국시대의 것이고, 출토지역상으로는 한민족의 세력 범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10] 동네 의원들이 손으로 파내서 쓴 갑골문 유적들은 미미한 수준으로, 대규모 발굴로 수습한 갑골문 유적에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부분이긴 하다.[11] 指南車,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일종의 나침반[12] 황제 헌원씨의 딸이었던 발은 후에 가뭄을 부르는 재앙신의 속성을 띠게 되어, 이름의 한자도 妭에서 魃로 바뀌게 되었다.[13] 득, 만나다/얻다로 둘 다 해석 가능[14] 김선자 저, 《중국 소수민족신화기행》[15] 한국인 중에서도 《신과 함께》 등으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대별왕과 소별왕, 삼신할미 등을 모르는 한국인들도 없지 않았다. 그냥 환인과 환웅, 단군 정도만 유명했다. 하지만 대별왕과 소별왕 신앙이 없고 유명하지 않았을 뿐, 신화는 분명히 존재했으므로 치우가 묘족의 조상신인지 여부와 비교하기엔 무리이다.[16] 비유하자면 우리가 '서양인'이라고 부른다고 독일과 이탈리아인을 동일 민족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17] 동이라는 '민족'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의 상호 연관성 또한 제한적인 혈연적인 관련성과 교류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