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8D6EB><colcolor=#000000> 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 James Hamilton, Duke of Châtellerault | ||
이름 | 제임스 해밀턴 (James Hamilton) | |
출생 | 1519년경 | |
스코틀랜드 왕국 | ||
사망 | 1575년 1월 22일 (향년 55~56세) | |
스코틀랜드 왕국 라나크셔 해밀턴 성 | ||
배우자 | 마거릿 더글러스(1532년 결혼) | |
자녀 | 제임스, 게이빈, 존, 데이비드, 클로드, 바바라, 제인, 앤 | |
아버지 |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 | |
어머니 | 자넷 베순 | |
형제 | 헬렌, 자넷 | |
직위 | 제2대 아란 백작, 샤텔로 공작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공작, 정치인, 군인. 메리 여왕 치세 초기 스코틀랜드의 섭정을 맡았으며, 거친 구혼 시기에 잉글랜드 왕국과 맞섰다. 이후 마리 드 기즈와 정쟁을 벌인 끝에 프랑스의 압력으로 섭정직을 마리에게 넘긴 뒤, 개신교 진영과 손잡고 내전에 참여했다. 이후 메리 여왕 치세에 벌어진 여러 정치적 사건에 개입했으며, 메리 여왕이 축출되자 메리 여왕의 복위를 명분으로 내걸고 제임스 6세를 앞세운 스코틀랜드 정부에 대적했다.2. 생애
제임스 5세 치세 초기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과 크레이크의 데이비드 베순 경의 딸이며 플로든 전투에서 전사한 이스터 웨미스의 로버트 리빙스턴 경의 미망인인 자넷 베순의 외아들이다. 누이로 헬렌[1], 자넷[2]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장녀 메리 스튜어트와 그녀의 두번째 남편인 초대 해밀턴 경 제임스 해밀턴의 아들로 제임스 해밀턴 본인은 메리의 친손자가 된다. 이런 관계를 통해 1536년 제임스 2세의 손자이자 제2대 올버니 공작인 존 스튜어트가 사망한 뒤에는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이 점은 왕손이 귀했던 스튜어트 왕조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근거로 작용했다.1542년 12월 제임스 5세가 사망한 뒤, 유아 여왕 메리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소집된 의회는 여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아란 백작이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기로 했다. 하지만 섭정 의회는 선왕의 측근들로 구성되었고, 스코틀랜드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이 수장을 맡았기에, 아란 백작의 권력은 제한적이었다. 여기에 데이비드 비튼은 아란 백작이 제임스 5세 치세 말기에 개신교에 동정적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공격했고, 그 다음으로 스코틀랜드 왕위에 가까웠던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는 아란 백작의 아버지인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아란 백작의 어머니인 자넷 베순과 결혼하기 전에 첫 번째 아내인 엘리자베스 홈과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백한 중혼으로 태어난 아란 백작은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1543년 7월 1일, 아란 백작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협의한 끝에 그리니치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간의 평화를 이루고 메리 여왕을 헨리 8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와 약혼시켰다. 여기에 양국은 헨리 8세와 메리 여왕 생전, 그리고 두 사람이 사망한 후 1년간 평화를 유지하며, 에드워드 왕자와 메리 여왕의 자녀가 두 나라를 통치할 권리를 누리게 하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동맹을 중요하게 여기고, 헨리 8세의 잉글랜드 국교회 강요 정책에 반감을 품고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고자 하는 스코틀랜드 내 내부 파벌의 반발이 강했기에,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여왕의 결혼은 쉽사리 성립되지 않았다.
1543년 7월, 친 프랑스 성향의 스코틀랜드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은 린리스고에서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 및 지주들과 함께 '비밀 결속(Secret Bond)'을 맺었다. 이 문서에 서명한 이들은 메리 여왕과 헨리 8세의 아들 간의 결혼에 끝까지 저항하며, 스코틀랜드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섭정의 전횡에 맞서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그들이 군대를 일으켜 아란 백작에 도전하자, 아란 백작은 7월 25일 에든버러와 린리스고 사이의 들판에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만난 뒤 악수와 우호적인 포옹을 통해 화해했다. 그 후 그들은 커클리스턴에서 우호 협정을 체결했고, 아란 백작은 친 영국 정책과 종교 개혁을 포기하고 메리 여왕과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기로 했다.
1543년 9월, 외교관과 첩자들을 통해 스코틀랜드 내부 분위기를 전해들은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성문까지 로우랜드 전역을 황폐화해서 스코틀랜드를 압박할 계획을 세웠다. 1543년 12월 15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그리니치 조약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헨리 8세는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한 것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여기에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제4대 클랜케언 백작 윌리엄 커닝햄은 에드워드 왕자와 메리 여왕의 결혼을 꿋꿋이 지지했다. 이에 의회는 두 사람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토벌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레녹스 백작은 1544년 3월 7일 메리 여왕의 어머니인 마리 드 기즈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무죄라고 호소하고 동료 귀족들이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하며 시간을 벌려 했지만, 아란 백작은 이미 토벌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1544년 3월 8일, 아란 백작은 보스웰 성에 포격을 가한 끝에 함락했다. 이에 레녹스 백작은 글래스고 시에서 동쪽으로 1마일 떨어진 글래스고 무어에서 군대를 집결해 맞서 싸울 태세를 갖췄다. 3월 16일, 아란 백작의 군대가 접근하자, 반란군은 역공에 나섰다. 이리하여 발발한 글래스고 전투는 처음에는 레녹스 백작 편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그의 병사 800명이 아란 백작의 군대를 거의 압도하는 듯 했고, 십지어 적의 대포를 탈취하기도 했다. 이때 토벌대에 함께 하던 킬마녹의 기사 로버트 보이드가 전장에 합류해 반격을 가하면서, 반란군은 패퇴했다. 이때 양측 모두 3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레녹스 백작은 덤버튼 성으로 피신했고, 아란 백작은 글래스고 시에 입성한 뒤 3월 26일 글래스고 주교의 성을 포위해 포격을 가했다. 이윽고 수비대가 항복하자, 글래스고에서 톨부스로 이어지는 길목에 저항군 지도자들을 교수형에 처하게 위한 교수대를 세웠다. 이후 전투의 승리를 이끈 로버트 보이드는 영지를 받고 보이드 가문의 작위 회복을 보상으로 받았다.
1544년 5월 7일,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보병 12,000명과 기병 4,000명, 수송선 200척이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 에든버러로 쳐들어갔다. 아란 백작은 잉글랜드군의 전력이 너무도 막강해 저항을 포기하고 에든버러를 버리고 멀찍이 후퇴했고, 잉글랜드군은 에든버러에 거의 무혈 입성한 뒤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후 잉글랜드군 약탈부대가 스코틀랜드를 반복적으로 침공해 로디언과 국경 지역을 황폐화했다.
1544년 5월 24일, 아란 백작은 글래스고 인근에서 글랜케언 백작 윌리엄 커닝햄과 두 번째로 글래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글렌케언 백작의 아들 앤드류 커닝햄과 캠버스키스의 기사 존 해밀턴이 전사했다. 그 후 레녹스 백작과 글랜케언 백작은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레녹스 백작 편에 선 자들은 반역자로 낙인찍혀 작위와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10년 후인 1554년 사면되었다.
잉글랜드군이 에든버러를 파괴한 직후인 1544년 5월 29일, 스털링 성에서 열린 의회는 잉글랜드군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아란 백작의 섭정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마리 드 기즈를 섭정으로 받들기로 했다. 그녀는 스털링 성에서 자신의 휘장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다. 하지만 그 해 11월 재차 열린 의회에서 아란 백작 지지 세력의 강한 반발에 직면하자, 아란 백작이 섭정을 다시 맡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1545년 2월 27일, 랄프 유어와 브라이언 레이턴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로우랜드를 약탈하고 잉글랜드로 귀환하던 중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군에게 앤크럼 무어 전투에서 참패했다. 잉글랜드 측 사료에 따르면, 전투 후 아란 백작이 전장에 찾아와서 앵거스 백작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는 포로 한 명에게 랄프 유어의 시신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한 뒤, 그의 시신 앞에서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이시여, 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는 너무나 잔인하고, 또 너무나 잔인한 사람이었기에 많은 남자와 고아들이 원망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그런 살육과 유혈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1546년 5월 29일, 급진적인 개신교도들이 개신교 설교사 처형을 주도한 데이비드 비튼 추기경을 살해하고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접수한 뒤, 그곳에 있던 아란 백작의 장남 제임스 해밀턴을 인질로 잡았다. 이에 아란 백작은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18개월에 걸쳐 세인트앤드루스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세인트앤드루스 반군을 지원했던 잉글랜드 정부는 에드워드 6세를 대신해 국정을 총괄하던 호국경 에드워드 시모어의 주도하에 스코틀랜드 내 개신교도들을 지키고 선왕 헨리 8세의 유지를 받들어 메리 여왕과 에드워드 6세의 결혼을 성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 침공을 선포했다.
아란 백작은 잉글랜드의 임박한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파이크병과 하이랜드 궁수 부대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를 소집했다. 여기에 목재로 제작된 '애버다지'와 '인버리스' 포대를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빼내 포병대를 재정비했다. 그는 스코틀랜드군을 에스크 강 서쪽 기슭의 경사지로 배치해,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했다. 1547년 9월, 아란 백작은 23,000명[3]에서 36,000명[4]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에드워드 시모어 휘하 잉글랜드군 16,800명을 상대로 맞섰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 아란 백작은 적진에 전령을 보내 "기독교인의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이 국경을 넘어 철수하라. 두 나라 간의 문제는 소수의 기사단을 거느린 두 사령관 간의 결투를 통해 해결하자."라고 제안했다. 이에 에드워드 시모어는 본인이 잉글랜드 국왕의 보호자로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 대신, 그는 아란 백작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 왕실이 메리 여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녀가 프랑스 왕자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1547년 9월 10일, 양군은 핑키 전투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군은 완패했고, 잉글랜드군은 에든버러 인근으로 진군해 스코틀랜드 정부를 압박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정부가 타협을 거부하고 에든버러에서 끝까지 농성하기로 하자, 에든버러 성을 공략할 중포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일주일 만에 철수하기로 했다. 그 대신 스코틀랜드의 여러 요새에 수비대를 배치했고, 로우랜드와 국경 지대의 상당 부분을 접수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정부는 여왕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기로 했고, 여왕은 프랑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한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를 지키기 위해 대거 파견되었다.
1548년 7월 7일, 아란 백작은 메리 여왕과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도팽인 프랑수아 2세의 결혼 조약에 서명했다. 1549년 2월, 앙리 2세는 그에게 샤텔로 공작 작위를 수여했고, 프랑스 내 상당한 영지를 하사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차츰 스코틀랜드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정계에 대한 프랑스의 입김은 갈수록 강해졌다. 한편, 샤텔로 공작은 스코틀랜드 내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양측을 화해하려 했다. 그의 주도로 루터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교황을 언급하기도 한 새로운 '교리문답'이 스코틀랜드 교회 예배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양 진영 모두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개신교와 가톨릭을 화해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가톨릭 신자 메리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위협은 사라졌다. 이에 프랑스 왕실은 스코틀랜드에 강한 압력을 가했고, 1554년 4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샤텔로 공작의 섭정직을 박탈하고 그 자리를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에서 전략적 이익을 챙기는 데 더욱 헌신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마리 드 기즈에게 맡겼다.
이후 수년 간 조용히 지내던 샤텔로 공작은 1559년 5월 퍼스에서 개신교도들의 반란이 벌어진 뒤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자 반란군과 정부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지만, 곧 개신교 영주들 쪽으로 기울었다. 개신교 영주들은 그의 장남인 제임스 해밀턴과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결혼시키고, 잉글랜드의 지원을 확실히 받아내려 했다. 이 결합은 해밀턴 가문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크게 높여줄 것이기에, 샤텔로 공작의 관심을 끌었다. 1559년 9월 19일, 샤텔로 공작은 개신교로 개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잉글랜드로 가서 진정한 신앙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후 개신교 신자들의 반란군과 잉글랜드 연합군은 스코틀랜드 정부군과 프랑스 동맹군을 상대로 리스 공방전을 치렀다. 이 공방전은 어느 한쪽이 뚜렷한 승기를 잡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게 흘러가다가, 1560년 6월 마리 드 기즈가 병사한 뒤 전의를 잃은 스코틀랜드-프랑스 동맹군이 협상을 요청하면서 종결되었다. 1560년 7월 6일 에든버러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군 모두 스코틀랜드에서 전면 철수했고, 개신교는 스코틀랜드에서 공인되었다. 이후 샤텔로 공작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기 아들과 얼른 결혼하고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워달라고 부추겼지만, 여왕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1560년 12월 5일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한 뒤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로 귀환하게 되면서, 스코틀랜드인들은 메리 여왕을 그대로 받들었다. 1561년 초, 엘리자베스 1세는 마침내 제임스 해밀턴과의 혼사를 취소했다.
이에 샤텔로 공작은 계획을 수정해 메리 여왕과 장남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은 지난 날 개신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로서 어머니와 대적한 그를 믿을 수 없다고 여겼기에 단호히 거부했다. 게다가 장남 제임스 해밀턴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더 이상의 결혼 계획을 추진할 수 없었다. 이후 젊은 귀족들인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윌리엄 메이틀랜드에게 밀려나 정치적 영향력이 쇠퇴하다가, 메리 여왕이 그의 정적인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의 아들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하자 1565년 모레이 백작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후 프랑스에서 수 년간 망명 생활하던 샤텔로 공작은 메리 여왕이 폐위된지 1년여 후인 1569년 2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페위된 여왕을 지지하는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 제5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과 제임스 6세를 왕으로 받든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 간의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샤텔로 공작은 자기 아들들 중 한 명을 메리 여왕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메리 여왕 편을 들기로 했다. 1568년 5월 13일 랭사이드 전투에서 메리 여왕의 반란군이 참패하고 메리 여왕이 잉글랜드로 망명했지만, 이후 5년간 스코틀랜드에서는 메리 여왕파와 제임스 6세파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샤텔로 공작은 스코틀랜드 서부를 성공적으로 장악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메리 여왕 지지 세력이 잉글랜드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제임스 6세파에게 갈수록 밀리는 걸 막지 못했다.
1573년 2월 23일, 양 진영은 엘리자베스 1세의 중재로 퍼스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왕파의 지도자였던 샤텔로 공작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은 제임스 6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고, 메리 여왕에 대한 지지와 정부에 대한 군사 행동을 중단하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이 조약에 동의하지 않은 메리 여왕 지지자들은 에든버러에서 항전했지만 곧 함락되면서 스코틀랜드 내전은 종식되었다. 1575년 1월 22일, 샤텔로 공작은 해밀턴 성에서 사망했고, 장남 제임스 해밀턴이 제3대 아란 백작이 되었지만 정신병에 걸렸기 때문에 동생 존 해밀턴이 실질적인 해밀턴 가문 수장으로 군림했다.
3. 가족
- 마거릿 더글러스(? ~ 1579): 제3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 제임스 4세와 그의 정부 마리온 보이드의 사생아 캐서린 스튜어트의 딸.
- 제임스 해밀턴(1537 ~ 1609): 아버지 사후 제3대 아란 백작이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여왕과의 혼담이 오가기도 했지만, 1562년 정신병에 걸린 뒤 남은 생애 동안 해밀턴 성에 갇혀 지내야 했다.
- 게이빈 해밀턴: 유년기에 사망.
- 존 해밀턴(1540 ~ 1604): 1579년 제4대 모튼 백작이자 제임스 6세의 섭정을 맡은 제임스 더글러스가 그와 동생 클로드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의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고발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1585년 엘리자베스 1세의 지원을 받고 복귀한 뒤 모든 영지를 돌려받았고, 이후엔 제임스 6세의 충실한 신하로서 활약했으며, 1599년 초대 해밀턴 후작에 선임되었다.
- 데이비드 해밀턴(? ~ 1611): 해밀턴 기사.
- 클로드 해밀턴 (1546 ~ 1621): 초대 페이즐리 경. 제임스 6세와 메리 여왕의 화해를 시도했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연합해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고 제임스 6세를 잉글랜드 국왕에 옹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1590년부터 정신병에 시달렸고, 그의 장남 제임스 해밀턴이 그를 대신해 해밀턴 가문을 이끌었다. 애버콘 백작, 후작, 공작 가문의 조상이다.
- 바바라 해밀턴(? ~ 1577): 제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아들 알렉산더 고든과 약혼했으나, 알렉산더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고, 뒤이어 제4대 플레밍 경 제임스 플래밍과 결혼했다.
- 제인 해밀턴: 제3대 에글린턴 백작 휴 몽고베리의 부인.
- 앤 해밀턴(1535 ~ 1574년 4월 이전):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