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아치볼드 캠벨 Archibald Campbell |
출생 | 1532년 또는 1537년 |
스코틀랜드 왕국 아가일 | |
사망 | 1573년 9월 12일 |
스코틀랜드 왕국 아가일 | |
아버지 | 제4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 |
어머니 | 핼렌 해밀턴 |
형제 | 자넷, 콜린, 마거릿, 자넷, 아그네스 |
배우자 | 진 스튜어트, 자넷 커닝햄 |
직위 | 제5대 아가일 백작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메리 여왕의 치세와 제임스 6세 통치 초기 스코틀랜드 정계에서 활약했다.2. 생애
제4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과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의 딸 헬렌 해밀턴의 장남이다. 친누이로 자넷[1]이 있었으며, 이복 형제로 콜린, 마거릿[2], 자넷[3], 아그네스[4]가 있었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존 녹스의 설교에 감명받고 개신교로 개종했다. 1557년, 그는 개신교 영주들의 연합 서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으로서, 스코틀랜드 내에 개신교 신앙을 퍼뜨리는 데 힘썼다. 1559년 5월 퍼스에서 개신교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즉시 가담하여 왕대비 마리 드 기즈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정부에 맞섰다. 그는 이 시기에 가톨릭을 고수하며 스코틀랜드 정부를 지원하는 프랑스에게 깊은 반감을 표명하며, 그들이 스코틀랜드를 강점한 뒤 스코틀랜드인들을 노예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반포했다.
개신교 봉기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지원하에 스코틀랜드 정부를 상대로 우세하게 이어졌고, 1560년 리스 공방전으로 이어진 끝에 마리 드 기즈 왕대비가 사망한 뒤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에서 전면 철수하고 개신교가 용인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메리 여왕이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복귀했을 때, 그는 모레이 백작이자 여왕의 이복형제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국정을 주도하며 친 잉글랜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면서도 마리 드 기즈와 메리 여왕 모녀에게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가 추방된 존 녹스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1563년 1월, 메리 여왕과 모레이 백작은 캠벨 성에서 아치볼드의 이복 여동생 마거릿 캠벨과 초대 도운 경 제임스 스튜어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때 메리 여왕의 신하들은 양치기 복장을 하고 가면극을 공연했다. 또한 메리 여왕과 신하들은 아가일과 버러레이를 방문했을 때 하이랜드의 전통옷을 착용했다. 이렇듯 메리 여왕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던 그였으나, 여왕이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결혼하려 하자 모레이 백작과 함께 반대했다. 메리 여왕을 옹호호한 대표적인 스코틀랜드 작가 아담 블랙우드에 따르면, 아치볼드는 1565년 6월 퍼스와 에든버러 사이를 여행하던 메리 여왕과 단리 경을 납치해 로클레븐 성 또는 캠벨 성에 가두려 했지만, 다우힐 영주가 메리에게 경고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후 메리 여왕이 끝내 단리 경과 결혼하자, 아치볼드는 모레이 백작 및 여러 개신교 지도자들과 함께 반기를 들었지만, 스코틀랜드 정부의 신속한 대처로 인해 진압되었다. 모레이 백작은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그는 의회 법정에 끌려갔지만 다시는 여왕에게 맞서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사면되었다. 이후 반란을 제대로 도와주지 않은 잉글랜드에 환멸을 느끼고 메리 여왕의 추종자가 되었다. 1567년 초 단리 경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그는 그 해 4월 20일 에인슬리 선술집에서 여러 귀족과 주교들과 함께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이 단리 경 암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인정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4월 24일 보스웰 백작이 스털링에서 이동하던 메리 여왕을 납치한 뒤 5월 15일 홀리루드에서 메리와 결혼해 버리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메리 여왕에게 등을 돌렸다.
그 후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및 다른 개신교 신자들과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켜 카베리 힐 전투에서 보스웰 백작을 무찌르고 메리 여왕을 생포했다. 그러나 모레이 백작이 메리 여왕을 폐위하고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자, 여왕을 폐위할 것까지 없다고 봤던 그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1568년 메리 여왕이 로클레번 성에서 탈출하자, 그는 메리 여왕 편으로 돌아서서 스코틀랜드 정부에 맞섰다.(메리 여왕 내전) 그러나 랭사이드 전투에서 지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참패에 일조했다.
메리 여왕이 랭사이드 전투 후 잉글랜드에 망명한 후에도, 그는 자기 영지에서 계속 항전했다. 그러다가 1571년 스코틀랜드 섭정인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화해하고 제임스 1세 편으로 돌아섰다. 이후 추밀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1572년 스코틀랜드 대법관이 되었다. 1573년 9월 12일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여 킬문 교구 교회에 묻혔고, 이복형제인 콜린 캠벨이 그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진 스튜어트(? ~ 1588):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와 정부인 엘리자베스 베순의 딸. 1567년 남편과 불화한 끝에 집을 떠났고, 1573년 6월 23일에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 자넷 커닝햄(? ~ 1584): 글렌캐언 백작 알렌산더의 둘째 딸. 남편이 사망한 후인 1574년 6월 사산아를 낳았다. 이후 러스의 험프리 콜훈과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