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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더글러스(제4대 모튼 백작)

<colbgcolor=#0065bd><colcolor=#ffffff>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
James Douglas, 4th Earl of M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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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제임스 더글러스
James Douglas
출생 1516년
스코틀랜드 왕국 앵거스 백작령
사망 1581년 6월 2일 (향년 64~65세)
스코틀랜드 왕국 에든버러
배우자 엘리자베스 더글러스(1543년 이전 결혼)
자녀 아치볼드, 조지, 이름을 알 수 없는 딸 3명
형제 제7대 엥거스 백작 데이비드 더글러스
아버지 피텐드라이히의 조지 더글러스
어머니 엘리자베스 더글러스
직위 제4대 모튼 백작, 스코틀랜드 섭정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 백작, 군인.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개신교 영주로, 메리 여왕을 축출하고 제임스 6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한 뒤 뒤이은 내전에서 메리 여왕 추종 세력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이후 제임스 6세의 섭정으로 군림하며 강대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성년이 된 제임스 6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면서 처형당했다.

2. 생애

아버지 조지 더글러스는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동생으로, 제임스 5세메리 여왕 치세 초기에 활동한 기사이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더글러스는 엘긴 인근 피텐드라이히의 영주 데이비드 더글러스의 딸이자 상속인이다. 제임스의 백부인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제임스 5세의 미성년자 시절에 섭정을 맡았다. 1557년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사망한 뒤 형 데이비드가 제7대 앵거스 백작이 되었지만 1년 만인 1558년에 사망했고, 아들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제8대 앵거스 백작위를 계승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제임스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인 더글러스 씨족의 수장이 되었다.

제임스는 젊은 시절부터 존 녹스 등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종교 개혁을 단행한 잉글랜드와 우호 관계를 맺고, 스코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만들길 희망했다. 거친 구혼 시기인 1544년, 그는 에든버러 방화를 저지른 잉글랜드군 사령관인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달키스 궁전과 탄탈론 성을 넘기는 걸 논의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1548년 6월 잉글랜드군에 맞서 달키스 궁전을 방어하다가 허벅지에 심한 상처를 입고 생포되어 인질 취급당했다. 1560년 불로뉴 조약이 체결된 후 스코틀랜드에 붙들린 잉글랜드군 장성 존 루트렐과 교환되었고, 이후 모튼 백작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557년 스코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연합에 가담했고, 1559년 마리 드 기즈 왕대비에 대항한 개신교 영주들의 반란이 벌어졌을 때 가담했다. 1560년 2월, 잉글랜드군을 스코틀랜드로 초대해 마리 드 기즈 왕대비와 스코틀랜드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몰아낸다는 내용의 베릭 조약에 서명했다. 그해 11월에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의 장남인 제임스 해밀턴과의 결혼을 주선했지만 실패했다.

1561년 가톨릭 신자이며 프랑스 왕국의 전 왕비였던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자, 모튼 백작은 여왕이 스코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 할 거라고 의심했다. 하지만 여왕은 의회에서 개신교 신자들을 박해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맹세했고, 모튼 백작은 일단 여왕의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1565년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메리 여왕과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결혼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가담하길 거부했다. 그러나 모레이 백작이 반란에 실패하고 잉글랜드로 망명한 뒤 가톨릭 고문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모튼 백작은 다비드 리치오와 친밀하게 지내는 메리 여왕과 갈등을 벌이던 단리 경에게 접근해, 메리 여왕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리치오의 자식일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알려줬다. 이에 분노한 단리 경은 음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566년 3월 9일, 모튼 백작은 제3대 루스벤 경 패트릭 루스벤 등과 함께 궁전에 난입했고, 단리 경은 이들과 함께하면서 근위대가 침입자들을 저지하지 않도록 막아줬다. 침입자들은 메리 여왕과 함께 있던 리치오를 강제로 끌고 가서 단검으로 57번이나 찔러 살해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설득에 감화된 단리 경이 메리 여왕과 함께 궁전에서 탈출해 던바 성으로 피신한 뒤,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 등이 이끄는 왕실군 8천 명과 함께 에든버러로 귀환하자, 모튼 백작은 루스벤 경 등과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567년 초, 모튼 백작은 사면을 받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해 2월 10일, 단리 경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단리 경은 죽어가면서 더글러스 가문, 특히 모튼 백작을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의 진위는 불분명하며,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론은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이 암살을 공모했다고 봤다. 그 후 보스웰 백작이 스털링 성에서 외동아들 제임스 왕자를 보고 에든버러로 귀환하던 메리 여왕을 도중에 '납치'해 던바 성채로 데려간 뒤 결혼해 버린 사건이 벌어지자, 모튼 백작은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에 대항한 남부 귀족 연합에 가담했다.

1567년 5월 15일, 반란군은 카베리 힐 전투에서 보스웰 백작을 몰아내고 메리 여왕을 생포했다. 그 후 메리 여왕은 로클레번 성에 감금된 뒤 함력에 못 이겨 아들 제임스 왕자를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로 세우는 데 동의했다. 모튼 백작은 여왕의 퇴위 협상에 참여했다. 1년 후 메리 여왕이 탈옥에 성공한 뒤 지지자들을 규합해 복위를 꾀하자, 모튼 백작은 모레이 백작과 함께 정부군을 이끌고 출진해 랭사이드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로 쫓아냈다.

이후 제임스 6세의 첫 번째 섭정으로서 메리 여왕의 추종자들을 상대로 내전을 치르는 모레이 백작의 최측근 고문이 되었고, 메리 여왕과 보스웰 백작 사이의 서신인 보석함 편지를 엘리자베스 1세에게 전달하는 걸 주도했는데, 이는 메리 여왕의 복위에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1570년 1월 모레이 백작이 암살된 후, 모튼 백작은 왕실군을 이끌어 메리 여왕을 복위하려는 영주들과 항쟁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를 여러 차례 만나서 메리 여왕 지지 세력을 탄압하고 스코틀랜드에서 가톨릭을 완전히 축출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전폭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랑스와의 갈등을 우려해 스코틀랜드 내전에 개입하는 걸 피했다.

1571년 9월 4일, 제임스 6세의 두 번째 섭정인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가 암살당했다. 이후 초대 마르 백작 존 어스킨이 세 번째 섭정을 맡았지만, 군사적 재능이 모자랐기에 모튼 백작이 군대를 이끌어 메리 여왕 지지자들과 계속 싸웠다. 1572년 10월 29일, 존 어스킨이 스털링에서 짧은 병환 끝에 사망했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병사했다고 기술되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모튼 백작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주장했다. 스코틀랜드 외교관이자 회고록 작가 제임스 멜빌(1535 ~ 1617)은 마르 백작이 모튼 백작이 달키스 궁전에서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 이후 급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 후 제임스 6세의 네 번째 섭정이 된 모튼 백작은 잉글랜드의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메리 여왕 지지자들을 압박했다.

1573년 2월 23일, 모튼 백작은 엘리자베스 1세의 중재로 여왕파의 지도자들인 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과 퍼스 평화 협약을 맺었다. 두 영주는 제임스 6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고, 메리 여왕에 대한 지지와 정부에 대한 군사 행동을 중단하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윌리엄 커콜디를 비롯해 이 조약에 동의하지 않은 메리 여왕 지지자들은 에든버러에서 계속 항전했지만, 스코틀랜드 왕실군과 잉글랜드군이 12일간 3,000여 발에 달하는 포탄을 퍼부으며 맹공을 퍼붓자 결국 5월 28일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내전이 종식된 후, 모튼 백작은 스코틀랜드 파벌의 거의 모든 지도자가 내전에 휘말려 죽거나 병사하면서 공백이 생긴 틈을 타 국가 행정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그는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법치주의와 중앙 정부 기관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중점을 뒀다. 국가 및 지방 자치 단체 직책을 맡는 데 대한 의무적 요건으로 왕과 개신교에 대한 충성 맹세를 의무화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정계에서 가차 없이 축출했다. 1572년에서 1573년 사이에 교회와 국가 간의 타협안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국가가 각 교회에 배치한 감독 제도는 유지되었지만, 개신교 성직자는 교회 직책 선거와 교회 재산 처분을 자율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 모튼 백작은 스코틀랜드 교회를 의식과 조직 면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국교회와 점점 더 유사하게 이끌었고, 이를 통해 두 국가가 공통 조건을 기반으로 미래에 통일되기를 희망했다.

모튼 백작의 외교 정책의 주안점은 잉글랜드 왕국과의 동맹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방위 동맹 체결을 촉구했고, 잉글랜드 왕국이 스코틀랜드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해 주는 대가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의 방위 전쟁을 돕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가 자국의 방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가톨릭 국가이지만 스페인펠리페 2세를 적대하는 프랑스 왕국과 동맹을 맺는 걸 선호했다. 결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모튼 백작의 통치 기간에 군사적, 정치적 연합을 달성하지 못했다.

또한 모튼 백작의 종교 정책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큰 불만을 샀다. 그들은 감독 제도를 폐지하고 목사뿐만 아니라 권위 있는 평신도까지 포함하는 분권화된 교구 통치 기군인 장로회 제도의 창설을 주장한 앤드류 멜빌에게 호응했다. 모튼 백작은 앤드류 멜빌의 주장을 배격하면서, 자신과 같은 부류의 교구민 6명이 교수형에 처하기 전까지는 스코틀랜드에 평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렇듯 섭정이 장로회를 받아들이길 거부하자,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은 점차 그를 배척했다.

이와 동시에, 법과 질서 분야에서 모튼이 단호하게 취한 조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 불만을 일으켰으며, 재정 문제에 무심한 그의 태도 때문에 왕실 재정이 매우 궁핍해졌고, 자기 친척들을 요직에 앉히는 조치에 대한 반감도 무척 컸다. 모튼 백작이 재정난을 당장 만회하기 위해 시행한 주화 평가절하 역시 시민들과 가장 가난한 계층의 반감을 샀다. 이렇듯 그에 대한 불만을 품은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메리 여왕 내전 종식을 이끌면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춘 듯했던 그의 입지는 점점 약해졌다.

1578년, 모튼 백작에게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었던 제4대 아솔 백작 존 스튜어트와 제6대 아가일 백작 콜린 캠벨이 제임스 6세의 12세 생일잔치가 열린 틈을 타 왕을 납치 하고, 왕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섭정을 종식한다고 선언했다. 모튼 백작은 일단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하고, 에든버러 성, 홀리루드 궁전 , 국새(國章) , 스코틀랜드의 보석과 영예를 넘겨주고 잠시 로클레번 성으로 물러나 정원 조성에 전념했다. 3월 10일, 제임스 6세는 코틀랜드의 많은 사람들이 사임한 모튼의 연대를 "싫어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해 행정의 부담을 떠맡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모튼 백작이 갑자기 물러난 것에 놀라움과 불쾌감을 표했고, 외교관 토머스 랜돌프와 로버트 보우스에게 모튼 백작이 정치를 잘못 이끈 혐의로 고발당하면 모튼 백작을 변호하라고 지시했다.

1578년 4월 27일, 제2대 마르 백작 존 어스킨과 그의 형제들의 협조로, 모튼 백작은 스털링 성과 제임스 6세의 신병을 확보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8월 12일, 그의 적대 세력이 폴커크에서 모튼 백작의 군대와 맞섰지만, 에든버러의 두 장관인 제임스 로슨과 데이비드 린제이, 그리고 로버트 보우스가 평화를 지키라고 권고했다. 이후 명목상의 화해가 이뤄졌고, 스털링 의회에서 새로운 정부가 도입되었다. 모튼 백작은 의회 의장이 되었고, 아솔 백작은 추밀원 의원으로 남았다. 얼마 후 아솔 백작이 사망하자, 사람들은 모튼 백작이 자신을 대적한 아솔 백작에게 원한을 품고 독살했다고 속닥였지만, 증거는 없다.

1579년 봄, 모튼 백작은 여전히 메리 여왕을 추종하던 해밀턴 가문을 잠재적인 반역자로 간주하고 토벌에 나섰고, 클로드 해밀턴과 존 해밀턴은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579년 9월, 제임스 6세는 성년식을 거행한 뒤 모튼 백작의 보호에서 벗어나 에든버러로 귀환했다. 그는 어머니 메리가 아버지 단리 경을 죽였다는 조지 뷰캐넌 등 주변인들의 말을 듣고 자라서 어머니에게 증오심을 품었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1580년 프랑스에서 막 돌아온 30세의 레녹스 공작 에스미 스튜어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제임스 6세를 둘러싼 에스미 외 젊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종교심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왕에게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튼 백작을 질시했다. 제임스 6세는 그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모튼 백작을 완전히 배제하기로 마음먹었다.

1580년 12월 31일, 아란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홀리루드 의회에서 모튼 백작을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암살에 공모한 혐의로 고발했다. 모튼 백작은 즉시 홀리루드 하우스로 구금된 뒤 덤버턴 성으로 압송되었다. 6월 1일 몬트로즈 백작 존 그레이엄이 주재한 톨부스 순회재판에 출석한 모튼 백작은 단리 경 암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모진 고문 끝에 보스웰 백작이 자신에게 살인 계획을 알려줬다고 자백했지만, 살인이 벌어졌을 때 공범으로 가담한 건 부인했다. 몬트로즈 백작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집행하게 했다.

1581년 5월 30일, 모튼 백작은 에든버러로 끌려와서 로열 마일에 있는 로버트 고얼레이의 집에 감금되었다. 그는 하인 윌리엄 스튜어트와 함께 있었는데, 윌리엄 스튜어트는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날 밤 잠을 잘 잤다고 증언했다. 1581년 6월 2일, 세인트 자일스의 영주 제임스 로슨이 참관한 가운데 처형당했다. 그의 처형은 초기 형태의 단두대인 메이든(maiden)으로 집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다음 날까지 메이든에 놓여 있다가 그레이프라이어스 커크야드의 공동묘지에 옮겨졌다. 그의 머리는 에든버러 톨부스 밖 북쪽 박공의 가장 높은 돌에 박힌 뾰족한 못에 18개월 동안 박혀 있다가 1582년 12월 몸통이 묻힌 곳과 같은 곳에 묻혔다.

모튼 백작은 1543년 이전에 제3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의 딸인 엘리자베스 더글러스와 결혼하여 '모튼의 마스터'로 일컬어졌고, 1553년 장인이 사망한 뒤 장인의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더글러스는 정신병을 앓았고, 낭비벽이 심해 자기 일을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남편 사후에 영지 관리권이 박탈당했다. 두 부부 사이에는 두 아들 아치볼드와 조지가 있었지만,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세 딸 모두 어머니처럼 정신병이 있었다. 이에 왕실은 모튼 백작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했다가 엘리자베스 더글러스의 누이 베아트릭스의 아들인 제8대 맥스웰 경 존 맥스웰에게 넘겨줬다. 1586년, 모튼 백작의 작위와 영지는 그의 조카이자 상속인인 제8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주어졌다. 존 맥스웰은 모튼 백작 칭호를 여전히 쓸 수 있었지만, 작위는 그의 상속인에게 계승되지 않았다.

모튼 백작은 엘리자베스 더글러스 외에도 여러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들을 여럿 낳았는데, 그중 한 명인 스팟의 제임스 더글러스는 1577년 아버지에 의해 플러 스카든의 수도원장으로 선임되어 제8대 글래미스 경 존 라이언과 공유한 커닝햄, 캐릭, 갤러웨이의 납 광산 임대권을 받았다. 제임스 6세와 갈등을 여러 차례 벌이다가 제5대 보스웰 백작 프랜시스 헵번과 공모했다는 반역죄로 여러 차례 기소되어 자주 국외 망명을 떠나야 했지만, 1603년 왕의 용서를 받고 던바의 대장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