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알렉산더 세튼 Alexander Seton |
출생 | 미상 |
스코틀랜드 왕국 로디언 | |
사망 | 1348년경 (향년 미상) |
로도스 | |
배우자 | 크리스티나 르 첸 |
자녀 | 토머스, 윌리엄, 마거릿, 알렉산더, 존 |
직위 | 로디언 영주, 베릭 수비대 사령관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 로버트 1세의 부관으로서 활약했으며,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엔 베릭 수비대장으로서 에드워드 3세에 맞섰지만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궤멸되자 항복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를 추종하는 세력이 스코틀랜드에서 대세가 되어가자 도로 데이비드 2세 편으로 전향했다.2. 생애
12세기 말부터 로디언의 에든버러 동쪽 지역에서 영지를 소유했던 세튼 가문 출신이다. 요크셔 노스 라이딩의 세튼 마을에서 이름을 딴 세튼 가문 출신이었던 로버트 1세의 측근 크리스토퍼 세튼, 존 세튼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그의 초기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309년 8월 존 드 스트라칸과 함께 퍼스의 수도원에 기부한 사실은 알려졌다. 퍼스는 1313년까지 잉글랜드군의 보급 기지이자 주둔지였으며, 스트라칸 가문은 부컨 백작 존 코민의 동맹자로서 로버트 1세에 대적했다. 이로 볼 때, 알렉산더 세튼은 초기엔 잉글랜드 편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배넉번 전투 중이던 1314년 6월 23일 밤, 스코틀랜드 진영에 망명하여 잉글랜드 진영의 지도력이 부족하고 사기가 낮다고 알렸다. 이에 로버트 1세는 다음날 잉글랜드군과 전면전을 벌여 대승을 거뒀다. 그 후 알렉산더는 로버트 1세의 가장 가까운 고문 중 한 명이 되었다. 1315년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으며, 1317년 왕실 집사로 선임되었으며, 1317년 9월 던바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와 함께 중요한 국경 요새인 베릭을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320년 교황 요한 22세에게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청원한 아브로스 선언에 서명했다.
1327년 스코틀랜드에 접수된 베릭 성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이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 지대인 베릭 성을 지키던 1333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베릭 성을 포위했다. 알렉산더는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한 끝에 1333년 7월 11일까지 스코틀랜드군이 구호하지 않으면 도시를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합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인질을 잉글랜드 측에 넘겨줬는데, 인질 중에는 알렉산더 서튼의 아들인 토머스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섭정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베릭 성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이때 윌리엄 키스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분견대가 트위드 강의 북쪽 제방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다리의 불에 탄 폐허를 가까스로 건넌 뒤 베릭 마을에 들어섰다. 그리고 또다른 분견대는 잉글랜드 국경지대에 있는 벰버그 성을 공격했지만, 공성 장비가 없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33년 7월 11일,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 수비대에게 약속했던 대로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수비대는 윌리엄 키스가 분견대를 이끌고 베릭 마을에 들어서면서 자기들이 구호받았으므로, 그 계약은 더이상 수비대를 구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알렉산더 세튼의 아들 토머스를 수비대가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이후로 하루에 두 명씩 스코틀랜드 인질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 후 추가 항복 조건이 합의되었다. 이번에는 스코틀랜드군이 베릭 외곽에서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거나, 1333년 7월 20일까지 200명의 병력을 마을에 투입함으로써 구호 조치를 취하지 못할 경우, 베릭은 항복하고 주민과 수비대는 베릭 성을 떠나기로 했다. 윌리엄 키스는 이 항복 조건을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전달했고, 더글러스는 정면 대결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벌어진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완패하자, 알렉산더는 베릭 성을 에드워드 3세에게 넘겼다.
1334년 에드워드 3세의 지원으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에드워드 발리올이 소집한 의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2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든 스코틀랜드군이 반격해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휩쓸자, 그는 다시 편을 바꾸어 데이비드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341년 이후 구호 기사단에 들어갔고, 로도스의 대장인 엘리옹 드 빌 뇌브에 의해 구호 기사단 토르피헨 가문의 책임자로 선임된 후 1345년 토르피헨 대장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346년 2월 6일 교황 클레멘스 6세로루터 일시적인 면죄부를 받아 고해 신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구호 기사단의 기사 자격으로 1348년 8월 12일에 에드워드 3세로부터 안전 통행권을 받고, 1346년 네빌스 크로스 전투 참패 후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던 데이비드 2세를 면회했다. 그는 그 해를 못 넘기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가족
- 크리스티나 르 첸: 스트라로흐의 기사 프랜시스 르 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