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9 17:25:47

에드워드 브루스

이름 에드워드 브루스
Edward Brus
출생 1280년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318년 10월 14일 (향년 37~38세)
아일랜드 영지 포하트 언덕
아버지 로버트 브루스
어머니 마조리 캐릭
형제 이사벨라, 메리, 크리스티나, 로버트, 토머스, 알렉산더 마틸다, 마거릿, 엘리자베스
배우자 이사벨라 스트라스보기(약혼녀 또는 애인)
이사벨라 드 로스
자녀 알렉산더 브루스
직위 캐릭 백작, 아일랜드의 아르드리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로버트 1세의 동생으로,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형이 잉글랜드군과 대적하는 걸 도왔다. 특히 1315년부터 아일랜드 원정을 감행해 한때 아일랜드의 패권을 확보하고 아르드리를 칭할 정도로 기세를 드높였지만, 1318년 10월 14일 포하트 언덕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와 잉글랜드 북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브루스 가문 출신으로,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와 제2대 캐릭 백작 닐 맥도나의 딸 마조리 캐릭의 세번째 아들이다. 에드워드의 어린 시절은 그가 한동안 친절한 아일랜드인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그는 아마도 두 형 로버트 브루스, 처럼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게일인 가족의 집에서 양육되었을 것이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 사후, 조부인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했고, 존 발리올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1292년 스코틀랜드 왕위를 결정할 권한을 스코틀랜드 의회로부터 받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낙점했다. 1296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는 존 발리올을 폐위하고 자기를 왕으로 앉혀주겠다는 에드워드 1세의 약속을 믿고 에드워드 1세 편에 섰다. 그러나 존 발리올이 폐위된 뒤, 에드워드 1세는 스스로 스코틀랜드 국왕에 올랐다.

1297년 윌리엄 월레스, 앤드류 모레이 등이 잉글랜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큰형이자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초기엔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반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입장을 바꿔 반란에 가담했다. 1298년 폴커크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참패한 윌리엄 월레스가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직위에서 사퇴한 뒤, 로버트 브루스는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 잉그램 드 움프라빌 등과 함께 수호자에 올랐다. 그러나 존 코민 3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사임했고, 1302년 2월 에드워드 1세 편으로 돌아섰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이런 형을 따라 잉글랜드군에 종군했고, 1304년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 왕자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306년 2월 형 로버트 브루스가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를 덤프리스 교회에서 살해하고 3월에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가담했다. 스코틀랜드 시인 존 바버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존 코민 3세를 살해하기 전에 동생 에드워드를 존 코민 3세에게 사절로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또다른 형제 토머스 브루스알렉산더 브루스라는 기록도 있다.

1306년 6월, 로버트 1세는 메스번 전투에서 펨브로크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총독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했다. 로버트 1세는 가족 및 소규모 추종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서부로 도주해 헤브리디스 제도 또는 아일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북부로 달아났던 닐 브루스가 1306년 9월 킬드럼미 성에서 체포된 뒤 베릭으로 끌려가 잔혹하게 처형되었고, 1307년 2월에는 토머스 브루스알렉산더 브루스 형제가 소규모 병사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남서부 갤러웨이의 라이언 호에 상륙했다가 갤러웨이의 유력 가문인 맥도월 가문의 지도자 둔갈 맥도월기습 공격으로 체포된 뒤 칼라일로 보내져서 역시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로버트 1세의 남자 형제는 오직 에드워드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는 1307년 여름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추격대를 상대로 글렌 트룰 전투에서 격퇴하고 뒤이어 에이머 드 발랑스를 라우던 힐 전투에서 격파했을 때 최측근으로서 종군했을 것이다. 1307년 7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삼아했고,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2세는 9월에 런던으로 돌아갔다. 이후 스코틀랜드 반군에 대한 잉글랜드군의 압박이 완화되었고, 로버트 1세는 이를 틈타 스코틀랜드 내 정적들에 대한 공세를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에드워드는 1307년 말 로버트 1세가 부컨 백작 존 코민과 대치하다가 중병에 걸렸을 때 형을 대신해 군대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

에드워드는 1307년 가을부터 스코틀랜드 서해안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다. 아이슬레이의 도널드의 지원을 받은 그는 잉글랜드 지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러다가 1308년 6월 29일 도널드 맥켄이 이끄는 갤러웨이 귀족들을 디 강 또는 크리 강에서 격파하고, 헤스탄 섬에 있는 멕도월 성을 불태웠으며, 둔갈 맥도월을 비롯한 잉글랜드 지지자들이 잉글랜드로 도주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잔존한 잉글랜드군이 수비하는 성들을 하나둘씩 공략한 끝에, 1313년에 모두 평정했다. 로버트 1세는 동생의 공적을 기려 1309년 3월에 에드워드를 갤러웨이의 영주로 선임했다.

에드워드는 이후에도 형의 군대에 종군하면서 잉글랜드군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로버트 1세의 주요 사령관이자 고문이 된 인물은 그가 아니라 1312년 초대 모레이 백작으로 선임된 토머스 랜돌프였다. 에드워드는 1313년 10월 이전에 캐릭 백작으로 선임되었지만, 그의 영지는 토머스 랜돌프보다 훨씬 더 적은 영지와 특권을 누렸다. 존 바버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1312년 4월 초에 던디를 점령했지만, 로버트 1세가 포위 공격을 한 후 주민들이 합의한 조건에 따라 도시가 항복했기 때문에 그가 한 역할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1314년 2월 말 제임스 더글러스가 기습 공격을 가해 록스버러 성을 함락한 후, 로버트 1세는 동생 에드워드에게 록스버러 성을 철거해 잉글랜드군이 더 이상 이곳을 거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1314년 4월 16일, 에드워드의 그의 군대는 컴벌랜드 귀족들이 합의안 몸값 지불을 이행하지 않자 컴벌렌드로 쳐들어가 마을과 도시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살해했으며, 가축을 대거 약탈했다. 이후 스털링 성을 포위 공격한 그는 1314년 5월 수비대와 협정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그들이 6월 24일까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스코틀랜드에 항복한다는 것이었다.

1314년 6월 중순,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스털링 성을 구원하기 위해 북상했다. 이 소식을 접한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군을 대거 끌어모은 뒤 쉴트론[1] 3개 부대를 결성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그 중 한개 부대를 지휘했고, 6월 23~24일 배넉번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의 잉글랜드 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 1314년 8월 1일, 에드워드는 제임스 더글러스와 함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노섬벌랜드로 쳐들어가 리치먼드셔까지 진군하면서 가축을 약탈하고 곡물 밭을 파괴한 후, 스웨일데일과 스테인무어를 거쳐 막대한 전리품을 챙긴 뒤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브러, 애플비, 커크 오스월드를 방화했다.

한편, 배넉번 전투가 끝난 뒤 포로가 된 잉글랜드의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은 로버트 1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드 버러와 그의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마조리 브루스와 교환되었다. 이후 로버트 1세는 자신에게 아직 아들이 없는 점을 고려해, 1315년 4월 27일 에어에서 열린 의회에서 자기가 죽은 뒤의 왕위 계승을 정했다. 이에 따르면, 만약 그가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으면 에드워드 브루스가 왕위를 물려받고, 로버트 1세가 어린 아들을 남겨두게 되면 에드워드 브루스가 아니라 초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섭정을 맡을 것이었다.

에어에서 의회가 소집될 무렵, 에드워드 브루스는 형과 사전 합의한 뒤 아일랜드를 향한 원정을 준비했다. 학계에서는 이 원정이 감행된 동기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기했다. 우선, 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잉글랜드군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꾸준히 공급했다. 특히 더블린, 던독, 드로이다 항구는 잉글랜드 선박이 스코틀랜드 서해안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곳을 공략한다면,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할 때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는 경로를 상실하게 되며,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스코틀랜드에 곡물과 가축을 공급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아일랜드 내 반 잉글랜드 정서를 품은 게일인들이 로버트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 전승에 따르면, 타르 에오가인(현재 북아일랜드 타이론 주)의 소왕인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이 에오간의 남동쪽 소왕국인 베르됭과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의 가신들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영토를 지키기 위해 가신 및 동맹자 12명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구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브루스 본인의 개인적인 야심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그는 아일랜드를 정복한 뒤 형이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군림하는 동안, 본인은 아일랜드의 아르드리로 군림하며, 두 형제가 힘을 합쳐 잉글랜드를 공동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1315년 5월 26일, 에드워드 브루스는 앤트림의 라른에 상륙했다. 일부 연대기는 그가 이끈 병력이 5,000명에 달하며, 함대는 300척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배넉번 전투 당시에 동원된 스코틀랜드군이 5,000 ~ 8,000명인데, 아일랜드 원정에 그만한 병력을 파견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면서, 에드워드가 아일랜드로 출진한 병력은 1,000명도 채 되지 않는 소규모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잉글랜드군과의 오랜 전쟁에 단련되었으며,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존 드 소울스, 필립 드 모브레이 등 숙련된 장교들이 이끌었다. 아일랜드로 파견된 스코틀랜드 전력의 핵심은 헤브리디스 제도 출신 장병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1315년 6월 6일, 에드워드 브루스는 얼스터에서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 및 여러 게일인 귀족들과 접견한 뒤 그로부터 아르드리를 대대로 세습할 권리를 양도받고 아르드리로 즉위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의 보급로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성인 캐릭퍼거스 성을 포위했다. 6월 29일, 스코틀랜드인들은 격렬한 전투 끝에 던독을 공략하고 그곳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는 게일인 주민 중 스코틀랜드군에 가담하기를 주저하던 자들에게 "계속 주저한다면 적으로 간주하고 쓸어버리겠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조치였다.

제2대 얼스터 백작으로서 아일랜드 영지를 이끌었던 리처드 드 버러는 에드워드 브루스에 대항하여 가신들을 동원했다.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전투와 마을과 촌락의 파괴가 벌어진 후, 에드워드 브루스는 1315년 9월 10일 코너 전투에서 리처드 드 버러를 격파했다. 그 후 리처드 드 버러는 전력 손실이 막심했기에 더 이상 스코틀랜드 침략자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남은 영토를 방어하는 것만 주력했다. 이제 얼스터에서 근거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에드워드 브루스는 남하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대규모 약탈을 자행하며 농장과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1315년 12월, 에드워드 브루스는 켈스에서 로저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후 트림 성을 포위했지만, 성의 방어 시설이 강력했기에 함락하지 못했다. 로저 모티머와 전직 보안관 테오발드 드 베르됭은 패전 후 잉글랜드로 도피했다. 이로 인해 미스는 사실상 방치되었고, 더블린 역시 위험에 처했다. 1316년 1월, 에드워드 브루스는 더블린 인근에 이르렀지만, 그곳의 방어가 굳건하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더블린을 우회하여 아일랜드 남부의 킬다르로 진군했다.

1316년 1월 26일, 스코틀랜드군은 아시 인근의 아즈컬에서 에드먼드 보안관과 아일랜드 남부 귀족들이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과 마주쳤다. 이 연합군은 잉글랜드 측이 아일랜드에서 소집할 수 있는 마지막 군대였기에, 여기서도 완패한다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스코틀랜드군이 수 개월간의 전역으로 지쳐 있고 보급품이 부족하다는 걸 간파하고, 전면전을 회피하고 방어에 주력했다. 스코틀랜드군은 그들을 공격했지만 쉽사리 압도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자 전투를 중단한 뒤 다음 날 얼스터로 철수했다.

그 후 에드워드 브루스는 1316년 내내 얼스터에 머물면서 정부를 세우고 순회판사를 선임하려고 노력했다. 그해 봄과 여름, 스코틀랜드군은 그린캐슬과 노스버그 성을 점령했다. 1316년 7월 말이나 8월 초, 로버트 1세가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아직까지도 버티고 있던 캐릭퍼거스 성 공방전을 지원했고, 캐릭퍼거스 성은 구원군이 좀처럼 오지 않는데다 식량마저 바닥나자 1316년 9월에 항복했다. 로버트 1세는 곧 돌아갔고, 에드워드 브루스는 1316년 9월 30일 스코틀랜드로 가서 파이프의 쿠퍼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의 게일인 소왕과 귀족에게만 지원을 받지 않았다. 일부 아일랜드 프란치스코회 성직자들도 설교에서 신자들에게 에드워드 브루스를 지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아일랜드는 오직 교황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잉글랜드가 불법적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에 잉글랜드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아일샴의 제프리는 에드워드 2세를 대신해 프란치스코회 총장인 체세나의 미카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미카엘은 아일랜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에드워드 브루스를 옹호하는 설교를 하는 걸 금지했다. 교황 요한 22세도 이 금지 조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현지 수도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를 이어갔고, 1316년 하반기에 렌스터, 데스먼드, 토몬드에서 잉글랜드의 통치에 반항하는 아일랜드 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1317년 1월, 로버트 1세는 동생의 원정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진군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과 아일랜드 동맹군은 캐릭퍼거스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새로운 작전을 논의했다. 이후 그들은 더블린을 정복하거나 에드먼드 버틀러가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을 섬멸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해 2월 초, 에드워드 브루스는 토머스 랜돌프, 로버트 1세,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과 함께 약탈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미스의 슬레인을 불태운 뒤, 2월 23일 이전에 더블린 인근으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에 있는 모든 마을을 약탈했다.

잉글랜드 수비대는 더블린 성벽 바깥의 건물들을 불태워서 적이 쓰지 못하게 했고,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는 더블린 성벽 뒤에서 버텼다. 그러나 얼마 후, 잉글랜드 당국은 그가 로버트 1세의 장인이라서 로버트 1세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체포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아일랜드에 들이닥친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보급품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어서[2] 더블린 공방전을 벌일 수 없음을 인지하고, 더블린을 우회한 뒤 남서쪽으로 이동해 렌스터와 먼스터를 거쳐 4월 초에 리머릭에 도착했다. 에드먼드 버틀러가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이 그들을 추격해 스코틀랜드군의 진군을 방해했지만, 전면전은 회피했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동맹군은 리머릭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1317년 4월, 국왕의 부관을 맡은 로저 모티머가 지원군을 이끌고 아일랜드 남부에 상륙했다. 이후 로저 모티머는 에드먼드 버틀러와 합세한 뒤 반격하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군은 현지 주민들의 비협조로 곤경을 겪다가 얼스터로 철수했다. 스코틀랜드 측은 이 원정에서 길고 힘든 작전을 치르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지만,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 많은 손실을 입었다. 1317년 5월 22일, 로버트 1세와 토머스 랜돌프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 남았지만, 더 이상 아일랜드 소왕 및 귀족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얼스터에서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1318년 10월 초, 에드워드 브루스는 원정군을 재차 일으켰다. 스코틀랜드에서 지원군이 곧 올 예정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동맹 세력을 전부 상실하고 완전히 고립될 거라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작정 원정을 감행했다. 에드먼드 버틀러와 존 드 버밍엄이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은 적이 출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출진하여 에드워드 브루스에게 접근했다. 10월 14일, 양측은 던독 인근의 포하트 언덕에서 대면했다.

아일랜드 동맹군이 더욱 강력한 적군과 맞서는 걸 반대하자, 에드워드 브루스는 그들을 언덕 꼭대기에 가까운 후방에 배치한 뒤, 2,000 가량의 스코틀랜드군만 이끌고 적 진영에 접근했다. <라네르코스트 연대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은 세 개 대열로 나뉜 채 진군했지만, 서로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이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3번째 대열을 이끌고 진군했다가 적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존 드 소울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기사 30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헤브리디스의 족장 막 루아리드리, 아가일의 족장 막 돔날도 전사했다.

에드워드 브루스의 수급은 참수되었고, 사지가 4개로 잘려나가 아일랜드의 네 지역으로 보내졌고, 머리는 요크에 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보냈다. 에드워드 2세는 아일랜드를 수 년간 휩쓸었던 스코틀랜드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존 드 버밍엄을 라우스 백작에 선임했다. 얼스터 연대기는 에드워드 브루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 전역을 파괴한 인간으로, 외국인과 게일인 모두를 해쳤지만, 던델간에서 싸우다가 아일랜드의 외국인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부대에는 인시갈 헤브리디스의 왕인 맥 루아이드리와 아가일의 왕인 맥 돔날이 죽었고, 주변의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학살당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그의 죽음보다 아일랜드 사람드에게 더 나은 일은 없었다. 그가 있던 3년 반 동안 아일랜드 전역에서 사람들이 죽고 죽였고,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일랜드 전역에서 서로를 잡아먹었다.

3. 가족

  • 이사벨라 드 스트라스보기: 제9대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의 딸. 에드워드 브루스와 결혼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잉글랜드 측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는 이사벨라와 결혼하겠다고 꼬드겨서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지만, 나중에 입을 싹 씻고 결혼을 거부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브루스 가문을 폄훼하려는 의도로 조작된 기록이라 단정하며, 에드워드 브루스는 그녀와 약혼했지만 나중에 파기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사벨라의 남자 형제 데이비드 2세 드 스트라스보기는 에드워드 브루스가 자기 누이를 거둬들이지 않은 것에 분노해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섰다.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2] 당시 아일랜드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 지역이 소빙하기로 인해 기근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