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존 코민 John Comyn |
출생 | 1250년경 |
스코틀랜드 왕국 부컨 백작령 | |
사망 | 1308년 (향년 57~58세) |
잉글랜드 왕국 | |
아버지 | 알렉산더 코민 |
어머니 | 엘리자베스 드 퀸시 |
형제 | 알렉산더, 윌리엄, 마조리, 애그네스, 엘리자베스, 엘레나, 안노라 |
부인 | 이사벨라 맥더프 |
직위 | 제7대 부컨 백작 |
1. 개요
제7대 부컨 백작.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존 발리올을 위해 에드워드 1세와 맞서다가 대세가 기울자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했고, 사촌인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가 로버트 1세에게 살해되자 로버트 1세에 대적했다가 스코틀랜드에서 축출되었다.2. 생애
스코틀랜드의 코민 씨족은 더럼 대주교이자 스코틀랜드 대법관 윌리엄 코민의 조카인 리처드 코민에게서 기원한다. 리처드 코민은 다비드 1세 치세에 왕실 법관을 역임했으며, 돔날 3세의 손녀인 헥스틸다와 결혼했다. 그의 아들인 윌리엄 코민은 제4대 부컨 백작 퍼거스의 딸이자 제5대 부컨 여백작인 마조리와 두번째로 결혼하면서 부컨 백작위를 차지했다.윌리엄 코민의 장남 알렉산더 코민은 알락산더르 3세 치세에 대법관을 역임했으며, 노르웨이 국왕 호콘 4세의 침공을 물리치고 헤브리디스 제도 일대를 스코틀랜드 왕국의 영토로 귀속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알락산더르 3세 사후 스코틀랜드의 여섯 수호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국왕이 부재하던 스코틀랜드 왕국을 1289년 사망할 때까지 다스렸다.
알렉산더 코민은 제2대 윈체스터 백작 로저 드 퀸시의 딸 엘리자베스 드 퀸시와 결혼해 여러 자식을 낳았다. 존 코민은 알렉산더 코민과 엘리자베스 드 퀸시의 장남이며, 차남 알렉산더는 초대 라티머 남작 윌리엄 라티머의 딸인 조앤과 결혼했다. 삼남 윌리엄은 세인트 앤드류스 세인트 메리 교회의 교구장을 역임했고, 장녀 마조리는 마치 백작 페트릭 4세의 부인이 되었고, 차녀 애그네스는 스트래선 백작 말리스 3세와 결혼했고, 삼녀 엘리자베스는 앵거스 백작 길버트 3세 드 움프라빌과 결혼했으며, 사녀 엘레나는 윌리엄 드 브레친 경과 결혼했고, 오녀 안노라는 리즈데일 영주이자 스코틀랜드 집사 니콜라스 1세 드 술레스와 결혼했다.
1283년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을 때 잉글랜드 북부 내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고, 1289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부컨 백작 작위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미들랜드에 걸친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1289년 밴프셔의 보안관이 되었고, 1290년 위그타운셔의 보안관을 역임했다. 1291년 자신이 관리하던 왕궁을 스코틀랜드 왕위 분쟁을 중재하러 온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겼다. 에드워드 1세가 13명에 달하는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자들의 권리를 검토하기 위해 설립한 위원회에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프레이저, 제6대 마르 백작 돔날과 함께 참여했다. 1292년 11월 17일, 에드워드 1세가 그의 사촌인 존 발리올을 새로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추대했을 때, 그는 그 현장에 있었다. 이후 갤러웨이에 있는 자신의 땅 일부 또는 전부를 존 발리올에게 넘겼고, 그 대가로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땅을 받았다.
1295년, 에드워드 1세의 지나친 간섭에 지친 존 발리올이 프랑스 왕국을 침공하기 위한 병력 파견을 요구한 그의 요구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존 코민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1296년 봄 습격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애넌데일에서 온 많은 보병과 함께 솔웨이 강을 건너 아서렛 마을을 불태웠다. 이후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지키는 칼라일로 진군해 성채를 에워쌌지만, 공성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성채를 공략할 수 없었고, 3월 28일 하루 동안 포위 공격한 뒤 철수했다.
1296년 3월 30일,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베릭을 공략한 뒤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그 후 4월 23일에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기병 300명, 보병 2,000명이 에드워드1세의 지시에 따라 던바 성으로 출진했다. 당시 제8대 마치 백작 패트릭 4세 드 던바는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지만, 그의 아내이자 부컨 백작 존 코민의 누이인 마조리 코민은 존 발리올을 추종했고, 던바 성의 수비를 진두지휘했다. 존 발리올은 던바 성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존 코민에게 군대를 맡ㄱ뎌 던바를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존 코민은 1296년 4월 27일 던바 전투에서 지리멸렬한 지휘로 인해 참패했다. 이에 던바 수비대는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했다. 그 후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공세를 막을 길이 없자 1296년 7월 10일 브레친 성에서 항복하고 모든 왕실 휘장을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겼다. 이때 현장에 있었던 존 코민도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에드워드 1세는 처음에는 그가 트렌트 강 남쪽에 있는 잉글랜드 영지에서 살라고 지시했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반 잉글랜드 반란이 일어나자, 에드워드 1세는 1297년 6월 방침을 바꿔 그와 바데녹 영주 존 코민 2세를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존 코민은 친족인 존 코민 2세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뒤, 애버딘의 헨리 체인 주교, 제7대 마르 백작 가르트나이트의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도 군대를 일으켰다. 이들은 애넌데일과 니스데일을 지나 6월 말에 에어에 도착했다. 이에 반란군 지도자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윌리엄 르 하디는 강력한 무장과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에 대적할 엄두를 못 내고 어바인에서 항복했다. 하지만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군의 기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두 코민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본 끝에 반란군에 가담했다.
그 후 부컨 백작은 잉글랜드군과 대적했지만, 1298년 폴커크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4세기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 포던의 존은 코민 가문의 군대가 폴커크 전투에 참여했다가 윌리엄 월레스를 의도적으로 배신하고 도주했기 때문에 윌리엄 월레스가 참패를 면치 못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코민 가문의 정적인 로버트 1세가 코민 가문을 스코틀랜드의 배신자로 낙인찍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한 걸 그대로 받아적었을 뿐이라고 추정한다. 어쨌든 폴커크 전투 패전 후 스코틀랜드 정부의 수호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299년 8월 피블스 회의에 참석한 그는 브루스 가문 추종자들과 갈등을 벌인 끝에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를 체포했고, 새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이 잉글랜드와 내통해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부컨 백작의 동생이지만 에드워드 1세 편에 섰던 알렉산더 코민이 헤브리디스 제도와 스코틀랜드 서해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귀족 라클란 맥루아이드리와 함께 스코틀랜드 북부 영지를 약탈하자, 부컨 백작은 방침을 바꿔 로버트 브루스를 풀어주고 브루스 가문과 화해했다. 그 후 부컨 백작은 스코샤 판사로서 에버딘에서 사건을 심리했다. 그러자 알렉산더 코민이 에드워드 1세가 자신에게 그 직위를 주었는데 형이 왜 멋대로 판결하느냐며 항의했지만 무시당했다.
부컨 백작은 1300년 5월 루더글렌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갤러웨이에 있었는데, 그곳 주민들은 스코틀랜드로부터 독립하려는 열망이 강해서 언제라도 에드워드 1세에게 호응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 억누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회가 12월 17일까지 연기되었기 때문에, 그는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를 맡았던 윌리엄 램버튼, 잉그램 드 움프라빌과 이권 다툼을 일삼다가 1300년 12월과 1301년 5월 사이에 전원 사임했고, 웨스터키르크의 작은 영지를 소유한 기사 존 드 소울스가 유일한 수호자가 되었다. 1301년, 부컨 백작은 존 소울스와 협력해 글래스고 인근에 주둔하던 에드워드 1세의 군대가 에어셔 서부의 라우던에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와 연합하는 걸 저지했다.
1304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영지가 파괴되어 수입이 끊겨버리면서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고, 프랑스 왕국마저 더 이상 지원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겼다. 게다가 에드워드 1세가 지난 원정과는 달리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코틀랜드 한복판인 던펌린 수도원에서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전쟁을 이어갈 의지를 드러내자, 그들은 전의를 잃고 협상하기로 했다. 그는 1304년 2월 9일에 바데녹 영주이자 스코틀랜드 수호자를 맡았던 존 코민 3세 및 대다수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정식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들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안정적으로 다스리려면 부컨 백작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스코틀랜드 총독 장 드 브르타뉴에게 조언할 권한이 있는 고문 중 한 명으로 선임했다. 1306년 5월 22일, 부컨 백작은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바스 기사로 선임되었다. 그러던 중 로버트 1세가 부컨 백작의 친족 존 코민 3세를 살해한 뒤 스코틀랜드 국왕을 칭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부컨 백작의 아내인 이사벨라 맥더프는 로버트 1세에게 왕관을 바쳤지만, 그는 친족을 살해한 로버트 1세를 적대했다.
1307년 말, 로버트 1세는 가장 강력한 정적인 부컨 백작을 쳐부수기 위해 부컨 백작령으로 진군했다. 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더그러스데일, 어퍼 클라이즈데일, 셀커크 숲, 그리고 제드버러를 잇달아 석권했다. 1307년 크리스마스 이전, 발랑스의 가신이었던 셀커크와 트위드데일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로버트 1세 편으로 돌아섰다. 뒤이어 레녹스, 멘티스, 파이프, 스트라선, 아솔, 앵거스 출신의 많은 스코틀랜드인들도 로버트 1세에 가담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는 인버루리로 진군했다가 중병에 걸려서 몸져누웠고, 추종자들은 그가 죽을까 봐 두려워했다. 한편 부컨 백작은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만나러 진군했다. 로버트 1세의 부하들은 주군의 상태를 고려해 드럼블레이드의 슬리오치로 후퇴했다. 부컨 백작은 슬리오치로 진군했지만, 적군과 직접 교전하지 않고 궁수대에게 적진을 향해 사격하도록 했다. 로버트 1세의 군대는 응사했지만 사흘 후 질서 있게 후퇴했다.
그 후 스트라스보기로 후송된 로버트 1세는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뒤 1308년 4월부터 부컨 백작령으로 다시 진격해 발베니 성, 타라데일 성, 스켈보 성 을 공략했고, 엘긴 성을 일부 병력으로 포위했고, 5월에 병사 700명과 함께 인버루리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아직 병에 시달렸지만, 부컨 백작과 일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5월 22일, 부컨 백작은 즉각 병사 1,000명을 이끌고 인버루리 시 앞으로 진군했지만, 공격을 주저하다가 올드 멜드럼에 주둔지를 세웠다. 다음날인 5월 23일 새벽, 부컨 백작의 부관인 브레친 영주 데이비드는 부컨 백작과 상의하지 않고 인버루리로 진군했고, 그의 병사들은 로버트 1세의 전초 기지 중 하나를 공격해 여러 명을 살해했다.
로버트 1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침대에서 일어나 말을 타고 군대를 소집한 뒤 반격에 착수했다. 부컨 백작은 로버트 1세가 다가오는 걸 보고 급히 군대를 모아서 바라 힐과 로크터 번 습지 사이의 길목에 전투 대열을 편성했다. 이때 그는 전방에 기사와 무장병을 세웠고, 징집병을 후방에 세웠다. 그러나 로버트 1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징집병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애초에 로버트 1세가 중병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한다는 이야기만 믿고 영주의 소집령에 응했지, 건강해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에게 검을 들이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무기를 내던지고 달아났고, 후방에서 대량 탈영이 발생한 걸 본 전방의 무장병까지 동요한 끝에 달아났다. 부컨 백작은 군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걸 보고 별 수 없이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인들은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대거 살해했다.
그리하여 인버루리 전투에서 부컨 백작을 꺾은 로버트 1세는 부컨 백작령을 대거 습격해 수많은 주민을 학살하고 가축을 도살했다. 이에 부컨 주민들은 코민 가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로버트 1세에게 복종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모레이로 이동해 그곳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1308년 여름까지 스코틀랜드 북동부에서 엘긴, 포레스, 네언, 인버네스 성들의 복종을 받아냈고, 1305년 이래 코민 가문이 소유했던 블랙 아일의 어콰트 성과 타라데일 성을 접수했다. 이리하여 로버트 1세의 최대 정적이었던 코민 가문은 몰락했다. 그 후 존 코민은 에드워드 2세로부터 스코틀랜드 서부 변경의 애넌데일, 캐릭, 갤러웨이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지만, 전쟁에 더 이상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1308년 말에 사망했다.
존 코민은 이사벨라 맥더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고, 이사벨라 맥더프가 1306년 그의 곁을 떠나 로버트 브루스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했다가 잉글랜드군에 붙잡혀 감옥에 수감된 뒤 헤어졌다. 결국 그는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고, 잉글랜드에 남은 영지는 그의 형제 알렉산더 코민의 딸인 앨리스 코민과 그녀의 남편 헨리 드 보몽에게 넘어갔다. 헨리 드 보몽은 1334년부터 아내의 권리를 내세워 부컨 백작을 칭하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