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3 15:00:32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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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영어: Second War of Scottish Independence
기간
1332년 ~ 1357년
장소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북부
원인
로버트 1세에게 영지를 상실한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격
교전국 및 교전세력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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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워드 3세
파일:Balliol_arms.svg.png 에드워드 발리올
파일:Arms_of_Beaumont_(Baron_Beaumont,_1309).svg.png 헨리 드 보몽
파일:800px-Modern_arms_of_Percy.svg.png 헨리 퍼시
파일:CoA_Walter_Manny_1st_Baron_Manny.svg.png 월터 매니
파일:CoA_Thomas_Ughtred_1st_Baron_Ughtred.svg.png 토머스 우트레드
파일:Arms_of_Thomas_of_Brotherton,_1st_Earl_of_Norfolk.svg.png 브라더턴의 토머스
파일:Blason_Comtes_d'Atholl.svg.png 데이비드 3세 드 스트라스보기
파일:800px-MontaguArms_Unquartered.png 윌리엄 몬터규
파일:800px-Neville_arms.svg.png 랄프 네빌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윌리엄 드 보훈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에드워드 드 보훈
파일:800px-Arms_of_Edmund_Crouchback,_Earl_of_Leicester_and_Lancaster.svg.png 그로스몬트의 헨리
파일:Arms_of_John_Segrave,_2nd_Baron_Segrave_(d.1325).svg.png 존 시그레이브
파일:Coat_of_Arms_of_Sir_John_de_Mohun,_2nd_Baron_Mohun,_KG.png 존 모훈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윌리엄 드 라 주쉬
파일:Arms_of_Bruce.svg.png 데이비드 2세
파일:fitz-randolf-coat-of-arms.jpg 초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파일:fitz-randolf-coat-of-arms.jpg 제2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파일:fitz-randolf-coat-of-arms.jpg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돔날 2세
파일:Arms_of_Bruce.svg.png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
파일:Wapen_graafschap_Holland.svg.png 던컨 4세 맥더프
파일:Arms_of_the_House_of_Seton.svg.png 알렉산더 세튼
파일:Arms_of_Keith,_Earl_Marischal.svg.png 로버트 2세 키스
파일:Arms_of_Keith,_Earl_Marischal.svg.png 로버트 3세 키스
파일:Arms_of_the_House_of_Douglas_(Ancient).svg.png 리데스데일 기사 아치볼드 더글러스
파일:Arms_of_the_House_of_Douglas_(Ancient).svg.png 리데스데일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
파일:Arms of Stewart.png 로버트 스튜어트
파일:moray.jpg 앤드류 머레이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알렉산더 램지
파일:K-051-Coat_of_Arms-DUNBAR-Patrick_de_Dunbar,_Earl_of_Dunbar_(_Conte_de_Laönois_).png 패트릭 5세 드 던바
파일:fitz-randolf-coat-of-arms.jpg 아그네스 랜돌프
파일:Arms of the Kings of France (France Ancien).svg 필리프 6세
파일:Arms of the Kings of France (France Ancien).svg 장 2세
결과
베릭 평화 협정 체결.
1. 개요2. 배경3. 경과
3.1.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국왕 등극과 축출3.2. 1333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3.3. 스코틀랜드의 끈질긴 저항3.4. 프랑스의 개입과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 강행3.5. 스코틀랜드의 부활3.6. 네빌스 크로스 전투3.7. 이후의 전쟁
4. 결과5. 주요 전투

1. 개요

1332년 로버트 1세에게 영지를 잃은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 영주들이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 1357년 10월 3일 베릭 평화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25년간 진행되었다. 백년전쟁의 일부로 간주되는 전쟁이다.

2. 배경

1296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자신에게 불순종한 봉신 존 발리올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1328년 에든버러-노샘프턴 협약이 체결되면서 30여 년만에 종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에드워드 3세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 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협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에 의해 영지를 잃은 잉글랜드 영주와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난 귀족들은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지를 되찾지 못하게 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협약을 이끌었던 권신 로저 모티머는 많은 비난을 받았고, 결국 1330년 10월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실각 후 처형되었다.

한편,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버트 1세는 1329년 6월 7일에 사망했고, 5살의 어린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잉글랜드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스코틀랜드로 진격해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기를 희망했다. 1332년 여름, 에드워드 3세는 아일랜드 영지가 현지 게일인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군대를 항구에 집결하라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헨리 드 보몽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 거물들은 노샘프턴 평화 협약 이후 잃어버린 스코틀랜드 영지를 되찾고 싶어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아일랜드 대신 스코틀랜드를 침공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들은 존 발리올의 아들인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고 옛 영지를 되찾으려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직접 개입하는 건 거부했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병대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3. 경과

3.1.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국왕 등극과 축출

1332년 7월 31일, 에드워드 발리올헨리 드 보몽, 헨리 퍼시, 월터 매니, 토머스 우트레드 등 잉글랜드 귀족 및 로버트 1세에 의해 추방당한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총사령관은 아내 앨리스 코민이 부컨 백작령 계승권이 있다는 걸 빌미로 삼아 부컨 백작 칭호를 주장한 헨리 드 보몽이었다. 당시 이들이 보유한 군대는 기사 500명, 보병(주로 궁수) 1,000명이었다. 이 무렵 스코틀랜드의 호국경로서 어린 왕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던 초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적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남하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급사했고, 마르 백작 돔날 2세가 새 호국경에 선임되었다.

돔날 2세는 군대를 두 부분으로 나눴다. 본인은 포스만 북쪽 부분을 경비했고, 포스만 남쪽 부분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맡았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전에 마르 백작과 서신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편이 되기를 바라며 8월 6일 포스만 북부의 웨스터 킹혼(현재 스코틀랜드 번티스랜드)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잉글랜드군이 한창 상륙하고 있을 때, 로버트 1세의 사생아인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와 파이프 백작 던컨 4세 맥더프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몰려왔다. 잉글랜드 연대기는 최소 4,000명, 최대 24,000명으로 기술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4,000명이 가장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하선 중이던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와 지원 보병을의 공격을 받은 후 격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상륙에 성공했다.

킹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잉글랜드 원정군은 승리의 기세를 이어가 덤펌린으로 이동해 식량을 확보하고 무기고를 접수한 뒤 퍼스로 진군했다. 마르 백작 돔날 2세는 적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퍼스로 철수한 뒤 킹혼 전투의 생존자들과 합류했다. 이후 전국에 파발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으며, 퍼스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에르네 강 북쪽 기슭에 군대를 배치하고 다리를 파괴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군대는 연대기 상에서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기술되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15,00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스코틀랜드군의 대다수는 보병이었다. 8월 10일, 잉글랜드군은 에르네 강 남쪽 강둑에 도착했다. 당시 그들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의 10배 이상이었고, 강 건너편에 유리한 방어 위치에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지원군이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잉글랜드군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양군은 해질 무렵까지 에르네 강 반대편에 나란히 주둔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이길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즐겼으며, 배넉번 전투에서의 승리를 회상하고 잉글랜드인에 대한 외설적인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파괴된 다리 인근에 경비원이 배치되었지만 다른 예방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 해가 뜰 때 강 건너편으로 일부 병력을 보내 적의 측면을 요격하여 혼란을 일으킨 뒤, 적이 패주할 때 추격하여 섬멸해버리기로 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계속 대치하고만 있으면 승리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고, 어둠을 틈타 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날 밤, 잉글랜드군 전체가 몰래 강을 건넌 뒤 자정 무렵에 스코틀랜드 숙영지에 도착해 공격을 퍼부어 닥치는 대로 살육했고, 스코트랜드인들은 급히 도주했다. 잉글랜드군은 주력군을 패주했다고 믿었지만, 새벽에 스코틀랜드군이 자기들을 향해 2개 대열을 결성한 채 접근하는 것을 보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때 한 장성이 그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라고 연설했다. 이 장수의 이름은 연대기마다 다르게 기술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아무튼 잉글랜드군은 말을 타고 싸우는 40명의 용병 기사를 제외하고 전원이 도보로 대열을 결성했다. 이후 벌어진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장궁병들의 압도적인 살상력과 스코틀랜드군의 지휘 통제 붕괴 등에 힘입어, 잉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에드워드 발리올은 9월 24일 스코틀랜드 국왕들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거행된 연회에서 모두가 갑옷을 입고 테이블에 앉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곧 스코틀랜드인들의 반격을 우려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과 가까운 록스버러로 이동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에드워드 3세를 자신의 대군주로 인정하고 그에게 연간 총수입이 20,000파운드인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와 주요 국경 요새인 베릭 성을 넘기겠다고 약속했고, 그 대가로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한편, 데이비드 2세는 에드워드 발리올의 무리를 피해 하이랜드로 피신했다.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해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호국경을 맡은 리데스데일의 기사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는 에드워드 발리올에게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데이비드 2세와 발리올 중 누구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간주할 지를 논의하게 할 테니 1332년 2월 2일까지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패트릭 5세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 잉글랜드 추종자들을 돌려보내고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아난으로 이동한 뒤, 캐릭 백작 알락산더르 브루스를 비롯한 수많은 지역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고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는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야간 행군을 통해 아난으로 이동했다.

1332년 12월 17일 새벽, 스코틀랜드인들이 발리올이 머물고 있던 아난을 급습했다.(아난 전투) 잉글랜드인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완패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의 형제 헨리, 월터 코민, 존 모브레이를 포함한 여러 귀족이 피살당했다. 에드워드 발리올 본인은 간신히 탈출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거의 벌거벗은 채 칼라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데이비드 2세 추종자들의 역습을 받고 잉글랜드로 도주했다.

3.2. 1333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

1333년 2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그가 가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며, 스코틀랜드 남부를 잉글랜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3월 에드워드 발리올이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칼라일에서 출진해 스코틀랜드로 진입했고, 그해 4월엔 에드워드 3세가 뉴캐슬에서 본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6,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국경의 요충지인 베릭 성 앞에 집결한 뒤 그곳을 포위했다. 에드워드 3세는 투석기 수십 대를 제작한 뒤 거대한 바위를 여러 차례 퍼부어 베릭 마을 대부분을 파괴하고 수비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지하 파이프 4개를 끊고 베릭 인근의 모든 촌락을 파괴하고 농작물을 약탈해 수비대가 굶주리게 만들었다. 또한 잉글랜드 해군은 트위드머스라는 작은 항구를 통해 군수 물자를 원정군에 공급했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대거 동원했다. 당시의 연대기에는 그 수가 14,629명, 30,000명, 40,000명, 80,000명, 90,000명, 100,000명 이상이거나 잉글랜드인보다 5대 1로 많았다고 다양하게 추정했다. 학계에서는 약 15,00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스코틀랜드군은 컴벌랜드에 소규모 습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더글러스는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잉글랜드군에 바로 도전하기 보다는 좀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베릭 성은 육지와 바다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수비대는 지쳐갔다.

베릭 성 수비대장 알렉산더 세튼은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한 끝에 1333년 7월 11일까지 스코틀랜드군이 구호하지 않으면 도시를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합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인질을 잉글랜드 측에 넘겨줬는데, 인질 중에는 알렉산더 서튼의 아들인 토머스도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베릭 성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이때 윌리엄 키스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분견대가 트위드 강의 북쪽 제방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다리의 불에 탄 폐허를 가까스로 건넌 뒤 베릭 마을에 들어섰다. 그리고 또다른 분견대는 잉글랜드 국경지대에 있는 벰버그 성을 공격했지만, 공성 장비가 없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33년 7월 11일,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 수비대에게 약속했던 대로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수비대는 윌리엄 키스가 분견대를 이끌고 베릭 마을에 들어서면서 자기들이 구호받았으므로, 그 계약은 더이상 수비대를 구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알렉산더 세튼의 아들 토머스를 수비대가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이후로 하루에 두 명씩 스코틀랜드 인질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 후 추가 항복 조건이 합의되었다. 이번에는 스코틀랜드군이 베릭 외곽에서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거나, 1333년 7월 20일까지 200명의 병력을 마을에 투입함으로써 구호 조치를 취하지 못할 경우, 베릭은 항복하고 주민과 수비대는 베릭 성을 떠나기로 했다. 윌리엄 키스는 이 항복 조건을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전달했고, 더글러스는 정면 대결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트랜드군은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한 에드워드 3세와 강력한 살상력을 갖춘 잉글랜드 장궁병, 그리고 본인들의 지리멸렬한 지휘 통제로 인해 완패했다. 스코틀랜드군 총사령관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로스 백작 휴 드 로스는 전사했고, 그 외의 여러 스코틀랜드 기사들도 전사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잉글랜드 연대기에서는 14명으로 기술되었지만, 학자들은 수백명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전투가 끝난 뒤 스코틀랜드 백작 6인의 유해를 몸소 매장했다고 한다.

할리돈 힐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에드워드 3세는 베릭 성의 항복을 받아낸 뒤 스코틀랜드 대귀족들의 복종 서약을 받아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남쪽으로 떠났고, 에드워드 발리올과 그의 추종자들은 북쪽으로 나아가 1333년 10월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에서 의회를 개최한 뒤 자신이 왕좌에 오르도록 도왔던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스코틀랜드 내 재산을 돌려줬다. 1334년 6월 19일, 발리올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8개 카운티를 잉글랜드에 양도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데이비드 2세와 결혼했던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앤과 약혼했다. 한편, 데이비드 2세는 할리돈 힐 전투 패배 직후 추종자들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3.3. 스코틀랜드의 끈질긴 저항

에드워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3세의 도움에 힘입어 스코틀랜드 왕위에 복귀했지만, 그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 로버트 1세에게 추방당했다가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복귀한 귀족들과 브루스 가문의 지지자들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던 1334년, 할리돈 힐 전투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프랑스로 망명했던 존 랜돌프가 133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스코틀랜드의 고위 청지기인 로버트 스튜어트와 함께 공동 호국경으로 선임되어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이들은 그 해 9월 27일 잉글랜드군 장성 데이비드 3세 드 스트라스보기를 로카버에서 포위한 뒤, 신변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가로 데이비드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데이비드는 요구를 받아들이고 북부 스코틀랜드에서 데이비드 2세의 총독을 맡았다. 여기에 존 랜돌프는 리데스데일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와 함께 나무르 백작 기 2세를 보로우뮤어 전투에서 격파하고 생포했다.

이렇듯 반란군의 기세가 갈수록 거세지자, 에드워드 발리올은 1334년 8월 반란군을 피해 베릭 성으로 이동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1334년 겨울에 록스버러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해 1335년 초까지 스코틀랜드 서부 저지대로 이동하면서 여러 마을과 영지를 파괴했다. 존 랜돌프 등은 생포되었고, 다수의 영주들이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리데스데일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는 로디언으로 가서 알렉산더 램지 등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잉글랜드군에 맞서 유격전을 벌였다. 램지는 미들로디언의 호손딘에 있는 동굴에서 병력을 양성했고, 윌리엄은 에트릭 포레스트와 팬트랜드 둔덕을 근거지로 삼고 램지가 양성한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여러 차례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훗날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윌리엄의 유격대를 "기사도 학교"로 칭송했고, 윌리엄에게 "기사도의 꽃"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3.4. 프랑스의 개입과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 강행

한편, 스코틀랜드 국왕이었다가 에드워드 3세의 침공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데이비드 2세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1295년 동맹을 맺은 이래 이때까지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당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필리프 6세는 동맹국이 무너진 채로 원정을 떠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에드워드 3세에게 항의하기로 했다. 1335년 2월 18일, 프랑스 사절이 뉴캐슬에서 에드워드 3세를 만나 스코틀랜드를 침략한 근거를 물었다. 에드워드 3세는 서유럽의 초강대국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싶진 않았기에 이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1335년 중반까지 지속되는 휴전을 스코틀랜드인들과 맺고 프랑스 사절이 평화 협상을 논의하는 걸 허용했다.

1335년 5월,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에드워드 2세로부터 빼앗은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신도 십자군에 동참하겠으며, 스코틀랜드 문제는 잊어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필리프 6세는 프랑스의 충실한 동맹국이었던 스코틀랜드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여겨 거부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꼭 가고 싶었기에 잉글랜드를 대놓고 적대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스코틀랜드 저항군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스코틀랜드와 노르망디 사략선이 영국해협에서 잉글랜드 선박들을 약탈하도록 했다.

에드워드 3세의 평화 협상은 말 뿐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에 13,000명 이상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스코틀랜드인들도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잉글랜드군의 침략에 노출될 로우랜드에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재산을 챙겨 북부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133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일으켜 칼라일에서 글래스고로 진격했다. 스코틀랜드군의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는 가운데, 잉글랜드군은 진군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에 입성했고,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전투를 강요하기 위해 계속해서 약탈하고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1335년 8월 11일,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왕실 청지기를 맡은 로버트 스튜어트와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등 여러 스코틀랜드 거물들을 접견하고 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발리올을 주권자로 받들며 에드워드 3세가 에드워드 발리올의 주군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작위와 영지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이것으로 스코틀랜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고 런던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앤드류 머레이, 윌리엄 더글러스 등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여전히 에드워드 발리올을 받들길 거부했다. 1335년 9월, 덤바턴 성에서 추종자들을 집결시킨 윌리엄 더글러스는 에드워드 1세에 맞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윌리엄 월레스의 전우인 앤드류 모레이의 아들 앤드류 머레이를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으로 추대했다.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강행하자,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기고, 스코틀랜드를 돕기 위해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장병 6,000명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하겠다고 선언했다. 1335년 8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가 오랜 앙숙인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것에 격분했고, 양국간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분쟁 조정을 위해 자신과 함께 중재를 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교황은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편을 들고 있는 그에게는 중재자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며 혼자서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협상은 양자간의 입장차가 너무 커서 실패했고, 베네딕토 12세는 필리프 6세에게 십자군을 취소하라고 권고했다.

1335년 11월 30일, 머레이의 군대는 에버딘셔의 컬블린에서 데이비드 3세 드 스트라스보기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조우했다. 머레이는 병력을 둘로 나눴고, 윌리엄이 선봉을 맡았다.(컬블린 전투) 스트라스보기가 전투 준비를 하자, 윌리엄은 마치 적의 방어 태세에 직면하여 망설이는 듯 멈춰 섰다. 이에 스트라스보기는 적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고 여기고 진영에서 출진해 단숨에 끝장내려 했다. 이에 윌리엄은 병사들을 이끌고 전면에서 항전했고, 그 사이에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후위대가 적의 노출된 측면을 요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트라스보기는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하다가 토머스 코민을 포함한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전사했다.

컬블린 전투 패배로 인해 잉글랜드 세력이 쇠약해진 데다, 필리프 6세가 노르망디에 500척 이상의 함대를 결집한 뒤 한 군대를 스코틀랜드로 수송하고 다른 군대를 포츠머스에 상륙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첩보를 접하자,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프랑스군이 오기 전에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1336년 6월,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퍼스로 진격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를 스스로 파괴한 뒤 고산 지대로 피신했다.

에드워드 3세는 6월 28일 폐허가 된 퍼스에 도착한 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했다. 7월 중순 퍼스에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로킨도르브에 도착한 뒤 800명의 기병대만 이끌고 테이 만과 머레이 만 사이에 있는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철저히 파괴했고, 프랑스 원정대의 잠재적인 하선 항구로 여겨진 포레스와 애버딘을 파괴했다. 머레이는 이런 잉글랜드와 전투를 벌이길 회피하고 산악지대에 은거했다.(1335~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필리프 6세는 이에 분노해 8월 20일 파리에 찾아온 잉글랜드 사절단에게 함대를 규합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해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후 프랑스 전함들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파리 법원은 1336년 12월에 잉글랜드로 망명한 로베르 다르투아를 인도할 것을 잉글랜드에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맞서 프랑스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항전할 것을 호소해 여론의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했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이 프랑스 왕국 전역에 선포되었고, 프랑스 국왕에게 반기를 든 '아키텐 공작 에드워드'의 영지를 몰수한다는 결의안이 뒤이어 선포되었다. 그해 7월, 1만여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 가스코뉴 국경지대의 여러 마을을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리하여 백년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3.5. 스코틀랜드의 부활

이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스코틀랜드 방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고,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의 영향력은 갈수록 쇠락했다. 1337년, 앤드류 머레이, 윌리엄 더글러스, 패트릭 5세 드 던바 등이 지휘하는 스코틀랜드군은 파이프 주를 통과하여 포클랜드 마을을 파괴했으며, 루카르 성을 점령한 뒤 3주 간의 포위 공격 끝에 세인트 앤드류스 성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뒤이어 그해 3월에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보스웰 성을 탈환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세를 벌인 끝에 초여름에 북부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 요새 대부분을 공략했으며, 발리올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갤로웨이를 파괴했다. 1337년 11월 잉글랜드 영토인 칼라일을 습격해 컴벌랜드를 황페화했으며, 애든버러 성을 포위했다.

1338년 1월, 잉글랜드 정부는 갈수록 악화되는 스코틀랜드 전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초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터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에 맞서는 스코틀랜드 거물인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다른 곳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사이에 그의 본거지인 던바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패트릭 5세 드 던바의 아내인 아그네스 랜돌프의 맹활약으로, 윌리엄 몬터규는 7월 10일까지 던바 성을 공략하지 못하다가 결국 잉글랜드로 철수했다. 잉글랜드 왕실은 던바 공방전이 실패하면서 6,000 파운드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이후 잉글랜드 측은 프랑스와의 대규모 전쟁을 벌이느라 스코틀랜드 전선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고, 스코틀랜드군은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1339년 퍼스를 탈환하고 1340년 에딘버러를 탈환했으며, 잉글랜드 북부 지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했다. 프랑스로 망명갔던 데이비드 2세는 1341년 6월 스코틀랜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퍼스로 귀환했다. 1342년 3월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군 최후의 거점이었던 스털링 성이 함락되면서,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 세력은 허물어졌다.

3.6. 네빌스 크로스 전투

1340년대 중반,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치중하느라 자기들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잉글랜드군이 점령했던 자국의 영역을 전부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1343년 1월 19일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체결해 3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을 때, 스코틀랜드 역시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중단했다. 그 후 1345년 에드워드 3세가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을 재개하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1329년에 양국이 맺은 방위 협약에 따라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1346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본대가 포츠머스에 집결하자, 필리프 6세는 재차 사절을 보내 잉글랜드 침공을 호소했다.
"부탁하오, 간청하오. (중략) 비슷한 위기 상황에서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나를 위해 해주고, 가능한 한 빨리 해주길 바라오."

그해 7월 에드워드 3세가 15,000명의 군대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1차 캉 공방전에서 을 파괴하자,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에 재차 호소했다. 그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 브르타뉴, 플란데런에도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는 "사제, 수도자, 서기, 장인, 상인들"만 남아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2세는 강성한 잉글랜드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파국을 맞을 것을 우려해 필리프 6세의 요청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지만, 필리프 6세의 이번 설득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1346년 9월 퍼스에서 스코틀랜드 전역에 소집령을 내리고 조카 로버트 스튜어트,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리데스데일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 등 여러 귀족들을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1346년 10월 7일, 데이비드 2세는 일부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는 국경지대에 설치된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먼저 '리델의 껍질(Peel of Liddell)'로 불리는 자연 요새를 포위해 3일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하고 자신의 장교였다가 잉글랜드에 귀순한 뒤 총독 노릇하고 있던 월터 셀비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후 인근의 칼라일 시민들로부터 약탈하지 않는 대가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고, 남동쪽의 부유한 도시 더럼으로 향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다. 그러다 헥샴에서 3일간 머물면서 그곳의 대수도원을 약탈했다. 10월 16일, 데이비드 2세의 군대는 더럼에 도착한 뒤 도시 서쪽에 있는 보레페어 마을에 도착했다. 이 곳의 수도자들은 마을과 수도원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1,000파운드의 몸값을 10월 18일에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데이비드 2세는 이에 동의하고 지급일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스코틀랜드 수뇌부는 잉글랜드군이 대거 프랑스로 가버렸으니 현지 민병대 외에는 자신들을 막을 병력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요크 대주교 윌리엄 드 라 주쉬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부 요크셔의 리치몬드에서 병력을 신속하게 모집했다. 이에 잉글랜드 북부 지역인 컴벌랜드, 노섬벌랜드, 랭커셔 등지에서 3,000~4,000명이 모였고, 또다른 3,000명의 요크셔 병사들이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다가왔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군대를 모집할 때 험버 강 북쪽 지역에는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같은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했다. 잉글랜드군 상당수는 장궁병이었는데, 그중 1,200명은 랭커셔 출신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요크셔 병사들을 기다리지 않고 리치먼드에서 바너드 성까지 진군했고, 대주교는 그곳에서 군대를 3개 편대로 재구성한 뒤 진군을 이어갔다. 10월 17일 아침,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소규모 스코틀랜드군은 더럼 남쪽 지역을 약탈하던 중 페리힐에서 잉글랜드군 2개 부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곧 교전했고, 스코틀랜드군이 300명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했다. 더글러스는 보레페어에 있는 아군 진영으로 돌아와서 국왕에게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고 알렸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군이 이렇게나 빨리 대응한 것에 깜짝 놀랐다. 때마침 2명의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이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더럼에서 찾아왔지만, 데이비드 2세는 이들이 스파이라고 생각해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군영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이 '네빌의 십자가'라고 불리는 돌 기념물이 서 있는 고지로 이동하고 잉글랜드군이 그곳에 도착했다. 이후 벌어진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3,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가 전사했으며, 데이비드 2세와 리더스데일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 등 여러 귀족, 경호원, 시종, 순경 등이 사로잡혔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347년 초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로우랜드 대부분을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보급품이 바닥나자, 잉글랜드군은 점령지를 확고히 다지지 못한 채 철수했다.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어 런던 탑에 사로잡힌 뒤,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 때를 틈타 스코틀랜드 왕위에 재차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347년 스코틀랜드로 잠입해 갤러웨이에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뒤 1355년까지 갤러웨이의 일부 지역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를 붙잡아둬서 스코틀랜드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뜯어낼 생각만 했을 뿐, 발리올을 복위시키는 데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에드워드 3세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에드워드 발리올은 갤로웨이에서 근근히 버틸 뿐, 스코틀랜드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3.7. 이후의 전쟁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의 포로로 전락한 뒤,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버트 스튜어트를 호국경으로 선임해 군주 대신 통치를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데이비드 2세가 런던 탑에서 측근들을 종종 스코틀랜드로 보내 상황을 통제하려 했고, 네빌스 크로스 전투 도중에 전장을 이탈한 로버트 스튜어트를 불신해 그의 정적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로버트 스튜어트는 자기 입지를 다지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고, 자연히 갤로웨이에서 버티는 에드워드 발리올을 물리치기 위한 군사 원정은 오랫동안 감행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를 협상 상대로 삼아 스코틀랜드 왕국과 타협을 시도했다. 협상의 세부 사항은 불분명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1348년에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으로서 스코틀랜드를 다스리고, 그에게 자녀가 없으면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고했다. 1350년,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의 몸값을 4만 파운드로 지불하고, 에드워드 발리올의 추종자들을 복직시키고, 데이비드 2세에게 자녀가 없을 경우 자기 아들인 곤트의 존을 후계자로 자명하라고 제안했다. 대신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봉토로 삼는 안건은 제외하기로 했다.

데이비드 2세는 1352년 초에 스코틀랜드로 잠시 돌아가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2세의 조카인 로버트 스튜어트는 왕위 계승에서 자신을 제외하는 어떤 조건도 지지하기를 꺼렸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1352년 3월 에드워드 3세가 제시한 조건을 거부했다. 결국 데이비드 2세는 빈손으로 잉글랜드로 돌아와 투옥되었다. 여전히 프랑스와의 전쟁에 몰두했던 에드워드 3세는 1354년 몸값을 지불하면 데이비드 2세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이를 거부했는데, 이는 스코틀랜드를 통제하려는 에드워드 3세의 추가 시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355년, 에드워드 발리올이 갤러웨이에서 스코틀랜드군에게 축출되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55년 초,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의 영지를 약탈했다. 이에 마치 백작은 복수를 결심하고, 초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와 함께 각자 사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기사 60명의 지원을 받으며 1355년 8월에 잉글랜드 국경으로 진군했다.

윌리엄 더글러스는 부관인 댈하우지의 윌리엄 램지에게 노럼 성 수비대를 유인하기 위해 노럼 주변의 땅을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램지는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했고, 노럼 성주인 히턴의 토머스 그레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이들을 추격했다. 윌리엄 더글러스와 패트릭 5세는 던스에서 남쪽으로 7마일 떨어진 네스빗 무어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아군을 추격하던 잉글랜드군을 습격했다.

그 결과 토머스 그레이, 제2대 데이커 남작 윌리엄 데이커가 생포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이글랜드의 고급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고, 일반 장병들은 프랑스 기사단에 맡겨졌다. 프랑스 기사단 사령관은 당시 잉글랜드군의 손에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 사건은 현지에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언덕에 '살육의 언덕'이란 이름이 붙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프랑스 왕국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잉글랜드를 공격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외젠 드 가랑시에르가 이끄는 프랑스 기사 60명이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었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침공한다면 큰 현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프랑스 측에서 약속한 현금이 도착할 기미가 없자, 스코틀랜드 측은 그해 9월 말에 잉글랜드 측과 9개월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대부분의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북부에서의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때 잉글랜드 국경 요새 수비대 상당수가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합류하기 위해 허가 없이 자리를 떠났는데, 그 중에는 베릭 요새 사령관인 제2대 그레이스토크 남작 윌리엄 드 그레이스토크도 있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지 며칠 후, 프랑스에서 40,000 에쿠스에 달하는 현금이 도착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장성 윌리엄 더글러스, 패트릭 5세 드 던바 등은 프랑스 인사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휴전을 깨고 잉글랜드 북부의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노햄 성 순경이 수비대 일부와 민병대를 이끌고 반격을 시도했지만 격파되었다. 11월 6일, 스코틀랜드 귀족 제2대 앵거스 백작 토머스 스튜어트와 패트릭 5세가 프랑스군의 협조를 받으며 베릭 성을 기습 공격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수비대를 무찌르고 성벽을 넘은 뒤 마을에 진입했다. 마을 수비대와 주민들은 베릭 성으로 피신했고, 스콭르랜드인들은 마을을 약탈했다.

하지만 얼마 후 존 코플랜드가 록스버러의 잉글랜드 수비대 일부와 함께 베릭 성에 도착하면서, 베릭 성의 수비는 강화되었다. 그 후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하여 스콭르랜드를 이끌던 스코틀랜드 호국경 로버트 스튜어트가 현장에 도착한 뒤 성을 포위하는 걸 직접 지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마을에서 성까지 이어지는 요새화된 다리를 공략한 뒤 성벽을 허물려고 시도하는 동시에 성벽을 넘으려고 공세를 벌였지만, 수비대의 항전에 부딪혀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한편, 피카르디에서 약탈 행진을 벌였지만 프랑스군이 좀처럼 전투에 응하지 않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칼레로 돌아간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군이 베릭을 공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서둘러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55년 12월 24일 뉴캐슬에서 대규모 병력을 결집한 에드워드 3세는 1356년 1월 6일 뉴캐슬에서 출발해 베릭으로 향했다. 그는 곧 베릭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베릭 마을은 공략된 뒤 스코틀랜드 수비대 130명만 남았으며, 나머지는 그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찌감치 물러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1월 13일, 에드워드 3세는 베릭에 도착한 뒤 곧바로 광부들을 동원해 마을을 둘러싼 성벽을 뚫었고,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협상을 제안했다. 에드워드 3세는 그들이 떠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약탈물을 가져가는 걸 허용했다.(베릭 공방전)

1356년 1월 20일, 그동안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워진 후 20여년간 스코틀랜드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에드워드 발리올은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는 대가로 스코틀랜드 국왕 칭호를 에드워드 3세에게 넘겨줬다. 1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에딘버러로 출진했다. 병력 규모는 연대기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큰 호스트"로 묘사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13,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잉글랜드군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 행진하면서, 80~100km에 달하는 인근 지역을 파괴했다. 특히 그들은 휴전을 무시하고 베릭을 침공한 스코틀랜드 지도자 중 한 명인 마치 백작 패트릭 5세의 영지를 철저히 짓밟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군과의 대결을 거부하고, 주민들을 잉글랜드군이 오기 전에 대피시키고 영토를 파괴하는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에 진입한 잉글랜드군은 식수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2월 초 에든버러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에든버러 대부분을 불태우고 동쪽 해딩턴에 숙영지를 세운 뒤, 잉글랜드 함대로부터 재보급을 받았다. 뒤이어 스털링을 거쳐 스콭를내드의 수도 퍼스로 진군한 뒤, 스코틀랜드 군주들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려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했기에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길이 막막했기에, 에드워드 3세는 함대가 계속 따라오면서 보급하기를 희망했다. 북풍이 부는 바람에 함대가 움직일 수 없었고, 에드워드 3세는 해딩턴에서 열흘간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잉글랜드군이 주둔한 로디언 일대가 너무나 황폐해졌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침략을 "번트 캔들마스(Burnt Candlemas)"라고 불렀다. 이는 캔들마스로 알려진 의식에서 매년 2월 2일에 양초를 지역 교회로 가져가는 관습을 빗댄 것으로, 잉글랜드인들이 로디언 전역을 불태운 것을 풍자했다.

1356년 2월 중순에 바람이 바뀌었지만, 심한 강풍으로 인해 함대가 완전히 흩어졌고 배 여러 척이 침몰되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계획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은 진군했던 길 대신 남서쪽으로 철수하면서 멜로즈까지 이어지는 주변 지역을 계속해서 불태우고 황폐화했다. 이에 윌리엄 더글러스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잉글랜드 약탈자 및 낙오자들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그 외에도 강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멜로즈 외곽에서 스코틀랜드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에드워드 3세는 윌리엄의 부하들에게 거의 잡힐 뻔했다가 호위병들의 분전으로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 잉글랜드로 철수했다. 2월 말 칼라일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해산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공세를 재개했고, 캐러버록, 달스윈턴 성을 공략한 뒤 에드워드 발리올을 추종했던 갤로웨이를 복종시켰다.

1356년 4월 18일, 윌리엄 더글러스와 잉글랜드 장성 윌리엄 드 보훈의 합의하에 새로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357년 10월 3일 베릭에서 최종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1346년 네빌스 크로스 전투 이래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었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했고, 잉글랜드 측은 몸값으로 67,000 파운드를 10년에 걸쳐 매년 6월 24일에 분할 납부하기로 했다. 또한 이 10년 동안 스코틀랜드 시민이 에드워드 3세나 그의 부하들에 대해 무기를 드는 것이 금지되었다.

4. 결과

베릭 조약이 체결되면서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복속하려던 계획을 포기했고, 스코틀랜드인은 독립을 지켜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평화 조약이 아니라 휴전 협정이었으며, 40년 동안 양자간의 간혈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뒤 2만 파운드만 상환한 후 지불을 중단했고, 이후 재협상을 통해 지불해야 할 몸값을 대폭 감축했다. 1360년 그를 축출하려는 반란이 발발했으나 진압되었고, 그는 1371년 사망할 때까지 왕위를 무탈하게 이어갔다. 그 후 스코틀랜드 고위 청지기이자 데이비드 2세의 조카인 로버트 스튜어트가 로버트 2세로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다.

5. 주요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