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랭 프로스트의 우승 및 수상 경력 | |||||||||||||||||||||||||||||||||||||||||||||||||||||||||||||||||||||||||||||||||||||||||||||||||||||||||||||||||||||||||||||||||||||||||||||||||||||||||||||||||||||||||||||||||||||||||||||||||||||||||||||||||||||||||||||||||||||||||||||||||||||||||||||||||||||||||||||||||||||||||||||||||||||||||||||||||||||||||||||||||||||||||||||||||||||||||||||||||||||||||||||||||||||||||||||||||||||||||||||||||||||||||||||||||||||||||||||||||||||||||||||||||||||||||||||||||||||||||||||||||||||||||||||||||||||||||||||||||||||||||||||||||||||||||||||||||||||||||||||||||||||||||||||||||||||||||||||||||||||||||||||||||||||||||||||||||||||||||||||||||||||||||||||||||||||||||||||||||||||||||||||||||||||||||||||||||||||||||||||||||||||||||||||||||||||||||||||||||||||||||||||||||||||||||||||||||||||||||||||||||||||||||||||||||||||||||||||||||||||||||||||||||||||||||||||||||||||||||||||||||||||||||||||||||||||||||||||||||||||||||||||||||||||||||||||||||||||||||||||||||||||||||||||||||||||||||||||||||||||||
| |||||||||||||||||||||||||||||||||||||||||||||||||||||||||||||||||||||||||||||||||||||||||||||||||||||||||||||||||||||||||||||||||||||||||||||||||||||||||||||||||||||||||||||||||||||||||||||||||||||||||||||||||||||||||||||||||||||||||||||||||||||||||||||||||||||||||||||||||||||||||||||||||||||||||||||||||||||||||||||||||||||||||||||||||||||||||||||||||||||||||||||||||||||||||||||||||||||||||||||||||||||||||||||||||||||||||||||||||||||||||||||||||||||||||||||||||||||||||||||||||||||||||||||||||||||||||||||||||||||||||||||||||||||||||||||||||||||||||||||||||||||||||||||||||||||||||||||||||||||||||||||||||||||||||||||||||||||||||||||||||||||||||||||||||||||||||||||||||||||||||||||||||||||||||||||||||||||||||||||||||||||||||||||||||||||||||||||||||||||||||||||||||||||||||||||||||||||||||||||||||||||||||||||||||||||||||||||||||||||||||||||||||||||||||||||||||||||||||||||||||||||||||||||||||||||||||||||||||||||||||||||||||||||||||||||||||||||||||||||||||||||||||||||||||||||||||||||||||||||||
| 프랑스의 前 레이싱 드라이버 | |||||
| |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알랭 프로스트 Alain Prost | ||||
| 본명 | 알랭 마리 파스칼 프로스트 Alain Marie Pascal Prost | ||||
| 출생 | 1955년 2월 24일 ([age(1955-02-24)]세)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 루아르 로레트 | ||||
| 국적 | |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eeeeee,#191919> F1 | ||||
| 출전 횟수 | 199경기 | ||||
| 월드 챔피언 | 4회 (1985, 1986, 1989, 1993) | ||||
| 그랑프리 우승 | 51회 | ||||
| 포디움 | 106회 | ||||
| 폴 포지션 | 33회 | ||||
| 패스티스트 랩 | 41회 | ||||
| 첫 경기 | 1980 아르헨티나 그랑프리 | ||||
| 첫 그랑프리 우승 | 1981 프랑스 그랑프리 | ||||
|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 1993 독일 그랑프리 | ||||
| 마지막 경기 | 1993 호주 그랑프리 |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드라이버 | 말보로 팀 맥라렌 (1980) 에키프 르노 엘프 (1981~1983) 말보로 맥라렌 (1984~1989) 스쿠데리아 페라리 (1990~1991) 캐논 윌리엄스 (1993) | |||
| 스태프 | 프로스트 그랑프리 (1997~2001소유주) 르노 F1 팀 (2019~2020비상임 이사) 알핀 F1 팀 (2021비상임 이사) | }}} | |||
1. 개요2. 상세3. 선수 경력
3.1. 초기3.2. 포뮬러 1 진출 및 초창기 F1 경력3.3. 맥라렌 복귀 및 첫 번째 챔피언십 타이틀3.4. 맥라렌과의 경쟁, 세나와의 라이벌 관계3.5. 페라리 이적과 어려움3.6. 잠정 은퇴, 복귀, 최고의 해 및 최종 은퇴3.7. 은퇴 후 활동
4. 드라이빙 스타일4.1. 코너링 스타일4.2. 타이어 관리 능력4.3. 연료 관리4.4. 세팅과 기술적 피드백4.5. 공격성과 리스크 관리4.6. 세나와의 비교4.7. 현대 F1과의 비교4.8. 서킷 위의 교수
5. 애증의 라이벌 아일톤 세나6. 연도별 성적7. 평가7.1. 팬덤에서의 평가
8. 프랑스 스포츠계에서의 위상9. 기타10. 정치·사회적 언급11. 후배 드라이버들에 대한 평가12. 인간적 일화1. 개요
| <nopad> | |
| 1982 시즌 르노 시절의 모습 | 2020년의 모습 |
포뮬러 1에서 활약했던 전 레이싱 드라이버.
맥라렌 F1 팀 역사상 최다 포디움 획득 드라이버다.
2. 상세
아일톤 세나, 나이젤 만셀 등과 함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시대를 풍미했고, 4회의 월드 챔피언십 우승으로 당대 활동했던 드라이버들 중 가장 많은 수상을 올린 드라이버이다.현재는 특히 성장 배경, 성격, 드라이빙 스타일이 모두 정반대인 세나와의 라이벌리로 유명하다.
3. 선수 경력
프랑스 루아르 생 샤몽에서 약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로레트에서 출생. 소년 시절부터 스포츠에 소질을 보였고, 장래희망은 축구 선수나 헬스 트레이너였다고 한다.하지만 14세에 가족들과 함께 카트레이싱 경기를 관람하러 간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 버린다. 경기를 보면서 모터스포츠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고, 레이서의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결국 19세에 학교를 그만두었고 본격적으로 프로 레이서로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1974년 프랑스 시니어 카트 챔피언십과 포뮬러 르노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F3에 진출했고 F3에서도 맹활약하면서 맥라렌과 2년 계약, F1에 데뷔하게 된다.
3.1. 초기
프로스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모터스포츠에 입문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레슬링, 축구, 롤러스케이트 등 다양한 운동을 했고, 특히 축구를 진로로 고민하기도 했지만, 14세 무렵 휴가 중 카트를 접하면서 카트 경주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그의 경주 인생의 시작이었다.카트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뒤, 1974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레이싱에 전념하였다. 엔진 튜닝 일도 하며 자금을 마련하였고, 카트 대회 우승을 통해 뒤를 잇는 상금과 기회들을 얻었다. 이후 르노 F1 팀 무대에 올라 두 번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포뮬러 3에서는 1978년부터 1979년까지 프랑스 및 유럽 챔피언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여러 팀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3.2. 포뮬러 1 진출 및 초창기 F1 경력
프로스트는 1980년 맥라렌 팀 소속으로 포뮬러 1에 데뷔했다. 첫 시즌은 여러 사고와 기계적 문제도 겪었고, 손목 골절, 사고로 인한 부상 등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 포인트 입상을 기록하였다. 1981년 시즌이 되면서 그는 르노 팀으로 이적하였다. 이 해에 프로스트는 고향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처음으로 F1 우승을 한다. 프랑스의 차, 프랑스 드라이버가 고국에서 승리한 것이어서 매우 의미있었다고 한다. 이후 르노 소속으로 여러 승리를 추가하며 명성을 쌓는다. 르노 시절에 프로스트는 1982년, 1983년에 걸쳐 좋은 페이스를 보이며 우승도 반복했고, 세계 선수권을 노릴 만한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여러 모로 팀의 지원, 차량 개발, 내부 갈등 등이 그의 우승 가능성을 가로막는 요소가 되었다는 평가다.3.3. 맥라렌 복귀 및 첫 번째 챔피언십 타이틀
르노에서의 몇 시즌 후, 1984년에 프로스트는 다시 맥라렌으로 복귀한다. 맥라렌은 기술적으로 매우 경쟁력 있는 차를 제공했으며, 프로스트는 곧바로 상위권 경쟁자로 발돋움한다. 1985년 그는 마침내 첫 세계 선수권 타이틀을 획득한다. 맥라렌 소속으로, 경쟁 드라이버들과 치열한 싸움 끝에 우승하며 “최초의 프랑스 세계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이어서 1986년에도 연속 타이틀을 방어하며, 연속 우승을 한 첫 프랑스 출신 챔피언이 된다.3.4. 맥라렌과의 경쟁, 세나와의 라이벌 관계
1988년부터는 맥라렌과 혼다의 엔진 콤보로 큰 강세를 보이며, 1988년 시즌은 맥라렌-혼다가 거의 압도적인 지배를 했다. 그 시즌 프로스트는 여러 번 우승했고, 동료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와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세나는 속도 면에서, 스타일 면에서 공격적인 면에서 뛰어났고, 프로스트는 좀 더 계산적이고 전략 중심의 드라이빙으로 대항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1989년에는 프로스트와 세나 간의 긴장감이 매우 높아졌고, 시즌 마지막 경기가 치열한 라이벌전의 결판 무대가 됐다. 일본의 스즈카에서 두 사람 간 충돌 사건이 있었고, 이는 선수권 결정에 직결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프로스트는 이 시즌에 챔피언을 획득한다.3.5. 페라리 이적과 어려움
1989년 맥라렌과의 일정을 마무리한 뒤, 프로스트는 1990년부터 페라리(Ferrari)로 이적한다. 처음 페라리에 들어갔을 때의 기대가 매우 컸다. 그는 여러 차례 우승을 거두었고, 타이틀 경쟁에도 근접했으나 결국 세나가 또다시 경쟁자로서 우위를 점했다. 특히 1990년 일본 스즈카에서의 충돌은 논란이 되었다. 세나는 의도적으로 페라리를 밀어붙였다는 비판을 받고, 프로스트는 이를 “역겹다”라고 표현했다. 1991년에는 페라리가 전반적으로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고, 신뢰성 문제와 잦은 고장, 엔진 등의 이슈가 발생했다. 프로스트는 팀에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게 되고, 시즌 마지막까지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일부 레이스에서 성적을 내지 못했다. 결국 시즌 중 페라리에서 해고되는 일이 발생한다.3.6. 잠정 은퇴, 복귀, 최고의 해 및 최종 은퇴
1992년 프로스트는 잠시 F1에서 물러나 방송 해설자로 활동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레이싱과 팀 경영 양쪽에 대한 여러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93년, 윌리엄스 팀으로 돌아온다. 이 해는 그에게 있어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여러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두며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고, 마침내 네 번째 세계 선수권 타이틀을 차지한다. 이 성과로 그는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 중 하나로 평가받는 위치를 확고히 한다. 1993 시즌 종료 후, 그는 아르톤 세나가 같은 팀으로 들어올 가능성 등이 거론되자 “경쟁을 계속할만한 의욕이 떨어졌다”고 판단하여 정식으로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한다.3.7. 은퇴 후 활동
1993년 은퇴 이후 프로스트는 여러 활동을 병행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르노 F1 팀과의 관계다. 르노는 프로스트를 자문역으로 삼거나 때로는 공식 직책을 부여하며 기술 개발과 팀 운영에 간접적으로 참여시켰다.또한 1997년에는 직접 ‘프로스트 그랑프리(Prost Grand Prix)’라는 팀을 창설하여 F1에 뛰어들었다. 이는 전통 있는 리제 팀(Ligier)을 인수한 것이었는데, 초반에는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으나 재정난과 스폰서 부족으로 2001년을 끝으로 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실패는 프로스트의 은퇴 후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큰 아쉬움으로 꼽힌다.
이후에도 그는 모터스포츠와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았다. 전기차 기반의 포뮬러 E 대회에서도 르노 e.댐스 팀 운영에 관여했으며, 프랑스 내 카레이싱 관련 인프라 확대에 힘썼다.
4. 드라이빙 스타일
프로스트의 드라이빙 철학은 한마디로 “필요 이상으로 차를 몰아붙이지 않는다”였다.그는 언제나 머신의 한계와 자신의 기술적 역량 사이에서 “안정적인 최적치”를 찾아내는 데 집중했으며, 순간적인 영웅심이나 과감한 모험보다 “레이스 전체를 관통하는 그림”을 우선시했다. 따라서 그의 주행은 외견상으로는 과감함이나 화려함이 부족해 보일 수 있었지만, 장거리 레이스의 맥락에서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으로 귀결되곤 했다.
일부 팬들은 그를 “지루하다”거나 “모험이 없다”고 평했지만, 실제로 그의 레이스 운영 방식은 당시의 불완전한 머신, 극단적으로 제한된 타이어와 연료 조건 속에서 승리 확률을 극대화하는 현실적인 승부수였다. 즉, “가능한 위험은 최소화하고,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만을 달성한다”라는 원칙이 드라이빙의 핵심이었다.
4.1. 코너링 스타일
프로스트의 코너링은 동시대 드라이버들에 비해 확연히 부드럽고, 마치 연습 주행처럼 여유로워 보이는 것이 특징이었다.그는 코너 진입 시에도 과도한 브레이킹으로 프론트 타이어를 잠그거나 차체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차량의 밸런스를 보존한 채 안정적으로 회두하는 데 집중했다.
코너 초입에서는 상대적으로 일찍 브레이크를 밟되, 길고 일정한 압력으로 감속하면서 차체를 안정시켰다. 이후 조향각 역시 매우 부드럽고 일정하게 가져갔으며, 스티어링 휠을 급하게 꺾는 법이 거의 없었다.
출구에서는 지나치게 급격하게 스로틀을 열지 않고, 점진적으로 엔진 출력을 끌어올리며 트랙션 손실을 최소화했다. 이런 주행 방식은 타이어 마모와 연료 소모를 현저히 줄였고, 레이스 후반부에 다른 드라이버들이 페이스가 떨어질 때 프로스트는 여전히 꾸준한 랩타임을 유지할 수 있었다.
4.2. 타이어 관리 능력
프로스트가 “교수”라는 별명을 얻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압도적인 타이어 관리 능력이다.1980년대 F1은 현대와 달리 피트스톱 전략이 자유롭지 않았으며, 많은 경우 한 세트의 타이어로 전 레이스를 소화해야 했다. 따라서 타이어를 아끼지 못하는 드라이버는 후반부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프로스트는 초반부터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고, 타이어의 온도와 마모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단순히 “천천히 달린다”가 아니라, 트랙의 마찰 계수, 코너에서의 슬립 앵글, 그리고 차체의 하중 이동을 정밀하게 계산해 타이어가 가장 오랫동안, 가장 효율적으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주행했다.
그 결과, 레이스 중반부 이후 대부분의 드라이버들이 랩타임이 급격히 떨어질 때 프로스트는 오히려 페이스를 올리며 추월하거나, 후반에 안정적으로 리드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점이 바로 그가 긴 커리어 동안 일관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4.3. 연료 관리
터보 시대의 F1에서 연료 관리야말로 경기 결과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였는데, 프로스트는 이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감각을 지녔다.1980년대 터보 엔진은 엄청난 출력을 뿜어냈지만 연료 소모량이 막대했기 때문에, FIA는 연료 탱크 용량을 제한하여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가” 자체가 전략적 싸움이 되었다.
프로스트는 단순히 스로틀을 덜 밟는 수준이 아니라, 각 코너와 직선에서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가속·감속 패턴을 몸에 익혔다. 또한 레이스 초반에는 경쟁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일정한 리듬으로 연료를 아껴두었다가, 후반에 필요할 때만 잠시 푸시해 상대를 압박하거나 추월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특히 1986년 애들레이드에서 열린 시즌 최종전은 그의 연료 관리 능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례로 꼽힌다. 당시 맥라렌-태그 포르쉐 엔진은 연료 효율이 불리했음에도, 프로스트는 치밀한 관리로 레이스를 끝까지 이어가며 극적인 역전 우승과 함께 시즌 챔피언십을 가져갔다.
4.4. 세팅과 기술적 피드백
프로스트는 단순한 드라이버가 아니라, 엔지니어적 사고를 가진 레이서였다. 그는 머신 세팅과 개발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정밀한 피드백을 제공했으며, 팀은 그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대부분의 드라이버가 감각적인 표현(“언더스티어가 심하다”, “리어가 미끄럽다”) 수준에 머무를 때, 프로스트는 실제 엔지니어처럼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코멘트를 남겼다. 예컨대 “이 구간에서 특정 RPM대에서 토크 곡선이 매끄럽지 않다”라든지, “브레이킹 시 전륜 하중이 특정 지점에서 급격히 사라진다” 같은 식이었다.
덕분에 프로스트가 몸담은 팀은 머신 개발에서 항상 큰 이점을 얻었고, 이는 곧 레이스 퍼포먼스로 이어졌다. 맥라렌, 르노, 페라리, 윌리엄스 등 명문 팀들이 모두 그와 함께한 것은 단순히 드라이버로서의 실력 때문만이 아니라, 개발 드라이버로서의 자산 가치 때문이기도 했다.
4.5. 공격성과 리스크 관리
프로스트가 흔히 “지나치게 안전지향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지만, 실제로는 필요할 때 과감한 공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만 차이점은, 그는 결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상대 드라이버가 무리한 방어를 펼치거나 사고 위험이 높은 상황에서는 한 템포 물러나기도 했지만, 후반부 레이스 흐름에서 반드시 필요할 때는 예리하고도 깔끔한 추월을 구사했다. 그는 정면승부보다는 타이밍과 상황을 이용한 효율적인 추월을 선호했으며, 이는 “레이스 전체를 보는 눈”이 있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라이벌인 세나처럼 극단적인 브레이킹 포인트 돌파보다는, 상대의 타이어 상태나 레이스 운영 패턴을 파악한 뒤 그 약점을 찌르는 식으로 자주 승부를 걸었다.
4.6. 세나와의 비교
프로스트의 드라이빙 스타일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비교 대상이 바로 아일톤 세나다.세나는 언제나 한계까지 차를 몰아붙이며, 화려하고 감각적인 주행으로 관중을 압도했다. 반면 프로스트는 계산적이고 안정적인 운영으로 레이스를 지배했다. 이 둘의 차이는 마치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의 차이와 같았다. 세나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천재형”이라면, 프로스트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최적해를 찾아내는 “학자형”이었다. 실제로 같은 머신을 몰았던 1988년 맥라렌에서 세나는 13번의 폴 포지션을 차지했지만, 시즌 챔피언십은 프로스트와 세나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다투었다. 세나가 압도적인 속도로 주목을 끌었음에도, 프로스트는 꾸준한 포인트 적립과 안정적인 레이스 운영으로 끝까지 맞섰던 것이다.
4.7. 현대 F1과의 비교
오늘날의 F1에서는 연료와 타이어 관리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하이브리드 파워 유닛과 데이터 기반 전략 시스템이 훨씬 정교해졌다. 그러나 당시의 환경에서는 이런 계산을 드라이버 스스로 몸으로 체득해야 했다. 따라서 프로스트의 드라이빙 스타일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 기반 레이스 전략”을 이미 인간 두뇌와 감각으로 구현해낸 선구적 사례라 할 수 있다.4.8. 서킷 위의 교수
맥라렌 유니폼을 입고 치른 데뷔 시즌에서 5포인트를 획득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나 자신의 팔목 부상을 불안정한 맥라렌의 차량 때문이라고 여긴 프로스트는, 계약을 파기하고 르노로 팀을 옮긴다.1981년 프로스트는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데뷔 첫 승을 거두는 등 그 해에 3승을 따냈고, 3시즌 동안 9승을 따내면서 르노의 간판 드라이버로 활약했다.
그리고 프로스트는 1984년 맥라렌으로 복귀, 이후 6시즌 동안 30회의 그랑프리 우승, 3회의 월드 챔피언십 우승으로 최고의 레이서로 군림한다.
이런 프로스트에게는 '교수'라는 애칭이 붙었는데, 항상 철저한 분석과 연구로 경기에 임하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맥라렌에서 1984 시즌을 보낼 때 파트너가 다름 아닌 니키 라우다였는데 공교롭게도 라우다 역시 분석적이고 안정적인 레이스 스타일로 유명했다. 실제로 F1 오피셜 유튜브 채널 팟캐스트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알랭 프로스트가 니키라우다의 스타일과 닮게 된건, 1984년 매 라운드마다 1등만을 바라보고 100퍼센트 기량을 발휘하던 본인과 다르게, 포인트를 꾸준히 따내며 안정적으로 레이스를 끝내던 니키에게 챔피언십 선두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이 계기라고 한다.[1]
5. 애증의 라이벌 아일톤 세나
| |
| 맥라렌 시절 아일톤 세나와 함께. |
1984 모나코 GP의 우천 중단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악연은 1988년에 맥라렌이 로터스 소속이었던 아일톤 세나를 영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점화됐다. 프로스트와 세나는 F1 역사상 최강의 듀오로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고, 실제로도 둘은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철저한 분석과 전략을 선호하는 프로스트의 레이싱 스타일과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세나의 레이싱 스타일은 완전히 정반대였는데[2], 레이싱 스타일만큼 둘의 사이도 악연에 가까웠다. 보통은 뛰어난 1명을 메인 드라이버로 두고 그보다 떨어지는 드라이버가 세컨드 드라이버가 되어 메인 드라이버를 지원해주는 일이 많은데, 이 둘은 둘 다 메인을 맡아도 이상할 게 없는 기량을 가진데다 기량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했다. 서로간의 불화가 커져갈 수밖에 없는 상황. 맥라렌 후기엔 팀내에서 파벌이 갈려 서로 제대로 말도 섞지 않는 상황이 됐다고 한다.
두 사람의 불화가 폭발해 대외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바로 1989년 일본 그랑프리의 충돌 사고다. 앞서 달리던 프로스트의 인코스를 세나가 파고들었고 프로스트가 방어하며 충돌이 발생했다.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충돌인데, 세나를 옹호하는 측에선 드론뷰 시점의 영상을 증거로 프로스트의 코스 방어가 이질적으로 느렸다고 주장하고, 프로스트 측은 프로스트의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세나가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3]
프로스트가 페라리로 이적한 90년 일본 GP에서도 레이스 개시 직후 앞서 달리던 프로스트를 세나가 들이받아 양자가 리타이어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포인트에서 세나가 앞서있는 상황에서 프로스트에게도 역전의 가능성이 있었으나 레이스 시작과 동시에 벌어진 리타이어로 인해 세나의 우승이 확정됐다. 충돌의 고의성에 대한 질문에 세나는 계속 당하고만 있진 않겠다며 사실상 고의 충돌을 시인했다. 레이스 전부터 세나는 자신이 폴 포지션을 차지했음에도 노면 상태가 불리하게(프로스트에게 유리하게) 배정됐다며 대놓고 분노를 드러냈다.[4][5]
이후 1991년, 프로스트는 데뷔 후 처음으로 시즌 중 1승도 올리지 못하는 부진 끝에 페라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 굴욕을 겪었고[6], 92년 TV 해설가로 데뷔하면서 은퇴 수순을 밟는 듯 했다. 하지만 1993년, 그는 윌리엄스 팀에 입단. 그 시즌에서 7승을 거두며 자신의 통산 네 번째 월드 챔피언에 오르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 |
| 윌리엄스에서 마지막 챔피언이 된 1993년의 모습. |
하지만 윌리엄스가 세나의 영입에 관심을 보인다는 말이 돌자, 프로스트는 은퇴를 선언했다. 애초에 윌리엄스에 입단할 때 프로스트가 내세운 조건 중에 세나를 영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세나를 영입할 거라면 차라리 이듬해 계약금까지 받고 은퇴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 정도로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서 물러난 후엔 당시 윌리엄스 소속이던 세나와의 관계도 많이 누그러져서 평범하게 인사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이몰라에서 롤란드 라첸베르거가 사망했을 때 GDPA의 재결성을 논의하기 위해 세나가 가장 먼저 찾아간 드라이버가 프로스트였다. 또 세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며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한 사람들 중 하나가 프로스트였다.
6. 연도별 성적
6.1. 포뮬러 1
| 시즌 | 팀 | 경기 | 우승 | 폴 포지션 | 패스티스트 랩 | 포디움 | 포인트 | 순위 |
| 1980 | 말보로 팀 맥라렌 | 13 | 0 | 0 | 0 | 0 | 5 | 16위 |
| 1981 | 에키프 르노 엘프 | 15 | 3 | 2 | 1 | 6 | 43 | 5위 |
| 1982 | 16 | 2 | 4 | 4 | 4 | 34 | 4위 | |
| 1983 | 16 | 4 | 2 | 3 | 7 | 57 | 2위 | |
| 1984 | 맥라렌 F1 팀 | 16 | 7 | 3 | 3 | 9 | 71.5 | 2위 |
| 1985 | 16 | 5 | 2 | 5 | 11 | 73 | 1위 | |
| 1986 | 16 | 3 | 1 | 2 | 11 | 72 | 1위 | |
| 1987 | 16 | 3 | 0 | 2 | 7 | 46 | 4위 | |
| 1988 | 16 | 7 | 2 | 7 | 14 | 87 | 2위 | |
| 1989 | 16 | 4 | 2 | 5 | 11 | 76 | 1위 | |
| 1990 | 스쿠데리아 페라리 | 16 | 5 | 0 | 2 | 9 | 71 | 2위 |
| 1991 | 14 | 0 | 0 | 1 | 5 | 34 | 5위 | |
| 1993 | 캐논 윌리엄스 르노 | 16 | 7 | 13 | 6 | 12 | 99 | 1위 |
7. 평가
프로스트는 당대는 물론이고 현재도 역사상 최고 반열의 드라이버 중 한 명으로 인식되며 아무리 낮게 잡아도 역대 탑 10에는 넉넉히 드는 거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저평가된 드라이버로도 거론된다. 자신의 역사적인 저평가에 대해 은퇴 30년이 지난 최근에도 강하게 의식하며 아쉬워할 정도이다. 이는 프로스트가 역대급이라는 평가는 받지만 막상 역대 최고를 뽑을 때는 잘 언급되지 않고 특히 라이벌인 세나의 신화적인 인기와 위상에 눌려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인데, 실제 그의 커리어를 살펴보면 그의 아쉬움에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프로스트의 커리어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그가 상대해온 팀메이트들을, 그들이 하나같이 높은 실력을 자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겨왔다는 점이다. 비챔피언 팀메이트들인 왓슨, 아르누, 치버, 요한손, 알레시 등도 물론 당대 중상위권~상위권의 실력자들이었지만, 프로스트가 그저 앞서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넉넉히 압살해버린 대상들이 니키 라우다, 케케 로즈버그, 나이젤 만셀, 데이먼 힐 등의 챔피언들까지 포함한다는 점은 프로스트의 실력을 짐작케 한다.
가장 주목받았던 아일톤 세나와의 경쟁에서도 두 시즌 모두 더 많은 포인트를 땄지만, 당시 포인트 계산법 탓에 한 번 챔피언을 내주었을 뿐이다. 물론 숏런에서는 밀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레이스 기록을 포함한 종합적인 성과에서는 뒤지지 않았음에도 대중적인 평가에서는 2인자처럼 인식되곤 한다. 프로스트의 지지자들은 이것이 그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드라이빙 스타일과 세나의 비극적인 요절에 따른 잘못된 평가라고 본다.
| 세나 | vs | 프로스트 |
| 17 | 레이스 승리 | 13 |
| 28 | 퀄리파잉 승리 | 4 |
| 14 | 그랑프리 우승 | 11 |
| 26 | 폴 포지션 | 4 |
| 154 | 포인트 | 186 |
알랭 프로스트에 대해 자세한 분석이 들어가 있는 내용이다. 주관이 비교적 많이 들어가있는 편이긴 하지만 읽을만한 내용이다. 아일톤 세나가 정말 대단한 드라이버인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로스트가 결코 평가절하당할만한, 그리고 굳이 악역으로서 역할을 떠맡아야할 선수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7.1. 팬덤에서의 평가
팬덤의 평가에서는 극단적인 양면성이 존재했다. 하나는 “F1 역사상 가장 지적이고 효율적인 드라이버”라는 찬사였다. 특히 같은 시대의 파격적인 스타일을 대표한 세나, 나이젤 만셀, 넬슨 피케 등과 비교했을 때 프로스트의 모습은 ‘이성과 전략’ 그 자체였기 때문에, 지적이고 치밀한 레이스를 선호하는 팬층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반면 또 다른 쪽에서는 “재미없는 챔피언”이라는 오명을 씌우기도 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프로스트는 무리한 추월이나 극적인 사고 장면을 만들지 않고, 종종 우승보다는 안정적인 포인트 획득을 노렸다. 이는 챔피언십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관객들에게는 박진감을 덜 느끼게 만들었다. 실제로 1980~90년대 영국 언론은 그를 “무색무취의 승자”라고 조롱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른 뒤 그의 기록과 통계가 재조명되면서 점차 후자의 평가는 옅어졌다. 오늘날에는 ‘재미없다’보다는 ‘현명하다’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아 있다.
8. 프랑스 스포츠계에서의 위상
프로스트는 프랑스인 드라이버로서 유일하게 F1 월드 챔피언을 여러 차례 차지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 언론과 대중은 그를 단순한 드라이버가 아니라 국가적 자산으로 바라봤다. 프랑스 체육부에서 공식적으로 치하를 받은 적도 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스포츠 외교의 일환으로 각종 행사에 초청되곤 했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는 프랑스의 축구 대표팀이나 사이클링(투르 드 프랑스)이 침체기를 겪던 시기라, 프로스트의 성공이 프랑스 스포츠 팬들에게는 일종의 자존심 회복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프랑스 대중문화에서 프로스트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를 넘어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프랑스의 어린이들이 모터스포츠에 관심을 갖는 계기 중 상당수가 ‘프로스트가 있어서’였다는 증언이 많다. 또한 프로스트는 수많은 잡지 표지를 장식했으며, TV 광고에도 등장했다. 당시 프랑스 내 자동차 광고에서 “프로스트가 추천하는 ○○”라는 문구는 곧 신뢰성을 상징했다. 특히 르노와의 협업 광고는 프랑스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해외에서는 ‘세나와 함께 기억되는 인물’로서 문화적 재현이 이루어졌다. 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 《Senna》에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극적인 라이벌 구도의 한 축으로 묘사되었다. 다만 일부 편집 방향 때문에 프로스트의 입장이 다소 불리하게 보였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이후 프로스트 본인이 인터뷰에서 “세나를 추모하는 영화였으니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내 이야기가 전부 담기지는 않았다”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9. 기타
-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의 프란츠 하이넬은 바로 알랭 프로스트+니키 라우다를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다.[7]
- 영화 '세나 : F1의 신화'에서 확인된 자료에 의하면 현재 아일톤 세나 재단의 이사라고 한다.
- 1997년 에키프 리지에 팀을 인수하여 프로스트 F1 팀의 오너가 되었지만 팀은 이렇다 할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2001년을 끝으로 파산, F1에서 사라지게 된다.
- 1981년에 장남 니콜라를 득남, 1990년에 차남 사샤를 득남했다. 장남 니콜라 프로스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터 스포츠 커리어를 밟았으나 성적은 영 시원찮은[8]. 니콜라는 현재 DA 레이싱 소속으로 안드로스 트로피에 출전 중이다. 둘째아들 사샤는 현재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으며 8JS 라는 패션 브랜드를 런칭하였다.
- 한 때 알핀 F1 팀의 비상임 이사로 활동하였다. TV 중계를 보면 패독에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2019년 천 번째 그랑프리이기도 했던 중국 그랑프리에서는 마지막 랩에 체커기를 흔들기도 했다.
- 모터스포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OBE를 수훈받았다.
10. 정치·사회적 언급
프로스트는 정치적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언론은 그를 종종 국가적 자부심의 상징으로 소비했다. 특히 1980년대 말 프랑스 경제 상황이 불안정할 때 언론은 “적어도 트랙 위에서는 프로스트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있다”라는 식의 논조를 자주 사용했다.은퇴 후에도 프랑스 정부의 체육 정책이나 모터스포츠 발전과 관련된 자리에서 의견을 내놓았으며, 그 과정에서 비교적 보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포츠 관련 발언이 주를 이루었고, 정당 정치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11. 후배 드라이버들에 대한 평가
프로스트는 은퇴 이후 해설자로 활동하면서 후배 드라이버들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특히 미하엘 슈마허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그는 내가 하던 방식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계산적이면서도, 동시에 더 과감하다”라고 평가해 주목받았다.또한 루이스 해밀턴에 대해서도 “세나와 같은 본능, 그리고 나와 같은 계산을 동시에 갖춘 드라이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발언은 많은 팬들에게 ‘프로스트가 해밀턴을 높게 평가한다’라는 인상을 주었다.
후배들에게는 종종 조언을 건넸지만, 공개적으로 특정 드라이버를 깎아내리지는 않았다. 이는 은퇴 후의 프로스트가 ‘원로’로서 존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12. 인간적 일화
냉철한 이미지와 달리, 프로스트에게도 인간적인 일화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992년 은퇴를 고려하던 시기, 팬들에게 직접 자필 편지를 보내며 “당신들의 지지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라고 쓴 사건이다. 당시 팬클럽 회원들에게만 전달된 이 편지는 지금도 수집가들 사이에서 희귀 아이템으로 취급된다. 또한 은퇴 후 프랑스의 한 지방에서 자전거 대회를 주최했을 때, 직접 참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주며, “내가 챔피언일 때보다 이런 자리가 더 행복하다”라고 말해 큰 호응을 얻었다.[1] 프로스트-세나의 라이벌리는 호사가들에 의해 한 세대 앞의 니키 라우다-제임스 헌트의 관계와 종종 대응되곤 한다. 후술하겠지만 프로스트와 세나의 성격과 경기운영은 서로 정반대인데 이 구도가 라우다-헌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2] 세나가 화려한 주행으로 가장 많은 폴 포지션과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랑프리 포인트는 차분하게 안정적인 주행을 했던 프로스트가 더 높았다.[3] 이는 또 다른 유명한 논란을 낳았다. 그대로 레이스를 포기한 프로스트와 달리 세나는 다시 레이스를 재개해 극적으로 1위를 차지했지만 레이스 복귀 규정 미준수를 이유로 실격 처리됐다. 세나는 그로 인해 레이스에서 이득을 본 게 없으며 전례를 봐도 실격은 과한 처사라 어필했으나 기각됐다. (재밌는 건 나중에 세나의 레이스 복귀는 문제가 없는 쪽으로 규정이 변경된다.)[4] 세나는 기존부터 프로스트와 국제 자동차 연맹의 수장 발레스트르의 유착 관계를 의심하며 그로 인해 자신이 부당한 처사를 받아왔다는 불만을 표출해왔다.[5] 안 그래도 위험한 드라이버로 낙인 찍혀 라이센스가 취소될뻔한 전적도 있었던 세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큰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6] 다른 드라이버도 아니고 프로스트 정도 되는 드라이버라면 드라이버의 기량보다도 차량의 성능 문제가 컸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결국 부진에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한 법이고, 팀과의 관계도 좋지 않고 팀의 차량을 대놓고 비난했던 프로스트가 해고된 것이다. (프로스트는 자신이 몰던 레이싱 카의 핸들링 성능을 무려 '트럭'에 비유했다...)[7] 니키 라우다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의견이 많다.[8] 니콜라는 2014년 포뮬러 E에서 닉 하이트펠트를 거의 죽일뻔하며 욕을 잔뜩 얻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