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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4년 4월 7일 ([age(1944-04-07)]세) | ||
나치 독일 베스트팔렌노르트대관구 모센베르크 | |||
재임기간 | 제7대 연방총리 | ||
1998년 10월 27일 ~ 2005년 11월 22일 | |||
서명 | |||
S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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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괴팅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 (법학) | ||
종교 | 개신교 (독일 개신교회)[2] | ||
소속 정당 | |||
의원 선수 | 5 (하원) | ||
지역구 | 비례대표[3] | }}}}}}}}}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총리2.3. 퇴임 후 행보
3. 기타2.3.1. 친러 행보 및 푸틴 옹호 논란
2.3.1.1. 빅토르 유셴코 다이옥신 암살 미수 관련 푸틴 찬양2.3.1.2. 재임 중 러시아 노르트스트림과의 유착2.3.1.3. 체첸 전쟁 관련 푸틴 옹호2.3.1.4. 에스토니아 전쟁기념물 철거 이전 관련 러시아 옹호 2.3.1.5. 남오세티아 전쟁 관련 푸틴 옹호2.3.1.6. 러시아 크림반도 합병 관련 푸틴 옹호2.3.1.7. 러시아 로스네프트 이사회 의장 취임2.3.1.8.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푸틴 옹호
2.3.2. 사생활 논란2.3.3. 파라다이스 페이퍼스 탈세2.3.4. 사민당 내 복권1. 개요
독일의 정치인이자 제7대 연방총리로, 정계 은퇴 이후에는 기업인 겸 로비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5년 기준으로 생존한 독일 총리 중 최고령이자 최선임 총리이기도 하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944년 4월 7일, 나치 독일 시절 베스트팔렌노르트대관구(오늘날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모센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이후 슈뢰더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니더작센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다.아버지 프리츠 슈뢰더(Fritz Schröder, 1912~1944)는 부모 없이 자란 고아였고, 젊은 시절 대부분을 노숙자 생활과 농장 임시노동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절도죄 등으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아 복역한 전과자이기도 했다. 1936년, 프리츠는 그룬힐트 에리카 라우터바흐(1913~2012)와 교제를 시작했으며, 이후 재수감되었다가 1939년 출소 직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결혼한 뒤에는 에리카의 계부가 거주하던 집에 얹혀살았으며, 징집 연령에 해당했지만 전과자로 복역 중이었기에 나치 독일의 초기 징집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한 이후인 1940년 결국 징집되었고, 1944년 둘째 아들 게르하르트가 태어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전사하였다.
이때문에 슈뢰더는 농장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던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스스로를 극빈층 출신이라 언급했으나, 그 가족사는 사민당의 정치적 아버지인 빌리 브란트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빈곤 이상의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피가 섞이지 않은 계부의 자녀들 및 계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 형제들과 함께 계부의 어머니, 즉 새할머니의 집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복잡한 가족 내 갈등과 긴장 속에서 자랐다.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던지라 14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가게에서 견습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건설 현장 등에서 힘겹게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래도 17세부터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병행했고, 19세였던 1963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전사한 유복자로 병역은 면제되었다.[4]
1966년, 22세의 나이에 대입자격시험을 통과한 뒤 괴팅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고, 1976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하노버에서 개업하였다. 이후 정치활동과 법률활동을 병행했는데, 1970년대 말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던 독일 적군파의 공동 설립자이자 극좌 공산주의 정치운동가이자 테러리스트였던 호르스트 말러(Horst Mahler)의 변호인으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80년 말러가 석방되었을 때, 석방을 주도한 인물로서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말러의 복권과 정치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이름값을 높였다.
한편 1978년에는 사민당 청년조직인 Jusos 의장을 역임했고, 1980년에는 연방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86년 니더작센 주의회 원내대표, 1990년 니더작센 주총리를 거쳐 사민당 내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 슈뢰더는 사민당 내 우파, 즉 제3의 길 계열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으며, 민주사회주의 성향 좌파 노선을 대표하던 오스카 라퐁텐과는 오랜 기간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2.2. 총리
2.2.1. 임기 초: 제3의 길
1998년 연방총선에서 제3의 길을 내세우며 사민당의 총리 후보로 나선 슈뢰더는 16년 넘게 장기집권한 헬무트 콜 총리의 CDU/CSU를 꺾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1990년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래 서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침체기를 맞았으나, 90년대 후반 우파적인 요소를 일부 수용하여 우파와 좌파를 절충한다는 이른바 제3의 길은 같은 시기 영국의 토니 블레어, 프랑스의 리오넬 조스팽과 함께 유럽 중도좌파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했다. 슈뢰더는 1999년 6월 블레어와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위한 제3의 길 선언」을 발표하며 같은 맥락인 '신중도' 노선을 지향했다.총리 취임 직후, 슈뢰더는 통일 이후 지속된 경제 침체와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는 것을 최대 과제로 제시하였다. 동시에 이민자에게 국적 취득의 기회를 확대하는 국적법 개정을 추진해 독일 사회의 다양성과 통합을 강조했다. 실제로 혈통주의(Jus sanguinis) 중심의 기존 국적법에 출생지주의(Jus soli)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독일 시민권 제도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실업률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는 높은 실업률 덕분에 기민당 정권 16년을 깨고 집권했지만, 결국 자신도 그 실업률을 개선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민당의 메르켈에게 총리직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높은 실업률 덕분에 총리라도 해먹었다.
독일 경제는 1999년(2.0%)과 2000년(3.1%) 일시적 반등을 보였지만, 2001년 닷컴 버블 붕괴와 9.11 테러 여파로 다시 침체에 빠졌다. 실질 GDP 성장률은 2000년 3.1%에서 2002년 0%로 급감했으며, 실업률도 여전히 9% 대에 머물렀다. 특히 동독 지역의 장기 실업률은 20%를 넘나들며 통일 비용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다.
연립 파트너였던 녹색당과는 원자력 발전소 단계적 폐쇄, 환경세 도입 등에서 협력하면서도, 경제정책 및 복지 구조조정에서는 마찰을 겪었다. 사민당 내부에서도 노동계와 좌파 지지층의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이는 정권의 정체성 논란으로 이어졌다.
외교적으로 전현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인 친선을 추구했고, 특히 러시아와의 적극적인 밀월 관계를 추구했다. 2004년 푸틴을 '완벽한 민주주의자'라고 칭송했다가 세계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적극적인 친중 정책을 펼쳤다. 퇴임 후에도 일방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옹호하는 발언을 쏟아내며 서방과 미국을 비판하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는 북한이 수교를 요청해오자 슈뢰더는 고심하다가 김대중 정부의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과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권했다고 한다. 결국 북한과도 수교를 맺었다.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중도라고 포장했지만, 기실은 그동안 자신들이 추구해왔던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다만 시대적 변화에 따른 수정만을 가했을 뿐이었다. 처음에 제3의 길이 뭔가 엄청나게 새로운 것인 줄 알고 환호했던 시민들도 이같은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고 90년대말 제3의 길을 주창하며 정권을 잡았던 서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결국 2000년대 중반 동시다발적으로 선거에서 패했다. 제3의 길 3인방 중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이 가장 먼저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여 물러났고, 같은해 하반기 독일 총선에서 슈뢰더도 집권 4년만에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2.2. 재선 성공과 하르츠 개혁
2002년 총선에서 슈뢰더와 사민당은 지지율이 썩 좋지 않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전쟁 개전에 강경하게 반대했던 데다가, 선거 직전 있었던 엘베 강 홍수에 맞서 보여준 리더십에 힘입어 가까스로 적록 연합이 과반 의석을 확보, 총리직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사민당은 이전보다 무려 47석이 잃어 CDU/CSU에 불과 3석 차이로 제1당이 되었는데다가, 연정 의석은 과반에서 겨우 4석을 더 확보한 상황이라 정국 불안이 계속되었다. 이미 사민당의 전국적 지지 기반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특히 갈수록 악화되는 실업 문제와 옛 동독 지역의 낙후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면서 사민당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졌다. 게다가 총선 직후부터 사민당은 지방선거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지방 정부 장악력을 잃어갔다. 잇따른 주의회 선거에서의 패배는 정권 운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슈뢰더 2기는 1기 때보다 훨씬 힘이 빠지게 되었고, 결국 임기를 1년 여 앞둔 시점에서 슈뢰더는 조기총선 도박을 감행하게 된다.정책적으로는 재선 이후부터 2005년까지 하르츠 개혁이라 불리는 노동시장 및 복지제도 개편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은 2002년 도입된 아겐다 2010(Agenda 2010)의 일환으로, 슈뢰더 정부가 구성한 하르츠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단계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독일의 복지국가 모델이 고비용·저효율 구조에 빠져 있으며,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면 구조적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에서 슈뢰더가 이러한 정책을 강행했는데, 이결국 사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계와 노조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고, 사민당 내부에서도 좌파 계열의 이탈과 분열로 이어졌다. 특히 하르츠 IV는 빈곤층에 대한 보호를 축소한다는 비판 속에서 사민당의 지지율 하락을 가속화시켰다.
정치적으로는 큰 대가를 치렀지만, 하르츠 개혁은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고 후임 메르켈 내각에서도 유지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독일 경제의 구조 개혁과 고용 회복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국면에서도 독일이 비교적 안정적인 고용과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르츠 개혁을 통한 노동시장 유연화와 복지 재편이 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슈뢰더가 집권한 후 98년부터 2004년까지 독일의 경제 성장률은 1%에 불과한 사실상 제로 성장에 가까운 상태에 머물며 침체에 빠져들었고, 헬무트 콜을 실업자 총리라 비난하면 집권했지만, 슈뢰더 재임기간 중 실업률은 역대 최고치인 11%를 경신했으며, 실업자수는 급기야 500만명을 넘어서며 오일쇼크 시절을 능가하는 독일 연방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장기 경기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독일은 '유럽의 병자'로 불리었고, 경제대국으로서 독일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여겨졌다.
2002년 9월 이후 슈뢰더의 2기 총리 임기 동안 사민당은 지방 선거에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이 기간동안 치러진 12번의 지방 선거에서 사민당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를 제외한 11개 주에서 이전보다 의석을 잃었다. 특히 니더작센, 헤센, 자를란트 등 구 서독 지역에서는 몰락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의 참패를 거듭했다. 슈뢰더 1기 집권 초기인 1999년 사민당 주도 연정은 독일 16개 주 중에서 10개 지방 정부를 장악하여 10개 주정부를 장악한 CDU/CSU 주도 연정에 크게 앞서 있었다. 하지만 슈뢰더 재임 기간 동안 사민당은 지방선거에서 연전연패함에 따라 지방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사민당 연정에서 기민당 연정으로 지방 정권이 바뀌어 갔다.
그리고 예정된 총선을 1년 넘게 남겨둔 시점인 2005년 5월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또다시 참패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독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공업지대로 사민당의 전통적인 표밭이었기에 패배의 충격과 여파는 상당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1966년 이래 무려 39년간 사민당이 장악해 왔으니 이 선거의 패배의 충격은 클 수 밖에 없었다. #
게다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독일의 16개 주 중에 유일하게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집권하고 있는 주였다. 반면 야당은 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16개 주 가운데 11개 주를 장악하여 연방정부의 모든 입법을 저지할 수 있는 2/3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
이 패배로 향후 슈뢰더 내각은 남은 1년여의 임기 동안 법안의 정상적인 추진이 사실상 어려워지며 레임덕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슈뢰더는 식물 총리로 남느니 도박수를 던지기로 했다.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 지방선거 참패 결과가 나온 직후 슈뢰더는 당일 저녁 기자회견을 갖고 2005년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 # 이는 명백한 도박이었고 애초에 이기기 어려운 것이었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기민/기사당의 지지율이 월등히 높게 나오는 상황에서 자충수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가 지방선거에서 완패하여 남은 임기를 식물 총리로 보내는 것 또한 유럽의 정치 문화에서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슈뢰더의 조기총선 감행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상술하였듯 슈뢰더와 사민당의 인기는 바닥을 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슈뢰더가 조기총선 실시를 발표한 직후 여론조사에서 기민당 지지 46%, 사민당 지지 29%의 결과가 나왔고, 언론은 진작부터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당수가 독일 역사상 첫 여성총리가 될 것이라 대서특필했다. 이렇게 조기총선 캠페인 기간 내내 기민당(CDU/CSU)의 낙승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선거 후반 기민당의 메르켈이 주장한 기업 감세 및 소비자 증세 논란과 토론회에서 슈뢰더의 우세가 합쳐져 기민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그 반사이익으로 사민당의 지지율이 반등하여 턱밑까지 추격했다.
총선 결과 CDU/CSU이 제1당이 되었지만 연정파트너 자유민주당(제3당)과 합쳐도 과반을 넘기지 못했고, 사민당(제2당) 역시 연정파트너인 녹색당(제5당)과 합해도 절반을 넘기지 못하는, 애매한 결과가 나왔다. 사실 좌파당(제4당)까지 연정에 포함시키면 과반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전직 사민당 당수 겸 전직 연방재무장관이자 당시 좌파당 당수였던 오스카 라퐁텐과 슈뢰더와의 사이가 최악이었던 것. 결국 좌파당과의 연정이 무산되면서 정권 연장이 어려워진 상황이 됐다.
선거 당일 저녁에 메르켈과 토론을 하는 슈뢰더의 모습 |
그러나 제1당을 차지한 CDU/CSU가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연정 협상을 주도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결국 슈뢰더와 사민당은 기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기로 합의했고, 슈뢰더는 앙겔라 메르켈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퇴임하였다.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후임 총리 메르켈은 슈뢰더 내각이 추진했던 정책의 상당수에 크게 변화를 주지 않았다. 때문에 슈뢰더 내각의 정책이 독일 경제의 활력 회복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재평가가 나온다.
독일연방공화국 총리 퇴임식 중 국가 제창 |
슈뢰더는 좌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비교적 우파적인, 사실 사민당으로서는 상당히 우파적인 정책을 실시한 측면이 있었는데, 이러한 슈뢰더 내각의 정책은 실질적으로 독일에 도움이 되었고, 이후 메르켈 내각에서 이러한 기조를 이어가면서 독일은 유럽의 병자에서 회복하여 유럽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다시 부활한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이런 정책은 우파 정당도 반발 때문에 실시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만큼 당시 독일 경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거의 말기암 환자 치료 수준의 고통스러운 대응을 하게 된 것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그나마 보수 정당인 기민당이 아닌 좌파 정당 사민당이 이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좌파 지지자들의 반발을 그나마 줄일 수 있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사실 슈뢰더가 특별히 용기 있어서였다기 보다 90년대 이후 사회주의가 급격히 퇴조하며 90년대 말에야 이른바 제3의 길, 중도로 포장하며 겨우 재기에 성공했고, 슈뢰더 내각 뿐만 아니라 영국의 블레어 내각 등 당시 제3의 길 트리오 내각들은 이전 사회주의 정권에 비해서는 상당히 시장경제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고, 이는 사회주의가 낡은 이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당시에는 필연이라 여겨졌다.
어쨌거나 그의 노동 개혁과 사회 복지 축소 개혁은 퇴임 후 가장 높게 평가되는 그의 업적이며, 비록 재임 기간 중 독일 연방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경제 지표를 찍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았던 총리로 평가되는 주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메르켈 때 나타난 독일의 경제 회복의 공 역시 슈뢰더의 노동 개혁에서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자였던 슈뢰더의 노동 사회 개혁은 결국 한계가 있었고 특히 아래에 서술된 바와 같이 대기업들과의 유착 의혹, 그리고 정권 말기에 기존 정책이 뒤짚히고 반기업 정책을 실시한 점 등에서 많은 한계를 보였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한편 슈뢰더 개인과 기업, 특히 폭스바겐과의 관계는 지속적인 논란거리였다. 슈뢰더는 총리를 맡기 전 주지자 신분으로 폭스바겐의 이사로 9년이나 재직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슈뢰더와 사민당, 그리고 지지자들은 주정부가 폭스바겐 주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뭐가 문제냐고 했지만 강력한 실권을 갖고 있는 주 총리가 대기업의 이사로 장기 재직하는 것은 충분히 논란이 될만 했다. 그리고 슈뢰더는 이렇게 폭스바겐과의 유착을 통해 폭스바겐에 유리하도록 자신의 정치력을 십분 발휘한 전례가 여러차례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총리에 취임하기 직전에 있었던 폭스바겐의 롤스로이스 인수는 사실 BMW가 인수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슈뢰더가 적극적인 로비를 펼쳐 판을 뒤엎고 폭스바겐이 롤스로이스를 인수하게 된 것은 당시 해외 경제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이후 폭스바겐은 슈뢰더 집권 기간 내내 전폭적인 지원과 규제 완화를 통해 세계 1~2위를 다투는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슈뢰더는 평소에 환경 정치를 자처할 정도로 환경 문제를 주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집권 기간 동안 자동차 기업의 배기가스 규제 강화를 억제해 왔다. 덕분에 독일은 미국 등 다른 선진국에 비해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가 훨씬 완화되었고, 미국, 일본 등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훨씬 널럴한 배기가스 규정을 지속했다. 덕분에 디젤 승용차를 주력으로 하는 독일의 자동차 회사들이 강해지는 환경 규제로 망해가다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동안 환경 정책을 강조해왔던 그가 보이는 이같은 모순된 행보에 대한 지적이 있었지만, 클린 디젤이라는 날조된 프로파간다를 언급하며 환경도 잡고 경제도 잡는다는 기만적인 홍보를 했다.결국 슈뢰더 내각은 집권 후기로 갈수록 낮은 지지율을 만회하고 전통적 좌파 지지율을 결집시키기 위해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강화했다. 임기 후반 지지율 하락에 직면한 슈뢰더는 노조와 좌파 지지자들의 결집을 노리고 반기업 정서를 노골적으로 과시하기도 했다.
2.3. 퇴임 후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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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최근 모습 |
2023년 10월 한 인터뷰에서는 극우정당 AfD의 위험성에 대해 "의회제도 하에서는 나치와 같은 위험이 적다"고 언급하면서도, "독일이 EU와 NATO 안에서 긴밀히 통합되어 있어야 AfD의 극단화를 막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2.3.1. 친러 행보 및 푸틴 옹호 논란
총리 재직 시절 적극적인 친러 행각을 보였던 슈뢰더는 퇴임 직후부터 러시아 기업인으로 변신, 러시아의 이익을 대변하며, 푸틴의 숱한 전쟁 범죄 행각을 옹호해 독일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아 왔다. 이미 현직 총리 재직 시절부터 그는 친러 행보를 보여 러시아와의 유착에 대해 지적받아왔다.특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오히려 더 심해진 그의 이러한 집요한 친러 행보에 세계적인 비난과 사과 요구가 이어졌다. 사과할 생각이 있냐는 뉴욕 타임스 기자의 질문에 그는 "사과 같은 것(mea culpa)[5]은 하지 않는다. 나는 사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며 안면몰수 발언을 이어갔다. 또 슈뢰더는 NYT에 "나는 언제나 독일의 이익을 위해 일해왔다."고 말하여 독일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같은 행보에 대해 독일 국내외에서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다. 슈뢰더의 고향 하노버 시는 그에게 수여한 명예시민 박탈을 결의했는데, 이는 아돌프 히틀러에 이은 두번째 사례였다. 그의 오랜 측근들조차 그와의 관계를 끊는 등 독일 내에서 완전히 고립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사민당에서도 그의 출당 목소리가 높아졌고, 독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그의 사무실을 박탈하자는 안건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2022년 5월 18일 사민당을 비롯한 신호등 연정 3당의 합의로 베를린 연방하원에 있는 전 총리 사무실을 폐쇄당했다.#
전직 총리 특권을 없앤 하원의원들을 고소하였다.#
다만, 제명 요청안을 심사한 결과 슈뢰더 총리가 당 규약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는다면서 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2.3.1.1. 빅토르 유셴코 다이옥신 암살 미수 관련 푸틴 찬양
2004년 11월 24일 현직 총리였던 슈뢰더는 당시 국내외 정적 암살로 논란이 많았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향해 완벽한 민주주의자라고 칭송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야당인 기민당 대표 메르켈은 물론이고 독일 국내외 언론과 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유력 대선주자 빅토르 유셴코가 다이옥신 테러를 받아 전세계에 충격을 던져준 가운데 슈뢰더가 이같은 발언을 하였기에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푸틴은 집권 이후 수많은 정적과 언론인들을 탄압, 암살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슈뢰더의 해당 발언 직전에 벌어진 유셴코 다이옥신 테러 사건은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고, 배후로 지목된 푸틴에 대한 세계적인 비난이 높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반러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고, 오렌지 혁명의 선두에는 우크라이나의 반러 정치인 빅토르 유셴코가 있었다. 유셴코는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선을 얼마 앞둔 2004년 9월 유셴코가 다이옥신 테러를 받고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유셴코는 살아났지만 그의 얼굴은 독극물 중독으로 크게 망가졌다. 이 사건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빅토르 유셴코를 다이옥신으로 암살하려 했던 이 사건의 배후에는 러시아의 정보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블라디미르 푸틴이 지시한 것이라는 의혹이 파다했다. 이러한 와중에 슈뢰더가 푸틴을 완벽한 민주주의자'라고 칭송하자 전세계적으로 비난이 쏟아졌다.
2.3.1.2. 재임 중 러시아 노르트스트림과의 유착
특히 임기말인 2005년 러시아 에너지 기업 노르트스트림 AG과의 유착이 워싱턴포스트 등에 의해 폭로되었다. 슈뢰더는 독일에서 러시아 천연가스 사업이 성취도록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슈뢰더는 퇴임하기 직전인 2005년 10월 24일 러시아 노르트스트림의 천연가스 프로젝트 사업 비용 1조 유로를 독일 정부가 모두 보증하도록했다.총리 퇴임 직후부터 러시아 국영가스회사 가스프롬이 대주주로 있는 러시아 내 여러 에너지업체의 컨소시엄에서 임원으로 재직해왔고, 2022년 현재까지 10여년째 해당 직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퇴임 후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포스트 등에 주기적으로 슈뢰더와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간의 정경 유착과 검은 거래를 비판하는 폭로성 기사들이 몇 차례 나왔다.
이로 인하여 독일 타블로이드 언론인 빌트로부터 가스-게르트(Gas-Gerd)라는 부정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2.3.1.3. 체첸 전쟁 관련 푸틴 옹호
또 퇴임 후 발간한 자서전에도 여전히 체첸 전쟁 등 푸틴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푸틴을 매우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2.3.1.4. 에스토니아 전쟁기념물 철거 이전 관련 러시아 옹호
2007년 에스토니아는 과거 소련이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중앙 광장에 만든 전쟁기념 동상을 철거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 소련군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강제 합병한 직후 건립되었다.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후 에스토니아 국민들은 이 동상을 소련의 침략과 압제의 상징으로 여겨 철거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에스토니아 인구의 30% 가까이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사람들의 극렬한 반대와 저항, 그리고 러시아의 무언의 압력으로 철거가 미뤄지고 있었다. 이후 에스토니아에서는 이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결국 에스토니아 대학생들의 동상 철거 목소리가 높아지자 2007년 에스토니아 정부는 이 동상을 철거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에스토니아의 러시아계 주민들 중 일부가 격렬히 반대하며 폭동을 일으켜 상점을 부수는 등 폭력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항하는 에스토니아 주민들과 무력 충돌이 벌어져 사상자가 나왔다. 기사에 따르면 폭동 참가자들은 대부분 20대 러시아계 젊은이들이며 이들은 대부분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 사태는 에스토니아 독립 이후 최대의 유혈 사태였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에스토니아인들 사이에서는 시위 참가자들이 어디서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다고 한다.
한편 에스토니아 정부가 동상을 철거하려 하자 러시아 정부가 에스토니아에 강력 항의하며 하고 나섰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군사적 보복도 불사하겠다며 에스토니아에 강력하게 위협했다.
러시아계 주민들의 무력 폭동이 일어난지 며칠 후인 27일 에스토니아 정부가 긴급히 동상을 철거하여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철거한 동상을 이전 보관 중이라고 발표했지만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동상이 철거된 당일 러시아 정부는 무력 침공을 할 수 있다고 발표했고, 러시아 국회도 에스토니아와의 국교 단절을 요구하는 등 독립 주권국인 에스토니아에 도가 넘는 위협을 가했다. 그러자 같은날 나토 소속 군용기 2대가 에스토니아 상공을 정찰 비행하며 러시아의 군사 보복에 대응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러시아에서는 젊은이들이 모스크바 주재 에스토니아 대사관을 봉쇄하며 에스토니아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 에스토니아로 몰려와 무력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잠정 중단했다.
이후 러시아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이버 테러가 발생했지만 이후 사태는 더이상이 확전되지 않고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때 슈뢰더가 나서 러시아를 옹호하며 에스토니아를 비판하여 큰 논란이 되었다. 슈뢰더는 에스토니아에 대해 어떠한 문명화된 행동에도 반하는 짓이라 맹비난했다. 이에 열받은 에스토니아 정부는 슈뢰더가 러시아 노르트스트림 AG 대표 자격으로 예정되어 있던 입국을 취소시켰다.
한편 이후에도 에스토니아에 남아 있는 몇몇 소련 기념물의 처리(철거)를 놓고 에스토니아와 러시아의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인 2022년 8월 16일 에스토니아 정부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나르바시 공원에 설치한 T-34 탱크 전시물을 철거했다. 이후 친러 성향 해커그룹인 킬넷은 에스토니아 200여개의 공공기관과 민간단체 등에 디도스 사이버 공격을 가했다. #
2.3.1.5. 남오세티아 전쟁 관련 푸틴 옹호
2008년 8월에는 그해 벌어진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푸틴을 또다시 옹호하고 미국과 서방이 러시아의 침공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2.3.1.6. 러시아 크림반도 합병 관련 푸틴 옹호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강제 병합하자 다시 한번 슈뢰더는 푸틴을 옹호하고 나섰다.슈뢰더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 강제 병합이 국제법 위반이긴 하지만,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을 이해한다며 두둔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려는 고립 심화에서 오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된다"며 "소련 붕괴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된 반면 나토는 동유럽쪽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고 러시아 입장을 두둔했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은 나토의 동유럽 확장 때문이라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주장을 그대로 옹호했다.
또 슈뢰더는 폴란드와 발트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해 우려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러시아와 푸틴 편을 들며, 이전에 에스토니아를 비판했던 행보를 이어갔다.
슈뢰더는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의도는 잘못된 것이라며 비판했다.
2.3.1.7. 러시아 로스네프트 이사회 의장 취임
퇴임 직후부터 러시아 가스프롬과 노르트스트림 AG의 이사로 재직하며 러시아의 이익을 대변하고 미국 등 서방을 비난하여 논란이 되어 왔던 슈뢰더는 2017년 8월 러시아 석유공기업이자 제재 대상인 로스네프트의 감독이사회 의장으로 공식 취임하여 다시 한번 독일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번 건은 단순 이사가 아니라 의장의 직위여서 충격이 더했다.2014년 러시아 크림 반도 침공 이후에도 러시아 제재 해제를 주장하며 러시아 기업 비즈니스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 독일 국내외로부터 큰 비난과 논란을 받아온 터에 이번 의장 취임은 결정타가 되었다.
푸틴의 밸브 잠금질에 곤란을 겪은 독일에서는 전직 총리였던 그의 행보에 대해 경악했다. 총선을 앞두고 자기 당의 평판에 먹칠을 한 셈이기 때문. 獨 슈뢰더 전 총리, 對러 제재대상 석유회사 돈벌이 시도 논란(연합뉴스 2017년 8월 29일 기사) 총선을 앞둔 메르켈 총리는 슈뢰더의 행동이 전직 총리로서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메르켈 총리는 자신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기업 아래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슈뢰더의 행보에 일침을 놓았다.
슈뢰더의 이런 막장 행보로 소속 정당인 사민당의 지지율에 큰 타격이 예상되자, 사민당에서도 슈뢰더를 손절하기 시작했다. 원래 사민당은 '스타 정치인'인 슈뢰더가 퇴임한 후 그를 우상으로 만들어 적극 활용할 예정이었지만 퇴임 후 그는 예상과 전혀 달리 연이은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였고 사민당의 전략을 완전히 어긋나게 만들었다. 슈뢰더가 로스네프트 감독이사회 의장에 취임하며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사민당 당수 올라프 숄츠조차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슈뢰더를 공개 비판했다. #
결국,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계기로 슈뢰더가 친러 행보를 이어가자 분노한 독일은 일부 특권을 없앴으며, 유럽연합에서는 제재 소식까지 나오자 결국 사퇴한 것이다.#
2.3.1.8.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푸틴 옹호
2022년 2월 노르트스트림2 사업의 주축인 가스프롬 이사에 취임하여 고액의 연봉을 받게 되었다. # 슈뢰더는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두 러시아 에너지 회사로부터 합산 10억원 이상의 고액 연봉을 받게 되었다. 이는 외부에 알려진 공식적 임금이며, 비공식적으로 받는 돈은 알 수 없다고 한다.하지만 2022년 2월 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하자 노르트스트림2는 다름아닌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 총리에 의해 즉각 폐기되어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하자 서방 각국 정치인들이 러시아 기업과 관련된 직책을 사임하는 가운데, 슈뢰더는 러시아의 비인도적인 폭력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로스네프트 및 가스프롬 이사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 세계적인 비난에 직면했다.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 또한 미국의 대러 제재를 받게 되었다. #
슈뢰더는 계속해서 러시아를 제재하는 서방 정부들을 비난하고, 러시아 국민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러시아 제재를 완화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또 그는 푸틴이야말로 전쟁을 끝낼 단 한 사람이며, 독일은 푸틴에게 신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후 각국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슈뢰더는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느냐며 번번이 사과를 거절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그에 대한 처우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당장 그의 고향 하노버시는 그의 명예시민증을 박탈했다.사민당·녹색당·자민당 3당의 '신호등 연정'으로 구성된 독일 연방정부는 슈뢰더의 전직 총리 예우 박탈 절차에 들어갔다.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자민당 대표)은 방송 인터뷰에서 “푸틴을 위해 공개적으로 로비 활동을 하는 전직 총리가 여전히 납세자들의 돈으로 전직 총리 예우를 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슈뢰더는 전직 총리에 대한 예우로 연간 5억3천만원 상당의 예산으로 국회 사무실과 직원 등을 제공받고 있었다. # 이후 2022년 5월 독일 연방 하원은 슈뢰더에게 전직 총리 예우로 제공하던 혜택 박탈을 의결, 확정하였고, 집행에 들어갔다. 다만 전직 총리 자격으로 제공되는 약 1억 3000만원의 연금 및 경호는 일단 유지된다. 이후 2022년 8월 12일, 슈뢰더는 전직 총리 예우 박탈을 의결한 독일 연방 하원의 결의가 불법이라 주장하며, 베를린 행정법원에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소속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에서도 그의 당적 박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장 다음 선거를 위해서라도 슈뢰더를 당에서 제명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사민당 내부에서 수개월간 논란이 지속된 끝에 2022년 8월 8일, 그가 당헌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 당분간 그의 당적은 유지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연이은 비판과 사과 여론에도 사과를 거부하던 슈뢰더는 2022년 8월 3일, 전쟁을 종식을 위한 협상을 제안하며, 우크라이나가 크림 반도를 포기할 것 등을 주장하며 또다시 논란이 되었다. 주요 외신들은 슈뢰더가 러시아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2.3.2. 사생활 논란
- 슈뢰더의 부인들 목록
- 에바 슈바흐(Eva Schubach, 1968년 결혼 ~ 1972년 이혼)
- 안네 타셴마허(Anne Taschenmacher, 1972년 결혼 ~ 1984년 이혼)
- 힐트루트 함펠(Hiltrud Hampel, 1984년 결혼 ~ 1997년 이혼)
- 도리스 쾨프(Doris Köpf, 1997년 결혼 ~ 2018년 이혼)
- 김소연(So-yeon Schröder-Kim, 2018년 결혼 ~ 현재)
특히 슈뢰더는 4번 재혼 모두 이혼 직후 재혼을 거듭해왔고, 결국 네 번의 이혼 모두 불륜으로 인한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독일인들의 시선도 차가운 편이다. 그의 네번째 결혼 때도 이런 행보가 도마에 오른 바 있었고, 2018년 또다시 김소연과의 다섯번째 결혼을 올리자 정치적인 구설수와 더불어 슈뢰더에 대한 독일 여론은 상당히 싸늘해지고 있다.
총리가 되기 전 이미 3차례 결혼과 이혼을 했고, 총리가 되기 1년 전인 1997년 19세 연하의 도리스 쾨프와 결혼하여 또다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도리스 쾨프와도 2016년 다시 이혼했다. 이미 총리 시절부터 그는 네 번 결혼을 했다고 하여 '아우디맨'이나 '반지의 제왕'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4번의 결혼으로 결혼반지가 4개인 것을, 아우디의 로고가 4개의 고리로 되어 있는 것에 빗대 비꼰 것이다. 이는 그가 정치적으로 환경규제와 친환경 자동차를 주장해 왔으면서도, 폭스바겐의 이사로 장기 재직하는 이중적 행보를 보이는 것을 비꼬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원래 독일 총리의 의전 차량은 전통적으로 메르세데스-벤츠였으나 슈뢰더가 총리가 되고 나서 자신이 이사회로 재직했던 폭스바겐 산하의 아우디로 의전 차량을 바꿨기 때문에 더욱 이런 말이 나온 것. 2018년 한국인 김소연과 다섯번째로 결혼식을 올리자 그의 별명은 '올림픽의 남자'로 바뀌었다.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기의 원이 다섯 개이기 때문.
총리 재직 시절 그는 유럽 최대의 경제 대국 독일의 총리로서 25만 유로가 넘는 당시 국가 수반으로서는 상당한 액수의 연봉을 받았지만, 이 연봉의 상당액이 여러 전처들의 이혼 수당으로 나가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 #
2017년 도리스 쾨프와 이혼했을 발표했으나, 지리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으며, 이혼이 완전히 완료된 것은 2018년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개인사적인 것들이라 독일 현지 언론에서도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혼 과정이 마무리되기까지 무려 2년 넘게 걸린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소송전과 법정 공방이 오간 것으로 보인다. 슈뢰더와 이혼한 전 부인 도리스 쾨프는 이혼 사유가 김소연 때문이라고 언급하여 불륜임을 암시했다.[6]
2018년 슈뢰더와 결혼한 김소연은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독일에서 통역인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에 따르면 2015년 국제경영자회의에서 통역원으로 슈뢰더와 처음 만나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화제가 되었을 당시 김소연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경제개발공사의 한국대표부 대표를 맡고 있었다. 슈뢰더와 김소연은 각각 유부남, 유부녀로서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결국 각각의 결혼 관계가 파탄나고 말았다.
2017년 9월, 슈뢰더는 김소연과 함께 자서전 한국 출판 기념으로 한국에 방문했다. 그는 출판 기념회 이외에도 문재인 대통령과 접견자리를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김소연이 직접 문 대통령과 슈뢰더의 통역을 맡았다. 나눔의 집에 가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고,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5.18 취재를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하였으며, EBS 초대석, 김어준의 뉴스공장(9월 15일)에 출연했다. 방한 당시 나눔의 집을 찾아서 전 일본군 위안부들을 위로한 뒤, 역사수정주의를 추구하는 일본 정부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참으로 가슴 아픈 현장을 찾았다.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분들을 '위안부'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위안'은 자발적 의사가 담긴 것이다. 이분들은 위안이 아니라 전쟁의 폭력에 참혹하게 희생된 여성들이다. 전쟁에 의한 참혹한 폭력은 복구될 수 없다. 일본의 전쟁 폭력 희생자들인 할머니들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할 것. 할머니들이 당한 개개인들의 희생과 고통은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와 다르지 않다. 전쟁에서 희생된 여성에 대해 세계가 알아야 한다. 피해 할머니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역사를 쓰는 것. 할머니들이 살아 생전에일본이 사과하기를 바란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 이 할머니들께 남긴 상처를 봤다"는 말을 남겼다. # # # #
2018년 도리스 쾨프와의 이혼 절차가 법정에서 최종 마무리가 되자, 10월 5일 슈뢰더는 베를린에서 김소연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베를린의 유서 깊은 최고급 호텔 아들론(Adlon)에서 올렸다. # 결혼 후 독일과 한국을 오가고 여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어도 배울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 베를린에서 김소연과 결혼식을 올린 후 한국에서 축하연을 가지기 위해 방한한 슈뢰더 부부는 10월 26일 신혼 여행지 중 하나로 광주광역시를 찾아 5·18묘지를 참배했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광주는 김소연의 고향이라고 한다. 슈뢰더 부부는 독일 현지에서도 신혼 여행지로 부헨발트 나치 수용소를 찾았는데, 이 역시 김소연의 의중이었다고 한다. 광주를 참배한 슈뢰더는 국제사회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광주 참배를 마친 후 서울로 이동하여 10월 28일 하얏트 호텔에서 축하연을 가졌다. #
2019년 8월 29일 서울의 DMZ 평화경제 국제 포럼에 참석한 슈뢰더는 북한이 도발을 멈추고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따르고 협상의 장으로 나오는 것을 촉구했다. #
2020년 3월 15일 청와대는 슈뢰더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과 관련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와 성금을 보내왔고 밝혔다. #
2020년 4월 27일 김소연의 전 남편은 서울가정법원에 슈뢰더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5월 7일 서울가정법원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슈뢰더 때문에 김소연과의 혼인 관계가 파탄났다고 주장했다. #
소송전에서 슈뢰더는 한국 법정에서 독일법을 들먹거리며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슈뢰더의 이같은 행보는 대한민국의 주권과 사법 시스템을 무시한 안하무인적 처사였다. 변호사이자 일국의 총리까지 지낸 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우습게 보길래 이같은 주장을 펼치냐는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2020년 10월 11일 슈뢰더, 김소연 부부는 베를린 시 미테 구[7]에 세워진 소녀상 철거 결정에 항의하며 현지 당국에 이를 철회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했다.#
2021년 5월 20일, 슈뢰더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김소연의 전 남편이 1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4단독 조아라 판사는 2021년 5월20일 김씨의 전 남편 A씨가 슈뢰더 전 총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일부 받아들여 "피고는 원고에게 3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8]
2021년 6월 17일, 슈뢰더 측이 1심 판결에 패소한 뒤 항소하지 않음으로써 손해배상소송 패소가 확정되었다.
본인의 생물학적 아이는 없고 도리스 쾨프의 이전 결혼에서 낳은 딸 한명과, 러시아 출신 입양아 두 명을 자녀로 두고 있다.
2.3.3. 파라다이스 페이퍼스 탈세
2017년 공개된 파라다이스 페이퍼스에 그의 탈루 사실이 폭로되었다.2.3.4. 사민당 내 복권
2024년 10월 29일, 사민당에서 슈뢰더의 친러 행보에 대해 해당 혐의가 없으며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견해가 다른 것에 대해 흑백논리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며 복권했다. 결국 우러전쟁 장기화로 독일 내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회의론과 러시아와의 대화 요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점이 반영된 조치로 보인다.
전쟁 발발 당시 슈뢰더 전 총리 제명을 추진했으나 당내 심사에서 기각된바 있다. 대신 신호등 연정이 다수당을 차지한 연방의회는 그가 전직 총리로서 본분을 수행하지 않는다며 연간 40만 유로의 전직 총리 예우 예산을 삭감처리했었고, 슈뢰더는 이 조치를 취소하라며 낸 소송에서 종전을 위해 러시아와 중재를 시도하는 등 전직 총리로서 의무를 이행했다고 주장하였으나 행정법원에서 관습법상으로도, 보편적 평등권 상으로도 사무실과 직원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판결내린바 있다.#
이 시기를 즈음해 KBS가 주관한 미래인구포럼에 참석해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대하여 폴 크루그먼과 함께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3. 기타
- 스스로는 개신교 신자라고 칭한다. 그런데 독일 내에서는 나이롱 신자 정도로 인식되는 듯. 실제로 보통 독일에서 총리직에 오를 때 선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부디 도와주소서(So wahr mir Gott helfe)'라는 구절이 으레 들어가는데 슈뢰더는 이 구절을 빼고 총리직 선서를 했다.
- 베를린의 대표적인 패스트 푸드인 커리 부어스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카더라. 퇴임 후에도 베를린 길거리에 있는 음식점에서 커리 부어스트를 먹는 게 종종 포착되었을 정도.
- 자동차광으로도 유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구설수에도 많이 올랐다. 정치 이력 초기부터 총리 시절 내내 친환경 정책을 주장하는 행보를 보여왔으나, 본인이 폭스바겐 임원으로 활동했던 사실도 밝혀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에 대해 슈뢰더와 사민당은 니더작센 주정부가 폭스바겐의 총자산의 11.8%, 의결권의 20%를 소유하고 있어, 자연히 니더작센 주총리를 지냈던 슈뢰더는 폭스바겐의 임원이 되었던 것이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동안 친환경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던 그의 행보와는 모순되어 보이는 행보였다. 총리 재직 기간 동안 그는 자동차 산업을 크게 밀어줬고, 특히 디젤 승용차 제조사에 엄청난 혜택을 주었다. 자동차 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행보 덕분에 자동차 총리(Auto Kanzler)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는 친환경을 주장해온 행보와 달리 정작 실제로는 유로 규제 강화를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널럴한 규제 덕분에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디젤 승용차가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다. 어쨌거나 미국과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결국에는 배기가스 규제를 올리기는 했지만, 그동안 독일 자동차 업체들이 디젤 저감장치를 개발할 수 있는 충분히 시간적 여유를 벌어줬고, 이것이 상용화될 타이밍에 배기가스 규제를 올렸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각종 규제 완화 및 정부 지원 등 온갖 혜택을 등에 업은 독일의 디젤 승용차 기업들, 그중에서도 특히 폭스바겐의 주가는 날개가 돋힌 듯 치솟았다. 이러한 그의 모순된 행보는 대중들에게 의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폭스바겐의 디젤 게이트가 터지자 폭스바겐의 이사를 맡았고, 총리 시절 디젤 승용차 진흥 정책을 펼쳤던 슈뢰더는 당연히 그 배후이자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지목되었지만, 뻔뻔함과 유체이탈 화법의 달인답게 슈뢰더는 자신은 전혀 그 사실을 몰랐으며, 오히려 폭스바겐이 자신을 속여왔다고 주장했고, 메르켈 현 총리가 이를 책임져야 한다고 뻔뻔하게 나왔다.
- 변호사 출신이어서 그런지 언변이 뛰어난 편이었는데 특히 선거를 앞둔 TV 토론회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헬무트 콜을 상대해 정권교체를 만들어낸 1998년은 물론이고, 에드문트 슈토이버를 상대했던 2002년에도 토론회에서 압승을 거두고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대패가 예상되던 2005년에도 앙겔라 메르켈을 상대로 한 두 번의 토론회에서 모두 낙승을 거두면서 실제 선거도 사실상 무승부로 이끌 만큼 승부의 분위기를 바꿨다. 언변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활용하는 감각도 상당히 뛰어나서, 2002년 선거는 도통 나아지지 않는 실업률 문제로 정권을 잡고 있는 슈뢰더 총리에게 상당히 불리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때 터진 엘베 강 홍수 역시 잘못하면 슈뢰더의 정치적 명줄을 끊어놓을 악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무장화를 신고 진창이 된 재난 현장을 직접 시찰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디어에 적극 노출시키면서 여론을 바꾸었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슈뢰더를 '미디어 총리(Medien Kanzler)'로 부르기도 한다.
- 상술했듯이 언변이 매우 뛰어나 상당한 일가견이 있다. 슈뢰더는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의 과오에 대한 공격에서 벗어났고,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오히려 유리하게 역전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인 위기를 겪을 때마다 판세를 유리하게 가져오는 이런 전략을 자주 구사했고, 이런 방식은 의외로 선거에서 잘 먹혔다. 친환경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자신이 임원으로 있던 디젤 자동차 회사들을 지원하며 환경 규제를 완화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일 때도 그는 이같은 말로 자신을 포장해 왔고, 실제로도 이는 성공적이었다. 오히려 그의 지지자들은 슈뢰더를 환경도 잡고 경제도 잡는 기적의 사나이라 칭송했다. 하지만 2015년 디젤 게이트가 터지며 모든 것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슈뢰더는 자신은 폭스바겐으로 일방적으로 속은 피해자일 뿐이며,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은 메르켈이 져야한다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였다. 슈뢰더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이혼 관련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독일법을 들먹거리며, 독일 시민인 자신이 한국 법정의 판결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1] 한국인이다. 인스타그램[2] 본인 스스로 루터교회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무종교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총리 취임식에서도 선택 문구인 'So wahr mir Gott helfe(그러니 신이시여 도와주소서)'를 추가하지 않아 루터교 신자라도 딱히 종교적인 편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3] 초선때는 하노버-란트 1구였다.[4] 당시 서독은 징병제를 운영중이었다.[5] '내 잘못을 통해서'라는 뜻의 라틴어로,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에서 유래했다.[6] 사민당의 선거 부진 이유가 친시장주의로의 노선 변화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슈뢰더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듯.[7] 구청장 슈테판 폰다셀(동맹 90/녹색당)[8] 이혼 조건이, 이혼 후 슈뢰더와 헤어질 것이었는데 이를 어겨 소송을 냈다고 한다. 참고로 김소연 씨는 합의이혼 조건으로 전 남편에게 모든 재산과 딸 양육권을 다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