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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 |||||
<rowcolor=#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콘라트 아데나워 | 마르틴 루터 | 카를 마르크스 | 한스, 죠피 숄 남매 | 빌리 브란트 | |
<rowcolor=#fff>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11위~100위 | |||||
<rowcolor=#fff>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아돌프 콜핑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헬무트 콜 | 로베르트 보쉬 | 다니엘 퀴블뵈크 | |
<rowcolor=#fff>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콘라트 추제 | 요제프 켄테니히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카를하인츠 뵘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
<rowcolor=#fff>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헬무트 슈미트 | 레진 힐데브란트 | 알리체 슈바르처 | 토마스 고트샤크 |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 |
<rowcolor=#fff>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미하엘 슈마허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 귄터 야우흐 | 디터 볼렌 | |
<rowcolor=#fff>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얀 울리히 | 슈테피 그라프 | 사무엘 하네만 | 디트리히 본회퍼 | 보리스 베커 | |
<rowcolor=#fff>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프란츠 베켄바워 | 오스카 쉰들러 | 네나 | 한스디트리히 겐셔 | 하인츠 뤼만 | |
<rowcolor=#fff>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하랄트 슈미트 | 프리드리히 대왕 | 임마누엘 칸트 | 패트릭 린드너 | 하르트무트 엥겔 | |
<rowcolor=#fff>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힐데가르트 폰 빙엔 | 하이노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마를레네 디트리히 | |
<rowcolor=#fff>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로베르트 코흐 | 요슈카 피셔 | 카를 마이 | 로리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
<rowcolor=#fff>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루디 푈러 | 하인츠 에르하르트 | 로이 블랙 | 하인츠하랄트 프렌첸 | 볼프강 아펠 | |
<rowcolor=#fff>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알렉산더 폰 훔볼트 | 피터 크라우스 | 베르너 폰 브라운 | 덕 노비츠키 | 캄피노 | |
<rowcolor=#fff>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 프리드리히 실러 | 리하르트 바그너 | 카타리나 비트 | |
<rowcolor=#fff>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프리츠 발터 | 니콜 |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 오토 릴리엔탈 | 마리온 돈호프 | |
<rowcolor=#fff>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토마스 만 | 헤르만 헤세 | 로미 슈나이더 | 스벤 하나발트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
<rowcolor=#fff>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빌리 밀로위치 | 게르하르트 슈뢰더 | 요제프 보이스 | 프리드리히 니체 | 루디 두치크 | |
<rowcolor=#fff>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카를 레만 | 베아테 우제 | 트뤼머프라우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헬무트 란 | |
<rowcolor=#fff>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알브레히트 뒤러 | 막스 슈멜링 | 카를 벤츠 | 프리드리히 2세 | 라인하르트 메이 | |
<rowcolor=#fff>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하인리히 하이네 | 게오르크 엘저 | 콘라드 두덴 | 제임스 라스트 | 우베 젤러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 |
출생 | 1906년 2월 4일 |
독일 제국 브레슬라우 (現 폴란드 브로츠와프) | |
사망 | 1945년 4월 9일 (향년 39세) |
나치 독일 바이에른 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 |
직업 | 신학자, 저술가 |
종교 | 개신교 (루터교회) |
학력 | 튀빙겐 대학교 (신학 / 박사) 베를린 대학교 (신학 / 박사) |
부모 | 아버지 카를 본회퍼 어머니 파울라 본회퍼[1] |
축일 | 4월 9일 |
1. 개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나치 독일 시절, 나치의 폭정에 반대한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영화 작전명 발키리로 잘 알려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축일은 4월 9일.
2. 생애
본회퍼의 일생, 신학 세계를 소개하는 영상. 개신교 계통 선교 케이블방송 채널 CGN에서 제작했다.
본회퍼의 삶을 설명한 가톨릭 평화방송 뉴스 영상. 방송사의 종교를 통해 그가 종파를 초월하여 존경받는 그리스도교 신학자, 신앙인임을 보여준다. 영화 '본회퍼'도 종파를 초월한 사랑을 받았다.
2.1. 목사가 되기까지
그는 1906년 2월 4일, 독일 제국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루터교회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개신교 가문이었다. 할아버지는 프로이센 왕국 왕실의 궁정 목사였고, 어머니 파울라도 자녀들에게 성서 이야기, 시, 노래를 가르칠 정도로 믿음과 교양이 모두 훌륭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신앙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하며, 그가 신학도의 길을 걸어가려 하자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튀빙겐 대학교[2]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다. 워낙 신학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였던 아돌프 폰 하르낙의 촉망받는 제자였고[3]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라는 제목의 졸업논문을 제출했다. 이후 로마에서 공부하면서 가톨릭의 전례를 경험하기도 한 그는 25세부터 목사 안수를 주는 루터교회의 법에 의거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공부를 하면서 그 곳에서 평화주의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된다.[4]
2.2. 나치 독일 치하에서
당시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더불어 나라가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특히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당시 독일 교회는 히틀러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정도로 우경화 되고 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이에 저항하는 교회인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설립하고 고백교회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지속하며 기독교 신앙의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그러나 당국은 그에게 감시의 손길을 늦추지 않고 있었고, 곧 교수직과 목회 자체에 대해서도 조금씩 제제를 가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독일 남성은 반드시 군복무를 해야만 했다. 평화주의자이며 반나치사상가였던 본회퍼에게도 위기가 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 아프베어의 수장인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손을 써서 본회퍼는 아프베어[5] 소속 정보원 신분으로 영국에 파견을 나가는 것으로 복무를 대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독일 국방군에 영국에 대한 동향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외 나머지 평일에는 자유로이 신학을 더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그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망명을 권유했다. 특히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는 그에게 연구교수직을 제안했다. "학생을 가르치지 않아도 좋으니 학교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라"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일단 독일을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포들이 어둠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누군가는 그들을 섬겨야 한다"고 하며 이러한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독일로 귀국하기에 이른다.
2.3. 반나치 운동과 히틀러 암살 작전
본회퍼는 그의 책 『윤리학 Ethik』에서 "예외 상태"에 대해서 언급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본회퍼는 "한계 상황"이란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적인 행동에 대해서 설명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위해 책임적으로 행동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다. 그 경우들 중의 하나가 한계 상황이다. 그리스도인은 "한계 상황"에 직면할 때, 죄를 짓게 되더라도 이웃을 위해 책임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은 자기 안에 있지 않으며, 그 판단의 여부는 하나님의 "손"과 "은혜"에 맡겨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처럼 스스로를 의로운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관점은 히틀러를 암살하는 공모에 가담한 본회퍼의 고민을 잘 반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계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폭력의 행위는 "마지막 수단(ultima ratio)"으로서 제한적으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위기를 해결하지 못 했을 때, 그리스도인은 예외 상태와 한계 상황 속에서 폭력의 사용을 제한적인 범주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기를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폭력은 목적 달성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되어야 하며, 처음부터 사용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ㅡ 고재길 목사, 「히틀러의 파시즘과 본회퍼의 저항」, 2025 제24회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포럼.[6]
독일로 돌아온 그는 더욱 상황이 어려워진 고백교회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ㅡ 고재길 목사, 「히틀러의 파시즘과 본회퍼의 저항」, 2025 제24회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포럼.[6]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활동은 탄압받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주요 인사들에게 체포령이 내려 많은 수의 인사들이 체포되기에 이른다. 결국 고백교회는 지하로 내려가 활동을 하게 되었고, 본회퍼 역시 활동을 줄이기에 이른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940년 9월, 나치는 "본회퍼의 행동이 국민을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발언 금지 조치를 내리고 관할 경찰서에 주소지를 의무적으로 신고할 것을 명령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는 그가 옳다 여기는 일을 쉬지 않았다. 1941년 10월, 베를린에서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기 시작하자, 이들을 방첩대 요원으로 위장하여 구출하는 '작전 7'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1943년 1월 13일,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1924년생)와 약혼하고 가정을 꾸리기로 했으나, 안타깝게도 4월 5일, 게슈타포의 가택수색으로 한스 폰 도나니 부부, 요제프 뮐러 부부와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7]
이 와중에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 암살을 기획하게 된다. 만약 암살이 성공하면, 군부를 신속히 장악하고 친위대를 제압한 후, 카나리스 제독이 본회퍼를 통하여 영국에 선을 넣어 강화협정을 진행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항목 참조.
결국 암살 작전 이후 경악에 광분한 히틀러는 장검의 밤보다 더한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었고, 그 포위망은 옥죄어져 왔다. 결국 본회퍼 역시 체포되었다.
초기에는 감옥에서 저술활동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고, 감옥에서의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씩 암살작전 가담의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처우 역시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그 역시 처형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종전을 겨우 한 달 앞둔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Flossenbürg)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편 그의 본거지인 브레슬라우는 2차대전 이후 폴란드령이 되어 브로츠와프라 불리는데, 폴란드 공산정권 몰락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생가에 기념물과 기념판을 만들었다.
3. 평가와 논쟁: 복음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해석은 전통적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뜨거운 감자다. 특히 그를 순교자, 예언자적 신학자,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으로 칭송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과연 "정통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적잖은 논쟁이 있다.그의 대표작 『나를 따르라』 (Nachfolge, 영어판 The Cost of Discipleship)는 "값싼 은혜"라는 개념으로 유명하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복음의 무조건적인 은혜 개념보다는 제자도와 윤리적 실천에 강조가 쏠려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본회퍼의 사상을 "자기 구원적"이라며 비판해왔다.
또한 본회퍼는 자신의 그리스도론 강의에서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신학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 사건들의 실재 여부보다는 그 의미와 신앙적 해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라는 식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역사성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던 전통적 복음주의의 입장과는 확연히 다르다.
『옥중서신』에서는 아예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며, 고전적 의미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존이 아닌, 세속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성의 회복에 더 초점을 맞추는 모습을 보인다. 루돌프 불트만의 신약 비신화화 작업에 대해서도 "너무 멀리 간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가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기독교의 '종교적 언어' 자체를 해체하려는 경향까지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본회퍼는 복음주의자가 될 뻔했지만, 실제로는 20세기 신정통주의와 실존주의 철학의 교차점 어딘가에 있는 인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에릭 메탁사스(Eric Metaxas)나 일부 보수적 저자들이 그를 "보수적 복음주의 순교자"로 묘사하는 것은, 신학적 본회퍼와 윤리적 본회퍼를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해석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본회퍼의 인물상이 종종 독일 개신교계 내에서 역사적 책임의 '면책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존재한다. 예컨대 마르틴 루터의 후기 저술에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는 반유대주의적 표현이 적지 않으며, 그의 글은 훗날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선전에도 (의외로) 적극 인용된 바 있다. 그런데도 "그래도 본회퍼는 달랐다"는 식의 강조가 반복되는 경우, 독일 개신교도들이 가톨릭보다도 상대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나치 정권을 지지했던 역사적 사실이 은근슬쩍 희석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1933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당시, 나치당은 개신교 인구가 집중된 북부와 동부 독일에서 가톨릭 정당 지지 성향이 강한 남부 독일보다 훨씬 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 통계적 사실은 개신교 사회가 나치즘에 보였던 열렬한 기대감과 정치적 편승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지만, 이런 불편한 진실은 본회퍼 같은 상징적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결과적으로 흐릿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본회퍼 개인의 용기와 신앙적 결단은 진정성이 있었고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만, 본회퍼 한 사람의 의로움을, 전체 독일 개신교회의 침묵과 동조를 덮는 서사로 포장하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역사적 왜곡일 수 있다. 정당한 존경과 의도된 기억 정치 사이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다.
4. 어록
도덕적 사회의 궁극적 시험은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는가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삶의 의미는 충분하다.
Der Sinn des Lebens ist erfüllt, wo Liebe ist.
Der Sinn des Lebens ist erfüllt, wo Liebe ist.
5. 기타
오늘날에는 주로 반독재 투쟁에 헌신한 순교자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신학자였다. 이미 젊은 나이부터 어마어마한 재능을 인정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신학자였기에, 신학계에서는 그가 좀더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던 것을 두고두고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현재 그의 신학서적은 고백교회 시절 신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집필한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과 "값싼 은혜" 문제를 비판하는 책인 나를 따르라(Nachfolge)[9][10], 그리고 그가 수용소에서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한데 묶은 "옥중서신 : 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이 그의 사후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현재 모두 번역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선집'을 출판했으며, 그의 측근인 에버하르트 베트게 목사가 집필한 전기 '복있는 사람'이 출간되었다. 그 외에 다양한 책들이 '좋은씨앗'과 '복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출판되어 있어서 본회퍼의 사상을 쉽게 연구할 수 있다.
간혹 "본 회퍼"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11]
2000년에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2024년, 그의 생애를 다룬 또다른 영화인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2024년 11월에 미국에서, 2024년 12월에 아일랜드에서 개봉하였으며, 2025년 3월에 영국과 독일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본회퍼 목사의 순교 80주기가 되는 날인 2025년 4월 9일에 개봉될 예정이다.
5.1. 노래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구속된 후 옥중에서 쓴 시이자 기도문으로 최근 한국 개신교에서 CCM으로 많이 등장하는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라는 찬송가가 있다.이 찬송가는 본래 위에도 나와 있듯, 옥중에서 가족과 약혼녀였던 마리아 폰 베데메이어에게 쓴 편지에 포함되어 있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 「선한 능력으로」원문 시 한국어 번역
찬송가가 아닌 본회퍼 목사가 쓴 시의 원문을 한국어로
최대한 자연스럽고, 본회퍼의 의도에 맞게 번역한 것이다.
선한 능력이 조용히 우리를 감싸며 기이한 평안 속에 우리를 지키시니 이 날들을 당신과 함께 살아가며 새해를 소망으로 맞이하리라 고통의 기억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무거운 짐이 마음을 짓누를지라도 주여, 불안에 떠는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구원으로 평안히 품으소서 만일 우리에게 쓰디쓴 고난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 해도 우리는 떨지 않고 감사히 받으리 당신의 선하고 사랑스러운 손에서 그러나 다시금 기쁨을 허락하신다면 이 세상과 그 찬란한 빛 속에서 지난 날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우리 삶을 온전히 당신께 드리리 오늘도 촛불을 따스히 밝히소서 당신께서 우리의 어둠에 두신 그 빛 만일 가능하다면 다시 함께 모이게 하소서 당신의 빛이 밤에도 우리를 비추나니 이제 깊은 고요가 우리를 감쌀 때 우리는 들으리, 충만한 그 음성을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나라에서 모든 자녀들이 부르는 찬양을 선한 능력이 놀랍도록 우리를 감싸시니 다가올 모든 날을 담대히 맞으리 하나님은 저녁에도, 아침에도 함께하시며 그리고 모든 새로운 날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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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전성은 '폰 하제(von Hase)'.[2] 독일의 명문 신학교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에서는 한신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들 중에 이 학교 출신들이 많다.[3] 그러나,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했다. 오히려 칼 바르트와 더 가깝다. 그런데도 일부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본회퍼마저 자유주의 신학자로 매도하고 있다.[4] 당시의 유니온 신학교도 자유주의 신학이 대세였다. 그런데 그 분야의 거두에게 직접 수학하였던 본회퍼가 보기에 그저 근본주의 진영을 깔보기만 하는 유니온 신학교의 모습이 우습게만 보였다.[5] 독일 해외방첩청[6] 일치포럼 자료집 p.37. #[7] 약혼녀 마리아는 살아남아 전후 학업을 이어나갔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 당시로서는 초창기 수준이었던 컴퓨터 기술에 종사하였다. 생전에 본회퍼와 주고받았던 서신 일부를 관련 추모 단체에 기증했으며, 그녀의 사후 모든 서신들이 공개 및 출간되었다. 한국에서도 <옥중연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구할 수 있다.[다른원문] We are not to simply bandage the wounds of victims beneath the wheels of injustice, we are to drive a spoke into the wheel itself.[9] 이 책은 1936년, 그가 베를린 대학교 신학부 교수의 자격으로 행한 마지막 강의의 내용이다. 이후 나치 독일은 그의 교수직을 박탈해 버렸다. 원제인 Nachfolge는 '제자들', 혹은 '후계자들'이라는 뜻이다.[10]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Cost of Discipleship, 즉 번역하자면, '제자도의 대가'이다.[11] 독일을 비롯한 게르만계 귀족의 이름에 '폰'이 쓰이는데(예: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귀족 가문과는 거리가 먼 본회퍼도 같은 경우인 줄로 착각해서 벌어지는 일. 게다가 귀족계 이름에 쓰이는 '폰'이 알파벳 V(on)인 반면, '본회퍼'는 알파벳 B(onhoeffer)로 표기된다는 것도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