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3 00:15:45

하충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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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도향문목후(都鄉文穆侯)
何充 | 하충
시호 문목(文穆)
작위 도향현후(都鄕縣侯)
(何)
(充)
차도(次道)
생몰 292년 ~ 346년 2월 21일
출신 여강군(廬江郡) 잠현(灊縣)
부모 부친 - 하예(何睿)
모친 - 조씨(曺氏)
배우자 유씨(庾氏)
자녀 하법등(何法登)[1]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차도(次道). 양주 여강군 잠현 출신. 외척 유씨 집안을 성공적으로 실각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더 위험한 인물인 환온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증조부 하정삼국시대조위 시기 광록대부를 지냈으며, 조부 하운은 서진 시기 예주자사, 아버지 하예는 안풍태수를 지냈다. 참고로 동생 하준의 딸인 하법예목제 사마담에게 시집가면서 외척이 되었다.

2. 생애

일찍이 풍류와 운취가 깊고 우아하며, 문장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대장군 왕돈의 부름을 받고 그의 막부로 들어가 주부(主簿)를 지냈다. 당시 왕돈의 형인 여강태수 왕함은 탐관오리로 평판이 매우 나빴으나, 그럼에도 왕돈은 형을 두둔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길,
"내 형이 군(郡)을 아름답게 통치하니, 여강의 백성과 선비들이 모두 칭송한다 하는구나."
하니, 그 자리에 있던 하충이 정색하며 답했다.
"이 하충은 여강 사람인데, 제가 들은 바와 다른 것 같습니다."
왕돈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하충은 그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했다. 결국 왕돈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곧 화근이 되어 동해왕 사마충의 문학연으로 좌천당했다.

태녕 2년(324년) 7월, 왕돈이 명제 사마소에게 패망하자 여러 차례 승진하여 관직이 중서시랑에 이르렀다. 하충의 어머니 조씨는 낭야 왕씨 가문의 수장인 왕도의 처 조숙의 누나이며, 하충의 처 유씨는 명목황후 유문군의 여동생이라, 하충은 동진 조정에서의 입지가 상당했다. 심지어 왕도와는 어릴 적부터 친한 사이라 중앙에서 여러 주요 관직들을 역임할 수 있었다. 또, 명제 사마소마저도 하충을 마음에 들어해 사사로이 친밀하게 대했다.

태녕 3년(325년) 8월, 명제 사마소가 병으로 붕어하고 성제 사마연이 즉위하자 황문시랑으로 승진했다.

함화 3년(328년) 2월, 반란을 일으킨 소준이 도성 건강(建康)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핍박해 석두성으로 이동했다. 사도 왕도는 소준이 황궁을 비운 틈을 타 밀서를 보내 3오(三吳: 오흥, 오국, 의흥)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했는데, 하충도 건강을 빠져나와 오흥태수 우담, 오국내사 채모, 의흥태수 고중의 의병과 합류했다.

함화 4년(329년) 2월, 반란이 모두 평정되자 하충은 공을 인정받아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고, 산기상시, 동양태수, 건위장군, 회계내사를 역임했다. 그는 지역을 통치하면서 덕정을 펼치기로 명망이 높았으며, 우희, 사봉, 위의 등과 같은 여러 인재들을 발굴해 자신을 보좌하게 했다. 이후 건위장군, 단양윤으로 옮겨졌다.

함강 5년(339년) 7월, 승상 왕도와 사공 유량이 하충을 천거하면서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이부상서, 관군장군, 회계왕사(會稽王師)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승상 왕도가 세상을 뜨자 호군장군으로 옮겨져 중서감 유빙과 더불어 상서의 업무를 관장했다. 이후 상서령으로 승진하고 좌장군이 더해졌다.

함강 6년(340년) 정월, 사공 유량이 사망하면서 중서령으로 승진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또, 조정으로부터 양주의 대중정 직책을 제안받았으나 하충은 자신보다 더 적합한 인재가 많다며 굳게 사양했다.

함강 8년(342년) 6월, 성제 사마연이 위독해지자 외척인 유빙은 성제의 아들이 즉위하면 자신의 권력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유빙이 장성한 군주를 세워야 한다며 성제의 동생 낭야왕 사마악을 후계자로 추천하니, 성제가 이를 따랐다. 하충은 성제 앞에서 유빙을 비판했으나, 성제는 단지 부끄러워하는 기색만 보일 뿐 끝내 결정을 물리지 않았다. 결국 조서가 내려져 낭야왕 사마악이 황태제에 올랐고, 하충, 유빙, 무릉왕 사마희, 회계왕 사마욱, 상서령 제갈회에게 보정을 부탁했다.

다음 날, 성제 사마연이 붕어하고 강제 사마악이 황위에 올랐다. 새로이 즉위한 황제 강제 사마악은 유빙과 하충을 보정대신으로 삼아 정사를 전부 위임했다. 드디어 정권을 잡은 유빙은 하충을 표기장군, 도독서주양주지진릉제군사(都督徐州揚州之晉陵諸軍事), 가절, 영서주자사에 임명하고, 경구(京口)에 진수하게 했다.

건원 원년(343년) 8월, 유빙의 동생 유익이 장차 북벌을 준비하려 하자, 유빙은 군대를 거느리고 동생을 지원하기 위해 건강에서 나와 강주(江州) 무창(武昌)에 주둔하려 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하충은 입조하여 강제 사마악에게 말했다.
"신하 유빙과 외척들은 황실의 중한 존재이니, 마땅히 임금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고로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마시고 또, 그들이 멀리 떠나지 않게 하시옵소서."
하지만 강제는 따르지 않았다. 이윽고 조정은 하충을 도독양예서주지랑낭제군사(都督揚豫徐州之瑯邪諸軍事), 영양주자사(領揚州刺史)로 삼아 보정에 임하게 했다.

건원 2년(344년) 8월, 강제 사마악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유빙, 유익 형제는 자신의 가문과 친밀한 회계왕 사마욱을 후계자로 세울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하충이 이번에도 반대하며 강제의 아들인 사마담을 세워야 한다 하니, 강제가 하충의 말을 따랐다.

건원 2년(344년) 9월, 강제가 붕어하면서 2살의 어린 황제 목제 사마담이 즉위하고 강헌황태후 저산자가 섭정을 맡았다. 유빙 형제는 자신들의 계획을 망쳐버린 하충을 깊이 원망했다. 저산자는 하충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길,
「표기장군의 임무는 막중하니 철갑 병사 100명과 함께 입궁하는 것을 허하노라.」
라 하고, 중서감, 녹상서사를 겸하게 했다. 그러자 하충은 녹상서사 직책을 수령하는 대신 중서감 직책은 사양했다. 이후 황태후 저씨의 아버지인 좌장군 저부의 천거를 받아 시중, 위장군이 더해지고, 우림기 10기를 거느릴 수 있는 혜택을 하사받았다. 하충은 너무 많은 권력을 쥐고 중앙에 머무르면 정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조정의 허락을 받고 다시 중앙에서 나와 경구에 진수했다.

건원 2년(344년) 11월에 강주자사 유빙이 사망하고, 영화 원년(345년) 7월에는 형주자사 유익도 등창으로 잇달아 병사했다. 조정의 대신들은 유익의 유언에 따라 그 아들인 유원지에게 형주자사직을 넘겨주려 했으나, 하충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안됩니다. 형초(荊楚)는 100만의 호구를 지닌 요지로, 북쪽으로는 강대한 오랑캐와 대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촉과 맞닿아 있어, 그 경계가 만 리에 이르니, 이를 지키기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현인을 얻으면 가히 중원을 평정할 수 있으나, 세력이 약하면 사직이 근심하게 됩니다. 육항이 존재하면 손오가 존재하고 육항이 없으면 손오가 멸망한다는 말도 있는데, 젖비린내 나는 소년에게 요충지를 맡긴다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환온은 그 영략(英略)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문무도 겸하고 있으니, 서하(西夏)를 맡을 인재로는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말했다.
"유원지가 순순히 환온에게 자리를 내주겠습니까? 만약 그가 반발해 군사를 이끌고 환온을 막는다면 큰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하충이 답했다.
"환온이라면 족히 다스릴 수 있을 터이니 그대들은 어떠한 걱정도 할 필요 없소."
조정은 하충의 제안에 따라 환온을 형주자사에 임명했다. 환온이 서쪽으로 부임하자 과연 유원지는 감히 다투지 못했다. 이로써 외척 유씨를 크게 약화하는 데 성공한 하충은 저부, 환온, 은호 등과 파벌을 이루고 동진의 정권을 잡았다. 하충은 비록 개혁하려는 의지는 없었으나, 국가의 번영을 시키려는 마음은 있어 능력있는 자들을 우대하고, 사사로이 친족이나 지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친한 자들 중 난잡한 이들이 많아 뭇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또, 불교를 숭상해 사찰을 크게 짓고 억대의 돈을 공양으로 바치면서 그의 가족은 언제나 빈곤에 허덕이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한번은 동진의 명망높은 사대부인 완유가 하충을 놀릴 심산으로 말했다.
"경의 우주와 같이 거대한 뜻과 용기는 만고에 길이 빛날 것이네."
하충이 그 까닭을 묻자 완유가 답했다.
"아직 수천 호의 군(郡)을 얻는 것조차 이루지 못한 나에 비하면, 부처가 되려는 경의 포부는 역시 거대하다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 동진의 명문가 진군 사씨 집안의 자제인 종사중랑 사만
"두 치씨는 도(道)에 아첨하고, 두 하씨는 부처에 아첨하는구나."
라 하였는데, 이는 당시 천사도를 숭배하던 치음과 그 동생 치담, 그리고 불교를 숭배하던 하충과 그 동생 하준을 비꼰 것이다.

영화 2년(346년) 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2] 향년 55세. 사공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라 하였다. 아들이 없어 조카 하방이 후사를 이었다.


[1] 외동딸로 강주자사 왕빈의 아들 왕강지에게 시집갔다.[2] 양력으로 계산하면 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