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9-28 13:04:07

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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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4F67><colcolor=#ece5b6>
후량 3대 천왕
여찬 | 呂纂
즉위 399년 12월
후량 양주 고장성
(現 간쑤성 우웨이시)
사망 401년 2월
후량 양주 고장성
(現 간쑤성 우웨이시)
능묘 백석릉(白石陵)
재위기간 후량의 3대 천왕
399년 12월 ~ 4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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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4F67><colcolor=#ece5b6> 성씨 여(呂)
휘 찬(纂)
자 영서(永緒)
부모 부황 의무황제(懿武皇帝)
모비 숙원 조씨(趙氏)
형제자매 5남 중 장남
배우자 목황후(穆皇后)
자녀 불명
묘호 없음
시호 영황제(靈皇帝)
연호 함녕(咸寧, 399년 ~ 4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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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후량의 제3대 황제.

태조 의무제 여광과 숙원(淑媛) 조씨(趙氏)의 서장남으로, 제2대 천왕인 은왕 여소의 이복형이었다.

2. 생애

여찬은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으며, 아버지 여광을 닮아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매와 사냥개를 좋아하였다. 전진의 천왕 부견이 재위할 때, 여찬은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고, 오직 귀족들과 교류하고 음악과 향락을 즐기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여광이 서역 원정에 나섰을 때, 여찬은 그대로 전진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머물렀고, 얼마 안 가서 천왕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참패하자 상규(上邽)로 갔다가 다시 고장(姑臧)에 이르렀다. 이후 여광이 서역에서 돌아와 후량을 건국하자, 여찬은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 진주자사(秦州刺史)로 임명되고, 태원공(太原公)에 봉해져 여러 정벌에 참전하고 반란을 진압하며 전공을 많이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여광 문서 참고.

용비 4년(399년) 12월, 여광은 병세가 매우 위중해지자, 태자 여소에게 천왕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제라 칭하였다. 여광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여소가 난세에 적합하지 않음을 걱정하여, 병권은 여찬에게, 내정에 관한 권한은 차남 여홍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그리고 여소에게는 두 형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라는 말을 끝으로 붕어하였다.

천왕 여소는 상을 비밀에 부쳐 아직 죽음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때 여찬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여광의 죽음을 슬퍼하며 곡하였는데, 애도를 극진히 한 뒤 옷자락을 떨치며 나가려 하였다. 여소는 여찬에게 살해될까 두려워하여 왕위를 양보하며 말하였다.
"형님께서는 공이 높고 나이도 많으시니 마땅히 대통(大統)을 이어야 합니다. 바라건대 형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찬은 거절하며 말했다.
"신(臣)이 비록 나이는 많지만 폐하께서는 국가의 적장자이십니다. 신이 어찌 감히 그 지위를 범하겠습니까? 사사로운 인정 때문에 큰 인륜의 질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됩니다."
여소가 거듭 왕위를 양보하였으나, 여찬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여소가 마침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초 여광이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했을 때, 차남 여홍(呂弘)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마침 적장자 여소가 구지(仇池)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여홍은 이 때문에 여소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의무제 여광 사후 몰래 상서 강기(姜紀)를 보내 몰래 여찬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선제(先帝)께서 승하하셨는데, 주상은 아둔하고 나약하여 이처럼 많은 난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안팎의 군정을 모두 맡아 다스려 왔고 위엄과 은덕도 본래 널리 알려져 있으니, 마땅히 사직을 위한 계책을 세워야지 사소한 절개와 의리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감히 옛날 창읍왕(昌邑王)을 폐위했던 의리를 본받아 형님을 중종(中宗)과 같은 군주로 받들고자 하는데 어떻겠습니까?[1]"
여찬은 이를 따랐다.

얼마 뒤, 여찬은 천왕 여소를 알현하였는데, 그날 밤중에 장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북쪽 성벽을 넘어 광하문(廣夏門)을 공격하였다. 이때 여홍도 동원(東苑)의 병력을 거느리고 홍범문(洪範門)을 공격하였다. 당시 좌위장군 제종은 융명관(融明觀)을 지키고 있었는데, 칼을 뽑아 여찬의 이마를 향해 내리쳤으나 맞히지 못하고 작은 부상만 입힌 채 도리어 사로잡혔다. 이윽고 여찬이 황성 안까지 진입하자, 여소는 무분중랑장 여개(呂開)에게 금병(禁兵)을 거느리고 단문(端門)에서 맞서 싸우게 하였다. 표기장군 여초(呂超)도 병사 2,000명을 거느리고 요소를 구원하러 왔으나, 병사들은 평소부터 여찬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모두 싸우지도 않은 채 스스로 무너져 흩어졌다. 이로써 여찬은 손쉽게 청각문(青角門)을 통해 궁으로 들어가 겸광전(謙光殿)에 올랐다. 결국 도망칠 곳이 없어진 여소는 자합(紫閤)에 올라 자결하였고, 여초는 광무(廣武)로 달아났다.

함년 원년(399년) 12월, 도성을 장악한 여찬은 여홍의 군세가 강한 것을 꺼려 왕위를 여홍에게 양보하려 하였으나, 여홍은 거절하며 말했다.
"지난번 여소는 저의 아우이면서도 대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제의 유명(遺命)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폐위하였으니, 황천에 계신 선제를 저버린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형님을 뛰어넘어 제가 즉위한다면 어찌 그것이 제 본래 뜻이겠습니까? 또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겠습니까? 큰형님께서는 나이도 많고 어질며, 위세와 명성은 두 강적에게까지 떨치고 있습니다. 마땅히 속히 대위에 올라 나라를 안정시키십시오."
이에 여찬은 여홍을 시켜 밖으로 나가 여러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선제께서 임종하실 때 내리신 명이 이와 같았다."
여러 신하가 모두 말했다.
"사직에 주인이 있기만 한다면 누가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마침내 여찬은 스스로 천왕(天王)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함녕(咸寧)'으로 고쳤으며, 적모(嫡母) 석씨(石氏)를 왕태후로 높이고, 생모 조씨(趙氏)를 태후로 높였다. 또, 정변을 도운 상산공 여홍을 사지절 · 시중 · 대도독 · 도독중외제군사 · 대사마 · 거기대장군 · 사예교위 · 녹상서사로 삼고, 작위를 번화군공(番禾郡公)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어 관직과 작위를 내렸다. 그리고 여찬 자신을 죽이려 한 제종을 불러 그의 충심을 치하하였다. 당시 여찬의 숙부인 정동장군 여방(呂方)은 광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여찬은 사신을 보내 여방에게 말했다.
"여초는 실로 충신이며, 의로움과 용기 또한 가상하나, 국가의 큰 형세와 임기응변의 이치를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바로 그의 충절에 의지하여 세상의 난국을 크게 구제해야 할 때이니, 숙부께서는 이러한 뜻으로 그를 타일러 주십시오."
이에 여초는 상소를 올려 자신의 죄를 진술하였고, 여찬은 여초의 작위와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함녕 2년(400년) 3월, 여찬의 동생인 대사마 · 번화공 여홍은 자신의 공적과 명망, 지위가 지나치게 높아 여찬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여찬 역시 여홍의 공이 크고 지위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 높았으므로 그를 몹시 시기하고 꺼렸다. 결국 여홍은 동원(東苑)의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윤문(尹文)과 양환(楊桓)을 위협하여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 또 종섭(宗燮)에게 함께 할 것을 청하였으나 종섭은 완강히 거절하였다.

여홍이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여찬을 치자, 여찬은 장군 초변(焦辨)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홍의 군대는 무너졌고, 여홍은 달아나 광무로 향하였다. 여찬은 병사들에게 마음대로 약탈하게 하고, 동원(東苑)의 부녀자들을 모두 군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이때 심지어 여홍의 아내와 딸들까지 병사들에게 능욕당하였다. 여찬이 웃으며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오늘 전투는 어떠하였는가?"
시중 방귀(房晷)가 대답하였다.
"하늘이 양(涼)나라의 왕실에 재앙을 내리니 친족과 제후 사이에서 화란이 일어났습니다. 선제께서 막 붕어하시자 은왕(隱王)은 핍박을 받아 죽었고, 선제의 장례가 막 끝나자 이번에는 대사마(大司馬)가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반역을 저질러 도성에는 피가 흐르고 형제끼리 칼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비록 여홍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폐하께서 형제 사이의 우애를 베풀지 못하신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여 백성들에게 사죄하셔야 할 터인데, 도리어 병사들에게 마음대로 약탈하게 하고 사대부와 부녀자들을 잡아 능욕하게 하셨습니다. 반란은 여홍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더구나 여홍의 아내는 폐하의 제수씨이고, 여홍의 딸은 폐하의 조카딸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뢰한 자들이 그들을 욕보이고 노비와 첩으로 삼게 내버려 두십니까? 천지신명이시여, 이런 상황에 이를 때까지 어찌하여 보기만 하신 겁니까!"
방귀는 말을 마치고 흐느껴 울었다.
여찬은 낯빛을 고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이어 여홍의 아내와 아들딸들을 불러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하고 후하게 위무하였다. 한편, 여홍은 남량의 독발리록고에게 달아나려 하다가 길을 지나 광무에 이르러 정동장군 여방을 찾아갔다. 여방은 조카인 여홍을 보자 크게 울면서 말했다.
"천하는 이토록 넓은데 네가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느냐!"
그리고 여홍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급히 사신을 보내 여찬에게 알렸다. 여찬은 역사(力士) 강룡(康龍)을 보내 여홍을 그 자리에서 허리를 꺾어 죽이게 하였다.

그달, 여찬은 왕비 양씨를 황후로 세우고, 황후의 아버지 양환을 산기상시 · 상서좌복야 · 양도윤(涼都尹)으로 삼고 금성후(金城侯)에 봉하였다.

함녕 2년(400년) 4월, 여찬이 남량을 정벌하려 하자, 중서령 양영(楊穎)이 간하였다.
"군대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일은 반드시 하늘의 때와 사람의 형편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때가 맞지 않으면 성현(聖賢)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작금의 독발리록고는 위아래가 한마음으로 명을 따르고 있고 그 나라에도 아직 틈이 생기지 않았으니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마땅히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고 정예병을 길러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며, 공격할 틈이 생기기를 기다렸다가 한 번에 쓸어버려야 합니다. 더구나 근래 여러 해 동안 일이 많아 관청과 백성의 재력이 모두 고갈되었으므로, 뿌리를 깊게 내리고 근본을 굳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후환이 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크게 노하신 마음을 억누르시고 만전을 기할 계책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여찬은 따르지 않았고, 마침내 군대를 거느려 호문하(浩亹河)를 건넜다. 이에 독발리록고는 동생 독발녹단을 보내 맞서게 하였다. 양군은 삼퇴(三堆)에서 싸웠고, 여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병사 2,000여 명이 남량군에 의해 참수당했다.

함녕 2년(400년) 6월, 여찬은 다시 서쪽으로 북량의 영역인 장액(張掖)을 기습하려 하였다. 상서 강기가 간하였다.
"지금은 한여름으로 농사가 한창 바쁜 때입니다. 백성들이 농사를 포기하게 하면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 군대가 영서(嶺西)에 이르면 적이 반드시 빈틈을 타 도성을 침략하고 약탈할 것인데, 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우선 군대를 돌리고 뒷날의 계책을 세우는 것이 좋습니다."
여찬이 말했다.
"적에게는 큰 뜻이 없어, 내가 서쪽으로 정벌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어도 자기 땅을 지키는 데 급급할 뿐이다. 지금 신속히 습격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진군하여 장액을 포위하고 건강(建康) 일대를 공략하였다. 과연 독발녹단은 이 소식을 듣고 기병 10,000기를 거느려 수도 고장을 공격하였고, 여찬의 동생 농서공 여위는 북성(北城)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다. 독발녹단은 청양문(青陽門)에서 군세를 과시한 뒤, 8,000여 호의 백성을 노략질하여 끌고 돌아갔다. 결국 여찬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함녕 2년(400년) 9월, 정동장군 여방이 광무의 백성 3,000여 호를 거느리고 남량에 투항하였다.

이해에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셋 달린 기형이었다. 또, 용 한 마리가 동상(東廂)의 우물에서 나와 궁전 앞까지 와서 꽈리를 틀고 누워 있다가 날이 밝을 무렵 사라졌다. 여찬은 이것을 아름답고 상서로운 징조라고 여겨 대전(大殿)의 이름을 '용상전(龍翔殿)'으로 고쳤다. 그리고 한번은 검은 용이 당양(當陽)의 구궁문(九宮門)에 나타나 돌아다니자 그 문을 '용흥문(龍興門)'으로 고쳤다. 그러나 구마라습만은 이를 재앙의 징조라고 여겨 여찬에게 말하였다.
"근래 숨어 있어야 할 용이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고, 돼지에게서도 괴이한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용은 음(陰)에 속하는 존재이므로 나오고 들어갈 때가 따로 있는데, 지금처럼 거듭 나타난다면 이는 재앙의 징조입니다. 장차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도모하는 변란이 일어날 것이니, 마땅히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덕(德)을 닦아 하늘의 경고에 응답하십시오."
그러나 여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무렵 양주(涼州) 사람 호거(胡據)가 전량의 왕이었던 장준의 왕릉을 도굴하였다.[2] 호거가 무덤을 열어 보니 장준의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호거는 그곳에서 진주로 만든 발과 휘장, 운모 병풍, 유리로 만든 술그릇, 세 되가 들어가는 백옥 술잔, 적옥으로 만든 퉁소, 자옥으로 만든 피리, 산호로 장식한 채찍, 마노로 만든 종, 황금 재갈 등 육지와 물에서 나는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얻었는데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자 여찬은 호거는 물론 그의 도굴 행위와 연관된 무리 50여 가문을 멸족하고, 사신을 보내 장준을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그의 릉 또한 다시 수리하게 하였다.

함녕 3년(401년) 2월, 여찬은 혼미하고 포학하여 제멋대로 행동하였고, 사냥과 유람에 절제가 없었으며, 술과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태상 양영이 간하였다.
"신이 듣기로 황천(皇天)은 아래를 굽어살피되 오직 덕 있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덕은 사람이 스스로 넓혀 가는 것이므로 하늘도 이에 복으로 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크나큰 복된 기운이 모두 폐하의 몸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미 대업(大業)을 이루셨으니 마땅히 도(道)로써 이를 지키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정치로 신령한 국가의 기틀을 넓혀 만세에 걸친 큰 복을 구하셔야 합니다. 한데 폐하께서 용처럼 날아오르신 뒤로도 나라의 영토는 아직 널리 개척되지 못하여 두 영(嶺) 안의 좁은 지역에 머물러 있고, 천하에는 아직 나라의 기강이 떨쳐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는 삼가고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경계하여 사방을 경략하고 선제의 유지를 이루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술을 지나치게 마시며 유람에도 일정함이 없으십니다. 편안히 놀고 즐기는 데 빠지고 술독 사이에 깊이 취하여 원수와 적을 근심하지 않으시니, 신(臣)은 삼가 이를 위태롭다 여깁니다. 주구(糟丘)와 주지(酒池)를 만들었던 자들이나 낙예(洛汭)에서 돌아오지 못한 옛일은 모두 폐하께서 깊이 거울로 삼으셔야 할 일입니다. 신은 선제께서 평안할 때나 위태로울 때나 한결같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입었으므로, 감히 간장(干將)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조차 피하지 않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찬이 사과하며 말했다.
"이는 짐의 죄이다.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없다면 누가 사악하고 그릇된 임금을 바로잡겠는가?"
하지만 여찬은 본래의 혼미하고 포학한 성정을 그대로 따랐으므로, 비록 이러한 간언을 들어도 끝내 행실을 고치지 못하였다. 그는 늘 측근들과 술에 취한 채 말을 달리며 사냥을 즐겼고, 때로는 말이 구덩이나 도랑 사이로 내달리기도 하였다. 전중시어사 왕회(王回)와 중서시랑 왕유(王儒)가 말고삐를 붙잡고 간하였다.
"천금의 재산을 가진 귀한 사람도 마루 끝에 가까이 앉지 않는다고 하였고, 만승의 임금은 길을 깨끗이 비운 뒤 행차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찌 수레의 편안함을 버리고 말을 달리는 위험을 무릅쓰십니까? 말의 재갈이나 굴레에서 사고가 생기면 예측하지 못한 재앙이 일어날 수 있으니, 어리석은 신(臣)들은 이를 매우 불안하게 여깁니다.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간쟁하오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멀리 옛일을 생각하시어 원앙(袁盎)이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던 일을 기억하시고, 신들로 하여금 천 년 뒤까지 비웃음을 받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찬은 듣지 않았다.

이때 번화태수(番禾太守)인 여초가 제멋대로 선비족 사반(思盤)을 공격하였다. 사반이 동생 걸진(乞珍)을 보내 여초의 일을 여찬에게 호소하니, 여찬은 여초와 사반에게 모두 조정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여초는 고장에 도착하자 크게 두려워하여 전중감 두상(杜尚)과 은밀히 연락하여 깊이 결탁하였다. 이윽고 여초는 조정으로 들어갔고, 여찬은 여초를 만나자 노하여 꾸짖었다.
"경은 형제들이 용맹하고 강한 것을 믿고 감히 나를 업신여기는가? 반드시 경의 목을 베어야 천하가 안정될 것이다."
여초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감히 그런 뜻은 없었습니다."
사실 여찬은 여초를 겁주려 했을 뿐 실제로 죽일 뜻은 없었기에, 여초와 사반 및 여러 신하를 불러 내전에서 함께 연회를 열었다. 이때 여초의 형인 중령군 여륭은 여러 차례 여찬에게 술을 권하였고, 날이 이미 저물 무렵 여찬은 크게 취하였다. 이후 여찬은 사람이 끄는 수레에 올라 여초 등과 함께 궁궐 금역 안을 돌아다녔다. 여찬 등이 곤화당(琨華堂) 동각(東閣)에 이르렀는데 수레가 갑자기 나아가지 못하였다. 여찬의 친위 장수 두천(竇川)과 낙등(駱騰)은 칼을 벽에 기대어 놓고 수레를 밀어 문을 통과시키려 하였다. 그 틈에 여초가 칼을 집어 들고 여찬을 공격하였다. 여찬은 수레에서 내려 여초를 붙잡았으나, 여초가 칼로 여찬의 가슴을 깊이 찔러 관통시켰고, 여찬은 큰 부상을 입은 채로 선덕당(宣德堂)으로 달아났다. 여초가 그의 뒤를 쫓자 두천과 낙등이 막았으나, 여초는 두 사람과 싸워 모두 죽였다. 여찬 역시 도중에 장군 위익다(魏益多)에게 잡혀 재위 3년차에 시해당하고 말았다.

한편, 상황을 파악한 여찬의 황후 양씨는 금병(禁兵)에게 여초를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미 여초에게 넘어간 전중감 두상이 이를 저지하자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거두어 내려놓았다. 이때 장군 위익다가 여찬의 머리를 베어 들고 사람들에게 돌려 보이며 말하기를,
"여찬은 선제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명령을 어기고, 태자를 죽인 뒤에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술과 사냥에 빠져 소인들을 가까이하였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으며, 백성을 풀과 티끌처럼 여겼다. 번화태수 여초는 골육의 지극히 가까운 친족으로서 사직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여 민심에 따라 그를 제거하였다. 위로는 종묘를 안정시키고, 아래로는 태자)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우리 모든 선비와 백성은 함께 이 경사를 누려야 할 것이다."
라 하였다. 이로써 금군을 무력화한 여륭과 여초 형제는 당시 북성에 머물고 있었던 여찬의 숙부인 파서공 여타(呂他)와 그 동생인 농서공 여위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여위는 토벌을 주장했으나, 여타는 부인 양씨(梁氏)의 조언을 듣고 따르지 않았기에, 저항 세력을 일소하여 황궁을 성공적으로 장악한 여초는 여위를 황궁에 입성하게 한 뒤,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참수하였다. 또, 여초가 여찬의 황후 양씨를 탐해 부인으로 맞이하려고 했지만, 이를 수치로 여긴 양씨는 자결하였다.

뒤에 왕위를 찬탈한 여륭이 여찬에게 '영황제(靈皇帝)'라는 시호를 올렸고, 능호를 '백석릉(白石陵)'이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찬이 아직 죽기 전, 일찍이 구마라습과 놀이를 하거나 바둑을 두곤 하였다. 어느 날 여찬이 구마라습의 바둑돌을 잡으며 말했다.
"호노(胡奴)의 머리를 베었소."
그러자 구마라습이 말했다.
"사람이 호노의 머리를 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호노가 장차 사람의 머리를 벨 것입니다."
이 말에는 뜻이 있었으나 이때 당시 여찬은 깨닫지 못하였다. 여광의 동생 여보(呂寶)에게는 여초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명이 바로 '호노(胡奴)'였다. 결국 여초가 여찬을 죽였으니, 끝내 구마라습의 말과 그대로 들어맞았다.
[1] '창읍왕을 폐위한 의리'는 전한의 곽광이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폐위하고 선제를 세운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무능한 군주를 폐하고 유능한 사람을 세우자는 뜻이다.[2] 다만 원문의 이 부분에는 판본상 혼란이 있다. 다른 기록에는 '호안매(胡安枚)' 또는 '호안거(胡安璩)' 등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