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17:07:44

황보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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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皇甫真
생몰연도 불명

전연의 인물. 자는 초계(楚季). 양주(涼州) 안정군(安定郡) 조나현(朝那縣) 출신. 서진의 동이교위 황보급의 동생.

2. 생애

황보급, 황보진 형제는 나란히 문장과 준수한 재능을 갖추고 있어 평주(平州)자사 최비가 형 황보급을 불러 자신의 장사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황보급은 말로 잘 타일러 완곡히 거절하고, 모용부 세력이 점차 두각을 드러낼 때 황보진과 함께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황보진은 모용부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기밀 사무를 관장하였고, 20세에 이르렀을 때 요동국시랑(遼東國侍郎)에 임명되었다.

함화 8년(333년) 5월, 요동공 모용외가 사망하고 세자 모용황이 후사를 잇자, 황보진은 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 이제 막 통치를 시작한 모용황이 법을 엄혹하게 집행하여 백성들이 모두 곤궁한 지경에 놓이게 되니, 황보진은 민간의 조세와 역을 줄여 백성들을 쉬게 해야 한다 주장했지만 모용황은 이를 받아들여지기는 커녕 오히려 황보진을 면직하였다.

함화 8년(333년) 11월, 모용황의 동생 모용인이 평곽(平郭)에서 거병하자, 모용황의 통치에 불만이 많았던 요동성의 백성과 관리들이 그에게 호응하였다. 모용황은 비로소 황보진의 말을 채택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황보진을 다시 불러 평주별가로 삼았다.

함강 3년(337년) 9월, 모용황이 여러 신하들의 권유에 따라 연왕(燕王)을 칭하기로 결심하고 관제를 재정비할 때 황보진은 양엽과 나란히 용기상시(宂騎常侍)에 임명되었다.

함강 4년(338년) 12월, 후조군에게 패해 밀운산(密雲山)에 숨어있던 단료가 후조와 전연으로 각각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천왕 석호는 정동장군 마추(麻秋)에게 30,000 군사를 주어 단료를 영접해오게 하면서 선우량, 양유도 같이 종군하게 하였다. 모용황 역시 태원공 모용각과 황보진에게 기병 7,000기를 주어 단료를 영접해오게 하였다. 전연군은 후조군보다 빠르게 진군하여 단료를 거두었고, 이어서 삼장구(三藏口)에서 후조군을 습격해 대파하고 적장 선우량을 사로잡았다. 이때의 공으로 황보진은 봉거도위, 요동•영구(營邱)2군태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2개의 군을 다스리면서도 선정을 펼쳤으므로 그 치적이 준수하였다.

영화 4년(348년) 11월, 연왕 모용황이 사망하고 세자 모용준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황보진은 전서령(典書令)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영화 6년(350년) 2월, 연왕 모용준이 여러 숙장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친히 후조 정벌에 나서면서 수도인 용성(龍城)을 비우게 되자, 황보진은 대사농 유빈(劉斌)과 더불어 수도에 남아 태자 모용엽(慕容曄)을 보좌하였다. 황보진은 수도가 계(薊)로 옮겨질 때까지 아직 어린 모용엽을 대신해 정무를 도맡아 처리하였고, 얼마 뒤 우사마로 전임되었다.

영화 8년(352년) 5월, 염위의 수도인 업(鄴) 공략이 지체되자, 황보진은 연왕 모용준의 명령에 따라 광위장군 모용군(慕容軍), 전중장군 모여근과 함께 보•기 20,000명을 거느리고 업으로 향하였다.

영화 8년(352년) 8월, 보필장군 모용평을 도와 마침내 업성을 함락시켰고, 이로써 염위는 멸망하였다. 업에는 후조의 석씨(石氏)들이 모아둔 진귀한 보물과 재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황보진은 다른 이들과 달리 이것을 일절 취하지 않고 지도와 서적만 챙겼다.

원새 원년(352년) 11월, 연왕 모용준이 황제로 즉위하고 백관을 설치하자 황보진은 상서좌복야에 제수받았다.

건희 원년(360년) 정월, 경소제 모용준이 임종 전에 태원왕 모용각 등에게 뒤를 부탁하고 붕어하였다. 이후 헌무제 모용위가 뒤를 이어 즉위하니, 황보진은 시중에 임명되었고 비서감을 겸하였다.

건희 원년(360년) 2월, 태사 모여근이 태원왕 모용각에게 모용위를 대신해 황제에 오르라 권했지만 모용각이 따르지 않았다. 이를 들은 황보진이 모용각에게 말했다.
"모여근은 본래 범부에 불과함에도 선제의 후한 은혜 덕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 그는 식견이 없는 소인배인 나머지 선제 폐하께서 승하하신 이래로 점점 그 무례함이 심해지고 있으니, 주공(周公)의 지위에 계시는 명공(明公)께서는 이것이 큰 혼란으로 번지기 전에 응당 모여근을 주살하여 사직을 지키셔야 합니다."
모용각은 차마 경소제 모용준이 세운 보정대신을 함부로 제거할 수 없어 듣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모여근의 모반 음모가 들통나면서 모여근이 참수되니, 모용각은 황보진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그대의 건의를 따르지 않는 바람에 하마터면 화를 당할 뻔 하였소."

건희 2년(361년) 2월, 과거 모여근에게 패하여 야왕(野王)으로 달아났던 후조의 옛 장수 여호(呂護)가 사망한 고창(高昌)의 무리까지 흡수하고 동진에 사자를 보내 투항하였다. 동진에서 여호의 투항을 받아주고 기주(冀州)자사로 삼자, 여호는 동진군과 협력하여 업 습격을 모의하였다. 이에 태원왕 모용각이 조회에 참석하여 대신들에게 여호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으니, 황보진이 나아가 답했다.
"여호는 9년 동안 3번에 걸쳐 주상(主上)을 배반하였습니다. 그 간사한 마음에서 나오는 흉패함은 헤어릴 수조차 없는 지경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명공께서는 강상(江湘) 일대에서 병사와 말을 쉬게 하여 검각(劍閣)에 그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수도와 매우 가까이 있는 여호가 어찌 이를 기회로 삼아 살육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이는 병사들을 움직여 취해야 할 뿐이므로, 아무리 격문을 보내면서 설득해봐야 소용없을 것입니다."
모용각은 황보진의 말을 옳게 여겨정벌에 나설 준비를 하였고, 황보진을 관군장군, 별부도호로 삼았다.

건희 2년(361년) 3월, 태원왕 모용각이 50,000 군사, 황보진이 10,000 군사를 거느리고 각각 출격하여 야왕의 여호를 토벌하였다. 여호가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하니, 호군장군 부안(傅顔)은 얼른 군사를 내몰아 총공세를 가해야 한다 주장했지만, 모용각은 100일이면 함락시킬 수 있다 자신하면서 포위망을 길게 늘어뜨려 야왕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건희 2년(361년) 5월, 수십일간 포위가 지속되면서 불안해진 여호가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장수 장흥(張興)을 내보내 전연군과 싸우게 하였으나, 장흥은 되려 부안에게 패하여 참수당했다. 이로 인해 성 안의 사기가 떨어지니, 황보진은 포위망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서신을 돌려 말을 전달했다.
"여호는 이번 전투로 군사를 많이 잃어 반드시 포위망이 허술한 곳을 살핀 다음 그곳으로 돌격해 성 밖으로 도주를 시도할 터이니, 방비를 더욱 두텁게 하여 대비토록 하라."
그리고 스스로 직접 현장을 감독하여 포위망에 놓여있는 전차와 방패의 상태를 점검하고, 밤에는 순찰병들에게 더욱 주의깊게 적의 동향을 조사케 하였다. 과연 군량이 전부 떨어진 여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야간을 틈타 모든 정예병을 동원해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지만 황보진의 단단한 방어로 실패하였다. 이때 모용각이 군사를 몰아 여호의 군대를 역으로 덮쳐 궤멸시켰고, 여호는 처자식도 모두 버린 채 형양(滎陽)으로 도망쳤다. 이후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개선한 황보진은 진서장군, 병주(并州)자사, 진호흉노중랑장(鎮護匈奴中郎將)으로 승진하여 병주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수도로 돌아가 시중, 광록대부를 지냈다.

건희 6년(365년) 4월, 태위 봉혁이 사망하면서 사공 양무가 그를 대신해 태위가 되니, 황보진은 사공으로 승진하였다.

건희 8년(367년) 7월, 명장으로 숱한 공을 세웠던 태원왕 모용각이 사망하자, 전진의 천왕 부견은 은밀히 서융주부 곽변(郭弁)을 철불부의 좌현왕 조곡(曹轂)에게 보내어, 조곡이 조공을 바치러 전연으로 갈 때 그를 따라가 전연이 도모할만한지 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전연에 도착한 곽변은 황보진을 만나
"저는 본래 진(秦)의 사람이었으나 집안 사람이 주살당하여 조왕(曹王)에게 목숨을 맡기고 연나라로 왔습니다. 참고로 산기상시인 그대의 형 황보전(皇甫腆)과 그 아들들인 황보분(皇甫奮), 황보부(皇甫覆) 형제 모두와 평소 잘 아는 사이입니다."
라 말하며 은근히 접근하였다. 그러나 황보진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노하여 말했다.
"신하된 이는 아무리 같은 집안일지라도 국경 바깥의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는 법이거늘, 너는 어찌하여 내게 그런 말을 꺼내는가! 아마 그대는 간사한 사람으로, 거짓된 핑계를 이용해 무언가를 노리려 함이 아니겠는가?"
그러고는 헌무제 모용위에게 곽변을 조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용위는 그 말을 듣고도 별일 아니리라 생각해 무시하였다. 이후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간 곽변이 천왕 부견에게 결과를 보고하며 말했다.
"연나라 조정은 정치가 문란하고 기강이 없어 가히 도모할만 합니다. 기회와 변화를 파악할 줄 아는 자는 오직 황보진 뿐이었습니다."
이를 모두 들은 천왕 부견이 한탄하며 말했다.
"6주의 땅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어찌 지혜로운 선비가 한 사람 뿐일 수 있는가! 그 황보진 역시 본래 진나라에 고향이 있으므로, 사실상 연나라가 가져가서 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 관서(關西)는 군자(君子)가 많았던 것이었구나."

건희 8년(367년) 10월, 전진에서 5공의 반란이 일어나고 위공(魏公) 부수(苻謏)가 전연에 구원을 청하였지만 헌무제 모용위나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태부 모용평 모두 관심이 없어 무시하였다. 부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왕 모용수와 황보진에게도 각각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둘 모두 도와주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용평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고, 결국 5공의 반란은 왕맹 등의 활약으로 진압되면서 전진은 안정을 되찾았다.

건희 8년(367년) 12월, 태위 양무가 사망하자 황보진이 그를 대신해 태위에 올랐고, 시중 직책은 이전과 같이 겸하였다.

건희 10년(369년) 11월, 전진에 사신으로 갔던 급사황문시랑 양침(梁琛)과 부사 구순(苟純)이 귀환해 겸정(兼程)에서 태부 모용평과 헌무제 모용위에게 '전진이 매일같이 군사 훈련을 하고 군량을 섬동(陝東)에 쌓아두고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이에 양침이 황보진과 상의하였고, 황보진 역시 이를 듣고 심히 근심한 나머지 헌무제 모용위에게 상소를 올려 방비를 강화하라고 간절히 간하였다. 황보진의 상소문을 읽은 헌무제 모용위는 태부 모용평을 불러 상의하였는데, 모용평은 전진과 전연의 우호 관계는 돈독하다며 모용위를 안심시켰다. 결국 모용위는 황보진의 상소까지 무시하면서 끝내 국경의 방비를 강화되지 않았고, 양침은 구순의 모함을 믿은 모용평에 의해 투옥되었다.

건희 11년(370년) 12월, 전진군이 전연의 수도인 업(鄴)을 함락시키고, 그 황족과 대신들을 장안(長安)으로 옮기면서 전연이 멸망하였다. 이때 황보진도 장안으로 들어가 봉거도위에 임명되고, 봉조청(奉朝請)을 겸하였다. 이후 황보진은 수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