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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대 베네딕토 16세 | → | 제266대 프란치스코 | → | 제267대 레오 14세 |
<colbgcolor=#ffe100,#ffe100><colcolor=#670000,#670000> | |||
| |||
출생 | 1936년 12월 17일 |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
사망 | 2025년 4월 21일[1] (향년 88세) | ||
바티칸 성녀 마르타의 집[2] | |||
재위기간 | 제266대 교황 | ||
2013년 3월 13일 ~ 2025년 4월 21일(12년 1개월 8일) | |||
묘소 | 이탈리아 로마 성모 대성전[3] | ||
서명 |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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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 제오르지오 (Georgius)[5] | ||
부모 | 아버지 마리오 호세 베르고글리오 어머니 레히나 마리아 시보리 | ||
국적 |
|
[6] (복수국적) | ||
신체 | 178cm | ||
학력 | 산호세대학 (철학 / 박사과정 수료) | }}}}}}}}} |
1. 개요
교황 선출 직후 첫 강복을 하는 프란치스코[7] |
Miserando atque eligendo 자비로이 부르시니 사목표어 |
2. 문장
| |
<rowcolor=#670000,#670000> 교황 시절 문장 | 추기경 시절 문장 |
하단의 글귀 'Miserando atque eligendo'는 '자비로이 부르시니'라는 뜻의 라틴어로 프란치스코 본인의 사목표어이다. 성 베다의 설교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이는 성 마태오 사도가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 복음 이야기에 관한 말씀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교황 즉위 후 교황으로서의 자신의 문장에도 그대로 적어 넣었는데, 통상 추기경의 문장까지는 사목표어를 적어 넣지만, 교황의 문장에 사목표어를 적어 넣는 것은 이례적이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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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란치스코(교황)/생애#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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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란치스코(교황)/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1. 재위기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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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바티칸 오 베르토네 추기경과 안젤로 소다노 수석추기경으로 대표되는 교황청의 반발에 의해 이탈리아 추기경 표가 갈려 밀려났다고 한다. 이상의 연합뉴스 링크에 의하면 바티칸 내부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이전투구가 쿠리아 세력의 '질투와 경쟁심' 때문이었다고 하니 내부분열은 상당했던 모양. 결국 비유럽파와 개혁파의 응집에 의해 프란치스코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정황이 제기되었고, 따라서 이들의 지지를 업은 프란치스코에게 교황청의 개혁과 부패 말소는 숙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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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란치스코(교황)/개혁#|]] 부분을
참고하십시오.뉴욕 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에 의해,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한 직접적 원인이 바티리크스 사건이었다면, 더욱 근본적 원인으로는 바티칸 내 최고행정기구인 교황청의 관료제적 폐해와 부패라는 분석이 있었다. 국무원장과 궁무처장을 겸임한 반개혁파 타르치시오 베르토네가 이탈리아 출신들을 대거 요직에 앉혀 사실상 최고 실력자로 군림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출신-교황청 관료-반개혁 세력이 온갖 부패와 전횡을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사실상 고립되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출신들로 관료들을 가득 채워 놓은 교황청에서, 독일 출신의 베네딕토 16세는 파벌이 전혀 형성될 수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어디든 고관대작이 존재하는 곳은 파벌이 존재하며 파벌이탈죄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중범죄로 간주한다.
대표적으로 베네딕토 16세는 바티칸 은행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바티칸 은행을 관할하는 베르토네 국무원장의 음해와 방해로 실패했다고 한다. 교황청의 2인자 비가노 대주교 역시 교황을 보필하여 교황청 개혁 작업에 나섰으나, 그 후 베르토네 국무원장에 의해 상대적으로 한직인 미국 주재 교황 대사로 발령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교황의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레가 이를 바깥에 알리기 위해 교황과 비가노 대주교 사이에 있었던 교황청 내부 문제들을 다룬 비밀편지를 고의적으로 유출한 것이 바티리크스라는 분석이다. 이는 바티리크스의 배후로 알려진 가브리엘레 집사가 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8년의 징역형까지 가능했으나 18개월의 징역형만을 선고 받았고 그나마 2개월 후 교황에 의해 사면됐다는 정황으로도 방증됐다. 요컨대 부패척결을 위해 신임했던 개혁파 비가노 대주교[8]와 가브리엘레 집사가 교황청에 의해 무력화되자 자진사임했다는 것.[9] 그 뒤로도 바티리크스의 처리과정에서도 베르토네가 도청을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차기 교황은 바티칸을 개혁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교황 유력후보였던 밀라노의 안젤로 스콜라 추기경은 타르치시언론에서도 부패척결과 관료주의 타파를 새 교황의 대표적인 직면과제로 꼽았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빈곤 타파, 기후변화 등에 이슈에 대한 강조와 개혁적인 발언을 통해 진보 세력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한 반면, 구체적인 실천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가톨릭계 복지시설에서 터져나온 학대와 아동 매장 등의 사건들과, 2018년에 터진, 상기한 측근이었던 비가노 대주교에 의한 폭로로, 재위도중 계속 터져나온 가톨릭 성직자들에 의한 각종 성범죄 및 성폭행 사건 은폐에 대해 교황 본인이 이를 알고도 문제를 일으킨 성직자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묵인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한 무대응 때문에 2018년부터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워낙 진보적인 언사(신학적+사회적으로 모두)와 행보를 취하여,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 내의 보수파들은 대놓고 입장표출만 안하지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단단히 불만 내지는 미운털이 박혀있고, 비가노 대주교에 의한 부정 폭로 및 교황직 사임 요구가 제기되자 아예 비가노 대주교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더라도 교황의 바른 해명과 처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매우 높다.
3.2. 2014년 대한민국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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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란치스코(교황)/한국 방문#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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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성품 및 종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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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란치스코(교황)/성품 및 종교관#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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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란치스코(교황)/성품 및 종교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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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란치스코(교황)/논란#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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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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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란치스코(교황)/여담#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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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7. 대중매체
2015년, 교황의 친구 엘리자베타 피크의 책 <교황 프란치스코의 인생과 혁명>을 바탕으로 한 아르헨티나 영화 Francis: Pray for Me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16년 3월 10일 국내에서 개봉했다.2016년 촬영 예정인 종교 영화 <Beyond the Sun>에 본인 역으로 출연 예정이라고 한다. 가톨릭 역사상 최초로 교황이 영화에 출연해 연기하는 것. 다만 예전에 비오 12세도 연기까지는 안 했지만 독일 영화에 찬조출연한 적은 있다.
국산 게임 엘라의 2048에서는 프란체스코 교황의 DNA를 복제한 걸로 추정되는 클론이 등장한다. 일종의 패러디 캐릭터로 볼 수 있을 듯.
2019년에 지난 2013년 콘클라베를 다룬 영화 <두 교황>에서 조너선 프라이스가 프란치스코 교황 역을 맡아 연기하며 재미로 이야기하던 닮은꼴 언급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상대역인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역을 맡은 대배우 앤서니 홉킨스도 대단한 싱크로율을 보여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예고편을 보고서는 "다큐인 줄 알았다"고 평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
8. 어록
(서울대교구 사목국에서 제작한 프란치스코 교황 어록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세속적으로 우리는 주교요, 사제요, 추기경이요, 교황일 수 있지만, 주님의 진정한 제자는 될 수 없다. 진정한 권위는 봉사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아주 가난하고, 약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 |
사랑이 증오를 이겼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겼습니다. 진리가 거짓을 이겼습니다. 용서가 복수를 이겼습니다. 악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끝까지 남아 있겠지만,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날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25년 4월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 중에서[10] |
9. 각종 기록들
-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11]
- 최초의 남반구 출신 교황
- 최초의 스페인어권 출신 교황
- 최초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사용한 교황
- 913년 란도 이후로 독자적인 교황명을 선택한 교황
- 745년 교황령 건국 이래 유일하게 교황 재위기간에 바티칸 외의 다른 국적을 가진 교황[12]
- 사도 궁전 창건 이래 최초로 사도 궁전에서 기거하지 않았고 사도궁전 또는 여름 궁전 이외의 장소에서 사망한 교황
- 역대 세 번째로 전임 교황 생존상태에서 즉위한 교황[13]
- 세족례에서 무슬림의 발을 씻긴 최초의 교황
- 세족례에서 여성의 발을 씻긴 최초의 교황 [14]
- 최초로 교황청 장관직, 차관직에 여성을 임명한 교황
10. 교황 문헌
10.1. 회칙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 bordercolor=#ffe100,#ffe100><rowbgcolor=#ffe100,#ffe100><rowcolor=#670000,#670000><tablebgcolor=#fff,#1c1d1f><width=15%> 연번 ||<width=50%> 제목 ||<width=15%> 반포 연도 ||<width=20%> 비고 ||
1 | 신앙의 빛 (Lumen Fidei) | 2013 | [15] |
2 |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 2015 | |
3 |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 2020 | |
4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 | 2024 |
10.2. 교황 권고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 bordercolor=#ffe100,#ffe100><rowbgcolor=#ffe100,#ffe100><rowcolor=#670000,#670000><tablebgcolor=#fff,#1c1d1f><width=15%> 연번 ||<width=50%> 제목 ||<width=15%> 반포 연도 ||<width=20%> 비고 ||
10.3. 교황 교서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 bordercolor=#ffe100,#ffe100><rowbgcolor=#ffe100,#ffe100><rowcolor=#670000,#670000><tablebgcolor=#fff,#1c1d1f><width=15%> 연번 ||<width=50%> 제목 ||<width=15%> 반포 연도 ||<width=20%> 비고 ||
10.4. 서한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 bordercolor=#ffe100,#ffe100><rowbgcolor=#ffe100,#ffe100><rowcolor=#670000,#670000><tablebgcolor=#fff,#1c1d1f><width=15%> 연번 ||<width=50%> 제목 ||<width=15%> 반포 연도 ||<width=20%>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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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 부활 대축일 다음날인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사망하였다. 사망 시각은 현지시각 오전 7시 35분. 한국 시각 오후 2시 35분.[2] 성녀 마르타의 집은 업무차 교황청을 방문하는 성직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이다. 콘클라베에 참석하러 오는 추기경들도 이곳을 숙소로 쓰는데,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공식 관저인 사도 궁전을 사양하고 자신이 콘클라베에 참석하려 와서 묵었던 성녀 마르타의 집 숙소를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위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사용하였다. (다만 처음에 묵었던 207호는 너무 좁아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맞은 편 201호로 옮겼다고 한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현대에 재위 중 사망한 교황 중으로는 최초로, 그리고 전현직을 통틀어서는 전임자인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두 번째로 사도 궁전 또는 교황의 여름 별궁이 아닌 곳에서 사망한 교황이 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으로 인한 급성 심부전.[3] 본인의 영적 유언에 따라 파올리나 경당(로마 백성의 구원 경당)과 스포르차 경당 사이에 있는 측면 회랑의 안치 공간에 안장되었다.[4] '베르골리오'라는 표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지침에는 이탈리아어식으로 '베르골료(/berˈɡɔʎʎo/)', 스페인어식으로는 '베르고글리오(/βerˈɣoɣljo/)'라고 표기한다. 가톨릭 굿뉴스에서는 '베르골료'로 표기하고 있지만, 국립국어원에서는 비록 이탈리아계더라도 스페인어를 쓰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점을 들어 스페인어식인 '베르고글리오'로 표기를 심의하였다.[5] 서구권에서는 본명(First Name)이 곧 세례명인 경우가 많다.[6] 교황은 교회법상 바티칸 이외의 그 어떠한 국적도 가질 수 없지만, 아르헨티나는 헌법상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국적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망까지 그 국적을 유지했다.[7] 다른 교황들과는 달리 교황의 권위를 뜻하는 붉은 모제타를 입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8] 그 후 비가노 대주교는 2018년 중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내 동성애 성범죄를 저지른 일부 성직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묵인했다는 주장을 폭로하고, 교황직 사임을 요구하면서 2018~2019년 사이 가톨릭 교계 내에 태풍의 핵으로 등장한다.[9] 프레시안과 동아일보의 보도 참고.[10]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망 하루 전에 발표되었으며, 사실상 그의 공적 유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은 유흥식 추기경이 발표한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사에도 인용되었다.[11] 비유럽권인 시리아 출신의 교황은 적어도 4명이 나왔지만 아예 지구 반대편이라 할 법한 동네에서 교황을 배출하는 것은 처음이다.[12] 원래 교황은 국제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해서 자국 국적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의 모국인 아르헨티나는 자국 출생 국민들에게 복수국적을 허용하는 대신 자국 국적 포기를 헌법으로 차단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복수국적 교황이 되었다.[13] 그 전에는 첼레스티노 5세와 그레고리오 12세가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프란치스코가 처음이다.[14] 가톨릭 세족식에서 12명 남자의 발만 씻는 전통을 최초로 깬 것.[15] 전임 베네딕토 16세가 초안을 작성한 것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듬고 완성한 회칙이다.[16] 성녀 데레사 탄생 150주년 기념[a] 자의 교서 형태로 작성된 교황 교서[a] [19] 예로니모 성인 사망 1400주년 기념[20] 요셉 성인의 보편 교회의 수호자 선포 150주년 기념[21]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사망 400주년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