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오스발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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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7대, 9대, 20대 |
독일의 前 축구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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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파울 오스발트 Paul Oßwald | |
출생 | 1905년 2월 4일 독일국 튀링겐주 잘펠트 | |
사망 | 1993년 11월 10일 (향년 88세)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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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미상 | |
직업 | 축구 선수 (풀백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미네르바 93 베를린 (불명) |
감독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28~1933) 1. FSV 마인츠 05 (1933~1935)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35~1938) VfR 프랑켄탈 (1938~1941) 키커스 오펜바흐 (1946~1958)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58~1964) 키커스 오펜바흐 (1968~1969) | |
국가대표 | 없음 |
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 출신 前 축구 감독. 선수로서는 1920년대 중반 미네르바 93 베를린에서 풀백 또는 하프백으로 활약했다.프랑크푸르트와 인근의 키커스 오펜바흐를 오가며 1960년대까지 30여년 간 감독 생활을 이어갔다. 전술적 능력과 선수 육성 능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엄격한 훈련과 냉철한 경기 운영으로 정평이 났던 명장이었다. 아인트라흐트와 오펜바흐 양 팀을 번갈아 맡으며 여러 차례 리그 우승과 컵 대회 입상을 이끌었다. 특히 아인트라흐트 감독 시절에는 1959년에 구단 역사상 최초로 독일 챔피언십 우승과 1960년에는 유러피언컵 준우승이라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57년에는 독일축구지도자연맹(BDFL)의 초대 회장을 지내는 등 독일 축구계 발전에도 공헌했다. 1993년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 지도자 경력
파울 오스발트는 독일 체육 아카데미를 졸업한 스포츠 교사 출신으로, 1929년 독일 대표팀 감독 오토 네르츠의 주선으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지휘봉을 잡으며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첫 부임 기간 동안 1930, 1932년 두 차례 남부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두 번째로 아인트라흐트를 지휘하며 1938년에는 가우리가 남서부도 차지했다. 한편 1933년부터 1935년까지 1. FSV 마인츠 05의 지휘봉도 잡았다.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의 라이벌 클럽 키커스 오펜바흐의 지휘봉을 잡았고, 무려 12년 간 장기 집권하며 팀을 전국구 명문 반열에 올려놓았다. 1949년과 1955년 두 차례 오버리가 남부의 정상에 올랐고, 독일 챔피언십에도 1950년 준우승을 포함해 4차례나 진출했다.
1958년에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제3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 남부 리그를 제패한 뒤 전국 결선에서 정상에 오르며 구단 역사상 첫 독일 챔피언십 우승을 견인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가 다름 아닌 오펜바흐였기에 '오스발트 더비'로 불리며 화제를 모았다.
이어진 1960년 유러피언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며 독일 클럽의 새 역사를 썼다. 1963-64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원년 멤버로 참가했으나 시즌 도중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났다.
1968-69 시즌 다시 한번 분데스리가의 오펜바흐 지휘봉을 잡았으나 1부리그 잔류에 실패하고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선수와 지도자를 연결해주는 중개 업무 등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93년 88세로 타계할 때까지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