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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퍼시(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
Thomas Percy, 7th Earl of Northumberland
파일:Thomas_Percy_Earl_of_Northumberland_1566.jpg
성명 토머스 퍼시
Thomas Percy
출생 1528년 6월 10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치체스터 피트워스
사망 1572년 8월 22일 (향년 44세)
잉글랜드 왕국 노스요크셔 요크
배우자 앤 서머셋(1558년 결혼)
자녀 토머스, 엘리자베스, 루시, 제인, 메리
아버지 토머스 퍼시 경
어머니 엘레노어 하보틀
형제 헨리, 기스카드, 리처드, 조앤, 메리, 캐서린
직위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스코를랜드 국경 관리관.

1. 개요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2.2. 엘리자베스 1세 치세기의 행적2.3. 잉글랜드 북부 반란2.4. 체포와 처형2.5. 사후
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가톨릭 신자로서 잉글랜드 국교회를 수호하려는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고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 메리를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과 손잡고 잉글랜드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끝내 진압된 후 스코틀랜드로 피신했다가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은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붙잡혀 잉글랜드로 끌려간 후 반역 혐의로 참수당했다. 1895년에 시복되었다.

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

잉글랜드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가문으로 손꼽힌 퍼시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 토머스 퍼시 경은 제5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더럼주 비미시의 영주 기스카드 하보틀의 딸인 엘레노어 하보틀이었다. 그에게는 세 남자 형제와 세 여자 형제가 있었다. 세 남자 형제 중 키스카드와 리처드는 요절했지만, 헨리는 오래 살았다.

1536년, 아버지 토머스 퍼시의 형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제6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빚더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기 영지를 대거 매각하고 나머지 재산을 왕실에 물려주면서, 사실상 다음 계승자로 유력하던 아버지 토머스 퍼시는 영지를 온전히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강한 불만을 품은 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봉기인 은총의 순례를 지원했으며, 요크셔의 노스 및 웨스트 라이딩에서 발발한 반란을 지원했다. 그러나 반란은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토머스는 반란에 가담한 죄로 체포된 뒤 1537년 6월 2일 타이번에서 참수당했다.

1528년 6월 10일 웨스트 서식스 치체스터 피트워스에서 태어난 토머스는 아버지가 처형된 뒤 형제들과 함께 친척인 토머스 템페스트 경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더럼 주 홀름 사이드로, 그다음에는 요크셔 통 홀로 보내졌다. 그의 어머니 엘레노어 하보틀은 1541년에 랭커셔 덴튼의 리처드 홀랜드 경과 재혼했고, 자녀들은 이후로 리버풀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49년 3월 14일, 토머스는 의회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계승권을 회복했다. 1551년, 그는 노섬벌랜드 공작이자 당시 잉글랜드의 실권자 존 더들리는 토머스와 그의 동생 헨리에게 연간 66파운드 13실링 4펜스의 수당을 지급했다. 또한 존 더들리는 토머스에게 노섬벌랜드 랭글리 인근에 있는 그의 아버지 토머스 퍼시의 이전 영지인 프라도를 연간 100파운드의 수입과 함께 수여했다. 1552년, 토머스 퍼시는 퍼시 가문의 영지를 좀 더 확보했다. 1553년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제인 그레이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했다가 9일 만에 무너진 후 처형당한 뒤, 새 여왕 메리 1세는 가톨릭 신자로 자란 토머스에게 퍼시 가문의 상속 재산을 되찾을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존 더들리처럼 자신에게 반기를 들까 봐 망설였지만, 잉글랜드 북부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토머스에게 영지와 작위를 돌려주기로 했다.

1554년 11월, 토머스는 웨스트모어랜드 주의 고위 기사로 의회에 입성했다. 이후 1555년까지 아버지가 맡았던 직위인 노섬벌랜드의 프라도 성 치안관으로 임명했다. 1557년 4월, 토머스는 요크셔 북부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스카버러 성을 토머스 스태퍼드 경이 이끄는 반란군으로부터 탈환했다. 또한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고, 4월 30일 퍼시 남작 작위가 회복되었으며, 5월 1일 드디어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백작 작위에 딸린 가문의 영지 일부를 반환받았다. 5월 30일, 토머스는 북부군 최고 원수 작위를 받았고, 북부 의회의 위원이 되었다. 6월 26일, 토머스는 리치먼드 집행관에 선임되었고, 7월 26일 리치먼드 삼림의 고위 관리인이자 리치먼드와 미들햄 성의 치안관으로 임명되었고, 8월 2일에 동부와 중부 스코틀랜드 변경백작의 관리인이자 베릭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노섬벌랜드 백작과 그의 동생 헨리는 스코틀랜드의 습격에 맞서 국경을 전반적으로 방어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1558년 8월, 노섬벌랜드 백작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노럼 성과 워크 성을 공격할 계획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막기 위해 베릭에 1,000명의 병사를 모집했다. 이 시기 제5대 슈루즈버리 백작 프랜시스 탈보트는 토머스가 스코틀랜드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선동물을 허락도 받지 않고 배포했으며, 증원군을 성급하게 요구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편, 노섬벌랜드 백작은 가문의 작위를 회복했지만, 조부가 가졌던 영지의 3/4만 통제할 수 있었고, 나머지 영지엔 새로운 소유주가 있었다. 그의 영지 대부분은 요크셔에 있었고, 컴벌랜드, 노섬벌랜드, 서식스에도 영지가 있었으며, 그의 연봉은 3,077파운드였다. 한편, 그의 주요 영지인 알닉과 다른 여러 영지는 약탈당했지만, 리치먼드 내 왕실 영지 일부를 통제할 수 있었고, 이는 그에게 상당한 수입을 안겨줬다.

2.2. 엘리자베스 1세 치세기의 행적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여왕이 된 후, 노섬벌랜드 백작은 새 여왕의 첫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쪽에서 소환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1559년 1월 18일, 노섬벌랜드 백작은 공식적으로 동부 변경 지방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2월, 그는 공식적으로 노럼에서 열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협상을 담당했지만, 개신교도인 동생 헨리에게 협상을 위임했다. 1559년 5월 31일, 그는 업세팅턴에서 스코틀랜드와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노섬벌랜드 백작이 가톨릭에 대한 동정심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잉글랜드 국교회를 수호할 의무가 있는 여왕 치하에서 그의 지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 동부 국경 감독관에 대한 항의가 런던으로 전달된 후, 가을에 랄프 새들러 경이 국경 지역에서 제기된 불만 사항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랄프 새들러는 노섬벌랜드 백작과 그의 형제 헨리의 지혜와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들을 해임할 것을 권고했고, 노섬벌랜드 백작이 열렬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형제 헨리보다 훨씬 더 악하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1559년 말에서 1560년 초, 노섬벌랜드 백작은 동부 국경 감독관을 사임했고, 토머스 아내의 외삼촌인 윌튼의 제13대 그레이 남작 윌리엄 그레이가 그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노섬벌랜드 백작은 후임자에게 알른윅을 거점으로 제공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또한 윌리엄 그레이는 노섬벌랜드 백작이 자신의 백성에게 은밀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랄프 새들러가 노섬벌랜드 백작의 종교에 대한 태도를 비판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토머스를 북부 잉글랜드의 영구적 감독관으로 재차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개신교로 개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 지역에 개신교가 확산하는 걸 지원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스코틀랜드 변경백작의 임무에서 풀려난 후, 의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정부가 취한 새로운 반가톨릭 조치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1563년에 회의의 약 60%에 참석했고, 1566년에는 약 75%에 참석했다. 또한, 그는 1563년 의회 개회와 1566년 폐회에서 칼을 든 의전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주로 위원회에 참석할 뿐 다른 회의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는데, 왕국의 주요 귀족들이 참석해야 하는 회의만큼은 예외적으로 참여했다.

여왕은 노섬벌랜드 백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1562년에 그에게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앨른윅 성으로 초대하여 자신과 메리가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1563년 4월 22일, 엘리자베스 1세는 그를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노섬벌랜드 백작이 왕실 법정에서 멀어진 것은 분명했고, 결국 1564년에 다른 저명한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노섬벌랜드와 요크셔의 평화 위원회에서 제외되었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요크셔에 살았던 레녹스 백작부인 마거릿 더글러스와 교류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고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정치적 음모의 핵심 인물이었다. 1561년 크리스마스에, 그는 백작 부인에게서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의 자매 중 한 명을 잉글랜드 왕위의 잠재적 상속자 중 한 명인 아서 폴과 결혼시키려는 계획이 정부의 첩보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때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는 에든버러에 있는 잉글랜드 사절 니콜라스 스록모턴 경을 찾아가서 노섬벌랜드 백작이 레녹스 백작 부인의 음모에 가담했으니 런던 탑에 갇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밀원은 노섬벌랜드 백작의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잠재적 위협으로 여겼지만, 그는 1560년대에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주요 거점은 노스 라이딩의 탑클리프 또는 이스트 라이딩의 르콘필드였지만, 그는 노섬벌랜드를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했다. 귀족들의 법정은 대체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소작농들은 백작보다는 이웃에게 의지했다. 반면에, 백작의 동생인 헨리 퍼시는 소작농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나중에 노섬벌랜드 백작이 도덕적 타락의 일환으로 사치를 부렸지만 재정적 문제는 없었다고 보고했다. 1565년, 스코틀랜드 여왕을 위해 교황 비오 4세 의 돈을 실은 배가 노섬벌랜드 해안에서 난파되었고 노섬벌랜드 백작은 그것을 압수했다. 메리는 여전히 여왕으로서 연금을 받았지만, 노섬벌랜드 백작은 그것으로 2,000파운드 이상을 벌었다. 이것은 백작이 교황이나 스코틀랜드 여왕과의 관계보다 이익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567년, 그는 컴벌랜드의 뉴랜즈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채굴된 구리와 석탄 수입을 왕실이 그에게 나눠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채굴하는 특권은 잉글랜드 왕실에서 나왔다. 1568년, 재무관이 백작에게 광산 수입을 주길 거부하면서 백작이 이 사업으로 이익을 내겠다는 희망은 결국 좌절되었다.

1568년,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폐위된 메리 여왕은 포로 생활에서 탈출한 뒤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복위를 꾀했지만, 랭사이드 전투에서 참패한 뒤 추격을 피하고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그녀는 5월에 컴벌랜드의 코커머스에 있는 노섬벌랜드 백작의 영지 근처인 워링턴에 도착했고, 그는 이 때문에 북부 의회로부터 메리 여왕의 접견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무렵, 메리 여왕은 이미 리처드 로더 경을 만났고, 그는 그녀를 칼라일로 데려갔다. 백작은 자신이 그곳의 유력한 거물이기 때문에 여왕의 보호자 지위를 넘겨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북부 의회는 그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허락한 듯 보였고, 백작은 칼라일에 도착하여 메리 여왕을 만나 그녀의 불행에 동정을 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호적인 태도는 메리 여왕을 경계하던 잉글랜드 정부의 불만을 샀고, 노섬벌랜드 백작은 칼라일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렇듯 엘리자베스 1세 정부와 여러 차례 갈등을 벌였고, 메리 여왕이 잉글랜드로 망명하자, 노섬벌랜드 백작은 반란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는 우선 메리 여왕을 구금에서 풀어주기 위한 다양한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그중 한 가지 계책에 따르면, 백작의 아내 앤 서머셋이 변장해서 포로가 된 여왕을 방문한 뒤, 그녀를 바깥으로 빼돌리고 자신은 메리 여왕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1568년 말, 노섬벌랜드 백작은 화이트 홀에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전 남편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를 암살한 혐의를 논하는 심리에 방청객으로 참석했다. 이때 그는 함께 재판을 지켜봤던 스페인의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러한 접촉은 즉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또한 백작은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저항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찾았다. 그는 니콜라스 샌더스가 쓴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쟁에 관한 저서 두 권 이상을 읽어봤기 때문에, 종교적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통치자가 교황에게 파문당하면 반란이 합법적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1569년 11월 8일, 노섬벌랜드 백작은 반란을 함께 일으킨 동지인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과 함께 교황 비오 5세에게 서신을 보내 엘리자베스 1세의 파문을 요청했다.

2.3. 잉글랜드 북부 반란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일으킨 노섬벌랜드 백작과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상이한 목표를 세웠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처남인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메리 여왕의 결혼 계획을 지지했지만, 반란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는 삼갔다. 반면에, 노섬벌랜드 백작은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되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었지만, 노퍽 공작이 메리 여왕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관심 없었고, 단지 메리 여왕이 가톨릭 신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569년 9월,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은 북부 의회의 수장인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요크에서 회동했다. 서식스 백작은 두 사람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곧 두 사람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두 사람이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대사와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11월 초, 엘리자베스 1세는 서식스 백작의 권유에 따라 두 백작에게 런던으로 소환령을 내렸지만, 두 사람은 런던에 출두하길 거부했다.

11월 14일, 노섬벌랜드 백작은 시간을 끌기 위해 여왕에게 사과하고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발송했지만, 이미 그의 부하들이 음모가 발각되었다고 여기고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서 반란을 일으켰다. 11월 15일, 요크에 주둔한 왕실군 장병들이 노섬벌랜드 백작의 집으로 가서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노섬벌랜드 백작은 빠져나온 뒤 브랜스페스에 있는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의 집으로 갔다. 두 백작은 그곳에서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고 지지자를 모집하며,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 메리를 구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두 백작과 그들의 부하들은 많은 이웃들과 합류했고, 결국 1,700명의 기병과 4,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가 갖춰졌다. 기병들은 잘 훈련된 전사들이었지만, 보병들은 대부분 규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정잡배들이었다. 11월 16일, 반란군은 더럼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서를 불태웠다. 11월 17일, 그들은 달링턴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한 후 요크를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식스 백작이 규합한 강력한 병력이 지키는 걸 확인한 뒤 요크를 공격하지 않고 지나쳤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11월 18일과 20일 사이에 리치먼드, 노샐러턴, 버러브리지를 방문하여 그곳 주민들이 반란에 가담하도록 격려했다. 11월 20일, 두 백작은 노섬벌랜드 백작부인 앤 서머셋과 함께 리폰에서 미사에 참석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분견대 하나가 하틀폴을 점령하여 유럽 대륙과의 통신로를 확보했고, 반란군은 스페인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하기를 기대했다. 11월 22일, 반란군 주력은 클리퍼드 무어에 집결했다.

왕실군은 이에 대응해 메리 여왕을 코번트리로 급히 옮겼고 엘리자베스 1세는 11월 26일 윈저 궁에서 반란 지도자들을 반역자로 엄숙하게 선포했다. 이와 동시에 조지 보우스 경은 군대를 일으켜 바너드 성에 요새를 구축했고 노섬벌랜드 백작의 동생이지만 형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헨리 퍼시 경은 존 포스터 경과 함께 국경에서 군대를 모아 반란을 진압할 준비를 했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바너드 성을 향해 진군해 그곳을 지키던 조지 보우스와 대결했다. 조지 보우스는 11일 동안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수비대가 배신하는 바람에 자유를 대가로 성을 내줘야 했고, 서식스 백작과 합류했다.

이후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클리퍼드 무어로 진군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한 데다 존 포스터와 헨리 퍼시가 강력한 국경군을 이끌고 진군하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라비로 후퇴했다. 한편, 노섬벌랜드 백작은 이와 별개로 토프클리프로 진군했고, 서식스 백작은 12월 11일 요크에서 1만 장병을 이끌고 노섬벌랜드 백작을 무찌르러 출진했으며, 클린턴 남작 에드워드 클린턴과 워릭 백작 엠브로즈 더들리가 1만 2천 명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노섬벌랜드 백작과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일단 연합한 뒤 스코틀랜드 국경으로 후퇴해 스코틀랜드 내 메리 여왕 지지자들의 지원을 바랐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12월 16일 헥삼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추종자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살길을 도모하라고 권한 뒤 스코틀랜드로 피신하여 리즈데일에 숨었다.

2.4. 체포와 처형

노섬벌랜드 백작과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리즈데일에서 암스트롱 가문에 의지했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처음에는 조크 암스트롱의 보호를 받다가, 임신한 아내 앤 서머셋을 조크에게 맡긴 뒤 할로의 헥터 암스트롱의 집으로 이사했다.[1] 그러나 1570년 1월, 암스트롱 가문은 스코틀랜드의 섭정인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현금 보상을 받고 노섬벌랜드 백작과 여러 동행자를 넘겼다. 모튼 백작은 노섬벌랜드 백작을 에든버러로 데려간 뒤 철저하게 감시했다.

노섬벌랜드 백작의 아내 앤 서머셋은 국경 지대의 여러 요새를 떠돌다가 남편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네덜란드 내 동조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1570년 8월 앤트워프로 이동했다.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그녀에게 6,000마르크를, 교황 비오 5세는 4,000크라운을 보냈다. 1572년 초, 앤 서머셋은 7,000에스쿠도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남편을 몸값으로 구해 네덜란드로 데려오려는 그녀의 시도는 돈을 이체하는 데 지연이 생기면서 실패했다. 나중에 그녀는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가 남편을 구하기 위해 모은 돈을 횡령했다며 고발했지만, 재판은 도중에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 정부에 노섬벌랜드 백작을 자신에게 인도하라고 권고했다. 노섬벌랜드 백작의 동생인 헨리 퍼시는 형을 설득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여왕에게 자비를 청하라는 서신을 보냈지만, 노섬벌랜드 백작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1572년 6월 6일, 스코틀랜드 정부는 2천 파운드를 받고 노섬벌랜드 백작을 잉글랜드에 넘겼다. 8월 15일, 노섬벌랜드 백작은 베릭으로 끌려가 허드스턴 경에게 넘겨졌다. 8월 17일, 허드스턴 경은 알른윅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을 존 포스터 경에게 인계했고, 존 포스터는 노섬벌랜드 백작을 요크로 데려갔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이미 잉글랜드 의회에 의해 반역자로 선언되었기 때문에, 재판은 없었다. 8월 22일, 그는 요크의 중앙 시장 광장에 세워진 사형대에서 참수당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은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며, 여왕의 사면을 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나는 생사불명 퍼시다!"라고 덧붙였다.

토머스의 유해는 같은 날 요크의 세인트 크룩 교회에 두 남자, 세 하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안장되었다.[2] 그의 수급은 미클게이트 바에 전시되었다. 이때 윌리엄 테사몬드라는 사람이 그의 수염 일부를 잘라 성유물로 삼았다고 한다.

2.5. 사후

토머스의 영지와 작위는 그의 남동생 헨리 퍼시에게 상속되었다. 아내인 앤 서머셋은 네덜란드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펠리페 2세에게 매달 연금을 받았고 남편의 뒤를 이어 메리 여왕을 복위시키려는 음모에 여러 번 가담했지만,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다가 토머스가 죽은지 19년만인 1591년 9월 8일 또는 9일 천연두에 걸려 나뮈르의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토머스의 딸들은 북부 반란 당시에 탑클리프에 있었고, 삼촌 헨리 퍼시가 도착했을 때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장녀 엘리자베스 퍼시는 나중에 요크셔 울리의 리처드 우크러프와 결혼했고, 차녀 루시 퍼시는 옥스퍼드셔 아인샴의 에드워드 스탠리와 결혼했다. 삼녀 제인 퍼시는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막내아들이며 해군 제독을 역임한 헨리 시모어와 결혼했다. 또 다른 딸 메리 퍼시는 1570년 6월 11일 부모가 스코틀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태어난 뒤 어머니를 따라 네덜란드로 이동했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1600년 브뤼셀에서 수녀 서원을 한 뒤 1616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승천 수녀원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앤 서머셋의 친구인 니콜라스 샌더는 앤 서머셋의 의뢰를 받고 토머스 퍼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1589년 존 브리지워터의 <가톨릭교회 논쟁>(Concertatio ecclesiae Catholicae)에 실렸다. 리처드 브리스토는 1574년에 <단편 논고>를 출간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토머스 퍼시를 "선한 백작"이자 순교자라고 칭했다. 윌리엄 앨런은 1584년에 출간된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진실하고 진솔하며 겸손한 변호>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을 순교자라고 불렀다. 1895년 5월 13일, 교황 레오 13세는 토머스를 시복했다. 그의 축일은 11월 14일이며, 헥삼과 뉴캐슬 교구에서 매년 기념되었다.

3. 가족

  • 앤 서머셋(1536 ~ 1591): 제2대 우스터 백작 헨리 서머셋의 딸.
    • 토머퍼스 퍼시(? ~ 1560): 퍼시 경. 요절.
    • 엘리자베스 퍼시(1559 ~ 1604년 이후): 요크셔 울리의 리처드 우드러프의 부인.
    • 루시 퍼시(? ~ 1601): 옥스퍼드셔 아인샴의 에드워드 스탠리의 부인.
    • 제인 퍼시(? ~ 1591년 이후):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막내아들이며 해군 제독을 역임한 헨리 시모어의 부인.
    • 메리 퍼시(1570 ~ 1642): 복되신 동정 마리아 승천 수녀원의 수녀원장.

[1] 조크 암스트롱은 나중에 앤 서머셋의 말과 돈을 훔쳤다고 전해진다.[2] 일부 기록에 따르면 한 변장한 낯선 남자도 장례식을 지켜보다가 의심을 받자 도망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