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8D6D0><colcolor=#000000> 제3대 워릭 백작 엠브로즈 더들리 Ambrose Dudley, 3rd Earl of Warwic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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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엠브로즈 더들리 (Ambrose Dudley) |
출생 | 1530년 경 |
잉글랜드 왕국 | |
사망 | 1590년 2월 21일 (향년 59~60세) |
잉글랜드 왕국 런던 베드퍼드 하우스 | |
배우자 | 앤 호우드 (1549년 결혼 / 1552년 사망) |
엘리자베스 탈보이스 (1553년 결혼 / 1563년 사망) | |
앤 러셀 (1565년 결혼) | |
자녀 | 존, 성명 미상의 딸 |
아버지 | 존 더들리 |
어머니 | 제인 길포드 |
형제 | 헨리, 토머스, 존, 헨리, 로버트, 길포드, 메리, 찰스, 캐서린, 템퍼린스, 마거릿, 캐서린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엘리자베스 1세의 신임을 받으며 위그노 전쟁에 참전했고,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진압했고, 청교도를 후원했다.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
1530년경, 미래의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와 헨리 8세의 측근인 에드워드 길포드 경의 딸 제인 길포드의 자녀 13명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존 더들리의 자녀들 중 두 딸 메리와 캐서린, 그리고 다섯 아들 헨리, 존, 로버트, 엠브로즈, 길포드만이 성인이 되었다.엠브로즈는 아버지 쪽으로 더들리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 가문은 서튼의 로랜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에 참여했던 브르타뉴 출신의 기사 알랭 더 루퍼스 추종자의 후손이었다. 14세기 초 서튼 가문이 더들리 남작으로 임명되었고, 제6대 더들리 남작 존 서튼은 백년전쟁과 장미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 후 그들은 더들리 남작을 대대로 물려받으면서 성을 '더들리(Dudley)'로 변경했다.
엠브로즈의 조부인 에드먼드 더들리는 헨리 7세의 고문이었지만, 가혹한 세금 징수 때문에 국민의 원망을 받았고, 헨리 7세가 죽고 왕위에 오른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당했다. 친할머니인 리슬 여자작 엘리자베스 그레이를 통해, 엠브로즈는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와 초대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의 후손이었다.
엠브로즈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 존 더들리는 기사였다. 1537년, 존 더들리는 잉글랜드 부제독이 되었고, 나중에는 제독이 되었으며, 1542년에 어머니의 소유였던 리슬 자작령을 확보하고 리슬 자작 칭호를 받았다. 에드워드 6세 치세 초기에 워릭 백작으로 선임되었고, 1550년 추밀원 의장이 되었으며, 1551년 호국경 에드워드 시모어를 축출한 뒤 잉글랜드의 권력자로 등극하고 노섬벌랜드 공작에 선임되었다. 한편, 엠브로즈의 어머니 제인 길포드는 앤 불린과 클레베의 앤 왕비의 시녀로 일했다.
더들리 가문은 종교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1530년대 중반부터 복음주의 집단에 속했다. 존 더들리와 제인 길포드는 인본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녀들을 키웠다. 엠브로즈의 가정교사 중에는 수학자이자 신비주의 학자인 존 디와 연설가 토머스 윌슨이 있었다. 1549년 9월, 엠브로즈는 아버지와 형제 로버트 더들리와 함께 로버트 켓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런던으로 돌아와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 법무장관 윌리엄 호우드의 딸인 앤 호우드와 결혼했다. 엠브로즈는 첫 번째 결혼에서 1545/1550년경에 태어나 1552년에 사망한 존이라는 아들을 두었으며, 1552년에 태어난 직후 사망한 딸이 있었다. 앤 호우드는 딸이 죽은 그해에 발한병에 걸려 사망했다.
1553년, 엠브로즈는 두 번째로 결혼했다. 그가 선택한 여인은 초대 카임의 탈보이스 남작 길버트 탈보이스와 엘리자베스 블런트의 딸인 엘리자베스 탈보이스로, 그와 결혼하기 전에 토머스 윔비시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지위가 단지 젠트리인 것에 불만을 품고 불화를 일으킨 끝에 남편이 죽자마자 엠브로즈와 재혼했다. 엘리자베스 탈보이스의 어머니는 헨리 8세의 정부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블런트였기에, 그는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블런트의 사생아인 리치먼드와 서머셋 공작 헨리 피츠로이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엠브로즈는 그의 형 존과 함께 궁정에서 활동적으로 살았으며, 종종 마상창시합 등 여러 행사에 참여했다.
2.2. 더들리 가문의 몰락
1553년 1월, 에드워드 6세가 중병에 걸려 상태가 위중해졌다가 나아지기를 반복했다가 6월 초순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공주가 잉글랜드 여왕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던 존 더들리는 왕을 설득해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를 왕위 계승권에서 배제하고 자기 아들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한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특허장을 발행하도록 설득했다. 1553년 6월 21일, 왕의 부름을 받고 침실에 모인 귀족 대표들은 왕위를 제인 그레이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특허장에 서명했다. 그 후 에드워드 6세가 7월 6일에 사망했고, 제인 그레이와 길포드 더들리 부부는 7월 10일 런던 탑에 엄숙하게 입장했다. 같은 날 저년, 메리 공주의 편지가 런던에 도착했는데, 그녀는 자신을 여왕이라고 칭하고 내각의 복종을 요구했다.1553년 7월 14일, 엠브로즈는 아버지와 형제 존과 함께 메리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더들리 가문의 군대가 케임브리지와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에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20일, 추밀원과 런던 시민들은 메리 1세를 여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하고 엠브로즈의 어머니 제인 길포드, 동생 길포드 더들리, 그리고 제인 그레이가 체포되었다. 결국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깨달은 존 더들리는 메리를 여왕으로 인정하기로 했지만, 많은 마을 사람과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존 더들리를 체포하기 위해 더들리 가족이 있던 킹스 칼리지를 포위했다. 엠브로즈는 아버지 존과 함께 싸움을 벌이지 않고 항복했고, 형제 존은 저항하다가 밤을 틈타 도망치려 했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제19대 아룬델 백작 헨리 피츠앨런에게 더들리 가족이 모조리 체포되어 런던으로 끌려갔고, 경비병들은 썩은 채소와 과일, 돌멩이를 던져대는 군중으로부터 존 더들리를 지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 후 더들리 가문 대다수가 런던 탑에 갇혔다. 엠브로즈의 형 존은 1553년 8월 18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아버지 존 더들리와 노샘프턴 후작 윌리엄 파와 함께 재판을 받았다. 아버지 존 더들리는 8월 21일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8월 22일 처형되었다. 엠브로즈, 길포드, 헨리, 길포드의 아내 제인, 전직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재판은 11월 13일에 리처드 모건 대법원장의 주재하에 진행되었다. 모든 피고인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남자들은 교수형에 처한 뒤 중도에 끌어내려진 후 사지가 절단되는 형벌을 받을 예정이었고, 제인 그레이는 화형 또는 참수형에 처할 예정이었다.
이후 런던 탑에 그대로 갇혀 지내던 더들리 형제들은 토머스 와이엇의 난으로 처지가 더욱 곤란해졌다. 1554년 2월 12일, 길포드 더들리와 제인 그레이 부부가 타워 힐에서 잇달아 참수되었다. 엠브로즈와 그의 세 형제는 감옥에 갇혀 지냈다. 형제는 감방 벽에 이름과 자기 문장을 새겼다. 1554년 하반기에 앰브로즈의 어머니 제인 길포드와 처남 헨리 시드니는 메리 1세의 배우자인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의 일행에게 접촉해 메리 1세가 살아남은 더들리 가문의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설득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그해 10월, 메리 1세는 제인 길포드와 헨리 시드니, 그리고 스페인 인사들의 간청에 따라 엠브로즈의 형제 존, 로버트, 헨리를 석방하기로 했다. 세 사람은 켄트에 있는 헨리 시드니의 집으로 이송되었는데, 존은 석방 직후 사망했다. 여전히 런던 탑에 갇혀 지내던 엠브로즈는 존의 사망 직후 더들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1554년 12월 또는 1555년 1월, 엠브로즈는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탈보이스의 간청을 받아들인 펠리페 왕자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엠브로즈는 석방 직후 형제 로버트와 함께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펠리페 왕자가 조직한 여러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한편, 더들리 가문의 재산은 1553년 재판 중에 몰수되었는데, 1554년 메리 1세는 엠브로즈의 재산 일부를 그의 어머니 제인 길포드에게 돌려줬고, 그녀에게 첼시에 있는 그녀의 남편 집을 사용하는 걸 허락했다. 제인 길포드는 1555년 1월 15일 또는 22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엠브로즈 본인은 모든 재산권을 박탈당했지만, 메리 1세는 그가 어머니의 상속 재산을 받는 걸 허락했다. 1555년 후반, 더들리 형제는 런던에서 떠나 자기 영지로 돌아가야 했고, 더들리 가문의 먼 친척인 헨리 더들리가 프랑스로 망명한 뒤 메리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공공연히 선동한 후 프랑스 대사 앙투안 드 노아유는 메리 1세 정부가 도주 중인 "노섬벌랜드 공작의 아이들"을 체포하려 한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557년 초, 상황이 바뀌었다. 더들리 형제는 이제 스페인 국왕이 된 펠리페 2세를 위해 싸울 개인 부대를 받았다. 엠브로즈, 로버트, 헨리 3형제는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스페인군과 함께 프랑스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고, 헨리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제 엠브로즈의 유일한 살아있는 형제가 된 로버트는 왕실에 대한 봉사로 1558년 의회법에 따라 권리를 회복했다.
2.3. 엘리자베스 1세 치세기
1558년 11월 메리 1세가 사망했고, 잉글랜드 국교회 성향인 엘리자베스 1세가 새 여왕으로 등극했다. 당시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살아남은 자식들인 엠브로즈, 로버트, 메리, 캐서린 모두 새 여왕의 총애를 받았다. 엠브로즈는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었고, 메리는 여왕의 내실에서 '무급'으로 근무할 수 있는 직책을 받았으며, 로버트는 기병대장이 되었고, 자녀가 없던 캐서린은 미들랜드와 요크셔의 상류층과 귀족 출신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전념했다.1561년 1월 25일과 26일에 엠브로즈의 부친과 형들이 소유했던 백작령이 부활했고, 한때 친할머니 가문에 속했던 리슬 자작 작위도 회복했다. 그는 제3대 워릭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이듬해에 1553년 몰수당한 대부분의 영지를 되찾았다. 엠브로즈와 로버트는 그들의 아버지처럼 중세 워릭 백작의 문장에 포함된 주둥이를 덮은 곰과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자기들 문장에 채택했다.
1562년 프랑스에서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 성향 고문들로부터 위그노를 지원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르아브르에서 가톨릭 지도자 제2대 기즈 공작 로렌의 프랑수아 1세에게 포위당한 위그노들은 잉글랜드에 도시를 넘겨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여왕은 1558년에 잃어버린 칼레를 르아브르와 교환할 계획을 세우고, 엠브로즈에게 6천 병력을 줘서 르아브르에 파견했다. 그의 군대는 1562년 10월 말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1563년 3월, 프랑스에 평화 협약이 제안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르아브르를 칼레와 교환하는 걸 확정하려 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엠브로즈는 프랑스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여러 성벽이 허물어지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분전했지만, 전염병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자 여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는 1563년 7월 엠브로즈가 도시를 넘기는 대가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게 했다. 엠브로즈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원정은 실패했지만, 엠브로즈는 사기를 유지하고 지역 민간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훌륭한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르아브르를 지킨 것에 대한 보상으로 루틴에 속한 웨일스 내 영주권을 받았고, 프랑스에 있는 동안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엠브로즈가 프랑스에서 고생하던 1563년, 아내 엘리자베스 탈보이스가 사망했다. 1565년, 그는 세 번째 결혼했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앤 러셀로, 제2대 베드퍼드 백작 프랜시스 러셀의 장녀였다. 앤은 모계 쪽으로 헨리 7세의 외할머니인 블랫소의 마거릿 뷰챔프의 증손녀였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이종사촌이기도 했다. 결혼식 행사는 1565년 11월 11일 화이트홀 궁전의 채플 로얄에서 열렸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 가장 큰 축하 행사 중 하나인 이 결혼식에는 수많은 토너먼트와 연회가 수반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연인이 된 로버트 더들리가 주선한 이 결혼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저명한 두 청교도 귀족 가문을 하나로 묶었다.
1569년 11월, 잉글랜드 북부 반란이 발발했다. 반란군은 잉글랜드에 억류되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고 가톨릭을 잉글랜드의 국교로 복원시키려고 했다. 엠브로즈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사령관 중 한 명이 되었지만 반란은 금세 가라앉았다. 얼마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한 엠브로즈는 엘리자베스 1세의 허락을 받아 미들랜드로 갔다. 1570년 1월, 케닐워스에서 회복 중인 형제를 만난 로버트 더들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아래의 서신을 보냈다.
"엠브로즈는 악천후에도 매일 말을 탑니다. 폐하의 은혜 덕분에 고통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중략) 물론 그는 매우 피곤하지만, 제 생각에는 말을 타는 게 그의 몸에 더 좋을 것입니다."
엠브로즈는 군수 총감으로서 포병, 탄약과 소총의 저장, 시험 포격 및 분배의 중앙 관리를 담당하는 중요한 정부 부서를 감독했다. 엠브로즈는 이렇게 제작한 화약 무기를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스페인군에 맞서 싸우던 오라녀 공 빌럼 1세에게 제공했고, 빌럼 1세는 잉글랜드 화약 무기의 성능이 매우 우수하다고 칭찬했다. 1576년, 스페인 대사는 대포를 네덜란드 반군에 제공하는 것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엠브로즈는 1573년 추밀원에 임명되었고, 1580년대까지 정기적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배빙턴 음모가 발각되면서 스코틀랜드 전 여왕 메리의 반역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엠브로즈는 위원을 맡았다. 메리 여왕은 앰브로즈가 그의 동생 로버트 더들리에게 중재를 맡아줄 것을 요청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메리는 결국 처형되었다.
2.4. 개인 생활
엠브로즈는 온건적인 청교도였다. 1567년, 그는 형제 로버트와 함께 지역 지주들과 연합하여 "워릭셔의 복음 설교자"를 위한 컨소시엄을 설립했다. 또한 반란을 선동한다는 비난을 받는 책을 출판한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몰린 설교자 존 필드를 옹호했다. 존 필드가 투옥되자, 엠브로즈는 로버트와 함깨 설교자를 런던 시의원으로 전근시키고 석방을 위한 기금을 기부했다. 엠브로즈는 형제 로버트와 마찬가지로 탐험과 사략선에 자금을 지원했다. 1576~78년 북서항로 탐험의 주요 후원자였지만, 50파운드라는 적은 금액만을 기부했다. 또한 그는 로버트 더들리와 함께 1582년 에드워드 펜튼의 세계 일주 탐험을 지원했다.엠브로즈는 1557년부터 유일한 형제로 남은 로버트와 무척 가까웠다. 그는 로버트에 대해 "나보다 그의 일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곤 했고, 로버트는 "형제를 자신처럼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로버트와 연인 관계였던 엘리자베스 1세는 엠브로즈가 로버트만큼 우아하거나 잘생기지 않았고 뚱뚱하다고 농담하는 것을 좋아했다. 엠브로즈는 런던에 자기 거주지가 없었고, 종종 로버트 소유의 레스터 하우스의 호화로운 아파트에 머물렀는데, 거기에는 그의 침실, 옷장, 식당이 별도로 마련되었다.
1588년 9월 로버트가 적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을 때, 그는 모든 재산을 엠브로즈에게 물려줬다. 또한 엠브로즈는 로버트가 낳은 사생아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는데, 이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로버트 더들리로 명명되었으며, 대부를 맡은 엠브로즈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이 인물은 1594년 서인도 제도 탐험을 이끌었고 세계 최초의 해상 지도책인 <델아르카노 델 마레>(Dell'Arcano del Mare)를 출간하는 등, 탁월한 항해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엠브로즈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이는 일찍 죽었고, 뒤이어 결혼한 두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 엠브로즈는 1563년 군 복무 중에 입은 다리 부상의 여파로 평생 고통받았다. 1590년 1월 말 괴저로 인해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2월 21일 세 번째 아내 앤 러셀의 런던 자택인 베드퍼드 하우스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기 이틀 전에 방문한 외교관 에드워드 스태퍼드는 백작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백작 부인은 "불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엠브로즈는 7천 파운드의 빚을 남겼기 때문에, 앤 러셀은 엠브로즈가 형제 로버트로부터 물려받은 치크 성을 사촌인 존 세인트 존에게 6천 파운드에 팔아야 했다. 또한 앤은 1602년에 스트랫퍼드어폰 에이번에 있는 별장과 장원을 팔아야 했는데, 이를 구매한 이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