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대함대의 스페인 원정 영어: English Armada 스페인어: La Invencible Ingles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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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
1589년 4월~7월 | ||
장소 | ||
라코루냐, 리스본, 대서양, 칸타브리아 해 | ||
원인 | ||
포르투갈 왕국을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고,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스페인 본토로 보물들을 보내는 해로를 차단하며, 스페인 함대 재건을 저지하려는 잉글랜드 해군의 공세. |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안토니우 | ||
병력 | ||
선박 180척 이상, 선원 및 병사 27,667명 | 갤리온 4척, 알려지지 않은 무장상선, 민병대 15,000명. | |
피해 | ||
40여 척 포획, 침몰, 또는 난파 11,000~18,000명 전사, 부상, 또는 병사. | 1,000여 명 사상, 갤리온 3척 파괴, 무장 상선 13척 파괴. | |
결과 | ||
스페인군의 대승. | ||
영향 | ||
잉글랜드 경제 파탄, 스페인 제국의 반격. |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89년 4월~7월, 스페인 제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려는 잉글랜드 대함대의 공세. '잉글리시 아르마다'(English Armada)라는 명칭으로도 일컬어지는 이 원정은 지난 해 스페인 대함대의 실패와 유사한 규모의 실패작으로 끝났고, 전쟁 초반 우세를 점했던 잉글랜드 왕국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2. 배경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 제국이 원정 실패로 약해진 틈을 타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평화 협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 위해 공세를 벌이려 했다. 잉글랜드 내무 장관 윌리엄 세실은 여왕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을 향한 원정을 본격적으로 기획했다. 그는 이번 원정대의 주요 목표를 아래의 3가지로 정했다.1. 스페인 북부 항구에서 수리 중인 손상된 스페인 함대를 파괴한다.
2. 리스본에 상륙하여 스페인 제국에 병합된 포르투갈 왕국을 부활하고, 아소르스 제도에 영구 기지를 건설한다.
3.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카디스로 돌아오는 스페인 보물선을 탈취한다.
2. 리스본에 상륙하여 스페인 제국에 병합된 포르투갈 왕국을 부활하고, 아소르스 제도에 영구 기지를 건설한다.
3.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카디스로 돌아오는 스페인 보물선을 탈취한다.
이중 엘리자베스 1세가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은 것은 포르투갈 왕국을 부활하는 것이었다. 당시엔 브라질 식민지, 동인도 제도, 인도와 중국의 무역소를 포함한 포르투갈 본토와 식민지는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한 펠리페 2세의 지시로 잉글랜드 상선에 대한 무역 거래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그녀는 잉글랜드에 망명 중이던 아비스 왕조의 마지막 상속인이자 왕위 요구자인 크라토 수도원장 안토니우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옹립하고, 그를 통해 이러한 금수 조치를 깨고 펠리페 2세에게 압력을 가하고 싶었다.
하지만 원정의 방식을 놓고 여왕의 측근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윌리엄 세실은 즉시 소함대를 출범해 스페인이 미처 대비하기 전에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페인 함대의 침략 시도를 막은 직후, 잉글랜드 함대는 완전히 지쳤고, 왕실 금고는 비어 있었기에 이는 불가능했다. 1587년 카디스 습격에서 재미를 톡톡히 봤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시일을 들여서 대규모 함대를 제대로 준비한 뒤 스페인 항구 도시들과 아소르스 제도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왕은 이에 동의했다. 이 외에도 여러 인사들이 별도의 계획을 세웠고, 각각의 목표에 모순이 있었다. 이에 여왕은 스페인 북부 해안을 따라 라코루냐, 산세바스티안, 산탄데르 항구에 정박한 스페인 대서양 함대를 파괴하는 걸 가장 먼저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겐 당장 원정에 투입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원정군 사령관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존 노리스는 자본금 약 8만 파운드를 주식회사 형태로 모집했다. 이 중 4분의 1은 여왕에게서, 8분의 1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조달했고, 나머지는 다양한 귀족, 상인, 길드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재무는 제임스 해일스 경이 맡았는데, 그는 원정을 마친 후 귀국하던 중 사망했다. 물류 문제와 악천후에 대한 우려로 함대의 출발이 지연되었고, 항구에서 기다리는 동안 혼란이 점점 심해졌다. 네덜란드는 약속한 대로 물자를 공급하지 못했고, 식량의 1/3은 이미 소모되었으며, 스페인에 한 방 제대로 먹이겠다는 의욕을 품은 자원병들이 속출하면서 병력은 1만 명에서 2만 명 이상 불어났다. 또한 전년도 스페인 대함대에는 공성포와 기병이 충분히 갖춰졌지만, 잉글랜드 함대에는 매우 부실했고, 주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21세의 에식스 백작이며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인 로버트 데버루는 이번 원정이 무척 흥미진진하고 수익성 있는 모험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원정에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가 원정에 참여했다가 잘못될 것을 우려해 원정 참여를 금지했지만, 에식스 백작은 원정에 참여한 전함인 '스위프트슈어' 호에 숨었다. 여왕이 프랜시스 놀리스를 플리머스항으로 파견해 에식스 백작의 행방을 물었지만, 드레이크와 노리스는 발설하지 않았다. 이윽고 원정군이 1589년 4월 8일에 출항했을 때, 스위프트슈어 호는 강풍에 밀려 팔머스로 밀려났다. 잉글랜드 함대는 스위프트슈어 호 없이 그대로 항해했고, 스위프트슈어 호는 이틀 후에 출항하여 나머지 함대와 만나기 위해 포르투갈 해안으로 직행했다.
3. 경과
3.1. 라코루냐 공방전
선박 180척 이상, 선원과 병사 27,667명에 달하는 잉글랜드 대함대의 첫 번째 목표는 지난해 원정 실패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간 잔여 함대를 섬멸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함대 지휘관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존 노리스에게 대다수의 갤리온이 정박한 산탄데르를 먼저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선장과 투자자들은 리스본에 상륙해 포르투갈 왕국을 부활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기를 희망했다.그러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풍향이 불리하게 불며, 자칫 산탄데르로 진군했다가 비스케이만에서 스페인군에 의해 갇힐 위험이 너무 크다며 여왕의 뜻을 받들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산탄데르를 우회하고 갈리시아 해안의 소규모 도시인 라코루냐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라코루냐를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도시로 예상하고, 그곳을 장악해서 전리품을 확보하고 장기간의 전투를 위한 보급품을 모으려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잉글랜드 대함대가 비스케이만을 건너는 동안 3,000명의 병력을 태운 배 25척이 도중에 이탈했는데, 여기에는 잉글랜드로 돌아가거나 라로셸에 정박할 이유를 찾은 많은 네덜란드인이 포함되었다. 원정 초반부터 이탈자가 대거 발생하는 건 불길한 징조였지만, 함대 지휘부는 개의치 않고 원정을 밀어붙였다.
당시 라코루냐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그곳엔 수리 중인 대형 갤리온 1척(대포 50문을 갖춘 산 후안 호), 갤리선 2척(각각 대포 20문을 갖춘 산 디아나와 산 프린세사), 1,300톤 카락선 '레가조나' 호, 소형 선박 3척(대포 27문을 갖춘 카락선 산 바르톨로메, 대포 18문을 갖춘 산손, 그리고 대포 21문을 갖춘 소형 갤리온 산 베르나도)을 보유했다. 세라보 후작 후안 파체코 데 톨레도, 라코루냐 주지사 마르케스 데 세랄보, 그리고 수비대 사령관 아라로 트론코소는 민병대, 이달고(Hidalgo, 스페인 귀족),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정규병을 합쳐 총 1,200명을 지휘했다. 이 병사 중 대부분은 군사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다. 다만 잉글랜드 원정에서 목숨을 건져 돌아온 후 이 도시에서 휴식을 취하던 테르시오 부대 7개 중대가 있었다. 이 도시에는 13세기에 건설된 중세 성벽도 있었다.
5월 4일, 잉글랜드 함대가 코루냐 만에 상륙했다. 존 노리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육군이 도시를 공격해 하부 도시를 손쉽게 점령한 뒤 파스카데리아( Pescadería) 마을을 약탈하고 많은 민간인을 포함한 약 500명의 스페인인을 사살했으며, 그곳의 와인 저장고와 어장을 약탈했다. 또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갤리온 레가조나, 산 바르톨로메, 항구에 있는 상선 13척을 파괴했다. 스페인군은 항해에 적합하지 않은 산 후안을 불태우면서, 잉글랜드 함대와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대포를 상부 도시로 옮겼다. 그 후 2주간 바람이 서쪽으로 불었고, 잉글랜드군은 라 코루냐의 요새화된 상부 도시를 포위한 채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아르투로 페르난데스 세르샤 작, <잉글랜드인을 상대로 돌격하는 마리아 피타>, 1889년.
2주 후, 존 노리스는 상부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뚫기 위해 3차례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성벽 뒤에 배치된 수비대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병사 1,000명이 전사했다. 이때 성벽에 틈을 내고 시가지로 진압한 잉글랜드 장병들이 그레고리오 데 로카문데라는 병사를 사살했는데, 이 병사의 아내인 마리아 피타가 분노해, "명예를 가진 자는 나를 따르라!(Quen teña honra, que me siga!)"라고 외치며 잉글랜드 장병들을 향해 달려들어, 성벽 아래에서 병사들에게 잔소리하던 중이던 한 소위[1]를 창으로 찔러 사살한 뒤 군기를 탈취했다. 이에 전의가 급격히 오른 민병대가 달려들어 시가지로 진입한 잉글랜드 장병들을 몰아붙였고, 결국 그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마리아 피타는 훗날 펠리페 2세로부터 명예 소위에 선임되었으며, 기존 월급에 5에스쿠도를 더한 연금을 받았고,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노새를 수출할 수 있는 허가도 받았다. 현재 라코루나 시청에 마리아 피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또한 잡화점을 운영하는 이네스 드 벤이라는 여인도 남편 세바스티안 페르난데스가 전사한 뒤 성벽 재건에 열심히 참여했고, 군대에 보급품을 열심히 제공하다가 적의 총격을 두 번 받아서 한 발은 머리에, 한 발은 다리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다. 그녀는 마리아 피타와는 달리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사망했지만, 훗날 그녀가 800두카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납, 화약, 밧줄을 기부한 사실이 갈리시아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되면서, 그녀의 이름이 뒤늦게 알려졌고, 라코루냐 시의회는 쿠라몬테스 마을의 한 거리를 이네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기로 결의했다.
이렇듯 코루냐 민병대와 시민들의 맹렬한 저항으로, 잉글랜드군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라코루냐를 쉽사리 접수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 증원군이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군은 도시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5월 18일 철수했다. 라코루냐 공방전에서 1,000명의 스페인인이 죽었고, 잉글랜드 병사 1,300명이 죽었으며, 선박 2~3척과 상륙정 4척이 산 안톤 요새와 스페인 함선에서 가져온 대포 사격을 받고 침몰했다. 그렇게 소규모 도시였던 라코루냐를 접수하지 못하고 퇴각한 뒤, 병사 1,000명을 태운 소형 선박 10척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잉글랜드로 향했다. 하지만 지휘부는 기존 계획을 계속 진행하기로 결의하고 리스본으로 향했다.
3.2. 리스본 공방전
1589년 5월 26일, 잉글랜드 대함대는 포르투갈 도시 페니슈에 정박하고 존 노리스가 지휘하는 육군을 상륙했다. 그 과정에서 스페인군의 저항은 미미했지만, 파도가 몹시 거칠어서 바지선 14척과 병사 80명이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다. 잉글랜드 대함대와 함께했던 안토니우가 존 노리스와 함께 육지에 내려서 현지인들과 대면하자, 안토니우의 추종자들이 지지하던 페니슈 요새는 즉시 귀순했다. 그 직후, 존 노리스는 1만 병사를 이끌고 리스본을 향해 진군했고, 이와 동시에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함대도 해안가를 따라 리스본으로 항해했다. 이때 세운 계획에 따르면, 드레이크가 타구스 강어귀를 뚫고 바다에서 리스본을 공격하는 동안, 존 노리스는 행군하면서 안토니우의 추종자와 보급품을 모은 뒤 육지에서 리스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꼬였다. 잉글랜드군은 행군하는 도중에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의 끊임없는 유격전으로 인해 사상자 수백 명이 발생했고, 항해 중에 발생한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병사가 죽어 나갔다. 게다가 현지 당국은 페니슈와 리스본 사이의 모든 도시에서 잉글랜드군이 사용할 수 있는 자재와 보급품을 모조리 없애거나 가져가는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또한 잉글랜드 수뇌부가 기대했던 포르투갈인들의 호응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에 가세한 포르투갈인은 고작 300명뿐이었고, 대다수 포르투갈인은 잉글랜드인들을 어선과 상선을 공격하고 약탈을 일삼는 이단이라고 간주하고 무시했다.
당시 잉글랜드군이 보유한 말은 44마리밖에 없어서, 군인들이 대부분의 물자를 직접 운반해야 했다. 그렇게 75km를 힘겹게 이동해 리스본에 도착했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화약과 탄약이 부족했고, 말과 대포도 터무니없이 부족했으며, 식량도 바닥났다. 그래도 어떻게든 도착했으니 리스본 주민들이 스페인에 맞서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자는 안토니우의 대의에 호응하여 성문을 열어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푸엔테스 백작 페드로 엔리케스 데 아세베도의 지휘하에 리스본을 수비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병사 7,000명은 항복하라는 권고를 거부하고 수비에 최선을 다했다. 여기에 마티아스 데 아부케르케가 지휘하는 범선 40척이 항구에 정박해 바다에서 쳐들어올 잉글랜드 함대에 대적할 준비를 했고, 레판토 해전의 영웅이었던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의 동생이자 제2대 산타크루스 후작인 알론소 데 바잔이 지휘하는 포르투갈 갤리선 18척도 타구스 강에 배치되어 잉글랜드 육군을 포격할 준비를 갖췄다.
산타크루스 후작의 갤리선은 타구스 강둑에서 리스본에 접근하는 잉글랜드 육군을 향해 대포를 쏘고 총격을 가해 큰 피해를 줬다. 잉글랜드군은 산타 카탈리나 수도원으로 피신했지만, 거기서도 포격받자 철수해야 했다. 다음 날 밤, 존 노리스의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갤리선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어둠 속에 진을 쳤다. 짙은 어둠이 껴서 적의 위치를 분별할 수 없게 되자, 산타크루스 후작은 보트 여러 척을 물에 띄워 모의 상륙을 명령했고, 부하들에게 가능한 한 큰 소리를 내고 공중에서 사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잉글랜드 진영에서 혼란이 발생했고, 장병들은 적을 몰아내려고 마구 사격했다. 스페인 갤리선은 어둠 속에서 잉글랜드군이 피운 횃불과 잉글랜드 총구에서 발생한 불을 보고, 즉시 그쪽으로 집중 포격을 가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 육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입었다.
다음 날 아침, 존 노리스는 알칸타라 지구를 통해 도시를 공격하려 했지만, 갤리선은 다시 잉글랜드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잉글랜드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엄폐물을 찾아 후퇴했다. 일부 적병들이 산타 카탈리나 수도원에 다시 숨자, 한 갤리선이 그 수도원에 다시 사격을 가했다. 참호를 파고 있던 잉글랜드 장병들은 급히 달아났지만, 많은 이가 도중에 전사했다. 적군이 이렇게 지리멸렬해지자, 산타크루스 후작은 병사 300명을 상륙시켜 잉글랜드군을 육지에서 공격했다.
이렇듯 잉글랜드 육군이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동안,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40척에 달하는 적선이 항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걸 보고 공격하지 않았다. 드레이크는 선원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승리가 확실해질 때 전투에 참여해서 전리품을 챙길 적절한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렇게 잉글랜드 해군이 가만히 있는 동안, 산타 가데아 백작 마르틴 데 파딜라가 지휘하는 스페인 함대 소속 갤리선 9척이 6월 11일 리스본에 입성하여 증원군 1,000명을 수송했다. 이제는 리스본을 공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존 노리스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은 적군이 철수하자 즉시 추격했다.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연합군은 뒤에 남겨진 수많은 포로를 잡았고, 다량의 잉글랜드군 보급품을 탈취했다. 또한 그들은 안토니우의 비밀문서도 입수했는데, 그 안에는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는 수많은 음모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3.3. 대서양에서의 해전과 아소르스 제도
존 노리스와 안토니우가 막대한 손실을 보고 돌아온 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함대를 이끌고 리스본을 떠나 대서양으로 가기로 했다. 산타 가데아 백작 마르틴 데 파딜라는 즉시 갤리선 7척을 이끌고 6월 20일에 그들을 추격했다. 그는 1567년 시칠리아 갤리선 함대 지휘권을 맡은 이래 20년이 넘도록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 알제리, 잉글랜드 해적에 맞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풍부한 전투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갤리선이 잉글랜드 해군이 보유한 큰 범선에 정면 대결하면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으면 범선이 사실상 움직이지 못하고 해류의 변화에 좌우되지만, 갤리선은 노의 추진력을 이용해 범선의 선미 쪽으로 기동한 뒤 제한된 화력으로 적 함선을 세로로 관통하도록 해, 적 함선의 현 측에 있는 포탄에 노출되지 않고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파딜라의 갤리선 7척은 잉글랜드 함대와 거리를 두고 추격하면서, 바람이 불지 않는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드레이크가 1587년에 그랬던 것처럼 카디스를 또다시 습격하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밤에 적 함대 중앙으로 들어가서 잉글랜드 출신 가톨릭 선장을 스키프에 태워서 잉글랜드 선원들과 접촉해 그들의 계획을 알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선장은 잉글랜드 선원들이 아프고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것만 파악하고 돌아왔다. 이후 바람이 매우 약하게 불어서 범선의 기동이 어려워지자, 파딜라는 본격적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함선들에 잉글랜드 함선의 선미로 이동한 뒤 연이어 포격을 가하고, 교대로 대포를 재장전하도록 했다. 또한 병사들은 머스킷 총으로 잉글랜드 함선의 갑판을 맹렬히 공격했다.
스페인 해군이 고작 갤리선 7척으로 공격을 퍼부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잉글랜드 해군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300~500톤급 함선 4척, 60톤급 보트 1척, 노를 젓는 보트 1척이 나포되었고, 잉글랜드군 570명이 전사하고 13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포로 중에는 선장 3명, 기관장 1명, 선원 여러 명이 포함되었다. 스페인 측 사상자는 전사자 2명, 부상자 10명에 그쳤다.
그러나 다시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드레이크는 기함을 조종하여 다른 대형 함선 4척을 이끌고 리스본으로 전리품을 견인하던 스페인 갤리선 쪽으로 향했다. 이에 파딜라는 전리품을 처분하기로 하고, 대형 함선들을 불태우고 소형 함선들을 포격으로 격침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스페인 갤리선들은 적의 대형 범선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후퇴했고, 드레이크는 바람이 충분히 불지 않아서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오후 5시경, 강풍이 불기 시작하자 잉글랜드군은 비로소 돛을 올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이후 카디스가 공격당할 것을 우려한 파딜라는 갤리선 3척이 추가로 합류했지만,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카디스로 가서 방어를 준비하기로 했다. 한편, 산타크루스 후작은 별도로 함대를 이끌고 적을 추격해 며칠 동안 낙오된 잉글랜드 함선 3척을 나포했다.
이렇듯 원정이 실패를 거듭했지만, 드레이크는 이대로 잉글랜드로 돌아가면 여왕의 분노에 직면할 것이 두려워서 아소르스 제도라도 접수하기로 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5일 동안 항해하면서, 잉글랜드 장병들은 시신 수백 구를 바다에 던져야 했다. 6월 29일, 133척의 선박이 시에스 섬의 별다른 방어 시설이 없는 작은 어촌 마을인 비고 인근 해안가에 정박했다. 그러나 상륙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스페인군은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물자를 파기했으며, 마을 주변에 매복했다.
6월 30일 새벽, 함대 내에서 전투가 가능한 병사 2,000명이 세 곳에서 상륙한 뒤 비고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마을이 완전히 텅 비어 있자, 그들은 분노하여 교회를 방화하고 성상을 파괴했으며,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후 식량과 전리품을 찾아 사방으로 무질서하게 움직였고, 장병 수백 명이 매복에 걸려 사살되었다. 7월 1일, 루이스 사르미엔토가 지휘하는 상당한 규모의 스페인군이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불시에 공격해 수백 명을 사살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드레이크는 부하들에게 다시 승선하라고 명령한 뒤, 전령을 적장에게 보내 포로를 돌려보낸다면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고 섬을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루이스 사르미엔토는 비고 마을이 초토화된 것에 분노해, 잉글랜드 함대가 볼 수 있는 곳에서 교수대를 설치한 후 포로들을 모조리 교수형에 처했으며, 드레이크에게 "모조리 교수형에 처할 테니 잉글랜드군을 더 보내봐라."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에 기가 죽어버린 드레이크는 7월 2일 아침 함대 대부분과 함께 잉글랜드로 철수했다. 그러나 폭풍이 닥치기 전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많은 선박이 이리저리 밀려났다. 2척이 그날 아소르스 제도의 스페인 함대에 나포되었고, 한 척은 좌초되었으며, 2척은 캉구스 인근 암초에 부딪쳐 난파되었다. 7월 3일, 드레이크는 피니스테레로 향하다가 강풍에 시달렸다. 한편, 존 노리스는 폭풍을 피해 30척만 거느린 채 시에스 섬에 가만히 정박하고 있다가 폭풍이 잦아든 7월 4일에 좌초된 배에서 대포를 꺼낸 뒤 불을 지른 후 시에스 섬을 비로소 떠났다.
3.4. 암울한 귀환
7월 5일, 산탄데르의 자브라 함대 지휘관 디에고 아람부루는 적 함대가 소규모 집단으로 뿔뿔이 흩어진 채 칸타브리아 해를 건너 잉글랜드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즉시 출진해 잉글랜드 함선 2척을 더 나포하여 산탄데르로 견인했다. 이후 잉글랜드 함대는 대열조차 갖추지 못하고 각 선박이 알아서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하는 지경으로 전락했고, 폭풍에 휘말려 침몰하는 배가 속출했다.토머스 페너 선장이 지휘하는 500톤급 드레드노트 호는 선원 300명을 태우고 출발했지만, 플리머스항으로 돌아왔을 때 고작 18명만 일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토머스 페너를 포함해 죽거나 질병에 시달렸다. 여기에 병사 50명 중 32~33명도 죽거나 질병에 걸려 골골거렸다. 드레이크의 기함인 리벤지 호는 폭풍 피해로 누수가 생겨서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플리머스로 돌아가던 중 거의 침몰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존 노리스는 7월 13일 플리머스에 상륙하자마자 에식스 백작과 앤서니 애슐리와 공모하여 재난의 규모를 은폐하고, 심지어는 원정이 성공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 다음 날, 노리스는 프랜시스 월싱엄에게 서신을 보내 실패를 인정하고 월싱엄을 회유하여 공모자로 만들었다. 7월 17일, 엘리자베스 1세는 원정이 성공했다는 위조된 보고서를 보고 답장을 보내 원정의 "행복한 성공"에 기쁨을 표했다. 뒤이어 익명의 참가자가 쓴 편지 형태로 자세한 설명을 담은 선전물이 배포되었다.
여왕의 신하들은 원정이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귀환한 선박들이 별다른 점검 없이 정박하도록 했다. 그 결과 선원들이 별다른 검진을 받지 않고 육지에 내리면서, 플리머스 시에 전염병이 확산했고, 처음 몇 주간 플리머스 시민 400명이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윌리엄 세실은 생존자들이 런던으로 접근하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비참한 몰골로 원정에서 귀환한 선원들을 통해 원정의 실패가 분명하게 드러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진상 조사 위원회를 수립했다. 그녀는 이를 통해 재난의 규모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수의 측근이 진상을 숨기는 데 관여했다는 걸 알게 되자 이들을 처벌하면 왕권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는 걸 깨닫고 누구도 처벌하지 않기로 했고, 원정이 성공했다는 공식 선언서를 수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재난을 초래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궁정에서 사실상 추방되어 플리머스의 해안 방어를 지휘하는 임무만 맡았다. 그 후 그는 6년간 잠자코 지내다가 1595년 누에바에스파냐에 대한 원정대 지휘를 맡고 출진했다가 원정 도중에 사망했다.
4. 결과
1589년 잉글랜드 대함대의 스페인 침공은 영국 역사상 가장 큰 군사적 재앙 중 하나였다. 원정의 목표 중 어느 것도 달성되지 않았고, 노획한 전리품은 3만 파운드도 되지 않아서, 원정을 단행할 때 들어간 8만 파운드를 만회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줄 수 없어서 5실링이라는 보잘것없는 금액만 줬다. 이에 분노한 병사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잉글랜드 당국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반란 주모자 7명을 교수형에 처했다.잉글랜드 대함대의 손실 범위에 대한 매우 다양한 설명으로 인해, 선박과 인원 피해의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기록에 따르면 돌아와서 급여를 요구한 3,722명 중 1,042명만이 5실링밖에 안 되는 급여를 받았고, 과부 수천 명 중 119명만이 남편의 급여를 받았다. 애초 원정에 동원된 병사가 27,667명이었는데 3,722명만 돌아왔다면, 거의 24,000명이 사망하거나 탈영했거나, 다른 이유로 실종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다양한 동시대 연대기 작가들은 사망자 수를 11,000명에서 18,000명 이상까지 다양하게 기재했다. 반면 생존자 수는 3,000명에서 5,000명 사이를 오갔다. 사라진 함선 수도 중구난방으로 알려졌는데,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40여 척에 달하는 선박이 침몰, 나포, 좌초, 또는 기타 방법으로 실종되었다고 본다. 이 중 14척은 스페인 해군의 공격으로 직접 손실되었다.
대규모 원정의 실패는 엘리자베스 1세의 오랜 통치 기간에 신중하게 회복되었던 잉글랜드 재정의 고갈과 경제 악화를 초래했으며, 항해술이 뛰어난 선원들이 대거 죽어 나갔기 때문에 배를 몰 인원을 새로 구하는 데에도 애를 먹어야 했다. 그 사이, 펠리페 2세는 성공적으로 해군을 회복하고 1590년 함선 37척에 병사 6,420명을 태워 브르타뉴로 보내 블라베 강에 작전 기지를 세우고 잉글랜드 함대를 저지하게 했다. 이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매년 많은 수의 군인을 동원했지만, 결국 누에바에스파냐와 스페인 본토를 오가는 보물선들을 방해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해상 패권을 계속 유지한 채 두 국가를 향한 전쟁을 꿋꿋이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