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3 18:05:27

롤리의 엘도라도 원정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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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의 엘도라도 원정
Raleigh's El Dorado expedition
시기
1595년 2월~8월
장소
대서양, 트리니다드강, 오리노코강
원인
엘도라도를 찾아내서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으려는 월터 롤리의 야망.
교전 세력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제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월터 롤리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안토니오 데 베리오
결과
엘도라도 발견 실패, 남미 원주민과 잉글랜드의 동맹 체결.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5. 이후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95년 2월 ~ 8월, 월터 롤리가 이끄는 원정군이 엘도라도를 찾아 누에바에스파냐 내륙 지역을 탐험한 사건.

2. 배경

월터 롤리는 북미 탐험과 스페인과의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적을 세우면서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592년 비밀리에 엘리자베스 1세의 시녀인 엘리자베스 스록모턴과 결혼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2달 만에 석방되어 스페인 해안에 대한 원정군에 참여했으나, 원정군이 복귀한 뒤 다시 런던 탑에 보내졌다가 1593년 초 석방되었다. 그 후 여왕에 대한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그는 남들이 이루지 못한 걸 이루기로 하니, 바로 카로니 강 상류에 있다는 전설적인 황금 도시 엘도라도였다.

롤리의 엘도라도에 대한 관심은 1586년 스페인의 파타고니아 총독인 페드로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를 생포했을 때 시작되었다. 감보아는 모든 행해 정보를 비밀로 유지한다는 스페인의 공식 정책을 무시하고 자신의 지도를 잉글랜드 지도 제작자들과 공유했다. 특히 1570년 페드로 마라베르 데 실바의 남미 원정에 참여했다가 오리노코강 하류에 사는 칼리나족에게 체포된 후안 마르테스 데 알부하르에 대한 감보아의 설명은 롤리의 흥미를 끌었다. 감보아에 따르면, 마르티네스는 눈가리개를 한 채 황금 도시로 끌려간 후 원주민들과 즐겁게 놀았고, 그 후 도시를 떠났지만 돌아오는 방법을 기억하지 못했고, 단지 근처에 있는 큰 호수만 기억했다고 한다. 롤리는 이 황금 도시를 찾고 싶었고, 그 도시가 파리메(Parime)라는 큰 호수 근처에 있는 마노아(Manoa)라는 실제 원주민 도시일 거라고 예상했다.

1594년, 제이콥 휘든 선장이 롤리를 찾아와서 엘도라도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이에 따르면, 휘든은 트리니다드 섬에 방문하여 안토니오 데 베리오 총독과 접촉했는데, 엘도라도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 베리오가 화를 내며 자기들을 처형하려 했기에 급히 탈출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롤리는 베리오 총독이 엘도라도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그해 후반기에 즉시 원정대를 조직했다. 그의 목표는 베리오 총독을 잡은 뒤 그를 안내인으로 삼아 오리노코 강변의 엘도라도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원정대는 선박 4척으로 구성되었다. 조지 기파드 선장이 이끄는 '라이온스 월프(Lion's Whelp, 사자 새끼)', 로렌스 케미스 선장이 이끄는 '갈레고'라는 이름의 작은 스페인 상선, 제이콥 휘든 선장과 존 더글러스 선장이 이끄는 롤리의 기함, 그리고 크로스 선장이 이끄는 작은 바크선이었다. 배에는 장교, 군인, 자원봉사자 150명이 탑승했다. 여기에 로버트 더들리[1], 조지 팝햄이 이끄는 함대와 조지 소머스와 아미아스 프레스턴이 이끄는 두 번째 함대가 롤리의 원정을 지원하기로 했다.

3. 경과

롤리는 1595년 2월 6일 플리머스 항에서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기 전 신선한 물자를 실으려고 아소르스 제도로 항해했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카나리아 제도 근처를 항해하던 중 테네리페섬에서 스페인 선박 1척을 나포했다. 나포된 선박의 화물을 비워졌고, 많은 양의 화기가 압수되었다. 하루 후 플랑드르 선박도 나포되었는데, 이 배에는 스페인산 와인 20 호그스헤드[2]가 들어 있었다.

롤리는 3월 말에 카리브해에 도착했지만, 대서양 횡단 중에 자기를 지원하기로 했던 다른 두 함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먼저 도착했던 로버트 더들리와 조지 팝햄은 그를 기다리다가 2월 9일에 그 지역을 떠났다. 이들은 항해 도중에 많은 스페인 함선을 나포한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여기에 뒤따라가던 조지 소머스와 아미아스 프레스턴의 함대는 스페인의 주의를 롤리의 원정대에서 돌리기 위해 서쪽으로 더 나아가서 라 과이라와 코로 일대를 약탈했다.

롤리는 스페인령 트리니다드섬, 특히 1592년 베리오 총독이 세운 주요 정착지인 산 호세 데 오루냐를 공략하려 했다. 우선 그는 섬 남부에 상륙한 뒤 파리아 만을 따라 행진했다. 그러던 중 칼리나족과 접촉한 뒤 '피치 호수'로 안내되었다.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 역청 매장지로, 롤리는 이 물질이 코킹[3]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곧바로 여러 통에 역청을 넣었고, 나중에 역청 호수를 '발견'했다는 공로를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인정받았다.

4월 4일, 롤리는 병사 100명과 함께 푸에르토 데 에스파냐의 작은 방책을 점령하여 소규모 스페인 수비대를 압도한 뒤, 내륙으로 진군하여 산 호세 데 오루냐를 향한 야간 기습을 개시했다. 이때 50명에 달하는 수비대가 사살되었고, 스페인 시장 알바로 호르헤는 생포되었다. 베리오 총독은 곧 나타난 뒤 그에게 복종할 테니 자기가 애써 세운 정착지를 파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고, 롤리는 오리노코강을 탐험하기 위한 임시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베리오 총독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한 롤리는 베리오가 긴 사슬 하나로 묶고 고문한 후 굶주리게 내버려뒀던 원주민 족장 5명을 석방했다.

그 후 스페인군의 반격에 대비해 요새를 건설한 롤리는 베리오를 심문해 마노아와 엘도라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들었다. 베리오는 엘도라도로 가는 길은 너무 위험하니 탐험을 중지하라고 권고했지만, 롤리는 듣지 않았다. 1595년 4월 15일, 롤리는 오리노코강 여행을 위해 개간된 갈레고강 유역에 있는 기지에서 2척의 웨리[4]와 병사 100명을 이끌고 출발했다. 그들은 거의 한 달분의 식량을 가졌으며, 대규모 스페인 원정대가 자기들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발했다. 실제로 베리오의 신임 장교 중 한 명인 펠리페 데 산티아고 대위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마르가리타 섬에 있는 기지에서 카누 여러 대를 이끌고 출발해 롤리의 원정대를 추적했다.

잉글랜드군은 오리노코강 유역에 진입했지만, 물이 너무 얕다는 게 밝혀지자, 무게를 줄이기 위해 짐을 덜고 몇 척의 뗏목을 제작했다. 강을 더 깊이 들어가면서 수많은 수로가 열리자, 롤리는 먼저 카뇨마나모강 지류를 따라 오리노코강 상류로 이동했다. 원정대가 점점 더 멀리 나아갈수록, 원정대는 더위와 열대성 호우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정글이 더 울창해지면서 길을 잃었고, 원주민 안내인 페르디난도는 도망쳤거나 원주민에게 잡혀 사라졌다. 하지만 롤리는 곧 원주민 마을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안내원을 새로 구했고 물고기, 빵, 가금류도 구매했다. 이후 다시 출발했을 때는 정글이 덜 울창해졌다. 며칠 안에 오리노코 계곡의 사바나 지대가 드러났고, 병사들 사이에서 사기가 고양했다. 이때 한 흑인이 강에 뛰어들어 수영하다가, 동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악어에게 잡아먹혔다. 롤리는 이 사건에 큰 공포를 느끼고, 이 강이 위험한 파충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선원들에게 다시는 수영하려 들지 말라고 명령했다.

4월 27일, 롤리의 원정대를 추적하던 산티아고 휘하 스페인군은 담수를 얻은 후 잉글랜드군을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들은 카누 4척을 타고 잉글랜드군에 접근했지만, 강의 굽이에 있는 좁은 수로에 갇히면서 무산되었다. 롤리의 원정대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선제공격하기로 했고, 조지 기파드가 앞장서서 반격을 개시해 스페인군을 제압했다. 스페인군은 막심한 사상자를 내고 숲으로 도망쳤고, 기파드는 그들의 배를 전리품을 가져갔다. 뒤이어 롤리와 나머지 배들이 나타나 스페인 카누 2척을 파괴했다. 롤리는 소규모 병력을 보내 스페인군을 추격했고, 스페인군은 숲으로 도망쳤다. 잉글랜드군은 원주민 전사 3명을 생포했다. 우너주민들은 목숨을 구걸했고, 세 사람 중 한 명이 그들의 안내자가 되어주겠다고 나섰다. 산티아고는 패배 후 추적을 포기하고 마르가리타섬에 있는 그의 기지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나포한 스페인 카누에는 롤리 일행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식량과 보급품이 있었고, 다양한 유형의 광석을 찾는 도구도 발견되었다.

다음 날, 롤리의 원정대는 오리노코 강의 큰 합류 지점을 발견했다. 이 큰 지류는 카로니강이었다. 롤리는 이 지점에서 원주민인 와라오족과 페몬족을 만났다. 롤리는 그들이 스페인군에 적대적이라는 걸 인지하고, 자기가 나포한 스페인 카누를 선물해 스페인인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걸 알려준 후 그들과 평화 관계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이때 현재의 시우다드 과야나 근처에 큰 마을이 있었는데, 토피아와리(Topiawari)라는 추장이 다스렸다. 토피아와리는 롤리에게 산속에 사는 종족들의 풍부한 문화에 관해 설명했고, 그 문화는 잉카 제국의 잔당이며, 전설적인 도시 '마노아'임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롤리는 부하 2명을 인질로 남겨두고, 토피아와리의 아들을 데려갔으며, 스페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일부 배가 마을에 머물러 귀국 항해를 위한 보급품을 보충하는 동안, 롤리와 로렌스 케미스 선장은 토피아와리의 아들을 안내자로 삼고 엘도라도로 향했다. 그들은 카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금과 광산을 찾기 위해 정찰병을 보냈고, 그동안 만나는 원주민과 동맹을 맺었다. 정찰병들은 금으로 보이는 돌을 여러 개 가져왔다. 롤리는 여정 중에 기아나 고지테푸이를 발견했으며, 약 12개의 폭포를 관찰하면서 가장 큰 폭포는 "어떤 교회 첨탑보다 더 높다"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배에서 내린 뒤 산지로 가서 주변 풍경을 한동안 감상했다. 롤리는 여행지에서 자기가 여태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롤리가 이때 앙헬 폭포를 유럽인 최초로 발견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학계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간주한다.

롤리는 내륙으로 거의 400마일(640km)을 이동했지만, 우기가 시작되자 더 이상 가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복귀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토피아와리의 마을로 무사히 돌아갔고, 안내인을 맡았던 토피아와리의 아들은 롤리와 함께 잉글랜드로 가기로 했다. 롤리는 그에게 괄테로(Gualtero)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롤리는 트리니다드섬으로의 귀환길에 올랐지만, 도중에 이코누리 산 인근 금광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로렌스 케미스에게 소규모 원정대를 맡겨서 조사해 보게 했다. 케미스는 사우다드 과야나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고, 요비즈나 폭포를 발견했다. 광산은 비록 발견하지 못했지만, 석영 암석을 발견하고 이를 가져갔고, 자기가 발견한 장소에 가치가 많은 자원이 묻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케미스와 재회한 롤리는 산 호세 요새로 돌아왔는데, 악어 공격 외에는 질병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없었다. 이는 그들이 원주민들에게 음식을 주기적으로 제공받아서 건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 호세 요새에 도착한 후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한 롤리는 베리오 총독의 항의를 무시하고 그가 세운 거주지를 약탈하고 방화를 자행했다. 그 후 마르가리타섬으로 이동해 보급품을 약탈한 후 쿠마나 항구에 상륙했고, 몸값을 받지 못한 베리오 총독을 해안에 남겨뒀다. 이후 리오아차에 상륙한 후 그곳도 약탈했다. 7월 13일, 롤리는 마침내 프레스턴과 소머스 선장과 재회한 뒤 카라카스, 라 과이라, 코로를 점령한 그들의 활약상을 전해들었다. 하지만 역풍 때문에 실종된 로어노크 식민지 주민들을 찾는 계획을 포기하고 1595년 8월 말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4. 결과

롤리는 잉글랜드에 무사히 돌아왔지만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투자자들은 전리품과 금이 부족하다며 실망을 표했고, 롤리의 원정대가 금이라고 여기고 가져온 광석은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 났고, 사람들은 롤리가 데번과 콘월의 외딴 지역에 금을 숨겼다고 비난했다. 이에 롤리는 <풍부하고 아름다운 기아나 제국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자기 원정에 관한 이야기를 출간하기로 했다. 1596년에 출간된 이 책은 과장을 심히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증폭했고, 이 때문에 엘도라도 전설이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은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도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롤리는 이듬해 케미스를 가이아나로 돌려보내 인질들을 확인하고 원주민과의 동맹을 갱신하도록 했다. 또한 케미스는 오리노코강을 지도로 만들고, 원주민 부족들의 정보를 기록하며, 그 나라의 지리, 지질, 식물학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케미스는 에세킾보 강 유역을 따라 훨씬 더 내륙으로 들어가 파리메 호수에 도착했다. 그는 귀환 후에 <가이아나로의 두 번째 항해에 대한 관계>에서 가이아나 해안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한편, 롤리에게 붙잡혀서 고초를 겪었던 베리오 총독은 1597년 도밍고 데 베라 이바르고옌의 지휘 아래 병사 470명을 이끌고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원주민들이 베라와 베리오의 군대를 습격했고, 스페인 병사 350명이 전사했다. 나머지는 후퇴했지만, 질병과 기근으로 얼마 안 남은 생존자만 살아남았다. 베리오는 가까스로 돌아온 뒤 산토 토마스 데 기아나 요새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이후

월터 롤리는 1617년 런던 탑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난 뒤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2번째 원정을 감행했지만, 부하 로렌스 케미스가 스페인인과 절대로 싸우지 말라는 제임스 1세의 명령을 어기고 산토 토마스 데 과야나에 있는 스페인 정착지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월터 롤리의 아들인 와트 롤리가 전사했다. 케미스는 롤리에게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용서를 구했지만, 롤리는 차갑게 답했다.
"당신의 고집 때문에 내가 파멸했소. 당신이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어떤 짓으로든 용납하지 않겠소."

이에 케미스가 답했다.
"그렇다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잘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권총으로 가슴을 쐈고, 즉시 죽지 못하자 검으로 심장을 찔러 죽었다. 그 후 롤리는 잉글랜드에 돌아온 뒤 스페인인과 싸우지 말라는 왕명을 어긴 죄로 체포된 후 1618년에 런던 탑에서 참수당했다.
[1]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사생아.[2] Hogshead. 제조 및 판매용 알코용 음료가 든 큰 통 단위.[3] caulking. 배의 이음새를 밀봉하는 데 사용되는 재료[4] whery. 잉글랜드의 강과 운하에서 화물이나 승객을 운반하는 데 사용하던 간이 수송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