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르바리 해안 해전 Battle of the Barbary Coast | ||
| 시기 | ||
| 1592년 7월 26일 | ||
| 장소 | ||
| 바르바리 해안(알보란해) | ||
| 원인 | ||
| 지중해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스페인 상선에 대한 잉글랜드 해군의 습격.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미상 | ||
| 병력 | ||
| 갤리온 1척 | 갤리온 1척, 플리부트 1척 | |
| 피해 | ||
| 15명 사상. | 갤리온 1척과 플리부트 1척 나포, 213명 사상 또는 나포. | |
| 결과 | ||
| 잉글랜드군의 승리. | ||
| 영향 | ||
| 잉글랜드군의 막대한 전리품 획득. | ||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92년 7월 26일, 잉글랜드 해군이 스페인의 보물선을 습격해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한 해전.2. 상세
1592년 7월 25일, 토머스 화이트 선장이 지휘하는 100톤급 무장상선인 갤리온 '아미티 오브 런던' 호가 바르바리 해안을 떠나 잉글랜드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이 배는 북아프리카의 바리바리 해안 상인들과 무역 거래를 하는 '헨리 콜서스트 앤 컴퍼니' 소속이었다. 상인들과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토머스 화이트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널 준비를하면서 스페인 함대의 출현을 경계했다.다음 날인 7월 26일 아침, 화이트 선장은 위도 36도에서 3~4리그 떨어진 스페인 갤리온 선 1척과 플리부트 1척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추격했고, 오후 7시 무렵에 대포 사격을 가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했다. 스페인 함선들도 적을 발견하고 즉시 전투 대열을 형성한 뒤 천천히 접근했다. 아미티 호는 그들이 접근하자 사격을 가했고, 스페인 함대도 반격했다. 스페인 갤리온 '상 페드로'는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계속 저항했다. 이에 화이트는 선원들에게 등선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배가 상 페드로 호에 가까이 접근하자, 그는 등선하기 직전에 적 함선에 대포와 경량탄을 발사해 선체에 있는 스페인인 다수를 살상했다.
상 페드로 호가 공격당하는 걸 본 플리부트 '상 프란시스코' 호는 잉글랜드인들이 상 페드로 호에 전부 올라탔을 것이라 예상하고, 아미티 호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와 상 페드로 호 사이에 아미티 호를 가두고 측면에서 올라탈 계획이었다. 이걸 알아차린 화이트 선장은 대포를 조정해 상 프란시스코 호로 겨냥해 측면을 포격했다. 이로 인해 상 프란시스코호의 선원 몇 명이 전사했고, 상 프란시스코 호는 물러섰다. 그 후 화이트는 모든 함포를 재무장한 후 두 배에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수위 아래에 구멍이 난 상 프란시스코 호는 항복했고, 상 페드로 호는 처음에는 항복을 거부했지만 침몰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하자 결국 백기를 계양하고 항복했다.
5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아미티 호는 사망자 2명을 포함해 약 15명의 사상자를 입었다. 또한 선체, 돛대, 돛에 32발의 총격을 받았지만, 수리를 용이하게 수행해 항해를 계속할수 있었다. 그 후 화이트는 스페인 함선 2척을 잉글랜드로 데려가서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템스강을 따라 런던으로 항해했다. 스페인 포로들은 나중에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들이 잉글랜드 배를 탈취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화이트의 배를 안달루시아의 해안 도시인 산투카르 데 바라메다로 데려갈 지, 아니면 리스본으로 가져가는 게 나을지 논쟁했다고 진술했다.
한 척으로 적선 2척을 나포한 것도 큰 성과였지만, 스페인 함선에 있는 전리품도 엄청났다. 수은 1,400상자, 와인 100톤, 교황 칙서, 머스킷과 아르케부스 500정 등이 노획되었고, 70만 파운드 상당의 포상금이 선원과 소유주에게 돌아갔고, 전리품 상당수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