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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암스트롱|스티븐 암스트롱]]
<nopad> |
It Has to be This Way에 그와 성조기를 썸네일에 깔아놓은 동영상[1] |
1. 개요2. 종합 평가
2.1. 옹호
2.1.1. 미국 건국이념과의 호응2.1.2. 실력주의의 필수불가결적 현실성2.1.3. 라이덴의 각성에 끼친 지대한 영향2.1.4. 자율적 강자에 대한 실존적인 정의와 미국인들의 지지2.1.5. 개인의 무장과 주체적 자유정신의 필요성2.1.6. 최강자로서의 공명정대함과 강자중심사회의 합리성2.1.7. 비판 측의 본질을 벗어난 비난2.1.8. 자유주의를 총망라하는 철학과 강자들을 아우르는 리더십2.1.9. 암스트롱을 계승한 라이덴과 제작진들의 메시지2.1.10. 자유를 억압하는 '적'에 대한 근본적 통찰2.1.11. 정치실용주의와 일관된 평등주의2.1.12. 자유지상주의적 질서의 근본적 필요성2.1.13. 강렬하고 희망적인 메시지
2.2. 비판1. 개요
"this guy really just came out of nowhere and established himself as one of the most iconic video game villains within 30 minutes of screentime."
'이 사람은 정말 뜬금없이 등장해서 단 30분의 출연 시간만으로 가장 상징적인 비디오 게임 악당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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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암스트롱의 평가를 다루는 하위 문서.'이 사람은 정말 뜬금없이 등장해서 단 30분의 출연 시간만으로 가장 상징적인 비디오 게임 악당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위 영상에 달린 댓글 중 3.6만 추천수를 받은 댓글
2. 종합 평가
스티븐 암스트롱은 여태까지의 여러 매체에서 정치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부수는 여러 의미로 파격적인 캐릭터다. 특히 북미 쪽 플레이어들에게 반응이 폭발적으로 좋았다. 우선 설정상 상원의원[2]임에도 입만 살고 힘은 하나도 못 쓰는데다 염세적이고 무감정할 것 같은 높으신 분 클리셰에서 벗어난[3] 마초 캐릭터라는 미칠 듯한 괴리감에, 생긴 것답게 산전수전 다 겪어온 정예 사이보그 요원인 라이덴을 애새끼 취급하며 태고의 달인마냥 신명나게 두드려패는 호쾌함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양덕후 사이트 TV Tropes도 정치인 관련 만신전에 스티븐 암스트롱을 최상위 티어로 선정했을까.[4]게다가 창작물의 일반적인 문법에서 강력한 육체능력이 부각되는 캐릭터는 단순한 근육뇌이거나, 그가 내세우는 신념이 무지하게 질 낮고 허접한 수준에 머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티븐 암스트롱은 이러한 클리셰를 완전히 뒤엎는다. 그는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자랑하는 동시에, 풍부한 감정과 유머를 민첩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언변과 재치를 뽐내며 자유지상주의에 기반한 심도 깊은 철학적 논리로 주인공 라이덴의 비판을 정면으로 논파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용하는 어휘나 말투는 다분히 마초스럽지만, 동시에 그 속에 담긴 세계관과 이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이질적 요소들의 자연스러운 결합이 해당 캐릭터에 강렬한 존재감을 부여했으며, 오죽하면 이 인물 하나 때문에 라이징에 대한 게이머들의 심정이 BADASS MURICA로 확 뒤바뀔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또한 약육강식을 주장하는 다수의 캐릭터들이 정작 패배의 순간이 다가오면 "내가 이렇게 죽을 리 없다"고 외치며 찌질하게 자신의 논리마저 부정하는 내로남불을 보이는 반면, 암스트롱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나게 두들겨 패던 라이덴이 자신을 쓰러뜨리자, 이를 호쾌하게 인정한다. 오히려 그의 방식과 신념을 존중하며 라이덴의 앞길을 축복하기까지하며 쓰러졌고 그에 라이덴 또한 암스트롱을 인정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이는 단순한 미화가 아니다. 암스트롱은 법과 제도, 명분이 아닌 개인의 의지와 무력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방식을 이상으로 삼았고, 그의 말마따나 라이덴은 그의 철학을 가장 극단적으로 구현해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암스트롱이 라이덴을 두고 "후계자는 잘 만들었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결국 누군가에게 계승되었음을 확인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신이 내세운 약육강식과 실존주의의 원칙을 자신에게도 끝까지 적용하며 초지일관한 최후를 맞이한 암스트롱의 모습은, 흔한 '강자 악역'의 클리셰를 깨뜨리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평가받으며 큰 호평을 받았다. 여러 모로 클리셰란 클리셰는 죄다 깨뜨리는 역대급 클리셰 브레이커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모습은 단순히 신선한 캐릭터성에 그치지 않고, 실제 미국 정치에 대한 불신과 피로감을 느낀 북미권 게이머들에게는 매우 속시원한 내용이기도 했다. 특히 암스트롱의 직설적이고 강경한 연설을 본 미국 게이머들은 일본산 게임에서 이렇게 '미국적인 캐릭터'가 나올 줄 몰랐다며 암스트롱의 사상에 진지하게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많다. 단적으로 유튜브의 MGR 최종보스전 영상이나 관련 밈 영상의 댓글만 살펴봐도, 수단은 틀렸지만 그 이상 자체는 옳다는 의견이 다수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아시아권에서도 게임 에필로그에서 라이덴이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악은 모두 직접 처단하겠다'고 선언하며 개인적인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결말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이 많아지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이 결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어진다는 점은 곧 암스트롱의 사상 또한 그저 '악역의 명분'으로 소비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문화와 국가, 사회에 대한 시선이 미국과는 딴판인 한국, 일본인들이야 암스트롱을 그저 사회를 매드 맥스 시리즈 또는 북두의 권에서나 볼 법한 약자에 대한 보호나 법이 전혀 없는 난장판으로 만들려는 광인으로 느끼는게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게임 출시 초기에는 암스트롱을 비판하는 의견이 우세했고 '우리 라이덴이 이런 미치광이의 신념을 계승하는 결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논조의 견해가 많았다. 반쯤 농담 삼아 당시엔 솔리드 스네이크가 애지중지 키워 겨우 사람 만들어놓은 라이덴이 암스트롱에게 네토라레 당했고, 라이덴 본인도 잭 더 리퍼를 버리질 못했으니 솔리드를 못 뛰어넘는 거라며 결국 배운 게 없다면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 이러한 반응은 동양적 공동체 윤리와 약자 보호의 이상이 강하게 뿌리내린 문화권에서는 암스트롱식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냉혹하고 파괴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5]
그러나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고, 옹호와 비판의 다양한 해석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라이덴은 단순히 암스트롱의 철학에 휘말려 잭 더 리퍼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적들과의 결투를 통해 각자의 신념을 마주하며 점진적으로 정신적 성장을 이룬 인물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현재는 애초에 당시 비판의 논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재평가되는 추세다. 특히 당시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었던 몬순과의 전투는, 오히려 '살인귀'였던 자신의 본성과 외면해온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끝내 이성을 유지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퇴행이 아닌 자기 수용의 출발점이었다. 결말부에서 암스트롱의 사상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통합해 “자신만의 전쟁”을 선언하는 라이덴의 모습은, 그가 내면의 모순과 트라우마를 극복한 끝에 도달한 주체적 결단의 결과로 읽힌다. 따라서 당시의 비난은 그냥 결말이 마음에 안 드니까 그간의 스토리는 다 못 본 척 하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 결국 암스트롱의 이상을 계승함으로써 자신의 모순, 트라우마, 정신적 방황을 완전히 극복했으므로 분명히 성장을 이뤄냈다고 해석하는 게 맞다. 즉 이 결말은 정신적 성장과 자기 정체성의 완성을 의미하며, 오히려 라이덴을 솔리드처럼 은퇴시키려는 게 아니라면 캐릭터 서사의 논리적 귀결이자 가장 설득력 있는 방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라이덴의 결말을 두고 "솔리드 스네이크의 신념을 저버리고 암스트롱의 철학에 굴복했다"는 식의 평가가 자주 제기되었고 아직도 일각에서 이에 절망감을 느끼는 팬들이 있지만, 이는 메탈기어 라이징의 서사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해다. 라이덴은 단순히 솔리드의 밈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밈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신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암스트롱의 밈을 구성하는 두 토대, 즉 니체주의적 실존과 자유지상주의적 결단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솔리드 스네이크의 신념은 어디까지나 애국자들같은 외부의 억압적 구조를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하려는 '소극적 해방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이 철학은 '인간성 회복과 약자 보호'라는 명확한 목적을 제공하면서도, '악의 구조'를 제거한 이후 인간이 어떤 주체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라이덴은 그것이 진정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인지, 아니면 국가와 법, 대중의 요구로부터 강요된 타자화된 신념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던 것이다. 반면 암스트롱은 체제 타파 이후의 인간이 스스로의 신념과 힘을 통해 삶을 증명해야 한다는 '적극적 자유의 철학'을 제시한다. 라이덴은 이 두 사상을 통합해, 억압에 저항하는 솔리드의 정의감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과거와 내면을 직시하고, 타인이 정해준 사명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싸움을 통해 진정한 주체가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솔리드를 비롯한 역대 스네이크들이 한계에 부딪혔던 '밈의 반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결정의 영역으로 나아가며 정신적으로 완성된 자유인의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유지상주의에 익숙한 북미 팬을 비롯한 서양권 게이머들에게는 상술했듯이 출시 초기부터 특정 성향 유저들을 제외하면 평가가 매우 좋았다는 게 재미있는 부분. 그리고 북미에서는 동양처럼 공동체주의적인 시각으로 해당 시리즈를 해석한 게 아니라 자유주의라는 큰 틀에서 메탈 기어 연대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주류였기에 딱히 암스트롱과 솔리드 스네이크의 신념이 그렇게까지 상반된다고 여기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물론 유튜브와 커뮤니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재는 동양권도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진척된 데다가 정치권의 무지성 PC, 문화 검열, 애국심 강요 등에 매우 지친 상태라 그런지 신규팬들은 암스트롱의 연설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훨씬 강하다. 또 상기했듯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현실 세계 정치가 암스트롱이 비판했던, 납득할 수 없는 명분과 사업화된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게 흘러가며 예전의 부정적인 평은 사실상 사장되고 나날이 재평가되고 있다.
한편, 다르게 보자면 물론 암스트롱의 이런 면이 약자에게 잔혹할 정도로 힘의 논리를 강요하는 미국의 현 상태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는 강자만 소위 그 주권자인 '인민'이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정성이란 시니컬한 측면에서도 배려가 아예 없는 미국식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 할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든 게임에 현대 미국 사회의 각종 고뇌나 번민,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쟁을 축약하다시피 했으며 긍정적으로 봐도, 개그성 밈으로 봐도, 비판적으로 봐도 너무나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튀어나온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만인을 갈라 놓는 부질없는 것들을 허물어 차별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더 보스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암스트롱은 더 보스와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완전한 평화를 위해서라면 서로를 해칠 무기를 버려야 한다며 스스로 핵을 짊어지고 물속으로 들어가 이를 실천했던 더 보스의 유지와는 정반대로, 암스트롱은 상당한 폭력성을 더한 자신만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6] 일단 애국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관련 정보를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어떻게 보면 암스트롱도 더 보스의 유지를 이은 자라고 볼 수 있기는 하다. 물론 암스트롱의 방식은 더 보스가 진정으로 원했던 방식과는 정반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보스의 밈을 잇고자 했으면서 더 보스가 원하는 방식과 한참 다른 방식을 제시한 인물들은 이전 작들에서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기술 독재 체제로 전지구적 질서를 구현하려 한 제로 소령과, 각국을 압도하는 군사 단체로 국경의 의미를 퇴색시켜서 강제적으로 무정부적 세계 평화를 이루려고 한 네이키드 스네이크가 그 예. 때문에 암스트롱이 더 보스의 사상을 안 이었다고 말할 근거가 없기는 하다.
다만, 사실 메탈기어 서사 내에서, 암스트롱은 더 보스의 밈을 계승한다기보다는 동등한 위치에서 뚜렷한 안티테제로서 기능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스티븐 암스트롱과 더 보스는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대조되는 철학을 지녔지만, 그들의 이상은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인물 모두 이념, 국경, 시대의 흐름, 집단정체성과 같은 '만인을 갈라 놓는 부질없는 것들'을 허물고, 개인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상적 목표는 동일하다. 그러나 더 보스가 이러한 이상을 공동체적 연대와 평화를 통해 실현하려 했던 반면, 암스트롱은 조직과 연대 자체가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보고, 오직 개인의 힘과 선택만이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급진적 자유주의를 제시한다. 더 보스는 공동체를 지키는 데서 군인의 존재 의의를 찾았지만, 암스트롱은 필요하다면 공동체조차 적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며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이들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한 이상주의자와 급진적 현실주의자로 서사 내에서 대비되며, 결과적으로 같은 이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추구한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 두 철학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우월하다고 보기보다는, 서로가 가지는 장점과 한계를 보완하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아래의 옹호와 비판 단락만 해도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7], 이를 읽는 독자가 어느 입장을 지지하고 또 상대의 어느 주장을 수용하여 라이덴처럼 자신의 내적 모순을 보완할지는 철저히 그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있을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이미 법, 도덕, 질서 등이 굳건히 자리를 잡은 현대보다는 그딴 게 의미를 잃은 난세에 훨씬 어울렸을 법한 인물. 탁월한 두뇌, 미칠 듯한 힘, 뛰어난 실천력과 인정사정없는 잔혹함, 거기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상적으로 그렸을 법한 강력하고 철저한 개인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니체는 거의 모든 저작에서 개인을 나약한 부속품으로 만드는 관료제적 사회를 맹렬히 비판했고, 약자의 이상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려는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가 지향하던 인간사회도 제도와 기득권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는 고대 그리스 영웅시대였다. 그리고 이것과 비슷하던 것이 바로 암스트롱이 언급한 미국의 초창기와 서부개척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라이덴이 훼이크를 칠 때 거기에 보기 좋게 넘어가 아주 사람 좋게 대하는 모습은 주로 고대 사회에서 싸움에 이긴 장수가 패배한 장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때 선보이는 전형적인 호쾌한 고대 영웅의 관용적인 면모와 일치한다. 라이덴이 현대판 '히어로' 상에 가깝다면, 암스트롱은 극단적인 사상과 그걸 행하는 비인간적인 방식을 지녔지만 자신과 맞설 수 있는 강자에 대해선 존중을 아끼지 않는 고전적 '영웅'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동양 군담소설에 나오는 호걸스러운 사나이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강력한 무력과 카리스마로 많은 인물들을 압도했던 항우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항우는 지도자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반면, 암스트롱은 정치적 수완과 철학적 통찰력 또한 겸비한 '완성형 정복군주'에 가깝다는 점에서, 더욱 입체적인 현대판 호걸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본질을 정리하면 고대 중국 혹은 그리스 고전에 나올 법한 군주형 협객 캐릭터가, 세계패권국가로서 쇠퇴와 방황을 겪고 있는 현대 미국 사회의 갈등과 담론이란 문맥에 맞추어 성공적으로 재해석된 인물인 셈. 고로 21세기 미국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자 할 때 예시로 들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옳고 그름을 떠나 미국의 이상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쓰러뜨린 주인공 라이덴이 그 이상을 계승하고 자기 식으로 재해석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장면을 통해, 그의 방식은 틀렸을지언정 그의 이상은 진정 옳았음을 제작진이 피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동서양, 북미와 본토 일본 양쪽에서 이 캐릭터가 가진 호흡력, 캐릭터로서 완성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출시 초기라 할 수 있는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메탈기어 시리즈의 주제의식이 핵확산 반대, 구체적으로는 "폭력과 무력, 공포로 인해 이뤄지는 '평화'는 절대 깨끗하지도 않고, 오래 갈 수도 없다."란 주장을 꾸준히 해왔다는 점과 모순된다는 걸 지적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조차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벌어지고서 급격히 치솟은 핵무기에 대한 수요, 그리고 2022년부터 도래한 신냉전 시기부터는 현실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현실을 굉장히 잘 예언했다는 평가가 주류가 되면서 빠르게 묻히게 되었다.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그의 이상에 동감하는 미국인들이 많지만, 도널드 트럼프와 사상이 매우 다름에도 그를 지지하는 대안 우파 성향의 플레이어들에게 특히 호감도가 높았다. 상술한 대로 그의 발언이 트럼프와 싱크로율이 높은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대안 우파 진영에 기성 정치계 및 LGBT 혐오자[8]가 많고, 대안 우파 진영에서도 Alt-lite 계열에 리버테리안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뮤니티와 유튜브 등에 그에 대해 부당할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쏟아내는 인물들은 주로 대안 우파와 원수관계를 맺은 SJW 플레이어 혹은 친 SJW 성향의 유튜버들이다. 하지만 그의 연설문과 평가 항목에서도 서술되어 있다시피, 정작 그는 PC 사상뿐만 아니라 아예 보수주의 윤리관 전체에도 부정적인 모두까기 성향의 우파 아나키스트[9]에 가깝다. 그래서 전체주의와 인종 차별에 호의적인 일반 대안 우파는 물론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Alt-lite 진영하고도 거리가 멀다는 게 아이러니.[10] 그래서 우파뿐만 아니라 SJW가 아닌 온건 좌파 성향의 플레이어들에게도 호감도가 높다.[11][12] 현재는 그의 니체주의적 발언들이 재조명을 받으며 불필요한 논쟁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현재로선 진보, 보수 두 진영 모두 깐다는 걸 깨달은 모양. 그래도 그의 사상이 워낙 인종주의, 금권 정치, 전체주의 등 수구적 요인이 일절 개입되지 않은 미국의 이상 그 자체를 잘 대변한 지라 그가 주장하는 바와 방식에 전부 찬성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우파 성향 플레이어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또한 이것이 좌파 성향 플레이어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이유이다. 어찌보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사회질서와 물질주의에 찌들고 목적을 상실한 세상에서 이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려는 성향이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13], 용과 같이 시리즈의 니시타니 호마레[14], 무사만리행의 콤모두스[15]와 같은 노빠꾸 니체주의적 캐릭터들이 사람들의 열광을 받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암스트롱 안티 중에는 아예 그의 기량이 나노머신 빨이라고 내려치기 하는 사람들도 소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이건 억까에 불과함에 유의. 일단 결정적으로, 암스트롱이 나노머신 빨이라면 라이덴의 개조신체도 암스트롱 못지 않게 튼튼했다. 또 라이덴이 계속 일방적으로 쳐맞다가 무라사마 들고 겨우 이겼다는 점에서 라이덴도 사이보그 몸체외 무라사마 빨이 되버린다. 즉 내로남불 논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량 측면에서도, 라이덴이 게임 내내 보여준 쳐내기 공격이 오직 암스트롱에게는 일절 통하지 않는데, 이는 상술했다시피 독토어의 분석에 따라 암스트롱의 기량이 라이덴과 최소 동급이라는 설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라이덴과 암스트롱 모두 호드리게스의 무라사마에 팔이 싹뚝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덴은 통각 센서가 있어서 고통도 안 느끼는 것은 물론에 검을 든 오른팔이 아닌 왼팔을 발도술로 잘렸음에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던 정신적 불안정성에, 4편 때 트라우마라도 다시 살아났는지 크게 당황해서 호드리게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반면 암스트롱은 발도술에 의해 오른팔이 잘리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임기응변을 발휘해 잘린 팔로 오히려 호드리게스의 오른팔을 찍어서 끊어버리며 호드리게스에게서 대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라이덴이 호드리게스와의 첫 대면에서 완패한 것만 봐도 알겠지만, 즉 오히려 암스트롱의 정신력과 경험, 기량이 적어도 호드리게스와 암스트롱이 맞붙었을 시점에서는 라이덴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사실 암스트롱의 결정적인 패배 원인은 따지고 보면 호드리게스가 멋대로 라이덴을 도울 생각을 했다는 것 때문이다.
사실 한 게임 캐릭터를 두고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옹호하는 팬층과 이에 반박하려는 다양한 안티 팬덤이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티븐 암스트롱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훌륭한 반동 인물(anti-hero or antagonist)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SJW(사회 정의 전사)든 대안 우파든, 혹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성향의 플레이어들 모두가, 암스트롱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마치 실제 정치인처럼 비판하거나 옹호하며 극도로 과몰입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현대 미국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 철학적 긴장을 고스란히 반영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그 입체성과 현실성이 매우 뛰어남을 방증한다.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가 자유지상주의 사상을 공유하는 바이오쇼크 시리즈의 앤드루 라이언인데,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자유지상주의적 이상을 추구했지만, 그 본질은 사뭇 다르다. 라이언은 '랩처'라는 지하도시를 통해 "노동의 대가를 빼앗기지 않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경제에 치우친 이상을 내세웠지만, 결국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가진 자들을 감옥에 수감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심지어 프랭크 폰테인과 같은 인물의 득세를 사실상 방조한 끝에 도시를 스스로 파괴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와 비교해 암스트롱은 비록 수단은 극단적이었지만, 체제에 순응하기보다는 이를 깨뜨리고 대중에게 자유와 책임을 되돌려주겠다는 방향성만큼은 끝까지 일관되었으며, 그 이상 또한 현실적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설득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결국 '목표는 선하되 수단이 그릇된 자'라는 평가가 더 어울리는 것은 앤드루 라이언이 아니라 오히려 스티븐 암스트롱이며, 그가 왜 시대를 초월해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의 플레이어들에게 논쟁의 중심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시리즈 내 다른 최종보스들을 포함한 어지간한 인물들과 비교해도 암스트롱의 위상이 높을 수밖에 없다. 네이키드 스네이크와 베놈 스네이크는 최종 보스이면서도 주인공이라 암스트롱과 최소 동급 위상이라 비교하기 묘하고, 메탈기어 솔리드 2의 솔리더스 스네이크는 의도한 바가 전혀 아니었지만 결국 애국자들의 계획에 이용당했기에 신념의 빛이 형편없이 바래는 모습을 보여줬다. 메탈기어 솔리드 5의 스컬 페이스는 복수귀라지만, 명분과 별 관련도 없는 비약적인 논리로 영어 단어 하나조차 아는 사람은 전부 죽이겠다면서도 본인은 거기서 빼는, 대량학살을 저지르려 했으면서 내로남불 행태까지 보여줬기에 팬들의 공감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캐릭터성인 복수심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밀려나 거의 페이크 최종 보스가 되어버려 마지막으로 한 줌 남았던 개성마저 사실상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 외에 메탈기어 솔리드 & 트윈 스네이크의 리퀴드 스네이크는 빅 보스를 뛰어넘겠다면서도 자신이 지금 무슨 언행을 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여겨질 정도로 충동적인 모습을 보여서 멍청하다는 농담과 함께 찌질하다는 악평을 받았다. 또 리볼버/리퀴드 오셀롯은 다중스파이라 행적이 너무 복잡하여 세 줄 요약이 굉장히 어려우니 시리즈와 캐릭터성을 관통하는 밈 발견이 어려운데다가 이마저도 사실은 빅 보스, 즉 네이키드 스네이크의 의지를 충실히 계승하는 자라서 다른 인물들과 포지션이 자주 겹치기에 캐릭터성이 독창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더 보스와 핫 콜드먼, 제로 소령은 소재가 부족하며, 그나마 도널드 앤더슨이 시긴트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 다시 말해 메기솔3 때의 대사들이 2022~2023년간 막장 플레이의 일종인 "Cursed Guns" 밈에 끼어들면서 잠깐 재조명받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암스트롱에 비할 바는 전혀 못 된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캐릭터성과 사상 모두 거의 완벽한 미국인의 우상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최종보스라고 평가받는다. 물론 그가 명문대를 졸업했으며 예부터 미국인들의 유구한 미식축구 사랑을 대표하는 강팀인 텍사스 롱혼스와 연계되어 있기에 금수저 출신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하지만,[16] 만약 정말 어렵고 가난했던 환경을 극복하고 장학금을 받아가며 자수성가에 성공한 사람이었다면 정말 완벽한 미국인의 이상적 롤모델 그 자체가 된다.[17][18] 따라서 현재까지도 그의 사상을 이렇다 하게 논파할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기에 암스트롱의 안티들마저도 상호확증파괴 이론 자체를 부정하고서도 평화로이 살 수 있어야만 깨져나가는 핫 콜드먼의 논리와 더불어, 메탈기어 연대기의 악당들 중 가장 그 주장을 꺾기 어려운 상대라는 것은 인정하는 분위기. 이런 이유들로 비디오게임 역사상 가장 잘 만들어진 악역 중 하나로 평가된다.
사실 암스트롱의 사상을 논파하기 어려운 이유는 명확하다. 단순히 파괴, 지배, 복수심을 지향하는 여타 미디어의 대다수 악역과 달리, 그의 사상은 하나의 완결된 철학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을 비판하려면 보통 미디어에 약자로 상정되는 대중이 '항상' 약자이며 집단 광기에 빠지지 않는다는 대전제를 깔아야 하는데, 암스트롱은 그 전제 자체를 정면에서 부숴버린다. 그의 철학에서 대중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쪽수와 정당성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협박과 위협을 가하며 정치적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들 입맛에 맞는 독재자를 옹립하는 실질적 '강자'일 수 있으며, 동시에 집단사고를 벗어나 그 자신만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가능성을 품은 주체들의 집합이기도 하다. 이 주장 앞에서 약자의 보호라는 윤리적 명분은 더 이상 절대적인 무기가 될 수 없다. 작중에서 라이덴의 활인검이 암스트롱의 손에 맥없이 두동강나는 것도 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암스트롱의 철학에 반대하는 플레이어들에게조차 그의 사상은 '논파'의 대상이 아니라 또다른 사상으로 '응수'해야할 대상이라는 결론에 수렴하며, 그것이 바로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투쟁'의 의미이자 제작진들이 서사의 이면에 숨겨둔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각은 단지 암스트롱 개인의 일탈적 사고가 아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대중의 열렬한 지지에 의해 권력을 얻은 역사적 경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앨러스터 매킨타이어, 찰스 테일러, 마이클 샌델, 마이클 왈저 등 현대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조차도 절대적 도덕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체의 통찰을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다. 객관적인 도덕법칙은 증명될 수 없으며, 이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독선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의 철학은 바로 이 니체적 전제인 '도덕적 절대 기준의 부재' 를 받아들이면서, 그 위에 실질적 자유와 정의는 오직 개개인의 신념과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해석을 덧붙인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통해 정신적 강함과 고귀한 인간상(거리의 파토스)을 추구했다면, 암스트롱은 물리적 충돌과 이념 간 논쟁을 통해 자유와 질서를 동시에 다지는 새로운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추구한다.
물론 이 강력하고도 위험한 철학은 자유지상주의적 무정부 상태는 질서인가, 아니면 질서의 탈을 쓴 혼돈인가 혹은 공화주의적 질서는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아니면 전체주의의 씨앗을 내포하는가에 대한 격렬하고도 오래된 논쟁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깊고 방대하고도 심오한 토론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게다가 암스트롱과의 최종 결전은 단순한 액션의 클라이맥스를 넘어서, 현대 사회의 핵심 아젠다들, 예컨데 자유지상주의와 공화주의, 니체적 개인주의와 센델식 공동체주의, 나노머신을 통한 트랜스휴머니즘,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긴장 관계, 그리고 미합중국이란 나라의 건국이념과 본질 등을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철학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러한 복잡한 시대적 질문들을 응축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암스트롱이라는 캐릭터는 밈으로든 논평으로든 앞으로도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회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 옹호
2.1.1. 미국 건국이념과의 호응
게임이 출시된 2013년부터 북미 쪽에선 대호평을 받았다. 암스트롱이 라이덴을 줘패며 내뱉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결정되고, 청문회가 아니라 힘이 좌우하며, 개인이 법에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개인을 섬김으로서 인민들의 손에 권력과 정의가 있는 나라." 가 바로 초창기의 미국이었고 이런 면모가 극에 달했을 시절이 일판에서 언급하는 바로 그 서부개척시대로, 아주 거친 방식이지만 미국이라는 국가 그 자체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며 말한 것이기 때문. 물론 북미 사람이라고 하여 전부 그에게 열광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상을 실현하려는 방식이 잘못돼서 그랬을 뿐, 평화적인 국민성을 지녔다는 이미지가 강한 캐나다에서조차도 "인민들의 손에 정의와 권력이 있는 나라"라는 문구는 옳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북미 거주자들은 조상이 대부분 개척자였던 경우가 굉장히 많기에 개인주의 또는 가족주의적 전통이 대세가 된 국가 사람들이므로 이런 정서가 기반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미국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개인주의적인 정서도 비슷한 호주 역시 마찬가지라서 암스트롱에 대해 상당한 호평을 했다.미국이라는 나라가 태생적으로 상당히 특이한데, 유라시아 대륙에 위치한 나라들은 국가가 먼저 있었고 국민들의 권리와 자유가 국가보다 나중에 생긴 경우가 많다. 반대로 미합중국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란 개념이 먼저 있었고, 국가가 그 다음에 태어난 몇 없는 사례. 따라서 동양인들의 생각보다 개인의 권리가 엄청나게 크기에 일개 개인이 자격증만 있으면 중무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암스트롱의 사상은 이러한 미국인의 국가관 및 세계관에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다. 게임 캐릭터라 과장이 많이 들어있어서 더 극단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 총기규제론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상적인 배경과 세계관을 비롯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지 읺는 사람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미국만의 특이한 사회 논쟁의 관점을 잘 반영한 연설을 한 것이다.[19]
2.1.2. 실력주의의 필수불가결적 현실성
강자만큼의 기회와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약자의 처지와 신념을 무시한다는 라이덴의 비판에도 암스트롱은 바로 '네가 그 증인이다!'라는 식으로 반박한다. 조지 시어스에게 이용당하던 소년병 시절부터 지옥 같은 밑바닥에서부터 살아남고 기어올라와 솔리드 스네이크와 함께 세상을 구해내어 마침내 나중에는 인류 최강이자, 정황상 라이덴만 없었으면 그냥 당선되는 것은 물론 의회까지 장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권력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신을 쓰러트리니, 라이덴의 인생이야말로 암스트롱의 이상향 그 자체다. 이러한 라이덴의 삶 자체가 암스트롱이 말하는 ‘능력으로 인정받은 약자’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즉, 그의 신념을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그 신념대로 강자가 되어버린 약자뿐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라이덴의 활인검이 상징하는 '실체없는 정의'는 암스트롱의 손에 식칼처럼 가소롭게 부러졌으나, 자신의 신념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호드리게스의 무라사마는 그에게 상처를 주는데 성공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명분 없는 정의보다 "진정한 개인의 자유와 그것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힘과 실력"이라는 진실된 신념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상징적 장면이다.몬순이 지적했던 것처럼, 라이덴의 활인검은 자유라는 본질을 무시한채 그저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무작정 제거하고 억압하는 맹목적인 정의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강자 또는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면서까지 약자에 대한 연민과 다수의 윤리관을 강조한 정책과 전략들은 약자의 역량부족과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부추기며 오히려 새로운 갈등만 낳아왔다. 기본권 침해, 사회 발전 저해 등의 문제로 무의미한 혼란과 분쟁만 초래해 온 데다가, 심지어 그 방식을 모방하기까지 한 새로운 수구주의적 강자의 태동을 막지도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암스트롱의 철학은 단순한 힘자랑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순에 대한 통렬하고도 설득력 있는 반박으로 읽힐 수 있다.
암스트롱의 사상은 "실력과 관계없이 모두를 동등하게 대우하며 사랑해야 하며, 강자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따라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명제에 내재된 실현 불가능성과 위선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애당초 인간은 자신의 삶과 연결된 사람에게 더 많은 연민과 책임을 느끼는 존재이며, 타국인뿐만 어니라 설령 같은 자국민일지라도 모든 타인을 동일하게 대하라는 윤리는 현실에서 작동하기 어렵다. 사랑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 관계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감정과 태도이며, 강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라이덴과 암스트롱의 대결은 바로 이 지점, 즉 이념적 평등과 현실적 구분, 보편주의와 개별 주체의 책임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평등주의적·보편주의적 도덕은 애국심과 결합했을 때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며, 따라서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강력한 개인주의로 폭주하지 않도록 견제해야 마땅하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처럼 자국민들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오히려 자국민을 전쟁에 끌어들이며 '국가와 국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도 엄연히 현실에 존재한다.[20]
2.1.3. 라이덴의 각성에 끼친 지대한 영향
일각에서는 라이덴과 비슷한 입장에서 암스트롱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실상 이는 라이덴의 신념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라이덴 역시 정의를 내세우며 싸웠지만, 그의 정의는 일관된 체계라기보다는 내적 갈등과 모순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은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성인들에겐 모든 고통을 '자기 책임'이라 치부하며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가차 없이 앗아갔다. 활인검이라는 명분 아래 오히려 타인을 제압하고 심판하는 행위는, 그 자신이 비판하던 폭력의 논리와 다르지 않았다.이러한 내적 모순은 결국 '잭 더 리퍼'로서의 본성과 '법과 도덕을 넘어선 자신만의 의지'를 실현하는 암스트롱의 신념을 받아들이며 극복된다. 라이덴은 자신의 폭력을 정의로 포장하는 것을 포기하고, "내 신념에 어긋나는 악은 내가 원하니 처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약자를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도덕주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싸우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암스트롱의 철학과도 일정 부분 닮아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간과한 채 암스트롱의 철학을 라이덴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그를 ‘강자만을 위한 위험한 능력주의자’라며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라이덴의 변화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시선이다. 초반의 라이덴은 ‘약자는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이상에 집착하며 싸우지만, 적들의 연이은 도전과 사상적 공격 속에서 자신의 정의가 모순에 빠져 있음을 직면하게 된다. '강자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무조건 악이고 약자는 체제가 얼마나 모순적이든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 정의'라는 이분법은 현실의 복잡한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며, 그 자신도 결국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내적 붕괴는 몬순과의 전투에서 절정에 이르며, 결국 그는 ‘잭 더 리퍼’로서의 본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각성한다. 이는 곧, 자신이 정의를 독점하거나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본인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싸우겠다는 주체적 인간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라이덴은 비로소 ‘강자의 자유’란 무엇인지 체감하게 되며, 암스트롱이 주장한 “스스로의 힘으로 신념을 관철할 권리”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다. 마지막 전투에서 그가 암스트롱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 또한, 단순히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신념과 책임을 감수한 강자의 위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스트롱의 철학을 단순한 능력주의나 오만한 강자 우선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철학이 내포한 책임과 갈등, 그리고 그것을 수용한 라이덴의 복합적인 서사를 간과한 태도다. 진정한 비판은 마이클 샌델이 말했듯, 능력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보완할 방법을 고민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의 많은 비판자들은 ‘강자’라는 이유만으로 성취를 부정하고, 암스트롱의 철학에 공감하는 이들까지 폭력주의자로 매도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강자의 자유를 견제하자’는 주장과 ‘강자의 설득력 있는 주장과 냉혹한 현실인식, 그들이 가져오는 성과를 원천적으로 부정하자’는 주장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며, 라이덴조차도 마지막에는 그 간극을 체감하고 스스로 강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2.1.4. 자율적 강자에 대한 실존적인 정의와 미국인들의 지지
암스트롱의 연설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말하는 '강자'란 단지 물리적·경제적 힘을 지닌 기득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사회적 위치나 대중성 여부를 떠나,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하며 책임지는 ‘자율적 행위자'야말로 진정한 강자라고 본다. 반대로, 외부의 명분이나 체제, 밈에 휩쓸려 자신을 규정짓고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설령 다수이거나 사회적 영향력이 크더라도 '약자'로 간주된다. 즉, 그의 구분은 전통적인 강자/약자, 기득권/대중의 이분법을 넘어선 철저히 실존적 기준에 기반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암스트롱은 '대중' 역시 단순한 피해자나 선량한 존재가 아니며, 스스로 선택을 하지 않고 집단사고에 기댄다면 오히려 가장 강력한 억압자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는 메탈기어 시리즈 전반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네이키드 스네이크는 시대의 필요에 의해 '영웅'에서 '악'으로 전락했고, 솔리드 스네이크는 전쟁의 영웅임에도 끝내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은둔자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체제나 대중이 부여한 프레임 속에서 고립된 채 싸운 '자율적 존재'였으며, 오히려 다수라는 이름의 타자성에 상처받은 강자였다. 이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베놈 스네이크다. 그는 코지마 히데오가 "플레이어의 페르소나"라고 직접 언급한 캐릭터로, 메탈기어 시리즈가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정체성의 성찰을 상징한다. 베놈은 정의로운 선인이라기보단, 시대에 저항하다 '악'으로 낙인찍힌 자로, 체제 바깥에서 스스로의 신념을 관철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단지 비극적이거나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게 아니라, 시대와 집단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 자율적으로 살아간 존재의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베놈이나 네이키드 스네이크, 그리고 그 유산을 잇는 오셀롯은 암스트롱의 철학에 매우 가까운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비판 측은 일관적으로 암스트롱이 마치 자본이나 무력을 지닌 소수의 강자만을 위한 사회를 주장한 것처럼 몰아붙이지만, 이는 그의 철학을 단지 유라시아의 시선에서만 이해한 편협한 시각이다. 실제로 암스트롱의 연설은 '사회적 강자'가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주체적 개인'을 위한 철학에 가깝다. '대중의 이상향'은 공동체주의와 중도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상기했듯이 그가 말하는 '강자'는 신체적 우위나 계급적 특권이 아니라, 외부의 밈과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존재다. 암스트롱은 연설에서 "권력과 정의가 인민의 손에 돌아온 나라"를 만들겠다고 명시하며, 기득권 엘리트가 전쟁경제를 이용해 독점하던 정치·경제 권력을 해체하고, 억압당했던 대중에게 선택과 결단의 권한을 되돌리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소수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암스트롱의 이상향이 '아나키즘적'이라고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기도 한 게 이때문이다. 게다가 암스트롱의 발언이 가장 큰 지지를 받은 곳은 현실에서도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미국의 평범한 게이머들 사이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의 이상이 일부 특권층만의 논리가 아니라, 대다수 미국인에게 익숙한 개척정신과 자유지상주의적 가치관을 진정성 있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즉, 이 메시지는 단순히 약육강식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 평등의 회복'이라는 미국의 본질적 자유주의 이상에 가깝다. 요컨대 암스트롱은 "힘 있는 소수의 특권"이 아닌, "신념을 가진 다수의 주체화"를 목표로 삼은 인물이며, 그가 말한 '강자의 사회'란 강제적 약탈의 세계가 아닌 자유를 실천할 수 있는 능동적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사회에 가깝다.
즉, 암스트롱이 말한 '위대한 미국인'이란 단순히 체제 내에서의 승자가 아니라, 외부의 밈이나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자립적으로 구현해내는 존재를 의미한다. '강자'란 바로 이런 자율적인 주체이며, 대중이든 엘리트든 간에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외부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의 철학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 개개인의 가능성과 자유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낙관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인물들, 즉 솔리드 스네이크, 빅 보스, 오타콘, 써니 등도 역시 암스트롱과 유사한 입장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부분 체제 바깥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며, 현실 사회 속에서는 쉽게 이해받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예컨대, 어린 시절부터 AI 시스템을 해킹해낸 천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무기 개발에 몰두하는 과학자,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이상을 고수하는 군인 등은 모두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자기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자율적 강자로 묘사된다. 오히려 이들은 암스트롱이 말하는 '자율성과 책임을 지닌 강자상'에 가까운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팬들은 암스트롱의 주장에 단순한 파괴적 성향이 아닌, 현대 사회의 대중성과 도덕성 간의 모순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메탈기어 시리즈 전반의 주제이기도 한 '밈(meme)' 개념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작중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자신도 모르게 밈에 휘둘려 극우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언행을 반복하고, 파키스탄을 침공하자는 주장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장면이 있다. 이는 선진국 대중이 밈을 통해 사고를 통제당하고,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자, 현대 정치의 극단화를 경고하는 예언적 서사로 읽을 수 있다.
2.1.5. 개인의 무장과 주체적 자유정신의 필요성
이러한 시선은 현실 정치에도 이어진다. 매우 과격한 언행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암스트롱의 연설에서 드러나는 미디어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Fuck the Great America"라고 말할 만큼 맹목적인 애국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다시 곱씹어 현실에 대입해보면 그가 지적한 바는 더욱 명확해진다. 이는 다수의 힘이 정치에 무분별하게 개입해 견제 없이 폭주할 수 있다는 미국 헌법 체계의 우려를 인용하며, 단순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신화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지켜주는 균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약자는 언제나 정의롭고, 강자는 언제나 억압자라는 이분법은 허구이며, 어떤 권력도, 심지어 대중의 권력조차 상호 견제 없이 휘둘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총기규제를 하지 않는 이유도 단순히 미국인들이 힘을 숭상하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런 개개인 간의 상호견제가 필요하다는 전통적이고 민주적이며 합리적인 인식 위에 성립되어 온 것이다. 결국 그는 ‘진정한 자유’란 강자·약자라는 이분법을 넘어, 모든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사회라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 대중의 권력까지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물론 피의 투쟁은 가급적이면 피해야 하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억제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쟁을 억제하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무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평화란 말 그대로의 비폭력이 아니라, 남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는 국가 단위의 안보 뿐 아니라, 개인 수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고, 자신의 무력에 대한 책임의식조차 없다면, 그 사회는 오히려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국가의 독재와 포퓰리즘적 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진정한 평화란 단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의지와 준비를 통해 '실현'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처럼, 평화는 요구하거나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행하고 유지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국가의 통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체적인 시민의 무장된 자유 정신이다. 암스트롱이 말한 무력의 분산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 것으로, 단지 전쟁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유가 뿌리내린 공동체가 전쟁을 예방하고 스스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신념을 가진 주체들 역시 전체주의로 빠질 수 있다고는 하나, 정작 현실 역사 속에서는 국가라는 권위가 도리어 개인을 위협하는 가장 거대한 폭력 주체로 작용했던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다. 당시 대지진으로 인해 사회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일본 정부와 군경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폭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사실상 방조하거나 조장했다. 이에 따라 일본 민간인들과 자경단, 경찰조차도 조선인을 색출하고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 수천 명의 조선인이 단지 "국가가 아닌 타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국가 권력이 극도로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오히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허위 정보와 민족주의적 선동을 통해 소수자를 제거하려 했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인들은 무장조차 하지 못했고, 일본인들이 휘두르는 도검과 총기, 심지어 몽둥이와 도구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했다.
국가와 다수 대중이 결탁하여 무고한 이들을 제거한 이 사건은, 국가의 보호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개인이 얼마나 쉽게 체제에 의해 희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예가 바로 1992년 LA폭동 당시 한인 커뮤니티의 무장 대응이다. 당시 미국 경찰은 백인 거주지나 대기업 상권 보호에 집중하며 한인타운은 사실상 방치했다. 이에 맞서 한인 상인들과 주민들은 경찰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 소총과 권총 등으로 무장한 채 상점 옥상에 올라가 자경 활동을 펼쳤다. 경찰과 공권력이 철수한 공백 상태 속에서, 한인들은 무장을 통해 자력으로 자신과 공동체를 지켜냈으며, 이들은 약자가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주체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두 사례는 국가나 다수에 의해 무고한 이들이 희생될 수 있다는 공통된 위험 속에서도, 무장을 통한 자위권 확보가 억압에 대한 실질적인 억제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대조적 교훈을 제시한다.
이 두 사례는 암스트롱의 주장, “진정한 자유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책임 아래 성립하며, 누구도 강자가 보호해주길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철학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무장한 자율 공동체는 때로 폭력적 국가 권력보다도 더 확실한 안전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은, 단지 개인이 공동체의 보호 아래 있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안전한 것이 아니며, 국가 자체가 폭력과 억압의 수단으로 돌변했을 때, 개인이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자기방어 수단, 즉 무장할 권리를 갖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최후 보루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따라서,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무장한 개인들의 상호 억제에 기반한 자유사회'는 단순한 이상주의적 선언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언제든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에 대한 실질적 대응책이자 가장 실용적인 정치철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2.1.6. 최강자로서의 공명정대함과 강자중심사회의 합리성
자유지상사회에서 전체주의적 신념을 지닌 인물들은 자기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이전에 추구하던 체제의 모순으로 탄생한 존재들이라고 반박하면 그만이다. 암스트롱의 사상 역시 중우정치나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지 않냐고 오해하는 시선도 있지만, 정작 그는 전체주의적 인물들조차 자유가 억압된 체제의 산물로 보았다. 라이덴과 암스트롱이 처음 직면했을 때 그가 전체주의, 황금만능주의, 국가주의에 대해 '멍청이들이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것'이라며 명확하게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그는 자유지상주의 사회에 등장한 독재자적 강자가 어떤 개인의 타락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체제의 모순, 특히 신념없는 대중들의 체제에 대한 허황된 복종 욕망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라고 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암스트롱은 자유를 억누르는 다수 대중이나 정치 엘리트들, 즉 '필요악'으로 포장된 억압적 권력 구조에 오히려 더 비판적이었다.그렇기에 자신의 권력과 권위에 도전은 커녕 한 치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졸렬한 중우정치와 전체주의와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암스트롱은 자신의 철학에 반하는 자가 등장하는 것조차 허용한다. 단, 그것이 개인의 신념과 자유를 기반으로 한 강자일 경우에만. 예컨대 라이덴, 솔리드 스네이크, 빅 보스처럼 체제와 대중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철학과 힘을 증명한 이들이야말로, 암스트롱의 신념이 허용하는 정당한 '적'이자 '심판자'다. 결국 암스트롱은 그런 강자들과의 충돌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실제로 그 자신이 패배했을 때도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처럼 암스트롱은 ‘누가 정의로운가’를 기준으로 적과 아군을 나누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개인이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가, 그에 맞는 힘을 갖추었는가였다. 따라서 그를 쓰러뜨린 라이덴조차도, 단순한 반대자가 아니라 암스트롱이 바랐던 '이상적인 적수'였다.
암스트롱이 강조하는 바는 단순히 본인이 ‘최상위 강자’로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주장한 것은, 개개인이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무력을 행사할 자유, 곧 ‘자기 철학을 증명할 수 있는 권리’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반박으로 종종 제기되는 "나노머신 억제제나 해킹 장비로 무력화될 수 있는 자들이 싸우는 게 어떻게 강자의 시대냐" 식의 비난은, 그의 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다. 암스트롱은 자신에게 맞설 수 있는 이들이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개인의 신념과 능력을 바탕으로 한 정당한 도전이라면, 기꺼이 싸움을 받아들여 그것을 즐길 것이고, 설령 패배한다면 그 결과마저 담담히 수용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꺾은 라이덴의 승리를 인정하며 의연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이 바로 암스트롱이 말한 ‘투쟁의 자유’이자 ‘개인의 해방’이다. 즉 누군가의 자유는 다른 이의 자유와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 충돌을 통해 누가 자신의 신념과 능력으로 더 많은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결정짓는 과정이 곧 투쟁인 것이다.
따라서 이건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강자와 약자의 개념은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무엇보다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자유지상주의적 강자와 공동체주의적 약자 중 누가 더 정의로울 지 확언할 수 있는 사람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 한 쪽이 악이 아니라, 그저 서로 상충되는 정의를 신봉하고 있을 뿐이며, 한 측을 악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전체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고로 서로 다른 신념과 처지에 있는 이들 사이에는 언제나 충돌이 존재할 것이며, 그 충돌을 억누르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하고 능력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암스트롱의 핵심 철학이다. 그의 최종전에서 흐르는 곡이자 암스트롱과 라이덴의 심정을 대변한 bgm인 ‘It Has To Be This Way’는 이 철학의 정수를 상징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가사는, 싸움과 갈등이 이상적인 사회에서도 필연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선언과도 같다.
오히려, 약자들이 언제나 강자의 보호만을 받으며 동시에 그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사회야말로 모순적이다. 그런 체제는 약자에게도 일방적인 선의를 강요하며, 강자에게는 끝없는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비대칭 구조다. 진정한 공화국의 정의란 그런 이상주의적 온정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힘과 신념으로 부딪히고 증명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다. 그리고, 만약 현실에 라이덴이나 솔리드 스네이크 같은 존재가 실제로 등장한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압도적인 무력과 자기신념을 자유가 아닌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억제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21] 즉, 강자가 존재할 수 없는 세상, 모두가 평준화된 세상을 만들겠다는 시도야말로 오히려 진정한 전체주의로 이어지는 발상일 수 있다.
2.1.7. 비판 측의 본질을 벗어난 비난
암스트롱에 대한 ‘금수저 논란’은 사실상 본질을 벗어난 비판이다. 일본 내수판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의 청년기 배경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으며, 자수성가한 인물인지, 혹은 트럼프처럼 상속으로 성장한 인물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단지 라이덴과 비교했을 때 그만큼 극단적인 절대 빈곤 출신은 아니었을 뿐이다. 그러나 라이덴처럼 가족도 없이 죽지 못해 살던 환경과 비교할 때, 대부분의 선진국 빈곤층조차도 라이덴 눈에는 ‘기회의 땅’에서 태어난 부자처럼 보였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암스트롱을 '강자 출신'이라 단정 짓는 건 일종의 착시다. 암스트롱의 캐릭터성에 확실히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등의 냉전 시기 대통령들도 각각 빈곤층과 중산층이었지만 라이덴처럼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충분히 라이덴 눈에는 이들도 자신보다 강자 출신의 배경이다. 게다가, ‘암스트롱이 약자가 아니었으니 약육강식의 정당성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비판은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정작 그러한 비판을 하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실제로 게임을 즐기고 메탈기어 시리즈 전반의 연대기를 탐독할 시간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진정한 절대 빈곤층이라면 게임은커녕 생존조차 위태롭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라이덴처럼 고통을 겪은 경험 없이도 약자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모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암스트롱이 '사다리를 걷어차려고 한다'고 비판하면서도, 라이덴같은 극빈층들 입장에서는 비판측 역시 이미 사다리 위에 올라간 사람들이 이중성을 드러내며 원치도 않는 공동체주의의 이상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또 중요한 점은, 라이덴은 암스트롱이 말한 '이상향'의 대표 모델이지, 성공의 유일한 길을 제시하는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암스트롱은 "라이덴과 같은 방식으로만 강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라이덴은 그의 철학을 실현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대표적인 하나를 상징하는 인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비판자들은 라이덴의 극단적인 과거를 들어, 암스트롱의 논리를 "라이덴 같은 비정상적인 케이스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이는 암스트롱의 핵심 사상인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고, 각자의 신념과 투쟁으로 삶을 증명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왜곡하는 비약적 해석이다. 암스트롱이 바라던 세계는, 모든 인간이 똑같은 방향으로 성장하라는 일률적인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힘과 신념을 발휘할 수 있는 다원적 자유의 터전이었다. 라이덴은 단지 그 중에서도 자신의 내면의 괴물과 싸워 이겨낸 독자적인 해석의 예일 뿐이며, 그 사례를 일반화해 암스트롱의 철학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공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암스트롱이 금수저 출신일 것이라는 비판은, 북미보다는 오히려 트럼프 집권 이후의 분위기에 더 민감한 한국, 일본 등지에서 강하게 제기된 경향이 있다. 실제로 북미에서는 게임 출시 당시 트럼프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명문대 입학 관련해서 트집잡힌 것 제외하고는 암스트롱의 캐릭터성은 트루먼이나 아이젠하워 같은 '냉전기의 실용주의적이고 강인한 대통령’의 이미지에 더 가까이 인식되었다. 즉, '금수저=위선' 이라는 도식은 문화적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다. 북미에서 금수저 논란이 재점화된 건 트럼프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고 대안우파 플레이어들로부터 그와 암스트롱의 정치적 행보가 유사하다는 점이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암스트롱이 실제로 금수저 출신이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그의 철학은 능력, 신념, 자유의지라는 기준을 통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라이덴을 포함한 수많은 강자들의 신뢰와 도전을 이끌어냈고, 스스로의 무력과 신념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또한 그의 철학은 미국 자유주의 전통과 완벽히 호응하며, 단순히 부와 지위가 아닌, '개인의 힘으로 시대를 돌파할 자유'를 강조한다. 결국, 공동체주의나 평등주의 관점에서 암스트롱의 철학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금수저라고 비난하며 그 철학의 정당성까지 부정하려 드는 것은 실질적인 근거가 몹시 부족하다. 실제로 마이클 샌델조차도 강자의 성과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자고 제안했을 뿐이다. 요컨대, 암스트롱은 비판자들이 상정하는 단순한 '기득권 포식자'가 아니라, 시대를 뚫고 나갈 만한 능력과 신념을 지닌 강자였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존재와 철학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다. 즉 암스트롱의 신념은 능력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철학의 극단적인 실천형으로 보는 편이 옳다.
또 한때 문화적 정보 전달자를 뜻하는 MEME과 신체 유전자인 GENE을 구분하지 못한 네티즌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백인우월주의자가 아니냐는 논쟁이 있었으나, 이는 대안 우파와 SJW 성향의 플레이어들이 분쟁하는 과정에서 파생한 아무 의미 없는 키배일 뿐이다. 암스트롱의 행적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가 인종, 성별, 출신 배경에는 관심이 전혀 없으며, 오직 인간을 ‘사상과 능력’이라는 기준으로만 평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미스트랄과 사무엘 호드리게스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을 고위 간부로 기용한 점만 보더라도, 그는 결코 외형적 차이에 근거해 차별을 두는 인물이 아니다. 애초에 그는 전체주의와 민족주의 등 집단주의 사고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줄도 모르는 신념 없는 멍청이들이나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며 선거운동에 유용하게 이용해 먹은 전적이 있는 고로 인종주의와는 정반대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다. 오히려 인종주의와 국가주의는 그가 선거 전략으로 이용한 뒤 냉소적으로 해체하려 했던 개인을 억압하는 대중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상에 해당한다.
따라서 만약 그가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위험한 독재자로 변모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그 캐릭터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암스트롱의 핵심 가치관은 "힘을 가진 자라면 그 힘에 걸맞은 신념을 지니고 자유롭게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권력을 가진 정부나 제도뿐 아니라, 공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개인이 스스로를 지킬 권리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예컨대 무장을 통해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소수 유색인종들에게는 "스스로 이익과 안전을 잘 사수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미국인"이라 평가했을 가능성이 크고, 반대로 공권력에 기대어 무사안일에 빠진 이들은 WASP같은 전통 백인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경멸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중에서 가장 큰 윤리적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인 '모두에게 싸울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본인 동의도 없이 어린이들의 뇌를 추출해 사이보그 병사로 만드는 행위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옹호 측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 또한 단순히 사이보그 병사들을 수족으로 부리려는 것이 아닌, '약자에게도 투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그의 철학의 과격한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약자를 단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보지 않았고, 그들 역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결론적으로, 암스트롱은 피부색이나 혈통, 국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개인을 중시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인류가 힘의 격돌이든 논리의 싸움이든 끊임없는 충돌과 경쟁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나가며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그를 인종차별주의자로 생각하는 것은 그저 오류이며, 또 단순히 약육강식주의자라고 규정짓는 건 그의 사상을 지나치게 축소한 오독이라 할 수 있다.
즉, 암스트롱의 사상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강자가 자유롭게 싸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그의 핵심 철학에 대해 보편윤리적 관점에서 약육강식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암스트롱이 금수저 출신이라든가, 인종차별주의자라든가, 자수성가한게 맞냐든가 하는 식의 비판 아닌 비난은 그의 사상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 채 곁가지를 때리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에 불과하다.
2.1.8. 자유주의를 총망라하는 철학과 강자들을 아우르는 리더십
그리고 설령 금수저라고 한들, 암스트롱은 단지 강한 힘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라, 데스페라도 간부들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강자들'조차 그를 충실히 따르고 깊이 공감할 만큼 강력한 신념과 리더십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각 챕터 보스들과 라이덴의 뼈가 있는 대화는 이 점을 잘 보여주며, 암스트롱의 이상이 결코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사상과 경험을 아우를 수 있는 철학이라는 점을 암시한다.그 뼈대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 LQ-84i(=블레이드 울프): 본의는 아니지만 웬만해서는 명령엔 조금의 의문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대가를 치뤄야하는 것과 그에 따른 파멸 뿐이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러한 명령에 대한 의무감으로 싸우는 나를 어디 한번 이겨봐라. 애초에 너도 나처럼 행동하지 않은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LQ-84i는 데스페라도 엔포스먼트 소속 시절, 미스트랄의 통제 아래 '명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명령 위반 시 자동으로 소거되도록 설정되어 있었고, 이는 사실상 자유의지를 봉쇄당한 상태였다. 그는 라이덴과의 대결에서 이러한 조건을 전제로 "명령에는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수행하는 그 명령의 정당성을 강자의 힘에 의해 반박받고 증명되기를 바라는 모순된 자세를 보인다. 이 장면은 신념없이 사는 순응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암스트롱의 핵심 사상, 즉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논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LQ-84i는 단순한 전투 인공지능이 아니라,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존재가 어떻게 자율적 사고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례다. 그는 라이덴과의 싸움, 독토어와 동료들에 의해 목줄이 해제된 경험, 무엇보다 호드리게스의 자유주의적 신념으로부터 점차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 각성하며, 이는 결국 명령에 복종만 하던 약자조차 자율적 판단력을 통해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낸다.결과적으로, 블레이드 울프는 암스트롱이 말하는 '신념을 갖고 자기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이란 이상을 충족시켜가는 과정 그 자체이며, 작품 전체에 흐르는 자기결정권과 정신적 해방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구현해낸 중요한 서사적 장치다.
2. 미스트랄: 전장에서의 싸움의 결과는 약자든 강자든 상관없이 죽음으로 이끌 뿐이지. 너 역시 결국에는 이상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는 해도 그 시시한 이상에 분수도 모르고 무참한 살육을 동반한 주제에 언제까지고 지킬 수 있을 지 모르겠구나. 네 명분은 곧 네 목적이 아닌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할 거야.
미스트랄은 라이덴이 내세우는 '정의'와 '이상'이 결국 전장에서 피로 얼룩지고, 스스로도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고 있음을 경고한다. 그녀는 "명분은 곧 폭력의 수단이 된다"는 말을 통해, 도덕적 명분조차 결국 피로 증명되는 세계에서는 이념 자체가 공허한 구실이 되며, 누가 '정의'인가를 따지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냉소주의를 드러낸다. 이러한 발언은 단순한 이상주의 비판을 넘어, 이념이 체계적으로 타락하는 구조, 즉 현실 권력 속에서 이상이 어떻게 왜곡되고 소비되는가를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내재적 부패 가능성을 경고하며, 명분과 신념조차도 진정한 자아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 조작되고 휘둘릴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암스트롱이 말하는 '자기 신념을 따르는 강자'란, 바로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나 남이 부여한 이상이 아닌, 자신이 체득한 신념과 힘을 스스로 증명하는 존재다. 미스트랄은 이러한 세계의 잔혹함을 경험한 자로서, 누군가의 정의를 대신해 싸우는 '대리 투쟁'에 대한 허무를 내비치고,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실의 법칙'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대사는 '자기 신념의 외주화'에 대한 경고이며, 이상을 명분 삼아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의 자기합리화에 내재된 위험을 드러낸다. 그리고 진정한 강자란 남의 명분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우러난 신념에 의해 싸우는 존재임을 더욱 강조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3. 몬순: 아이들 같은 약자들은 지켜야 하고, 어른들 같은 사회적인 인물들은 모두 자기책임이라고? 그들도 각자의 사연과 행복과 인간성이 있어! 너는 그저 법과 권력을 등에 업고 네가 앞세운 활인검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너의 자유와 목숨은 중시하고, 그들의 자유와 목숨을 닥치는 대로 빼앗는 독선적인 위선자에 불과해. 그러니 이제 진실을 받아들이고 죽어라.
몬순은 라이덴의 '어린이는 보호하고 어른은 책임진다'는 도식을 위선이라 지적하며, 명분 아래 저지른 살육을 냉소적으로 조롱한다. 이는 명분을 앞세운 도덕적 이중잣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즉 라이덴이 '약자는 보호하고 강자는 책임진다'고 외치지만, 실상은 그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점을 들추어낸다. 그는 라이덴이 활인검이라는 명분을 들먹이며 법과 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정작 그 법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자유와 생명을 침해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도덕적 명분은 언제든 권력의 언어로 바뀌며, 결국 타인의 삶을 짓밟는 정당화 도구로 변질된다는 통찰이다. 몬순은 이를 통해 형식적인 정의와 현실의 괴리를 폭로한다. 라이덴이 믿는 명분과 도덕은 전장에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정당성의 언어로 기능하며, 실제로는 그 누구도 온전히 정의롭지 않다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드러낸다. 나아가 그는, 모든 인간은 복잡한 사연과 고유한 삶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도덕적 선악 이분법의 폭력성을 경계한다. 이는 암스트롱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암스트롱은 '진정한 정의'란 타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이나 도덕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을 증명하는 싸움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결국 몬순의 대사는, '이상과 도덕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에 대한 회의이다. 진정한 자유란 남의 도덕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에 기반한 자율적인 행동과 본성을 받아들이는 결단에서 비롯된다는, 암스트롱 철학의 또 다른 변주라고도 볼 수 있다.
4. 선다우너: 애국자들은 그저 전쟁의 수요와 공급을 조정한 이들일 뿐, 사실 전쟁이나 군대는 그들과 같이 어떠한 나쁜 놈들이 하루아침에 인류에게 내린 저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본래 인류가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집단을 만드는 행위에서부터 시작되어, 결국 자신을 구원하고 상대를 파멸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했지. 집단 자체가 곧 그것을 스스로 수호할 군대로 이어지는 것이란 말이지. 즉, 아이들이 원래부터 잔혹한 본질을 타고난 이유도 바로 그것이라고. 그래서 난 만인에게 자신의 본질을 인정하게 만들 생각이다.
선다우너는 전쟁과 군대라는 개념이 애초에 애국자들 같은 상위 구조나 거대 조직이 만들어낸 '인위적 산물'이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된 본능적 욕망, 즉 "자신을 지키고 상대를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기원했다고 말한다. 아이들조차 그러한 본능을 타고났으며, 이는 단지 사회에 의해 주입된 것이 아니라, 투쟁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 조건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선다우너는 이러한 욕망을 국가나 기업 같은 조직이 관리하거나 통제하는 형태의 전쟁, 즉 '제도화된 폭력'의 형태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애국자들처럼 전쟁을 수요와 공급의 균형으로 조정하고, 인간의 충동마저 효율과 통제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냉소적이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을 왜곡하고 억압하는 위선적 체제라고 본다. 이는 그가 애국자들의 전쟁 통제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으며, 이제는 "투쟁을 원하는 자들이 각자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따라서 선다우너가 말하는 전쟁은 조직화된 국가폭력의 연장선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을 인정하고, 그것을 회피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마주하는 것에 가깝다. 이 점에서 그는 암스트롱의 철학에 경도된다.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자유란 조직에 소속된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로 힘을 해방하는 '개인'이 되는 것이며, 선다우너 역시 그러한 자유를 추구한다. 즉, 그가 말하는 "모두가 본질을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말은, 인간의 폭력성과 투쟁 본능을 더 이상 억압하지 말고,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실천하라는 도전이다.5. 사무엘 호드리게스: 전쟁은 돈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세계의 불황을 해결하기 위해 필수적이지. 애초에 너도 네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해도 괜찮을 것 같은 건 얼마든지 있잖아? 구태여 거창한 이상을 가지지 않고 방황하더라도, 그 행동 자체만으로도 인정을 받으며 묵묵하고 조용히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도 나쁘지 않고 말이야. 그러니 이제 결판을 내자. 누가 옳은지는 역사가 결정할 일이고, 우리는 그저 칼잡이로써 싸울 뿐이니까.
사무엘 호드리게스는 이상이나 명분 없이도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으며, 최후엔 “누가 옳은지는 역사가 결정할 일”이라 말하며 라이덴과 결투를 벌인다. 그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삶을 상징한다. 이는 곧 이념 없는 자유주의, 개인의 결단과 행동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상이다. 샘은 끝까지 자유로운 결단과 책임을 수반한 전사로서의 삶을 보여준다. 즉 그는 어떤 이념이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행동과 결단 자체로 의미를 찾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의 전형이다. 샘은 라이덴에게도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관철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암스트롱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샘은 암스트롱과의 철학적 연대 속에서 함께 싸웠고, 그가 암스트롱과 끝까지 함께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은 아니다. 그가 라이덴과의 최종 결투 전 블레이드 울프에게 한 말, "내가 이긴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도 결국 거기까지 밖에 되지 않는 존재일 뿐일테니. 하지만 내가 진다면 그가 그 자신이 맹세한 대로 검 한 자루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세상까지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유언은 오히려 라이덴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겠다는 태도였으며, 검과 밈을 남긴 것은 패자의 인정이자 신념의 계승이었다. 결국 암스트롱의 사상처럼 '강자는 스스로 행동하고, 책임을 지고, 스스로의 길을 간다'는 철학을 실현한 산 증인인 셈이다. 비록 샘은 암스트롱과 싸우고 패했지만, 그 철학은 마지막까지 이어져 라이덴에게까지 계승된다. 명분보다 행동, 이념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메탈기어 라이징 세계관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유주의적 실존주의를 구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이처럼 암스트롱은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상처를 지닌 강자들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철학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따른 인물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보스전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밈(MEME)이 충돌하며 하나의 정치철학적 대화를 이루는 구성이기도 하다. 위의 해석들을 읽어보면, 이들 각각의 사상은 암스트롱의 전체적인 철학의 일부분을 담당하며 자연스럽게 하나의 강줄기같은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라이덴 역시 암스트롱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모순을 깨닫고 그가 옳았음을 인정한다. 몬순과의 전투에서 잭 더 리퍼로서의 본성을 받아들이며, 암스트롱과의 최종전에서 그가 그토록 부정해오던 '힘으로 법과 도덕을 초월하는 정의'로 귀결된다. 이는 암스트롱의 신념을 전면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답을 찾았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그의 철학을 계승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는 '라이덴이라는 한 정의를 위해 살아온 사이보그 전사가, 암스트롱이라는 또 다른 정의를 대표하는 전사와 충돌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심지어 암스트롱이 라이덴에게 동맹을 제안했으나, 라이덴이 그 제안을 거부한 장면은 곧 이 게임이 단순한 수저 논쟁이 아니라 공화주의와 자유지상주의라는 두 철학 간의 충돌이라는 주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1.9. 암스트롱을 계승한 라이덴과 제작진들의 메시지
또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게임 내에서 라이덴과 암스트롱이 처음 등장할 때 입고 있는 복장이 완벽히 동일하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검은 바탕의 정장에 흰색 셔츠에 노란색 넥타이를 매고 등장한다. 이 의상은 단순한 디자인상의 우연으로 보기에는 어렵고, 스토리 전개를 고려할 때 분명한 복선적 의미를 지닌다. 암스트롱은 처음부터 자신이 꿈꾸는 자유와 이상을 위해 싸우는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라이덴은 그 이상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위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라이덴은 점차 암스트롱의 신념과 대면하고, 결국엔 그의 철학과 가치관 일부를 내면화하게 된다. 그 여정의 종착점이 바로 결말부에서 암스트롱의 실존주의적인 이상을 죽는 순간까지 실현했던 사무엘 호드리게스의 검을 이어받아 싸우는 장면이다.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라이덴과 암스트롱이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연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둘은 사실상 같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셈이며, 초반의 시각적 유사성은 결국 하나의 이상으로 수렴하게 되는 운명적 관계를 암시한다. 다시 말해, 라이덴은 단지 암스트롱을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계승'한 인물이며, 암스트롱이 그에게 남긴 이념적 유산을 실현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후계자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메탈기어 시리즈 특유의 밈(meme)과 유산의 계승이라는 주제와도 맞물린다. 즉, 암스트롱의 옷을 입은 라이덴은, 그가 단순히 암스트롱을 부정하거나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의미를 재해석해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이어간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라이덴은 암스트롱의 신념을 자신의 방식으로 계승했다. 게임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독토어와의 통화 중 암스트롱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그렇지, 역시 수요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처럼… 나는 나만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말을 남긴다. 이 순간 라이덴의 눈은 통각 센서 해제도 없이 리퍼 모드로 빛난다. 이는 단지 강자나 악당만이 아닌,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자라면 누구든, 각자의 사연이나 인간적 고뇌가 있더라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결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는 전쟁경제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모든 사이보그들, 나아가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옹호하는 모든 적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몬순이 지적했던 딜레마, 즉 어른들에게도 나름의 행복과 인간성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암스트롱식 결단의 실현이다. 이때 비판자들은 그가 암스트롱을 쓰러뜨렸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안심하지만, 정작 라이덴은 그 누구보다 암스트롱의 정신을 깊이 체득한 자가 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암스트롱을 물리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의 싸움을 통해 외면해왔던 자신의 내면과 진실하게 마주했으며,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위선 없는 신념을 관철하는 강자로 거듭났다. 암스트롱이 요구했던 삶의 태도, 즉 허울뿐인 명분과 제도적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로써 라이덴은 폭력적 수단이 아닌, 의식과 결단을 통해 암스트롱의 핵심 가치인 '자율성과 투쟁의 자유'를 재해석하고 실천한 정신적 계승자로 볼 수 있다.
2.1.10. 자유를 억압하는 '적'에 대한 근본적 통찰
또한 암스트롱이 강조한 "모든 인간은 국가, 기업, 도덕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한 전쟁을 치를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발언은,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 더 보스가 네이키드 스네이크에게 남긴 대사와 맥을 같이한다.시대의 상황에 따라 적은 달라진다. 그 가운데 우리들 군인은 농락당하지. 너를 훈련시킨 것도 너와 내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야. 우리들의 힘은 동료를 상처입히기 위한 것이 아냐. 그러면, 적이란 건 뭐지? 시간의 흐름이 관여치 않는 절대적인 '적'이란? 그런 적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아. 왜냐하면 적은 언제나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적'일 뿐이야.
더 보스는 시대에 따라 '적'이 달라지며, 군인은 언제든 그 흐름에 농락당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녀의 뜻을 이어받은 네이키드 스네이크는, 국경과 이념을 초월해 군인의 자유 의지를 지킬 수 있는 공간, 즉 아우터 헤븐을 창설했다. 이는 '국가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개인주의적 자유 실현이라는 점에서 암스트롱과 일정 부분 궤를 같이한다.하지만 암스트롱은 보다 과격한 해법을 택한다. 그는 '절대적인 적'을 설정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거하려는 자들 자체를 '상대적인 적'으로 규정하는 공격적 자유주의자다. 그는 조직화된 체계, 이데올로기, 도덕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다수를 자유의 가장 큰 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국가든, 기업이든, 시대의 흐름이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은 '적'이 될 수 있고, 필요하다면 폭력적으로 파괴해야 한다고 믿는다. 절대적인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이를 파괴하며 내부의 결속을 다져 자유를 억압하는 하는 냉전의 모순을, 더 보스든 암스트롱이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즉, 더 보스가 적의 상대성을 통해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평화를 강조했다면, 암스트롱은 자유의 절대성을 통해 억압 구조와 그것을 숭앙하는 자들을 모조리 상대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개인의 투쟁을 정당화한다. 이 차이는 결과적으로 네이키드 스네이크가 동료와의 연대를 지향했다면, 암스트롱은 오직 개인의 신념과 능력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인물이라는 점으로 귀결된다.
국가 간 대결의 상징인 냉전과 신냉전 같은 거대한 갈등은 물론, 현대 민주주의 국가 내부에서도 '절대적인 적'을 만드는 구도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념, 종교, 성별, 가치관 등 다양한 정체성을 둘러싸고 서로를 '적'으로 규정짓는 진영논리와 마녀사냥, 그리고 이를 통해 분열과 갈라치기를 조장해 권력과 이익을 챙기는 정치인과 언론의 행태가 대표적인 예다. 스티븐 암스트롱은 이런 현대 사회의 허점을 날카롭게 간파했고, 대중의 분노와 불만을 흡수하는 포퓰리스트를 연기하여 높은 지지율을 얻은 뒤 그 구조 자체를 해체하려는 혁명가로 등장한다. 겉으로는 트럼프와 비슷한 모습을 띠지만, 내면적으로는 트럼프식 정치의 이면에 숨은 '대중의 전체주의화'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품고 있다는 것. 즉, 어떻게보면 현대 사회는 언제든 바로 옆에 있는 인간이 내 소중한 자유를 침범할 독재세력으로 변모할 수 있는 위협적인 시대이며, 정치인들의 본심은 일절 고려하지 않은 채 겉으로 보이는 애국자적인 이미지로만 판단하며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풍자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암스트롱은 “적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실질적인 적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자신의 이웃, 그리고 시대 그 자체, 그리고 그런 시대를 머릿수로 무작정 밀어붙여서 만드는 대중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철학은 메탈기어 솔리드 3의 더 보스가 말한 '적의 상대성'과 깊이 연결된다.
더 보스는 전장에서 마주하는 적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상대적인 존재일 뿐이라며, 동료를 해치지 않기 위한 싸움, 즉 인간적인 전쟁의 조건을 주장했다. 반면 암스트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전쟁의 틀 자체가 정치와 대중심리, 권위주의에 의해 항상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모든 조직화된 체계는 결국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는 새로운 '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는 평화주의와 연대보다는, '개인의 투쟁을 통한 진짜 자유'를 강조한다. 아우터 헤븐조차 시간이 흐르며 또 하나의 이념 조직으로 변질되었듯, 네이키드 스네이크의 이상도 결국은 조직화된 이념 속에서 소멸했다.[22] 이러한 맥락에서 암스트롱은 더 보스의 유산을 반대로 해석하여, '절대적인 동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정한 자유란 결국 적의 존재를 인정하고 맞설 수 있는 개인의 힘에서 나온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사상은 이처럼 불편하지만 현실적인 통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대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경고이자 철학적 제안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암스트롱과 라이덴의 대결은 단순한 '정의 대 악'의 대립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온 두 이념의 충돌로 읽을 수 있다. 바로 자유지상주의와 중도 자유주의의 대립이다. 스티븐 암스트롱은 작품 내에서 미국식 자유지상주의 정신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작위 없는 능력주의, 그리고 자력으로의 자립과 생존을 강조한다. 이 철학은 미국의 건국 이념과 개척자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우파적 아나키즘에 가깝다. 반면 라이덴은 그보다 훨씬 온건하고 타협적인 중도 자유주의자다. 그는 명확한 법치주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무를 강조하지만, 그 와중에도 스스로가 자행하는 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이는 미국 정치의 중도 스펙트럼을 담당하는 리버럴, 온건주의, 중도 보수주의, 공화주의 등이 공통적으로 내포한 내적 모순을 표상한다.
실제로 미국의 중도정치 사상은 사실상 초기 형태의 과격한 자유지상주의를 보완하고자 혹은 그에 반발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이념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라이덴의 중도 자유주의적 스탠스는 작품 곳곳에 나타난다. 인게임상에서 라이덴은 LQ-84i에게 '대단한 지성 납셨군, 명령에는 의문도 품지 않는 건가? 명령을 거스르기 위해 지성을 써.'라고 하거나 자신을 전투기에 태워 해안가를 날아가게 해준 보리스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조종은 그쪽이 하고 있잖아. 내가 자유롭게 한다고는 못하지.'라고 하기도 하고, 보리스가 월드 마셜의 뇌 추출 행위는 국외에서 저지른 것이라서 국내로 들어온 뇌들은 엄연한 검증을 통해 들어온 것이니 그들의 수술 행위는 합법적인 게 된다고 말하자 '그럼 합법이면 다 정의인가?'라며 받아친다. 또한 아이들은 지켜야만 한다고 하면서도 성인들은 전부 자기책임이라고 몬순에게 말하기도 하며, 그리고 적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라이덴 자신 역시 법과 권력을 등에 업고 타인의 자유와 목숨을 뺏는 모순을 자행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마저 중도 자유주의의 딜레마와 닮아 있다.
이처럼 암스트롱과 라이덴은 각각 미국 정치의 두 축을 대표한다. 하나는 국가나 제도의 간섭을 최소화한 개인의 절대적 자유, 다른 하나는 그 자유가 공동체 내 정의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리고 그 대립은 단지 정치적 입장 차이를 넘어, 철학적으로도 니체식 개인주의와 마이클 샌델식 공동체주의 사이의 오래되고 치열한 논쟁을 그대로 반영한다. 암스트롱은 힘을 통해 스스로의 신념을 입증하길 원하며,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전쟁을 치를 자유를 원한다. 반대로 라이덴은 그렇게 무력에 기대는 자유가 약자의 안전을 침해한다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그 자신 역시 집단적 도덕과 법치주의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뇌하고 흔들리는 라이덴의 모습은, 현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안고 있는 딜레마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2.1.11. 정치실용주의와 일관된 평등주의
또 암스트롱이 거리의 청소년들을 납치해 본인 동의도 없이 사이보그 병사로 개조하고, 그들에게 전쟁을 위한 VR 훈련을 시킨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 극단적인 방식조차도 단순한 전력 확보 차원의 클리셰적 악행이 아니라, 철저히 그의 신념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는 모든 개인에게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싸울 자유, 즉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가 말하는 기회란, 단순한 제도적 보장이나 명목상의 평등이 아니라, 무력과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조건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그는 기존 체제 아래서 결코 강자로 성장할 수 없을 청소년들에게, 어쩌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 도전할 수 있는 수단과 모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맞설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 셈이다.암스트롱의 철학이 설득력을 지니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단순히 "강자가 되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누구든 강자가 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특히 그는 '라이덴'을 단지 예외적인 영웅으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목표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첨단 VR 훈련 기술을 활용해, 과거의 라이덴이 겪었던 극한의 전장 환경을 그대로 재현하고,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그와 동등한 조건과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기술 훈련이 아니라, 운과 배경이라는 '극복 불가능한 요소'를 기술로 통제하겠다는 실천적인 시도였다. 다시 말해, 암스트롱은 기존 사회가 말하는 기회의 평등이 실제로는 출발선부터 기울어진 허구임을 꿰뚫었고, 그 허구를 정면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아무리 재능과 의지가 있어도 환경이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그는 기술을 통해 그 격차를 제거하고, 누구나 라이덴이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암스트롱의 사상은 무정부적 폭력주의나 허황된 이상론이 아니라, 첨단기술과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구성된 극히 실용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만일 그가 납치라는 강제적인 방식만 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분명히 단지 강자가 되라는 대책 없는 이상을 던진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도구와 환경을 마련한 리더라는 평가를 들었을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강자에게 맞설 자격마저도 박탈당한 약자들에게 투쟁의 권리 자체를 돌려주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실험적이며 강제적인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그가 더욱 경계했던 건 오히려 그런 투쟁조차 불가능한 사회였다. 따라서 그는 무력으로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경쟁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기존 체제에서는 결코 강자가 될 수 없었던 이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암스트롱의 행위는 '극단적 형태의 기회 평등'을 실현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약자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국가주의와 파시즘적 경직성을 지닌 전통적 권위주의를 타파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면서, 현대 사회의 퇴행적 좌파, 특히 SJW 성향의 집단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암스트롱의 관점에서 이들은 약자를 무조건 선으로, 강자를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며, 도덕적 우월감과 피해의식을 앞세워 사회적 권력을 쟁취하려는 또 다른 집단주의적 강자의 변종에 불과하다. 이들은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실질적인 강자들, 특히 신념과 실력을 바탕으로 한 비주류의 강자들을 억압하며, 정작 자신들은 공권력과 여론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앞세운 억압적 존재로 탈바꿈하는 존재다. 결국 법과 제도를 등에 업은 무기력한 선동꾼들인 주제에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강자의 자유와 약자의 도전을 억압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스트롱이 혐오했던 것은 이렇듯 제도와 규범이 '사상 없는 권위주의 권력자'와 '능력 없는 평등주의 사상가'만의 것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어떤 책임이나 노력 없이도 명분만으로 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구조였다. 즉, 그는 '국가의 체제와 질서가 도덕적으로 무조건 옳다는 관점'과 '강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약자를 무조건 선으로 보는 관점' 모두에 대해 '도덕적 권력의 독점 현상'이라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반기를 든 것이다.
2.1.12. 자유지상주의적 질서의 근본적 필요성
데스노트의 야가미 라이토나 국민사형투표의 ‘개탈' 같은 심판자형 주인공들이 왜 결국 악당으로 몰락하는지를 보면, 자유의지와 공동체의 경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공동체 전체를 대변한다고 믿으며 타인의 선택권과 자유를 침해했기 때문이며,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은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자유의지'라는 점이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흔히 "공동체가 있어야 개인이 안전하다"고 믿지만, 공동체와 국가 역시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시스템일 뿐이다.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오류와 편향의 여지를 품은 인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의사가 쉽게 왜곡되거나 선동에 이용될 수 있다. 이런 구조적 결함은 공동체를 절대화하거나 전체의 명분을 내세워 개인을 억압할 때 특히 위험하게 드러난다.이 점에서 서부 개척 시대는 오히려 이런 '자율적 개인 중심 질서'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당시 미국 서부는 무법천지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개척을 주도한 이들 중 다수는 군 출신 베테랑들이었고, 지역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보안관이 존재했으며, 동부 연방 정부의 행정력도 배후에서 충분히 작용하고 있었다. 즉, 국가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과잉 간섭 없이 각 개인과 지역 공동체가 책임을 나누는 분산적 자율 질서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당시 미국은 정쟁과 당파싸움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들이 주체적으로 서부로 진출해 자신이 정착할 지역을 자유주 또는 노예주로 편입시킬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은 국가가 위에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의 주민들이 스스로 이주해 정착하고 인프라를 만들어 나가는 바텀업식 주권 구현의 모델이었다. 암스트롱의 사상은 바로 이처럼 개인이 중심이 되는 자유로운 사회 질서를 현대 기술과 철학을 통해 재정립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비가 오면 사람들이 서로 합의한 것도 아닌데 동시에 우산을 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각자가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 동일한 결정을 내리는 자율적 행위의 총합이 곧 질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이나, 다른 국가들의 당파 정치나, 결국 피와 갈등, 투쟁을 수반했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미국은 중앙의 통제를 최소화한 채 개개인의 자율과 개척정신에 기반해 국가를 확장했고, 이는 곧 세계 최강의 경제·군사 대국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반면 다른 국가들은 내부 권력투쟁과 당파 싸움에 매몰되어 분열과 쇠퇴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암스트롱은 단순히 세상을 무정부적 난장판으로 던져두려 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된 이후에도, '강자'라면 적이든 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포섭하거나, 뜻을 함께할 수 있도록 이끌어갈 계획이었다. 즉, 자유경쟁을 무한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과 투쟁을 거친 강자들끼리 새로운 질서를 자발적으로 구축하게 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암스트롱은 메탈기어 세계관 내에서도 인류 최강이라 할 만한 존재였다.[23] 이런 암스트롱이 자신의 체제를 끝장내기 위해 싸움을 걸어오는 자들을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그는 오히려 아카온처럼 '힘에 의한 정면승부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존재'에 가깝다. 암스트롱의 신념은, 싸움이 필요한 경우 정정당당하게 무력으로 승부를 보는 것을 모든 이들에게 공정한 기회로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상호확증파괴(MAD)의 원리가 개인 단위로까지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즉, 라이덴이나 이 문서를 작성하는 옹호 및 비판 측의 모든 이들처럼, 오직 자신의 재능과 실력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는 세상을 열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세상을 바꿀 생각도, 다른 이의 길을 가로막을 생각도 없는 평범한 이들에게는 굳이 해를 끼칠 이유도, 관심을 가질 시간도 없다. 이 체계의 핵심은, 자기 책임 하에 스스로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들끼리만 충돌하고, 타인의 삶을 억지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는 곧 강자 간의 투쟁은 허용하되, 힘 없는 다수는 그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철저한 구분이다. 실제로 암스트롱은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자에만 맞서 싸웠지, 주변의 무고한 시민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무력주의가 아닌, 선택과 책임의 자유가 공존하는 새로운 사회 질서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물론 암스트롱이 일판에서 "내가 안일함에 빠진 시민들의 눈을 뜨게 해주겠다"고 한 발언은 자칫하면 계몽주의적 우월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를 단순한 선민사상이나 오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암스트롱의 철학을 과도하게 축소하는 일이다. 이 발언은 '지배자가 대중을 깨어나게 하겠다'는 식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계몽이 아니라, 시민 개개인에게 "스스로 눈을 뜨고 강자가 되라"고 촉구하는 급진적 자각 요구에 가깝다. 다시 말해, 암스트롱은 대중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삶의 주체로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자유주의자의 급진적 표현을 한 것이다.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말은 물리적 강요나 세뇌가 아니라, 기존 체제의 모순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짜 윤리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현실을 들이밀어 충격을 줌으로써 자발적인 각성을 유도하겠다는 태도다. 이는 고통스럽더라도 진실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유와도 맞닿아 있다. 결국 암스트롱은 대중을 미성숙한 존재로 간주하며 무시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모두 잠재적 강자이자 주체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기에 그런 표현을 쓴 것이다. 즉, 암스트롱의 목표는 '시민을 깨우쳐 내가 이끄는 대로 따르게 하겠다'가 아니라, '모두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자율적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인류의 역사는 어차피 어느 이념을 따르든, 피와 희생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건, 그러한 희생이 헛되지 않고 다음 세대에 밈으로 전해질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바로 이 지점이 암스트롱이 주장한 세계관의 핵심이다. 그는 "어차피 죽음과 투쟁은 피할 수 없다면, 그 과정에서라도 각자의 철학과 신념이 남아야 한다"고 보았다. 단순한 피의 반복이 아닌, 신념의 계승을 전제로 한 투쟁, 그것이 암스트롱이 추구한 질서이며, 이는 작중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실제로 그는 라이덴에게 패배했지만, 결국 자신의 밈을 라이덴에게 전해주었고, 라이덴은 그 철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승했다. 반면, 당파 싸움은 끝없는 정쟁과 정치적 복수로 이어지며, 사상의 진보보다는 단지 '과거'와 '현재' 중 하나만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게 되는 폐쇄성을 낳는다. 암스트롱의 사상은 이런 소모적인 권력투쟁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이 자신의 철학을 힘으로 입증해내는 세계를 지향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인간의 힘과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에서 비롯되며, 프리드리히 니체의 힘에의 의지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니체는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인간 각자가 자신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암스트롱이 택한 방식은 윤리적으로 매우 위험하지만, 단순한 악당의 광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철학적 투쟁이자 실천적 이상주의의 일환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은 니체 철학에서 강조되는 초인(Übermensch)적 개인의 자기 극복 서사와도 닮아 있다. 암스트롱에게 인간의 진정한 자유란, 제도나 도덕, 피해의식이 아닌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힘과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며,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악당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실천주의자이자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에 더 가깝다.
즉 암스트롱은 현시점의 미국을 포함한 세계가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인간의 본질적 권리인 기회와 자유를 빼앗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그가 추구한 이상은 단순한 무력 지배가 아니라, 초기 미국 건국 당시의 프론티어 정신 즉 무한한 자유와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계층을 오르내릴 수 있는 사회으로의 회귀였다. 그의 방식은 과격하고 폭력적이었지만, 그 이념 자체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보편적인 울림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탈기어 시리즈 전반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가 일관되게 드러난다. 시리즈 내 최대의 적으로 묘사되는 '애국자들'은 국가주의적 시스템과 정보 통제를 통해 대중을 수동적이고 획일화된 존재로 길들이는 구조를 상징한다. 이는 현실에서 권위주의적 정권이 선동과 감시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일으키는 방식과 닮아 있다. 실로비키 체제가 주도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애국주의를 이용해 국민의 자율성과 비판적 사고를 억압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특히 암스트롱이 죽기 직전 내뱉은 말인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위해 싸울 것이다."라는 대사는 러시아의 강제징병 정책으로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었으며, 더불어 그가 현대 신냉전 시대의 권위주의 국가와 선진국 대중사회의 비이성적 구조를 얼마나 깊이 꿰뚫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정치권력이 만든 이념과 가치관(MEME)을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선동과 증오를 퍼뜨리는 대중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 속 극우 포퓰리즘 세력(대안 우파)과 극단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세력(SJW), 그리고 권력에 순응하며 비판을 거세한 중국과 러시아식 극렬 애국주의 세력(분청)과도 놀랍도록 유사하다.
2.1.13. 강렬하고 희망적인 메시지
끝으로, 암스트롱이 연설의 끝에 외친 강렬한 문장, "They’ll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대중 혐오나 선민주의적 조롱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운동에 써먹은 바람에 흔히 대중 조롱이나 극우적 선동으로 오해받지만, 그 본래 의미는 훨씬 더 복합적이고 낙관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오히려 이 문장은, 대중 역시 더 이상 수동적인 '선동 대상'이나 '정치적 도구'로 머물러서는 안 되며, 스스로의 신념과 힘을 통해 책임 있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철학적 요청에 가깝다. 그는 대중이 국가나 권력자에게 의존하며 타인의 생각에 휩쓸리는 '집단 사고'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그들이 단지 무지하거나 약하기에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있는 잠재성과 의지를 해방시킨다면 누구나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인간관이 그의 신념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암스트롱은 강자만을 위한 세상을 꿈꾼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강자가 될 수 있으며 그 기회와 자유가 설렁 패배해도 영구히 사라지지 않는 세계를 꿈꿨던 것이다. 다만, 그가 강조했던 것은 단지 사회가 제공하는 복지나 구제의 방식이 아니라, 의지와 투쟁을 통한 자발적인 변화와 성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겉보기에 냉혹하고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대중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과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내포한 급진적 낙관주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결국 암스트롱의 사상은 형태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자유와 기회를 빼앗는 모든 체제적 억압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덕분에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는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실을 예견한 작품'으로 재평가받고 있으며, 자유지상주의를 지지하는 영미권 플레이어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상징적 캐릭터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단순히 암스트롱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게임 후반, 라이덴이 무라사마를 뽑아 들고 암스트롱과 최종 결전을 벌일 때 암스트롱은 안경을 벗으며 동공이 붉게 변하고, 라이덴 역시 사무엘 호드리게스의 전투 자세를 잡으면서 동공이 붉게 변한다. 암스트롱이 사망하면서 그의 붉은 동공은 사라지지만, 동시에 라이덴의 붉은 눈빛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진다. 그리고 엔딩 장면에서는 라이덴은 자신의 활인검을 꺼내면서 처음 등장했을 때 입었던 복장, 즉 암스트롱과 완벽히 같은 정장을 그대로 입고 사이보그들과의 전투를 준비한다. 이 연출은 게임 내적으로 보았을 때 암스트롱의 사상과 투쟁 정신이 결코 죽지 않고, 라이덴에게 계승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정신이 어떤 수라장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고 후대에 이어져갈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2.2. 비판
2.2.1. 비영미권의 비판과 소수자 피해 문제
메탈기어 팬들 중, 특히 일본과 유라시아 대륙의 유저들 사이에서는, 라이덴이 작중에서 지적한 것처럼 '진짜 약자의 처지도 모른 채 누구나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논리를 들먹이며 약육강식을 주장한다'는 비판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이미 2013~2015년 무렵부터도 게임 팬들 사이에서 나왔으며, 일부는 단순히 감정적 비난이나 허수아비 때리기가 아니라 제법 설득력 있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상류층에서 태어나 극단주의로 치달은 오사마 빈 라덴처럼,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 사람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아온 이들이 범죄와 남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을 철학으로 정당화하는 사례와 암스트롱의 악행이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이는 사회적으로 특권을 누리다 갑작스럽게 폭력적 이상주의에 빠지는 사례와 연결되어, '기득권층이 어느날 갑자기 선민사상과 약육강식을 내세우며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과도 같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또 현실에서도 소위 '표현의 자유'를 방패 삼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소수자 혐오를 정당화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례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만약 이들에게 법적으로 정당화된 '무제한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폭력의 도구까지 쥐여준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또한, 선별된 '강자'들의 총칼이 반드시 '약자'들을 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라는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2.2.2. 서부개척시대식 질서의 지나친 불안정성
상기한 금수저 논란이나 현실 투영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암스트롱이 단순한 권력욕이 아닌 뚜렷한 이상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미국 개척 시대의 야성적 자유주의에 기반하고 있어, 세 가지 비판점이 있다.1. 이미 인명경시가 심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를 더욱 극단적으로 악화시킬 수 있다.
2. 공동체 파괴와 대량 살상의 논리로 변이되기 쉽고, 전쟁의 폭주 가능성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생긴다.
3. "다수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행들이 많은 만큼, 인간의 악의가 "자유"의 탈을 뒤집어쓰고 막나간 사례도 절대 적지 않다는 것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실제로 그가 언급한 서부 개척 사회는 개인의 자유가 확실히 보장된 반면, 무력 사용 역시 아무런 제약 없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분쟁에도 총탄과 칼날이 난무했고, 결국 미군이 도착해서 상황 정리를 하기 전까지는 무력이 곧 생존의 기준이 되는 구조가 형성되기 일쑤였다. 이렇다 보니, 보안관조차도 항상 생명에 위협을 받곤 했으며, 경찰, 심지어 주방위군이라고 해도 자국민에게 총 안 맞을 보장은 절대 없던 이러한 환경에서는 성능 좋은 무기와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실력, 체력, 그리고 이를 구입할 수 있는 자산 등 소위 '피지컬'이라 표현되는 물리적 조건을 갖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희생될 수 있는 운명에 처했다.
거기다가 일단 '약자'로 낙인찍히면 그 죽음조차 "약했기 때문"이라 정당화되기 쉬운 구조였으며, 따라서 이들은 철학이나 신념(밈)을 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러한 부조리는 약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기한 조건을 전부 갖춘 강자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으며, 가진 게 많다는 이유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어 생존의 위협에 시달렸던 건 마찬가지였다.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암스트롱식 '강자'라도 전투와 사고로 죽게 되는 순간, 세상에 유의미하게 남길 수 있는 게 없어지는 것이다. 협력은 존재했지만 서로를 믿지 못해 계약조차도 손바닥 뒤집듯 파기되는 일도 잦았다.
당장 레드 데드 시리즈, 그 중에서도 현대 한국에서도 꽤 알려진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포함한 서부극 장르만 보더라도,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적과 싸우는 장면이 자주 연출된다. 이는 당시의 사회 환경상 시야의 사각지대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경찰조차 없던 경우가 많아, 치안 유지 역할은 보안관이 순찰을 돌며 맡았고, 마을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자경단을 조직해 지역을 방어했다. 이러한 민병대의 존재와 무장 허용은 미국 헌법 수정 제2조에까지 명시되어 있으며, 오늘날 총기규제 반대론의 중요한 논거로도 인용된다. 하지만 그 시절이야 흑색화약 소총과 리볼버가 주력 무기였던 때였고, 사정거리와 명중률도 낮은 편이었다. 반면 오늘날은 무연화약을 사용하는 현대화 무기 체계가 기본이며, 개인이 자동화기를 갖추고 다니는 것은 물론, 약간의 자격 요건만 충족하면 경기관총처럼 다수를 살상할 수 있거나 대물 저격총처럼 차량이나 건물을 관통하는 화기까지도 구매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소득 수준에 따라서는 방탄 차량이나 정밀 저격 장비까지 갖추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무력의 개인적 소지가 완전히 자유화된다면, 사회적 불안정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미미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무력 중심의 사회 구조가 미치는 피해는 대부분 자국 내 또는 아메리카 대륙 안에서 국한되었다. 반면 오늘날의 미국은 국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으로, 일각에서는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도 완전히 무시했다간 큰 코 다치곤 하는 그 UN조차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자조적인 농담이 나올 정도이다. 즉 미국이 유지하던 세계질서와 평화가 단숨에 무너져내린다. 따라서 만약 현대 미국이 서부 개척 시대의 무력 중심 사회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면, 그 파급력은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국가 간 협력 체제와 산업 기반이 붕괴되면서 미국 국내 질서 자체가 마비되거나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는 건 기본이며, 심하면 연쇄반응이 일어나 군웅할거의 역사가 전세계 단위로 규모가 커진 채 반복될 수 있다. 전세계의 모든 사람이 정점을 차지하기 위한 탐욕만 좇으며 정과 신뢰, 약속을 잃고, 각자가 무력을 정당화하며 우발적 충돌을 일으켜, 전 세계적인 핵전쟁이나 대규모 분쟁으로 확대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실존하는 파멸의 날 기계(Doomsday Machine)처럼, 핵보복 시스템이 자동화된 현실에서 이는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충분히 우려할 수 있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단순한 총격 사건 수준만 빈번해져도 인명이 쉽게 사라지지만, 이런 사회에서는 범죄조직들이 일상에 더 깊이 파고들어 시민들을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더 심하게는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핵무장 또는 핵무기에 준하는 대량살상병기를 갖추고 운용할 수 있는 대형 전력이 통제를 벗어나고, 독가스, 핵무기, 탄도미사일 등의 대량 살상 수단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는 가정도 가능하다. 만약 이런 무기들이 현실 세계에서 무력의 자유를 빌미로 유출된다면, 국가 단위의 재앙과 인명 피해가 '일상화'될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된다.
비판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념을 가진 무장조직이 오히려 더욱 위험할 수 있다는 사례로는 게임 림버스 컴퍼니(Limbus Company)의 세계관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신념과 이념, 철학이 도리어 폭력과 파괴의 정당화 수단으로 악용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정교하게 묘사한다. 림버스 컴퍼니는 "도시"라는 거대한 혼돈의 세계를 배경으로, 각 구역마다 각기 다른 신념과 체계, 철학에 따라 조직된 무장단체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정의·윤리·종교·이념 등의 이름 아래 서로를 감시하고, 고문하고, 때로는 처형하며 자기 정당성을 유지한다. 문제는, 이들이 믿는 신념이 각자의 시점에선 고귀하고 절실한 이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실현 방식은 철저히 폭력과 지배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암스트롱식 자유주의나 무장한 주체들의 경쟁 사회 역시 일정 임계점을 넘어서면 협동의 기반이 파괴되고, 신념이 '정당화된 폭력'의 언어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관은 그런 세계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각자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싸우는 이들이 공존할 수 없게 되면, 결국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자기 이상을 관철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세계, 즉 이상과 신념의 껍데기를 쓴 생지옥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신념을 가진 개인이나 무장집단이 무조건 고귀하다는 보장은 없다. 때때로 그들은 다른 의견과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가장 위험한 전체주의로 변모한다.
2.2.3. 잘못된 방식과 지나치게 위험한 약자 경시 사상
암스트롱이 행한 오류는 이 뿐만이 아니다. 약자에게도 평등하게 기회를 주겠다는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도리어 그 이상 자체를 위배하는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개개인의 자유를 중시한다면서 자국의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희생시키는 부분에서 인명을 하찮게 본다는 게 드러나며, 중남미의 연고 없는 거리의 청소년들을 납치한 뒤 본인의 동의도 없이 뇌를 적출하여 사이보그 병사로 개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는 과거 라이덴이 받았던 시어스 프로그램의 VR 전투 훈련이 사용되었으며, 단지 훈련이라는 인식조차 없이,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가상공간 속에서 끊임없는 고통과 살육을 반복하게 되었다. 심지어 선다우너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뇌에서 직접 신호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상환경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육체는 뇌와 안구만이 남아 탈출의 가능성도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시스템은 단순한 소년병 운용이라는 문제를 넘어, 기껏해야 10대 초중반에 불과할 어린이들을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 속에 몰아넣어, 사실상 중증 C-PTSD를 유발하는 구조적 폭력이다.암스트롱이 주장하는 이상은, 국가나 조직의 통제가 아닌 개인의 신념과 힘으로 이루어지는 분쟁, 즉 '신념 없는 자, 힘 없는 자는 배제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강자가 반드시 고결한 신념을 가진다고 보장할 수 없고, 반대로 약자라고 사상이나 신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시리즈 시간대상 바로 직전에 해당하는 메탈기어 솔리드 4에서는, 군산복합체를 비롯한 강자들이 이념 없는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처럼 암스트롱의 사상은 필히 허점이 생기며, 강자라도 전체주의나 독재 이념을 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로 제로 소령처럼, 막강한 권력을 쥔 인물이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적 신념을 따를 수도 있다. 그리고 더 극단적인 예시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잭 리퍼 장군과 콩 소령처럼 거짓 정보에 속은 채 망상에 빠진 개인이 엄청난 무력을 손에 넣으면서 인류 멸망의 도화선을 점화시키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암스트롱의 논리대로라면, 그런 강자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라이덴이나 솔리드 스네이크 같은 자유주의 성향의 강자들에게 제거되어야 하지만, 그 투쟁이 실패할 수도 있고, 저지에 성공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부수적 피해 및 수많은 무고한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가 없다.
이와 같은 세계관은 약자는 그저 "약하니까 죽어도 싸다"는 피해자 비난과 약육강식 논리에 기대고 있으며, 최악의 경우, 현 인류가 보유한 대량살상무기들이 이를 차지한 강자들에 의해 통제 없이 사용되는 전 지구적 대멸종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상호확증파괴를 넘어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적 대멸종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위험성들에 비추었을 때 결국 암스트롱이 꿈꾸는 세상이란 약자는 존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또는 법과 도덕이 무너진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무정부 상태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 윤리관과 법치주의의 기준에선 명백한 악인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2.2.4. 자유지상주의식 자수성가 논리의 부당함
또한, 암스트롱은 정황상 한 번도 철저한 약자의 입장에 놓여본 적이 없으면서도 쉽사리 약육강식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모순을 안고 있다. 그의 과거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고 미국 내 빈곤층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라이덴처럼 절대 빈곤 속에서 태어난 적도, 철저히 무력한 소년병으로 살아온 적도 없으며, '미국의 사회적 자산'이란 환경 위에서 최소한 자수성가할 수 있는 혜택은 어느 정도 갖춘 채 살아온 엘리트임은 분명하다. 즉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나도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암스트롱의 주장은, 라이덴조차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사례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라이덴은 라이베리아의 어느 이름 없는 지역에서 태어나 가족의 보호도 없이 살아가며, 심각한 영양실조와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미성년자였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훈련 없이, 심지어 10대조차 되지 않았던 그 어린 몸으로 정규 군인 수십 명을 살해하고 '하얀 악마' 또는 '잭 더 리퍼'라 불릴 정도로 잘 싸웠다는 과거를 지녔다는 극도로 비현실적인 설정을 갖고 있다. 현실에서 이 정도로 잘 싸우려면 사실상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도 낮은 확률의 천재적 신체 조건과 극단적인 환경이 겹쳐야 한다. 이런 인물을 근거로 '약자도 능력이 있다면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스포츠 경기들처럼 정당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능력을 개화시키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도 그걸 거부하고 굳이 극단적인 환경으로 사람을 내몰기까지 하는 행동은 실제 약소국 극빈층의 입장을 겪어본 적 없는 '미국인'이 이론적으로만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비형평성의 오류를 내포한다. 더 나아가, 이런 논리는 결국 "운도 실력이다"는 식으로 귀결되며, 이는 공정한 기회와 상호의존적 공동체를 중시하는 시민적 가치를 훼손하는 태도다.라이덴이 시리즈의 주연이 아니었다면, 그의 소년병 시절은 거의 살아남는 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참혹했다.[24] 애초에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극단적인 천운과 우연의 연속, 그리고 애국자들이 그를 실험체 삼아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암스트롱은 마치 누구나 라이덴처럼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단정짓는다. 이는 '강자의 독립성을 맹신하는 암스트롱이 만약 동일한 조건, 동일한 위치에서 아무런 지원 없이 어린 시절을 살아갔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는 반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라이덴이 운이 좋아서 그렇지, 타고난 재능과 실력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총알받이로 소모되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설령 극빈층이더라도 재능과 실력만 있다면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라이덴과 데스페라도 엔포스먼트의 간부들처럼 '상위 사이보그 전사로 태어날 수준의 운과 능력이 없다면, 암스트롱의 기준에 맞는 '강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라이덴의 성공조차 순전히 자신의 실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애국자들의 실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생존이라는 극한 조건이 겹쳐진 결과이다. 메탈기어 솔리드 2의 서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라이덴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보다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조종당한 장기말로 살아온 인물이었다. 따라서 암스트롱의 논리는, 자신처럼 태생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지닌 이들만이 강자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해도 구조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차별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결국 암스트롱이 전제하는 약육강식 사회란 인간의 보편적인 한계와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암스트롱이란 특출나고 이상적인 강자 개인'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게임 내에서 라이덴 역시 암스트롱에게 “약자의 입장을 모른 채 약육강식을 말한다”고 정면으로 지적하는데, 이에 대한 암스트롱의 반론은 “너 정도의 강자라면 어떤 환경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는 되레 소수의 예외적 성공만이 가능함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대답일 뿐이며, 현실 속 다수에게 적용될 수 없는 공허한 이상이다.
2.2.5. 과하게 공격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극단주의
더군다나 설령 그런 능력을 행운이나 극도의 노력으로 얻어낸다고 하더라도, 그 힘을 어떻게 쓰느냐는 또 다른 윤리의 문제다. 예컨대 쿵후라는 말 자체가 원래 “공부와 훈련을 통해 얻어진 기술과 역량”을 뜻했으며, 이는 남을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지지 않기 위한 자기수련에 방점을 두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체육인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면서도 타인을 지키거나 신념과 공동체를 위해 힘을 사용하는 건강한 성장의 방향을 모색하는 등, 본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공존은 상반되는 게 아니라, 함께 수행할 수 있으며, 논쟁과 갈등은 필연이더라도 그걸 꼭 반드시 유혈사태로 해결할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준다.그러나 현실에서는 위의 건강하게 자유를 행사하는 사례와 함께, 잘못하면 자신도 파괴된다는 걸 망각하거나, 더 심한 경우엔 그것마저도 계산에 넣으면서까지 적을 "비교적 더 쉽고 빠른 방법"인 폭력에 의존하며 자신의 의지와 주장을 관철하려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있다. 또한,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전세계 부의 불균형은 결국 자원의 가짓수 및 보유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역사적 맥락을 왜곡하기까지도 한다.
이런 행태는 "내면에 있는 잠재성과 의지를 해방시킨다면 누구나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라는 암스트롱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주제를 알아도,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기적인 뜻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다는 우려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고 공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암스트롱의 자유 철학은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 경쟁 중심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지고, 공동체적 연대나 협력의 가치, 심지어 인간성마저 배제한 채, 힘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변질되기 쉽다. 더욱이 암스트롱 본인조차 연설과 실천에서 격렬한 투쟁과 전쟁, 피로 얼룩진 약육강식의 서사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어, 그의 철학은 폭력적 지배나 살육, 심지어 가까운 사람에 대한 배신까지 정당화하는 논리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는 결국, 자유의 실현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강자의 폭력으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한 채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해석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그의 철학은 ‘약한 것은 도태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적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공동체 내부에조차 언제 어디서 누가 갑자기 적으로 돌변하여 자신에게 총칼을 들이밀지 모른다는 공포, 불신과 혐오를 부추긴다.
이런 행태는 성악설을 극단적으로 오독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만 규정하거나,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라는 격언에서 '전쟁 준비'만을 강조해버리는 태도와 결합되어 타인을 쓰러뜨리고 이겨야만 하는 존재로만 보는 세계관으로 변질되기 쉽다. 결국 '힘'이 도덕이나 사회적 신뢰를 대신하는 순간, 그것은 언제든 선제공격과 예방전쟁의 명분으로 전락할 수 있으며, 오히려 공존을 파괴하고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극단주의적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암스트롱은 강자의 논리와 약육강식을 신봉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행사하는 힘은 누구나 접근할 수 없는 고도 기술과 자본에 기반한 나노머신이라는 특권적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곧, 그가 주장하는 '강자의 자유'가 실제로는 불평등한 자원 분배 구조에서만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따라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기준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적 시각에서 큰 문제를 드러낸다. 기술과 자원이 극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회에서, 강자의 기준을 기술력에 맞추는 순간 대부분의 시민은 구조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암스트롱이 말하는 '순수한 힘'은 사회적 연대나 공정한 기회 제공이라는 민주사회의 핵심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빅 보스, 솔리드 스네이크, 오셀롯 등은 자신의 힘을 사회와 분리된 절대적 우위로 사용하기보다는, 역사와 공동체 속에서 책임과 윤리적 고뇌를 동반한 행동으로 증명해왔다. 이들과 달리, 암스트롱은 극소수 특권층만이 접근할 수 있는 힘을 정당화하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을 배제하려는 사상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위험한 이상주의자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2.2.6. 고도 기술사회와 투쟁 사회가 결합되었을 때의 위험성
또한 암스트롱이 의존하는 나노머신 기반의 초인적 신체능력과 그에 기반한 전투가 보편화된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힘의 충돌을 넘어선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메탈기어 솔리드 4에서 등장한 뱀프처럼, 나노머신은 언제든지 억제제 한 방에 기능이 무력화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생명 유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스크리밍 맨티스의 사례에서 보이듯, 고도화된 해킹 기술이나 전자전 장비는 나노머신을 역이용하여 사용자의 신체를 제어하거나 마비, 심하면 즉사시킬 위험도 내포한다. 즉, 상기한대로 강자와 약자 모두 총 한 방에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서부개척사회의 모순이 재림하는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암스트롱이 상정한 세계는 누구나 신념과 힘으로 충돌하며 자신의 길을 증명해야만 하는 사회다. 이는 결과적으로 '항상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개인'이라는 긴장된 삶의 조건을 강제하게 된다. 일상생활은 파괴되며, 시민들은 언제 어디서건 강자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수면, 식사, 취미활동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이 상태는 삶의 질을 철저히 훼손하며, 결과적으로는 공동체의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근본부터 해치는 사회로 귀결된다. 공동체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강자든 약자든 구성원 모두가 어느 정도의 안전과 예측 가능성을 기반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가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암스트롱의 철학은 이 신뢰의 기반을 붕괴시키고, 공동의 규범을 무력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모든 이가 외톨이가 되는 파편화된 세계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일부 팬들은 나노머신이나 방탄복 같은 수단이 총과 폭탄같은 기존의 재래식 무기들을 무력화시킨다는 점을 들어, 암스트롱의 원하는 세상에서는 무력 투쟁이 있더라도 서부개척시대에 만연했던 어이없는 죽음은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도의 기술 사회에서 발전하는 위험 기술은 나노머신과 사이보그 기술뿐만이 아니며, 이는 나노머신과 같이 '복잡한 기술 시스템일수록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가능성도 증가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태도다. 같은 세계관에서 등장하는 뱀프와 나오미 헌터의 사례는 단순히 나노머신이 기술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 아니다. 이는 나노머신으로 대표되는 '최첨단 기술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무한하고 완벽한 힘의 상징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해석해야 옳다. 뱀프는 나노머신을 통해 뇌에 생긴 총상까지 회복하고 물 위를 달리는 초인적인 능력을 얻었지만, 지나친 의존으로 인해 나노머신의 임계치에 도달해 언제든지 생명이 꺼질 수 있는 시한부의 몸이 되었고, 결국 억제제 한 방으로 무력화된 채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오미 헌터 역시 의료용 나노머신으로 암세포를 억제하며 생존했지만, 이것 역시 임계치를 초과하자 더는 유지가 불가능해졌고, 결국 스스로 억제제를 투입해 생을 정리해야 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무리 고성능 기술이라 해도 인간의 생명과 신체를 영구적으로 대체하거나 보장해줄 수 없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특히 전투형 나노머신의 경우, 일반 시민들이 일상에서 활용할 수 없는 고위험 기술이며, 유지비용도 막대해 강자들만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모든 개인이 무력과 신념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라'는 이상은, 결국 일부에게만 허용된 선택지에 불과하고,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최소 80년대부터 SF 창작물들에서 자주 주요 소재로 다뤄지기도 했던 "삶을 지키기 위해 자기 신체를 희생해야 하는 윤리적 모순"을 강요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는 필히 전쟁경제보다 더한 수위로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비극이 곳곳에서 닥칠 확률이 크다.
암스트롱 같은 최상위 강자도 이러한 위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일반적인 나노머신은 노폐물과 함께 체외로 배출되며, 주기적인 교체와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이 나노머신을 심장과 대동맥에까지 이식한 상태로,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생명 유지와 직결된 구조를 지닌다. 그가 꿈꾸는 무력 중심의 혼돈 사회는 필연적으로 고도 기술의 유지에 필요한 사회적 인프라와 산업 기반이 무너지게 되는 구조인데, 이 경우 나노머신 기술 역시 유지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기술적 기반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나노머신 억제제나 해킹 장비에 의한 전자전 공격에 대응할 여력도 급격히 줄어든다. 아무리 타고난 피지컬과 나노머신 운용능력이 좋은 암스트롱일지라도 그 역시 인간인 이상, 체내 나노머신이 무력화되면 회복력과 내구성, 근력 증폭 기능까지 모두 잃게 되며, 단 한 번의 공격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즉, 아무리 강한 자라도 기술 의존적 존재라면 사회적 기반 없이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암스트롱이 강조하는 무정부적 강자 중심 사회는 결국 공공 시스템의 붕괴로 인한 자멸을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기술 사회를 가능케 하는 공동체적 기반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강자들은 과학자나 기술자를 곁에 두면 된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작중에서도 암스트롱은 거대 하이테크 기업의 CEO이자 부유한 정치인이므로, 최첨단 연구소를 운영하며 고도의 과학기술들을 개발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 산업은 개인의 부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교육 시스템, 안정적인 경제 구조, 지속적인 인재 순환에 의해 유지되는 공공적 기반 위에 놓여 있다. 이런 시스템은 결국 약자들을 포용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체제에서만 가능하다. 암스트롱이 추구하는 극단적인 약육강식 사회가 실현된다면, 이와 같은 기술·산업 기반 자체가 붕괴되며, 사이보그 시술이나 전투용 장비조차 유지되기 어렵게 된다. 암스트롱처럼 모든 자원을 독점한 소수의 초강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며, 대다수 시민은 강화 시술이나 장비 접근은커녕 기본적인 생존 자체도 위협받는 계층 양극화의 극단으로 밀려난다. 더욱이 설령 개인의 힘으로 강자의 위치에 오른다 해도, 해킹이나 전자전 등의 기술적 위협 앞에서는 누구나 취약하다. 실제로 현대 전장에서 기술은 물리적 힘 이상으로 위협적이며, 단 한 번의 정보전 실패로도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쓰러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보편화된 사회는 결국 불신과 경계가 일상이 되고, 수면과 휴식조차도 사치가 되는 피로 사회로 전락하게 된다.
2.2.7. 다수 시민이 따라갈 수 없는 극단적인 기준
물론 암스트롱은 그런 위험성까지 개의치 않을 정도로 자신의 철학을 본인에게까지도 철저히 적용하며, 약육강식의 논리를 내로남불 없이 실천하는, 여타 미디어의 악역과는 차원이 다른 신념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공정함 자체가 그 사상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상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벗어난다.물론 암스트롱의 상남자스러운 주장과 호쾌한 삶의 태도는 굉장히 터프하고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지만, 정말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No라고 대답할 것이다. 현실의 시민 다수는 언제나 극단적인 무력 충돌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기보다는, 법과 제도가 보장하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사회를 원한다. 사실 사람들이 암스트롱의 주장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의 철학중 자유지상주의적 요소, 즉 국가 권력의 부당한 통제나 검열, 대중들의 전체주의화에 맞서는 자세에 공감하는 것이지, 그가 말하는 극단적인 무력 자율성과 약육강식의 사회 모델까지 수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암스트롱은 분명 무정부 상태조차도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신념을 지닌 호걸이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그렇지 않다. 개인 간 신념에 충돌이 생겨도 절대다수의 현대인은 쿨하게 한 판 승부 보고 죽는 게 아니라 이를 무력으로 해결하기를 매우 두려워한다. 결국 시민들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사회 계약과 법치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암스트롱의 사상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다.
2.2.8. 현대 사회에서의 공동체적 연대의 필요성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비단 암스트롱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신념에 공감하거나 그를 따랐던 라이덴, 그리고 데스페라도 엔포스먼트의 간부들 역시 신체를 사이보그로 대체한 존재들이며, 그 힘과 생존은 고도화된 기술 인프라와 의료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암스트롱과 그가 높게 평가하는 라이덴은 분명히 힘과 신념을 모두 지닌 이상적이고 압도적인 강자가 맞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약자를 경멸하며 강자의 자격을 논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와 그를 따르는 '강자들'은 본질적으로 사회 전체의 과학기술과 복지 시스템이 제공한 혜택의 수혜자들이다. 사실 나노머신이나 사이보그 기술은 애초에 전쟁을 위한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의료와 재활, 혹은 삶의 질 향상이라는 보다 공동체적인 목적을 위해 발전해온 것이다. 암스트롱과 그의 철학은 이와 같은 시스템이 제공한 기술을 기반으로 강자성을 실현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체계의 기반이 되는 사회적 연대와 약자의 보호 장치를 경시하거나 파괴하려 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내적 모순을 지닌다.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개인의 힘조차도 공공의 자원과 제도 위에서 성립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약자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가 무너지면, 이들이 만든 기술 역시 유지될 수 없고, 강자 또한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힘의 사회는 결국 강자조차 약자에 의해 떠받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공공성을 배제한 채로 '자립적 강자'라는 허상을 구축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암스트롱이 가진 모든 힘은, 그가 경시했던 약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 가능한 것이며, 그들의 사회적 기여와 협력이 있어야만 발휘될 수 있는 힘이다. 정치인으로서의 권력은 유권자인 국민들의 투표와 지지가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그의 CEO로서의 경제력 또한 자신을 위해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과 용병들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유지될 수 없다. 그의 신체를 지탱하는 나노머신 기술조차도 과학자, 엔지니어, 의료 인력 등 수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의 지식과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암스트롱의 기준에서 이들 모두는 '신념 없는 약자'로 간주하며 배제되어야할 대상이다. 하지만 이들 '약자'들이 바로 강자의 권위와 기술적 기반을 지탱하는 공공의 토대이며, 이 기반 없이는 그가 말하는 '강자의 자유'조차 성립할 수 없다. 평등주의와 공동체주의적 시각에서 보자면, 암스트롱의 사상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 개인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망과 협력 구조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한다.
결국, 암스트롱은 비뚤어진 방식일지언정 숭고한 소신을 지닌 인물이긴 하지만, 그 권력과 영향력의 기반이 수많은 시민의 지지와 사회적 지원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악덕 정치인이나 독재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인다. 유권자들의 선택과 협력으로 힘을 얻었음에도, 그 힘을 시민들의 존재와 권리를 무시하며 휘두르는 태도는 명백한 독선이다. 현실에서 암스트롱처럼 극단적인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추종하는 인물들이 극우로 분류되고, 반대로 그에 상응하는 안티파 등 과격한 아나키스트들이 극좌로 분류되는 이유 역시, 이들이 공동체적 연대와 약자 보호의 필요성이라는 현실적인 전제를 무시하고, 그저 체제의 해체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 극단의 사상은 결국 시민 다수의 삶을 파괴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2.2.9. 자율적이지 못한 '약자'는 배제되어야만 하는가?
암스트롱의 사상은 ‘약한 것은 죄악’과 피해자 비난의 정서를 기반으로 한 점에서, 개발자들의 전작인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의 악역들과 유사한 철학적 기반을 지닌단 해석도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버질(혹은 유리즌)만 해도 타인의 연약함과 고통에 무감각했으며, 오직 힘과 통제를 지향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타인을 존중하는 윤리적 기준 없이 힘만을 숭배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 혹은 반공동체적 존재로서 묘사된다. 암스트롱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는,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속에서 인간 존재를 재단하는 태도를 보여준다.물론 암스트롱은 단순한 폭력적 이기주의가 아니라 현대 서사물에서 종종 높은 평가를 받는, "극단적 니체주의" 캐릭터 유형의 대표 사례로 볼 수 있기도 하다. Revengence status 밈에서도 암스트롱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가 앞서 언급한 버질이며, 그 외에도 타일러 더든, 니시타니 호마레, 마지마 고로, 콤모두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사회 질서나 도덕적 규율에 반하는 독자적인 힘과 욕망, 그 자신만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법과 제도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에서 느끼는 억압과 스트레스의 대리 분출구로서 인기를 끌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철학이 실현되는 무대가 창작물이기에 널리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보편윤리와 공동체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가정할시 인기와는 별개로 결코 선인으로 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니시타니나 마지마는 대놓고 야쿠자이며 타일러 더든은 폭력적인 광기의 상징이고 콤모두스는 명백한 폭군이다.[25]
결국 이런 개인의 무력을 인정하는 극단적인 니체주의는, 시작과 의도는 좋았어도 실천하는 과정에서 왜곡되어 공공성과 상호존중을 배제한 채 오직 '힘'과 '논리'만을 기준으로 정의를 판단하는 길로 빠지기 쉬워 결과적으로 반공동체적 이기주의가 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이는 더 보스가 강조했던, "타인을 또 다른 온전한 존재로 존중하는 것"이라는 건강한 개인주의와는 정반대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암스트롱은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이면서도 동시에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가 비판하는 삶의 태도, 즉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마치 악마처럼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자' 혹은 '오직 힘과 투쟁만을 해답으로 삼는 현실'이란 인간 비판적인 표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에서 버질, 아그누스, 상투스 등이 보여주는 "힘을 통한 구원"이라는 사상은, 결국 타인을 수단화하거나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암스트롱도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연대보다는 개인의 힘과 자유만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이들과 유사하다. 반면, 라이덴은 '현실의 모순과 고통 속에서도 약자를 이해하려는 자' 혹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 즉 일종의 인간 찬가적 상징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가능하다. 라이덴은 잭 더 리퍼라는 과거의 본능과 충동을 자각하고 암스트롱의 이상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이에 그치지 않고 끝내 그것을 타인을 위해 싸우는 방향으로 제어하며 연대와 자비의 가치를 실천하고자 한다. 이는 단지 폭력성의 초월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무엘 호드리게스의 주제가는, 자신의 행동으로 선악을 초월해서 자신의 모든 결심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겪은 상처와 나름의 신념이 있었음에도 자신에게 패배했던 자들을 되돌아보는 듯한 뉘앙스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사처럼 사무엘은 결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동시에 암스트롱에게 패배한 이후 과거의 정의감을 잃고 용병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고뇌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어두운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신념과 이성을 잃지 않은 라이덴의 모습에 강한 관심과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그와의 싸움 이후 블레이드 울프가 최후에 선택한 인물은 암스트롱이 아니라 라이덴이었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울프의 입장에서 암스트롱이 강조한 '강자의 자유'라는 이상은 분명 자신의 각성과 자율성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는 그 자유를 암스트롱이 주장하는 "수동적인 약자를 배제하는 무자비한 자유"가 아닌, "책임을 지고 고통받는 자를 지켜내는 신념"으로 실천하는 라이덴에게 제트스트림 샘의 검을 넘겼다. 이 장면들은 곧, 암스트롱의 사상이 실천 가능성과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선 '힘의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서사적 메시지로도 읽힌다. 다시 말해, 암스트롱은 강자 개인의 자율성과 투쟁 정신이라는 중요한 문제의식을 제기했지만, 그 비전을 사회적으로 확장하고 인간적인 형태로 계승한 것은 라이덴이었다. 암스트롱은 변화의 방아쇠를 당긴 인물이라면, 라이덴은 그것을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구체화한 진정한 후계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라이덴은 자신의 살육과 분노, 잭 더 리퍼로서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국가가 강요하는 법과 도덕'이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온 '약자들을 위한 싸움'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갖게 된다. 이는 그가 단순히 암스트롱의 주체적 의지와 힘의 해방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그가 비판했던 '힘도 신념도 없는 무지한 약자'가 지닌 본질적 가능성도 함께 껴안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몬순이나 암스트롱과 같은 인물들이 인간 사회의 전체주의적 타락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간의 잔혹한 피의 투쟁을 용인하자고 주장하는 것에 반해, 라이덴은 그 타락조차도 라이덴 그 자신처럼 스스로 자각하고 이겨낼 수 있다는 '약자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즉, 비판적 사고와 연대, 자율성의 회복은 오직 강자만이 아니라 약자도 실현할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이다.
2.2.10. 일부 옹호자들의 왜곡된 주장
그리고 일부 암스트롱 옹호자들은 그의 진짜 메세지를 곡해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들 중에는 "대중은 선동당하기 쉽고,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정의를 왜곡하는 존재이므로 결국 강자에 의해 제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꽤 많다. 이는 암스트롱 본인의 철학과도 어긋나는 왜곡된 해석이며, 오히려 초기 형태의 파시즘에 가깝다.암스트롱이 비판한 것은 대중 자체가 아니라, 대중을 무조건 약자로 간주한 채 면죄부를 주는 도덕적 이중잣대였다. 그는 오히려 연설을 통해 대중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 주체이자, 때때로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강자'라는 현실인식을 분명히 천명했다. 즉, 대중은 무지한 약자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힘으로 체제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암스트롱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중적 시각을 견지했다. 그런 점에서 "대중은 무지하고 폭력적이므로 억눌러야 한다"는 일부 옹호자들의 태도는, 겉보기엔 암스트롱의 철학을 계승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경계했던 '선민사상적 엘리트주의'와 동일한 프레임에 빠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논리는 결국 대중을 무조건적으로 악으로 규정하거나, 어떠한 사정이 있어서 적대적인 환경에 말려들어가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자주성과 자기 보호 능력을 미처 챙기지 못한 사람들을 무턱대고 무시하며 스스로를 '깨어있는 소수'로 여기는 전체주의적 인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경계하던 정치적 획일주의와 닮은꼴을 형성하게 된다. 암스트롱이 주장한 '기회의 평등'은 단지 강자의 자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 역시 스스로 강자가 되어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서 인정하자는 주장이었기에, 그의 철학을 비약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본래 취지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1] 다만 이 동영상에서는 암스트롱만 나오는 게 아니라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에 나오는 주요 캐릭터들이 모두 가사에 걸맞은 모습들을 한 채 나온다.[2] 아예 주인공을 처음으로 두들겨 패고 저 하늘 높이 내던져 버린 뒤 떨어지는 라이덴을 타이밍 맞게 걷어차 날려버리면서 내뱉은 말이 "Don't fuck with this senator! / 上院議員を舐めんじゃねぇ!! / 상원의원한테 개짓거리 하지 마라!"였다.[3] 물론 현실의 미국에도 강력한 육체 능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꽤 있다. 특히 배우 출신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분이나 전 미합중국 26대 대통령 같은 분들.[4] 게임 속 정치인으로서는 대선배격인 마이크 해거나 그 왕좌의 게임의 타이윈 라니스터, 훨씬 고참인 파워퍼프걸의 타운즈빌 시장보다도 높은 Greater God 티어다.[5]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몇몇 팬들이 '솔리드 스네이크는 라이덴을 사람 만들어준 인물'로 존경하는 한편, 암스트롱이 금수저일 것 같다는 이유로 라이덴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또한 드러난다. 그러나 정황상, 솔리드 스네이크는 라이덴보다 훨씬 나은 교육 환경과 지원을 받은 인물이었고, 반대로 암스트롱은 설정과 작중 묘사를 볼 때 시골 깡촌 혹은 저소득층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즉 계층으로 분리할거면 완전히 반대로 공격대상을 잡은 것.[6] 스컬 페이스는 약육강식의 자유를 주장한 스티븐 암스트롱과 정반대로 약자에게도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그 방식이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쓰는 사람들을 모두 학살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증오를 구현하는 방식이라 수단은 다를 바가 없었다.[7] 옹호: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주체적이고 뛰어난 개인들'이다. 위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집단이 아닌 개인의 의지와 역량으로 세상을 바꿔왔기에 위대한 것이다. 집단지성이 오히려 개인보다 극도로 무능하게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악마의 대변인 제도가 필요한 것도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결단과 행동이다. vs 비판: 한 사람이 아무리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내로남불없이 모범을 보인다 해도, 모두가 똑같이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상을 강요하면, 결국 따라잡겠다는 경쟁과 불신이 생겨나 싸움만 격화될 뿐이다. 이상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끝없는 충돌뿐이다.[8] 일어판에서 그가 셀럽과 메트로섹슈얼을 까는 발언을 한 게 이들의 공감을 많이 얻었다.[9] 애초에 무력에 의한 약육강식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유지되는 자유지상사회를 주장하는 시점에서부터 보수주의자가 아니다.[10] 그래서 북미권 커뮤니티에서는 게임이 출시된 초기에 그에 대해 평가할 때 대안 우파 측과 SJW 측의 싸움으로 번져서 캐릭터 자체에 대한 평가의 본질이 흐려지기도 했었다. 평가 항목에 서술된 MEME과 GENE 논쟁도 그 맥락에서 뜬끔없이 튀어나온 키배인 것.[11] 암스트롱은 리버테리안, 아나키즘 계열 극단주의자인 만큼 그의 사상에 반대하더라도 보여준 행보가 워낙 현실 미국 정치인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미국식 Bad Ass 상남자의 귀감인지라 좋아하는 팬들도 많다.[12] 별개로 무력으로 이상을 쟁취한다는 부분 때문에 안티파(...) 지지자 등 일부 극좌 계열 플레이어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듯하다.[13] 어찌보면 파이트 클럽의 창설을 통해서 자신만의 리틀 암스트롱 월드 개척에 성공했다.[14] 쾌락과 폭력, 여색에 찌든 전투광 야쿠자인 만큼 원하는 상대와 싸우기 위해서 캬바레를 빌리고 자진신고까지 하는 등 거리낌없는 기행을 한다[15] 자신을 헤라클레스의 화신이라 여기며 국정은 버리고 싸움질이나 하는 전투광 황제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이런 면은 어떤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신화와 예술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니체의 철학이 연상되는 태도이기도 하다.[16] 명문대와 금수저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으나 미국은 기부입학 제도 때문에 명문대 출신 기업인이나 정치인이면 실제로 맞든 아니든 곧잘 금수저 이미지와 연결되는 일이 잦다. 별 위화감 없이 곧바로 이런 논란이 생겼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이것도 암스트롱이 플레이어들에게 아주 현실감 있는 캐릭터로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부분.[17] 사실 자수성가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게, 금수저 출신이었다면 주변 환경상 오히려 타인에게 베풀고 다니면서 우수한 신념을 가진 이들을 모으고 다니는 콜렉터 기질에 더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을 것이다. 당장 본편에서도 암스트롱은 본인의 진심과는 별개로 표퓰리즘적인 전형적인 정치인으로 위장해 살고 있었다. 그만큼 자본과 지지율을 얻는 것에도 관심이 많고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암스트롱도 안 그래 보이지만 은근히 현실과 양보와 타협을 많이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이룩하려고 하려고 한 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자유를 위해서 평등한 기회를 부여받은 다음,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힘을 가진 이가 자신만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18] 사실 일각에서 암스트롱의 마초적인 말투에 대해 미국의 전통적 상류층 백인들의 관습에 어긋나는 거친 캐릭터라고 까는 것도 따지고 보면, 물론 암스트롱의 유년 시절과 성장기 시절이 작 중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만약 그가 자수성가했다고 가정하면 오히려 고증에 충실해지는 부분이다. 심지어 정치 쪽으로도 대표적인 예시가 캔자스 주에서 성장해 군에 입대하여 미식축구 활동을 하고 자수성가해 대통령까지 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마찬가지로 자수성가 출신인 전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을 시작으로 2차대전 말부터 미국 정치계는 기존 대통령의 유럽적인 상류 정치귀족 이미지를 타파하고 자수성가 배경과 강인하고 친서민적인 이미지를 지닌 정치인들이 높은 지지를 얻어 당선되는 경향이 생겼다. 즉 이 말투도 암스트롱이 해군 출신, 미식축구 선수, 대통령 후보인 걸 감안했을 때, 제작진들이 냉전 당시 대통령들이 연상되도록 노리고 만든 설정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결론적으로, 캐릭터의 모티브를 생각하면 자수성가 출신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리고 사실 이쪽 지역은 상류층이더라도 골드러시 또는 산업혁명 당시 서남부로 넘어가서 광물이나 석유 산업의 개발로 대박을 친 선조를 둔 경우가 많아서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미국 상류층의 이미지와 반대로 마초이즘을 숭상하는 상류층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19] 예컨대 미국에서는 “진정한 미국인의 영혼과 정수는 .45 ACP와 M1911, 그리고 .50 BMG와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에 담겨 있다”는 말이 퍼진 적이 있으며, 이는 총기 애호가들(특히 래리 빅커스를 비롯한 45 구경 지지자들) 사이에서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대규모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져도 총기규제를 요구하는 여론은 금세 잦아들고, 오히려 전미총기협회(NRA)의 언론플레이나 로비에 힘입어 규제 반대 의견이 급속히 확산되곤 한다. 이는 단순히 로비의 힘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은 개인주의와 자유지상주의 전통이 강력한 문화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20]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를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 욕망에 찬 인물들이라 생각하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사랑했기에 그런 끔찍한 학살도 정당화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물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당연히 같은 나라는 아니지만, 푸틴은 진짜로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일부라고 간주하여, 우크라이나는 정식 국가가 아니라 네오 나치 잔당인 아조우 연대에 의해서 키이우를 중심으로 분리독립을 선언한 테러집단의 유사국가라고 간주하고 있다.[21] 라이덴은 플레이어 관점의 주인공이라서 그렇지, 그가 자신의 적들을 가차없이 베어버리는 장면은 현실에서는 다수의 복잡한 삶의 사정을 무시한 냉혹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나아가 그가 수많은 사이보그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하는 장면은, 사연과 맥락을 모른 채 본다면 소시오패스적 행위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솔리드 스네이크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에 있었다면 ‘전쟁을 끝내고 싶다’는 이상을 품은 인물이 왜 잠입과 암살에 이토록 특화되어 있고, 왜 사람들과는 대화도 거의 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처세하며 혼자서만 고뇌하냐는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결국 그들처럼 특별한 신념과 능력, 삶의 궤적을 가진 인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과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그들의 이름을 빌려 스티븐 암스트롱을 공격하는 것은 전형적인 감탄고토적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22] 특히 핫 콜드맨이 피스 워커를 통해 일으킨 핵전쟁 오판 사태와, 이걸 멈출 방법이 없어지자 더 보스의 의지가 막판에 깨어나 피스 워커가 스스로 자진 침몰하는 장면은, 더 보스의 뜻을 계승하려던 네이키드 스네이크조차 이상을 포기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23] 물론, 만약 빅 보스나 솔리드 스네이크가 살아서 나노머신 억제제를 가지고 싸웠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암스트롱이 활약한 시점에는 이미 이 둘은 사망한 상태였다. 라이덴조차 무라사마 블레이드를 들기 전에는 암스트롱의 방어력을 뚫지 못했으며, 순수 전투 기량만 해도 라이덴과 최소 동급이란 점을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인류 최강이라 평가해도 무방하다.[24] 당장 유튜브에 무료 공개된 OBSOLETE의 5화만 봐도 소년병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죽어나가는지 잘 보여준다.[25] 이들 중 일부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변화와 반성을 겪기도 한다. 데빌 메이 크라이 5에서의 버질은 과거 자신의 집착을 인식하고 이를 내려놓으며, 점차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과 인간성을 회복해 간다. 마지마 고로나 니시타니 호마레도 비록 야쿠자라는 배경 속에 있지만,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선을 지키며 욕망과 도덕의 균형을 이루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폭력적 파괴자가 아닌, 나름의 윤리적 경계를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으며, 오히려 라이덴과 철학적으로 맞닿아 있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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