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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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키이우-할리치 상급대주교 | ||
<colbgcolor=#005bbb><colcolor=#fff> 제28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수장 스뱌토슬라우 셰우추크 Святослав Шевчук | ||
파일:His Beatitude Sviatoslav.jpg | ||
출생 | 1970년 5월 5일 ([age(1970-05-05)]세) |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스트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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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수품 | 1994년 6월 26일 | |
주교 임명 | 2009년 1월 14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호자 성모 교구 보좌주교 임명[1] | |
2011년 3월 23일 키이우-할리치 상급대교구장 선출[2] | ||
2011년 3월 25일 키이우-할리치 상급대교구장 선출 승인[3], 상급대주교 승품 | ||
재임기간 |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호자 성모 교구 보좌주교 | |
2009년 1월 14일 ~ 2010년 4월 10일 | ||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호자 성모 교구장 서리 | ||
2010년 4월 10일 ~ 2011년 3월 25일 | ||
키이우-할리치 상급대교구장 | ||
2011년 3월 25일 ~ 현직 | ||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수장 | ||
2011년 3월 25일 ~ 현직 | ||
우크라이나 가톨릭대학교 총장[4] | ||
2011년 3월 25일 ~ 현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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Гдⷭ҇ь просвѣще́нїє моє́ и҆ сп҃си́тель мо́й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1. 개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28대 수장이며, 제2대 키이우-할리치 상급대교구장.2. 생애
1970년 5월 5일, 스뱌토슬라우 셰우추크는 당시 소련령이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스트리에서 철도청 근무자였던 아버지 유리 셰우추크와 피아노 교사였던 어머니 비라 셰우추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가정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은 소련 정권에 의해 불법화되어 있었다.셰우추크의 부계 가문은 이바노프란키우시나 지역 브로슈니우-오사다 출신으로 당시 지하교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셰우추크 가정은 사제들이 비밀리에 전례를 집전하는 지하공동체로서의 역할도 했으며 순교자 오렉사 자리츠키 신부가 셰우추크의 집에서 전례를 집전하기도 했다.
셰우추크는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며 교회와 민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고, 성가대 활동과 시편 낭송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회 전례에 익숙해졌다. 이 시기 그는 지하 신학교 학장이었던 미하일로 코실 신부와도 교류하였다. 셰우추크는 피아노 교사인 어머니 덕에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접했고, 스트리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으며, 외삼촌에게 개인적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는 비발디의 음악을 즐겨 연주했다고 회고하며 음악이 유년기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말했다.
"저는 청각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 생활과 지하교회에 처음 접한 것도 '소리'가 매개였습니다. 저는 먼저 성가대에 들어가 다섯 선율을 익히고, 교회 슬라브어로 시편을 읽으며 자랐습니다. 종종 밤새 죽은 이를 위해 시편을 봉독하곤 했습니다."
셰우추크는 스트리 제10중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고, 이후 보리슬라우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의학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당시 지하교회에서는 사람 가까이에서 봉사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권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숙사가 없던 학교 특성상 셰우추크는 폴란드계 가정에 하숙하며 생활했고, 그 영향으로 폴란드어를 습득했다. 그와 더불어 셰우추크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지하 신학교 교육과정을 병행하며 프란키우시나와 스트리 사이에서 수도회 물품을 운반하는 역할도 맡았다.
의학전문학교 졸업 후에 셰우추크는 소련군에 징집되어 의무병으로 복무하였다. 훈련은 빈니차 주 바프냐르카에서 받았으며, 이후 루한스크의 항공학교 소속 비행장 지원 대대에 배치되었다. 복무는 키이우 군관구 소속 부대에서 2년간 이루어졌다.
2.1. 사제 수품과 초기 활동
소련이 붕괴되어 교회가 합법화된 후, 그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91년부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돈 보스코 철학·신학 센터'에서 철학 과정을 이수하였는데, 이 과정은 안드리 사펠랴크 주교의 주도로 구성된 유학생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우크라이나로 귀국하여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리비우 성령신학교'(Львівській духовній семінарії Святого Духа)에서 신학부 과정을 마쳤다.신학부 졸업 이후 셰우추크는 율리안 보로노우스키(Юліан Вороновський) 주교로부터 차부제로 수품을 받았으며, 1994년 5월 21일에는 필리몬 쿠르차바(Филимон Курчаба) 주교의 집전으로 부제로, 1994년 6월 26일에는 미로슬라우 이반 류바치우스키(Мирослав Іва́н Любачівський) 상급대주교의 집전으로 사제로 수품 받았다.
셰우추크 신부는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로마의 교황청립 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비잔틴 전통에 기반한 인간론과 윤리신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유학은 당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수장이었던 류바치우스키 상급대주교의 추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당시 교회 내에 교수 인력이 부족했던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셰우추크 신부는 학업과 병행하여 아테네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우들을 위한 사목 활동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목에 대한 축복을 받았다.
셰우추크 신부는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리비우 성령신학교의 프리펙트(학생담당 지도신부)로 봉직하였고, 2000년부터 2007년까지는 같은 신학교의 부학장으로, 2001년부터는 리비우 신학 아카데미(훗날 우크라이나 가톨릭대학교로 개편)의 신학부 부학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27대 수장인 류보미르 후자르 추기경의 비서 및 상급대주교좌 행정청의 사무처장으로 일하였다. 그는 훗날, 2011년 3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수장으로서의 첫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저는 류보미르 추기경님의 영적 아들이자 후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좋은 아버지처럼 저를 잘 이끌어주셨습니다."
2007년 6월부터 주교 임명 때까지는 리비우 성령신학교의 총장이자 교회 행정과 신학교육을 겸한 전임 책임자로 임명되어 재직하였다.
2.2. 주교 임명
2009년 1월 14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주교 시노드는 셰우추크 신부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호자 성모 교구'(Eparchy of Santa María del Patrocinio en Buenos Aires)의 보좌주교로 선출하였다. 이 결정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그는 동시에 카스트라 갈바에의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주교 수품은 2009년 4월 7일, 리비우의 성 제오르지오 주교좌성당(Собор святого Юра)에서 거행되었다. 주례는 리비우 대교구장 이호르 보즈냐크(Ігор Возьняк) 대주교였으며, 공동 집전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 미하일 미키체이(Михаїл Микице) 주교와 삼비르-드로호비치 교구장 율리안 보로노우스키 주교였다. 수품식에는 당시 교회 수장이었던 류바치우스키 상급대주교도 참석하였다.
2010년 4월 10일, 미키체이 주교의 사임에 따라, 셰우추크 주교는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그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 사목에 전념하였으며, 당시 라틴 가톨릭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이었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훗날 교황 프란치스코)과도 교류하였다. 그는 문화적 통합을 강조하며 현지 공동체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사목적 유연성과 다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하였다.
2010년 9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시노드는 차세대 계획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셰우추크 주교 또한 이 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해당 위원회는 향후 10년간의 교회 활동 지침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후 그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후속 위원회에도 참여하였다.
셰우추크 주교는 주교직 재임 중에도 교육활동을 이어갔다. 우크라이나 방문 시에는 우크라이나 가톨릭 대학교 및 리비우 성령신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아르헨티나 지역에서는 인간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2.3. 상급대주교 선출과 착좌
2011년 3월 23일, 셰우추크 주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 상급대주교 선출 시노드에서 교회 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노드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주교 40명이 참석하였다. 3월 25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시노드의 선출을 승인하였고, 3월 27일 키이우의 부활 대성당에서 착좌식이 거행되었다.착좌식에는 세계 각국에서 2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모였으며, 그 가운데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온 순례단이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셰우추크 주교가 아르헨티나 교구에서 사목하던 시절의 교우들이었으며, 서우크라이나 이민 1세대의 후손으로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보존해온 우크라이나어를 현지 발음 그대로 구사하였다.
셰우추크 상급대주교의 착좌식에는 당시 우크라이나 동방 정교회의 세 주요 분파 대표들도 참석하였다. 우크라이나 자치 정교회(UOAC)의 메포디 쿠드랴코우(Мефодій Кудряков) 대주교,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소속 우크라이나 정교회(UOC-MP)의 블라디미르 사보단(Владимир Сабодан) 대주교, 키이우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UOC-KP)의 예우스트라티 조랴(Євстратій Зоря) 주교가 각각 공식 대표로 자리하였다.
2.4. 상급대주교 활동
2011년 6월 2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는 공식 교리서인 『그리스도: 우리의 파스카(Христос — наша Пасха)』를 채택하였다. 이 교리서는 교회의 신조와 교의 전통을 집대성한 문서로, 공동체를 위한 최초의 통합 교리문답으로 간주된다. 셰우추크 상급대주교의 첫 행보는 같은 해 6월 24일 리비우 성령신학교에서 이루어진 이 교리서의 공식 발표 참석이었다.2012년 5월 31일, 셰우추크 상급대주교는 첫 사목 방문으로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상급대주교는 캘거리에 도착하여 에드먼턴 교구장 데이비드 모티우크(David Motiuk) 주교 및 지역 성직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에드먼턴과 캘거리의 성 요사팟 대성당과 성 제오르지오 성당을 방문하였다. 6월 2일에는 캘거리 성모 승천 성당 설립 100주년 기념 전례를 주례하였다.
2012년 9월 9일, 셰우추크 상급대주교는 다시 캐나다를 방문하여 매니토바주 위니펙의 성 볼로디미르와 성 올하 대성당에서 우크라이나 가톨릭 세계 시노드 개막 미사를 집전하였다. 시노드 참가자들은 전날 공식 서약을 하였다. 같은 해, 셰우추크 상급대주교는 가톨릭 평신도 기사단체인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의 회원이 되었다.
2013년 8월 18일, 키이우-루스 세례 1025주년을 기념하여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새 총대주교좌 성당인 그리스도 부활 대성당(Патріарший собор Воскресіння Христового)이 봉헌되었다. 봉헌식에는 700명 이상의 사제와 함께 2만 명 이상의 순례자가 참가하였다.
2014년 5월, 셰우추크 상급대주교는 캐나다를 다시 방문하여 토론토대학교 세인트마이클스 칼리지 내 셉티츠키 연구소(Andrey Sheptytsky Institute)의 개소를 기념하였다.
2017년 10월 28일, 영국 런던을 방문하여 웨스트민스터 주교좌성당에서 전례를 집전하였다.
3.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2022년 2월 초, 스뱌토슬라우 셰우추크는 ‘고통받는 교회 돕기(Aid to the Church in Need)’ 주최 회의에서 현재의 긴장이 단지 우크라이나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와 서방 세계, 특히 미국 사이의 갈등이 낳은 결과”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이번 위기를 “우크라이나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문제”로 규정하였으며, 점증하는 폭력에 대한 맹목적 숭배를 “진정한 우상숭배”라고 지적하며, 군사 행동보다는 평화적 대화를 촉구하였다.러시아가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이후, 그는 즉시 공개적으로 침공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죽음의 수용소(death camp)”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으며, 키이우 부활 대성당의 지하 공간을 민간인을 위한 방공 대피소로 개방하기로 한 결정을 교황 프란치스코로부터 지지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셰우추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러시아군의 성당 공격 가능성에 대한 정보가 제기되자, 셰우추크는 러시아 측에 성소에 대한 폭격 중단을 호소하였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키이우의 성 소피아 대성당이 타격 목표에 포함되었다는 첩보가 있었다.
같은 해 3월, 그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접촉하여,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에게 전쟁 반대를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이 자리에서 셰우추크는 “전쟁은 언제나 인류의 실패이며, 인간 존엄이 짓밟히는 순간”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가 평화를 향해 나아갈 때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말하며, “전쟁을 시작하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이며, 이웃을 죽이는 자는 먼저 자기 내면의 인간성과 존엄을 해친다”고 발언하였다.
셰우추크는 침공 이후 전쟁에 대한 메시지를 정기적으로 영상 연설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발표하고 있다. 2023년 12월, 그는 Aid to the Church in Need와의 대담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매우 지쳐 있으며,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절망감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외상 치료에 집중하고 있음을 설명하며, “전체 인구의 약 80%가 전쟁의 영향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신체적 상해뿐 아니라 깊은 영혼의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전쟁의 상처는 단지 물리적 피해를 넘어 심리적·정신적 외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열쇠”라고 덧붙였다.
4. 가족 관계
아버지 유리 이바노비치 셰우추크(Юрій Іванович Шевчук, 1945–2022)는 이바노프란키우시나 주 브로슈니우-오사다 출신으로, 철도청 소속의 공무원이었다.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탄압받던 시기, 그의 가문은 지하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022년 12월 5일, 미국 오하이오주 애크런에 위치한 수마 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2023년 5월 20일 우크라이나로 유해가 이장되었다.어머니 비라 바실리우나 셰우추크(Віра Василівна Шевчук, 1948–2021)는 1966년부터 리비우 주 스트리우 시립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2021년 4월 12일에 사망하였다.
동생 브셰볼로드 유리요비치 셰우추크(Всеволод Юрійович Шевчук, 1981년생)는 스탠퍼드 신학교와 워싱턴 소재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2011년 3월 1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의 '파르마의 성 요사팟 교구'(Eparchy of Saint Josaphat in Parma)에서 봉직중이다.
5. 여담
셰우추크 상급대주교는 우크라이나어 외에도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라틴어, 그리스어, 고대 교회 슬라브어에 능통하다.[1] 카스트라 갈바에 명의주교[2]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비롯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수장들은 교황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자체적인 시노드를 통해 선출된다.[3]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승인됨[4] Grand Chancell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