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12 14:19:05

안드레이 솁티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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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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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로 라고자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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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1599)
이파티 포티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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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1613)
하느님의 종 요시프 볠랴민루츠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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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1637)
라파일 코르사크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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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1642)
안틴 셸랴바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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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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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일 콜롄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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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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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1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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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1708)
유리 빈니츠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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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1713)
레우 2세 키슈카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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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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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 솁티츠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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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1746)
플로리얀 흐레브니츠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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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1762)
필립 볼로드코비츠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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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1778)
레우 3세 솁티츠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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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1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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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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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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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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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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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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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셈브라토비츠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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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882)
실베스트르 셈브라토비츠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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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1898)
율리안 사스쿠일로브스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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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00)
가경자 안드레이 솁티츠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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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44)
요시프 슬리피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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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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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슬라우 이반 류바치우스키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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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2000)
류보미르 후자르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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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11)
스뱌토슬라우 셰우추크 상급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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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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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리비우 대주교 및 할리치 관구장주교
<colbgcolor=#005bbb><colcolor=#fff> 제24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수장
가경자 안드레이 솁티츠키
Превелебний Андрей Шептицький
Venerabilis Andreas Szeptycki
OSBM
파일:Митрополит Андрей Шептицький.jpg
출생 1865년 7월 29일
오스트리아 제국 프릴비치
사망 1944년 11월 1일 (향년 79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비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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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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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1918)
(1918~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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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1)
(1941~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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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사제 수품 1892년 8월 28일
주교 임명 1899년 2월 2일 스타니슬라비우교구장 임명 및 승인[1][2]
1900년 12월 17일 캄야네츠교구장 및 리비우대교구장 및 할리치관구장 임명
재임기간 바실리오스회 성 오누프리 수도원 대수도원장
1896년 7월 20일 ~ 1898년 8월 26일
스타니슬라비우교구장
1899년 2월 2일 ~ 1900년 12월 17일
캄야네츠교구장 및 리비우대교구장 및 할리치관구장
1901년 1월 12일 ~ 1944년 11월 1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수장
1901년 1월 12일 ~ 1944년 11월 1일
파일:coat-of-arms-of-metropolitan-archbishop-andrey-sheptytsky-of-lviv-1900-1944_orig.png
За єдність Церкви і народу
교회와 민족의 일치를 위하여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소년기와 청년기2.3. 수도회 입회와 사제 서품2.4. 스타니슬라비우교구장 시기2.5. 할리치관구장이자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수장으로
2.5.1. 초기 활동과 업적2.5.2. 자선 및 후원 활동2.5.3. 소련과 나치 독일 점령 시기의 활동2.5.4. 사망
3. 시복 추진4. 여담

1. 개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24대 수장. 제8대 리비우 대주교 및 할리치 관구장주교. 본명은 로만 마리야 알렉산데르 솁티츠키(Рома́н Марі́я Алекса́ндер Шепти́цький)

2. 생애

2.1. 유년기

로만 솁티츠키는 1865년 7월 29일, 오스트리아 제국 갈리치아·볼로디미리야 왕국(현 우크라이나 르비우 주 야보리우 구역)의 프릴비치(Прилбичі)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대 루스계(우크라이나계) 귀족 가문인 솁티츠키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9세기에 이르러 폴란드화 과정을 겪으면서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라틴 예법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로만의 아버지는 이반 칸티 유제프 레미기안 솁티츠키 백작이고, 어머니는 조피아 프레드로 솁티츠카 백작 부인이었다. 조모는 흐리말라(Hrymala) 문장을 사용하는 얌브워노브스키 가문의 조피아로, 그녀는 오늘날 마리야 잔코베츠카 국립 우크라이나 드라마 극장 건립의 후원자였던 스타니스와프 스카르베크의 아내이기도 하다.

로만은 가문 소유의 도시 브루흐날(Bruchnal)에 있는 삼위일체 성당에서 라틴 예법 세례를 받았으며(1865년 8월 9일), 세례명으로 로만(Roman), 마리아(Maria), 알렉산데르(Alexander)를 받았다.

안드레이 솁티츠키는 일곱 형제였다. 장남 스테판은 두 살에 사망하였고(1862–1864), 차남 예지(유리)는 17세에 세상을 떠났다(1863–1880). 세 번째 아들이 훗날 안드레이라는 수도명으로 불리게 된 로만이다. 넷째는 올렉산데르이며, 다섯째 스타니스와프는 폴란드 진영에 남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로마 주재 무관으로 일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폴란드 군단 제3여단 지휘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총참모장 및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다. 여섯째 카지미르는 성공적인 변호사였으나 형 로만의 뒤를 따라 세속 경력을 버리고 43세에 스투디우스회에 입회하여 '클리멘티'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일곱째 레온은 1939년 첫 번째 소련-볼셰비키 점령 당시 프릴비치에서 아내와 함께 볼셰비키에게 학살되었다.

2.2. 소년기와 청년기

로만은 첫 교육을 가정에서 받았다. 홈스쿨링이 끝난 1879년 가을, 로만은 형 유리와 동생 올렉산데르와 함께 오스트리아 제국 갈리치아-볼로디미리야 왕국의 크라쿠프에 위치한 성 안나 김나지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가 그곳에서 사망하였고, 로만은 이 상실에 깊은 슬픔을 겪었다. 1883년 10월 1일, 로만은 크라쿠프에서 군 복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1884년 1월 8일, 질병으로 인해 병영에서 집으로 이송되었고, 성홍열 진단을 받았다. 병세는 심각하여 한순간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2월 말경 간신히 회복되었다. 이후 로만은 의사의 권고로 군 복무에서 해제되었으며, 부친의 노력으로 제대한 뒤 가족과 함께 5월에 크라쿠프를 떠나 프릴비치로 귀향하였다.

1884년 가을, 로만은 올렉산데르와 함께 독일 제국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로 유학하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886년에는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였으며, 1887년 여름에는 대학 학업을 마쳤다. 같은 해 8월 11일, 부친의 권유로 예수회가 운영하는 히루프(Hyrów) 학원으로 향하였고, 그로부터 1주일 뒤에는 바실리오스회 수도원인 도브로밀을 찾아 수도생활을 직접 체험해보았다. 1887년 10월에는 부친의 지시로 러시아 제국을 여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와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와 교류하였다. 이 여행 중에 포딜리아 주, 키이우,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1888년 2월 8일, 로만은 로마에서 교황 레오 13세의 일반 알현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3월 24일, 어머니 조피아의 노력 덕분에 솁티츠키 가족은 교황과의 특별 개인 알현의 기회를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로만은 레오 13세에게 바실리오스 수도회 입회를 위한 축복을 청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이 만남을 기억하였고, 11년 뒤 다른 자리에서 이때의 일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로만은 1888년 4월 27일 크라쿠프로 돌아왔으며, 3주 뒤인 5월 19일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3. 수도회 입회와 사제 서품

1888년 6월 29일, 로만은 바실리오스회 도브로밀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같은 해 9월 13일, 로만은 첫 서원을 바치고 수도명 안드레이(Андрей) 를 받았다. 이 때부터 로만은 본명 대신 안드레이라는 수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888년 10월부터 1891년 6월까지 안드레이 수사는 크라쿠프의 성 바르바라 광장에 위치한 예수회 수도원에 거처하며 신학과 철학 과정을 수강하였다. 어머니 조피아 솁티츠카의 회고에 따르면, 안드레이 수사는 1891년 사순 시기 동안 하루 한 끼만을 섭취하며 엄격한 금식 생활을 실천했다. 사순 시기가 지나고 1891년 6월, 그는 프랑스 출신 고위 성직자의 동행으로 부코비나 공국을 방문하였으며, 이곳에서 정교회 고의식파(Старообрядчество) 공동체의 신앙생활을 관찰하였다.

안드레이 수사는 8월 3일부터 10월 4일까지 장티푸스에 걸려 중병에 시달렸다. 솁티츠키 백작부부는 아들을 고향 프릴비치로 데려와 크라쿠프와 르비우에서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했다. 안드레이 수사는 회복을 위해 10월 17일, 의사의 권고에 따라 재활 휴양지인 자코파네로 요양을 떠났으며, 이듬해 1892년 5월 17일에 도브로밀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

1892년 8월 14일, 안드레이 수사는 크리스티노필 수도원에서 종신 서원을 바쳤고, 같은 달 28일에는 프셰미시 교구의 율리안 펠레슈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9월 11일, 그는 고향 프릴비치에서 첫 번째 전례를 집전하였다. 이후 1892년부터 1894년까지 그는 병으로 중단되었던 신학 과정을 크라쿠프에서 마무리하였고, 동시에 1892년부터 1896년까지 도브로밀 수도원에서 수련장[3]으로 봉직하였다.

1896년 7월 20일, 안드레이 신부는 리비우의 성 오누프리 수도원 대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897년 5월 19일에는 플라토니드 필랴스 신부와 함께 기도 사도직 운동(Apostolstwo modlitwy)의 월간 소식지 『미시오나르(Місіонар)』를 창간하였다. 1898년부터 1899년 사이에는 크리스티노필 수도원에서 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2.4. 스타니슬라비우교구장 시기

1899년 2월 2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안드레이 신부를 스타니슬라비우(현 이바노프란키우스크) 교구의 주교로 지명하였다. 같은 해 9월 17일, 그의 주교 서품식이 거행되었고, 9월 20일에는 스타니슬라비우 대성당에서 착좌식이 이루어졌다.

스타니슬라비우교구장으로 재직한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솁티츠키 주교는 여러 본당들을 순방하며 교구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힘썼다. 그는 재임 중 교구민을 향해 「목자의 첫 말씀」(신자들에게), 「우리의 계획」(성직자들에게), 「진실한 신앙」(부코비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가정」(성직자와 신자들에게), 「내 사랑하는 훗출인들에게」(훗출어 방언으로), 「두 세기의 경계에서」(성직자와 신자들에게) 등 총 여섯 편의 목회 서한을 발표하였다.

솁티츠키 주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 가운데 최초로 일반 민중의 언어, 특히 지역 방언을 공식 서신에 활용한 인물이다. 구체적으로는 훗출 지역 주민들을 위한 편지 「내 사랑하는 훗출인들에게」를 현지 방언으로 작성하였다.

솁티츠키 주교는 서우크라이나 출신의 화가 율리안 마르케비치를 초청하여 스타니슬라비우 대성당의 비잔틴 양식 프레스코화를 제작하도록 의뢰했다. 그는 또한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신학교 건립용 부지와 30만 크라운의 예산을 확보하여 스타니슬라비우교구 신학교의 설립 기반을 마련하였다.

2.5. 할리치관구장이자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수장으로

2.5.1. 초기 활동과 업적

1900년 12월 17일, 율리안 사스쿠일로브스키 대주교의 사망 이후 솁티츠키 주교는 할리치관구장주교로 지명되었으며, 1901년 1월 12일 리비우의 성 유리 대성당에서 착좌하였다.

새롭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수장이 된 솁티츠키 대주교는 훌륭한 사제 양성이 복음 선포의 핵심이라 보며, 신학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01년 3월에서 4월 동안 리비우 신학교를 시찰한 후, 조직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후 스타니슬라비우(1906년), 프셰미시(1907년)에 교구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재능 있는 학생들을 로마, 인스브루크, 스위스의 프리부르 대학교, 빈의 아우구스티네움 등지로 유학시켰다. 10년에 걸친 그의 개혁 끝에 교회는 충분한 수의 유능하고 교육받은 성직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리비우 신학교 안에 우크라이나 신학 학회가 설립되었고, 1924년에는 신학 계간지 『보호슬로비야』가 창간되었으며, 1929년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고등교육의 중심인 리비우 신학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1939년 2월 2일에는 루츠키 대주교 명의의 우크라이나 교회일치 가톨릭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솁티츠키 대주교의 동생 클리멘티 솁티츠키 대수도사제가 이를 이끌었다.

솁티츠키 대주교는 또한 1901년, 스투디오스 규칙에 따른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1913년에는 구속주회를 갈리치아로 초청하여 동방 전례를 따르는 지역 지부를 창설케 하였다. 그는 살레시오회도 초청하고자 하였으며, 수녀회를 위한 보호 활동에도 헌신하였다. 그가 지원한 수녀회로는 성가정 수녀회, 스투디오스 수녀회, 자비의 수녀회, 성 빈첸시오 수녀회, 성 요셉 수녀회, 성 요사팟 순교자 수녀회 등이 있다.

솁티츠키 대주교는 러시아 제국을 두 차례(1907년, 1912년) 방문하여 러시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성장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7년 3월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시노드를 소집하고, 레오니드 페도로프 신부를 러시아 내 비잔틴 예식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대리구장(엑사르호스)로 임명하였다. 그는 또한 1907부터 1927년까지 벨레흐라트 대회를 주도하며 동방과 서방, 정교회와 가톨릭 간의 일치 대화에 기여하였다.

1914년 9월 21일 솁티츠키 대주교는 키이우에 체류하던 중, 리비우 신학교 총장이던 요시프 보찬 신부를 루츠크의 주교로 서품하였다. 1917년에는 키이우에 거주지를 둔 대우크라이나 지역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대리구장으로 미하일로 체헬스키 신부를 임명하였다. 또한 리비우대교구의 동부 지역(브로디, 즈보르, 즈바라슈, 테르노필, 소칼)에는 프란츠 크사베르 본나 신부를, 스타니슬라비우교구에는 N. 테오도로비치 신부를 총대리로 임명하였다.

1939년 12월 22일에는 소련의 탄압 확대를 예견하고, 리비우 신학교 총장이던 요시프 슬리피 신부를 은밀히 주교로 서품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소련 내 비잔틴 예식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대리구장단을 설치하고, 미콜라 차르네츠키 주교를 볼리니아와 폴리시아 지역 담당으로, 동생 클리멘티 솁티츠키 신부를 러시아 및 시베리아 담당으로 임명하였다.

솁티츠키 대주교는 우크라이나 및 슬라브계 동방 가톨릭 주교단의 협력을 위해 주교회의 정례화를 시도하였다. 첫 회의는 1927년 11월 29~30일 리비우에서 개최되었으며, 이후 1928년 리비우, 1929년 로마, 1932년 로마, 1934년 리비우에서 후속 회의가 열렸다. 각 회의에서는 새로운 전례서 발간에 특별한 주안점이 두어졌다.

2.5.2. 자선 및 후원 활동

솁티츠키 대주교 재임 기간 중 다양한 사회적·문화적·경제적 분야에서 우크라이나 공동체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오스트리아 정부에 요청하여 사망한 사제의 유가족을 위한 복지 지원을 실현시킨 일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그의 중요한 공로 중 하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카멘네츠 지역의 정교회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전례도구, 전례서, 복식 등 교회적 지원과 재정적 후원을 요청하며 자신을 해당 지역의 주교로 간주하였고, 이에 대해 셰프티츠키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민족 계몽·교육 단체들인 ‘프로스비타’(Просвіта), ‘리드나 슐라’(Рідна школа), ‘실스키 호스포다르’(Сільський господар) 등을 후원하였다. 1905년에는 우크라이나 국립박물관(Український Національний Музей)을 설립하였고, 해당 박물관을 위한 건물을 34,000달러에 구입하였다. 폴란드인이었던 건물주는 매각을 꺼렸으나, 솁티츠키 대주교는 유대인의 중개를 통해 이를 성사시켰다. 이 박물관은 유럽 최대 규모의 이콘화 수집품을 보유한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자선 및 교육 인프라를 주도하거나 창설하였다.
  • 스타니슬라비우교구 도서관 (개인 소장 도서 4,000권 기증)
  • 리비우의 아카데미아 돔
  • 국민 진료소(Народна лічниця) → 후에 현대식 병원으로 발전 (1930–1938)
  • 각지의 김나지움 설립 및 운영
  •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요청하여 포제브라디 우크라이나 농업 아카데미를 구제
  • 1910년, 리비우에 토지은행 설립 주도

예술 분야에서는 20세기 초 우크라이나 미술 발전을 위해 개인 자금을 투자하였다. 그는 올렉사 노바키우스키 미술학교와 모데스트 소센코, 오시프 쿠릴라스 등의 화실이 입주한 건물을 매입해 제공하였고, 유럽 유수 예술학교로의 유학을 위한 젊은 미술가 장학금도 마련하였다. 또한 고아원을 위한 기금으로 100만 달러를 기부하였으며, 유대인 어린이들을 위해 유월절 선물을 보내는 등의 행동을 통해 종교 간 자선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환경 보호에도 관심을 기울여, NTSh(셰우첸코 과학협회) 산하 자연보호위원회와 협력하여 르비우 대교구 소유지 내 자연 보호구역을 설립하였다. 대표적으로는 피들류테 인근 야이코산의 시베리아잣나무 숲 보호구역, 로하틴 인근 초르토바 호라의 초지식 식생 보호구역이 있다. 이는 서우크라이나 지역 최초의 보호구역 중 하나였다. 또한 체르초 지역 등의 온천 요양지 개발을 지원하였다. 그의 사목 지도 하에, 일정한 교회 자산은 유럽 증권시장에 상장된 수익형 기업에 투자되었으며, 그 수익은 성직자 지원 및 자선 사업에 사용되었다.

2.5.3. 소련과 나치 독일 점령 시기의 활동

1939년 9월, 소련이 서우크라이나를 병합한 직후, 솁티츠키 대주교의 막내동생 레온 셰프티츠키 백작과 그의 부인은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 솁티츠키 가문의 저택은 약탈당하고, 문서 및 유품이 파괴되었으며, 가족 납골당도 훼손되었다. 솁티츠키의 조카 안제이(Andrzej) 또한 훗날 카틴 학살로 희생되었다.

1940년, 솁티츠키 대주교는 이오시프 스탈린니키타 흐루쇼프에게 편지를 보내, 서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소련 당국의 종교 탄압과 인권 침해에 항의하였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이를 소련의 무신론적 압제에서 해방될 기회로 간주하며, 나치 독일의 우크라이나 국가의 재건 선언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나치 독일 점령군은 곧 그의 영향력을 친나치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보도용 '충성 서한'이 발표되었지만, 이는 우크라이나 국가 재건을 환영하는 그의 실제 입장을 희석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일부 기록에서는 솁티츠키 대주교가 1941년 7월 5일 "승리한 독일군을 축하했다"고 전하나, 이는 소련 초기의 참혹한 탄압에 대한 일이적이고 반사적인 대응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에 대한 대주교의 태도는 뚜렷이 바뀌었다.

솁티츠키 대주교는 유럽 내 가톨릭 주교 중 누구보다도 분명하고 단호하게 나치즘을 공개 비판하였다. 그는 1941년 12월과 1942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유대인 학살을 반대하는 서한을 보냈고, 우크라이나 경찰이 유대인 학살에 동원되는 것에도 항의하였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SS 고위 관계자들이 솁티츠키 대주교를 설득하려 방문했으나, 그는 이에 단호히 맞섰으며, 나치 당국으로부터 "불손하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또한 이 시기 소위 나치 독일의 '갈리치엔 사단'이라고 불리던 우크라이나인 외인부대 제14무장척탄병사단을 축복했다는 음해가 꾸준히 있어왔으나, 솁티츠키 대주교는 군인 신자들을 위한 영적 봉사를 위해, 주교의 의무로서 열 두 명의 사제를 파견했을 뿐이었다.

1942년 8월 29~31일, 솁티츠키 대주교는 교황 비오 12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치즘을 "거짓과 폭력, 문명과 정의의 왜곡, 집단 광기에 가까운 국수주의와 미움의 체제"로 설명하며 규탄하였다. 같은 해 11월 21일에는 「살인하지 말라」라는 목회서한을 통해 정치적 살인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법상 파문 대상으로 선포하였다.

셰프티츠키는 300명 이상의 유대인 아동과 랍비의 자녀, 그리고 유대교 중요 문서 등을 보호하기 위해 수도원과 대주교 관저에 은신처를 마련하였다. 그의 형제 클리멘티 솁티츠키, 요시파 비테르(Йосифа Вітер) 수녀원장, 신발 공장에 소속된 여러 수도자들도 이 구조 활동에 함께하였다. 많은 일들이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유대인 랍비 다비드 카하네는 대주교의 도움에 깊은 존경을 표했다.

2.5.4. 사망

1944년 10월 31일, 솁티츠키 대주교는 측근들에게 "우리 교회는 곧 소련에 의해 분쇄될 것이다. 그러나 물러서지 말고, 신앙과 가톨릭교회에 충실하라. 나는 우리 교회의 부활을 본다. 교회는 온 우리 민족을 감쌀 것이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고, 1944년 11월 1일 13시 30분경, 독감으로 인한 뇌부종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솁티츠키 대주교는 병환으로 인한 자신의 사망을 슬퍼했다. 아직 우크라이나와 교회에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솁티츠키 대주교의 뒤를 이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수장이 된 요시프 슬리피 추기경은 자신의 「회고록」에 솁티츠키 대주교의 마지막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침대 위에서 맞는 죽음이라니, 참 허무하구나. 나는 다른 죽음을 원했거늘. 그래도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실테니, 이보다 더한 위로는 없지."
대주교의 장례는 소련군 점령 하에 있던 리비우에서 이루어졌으며, 성 유리 대성당 지하묘소에 안장되었고, 수많은 신자들이 모인 그의 장례식은 일종의 조용한 민족적 시위가 되었다.

3. 시복 추진

안드레이 솁티츠키 대주교의 시복·시성 절차는 그의 탁월한 교구 지도력, 교회 일치 노력, 그리고 나치 및 소련 체제에 맞선 불굴의 신앙적 행위 등으로 인한 평판에 기초하여 20세기 중반부터 추진되어 왔다. 이러한 추진은 그가 “성인의 향기”(in odore sanctitatis)를 지녔다는 교회 내 평가와 함께, 교회와 민족의 통합 및 정의의 상징적 인물로서의 위상을 반영한다.

1955년 1월 28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주교 시노드에서 솁티츠키 대주교의 절차가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당시로마 주재 대주교 이반 부치코(Іван Бучко)가 이 과정을 주도하였으며, 미셸 흐린치신(Michel Hrynchyshyn)이 공식 시복 청원인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솁티츠키 대주교에게 “하느님의 종(Servus Dei/Слуга Божий)” 칭호가 부여되어, 시복 절차의 첫 단계가 완료되었다.

1990년대 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의 민주화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합법적 복원이 이루어진 후, 솁티츠키 대주교에 대한 평가와 관심은 우크라이나 국내외에서 급증하였다. 여러 전기, 학술 논문, 기사, 그리고 자료집 등이 유럽, 북미, 로마 등지에서 발간되었으며, 그의 인도주의적 행위와 교회 내 통합 노력은 그의 시복 추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와 더불어, 솁티츠키 대주교가 대주교로 재임하는 동안 교회의 일치와 민족 통합을 위한 활동, 그리고 나치와 소련 체제에 대한 단호한 저항은 그를 향한 시복 청원의 근거로 작용하였다. 일부 폴란드 가톨릭 지도자들의 반대와 소련 선전에 의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과 교회 내 영향력은 끊임없이 재조명되었다.

최종적으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한 2015년 7월 16일 “영웅적 덕행(heroic virtue)”의 공식 인정을 통해 솁티츠키 대주교는 ‘가경자(Venerabilis/Превелебний)’ 칭호를 받았으며, 이는 시복 절차의 제2단계가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현재 시복 절차의 최종 단계에는, 그의 생애 동안 나타난 치유 기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 요구되고 있다.

4. 여담

솁티츠키 대주교는 키이우 방문 당시, 알렉산드르 성당 인근에 위치한 옛 도미니코회 수도원 건물에서 체류하였는데, 해당 건물은 현재 주우크라이나 캐나다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키가 2미터 10센티미터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르비우주에 그의 이름을 딴 솁티츠키 시가 있다.
[1] 프란츠 요제프 1세로부터 지명됨[2]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승인됨[3] 수도자가 되고자 하는 단계 중 수련기에 있는 형제들을 지도하는 직책